특별집회/매년 5월 성도집회

성경읽기 : 창세기 18장

박이레 2025. 5. 23. 17:19

< 성경읽기 : 창세기 18장 >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창세기 18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1-33).

저기, 박성호 형제님 진수가 병원에 갑자기 가게 돼서 자리를 비우시게 됐네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창세기 18장을 이제 성경 읽기를 할 텐데요. 지난 이제 12장에서는 이제 아브라함이 75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99세가 이제 된 거고요. 참 이제 오랜 시간이 이제 흐른 시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제 여기에 한 자손 하나가 있지가 않고, 또 아직도 그 약속의 땅에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참 저희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부르심은 앞에 교제하신 대로 참 은혜로운 그런 이제 부르심이고, 또한 그뿐만 아니라 참 영광 가운데로 부르시는, 참 그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또한 우리는 그 앞에서 많은 복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그 복된 그런 부르심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의 특징 중에 하나를 또 생각하게 될 때에 이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그 부르심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많은 시험을 거쳐야 되는 것이고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려야 되는 그런 부르심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다음에 25년이 됐을 때에 이제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 이 약속의 자손 이제 이삭이 태어나게 됩니다. 25년을 기다려야 되는 이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단지 25년뿐만 아니라, 참 자손, 그 씨에 대해서 정말 온전히 그 약속을 이루시는 그 자손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2천 년이나 되는 또한 시간이 필요한 이제 그러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정말 그 이스라엘 땅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킬 때까지, 또다시 한 번 2천 년이 지나가야 되는 이제 그런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는 부르심입니다. 참 우리가 이제 그런 부르심을 보게 될 때에 참으로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고 또한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또한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믿고 기다려야 되는지를 이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그러한 오랜 기간 동안에 이제 시간만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이 이제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그의 믿음을 이제 격려하시고 그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자라면서 그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각 장마다 하나님의 이제 이름이 나타나거나 이제 하나님의 어떠한 면이 특별히 이제 드러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우리가 12장에서는 이 영광의 하나님을 이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14장에서는 이제 멜기새댁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언급이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실 때는 이제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런 가운데 이제 이 18장 오늘 이 장에서는 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 또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 이제 이런 하나님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후에는 21장에 또한 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원토록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22장에 그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 그러한 22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로 계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게 되면서 아브라함은 이제 그의 믿음이 자라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런 과정 중에서 우리는 창세기 18장을 보게 되는데요. 이제 성도님들께서 이 장을 읽어보셨을 때에 이 내용을 아시겠지만 이제 크게 두 가지 내용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한 가지는 이제 접대하는 내용이고요. 또 한 가지는 이제 중보 기도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믿은 자들이 이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믿은 자들에게 어떠한 것들이 그의 믿음을 더욱 더해주는가, 이제 이런 것들을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런 접대와 이제 이런 기도, 이것은 믿은 자들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것임을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접대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구체적으로 우리가 방문객들을 이제 잘 대해주고, 이제 이런 것을 이제 물론 이제 생각해 볼 수가 있고요. 또 이제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이 신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 신자들도 그러한 부분을 닮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접대라는 것이 이제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접대는 이제 구체적으로 그 접대를 받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이제 살펴보겠지만 이제 이 접대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또 계시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렇게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1절부터 이제 8절까지, 이제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대하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9절부터 15절까지는, 이 접대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특별히 이제 사라와 관련돼서 어떠한 약속의 확신이 생기는지,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어떻게 더욱 믿음의 확신을 더해 주시는지를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절부터 22절까지는, 이제 그 방문객들 중에서 이제 두 사람은 떠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계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부분이 16절부터 22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마지막까지는 이제 아브라함이 그 계시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어떻게 중보 기도를 하는지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부분들을 함께 여러 형제님들과 나누어서 교제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볼 텐데요. 이제 여기서는 이제 아브라함이 세 방문자를 만나서 그가 어떻게 그를 접대를 하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이 방문객들이 누군지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이 방문자들이 이제 누군지, 그리고 이제 이러한 가운데서 이 방문자들에게 이제 어떻게 접대를 하는지,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그 접대의 교훈이 무엇인지, 특별히 이 방문자들은 이후에 19장에 보면 이제 롯에게도 방문을 하게 됩니다. 롯이 방문자들을 대하는 모습, 그리고 롯에게 방문자들이 하는 모습들을 좀 비교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제 이러한 부분들, 또 1절부터 8절까지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네, 1절에 "여호와께서"라고 되어 있고요. 그다음에 2절에서는 "눈을 들어 본 즉 사람 셋"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나와 있는 사람 셋을 그냥 동일한 셋으로 볼 수는 없고요. 1절을 근거로 해서 이제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육체를 입고 오시기 전에 구약 때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주님으로, 이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봐야 될 것 같고 그리고 이제 아까 언급해 주셨던 것처럼 19장 1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제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여러 귀한 것들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한 분이 계시고, 그다음에 이제 심판을 위해서 또 롯을 구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이제 두 천사가 와서 그것이 이제 세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 한신영 형제님 : 그리고나서 이제 보면 이제 아브라함이 이제 한 행동들을 1절, 2절에서 저희가 이제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먼저 저는 여기서 2절에서 보면 "몸을 땅에 굽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가 이제 예배라는 단어로 성경에서 가장 먼저 처음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걸 예배로 이제 보고 조금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제 12장에서는 이제 연약이 있었지만 이제 많이 성장하여서 이제 아브라함이 18장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된 것을 한번 생각해 보며 살펴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어디에 있었는지를 한번 살펴 보게 됩니다. 그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있었습니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이라는 것은 이제 창세기 13장에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보이고 이 땅을 주시겠다 약속을 하셨던 그 장소입니다. 아마 그 높은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것을 보여줬을 것이고요.
'마므레'라는 뜻은 또 이제 '힘'과 이제 '살찐 것', '강함' 이런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롯이 떠났을 때 롯은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가서 소돔에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에서 그 약속을 바라보며 당장의 즐거움이 아닌 후에 있을 그 축복을 바라보면서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이제 영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이 2절에서 보면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 1절에서 보면 "오정 즈음에 그가 앉아" 있었습니다.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정쯤은 그 사막 그때 거기는 더울 때입니다. 그때는 양들도 쉬고 사람들도 다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뜨거운 태양의 시간에 양떼들을 쉬게 하고 있는 그 휴식 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그는 2절에 보면 "눈을 들어 본즉"입니다. 눈을 들어봤다는 것은 그는 쉬는 시간에 묵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는 그 쉬는 시간 동안 다른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나님의 생각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있으면 비는 시간에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렇게 하고 있었을 때, 이제 주님이 나타났을 때, 바로 주님을 접대할 수 있는, 예배드릴 수 있는 자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런 것들을 표현을 통해서 그가 참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믿고 그 가운데서 묵상하며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때 무엇을 묵상하고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데, 17장 마지막에 보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17장에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오는데 처음에 아들을, 이삭을 주신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때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17장 마지막에 순종으로 끝나고 이제 18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아브라함은 할례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몸이 죽어, 사라도 몸이 죽어 아들을 낳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 약속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인가,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것을 묵상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했을 때 반드시 이루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주님께서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그때 바로 당장 주님께 달려나가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천지의 주제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의 임재 앞에서 합당한 예배를 이렇게 됐을 때,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고 있을 때,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그래서 참 이 접대라는 것은 항상 이제 갑자기 이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평소의 우리의 이제 영적인 상태가 이제 드러나는 이제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아까 이제 '마므레'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제 마므레 수풀 근처 여기는, 13장에 보면 거기서 이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이렇게 돼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배드리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 이제 이 사람이 그리고 접대를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고, 또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또 축복을 전해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정 즈음에"라고 돼 있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이제 더운 때고 이제 쉬어야 되는 때죠. 누구나 다 쉬고 싶은 그런 때, 그런데 항상 접대는 꼭 그럴 때 필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급히 달려나가서 접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부분들이 이제 그의 이제 영적인 그런 깨어 있음, 그런 부분들이 이제 드러나는 장면이 아닌가 이제 생각이 드는데요.
특별히 앞에 이제 "영접하고 땅을 굽혔다" 이것을 이제 예배라고 말씀을 해 주셨잖아요. 그러면 이 형제님은 이때 아브라함이 그 방문객 중에 한 분이 주님이시다. 이거를 이제 그때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네요?

