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장승훈 형제님(요약)

히브리서 3장 : 모세보다 뛰어나신 주님

박이레 2025. 4. 27. 12:43

히브리서 3장 : 모세보다 뛰어나신 주님 / 25년 4월 27일 일요일(요약2) / 장승훈 형제님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3:1-6, 개역한글)

히브리서 말씀을 교제드리고 있습니다. 1장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날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닥 말씀하시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설명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 히브리서 1장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무너진 말씀에 대한 권위와 통치를 아들로 말미암아 회복하실 것을 선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 가운데 있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주님께서 통치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부분들을 어떻게 바로잡으실 것을 하나님께서 선언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게 될 특별히 히브리인들에게 이스라엘에게 해준 약속보다 더 위대한 약속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장에서 큰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시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십니다. 시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것을 찬양하지만 2장에서는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 아담이 잃어버린 만물의 통치권을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거룩함을 입는 것은 저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회복하신 만물의 통치권을 저희들도 소유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해서 사단에게 일생을 종노릇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창세기 3장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대제사장되심과도 연결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개역한글)

제가 앞서 히브리서의 저자와 서술방식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명하고, 둘째는 예시를 들어서 말씀합니다. 세번째는 촉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이 말씀을 받는 히브리인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를 유혹받는 자들에게 주님의 어떠하심을 보고 그리로 돌아가지 말것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그와같은 촉구의 내용들을 3장 1절의 내용으로도 볼구 있습니다. 또 "완전한데로 나아갈찌니라"(6장 2절)도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저희에게 지식을 준다기 보다는 저희들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세상이나 교파의 웅장한 여러가지 것들을 추구하지 않기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전에 저희가 어떠한 자들인지를 말씀합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적을 두고 따로 구분하셨습니다. 뒤의 말씀들에도 "견고히 잡으면"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 실질적인 삶에서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개역한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 개역한글)

우리가 어떠한 자들인가를 먼저 말씀하시고 이 호소에 반응하는 것이 합당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어떻게 뛰어나신 분이심을 말씀하는데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을 말씀합니다. "깊이 생각하라"

주님은 이 땅 가운데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제사장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을 대표해서 주님께서 오셨고,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가신 분임을 말씀합니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3:2, 개역한글)

2절은 주님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는 2장에서도 언급된 부분인데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2:17, 개역한글)

주님의 대제사장의 사역은 현재도 지속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충성스럽게 그 일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특별히 민수기 말씀과 연계해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12:7, 개역한글)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내용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리하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록하는 가운데 민수기 12장 7절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환경이 잘 갖춘 상태에서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충성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충성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충성할수 있는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장 충성하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충성하기 어려운 가운데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의 간증을 볼 때에 저희가 감사하고 저희도 그와같은 충성을 하나님께 보일수 있기를 마음을 다잡지 않습니까?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3:3, 개역한글)

우리 주님께서 모세보다 얼마나 더 뛰어나신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충성하기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했습니다. 모세와 같이 충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세와 비교되실분이 아닙니다. 모세가 질서안에 있다면, 주님은 질서밖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집을 지으신 건축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3:4, 개역한글)

지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다는 의미만 담는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만들었다, 임명했다, 준비했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모든 만물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시고, 설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5절에서 다시 한번 모세와 주님을 비교합니다. 모세는 사환이고 우리 주님은 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가 여러가지 권한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충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아무리 훌륭한 사환이라 하더라도 그는 사환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의 집 맡은 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여기서 어떠한 차이를 찾기가 힘든데요. 영어 성경을 보면 모세의 경우 "하나님의 집에서" 라고 할때에 in(집안에서) 이라는 전치사가 들어가 있고, 주님의 경우는 그 '집위에'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3:5, 개역한글)

모세가 하나님의 집 안에서 사환으로 충성한 것은 주님과 모세의 차이를 드러낼 때 사용되지만, 또 주님께서 실제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충성하신 부분을 말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주님의 그림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이며, 그 이상을 넘어설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먼 나라로 가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을 다 탕진하고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 이와같이 고백합니다. "지급부터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름을 감당치 못하겠다.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아들과 품꾼, 종이 얼마나 그 신분의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3:6, 개역한글)

"그의 집이라" 이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지금 주님을 섬기는 저희들입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의 고백과 일치되는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면 우리는 그분의 참된 집이라는 것을, 참된 성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거하는 곳이고 그 집안에서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하고 주님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살아갈 때에 주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