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찬송

박이레 2024. 8. 31. 15:00

< 찬송 > 기드온 쿠 형제님

에베소서 5장입니다. 15절부터 21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5-21).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주의 말씀을 또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제 지난 시간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집회가 끝난 다음에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오셔가지고 "저 이거 이야기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태와 마가에서 그 장이 어떤 것을 강조하는지를 말씀을 먼저 드렸습니다. 마태 마가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래서 '피'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또 이제 고린도전서에서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그래서 이제 우리 한국어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새 언약'이 강조되는, '새 언약'이 먼저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라고 해서 그 잔이, 나의 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와 사도바울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해가지고 그 잔이 새 언약이니,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맞는 것입니까? 물론 그 두 가지 말씀이 다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잔을 취할 때 우리는 주님의 피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잔을 마실 때 우리는 또한 그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첫 번째로 그 언약의 피를 우리가 마시는 것이고, 그 언약은 오직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세워지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또한 그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새 언약인데 그것이 주님의 피와 함께 온 것임을, 주님의 피와 함께 온 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이 새 언약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단순하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그 잔에 참여할 때 그것은 이제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새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의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주님의 만찬에 참예하는 것은 유월절 양의 유월절 예식이 확장된 것이 아닙니다.물론 주님께서 유월절 밤에 이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만찬은 그 유월절 예식이 연장된 것이 아닙니다. 이 주님의 만찬은 유월절 예식과는 전혀 다른 분리된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유월절 날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예식에는 4개의 컵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 번째 잔을 드시고 이렇게 말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내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잔을 취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이것을 잘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찬송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노래로 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150편의 시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가서가 또한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노래한 것을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서에 많은 부분이 노래입니다. 그 유명한 이사야서 53장이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아주 많은 부분이 그 노래인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로, 어떤 서술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언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선지자의 글이 노래의 형식으로, 시가서로 기록된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가 부르는 노래로서 그렇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 노래에 공명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DNA를 우리 안에 두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치가 있죠. 성도님들이 서서 찬송을 부르든, 앉아서 찬송을 부르든지 이제 어떤 사람이 옆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사람들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노래가 나오든지 반 음정 낮게, 틀리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죠. 물론 그도 이제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형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멜로디를 들을 때에 그것에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창조하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노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끄러운 그런 노래도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좋은 노래를 들을 때에, 우리는 이제 지적으로 또한 정서적으로 좋은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은 노래에 반응하도록 만드셨고 그리고 그 좋은 노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래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노래는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세상의 노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령한 노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에베소서 5장 19절과 20절을 중점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놀라운 그런 찬송을 첫 번째로 드린 한 형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제 한국어를 읽지 못하는데요. 그 한국어 노래 중에 이런 단어에 대해서 저는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부른 찬송 중에 '노래를 하자' 이런 찬송과 가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 내용을 아냐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책이 이제 영어로도 같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단어, '행하자'라는 단어를 이제 여러분들이 그 찬송가에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가는 그러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에베도 5장, 그리고 또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4장과 5장에서 사도는 여러 번 '행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이제 17절에서는 이제 부정적으로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 4:17).

그리고 5장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걸어가라" 그리고 5장 8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걸어라" 그리고 5장 15절에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살펴볼 텐데요.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어떻게 걸을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걸어가야 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여기서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이 걸어가는 것을 통해서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삶에서 행해야 되는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방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그게 이 걷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절에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당하게 걸을 것인가?' 그것에 대한 답은 5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어떻게 살지, 말아야 되는지를 또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처럼 걸으면 안 된다. 그들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향한다. 그들은 총명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들과 같이 걷지 말라. 세상 사람들처럼 걷지 말라. 그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처럼 걷지 말라. 합당하게 걸어라.