- 한신영 형제님 : 네, 네 맞습니다. 앞에 이제 형제님도 얘기해 주셨지만 1절에서 이제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이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볼 때는 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주님을 묵상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있었을 때 참 주님을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접대한 사람이 이제 누군지 모르고 접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인 걸 알고 그 앞에서 엎드려 예배를 드린 것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저도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분은 주님이시구나, 이렇게 깨달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그 이제 롯의 반응하고 조금 비교해서 보자면요. 이제 19장 1절에 보면 소돔으로 간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이제 "두 천사가" 이렇게 분명하게 천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그 세 방문자를 만났을 때에 3절에 "내 주여" 이렇게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 "내 주여"에서 이 '주'라는 단어가 특별히 이제 하나님을 가르킬 때 사용되는 그런 단어입니다. 19장에 보면 19장 2절에서도 롯이 "내 주여"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는 다른 단어입니다. 사실 비슷한 단어, '아도나이'라는 그런 비슷한 발음이 되는 두 단어인데, 이제 18장에 나와 있는 주는 이것이 이제 복수형이지만,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고 그 나 뒤에서 보면 남아 있는 한 방문객에 대해서 이 복수형 "내 주여"라는 하나님께 사용되는 이 단어를 사용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 합당한 그런 분별력과 합당한 자세로 접대를 이제 하고자 하였고,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기쁘게 받으신 것으로 우리는 뒷부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롯과 같은 경우에는 롯리 그 방문객들을 초청하자 우리가 그냥 밖에서 경야하리라, 우리가 밖에서 보내겠다 2절에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 이것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는 모습과 또 롯이 성문에 앉아 있는 모습과 대조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형제님 말씀해 주신 대로 아브라함은 묵상과 또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분별력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롯은 이제 성문 앞에 그 죄악된 도시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이제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김대현 형제님 : 저는 아까 1절부터 8절이 세 사람이 나타난 것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접대에 대해서 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렇습니다. 여기 보면 9절에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을 볼 때 이 세 분들은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는 그런 상태로서 아브라함이 접대를 하지 않았나, 그래서 아까 교제하셨지만 3절에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하고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한 최종적으로 접대를 풍성히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말씀에 "내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린 것을 공궤하고 접대하였느냐"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내게 말고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는 그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접대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알고 했지만 모르더라도, 특히 우리 성도 간의 접대에 대해서는 한시라도, 참 여기 아브라함이 접대 한 것처럼 풍성히 접대를 해야 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 여기 보면 아까 형제님도 교제 하셨지만 정오쯤이기 때문에 때가 됐습니다. 때가 됐고 좀 쉬어야 되는데 그때 오신 손님에 대해서 그냥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될 그런 사안이 아닌가, 그래서 어느 때든지, 또 성도가 아니더라도 접대에 대해서는 항상 후회 없이 하는 것이 앞서서 말씀해 주셨지만 물질적인 욕심을 따지면 저희가 못합니다. 허나 물질을 떠나서 한 영혼을 구원, 즉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구원해 주신 그 은혜에 따라서 저희가 보답을 한다면 어느 때라도 접대는 후회 없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는가, 생각을 해보게 되고요.
특히 6절에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사라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아브라함의 지시를 받고, 이렇게 떡을 만들고 그다음에 송아지를 잡고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특히 사라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를 돕는 배필로서 물론 형제님도 계시지만 형제님을 돕는 자매들의 역할도 우리가 생각을 하면서 중요한 거다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예,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접대의 본을 몇 가지 한번 생각을 해볼 수가 있겠는데요. 우선 첫 번째로 풍성하다, 풍성한 면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면 이제 "고은 가루 세스아"라고 돼 있는데 이 '스아라는 단위를 살펴보니까는 이제 7L 정도 되더라고요. 이거는 이제 7L 그러니까 3개가 있는 것이죠. 굉장히 많은 양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전부 이 좋은 그런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아까 또 말씀해 주신 것처럼 사라가 함께 동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접대라는 것은 이제 함께하면서, 또 그 가정이, 사실 접대라는 것은 형제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그 가정이 함께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이제 그런 접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다른 형제님들께서 이 접대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본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한신영 형제님 : 여기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제 접대할 때 이제 이렇게 얘기합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하고 5절에서는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형제 얘기했지만 세 스아니까 22L쯤을 갖고 옵니다. 22L면은 한 150명 200명쯤 먹을 수 있는 떡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예배로서 이제 생각해 봤을 때, 주님 앞에 아브라함은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좋은 송아지도 있었고요. 고운 가루도 많이 있었습니다. 드리는데 많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나와서 드릴 때 자기가 드리는 것이 '조금'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많고 풍성하고 이럴지라도 주님 앞에 내가 드리는 것은 부족하고 조금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드릴 때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앞에 나가서 자기가 어떠한 자인지 알고 주님을 높이며 주님께 드려지는 이 좋은 송아지가 많은 것이었지만, 주님께 드려지는 이것은 아직 연약하고 작은 것이며 이런 것을 드린다라는 생각으로 겸손하게 먼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접대를 할 때,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롯과도 한번 비교하게 됩니다. 