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4일 일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다윗의 생애08_다윗의 회복과 사울의 죽음 >
오늘은 마지막 날입니다. 사무엘상 30장을 보겠습니다.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로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30:1-6, 개역한글)
저희들은 어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향해 총 공격을 하려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일으켰고 아벡에 모여서 모든 군대가 거기서 시작해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벡은 에브라임과 단 지파 사이에 있는 도성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블레셋 지경의 가장 북쪽에 있었던 도시 입니다.
거기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총 집결지였고 출발지 였습니다.
그들이 북으로 올라가서 수넴까지 올라가 접전을 하게 됩니다.
어제 저희는 다윗이 아기스의 명대로 블레셋과 함께 함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서 칼을 들어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는데 블레셋의 방백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전쟁 도중에 자신들을 배반할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것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전략적인 계산과 지혜를 동원해서 내린 결론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다윗을 보호하사 그가 결국에는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보존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30장에 보면 그들은 떠나서 남방의 시글락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발견한 것은 시글락이 완전히 불타버린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자리를 비웠을 때 시글락을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저희는 16개월동안 다윗이 시글락에 거하면서 유다 남방지역의 다른 족속들을 찾아가서 남녀노소를 다 죽이고 전리품을 얻어 그 상당한 것을 아기스에게 갔다 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 때문에 아기스는 다윗이 선하고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장관들에게 다윗을 추천하고 천거한 것을 보게됩니다.
시글락에서 다윗이 대표적으로 격파했던 종족이 아말렉이었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돌아왔을 때, 아말렉이 시글락을 공격하고 불태우고 거기있는 모든 남녀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삼상30:2, 개역한글)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아벡에 올라 갔을 때, 시글락에는 여자들과 자식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글락이 아말렉이 공격했는데 하나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이 보복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그와같이 했을까요? 우리는 이와같은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시는 손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 성은 불탔고 그의 처자들은 다 사로잡혀 갔습니다.
16개월동안 그가 이스라엘을 떠나있던 것이 그의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교제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부인할것도 없고 의심할 바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했던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은-사울에 쫓기고 그와 함께 했던 육백명과 처자들을 데리고 도망하는 것- 그의 마음속으로 블레셋으로 도망해야 겠다고 결정하게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의 양심은, 신앙은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블레셋 방백들이 "당신은 이 전쟁에 동참할수 없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다윗은 어쩌면 그 마음속에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행진해서 피곤함 가운데 돌아왔을 때, 그곳이 불타는 것을 목격하자, 그의 속사람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불신 가운데 생활을 했는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저희는 30장 말씀을 읽게 될 때, 다윗의 연약과 실패를 보게 됩니다.
저희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다윗을 비판하게 될것입니다. 저희는 다윗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않은 사람으로서 쉽게 이사람을 속가락질 하거나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영으로 이 말씀을 본다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연약을 이해합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와같은 어려움 속에서 장시간 견디어 온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다윗의 마음의 모든것들을 영의 아버지로서 이해하시고 그의 여러가지 연약과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저희들이 믿는 사람으로서 많은 연약과 부족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수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과 가능성을 생각할때, 이 당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은혜와 긍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삼상30:5, 개역한글)
여기 다윗의 두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저희는 27장에서 다윗이 블레셋으로 가려고 결정한 이후 아기스에게로 나아갔다는 말씀 전에 그의 두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이전에 읽는 말씀에는 처자들이 다 잡혀갔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또 다윗의 두 아내를 언급할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말씀을 일부러 기록하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한 이 처사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았다는것을 기록해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광경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삼상30:4, 개역한글)
다윗은 용사이고 다윗과 함께했던 육백명의 사람들도 다 용사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 가장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과 자식들입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시글락으로 돌아왔을때, 불타는 집, 화염과 연기와 모든것을 보았을 때, 아내와 자식들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가장 견딜수 없는 것은 그의 처자들이 죽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울 기력이 없을 정도까지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남편의 마음이고 아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운 후에 육백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30:6, 개역한글)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이 기간은 그렇게 오랜 기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시글락이 불타는것을 발견하고 슬퍼서 울고 다윗을 돌로 치자고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겠습니까? 이 짧은 기간동안 다윗의 마음속에 어떠한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살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마음이 기쁩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이유, 저런 불신, 연약, 실수로 인해서 주님을 따라가야 할만큼 따라가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부담과 어려움과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음을 나 자신이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나 자신이 주님을 따를만큼 따랐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게 될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 마음이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반대가 있어도, 핍박이 있어도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때만 우리는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일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 육백명의 사람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할 때 한글성경은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군급'이라는 단어는 궁색하고 급하다는 말입니다. 자기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것을 '군'이라고 말합니다. '급'이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급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표현으로는 말로할수 없이 깊은 절망속에, 실의속에 빠져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인도자로서 군급했습니다.
