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임

박이레 2024. 8. 17. 19:18

< 주님의 이름으로 모임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을 환영드리며 또 다시 한 번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의 나라가 얼마나 큰지 경험하였습니다. 여러 교통이 조금 상황이 안 좋아서 약간 늦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마침내 오게 된 것을 또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진해에서의 교제를 저의 인생 가운데서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에 여기 방문했죠. 왜냐하면 제가 이 지내 모임에 작년에 왔을 때가 제 인생 가운데 첫 번째로 말씀을 전하는데 성경을 안 가지고 온 그런 날이었습니다. 여러 짐을 싸다가 문제가 있어가지고 뭘 넣고 빼고 하다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안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경험은 이제 성경에 없는 저에게 원 형제님이 영어 뉴베리 성경을, 다 낡은 성경을 저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중에 계시록은 몇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인 집회 이후로 11일 동안 계속 그 낡은 성경을 가지고 저는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기쁘게 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찬 형제님한테 드렸는데 그걸 다시 돌려받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제 아내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 모임에 갈 때 새로 새 뉴베리 영어 성경을 사가지고 갖다 주면 어떻겠냐? 그런데 제 아내가 그것을 권해 주었을 때 단지 일주일만 여행 전에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배송 시간이 너무 길어가지고 제가 가지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이면 제가 다시 온다면, 새 뉴베리 영어 성경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다시 이 자리에 오게 돼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과 내일 말씀을 다룰 주제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성경의 원리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이미 다 잘 알고 있다라고 흔히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잘 익숙한 주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나라와 또 제 나라도 마찬가지로 이제 새로운 신자들이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그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다라고 흔히 생각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중심 구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읽기 전에 이 구절의 문맥이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2절과 23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2-23).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시작 부분의 기록을 읽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마태복음의 중앙 부분에 있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구절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어떤 한 책을 읽을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는 문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전하는 분은 누구든지 그 책의 전체적인 문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문맥을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서 그 처음과 그 중간과 그 끝에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첫 번째로 이 마태 복음은 '임마누엘의 복음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태복음에서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임마누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그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임마누엘을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의 후손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약속된 메시아며 약속된 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입만을 말하고 있는 부분을 보게 될 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것을 연결시켜서 생각할 때에 마태복음 기자가 말하고자 했던 그 메시아 그 왕께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태복음 중간에 오게 될 때 거기에 성경에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그 교회라는 단어가 맨 처음 언급된 곳입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단어가 이제 다른 문맥에서,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서 사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는 그것에 대해서 또 그 관련된 관련 구절을 살펴보지 않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몸인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어떤 표현으로 말씀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인 교회라고 또한 부르기도 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어떤 교단에 속해 있던, 어느 모임에 속해 있든지 간에 바로 이 몸인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18장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지역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이 지역교회는 어느 한 지역에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보게 되는 그 교회는 2천년 전에 그 구원받은 신자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시대에 있던지, 그들이 죽었던지 살았던지,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18장에 나와 있는 그 교회는 어느 한 지역에 한 시대에 있는 성도들의 무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맥을 살펴보면 그 16장과 18장의 그 두 교회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에 "교회에 말하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2천년 전부터 있는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 그 교회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무덤에 있는 그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서 그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18장은 오직 지역 교회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임마누엘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밤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18장 20절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것을 들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마도 천년 왕국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것을 말하는가 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미래에 있어서 분명히 사실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때 천년 왕국 시대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통치하실 때에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지만 신약의 이 교회에 있어서도 그 임마누엘이라는 의미가 특별히 우리와 관련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임마누엘이 전하고 있는 그런 개념을, 그런 특권을 우리는 놀랍게 기뻐하며 즐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모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에게 이런 육체가 육체로 임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18장 20절은 임마누엘을 이제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 전반부를 읽고 계실 때, 우리는 마태복음 전반부에 하나님의 나라 그 하늘의 왕국, 이 