롯은 드렸을 때 롯은 19장에서 롯은 무교병 하나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것과 차이가 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 롯은 무교병을 드렸을까? 무교병은 출애굽 했을 때, 출애굽 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념했었던 그런 떡입니다. 그게 왜 무교병이었냐면 급하게 출애굽 나오느라고 숙성된 떡을 만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급하게 만든 떡입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해방시켜 출애굽 해 주셨다를 나타내는 떡이지만, 이제 떡으로서만 본다 그러면 부족한 떡입니다. 이 떡은 숙성되지 않은, 급하게 만든, 그런 떡입니다. 롯은 급하다 생각해서 그냥 훅 드렸을 겁니다. 갑자기 나타나셨으니까 준비가 안 돼 있기에 그런 걸 그냥 막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급했던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보면 6절에서 보면 급히 장막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종에게 달려가고, 그리고 급히 요리하고, 아브라함도 급하게 준비했습니다. 롯은 시간이 없어서 무교병만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준비하고 접대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 없어서 못 드렸다는 우리가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이 무교병만 드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롯은 구원만 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드리는 바로, 이제 막 출애굽 했을 때 나왔던 어떤 드렸던 이 떡을, 지금 롯은 구원받고 나서 시간이 지났지만 주님 앞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장해서 주님께 드리는 것들을, 좋은 것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고 롯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주님 앞에 드릴 때 어떤 것을 드려야 될까, 나는 무교병만 드릴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려고 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한번 비교하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이제 99점 몇 세 이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서 이제 100세가 됐을 때 이삭을,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받게 되기 때문에 99세가 넘은 나이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그 18장 12절에서 보듯이 지금 사실 생식 기능이 이제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노쇠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상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이제 접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리고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오셨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본인이 구하던 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때 그가 달려나가서 영접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달려나갔다.
그다음에 7절 이하에 보면은 아브라함이 사실 이 접대를 주도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리고 8절에서는 이것을 직접 서빙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다음에 8절 마지막 부분에 서서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서매, 서빙 한 다음에 이제 그들이 드실 때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나이가 많은, 또 육체적으로도 늙은, 그와 같은 아브라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접대에 있어서 접대를 주도하였고 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라고 했던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나이가 점점 들겠죠.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것들을 참고해서 나이와 무관하게 접대에 열심을 가져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박용수 형제님 : 7절, 8절에 하인이 나오는데요. 이게 신스틸러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인이, 지금 아브라함이 되게 급하잖아요. 6절에 급히 나오고, 그리고 막 달려가고 막 그러잖아요. 지금 7절에 "달려가고" 있는데, 여기 하인도 지금 "급히"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하인은 아브라함과 동기화가 돼 있다. 지금 아브라함이 섬길 때 하인도 같은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좋게 보시는 것 같아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드시는 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를 가져왔는데 송아지에 대해서는 하인이 요리했다라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인의 섬김이라든지, 주인과 동기화된 그 마음을 귀히 보시고 내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먹었다, 이렇게 나오는데 참고로 8절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잡수신 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교회에서 섬김이 있을 때 아브라함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으로 돕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격려하고 계신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만약에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이 왔을 때부터 그중에 한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식했다고 가정한다고 하면, 본인이 접대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접대한 거잖아요. 그러면 이제 히브리서 13장 2절에 나와 있는 "부지 중에 천사들을 접대한 이들"이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적용되는 사례는 아닌 것이라고 봐야 될 것 같네요.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예, 저도 이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또 '천사'라고 이제 언급이 돼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이제 롯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아닌가, 히브리서의 말씀은 이제 롯에 대해서, 그런데 사실 히브리서 13장 말씀은 그 접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여기 아브라함의 접대에서 배울 수 있는 그런 접대의 교훈들 함께 또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또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그 복의 근원이 되잖아요. 그것이 여기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아브라함만 지금 이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있는 이제 사라 함께 접대하고 있는 사라 하인들, 모두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함께 섬기고 있는 모습을 이제 보게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18장에 보면 특별히 이제 9절부터 이제 다음 부분을 볼 텐데요. 9절부터 15절 부분을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이제 다루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접대의 유익은 이제 그 가정이 더욱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여기 9절에서부터 볼 수가 있는데요. 9절부터 형제님들께서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왜 갑자기 9절에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왜 갑자기 사라를 찾으신 걸까요?