그는 인도자로서 육백명의 용사와 그들의 처자들, 그의 처자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 전 민족을 인도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아직 왕으로 있음으로 그가 쫓겨다닐때에 하나님께서는 작음 샘플을 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가족과 가족들을 이끄는 육백명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왕이 되기전에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기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기회입니다. 그는 인도자로서 이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다는 자책속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죄송함에 빠졌을 것입니다.
16개월전에 그가 블레셋으로 오기로 결정할 때부터 자기 양심이 말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유익과 편리함을 얻었지만 이것은 자기 양심을 희생해서 온것입니다.
그는 육백명의 군사들을 오도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징계속에 있게 되었고 아내와 그의 자식들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비난속에서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한마음이 되어서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이와같은 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의 생애 중에 가장 어둡고 어두운 순간이 있다면, 아마 시글락의 이때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들이 돌을 들면 순식간에 돌은 날라올 것입니다. 불과 몇초, 짧은 기간 사이에 그는 결정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홀로 서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와 같이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이 짧은 순간에 그는 자기 죄값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어떻게 지불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모든 어려운 환경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육백명 모두에게 아내가 있었다면 그 아내가 전부 살았는지, 아니면 얼마나 죽었는지, 아니면 모두가 몰살했는지, 전체가 다 불확실성 속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었고 그 모든 고통 까지도 다윗은 홀로 어깨위에 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도자입니다.
다윗은 실패한 순간에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짧은 순간에 이 모든 재난과 절망과 어두움 속에서 그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역대상 말씀을 보면 이 당시의 다윗이 아기스의 명으로 아벡으로 가려고 하던 때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블레셋 장군들이 거절하여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될 때 그 당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 가서 사울을 치려 할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두어 사람이 다윗에게 돌아왔으나 다윗등이 블레셋 사람을 돕지 못하였음은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서로 의논하고 보내며 이르기를 저가 그 주 사울에게로 돌아가리니 우리 머리가 위태할까 하노라 함이라 (대상12:19, 개역한글)
아벡은 바로 므낫세 지경에 변경에 있는 도시입니다. 다윗이 여기에 집결했을 때, 다윗에게 투항한 므낫세 사람 몇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거절 당하고 아벡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올때, 므낫세 지파에서 일곱명의 천부장이 다윗에게 투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 다윗이 시글락으로 갈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그에게로 돌아온 자는 아드나와 요사밧과 여디아엘과 미가엘과 요사밧과 엘리후와 실르대니 다 므낫세의 천부장이라
21 이 무리가 다윗을 도와 적당을 쳤으니 저희는 다 큰 용사요 군대 장관이 됨이었더라
22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대상12:20-22, 개역한글)
제가 이 말씀에서 상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글락에서 아벡으로 가고자 할 때, 므낫세에서 두어사람이 다윗에게 왔고 또 아벡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올때에 일곱명의 천부장이 다윗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육백명의 사람들이 시글락에 도착해서 시글락이 불타는 것을 본 순간에는 다윗과 육백명의 사람 뿐 아니라 적어도 일곱명의 므낫세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처자가 끌려가거나 시글락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육백명에 가담해서 다윗을 돌로 쳐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사무엘상 30장 6절 말씀에서 돌로 치려하는 바로 그 순간 다윗이 꼭 홀로인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윗을 지지해 줄수 있는 사람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 혼자였습니다.
영적으로 혼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를 지원해주거나 그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다윗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그의 양심이 깨끗해 질수 없습니다.
육백명이 다윗에게 돌을 들려고 하는 순간에, 므낫세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16개월간 다윗은 자기의 의지대로 일들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다 무너져 버렸고 이제 불타서 재가 되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졌습니다. 때로는 아기스를 속이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해올때도 그의 한쪽 양심에서는 옳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이 일은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속에 16개월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 일의 결국은 시글락이 다 불타버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16개월동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짧은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갈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실책과 악함과 연약함과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16개월간의 어둠속에서의 일들을 그는 그냥 밀고 갔지만 더이상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한것입니다.