그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로 5장에서는 '사랑 가운데서 걸어라.' 그리고 8절에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걸어라.' 그리고 15절에서는 '주의하여서 조심히 걸어라.' 우리가 이것을 다 살펴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한다면 우리 식사를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이 '조심히 걷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15절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하면 '너희가 걷는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보라'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 같이 살고 계신 저희 어머니는 매년 이제 점점 더 늙어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가 여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좀 자연스럽게, 자유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녹음해가지고 어머니께 전달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분께서는 지금 77세입니다. 여전히 이제 강건하신데요. 실제로 너무 강건해서 제가 실성할 정도입니다. 어머니가 그냥 단지 30대처럼 행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그냥 빠르게 여러 가지 것들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항상 맨 앞장서 가지고 하고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에너지가 넘칩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어머니의 그 총명함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이 드신 분에게 가장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이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나이 드신 분들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때때로 아주 그냥 서둘러서 뭘 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할 때마다 넘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왜 이렇게 항상 서둘러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 계시는데 말입니다. 물론 정원 가꾸는 일이 많으시고 많은 채소들을 키우십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유기농 채소를 먹습니다. 정원 가꾸는 데 바쁘게 보냅니다. 때때로 "내가 너보다 더 바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서둘러야 돼." 그래서 "난 벌써 지금 여러 가지 일을 마쳤다." "그럼 그 바쁜 일 다 끝냈었어요?"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너무 바빠."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자주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해서 걱정을 합니다. 왜냐함면 어머니가 그것을 잘 살피면서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듣는 것도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참으로 어머니에게 보청기가 필요하다고 확인시켜주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조심히 걷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예입니다. 이 말씀이 네가 어떻게 걷는지 자세히 살피면서 걸어라. 어떤 것에 걸려 넘어지지 마라. 그냥 서두르다가 넘어지지 말라. 그런데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면을 보게 됩니다. 자세히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를 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것이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냥 부주의하게 가서만 됩니다. 더 자세히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야 되는지.
그리고 이제 몇 가지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여기에 언급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조심해서 걷는지, 그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것을 어떻게 조심히 살필지 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것을 언급합니다.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그리고 두 번째로 17절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세 가지가 모두 이것은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 이것은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 이것을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며" 그리고 17절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이 여러분이 걸을 때에 조심히 살피는 방법입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라.
우리는 살아갈 때 아주 어리석게 행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지혜 없는 자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라면서 이런 실수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을 때에 그런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지혜 있는 자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지혜 없는 자, 지혜 있는 자를 말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월을 아낄 때,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낄 때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시간을 낭비하는데 전문가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참 이 남편들이 항상 시간을 낭비하는데 선수입니다. 맞는 말이겠죠. 그런데 이제 영적인 면을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많이 낭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경을 연구했다면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그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낭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이 우리 주의를 끄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런 것들 가운데서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월을 아끼라'라고 말합니다. 이 이것은 이제 '기회를 사라'라는 헬라어 원문으로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매 초가, 우리가 내쉬는 그 숨 쉬는 그 시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심장이 뛰는 그 한순간 한순간이, 그 매초가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들이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우리는 그 강물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또 흘러가면 그건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흐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참으로 이 자리에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이러한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직 지금 좀 어리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제 겨우 20대인데, 내 인생의 결정인 순간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 내 미래는 아주 놀라운 것이 될 거야. 나는 아주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시기야. 그런데 여러분은 눈 깜짝할 새에 저처럼 이제 50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냥 그 위대한 20대는 금방 사라져버리고 없을 것입니다. 참 젊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놀라운 젊음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럼 여러분이 여러분의 젊음을 좋은 여러분의 직장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그 젊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또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됩니다. 