- 장승훈 형제님 : 저희가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6).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뒤에 보시면 이제 웃고 이런 장면이 나오지만, 지금 18장 초반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받아들이고 믿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이와 같은 믿음의 상태가 사라에게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이제 아마도 그런 것을 염두하시고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라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이제 사라가 언급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 한신영 형제님 : 네, 형제님처럼 이제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을 때 이제 지금 그것에 생각할 때 이제 사라가 제 위치가 어디인지보다도, 사라의 현재 믿음의 위치를 이제 물어보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직, 나중에 보면 이제 웃는 장면이 나오죠.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 그래서 주님께서 아시고, 사라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여기서 "사라가 어디 있느냐" 묻고, 그러고 나서 이제 10절에 다시 그의 믿음을 다시 강하게 하기 위해서 10절에 약속 가운데 믿을 수 있도록, 다시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내가 정녕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다시 한 번 믿음 없는 사라에게 약속의 말씀으로써 다시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이때 이렇게 사라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 김대현 형제님 : 저도 형제님의 교제해 주심과 동일한 생각인데요. 앞서서 약속한 후에도 10년이 지나도 아무런 임신의 징후가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 태어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해서 자기의 종을 아브라함에게 주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여기서 아까 형제님도 교제하셨지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한 것은 사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이 약속을 재확인 시켜주려고 하는 그런것이 있기 때문에 사라를 찾으신 것 같습니다.
여기 보면 10절과 14절에서 두 번이 언급이 됩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하고 두 번 동일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그때 사라는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가를 보게 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1-12).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5).