왕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큰 주제여서 오늘 밤에 이것을 다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왕국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 이것은 그들의 천년 왕국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마태복음 전반부에서 그들이 듣고 그렇게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태복음의 계속적인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 왕국이라는 표현이 그것 이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왕국이 단지 이스라엘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왕국은 이 온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다음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래서 여기 이 천국 열쇠가 우리는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 두 구절에 밀접성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이제 미래에 이스라엘이 그 왕국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지만 여기서 나와 있는 그 왕국은 단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큰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게 될 때에 우리는 이 하늘 나라가 점점 더 이 천국이 커지고 그 큰 개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복음서의 중간에 교회가 설명이 되었고,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을 마지막에 하게 될 때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신성한 위임을,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서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 뿐입니까? 이스라엘만 특화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나라에'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이제 모든 열방에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의 기초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끝에 주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봉사의 중간에 이 왕국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바로 이 교회는 주님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지역 교회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복이 아닙니다. 마태는 이것을 점진적으로 열방의 향한 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천국은, 이 왕국은 점점 더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전에 영어로 부정의 부정문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통역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데 그것을 하신다고 합니다. 만약에 오늘 이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그 구약의 그 예전 그 하나님의 경륜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어디로 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약 시대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마다 만찬 떡을 떼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아, 이건 좋은 휴가인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얼마 안 가면 우리가 가진 돈은 다 떨어지고 말겠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거기만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만, 거기에만 중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태복음 18장 20절에 "거기에"라는 단어를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거기는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곳이 어느 곳이라고 할지라도 바로 그 자리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그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어느 한 곳에만 국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프리카의 어느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곳에나 계실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한 분이 여기도 있을 수 있고 저기도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의 이 육체적인 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무소부재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여기에 그 중심이 되는 그 개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있는 특별히 젊은 형제 자매님들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이 모이는 장소는,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이 모임에 얼마의 성도님들이 모이는지 모르겠습니다. 50명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많은 수가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것에 대해서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을 여러분 제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아주 좋은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에서 어떤 궁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건축물은 아주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놀라운 건축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떤 신전은 금이나 보석들로 치장된 그런 건축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VIP들이 모이는 아주 멋진 그런 공간도 있습니다. 유엔 총회 건물 같은 거 말입니다. 아주 거기에 모인 집회를 볼 때 사람들은 중요한 집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다른 건 모두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성도들이 이와 같이 모이고 있는 이 장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장 놀라운 곳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여기 그냥 평범한 건축, 그냥 공간에 그냥 50명, 60명이 모인 공간, 그냥 앞에 좀 이상한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여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장소라고? 그 한국의 국회의사당이 같은 건물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백악관, 거기에 국회의사당 같은 건물, 참으로 그 놀라운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여기보다 더 분명히 나은 곳 아닌가? 전혀 아닙니다. 여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이 장소가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초반부에 야곱이 이것을 발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 야곱이 꿈의 사닥다리가 하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는 베엘이라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이 붙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장소와 같은 것이 없도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길이다." 여기 그 물리적인 그 사리를 보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 의미가 있습니다. 유엔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장소라고 할지라도 하늘과 연결된 어떤 장소가 아닙니다. 백악관도 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도 하늘과 연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야곱이 그 꿈에서 본 것은 미래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시대에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교회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임재가, 주님의 임재가 유일하게 있는 곳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을 보이기에는 아주 단순한 장소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놀라운 곳입니다. 