이제 통역사 형제가 더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했지만 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웃음) 많이 젊은 것은 아닌거 같지만 말이죠. 저의 생각은 아직도 분명히 명령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떤 것이 내가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냥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다. 이 노화라는 것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20대에, 여러분이 10대에, 여러분이 30대, 그 여러분의 힘을 이 세상의 것에 사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머리에 그 절정의 힘을 성경을 연구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절정의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 20대에 30대, 그 놀라운 순간을 아주 낭비해 버리고 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제 40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아직 성경을 몰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세상의 많은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제 가정에 대해서 걱정하고 이제 아이들에 대해서도 걱정합니다. 그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걱정을 갖게 됩니다. 이제 은퇴 후에는 또 어떻게 살지, 그 삶의 그런 실제적인 문제들이 그의 생각을 가득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공부할 기회가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50대, 60대가 됐을 때 더 이상 집중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순간은 20대와 30대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기회의 창을 놓쳐버리면, 여러분 그 놓친 것을 회복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대학에 대해서 생각하실 때, 여러분이 내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생각할 때, 여러분께서 내가 얼마나 많이 그런 것들보다도 내가 얼마나 많이 성경을 알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흘러가 버렸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시간들을 모두 소중히 생각해야 됩니까?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 시대는 악한 것으로 특징되어지는 시대입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모두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기회를 사용할 수 있는 바로 지금, 그 시간들을 그 초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주제로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가장 이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은 이것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을 가장 산만하게 만드는 것도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컴퓨터 게임입니다. 그냥 앉아서 그리고 게임을 하죠. 알아차리기도 전에 3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항상 그리고 나서도 한 번만 더 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지막 한 번만 더 하는 그런 게임은 있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이거 한 번만 더 했으면,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수년이 흘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에베소서 5장을 전혀 충분히 읽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는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읽는다면, 여러분이 죽기 전까지 매일 성경을 읽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이 성경에 그 부유한 것을 온전히 다 섭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교장 선생님이 아닙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금 허비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것에 사용할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젊은 성도님들이 "내가 어떻게 주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그 모든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더욱 그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 그 횟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의 뜻을 분별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걸을 때 조심히 살피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면서 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바라봐야 됩니다. 조심히 살펴봐야 됩니다. 자세히 관찰해야 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어떤 것은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운전해서 인도하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우리가 나의 잔고, 은행 계좌만 보고 있다면, 내가 직장에서 어느 정도까지 승진할 수 있는지 그것만 쳐다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성공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내 삶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의 뜻을 볼 수 있는 그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걷는 것에 주의하지 않고 딴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18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에서 조심히 걸을 수 있는지 이제 세 번째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언급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것은 방탕한 것이다" 그 술이라는 것은 우리를 방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이제 야생의 그런 생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심해서 걸어가는 것과 정반대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술 취한 사람들이 그가 자기가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쳐다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곳으로 영향을 받은 채 그냥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되는 것과 전혀 반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술의 영향력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친애하는 성도님들에게 이 술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 어느 누구도 술취한 적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너무나 안 좋은 경험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영향을 끼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영향을 받으려면 우리는 의식이 분명히 깨어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이 포도주, 독한 술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세 가지 것들,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세 가지 긍정적인 것, 우리가 어떻게 걸어야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마지막 부분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제 그는 몇 가지 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또 19절부터 21절까지는 4개의 행동, 4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이 4개의 행동, 4개의 동사가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도록 내어드리면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첫 번째로 19절에 "서로 화답"합니다. 이 또한 19절에 "노래"합니다. 그리고 또한 19절에 "찬송"합니다. 20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21절에 "피차 복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특징입니다.