앞서서 아까 장승훈 형제님 교제해 주는데 17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7).

그때 사라는 웃지 않았고, 17절에서 처음으로 먼저 아브라함이 웃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8-19).

하고 이렇게 강조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이 자기 큰 민족인줄 알고,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자기의 생각을 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네 생각이고, 내 뜻은 이렇다 하고 확실하게 다시 한 번 강조를 해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서서 창세기 12장에서도 2-3절에서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라는 약속을 하신것을 보게 됩니다. 보면서 사라에게 직접 다시 한 번 약속에 대한 재확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해보면 여기서 우리가 여호와께서는 사라가 웃지 아니했다고 부정을 하게 되지만 속마음까지도 다 알고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강조하시면서 사라를 살짝 책망하시면서 말씀을 마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앞서서 보면 로마서 4장 16-19절 말씀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6-19).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누가복음에서도 언급이 되는데 엘리사벳이 임신을 한 것을 보게 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6-37).

하고 말씀을 하는 걸 보면서, 이 18장의 주요 주제가 저는 여기에 있지 않는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기 때문에 사라의 이런 아브라함의 웃는 것을 책망하시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특히 우리가 성경을 처음 대할 때 창세기를 보게 됩니다. 창세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7일 동안의 모든 만물을 창조합니다. 이것 자체를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성경 전체가 불신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마지막 날에 아담을 창조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거 보면서 또 신약에 와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임신을 하게 되는 것, 이것조차도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가지 않고 상식 밖의 일이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만이 가장 기본적인 우리가 믿음의 근본이 아닌가로 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예,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특별히 이제 사라를 이제 언급을 하십니다. 참 그 사라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시고 이제 그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시는 이제 하나님이시죠.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 대해서 그 상태를 아시고 그를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사라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갖도록 이제 인도를 이제 하고 계시는데요.
특별히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이 질문 자체만 보자면 이것은 또한 아브라함에게도 어떤 자신의 잘못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질문이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사라를 여러 번 자기 집이 아니라 딴 데다가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라가 지금 이 가정 안에서, 지금 하나님이 두신 곳에서, 지금 이제 보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책임을 느끼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특별히 이제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또 상기시켜주시고, 또 사라의 믿음의 부족함뿐만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에게도 다시 한 번 격려하시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앞에 장승훈 형제님께서 잠깐 말씀을 해 주셨는데 여기 이제 사라가 이 말을 들을 때 이제 속으로 웃잖아요. 그리고 이제 17장에서는 이제 아브라함도 이제 웃었단 말이죠. 어떤 차이가 있는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사라는 이제 불신 가운데서 이제 이제 웃은 것이고 이제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음 가운데서 웃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하면은 약간 조금 이제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긴 한데, 이제 17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7).