우리가 돌이키는 순간, 회복되는 순간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주님 앞에서 빛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저희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합당치 못한 것들을 우리가 계속해서 밀고 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자백하고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주님앞에 나왔을 때, 그는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는 나른해졌고 일어설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모임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진실한 순간이 올 때 우리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치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저것을 하면서 여러가지 변명과 사람 앞에 이런저런 이유를 열거 해야만 내 마음에 안심이 됩니까? 그렇게 하면 평화같은것이 올것 같아서 자꾸 나에게 변명합니다.
왜입니까? 주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것, 불신, 순종치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력을 잃고 주님의 일은 제대로 되어지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의 결과를 우리가 거둬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16개월의 일도 그냥 적당히 넘어갈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사실인 것은 바로 이순간 다윗이 주님앞에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홀로 서서 주님께 말씀드렸을때 하나님께서 화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 그것은 바로 주님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십니다.
이제 다윗은 즉시 제사장을 부릅니다.
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삼상30:7-8, 개역한글)
우리는 다윗이 전에 그일라에 갈때도 하나님께 가야 하는지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앞에 묻는다고 하는것은 우리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끔가끔 되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항상 주님앞에 묻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적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의 생활인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바른결정을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고 묻고 들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덤으로 더 대답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군급하고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쫓아가면 미치겠다> 그리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다윗은 아말렉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미친다 해도 거기 갔을 때, 처자들을 도로 찾지 못한다면 모든것은 여전히 참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훈련하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잔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세우기 위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위로하는 생각 속에서 징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아버지가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10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삼상30:9-10, 개역한글)
브솔시내를 건너야 했습니다. 거기까지 갔을 때 이백명은 너무 피곤해서 시내를 건널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남아야 했던 이백명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처자가 끌려갔는데 자기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백명이 아말렉을 쫓아가는데 길을 가다가 쓰러진 애굽사람을 만납니다.
다윗은 빨리가서 처자를 구출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발견한 애굽사람을 세우고 물과 먹을것을 주는것은 얼마나 시간낭비라고 생각 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이 사람을 그냥 두고 갈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11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우고
12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낮 사흘, 밤 사흘을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가로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삼상30:11-13, 개역한글)
아말렉 주인과 다윗의 차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종의 주인은 쓸데 없으면 버리고 가버립니다. 이것이 사단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단을 우리가 아무리 잘 섬겨도 사단은 우리를 잘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살아있을때는 써먹고 쓸모없으면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당치 않고 합당치도 않은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우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위대한 상급이 있습니다.
이 애굽사람은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그가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사를 알고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에게 분명히 <미치리라> <찾으리라> 하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다윗은 몰랐지만 길에 애굽사람이 쓰러져 있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다윗의 가이드로서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습니다.
16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17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삼상30:16-17, 개역한글)
다윗이 언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부터 공격을 시작했다는 말을 보면, 그 전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아말렉이 취하고 놀도록, 군사력이 가장 취약해질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배울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전략이 중요하고 에너지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에너지, 무기를 에베소서 6장에서 말씀합니다.
적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쓰러뜨려야 합니다.
다윗은 이와같은 부분에서 성공적으로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아말렉을 격파했습니다.
18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19 그들의 탈취하였던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20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삼상30:18-20, 개역한글)
<아무것도 잃은것이 없었더라>
이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과정에서 다윗을 징계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우리가 징계를 받는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5-6, 개역한글)
누구를 징계 하나요? 그 아들을 징계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징계합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받을 때 두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입니다. 경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징계를 멸시한다면 아무 도움도 얻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한다면 여기서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10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0-11,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성품을 영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련화 시키는 것입니다. 육에 쩔어있던 우리의 세속적이고 더러운 성품을 제거하시고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바꾸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의 영적인 삶이 부요하도록 만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그가 소년부터 30세에 보좌에 오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징계라는 것은 당시에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징계가 즐거워 보이고 아주 쉽고 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첫째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쉽게 젖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향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매 순간 주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주님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주님앞에 가서 아뢰지 않습니다. 주님께 묻지 않습니다. 내 생각대로 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속에 주님에 대한 의존의 영을 주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을 너무나 고귀하게 여기게 하십니다.
초심자들은 주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안다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 모든것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바라보고 붇 좆고 나가게 하는것이 징계의 목적입니다.
징계를 받게 될 때, 우리는 다른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더욱 더 불쌍히 여기고 다른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만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개발됩니다.
영적인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느끼고 그것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찬양하고 그래서 주변에 은혜를 베풀수 있게 되고 사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할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받은 징계는 시글락에서의 사건이었습니다.