그냥 여기서 노래를 부르라는 것은 아주 멋진 노래를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신령한 노래"라는 것은 그냥 듣기 좋은 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해서 그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반응해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시편을 좋아하시기를 바랍니다. 대체로 이제 나이 드신 분들이 이 시편을 좋아하시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 저도 이 시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는 시편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시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합니다. 제 아내가 이것을 똑같이 말했습니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시편이 더 좋아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시편을 좋아한다면 여러분이 점점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사실 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모든 신자들이 좋아해야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감정을 우리의 경험 가운데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편은 하나님의 감정을,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그것을 우리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시편이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몇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신약을 와서 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이 신약의 모임의 집회 가운데서 악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인식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볼 때 여기 여러 모임들이 있고 여러 모임의 활동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악기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신서에 와서 볼 때도 동일하게 그 모임의 집회에서 악기가 사용되지 않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나와 있는 유일한 구절은 여기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5장에 이 구절이고 또한 동일한 내용이 담겨 있는 골로새서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놀랄 만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특별히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까? 왜냐하면 구약에는 그 악기에 대한 언급이 너무나 많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막에 대해서, 또 성전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거기에 많은 악기들이 언급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배는 자주 그 악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편에 보면 많은 악기들이, 여러 현악기와 관악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그 경배해 드리는 데 있어서 많은 악기들이 사용되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주 그 여호와의 절기, 그 일곱 절기 가운데 트럼펫이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와서 보게 될 때 처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후에 첫 번째로 세워진 모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악기에 아주 익숙한 유대인들이 이제 구원받은 신자들도 동일하게 예루살렘 모임에서 그 악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한 번도 악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그 절기에 그렇게나 많이 여러 가지 악기들이 언급되고 사용되었지만 이제 지금 이 시대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도 트럼펫이나 그 현악기가 사용된 것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 악기에 익숙한 유대인들이라면 이 지역 모임에 들어왔을 때에 "제가 트럼프를 이 집회 가운데 불러도 될까요?"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 거문고를 여기서 연주해도 될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서신서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한쪽에서는 아주 크게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 이제 신약에서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수 많은 악기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 있었다가 지역모임 지회 가운데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일부러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침묵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갑작스러운 악기에 대한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 모임에서는 더 이상 악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로보트 앤더슨 경이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장차올 왕이'라는 그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 다른 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 '성경의 침묵'이라는 책입니다. 또 이제 흥미로운 책입니다. 읽어볼 만한 그런 책입니다. 여러 가지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다른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께서 '웃었다'라는 표현이 없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또한 그분은 '우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분은 '한숨을 내셨다'라는 기록은 있습니다. '민망해'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전혀 웃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많이 웃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고의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서 그런 방식을 통해서 슬픔의 사람인 우리 주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분입니다. 그 슬픔을 지고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복음서에서 그분이 여기서 웃었다, 또 거기서 웃었다라고 기록했다면 적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뭔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고의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악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이 신약교회 집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기를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그냥 단순한 그냥 처음에 음정을 잡기 위해서 사용하는 그 오르간은 어떻습니까? 문제될 건 없지 않아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아주 교리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젊은 성도들이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할 것입니다. 이제 오르간을 사용하고 있는데 "강형제님 왜 그러면 왜 안 되나요?"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어쨌든 안돼." "왜 안 돼요?" 이것이 오늘날 아이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악기 하나만 쓸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성경은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죠. 제가 이 모임의 실행 가운데서 중요하게 경험한 것은 우리가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일관성 있게 대처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악기 사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시록을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다시 여러 가지 악기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때 다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펫이 불려집니다. 그때 여러 악기들이 사용됩니다. 이제 그 천년 왕국의 성전에 들어갈 때 많은 악기들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어떤 악기도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때와 다른 경륜의 시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모세의 시대와 다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단지 떡과 잔만 있습니다. 그리고 너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침례 입니다. 그리고 하프도 없습니다. 악기가 없습니다. 이 단순함은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여러 대형 교회들이 이제 밴드를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단순하게 모인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감정을 나타냅니까?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아니, 사도바울 형제님 당신은 이 노래 부르는 거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아닙니까? 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냐고 한다고 하셨습니까? 여기서 이제 이 화답이라는 것이 영어 성경에는 이제 'speak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노래 부르는 것을 안 하고 서로 '말하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 형제님은 '이.것.을. 의.도.한. 것.입.니.까.?'(기계식 말하기) 노래 곡조가 어떻게 된 겁니까? 