그런데 이제 이것을 불신의 말이 아니라,  그가 기뻐하면서 이제 100세 된 사람이 자식을 낳는다는 이런 이제 감탄과 놀라움에 그런 발언과 이제 웃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왜 박용수 형제님이 인상을 쓰시죠? 왜냐하면, 다시 한 번 왜 아닌지 한번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이제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라를 책망을 하시거든요. 그 교정을 하시고 이제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 20절에 보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제 이 부분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여기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이런 부분을 이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에서 이제 아브라함이 웃은 것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와 또 기쁨에, 또 의심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박용수 형제님 : 18절에 해당이 안 되잖아요.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그러니까 18절도 이렇게 이해를 해볼게요.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이건 우리 말이 조금 이게 조금 부정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제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란 것입니다.

- 박용수 형제님 : (안들립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그러니까 그 약속의 후손이 있다면 이스마엘에 대해서,

- 박용수 형제님 : 그럼 19절에 "아니라"는, 아브라함이 18절에서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한다고 했을때, 아니다. 하나님이 봤을 때 아니다, 하신 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왜 거기서는 책망을 안 하셨을까요?

- 박용수 형제님 :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확실히 이상한 거 같아요.

- 한신영 형제님 : 김회상 형제님 혹시 어제 제가 이거 질문했을 때, 다른 누구에 대해서 비유를 해 주셨었는데 제가 생각이 안 나네요. 그거 설명해 주신 거 제가 이해가 됐거든요.

- 김회상 형제님 :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에게 하신 거랑 똑같습니다. 마리아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사가랴는 반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를 얻었고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 이해가 되시죠?

- 한신영 형제님 : 네네, 그래서 마리아 있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가 이제 잉태했을 때 사가랴도 이제 이렇게 잉태를 하죠. 그런데 벌 받았고 안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여기다 적용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사라에겐 있었고 아브라함에게는 없었고, 이걸 통해서 아브라함의 그 웃음은 믿음의 웃음이고 여기서는 그렇지 않은 사라는 이제 불신의 웃음이었다.

- 박용수 형제님 : 저만 처음 들었는데 오늘 진짜 조금 당황스럽네요.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아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고요. 예, 제가 독특한 견해를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그 사라가 장막 뒤에서 이렇게 있었단 말이죠. 듣고 웃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요. 다 드러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굳이 교정하시려고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자극 연약한 부분, 그런 부분들을 더 교정하시려고 하시는 분이에요. 그런 부분이 있다면 굳이 언급을 하시고, "아니라 네가 웃었다." 이렇게 굳이 말씀하시면서, 정말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믿음을 계속적으로 이제 강화시키려고 하시지 만약에 아브라함이 못 미쳤다면 그냥 두시지 않죠.

시간상 다음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 이거는 교제에 안 나와서 하는 건데요.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창 18:12).