이래서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위엄이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며 우리 주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을 자세히 보기 전에 몇 가지 것을 더 언급을 하겠습니다. 16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았습니다. 18장에서는 지역교회를 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18장에 나와 있는 교회의 멤버들은 모두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 지역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정말 구원받은 성도가 돼야 됩니다. 하지만 그 몸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다 지역교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어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역 교회의 교제를 모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기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 교회에 속한 그 모든 지체들은 몸인 교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인 것입니다. 지역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교회에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은 16장에 나와 있는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몸인 교회에 수많은 신자 중에 이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교회가 그 몸인 교회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이 지역 교회가 그 우주적인 교회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 교회가 나타내 보이고 있는 그 하나 됨의 간증은 몸인 교회의 하나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한 부분 집합이 아니고, 이 지역교회의 하나됨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하나 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교회가 나눠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아주 안 좋은 간증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교회를 아주 나쁘게 그들이 간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기초이고 중요한 원리입니다. 만약에 이것에 대해서 혼동을 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잘못된 실행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영접과 관련돼서 사람들은 이것을 혼동했을 때 잘못된 실행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지역교회 교제 가운데로 영접하게 될 때 그들이 단지 거듭났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을 영접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비록 교회 진리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영접해야 된다. 그들이 구원받기 때문에 영접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형제님들은 우리가 모두 몸인 교회에 속한 형제이기 때문에 그를 영접해야 된다. 그것은 이 몸인 교회와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 혼동하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인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반드시 지역교회 영접해야 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모임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몸인 교회에 속한 사람은 그냥 지역교회에 당연히 영접해야 된다, 이런 논리를 잘못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해서 이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지역 교회의 각 개인들이 그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장에 나와 있는 이 지역 교회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길 원한다면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으로 와서 봐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 18장 이 구절이 지역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가서 이제 지역교회가 어떻게 모였는지 그 본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신서에 가서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원리로 모였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18장 20절이 유일한 궁극적인 지역교회를 설명하는 구절만이 아닙니다. 물론 이 구절은 이 지역교회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꼭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랑이 중요한 것이죠.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아 아닙니까? 예, 물론 신자들이 중요합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활발한 예배가 아닙니까? 물론 그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이것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그 임마누엘이 아니라면 우리 이 모임은 단지 그냥 사회적인 다른 그런 모임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그런 모임이 있습니다. 어떤 세미나를 위한 모임, 어떤 것을 어떻게 할지 그것을 서로 의논을 하는 그런 모임, 또한 어떤 운동을 위한 모임, 그냥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골프 얘기를 24시간 동안 하기도 합니다. 그냥 단지 이제 즐거움을 위해서 모여가지고 술 마시고, 이제 여러 가지 것들을 근심을 잊고자 하는 그런 모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모임이 특별한 것은, 이 장소가 이 땅에서 왜 가장 특별한 장소냐면 바로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만약에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다면 이것은 그냥 운동을 위한 모임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냥 그것을 그냥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 되겠습니다. 그냥 신학자들을 불러가지고 그런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이 지역 교회가 아닙니다. 바로 이 모임을 이 땅에서 특별하게 이 유일한 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 요소는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제가 이 장소가 이 땅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라고 말씀드리지만, 근데 때때로 그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지만, 이 마태복음 11장에서도 그곳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8장의 배경은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여기에 이 불일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그 약함, 그것이 바로 이 장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임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예전에 들으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걸 누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이제 아일랜드라든지 미국의 여러 형제님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그런 것입니다. 근데 이것은 아주 좋은 예화입니다. 어떤 젊은 이제 신자가 우리 모임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어라고, 참으로 여러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모임을 떠날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좀 나이 든 신자가 그 청년에게 와가지고, "그럼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물었습니다. "저는 전혀 문제가 없는 그 모임을 찾아서 갈 겁니다." 이 나이 든 성도님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면 나에게도 좀 알려달라. 그것을 내가 확인하러 그 모임에 가보겠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는 모임이라는 것은,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고 이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너 이거 싫어해? 그래, 너 그럼 너 알아서 그렇게 해.