16개월의 그의 모든 행보에서 있었던 부조리가 정산되고 청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시글락의 경험을 생각할 때 다윗은 오만해지거나 교만해 질수 없습니다.
다윗은 더욱 더 다른사람을 이해할만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어떻게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진퇴양난 속에서 구원해 주셨는가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계하시면서도 그의 처자를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은 이후의 삶동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인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온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삼상30:21, 개역한글)
다윗은 처음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자도 다 회복시키시고 또한 그들이 잃어버린 물건뿐이 아니라 아말렉이 가지고 있던 모든 보화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 어떠한 은혜입니까?
그렇게 다윗이 모든것을 가지고 돌아올 때 다윗의 무리들 중 가운데 비류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섞인 무리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삼상30:22, 개역한글)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30:23, 개역한글)
다윗의 마음속에 이해하고 있는 전리품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우리가 가서 얻은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우리가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주고 그렇게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전했던, 참전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에게 전리품을 분배합니다. 이것은 원칙이 됩니다.
다윗은 징계의 열매를 마음속에 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의 평강의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을 나눌때에 하나님이 주신것처럼 나누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인도함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을 봅니다. 이 공평은 어디서 옵니까?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공의로우심, 자비하심, 은혜, 백성들을 인도할 때 필요한 이 모든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거기에 능력이 있고 거기에 힘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잘 인도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불만을 잘 잠재운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도자는 대행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대행권세자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도력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가로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삼상30:26, 개역한글)
다윗은 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처자들을 하나도 잃지않고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가 감히 내 능력으로 이렇게 했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같은 자가 받을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감사하는 마음속에서 다윗은 유다의 여러 도성에 선물을 보냅니다.
지난번 23장에서 십 사람들은 다윗의 형제, 유다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있는곳을 보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일라 사람들도 자기들을 구원해준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배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상 그것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30장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니게 될때 직,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에서는 거절된 왕입니다. 이제 사무엘하에서는 영접된 왕이 됩니다.
그리고 이 거절된 왕의 시대에 다윗을 따라다녔던 육백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아직 보좌에 오르기 전에 그를 따랐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보좌에 오르기 전에 두려움과 가난과 고통속에 지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 사람들은 다윗에게 충성했습니다.
나중에 사무엘하에 가서 보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누가 다윗의 참모가 되었습니까?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누가 그 영광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당연히 이 용사들입니다. 그들이 다윗이 어려울 때 함께 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은 거절된 왕이심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의 능욕을 좇아 영문밖으로 함께 나가자고 히브리 저자는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섬기는 주님은 위대한 왕입니다. 그분은 장차 왕으로 이세상에 오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재, 저희들은 거절받으시는 주님, 멸시 당하시는 주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멸시와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능욕을 우리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능욕을 받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헌신은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능욕을 우리가 당하는것은 위대한 영광의 씨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게 될 때, 때가 되면 그것을 반드시 거두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아니고 소망입니다.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상에서 다윗과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다윗을 지원해 줬던 사람들의 수고와 우정과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사람들은 이제 보답을 받습니다.
다윗은 이제 왕이 되기도 전에 그가 받은 전리품을 여러 도성의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합당한 마음이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게 될 때, 장차 얻게될 위대한 영광은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가지 불이익이나 핍박이나 거절이나 조롱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는 무지함과 비루함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위대하면 따라갑니까? 그것은 세상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거절 당하셨고, 멸시를 받으시고 손가락질을 받으셨고 세상으로 버림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섬기지만 그분의 가치와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마음이 매료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거절 당하던 시대에 다윗을 섬겼던 사람들의 마음처럼 우리도 거절 당하신 우리 주님을 이 시대에 섬겨야 겠습니다.
어떻게 거절 당하신 주님을 섬길수 있나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때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31장을 보시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삼상31:1, 개역한글)
31장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입니다.
사울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날 저녁 사무엘로부터 "내일 너와 네 아들은 나와 함께 있을것이다" 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 나갔습니다. 전쟁에서 그는 심각하게 패하고 죽음을 맛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윗도 이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이며, 그가 전쟁이나 혹 다른것으로 죽을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사울의 마지막 순간을 보게 됩니다.