이 부분에서 전에 교제하실 때 베드로전서 3장 6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사라도 욕만 먹은 게 아니라 칭찬을 들었단 말이죠. 물론 맥락은 다른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라에 대해서, 사실 사라가 지금 약간 흑역사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라의 좋지 않음에서 또 칭찬할 것, 그래도 아브라함을 주인으로 이렇게 불렀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좀 후하다, 그거에 대해서는 사라를 너무 욕하지 말자. 우리도 사람처럼 막 밑바닥일 때도 뭐라도 하나 하나님께서 칭찬하려고 하신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계속 킵 고잉하자, 이게 제 교제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예, 아주 좋은 교재입니다. 정말 그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이렇게 부른 것, 남편의 머리 됨을 인정하고 따라가는 그런 부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굳이 이제 언급을 하시는 거죠. 성경에다가, 그리고 아까 그 히브리서 13장도 롯의 경우에서도 굳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이제 롯이 여러 실패가 있었지만 그래도 롯이 접대를 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또 칭찬하시면서 히브리서 13장에 언급을 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제 그다음 부분 이제 16절부터 21절을 볼 텐데요.
여기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17절에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이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이런 부분에서 이런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그 대상이 누구냐,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이런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 22절까지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 한신영 형제님 : 여기서부터 이제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숨기지 않고 얘기를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제 18절, 19절에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속 약속해 주셨던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다른 나라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이 소돔 땅이라도 심판하러 가실 것을 얘기하시고 그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서 중보 기도할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을 얘기해 주지 않으셨나 해서 그런 것을 말씀을 따라서 아브라함이 소돔을 향하여 중보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고, 그리고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할 때 단지 롯이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기도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하나님 성품에 대한 오해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런 중복 기도를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창 18: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길이 참으심이 이제 정해진 어떤 시한이 됐을 때는 지체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이제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시길 원하셨고,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이 이제 아브라함을 통해 나오게 될 수많은 자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셔서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은 내용을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이 들고요. 그것이 이제 17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이제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 앞에 부분에서는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니까는 아브라함이 주님을 접대한 것은, 주님을 접대한 것임과 동시에 주님과 교제한 것이죠. 그다음에 이제 주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이제 다 가르쳐주시길 원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 참된 하나님의 벗인 아브라함을 여기서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그것을 이제 야고보서는 말하였고요.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소돔 밖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롯도 이제 이곳에 곧 멸망이 올 것임을 이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록 같은 경우에는 도망치기 위해서, 그가 이제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알게 된 것이고, 이제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에는 롯과 그의 가족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이 특별히 소돔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것을 보게 될 때에, 정말 이제 성별되어 있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말씀에도 이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또한 친밀함을 이제 '비밀'로 이해를 해볼 수 있는데요. 이제 "여호와의 비밀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과 함께 교제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두 번째로 이 계시는 18절에 보면은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르쳐야 되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아브라함이 큰 나라가 되고 또 아브라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이제 아브라함이 뭘 알아야 되냐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이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본 것처럼 실패의 경험, 실패의 일, 이런 것들은 정말 많은 이제 큰 교육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제 분명하게 이제 깨닫게 하시고 이제 그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알려주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친구다' 이렇게 부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친구가 뭔가에 대해서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이제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제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주십니다. 종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그 마음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래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이제 친구임을 이제 보게 됩니다.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 된 부분이 이 중보 기도에서 나타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창 18:20-21).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가 그 많은 죄악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데, 왜 굳이 가서 이제 확인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게 여기서 뭘 느끼게 되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웬만하면 그 상황을 살피고 심판하지 않으시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친구로서 그 마음을 알고, 친구는 정말 그 마음을 아는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러한 가운데에 기도를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 이제 23절부터 이제 그 기도가 나와 있는데요. 23절부터 마지막 부분, 이 중보 기도에 대해서 이제 성도님들께서 또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이제 한 가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이제 이제 22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되어 있고요. 23절은 이제 "가까이 나아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제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 이런 자세가 자주 나옵니다. 아까 이제 접대할 때는 막 이렇게 뛰어다니는 모습, 또 이제 나무 아래에 이렇게 모셔 서 있는 모습 나오고, 그런데 여기 이제 기도할 때는 이제 23절에 이제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이 나오고요. 그리고 이제 22절에서는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가 돼 있는데,
제가 22절까지를 이제 계시의 부분에 포함을 했냐면 아마도 성도님들이 가지고 계신 이 성경책에 22절에 이렇게 구분 표시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22절을 그 앞부분에 넣은 이유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그대로 서 있는 모습, 여기서 그 계시를 받는,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더 잘 알게 되는 이제 이런 모습들이 여기 22절에 나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작 소돔 안에 들어가 있는 롯은 소돔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소돔 밖에, 여호와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소돔이 어떻게 운명이 끝날지를 알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이제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도 이제 요한계시록을 마포 모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끝날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이제 알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23절에서는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런 기도의 모습, 그래서 중보 기도가 이런 것이고, 이러한 내용들이 있구나, 이런 것들, 교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한신영 형제님 : 이제 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기도를 해야 되는가, 몇 가지만 살펴보면 먼저 기도할 때 보면 27절에 보면 이제 "티끌과 같은 자"인 것을 얘기합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제 '감히'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인지 내가 그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세로 서 있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할 때 이제 여러 가지 이제 계속 부탁을 하면서 기도할 때, "노하지 마옵소서" "노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얘기를 합니다. 계속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50, 45, 40,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 나아가서 계속 기도를 할 수 있는 이런 자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서 나아가서 어떤 기도를 할 수 있다 해서, 막 나아가는 게 아니라 "노하지 마옵소서." "감히 고하나이다." 감히 담대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을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해 보게 되고요.
그리고 또 한 번에 한 10명, 5명, 1명, 이렇게 안 하고 50서부터 조금씩 줄여나갑니다. 귀찮게, 또 하나님 귀찮게 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런데 이게 보면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무작정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저기 소돔, 저런 데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심판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인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50명, 45명, 조금씩 줄여나가되 10명에서 더 줄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이제 먼저 살펴보면 무작정 요구하거나, 이거를 하나님께 명령하거나, "이거 해 주세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태도로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해주세요." 이렇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무언가 우리가 앞에서 얘기했지만 '티끌 같은' 자 자신이 무언가를 주장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단계별로 줄여나가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넓은지 이렇게 체험하면서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러하겠다." 하나님의 그럴 때마다 이제 여전히 긍휼하신 약속을 받고 얼마나 참으시고 인자하신 분인지를 계속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걸 통해서 기도는 내가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게 교제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또 그런 기도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 기도를 통해서 한번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형제님 교제하신 대로 참 기도는 참 우리가 겸손하게 나아가는 것이고 또한 주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 가르쳐주신 대로 이제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를 이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은 이제 단순하게 반복이 아니죠. 그냥 똑같은 기도를 계속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발전됩니다. 이게 사실 더 발전이 돼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욱 담대함이 생긴다고 생각이 듭니다. 기도를 드리면 더욱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신뢰하게 되고 더욱 그것에 의지해서 더 구하게 되고,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제 점점 발전이 돼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 기도도 보면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기도를 드린 거 보면, 아까 형제님도 교제해 주셨지만 전혀 엉뚱하게 자기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제 구하게 되는데요.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이제 "의와 공들을 행하게 하려고" 이렇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러한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공도를 행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은 이제 그렇게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여기 보면 이제 '공의'라는 단어하고 앞에 19절에 나오는 이 '공도'라는 단어가 이제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그가 가지고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와 같이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혹시 이 기도에 대해서 또 다른 측면을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아까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 중에서 굳이 20절 21절에서 나온 것처럼, "죄악이 크고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그러한지 보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이제 심판을 하시는 것보다 이제 그 가운데서 돌이키는 자들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관련해서 에스겔서 33장 11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이와 같은 분이 하나님이심을 이제 아브라함은 알았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초하여서 이와 같은 중보 기도를 드렸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50인에서 시작돼서 이제 10인으로 마무리됐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첫 번째로는 그 10인에서 마무리됐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지금 멸망받을 곳에서 아브라함이 생각해 둔 사람이 이제 적어도 10명이 있었다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와 같은 자를 생각해서 멸하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이제 10명이라는 숫자가 근거가 있는 숫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적어도 10명 정도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근거로 멸하지 아니하시면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것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이제 왜 50명이었을까는 잘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혹시 왜 50에서 시작되는지에 대해서 혹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아브라함은 또한 되게 실질적으로 기도를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이제 롯을 생각했을 때 롯이 또한 이제 의로운 사람이고 그로 인해서 아브라함이 생각했을 때에 그 롯의 간증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50인 정도로 생각을 처음에 했던 것이죠. 이제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숫자를 조금씩 줄여나가고, 최소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10명 정도면 이제 롯의 가족의 숫자로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제 19장에 보면 이제 천사가 말하는 부분에 보면 아마도 그의 이제 롯의 아들과 또 결혼한 딸들, 또 사위들, 이렇게 해보면 이제 10명 정도가 나옵니다. 적어도 그 가족들은 의인으로서 살고 있지 않을까, 실제적으로 이제 기도를 한 것이죠.
하지만 롯은 이제 그 정도의 간증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롯의 문제이고요.