나는 상관 안 해. 그래, 너는 만찬을 이렇게 하고 싶어? 그래, 너 그렇게 해. 민주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이들은 아주 멋진 밴드를 좋아해.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이 땅에 평화로운 이러한 모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모임이 전혀 문제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임이기를 멈춘 곳입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에 대해서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지역 교회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데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 그것을 배경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김치를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면을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에어컨을 어떻게 온도를 맞추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22도를 원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리모콘을 가지고 20도로 내려놓습니다. 누가 20도로 맞춰놨어?! 라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다시 23도로 올려놓습니다. 저는 이제 한국 성도님들이 kk 모임에 올 때 자켓을 가지고 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겨울이 있는 나라에서 오는 분들이 우리보다 더 추위를 못 견딜까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다 다릅니다. 우리는 단지 똑같은 로봇처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전혀 다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각의 그 개성이 얼마나 자주 충돌하게 됩니까?
물론 우리 주님께서 이런 문제를 격려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임마누엘로써 여기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들과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제 세상으로 가서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이제 상처를 주었을 때, 그런데 그 나한테 상처를 준 형제가 이 소식을 듣게 되는 맨 마지막 사람이 됩니다.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했다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다른 데 가서 다 하소연하고 다니지만, 이제 정작 자신에게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반대로 하는 것이 그것이 참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이제 상처를 준 형제나 또는 자매한테 가서 먼저 그 사람하고만 말해야 됩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단계를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모임의 그 배경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 20절을 우리가 읽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로 이게 만찬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역의 집회 중에서 만찬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을 듣게 될 때에, "두세 사람이니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것은 바로 만찬 우리가 떡 뗄때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될 때 놀라실 것입니다. 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이 문맥에서? 여러분이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과 19절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마 18:19).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집회가 어떤 집회인지 한번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기도 집회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만찬 예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기도 집회를 배경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 집회를 특정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동일한 원리를 우리의 다른 집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복음 집회든 또는 만찬 예배든,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기도 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용어가 있습니다. 'SMO' 우리는 이런 영어를 줄여가지고 말하는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여기서SMO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일(Sunday) 아침만(Morninig) 간다.(Only) 그 SMO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아침에만 가는 그리스도인들, 그는 평일에는, 다른 주중 집회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는 그들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일 아침에만 갑자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앉아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갑자기 또 일어나서 감사를 합니다. 다른 6일 동안에는 어떤 참여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알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18장 20절은 분명히 기도 집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 일요일만 있는 그런 신자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 주 중에 기도 집회에 참여하는 특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서 모일 때, 우리는 찬양을 그리스도께 높여드립니다. 우리는 그분께 이것을 드립니다. 그분께 이것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 집회 때,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그분께 받는 것을 구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는 주님께 선물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기도 집회 때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을 구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기는 좋아하지만 하나님께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또 받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서 기도할 때는 그는 하나님께 아주 수많은 것들을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집합적으로 기도드리는 그 장소에 오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 집회를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 구절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모인 곳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맨 처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느 장소든지 그 장소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온 것이 "두 세 사람이" 여러분이 아마 이 집회 후에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교묘한 질문을 할 것 같은데요. "기드온 형제님, 왜 셋, 넷은 아니고, 왜 다섯 여섯은 아니고, 왜 꼭 두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저는 그때 "아 저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그 숫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얼마나 대조적인 것입니까? 아주 수많은 수만의 성도들이 모일 것입니다. 수많은 공중이 됩니다. 그 시편 133편에서 그 수많은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모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모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관련돼서 언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 "두 세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 특별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2천 명, 3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가장 최소의 그 숫자를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 주님의 백성들이 작은 그룹으로 모여서 집회를 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작은 수의 모임을 말씀하신 걸까요? 이제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라라고 말씀하신 명령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지혜 가운데서 이제 여러 각처에 여러 장소에서 이와 같은 모임이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만 사람들이 모여야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여기 고린도에도 모임이 있었고, 여기 에베소에도 모임이 생깁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에도 모임이 생깁니다. 