물론 사도 바울은 그다음에 노래하며 찬송하며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신령한 노래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멜로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담긴 메시지가, 그 내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서 "서로 화답하며"라고, '서로 말하며'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여기 앞에 사회자 형제님이 첫 번째 찬송을 선택할 때 그 찬송이 담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송가에는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이 복음 찬송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복음 찬송가의 모든 곡조가, 그리고 거기 불신자들이 들어야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 찬송가에도 복음 전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그런 복음 찬송가 그 노래를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복음적인 찬송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그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서로 화답하며" 서로 말하라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그 내용을 여러분이 알면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익숙한 곡을 부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따라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내용을 확인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서로 화답하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는 첫 번째가 '시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150편이 되는 시편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는 다른 노래들을 또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노래는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된다는 것을 첫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취한 내용이 돼야 됀다. 그래서 그 성경의 모든 구절을 가져왔다거나 그리고 그 성경에 어떤 단어들을 취했거나,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들은 자주 그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인용해서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시대 성도들도 그와 같이 시편에서 내용을 취해서 불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임 집회에서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성경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찬미'입니다. 찬미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 찬미에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래를 부를 때 여러 우리 찬송가에 구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도 많은 여러 가지 노래들이 있습니다. 그 박자가 이제 다른 여러 종류가 있죠. 그들의 그 기능이 다릅니다. 그 세상에 여러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비트, 박자와 우리가 부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 세상의 노래들은 아주 그냥 자유분방한 그런 박자를 가지고 있지만 저희 집회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구조적으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좀 지루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이 찬송가 너무 단조로운데, 하지만 그 각자는 우리의 마음을 계속 분명하게 그 내용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감정의 박자가 구조적으로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신자 찬송을 보면 거기에 이제 '75.75' 이런 박자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각자를 보고 어떤 곡조를 여기에 함께 부르면 되겠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찬송가들이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박자와 그런 빠르기를 따라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가 모임 집회에서 부르는 노래의 특징을 언급하는 것은 '신령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시편은 성경적인 것을 말했고, 찬미는 구조적인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신령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고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 대한 고조되는 그 감정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감정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께로 끌고 가는 데 사용되는 노래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모임에서 불러야 되는 그 노래들의 그런 기준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고, 그리고 구조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노래가 어떤지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노래를 듣는지 주의를 기울이기를 당부를 드립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구조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여러분이 찬송가 외에 다른 것을 듣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제 말하는 의미를 아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저는 이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 마음을 좋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음악은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날 노래들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이제 반역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의 육체 정욕을 이끌어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적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주 이 죄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말해 버립니다. 우리의 그 육체의 것들을 이끌어냅니다. 그러한 노래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이고, 구조적이고, 또 신령한 노래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래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피아노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여 찬송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집회에 어떤 악기가 사용되고 있나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연주해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찬송하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노래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너의 마음으로 주께" 우리는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래합니다. 그 노래를 주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하기를 "범사에" 항상 감사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성령 충만을 받습니까? 그리스도 우리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함께 노래할 때입니다.
또 두 번째로 범사에,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감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됩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들 중에 하나가 이제 아이들이 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게 만드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러한 매너를 잘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어른들도 때때로 그런 매너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까? 참으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선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때때로, 가끔 감사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냥 단지 월급이 올라서 감사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연말에 보너스를 받게 돼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가정에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서 감사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쁜 일, 아주 어려운 일, 그것에도 감사하나요? 그 사업이 잘 안 됐는데도 감사하나요?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잃게 되었는데 감사하나요? 그는 "범사에"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 구약의 여러 성도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우리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8절에서 성령을 발견하고요. 그리고 19절에서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20절에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정부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세계에 많은 지도자들이 반역하는, 이제 그러한 저항하는, 그런 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정당한 통치가 없는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 대항하고, 싸우고, 권위에 저항할 것을 권장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것에 대해서 대항해서 싸울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줍니다. 정부가 옳게 하지 않고 있다면 그냥 거리에 나아가서 그것을 저항하고 싸워라. 여기 한국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거리에서 그 플랜카드를 들고 저항하는 그런 것의 시위에 한번 서보신 적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방식은 무엇입니까?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부의 복종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또한 피차 복종할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이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그런 경향과 정반대로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피차 복종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스가 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다 또 직장에서 그런 직장 상사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사업장 만나는 손님이 또 여러분의 보스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고용주건 고용인이건 다른 보스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상전들이 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한 상전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바로 그 하나님께 우리는 복종해야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전일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차 복종하고, 그리고 복종함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복종하고 있는 것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복종한다는 것을 배울 때에 그리고 또한 피차 복종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이 경험을 해 나가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말하고 노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