참 이 접대도 그렇고 기도도 그렇고, 그 대상이 좀 뭐랄까 받을 만하지 못한 이제 그런 대상일 때가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이제 기도하는 것이고, 이제 접대도 이제 어려운 그런 사람을 이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주신 마음과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런 태도는 이제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을 접대하는 것이 이제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이라고, 또 기뻐하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을 때에, 참 그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을 그들이 이제 구원받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가운데서 이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이제 우리도 이제 그런 반응을 내어 보여야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이제 많은 계시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이제 지식적으로만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들을 위해서 또 기도하고 또한 그들을 섬겨야 되는 모습이 이제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혹시 이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러한 기도에 기도 응답에 대해서 혹시 생각해 보신 분이 계실까요?

이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19장을 보면 19장 2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창 19:27).

아브라함은 기도하고 그냥 잊어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나서 이게 정말 어떻게 됐나 관심을 가지고 이제 계속 살펴보는 것이죠. 그 여호와 앞에 섰던 곳에 가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서 거기서 이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 19:28-29).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참 우리의 기도는 이와 같이 이제 응답되는 기도이고 또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기도가 이루어질지를 또한 주의 깊게 또 살펴야 되는 것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 이제 시간도 이제 다 되었는데요. 여기까지 해서 창세기 18장을 저희 교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에 또한 이런 접대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더욱 그의 믿음이 이제 견고해지고 또 아브라함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정 안에서의 믿음도 채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 접대를 했을 때 이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익과 특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그러한 가운데 더욱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이제 기도하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또 우리 모두 가정 가운데 계속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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