예루살렘에도 있었고, 그리고 진해에도 있습니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그와 같이 퍼지는 것입니다. 이 지역교회는 그리고 하늘을 대표하게 됩니다. 이 복음이 한 지역에 그렇게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주 큰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2천 명의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 명의 교회가 있습니다. 한 2천 명의 3천 명의 신자들의 교회는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너무나 크게 된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 성도들이 이제 흩어져서 각처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래서 그 큰 그룹이 그것을 계속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눠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떤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영혼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 가운데서는 이 지역 교회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그룹입니다. 이 각 세상에 흩어지는 작은 그룹입니다. 이 복음의 증거를 가지고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다른 것을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통역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헬라어 문법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단어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이 '모이다'라는 것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였었고' 지금도 '모이고 있는' 현재 완료 진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헬라어라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영어에서 이제 과거 시제, 현재 시제, 이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 현재 시제는 지금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는 있었던 일,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에서는 완료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완료형이라는 것은 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가 합쳐져 있는 것입니다. 이 완료형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지만, 그 일어난 사건의 결과가, 그 효과가 지금 현재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 완료 시제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리고 이제 그것으로 끝났다. 종결됐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다 이런 것과 다릅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그 사건의 효과가, 결과가 지금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완료 시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완료 시제입니다. 그래서 이 완료 시제가 여러분이 잘 아시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완료 시제입니다. 그것이 완료 시제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사역이 다 완성됐지만, 그 사건의 결과가 계속적으로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완료된 그 사건의 그 효과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료 시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많은 것이 완료 시제로 말씀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늘 밤 이와 같은 헬라어 문법을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모임, 이것은 이 완료 시제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이것은 단지 한 번만 이루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효과가 지금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계속되는 그 효과를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한 번만 오는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는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이렇게 모입니다. 여러분이 화요일에, 또는 수요일에 성경에 다른 기도 집회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기적으로 또한 우리는 매 주일마다 이렇게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구절의 아름다운 점은 이것은 완료형이고 또한 수동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모였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여진 것입니다. 다른 존재가 그들을 모이도록 이끈 것입니다. 그들 외적인 다른 힘이 그들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다른 존재가 그들을 이렇게 모이게 하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자동차 시동을 걸고 차를 타고 왔겠죠. 여러분이 그 시동 키를 돌리고 여러분이 또한 엑셀을 밟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스스로 운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내가 왔다라고 여러분은 아마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왔지라고 말할 수 있겠죠. 내가 여기 올 거를 결정하고 왔어. 그 하지만 마태복음 18장 20절은 다른 누군가가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성령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보이지 않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역사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놀랄 것인데요. 그리고 이제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봐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자리에 자주 빠지는 그 성도님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그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을 그들이 막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자신의 사업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직장 일들이 우리를 너무 다 힘을 빼버려가지고, 그걸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다음번에 이제 두통을 앓게 될 때에, 허리가 아플 때에, 아주 작은 통증도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열이 날 것 같은데 해서 집회에 안 오는 분도 있습니다. 나는 내일 집에 갈 수 없어. 왜냐하면은 열이 내일 날 것 같단 말이야. 그것은 이제 열을 예언할 수 있는 선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다음번에 그 집회에 못 오게 될 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레이시아에서 어떤 형제님들이 '그분께로 모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지역교회의 집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 우리가 그분께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에 모입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거기서 사도바울이 그분 앞에 모이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왜 그때 우리는 그분 앞에 모이게 됩니까? 우리는 휴거 때 그분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분의 이름에 모입니다. 그분의 이름에 모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선 첫 번째로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분께서 그 육체로 이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너가 내 대신 내 이름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다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실제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자기 대신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으로'라는 것은 그분이 육체적으로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주 예수께서 육체로 이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이름에 모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이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그런데 바로 그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분의 영적인 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임재라고 해서 이것이 그분의 임재를 상징한다든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이 이름에 모이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단지 그분이 육체적으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존귀케 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존귀케 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리안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제 과일의 제왕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먹지 않아보셨다면은 그것을 모를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가운데 있는 여기 한국 성도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 두리안을 맛보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 두리안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떤 분들은 두리안을 싫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그냥 그 두리안 냄새도 맡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강 형제님이 난 두리안을 싫어한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제 이제 강형제님의 이름을 위해서 어떠한 파티를 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 이름으로 아주 큰 파티를 열자. 그래서 이 파티는 강 형제님 이름으로 열리는 파티입니다. 거기서는 어떤 두리안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강 형제님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두리안을 그 자리에 낸다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만약에 그분의 이름과 모순되는 그런 것을 하고 있다면, 그분의 말씀과 모순되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이름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일 때에 그분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방식으로 모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존귀케 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지역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그리고 성도들이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 그것은 주님의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20절 초반부에 "두 세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제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데요. 이제 "두 세 사람이"라는 거기에 이제 비동사가 현재형 시제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성경이 이제 현재 시제를 말하고 있는 그 부분에서는, 그 현제 시제는 계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 2천 년이 흐르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것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비록 이 복잡한 헬라어 문법을 사용해서 이것을 말씀하시긴 하였지만, 이것은 이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오늘날, 2024년 오늘에도 이 동일한 말씀을 동일한 진리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2024년 또는 어떤 해라도 이 진해에 지역 모임이 이 동일한 원리를 따라 있을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때 시대에만 적용되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단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바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은 아직 십자가에 가시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곧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2천년 후에 그때도 "나는 그들 중에 있다" 그래서 여기에 이 몇 개의 작은 적은 수의 단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분이 죽으실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사 세세토록 있을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주님께서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에서도 주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됐는데요. 이제 5분 안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5분을 달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제 여기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도 이제 우리 말로는 "모인 곳에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인 곳, 이것은 이제 실질적인 어떤 지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에 모인 곳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물리적인 어떤 장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빌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빌딩 안에서 모일 수 있죠. 저는 이제 kk 모임에서 자주 젊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만약에 이 홀이 불타서 없어진다면 우리가 그다음 주에 이 자리에 또 모였을 때, 그런데 여기 홀 옆에 옆에 농구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농구장에서도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상을 놓고 떡과 잔을 놓고 모일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는 동일하게 합법적인 모임 장소입니다. 당연히 거기도 합법적인 모임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건물에 이 모임이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한 장소에 모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 이제 까다로운 문제가 있는데요. 이 제가 이것을 말하면 여러분이 저를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말하고 제가 이제 도망가야 될지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이제 코비드 상황을 모두 겪었습니다. 그 코로나가 터졌을 때 온라인 미팅이 많이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라인 미팅을 한 다음에, 이렇게 하는 게 너무 편한데 하고 그 이상 모이지 못하는 데도 있습니다. 위에는 서츠와 넥타이를 매고 밑에는 잠옷을 입고 그냥 보이는 데만 잘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라인으로 모였을 때 그것은 지역 모임 집회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마태복음 18장 20절을 가지고 이렇게 판단해 보겠습니다.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그 온라인 집회를 위해서 모두 다 로그인을 합니다. 그 인터넷 선으로 연결된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아멘하고 기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이제 그 온라인 집회에서 '그 곳'은 어디가 됩니까? 주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 것입니까? 그 순간에는 우리 주님께서 그 인터넷 선 가운데 계시단 말입니까? 거기가 바로 그 곳입니까? 그래서 이 '곳'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물리적인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 곳이라는 것은 그리고 성도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성도들이 모인 것처럼 모여 있는 그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장소에 모이는 것입니다.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인 곳에, 그들 중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보통 가운데 자리는 의장이 앉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장을 둘러싸 앉게 됩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앉은 사람이 그 모인 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 모임 가운데 더 중요한 분은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높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임재를 우리가 인식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께 높은 곳을 내어드리는,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곳이 바로 지역교회입니다. 그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곳이 지역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가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정말로 이 지역교회와 같은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곳이 바로 지역교회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