길보아산은 이스르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합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삼상31:2-3, 개역한글)
이때로부터 60년 전에 삼손이 사사로써 블레셋을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블레셋 여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세 여인들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드릴라와의 관계에서 그는 마침내 체포됩니다. 그리고 눈이 뽑힙니다. 삼손은 죽기전에 많은 고문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체포된다면 블레셋이 엄청난 고문과 조롱을 할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엔돌의 무당에 찾아갈 때부터 공포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공포는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옆에 병기든 자에게 사울이 요청합니다.
4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삼상31:4-5, 개역한글)
사실 이와같은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 아비멜렉이 전쟁을 합니다. 전쟁을 하는데 탑 위에서 어떤 여인이 멧돌짝을 던졌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멧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졌습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여인에 의해서 죽느니 차라리 네가 나를 죽이라"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프라이드 게임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것입니다. 죽는 그 처절한 순간에도 우리 마음에 있는 자만심, 교만, 오만은 벗을 수 없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찔러서 고문을 피하게 하라, 능욕을 피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옆에 있는 병기든 자가 전에 다윗이 말했던 '기름부은자를 죽일수 없다'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죽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러 집니다. 이것이 사울의 마지막입니다. 사울은 자살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살한 사람들이 몇사람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다윗의 고문관이었던 아히도벨이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고향에 돌아가서 자결합니다.
또 북방왕국의 시므리라는 사람이 구테타를 통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죽게되는 순간이 오자 그는 두려움으로 자결해버립니다.
또 신약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 중 한사람인 가룟유다가 주님을 팔고서 후회는 했지만 회개치 아니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 이러한 예가 몇사람 있습니다만, 가장 최초로 자결한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내가 스스로 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적지않게 벌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죽었을까요?
13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대상10:13-14, 개역한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습니다. 불순종이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그리고 순종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요.
이 대조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자기의 왕권을 빼앗기고 이제 그가 마지막에 가서는 처참한 죽음 가운데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요인입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세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만일 가볍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마음속에 두고 시시때때로 생각해야 할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별거 아니라고 속삭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 왕권을 빼앗기고 폐위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또 한가지는 그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두 제쳐버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고, 듣지 않고, 선지자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가 다 없애버렸던 무당에게 찾아갑니다.
무당을 통해서 무언가 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범죄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무당을 찾아갔다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입니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과의 대화의 채널을 계속해서 보존한다고 하는것은 말씀을 읽고 주님앞에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과정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마음속에 다시한번 세기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대상10:14, 개역한글)
오래전에 사울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 자체도 부인하고 보좌를 자기가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은 계속해서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사울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칼을 든다는 것임을, 엄위한 현실이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달랐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죽이려고 따라다녔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입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겨 집니다.
사단은 오래전에 그의 모든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도 그의 권세를 가지고 역사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자로, 그리고 환난기에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계속해서 역사하고 적그리스도 뒤에서 그를 받쳐주고 거짓 선지자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세상을 환난에 빠트리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우리에게 그림으로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사단은 패배했지만 그러나 그가 불못으로 들어가게 될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역사하게 될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31:5-6, 개역한글)
사울의 병기 든 자도 사울의 죽음을 보고 함께 자결했습니다.
그가 한 선택은 왕을 따라한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영향력을 다른 사람에게 끼칠까요, 아니면 악한 영향력을 다른사람에게 끼칠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언제나 마음에 생각하고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악한자가 악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하는것은 '소자에게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참으로 주님 앞에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우셔서 선한 본을 남겨야 합니다. 때때로 그렇지 못할 때에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 앞에 자백하게 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삼상31:7, 개역한글)
블레셋이 남부해안가에 있었는데 위로 올라와 다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패하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검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복음의 위대한 신을 신고 싸워야 합니다.
복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사단의 화전을 막고 주님 앞에 깨어 기도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을 누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다 빼앗겼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삶속으로 이스라엘은 들어가 버렸습니다.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삼상31:8-10, 개역한글)
사울을 블레셋 사람들은 발견하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것을 블레셋 사방에 보내고 그와 아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박았습니다.
벧산은 길보아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단에서 매우 가깝습니다.
벧산은 대단히 중요한 도시로서 그곳에는 우상들이 가득했습니다.
거기에 사울의 시체를 성위에 못박아서 사람들에게 광고했습니다. 자기들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삼상31:11-13, 개역한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왕이 되었을 초기에 참단한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삼상11:1-3, 개역한글)
암몬사람들이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히고 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동편에는 블레셋이 강한 원수였습니다.
참으로 굴욕적인 일입니다. 힘이 없으면 이렇게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힘이 없다면 사단과 싸울때에 우리는 이와같은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우리는 타협하게 되고 하나님의 대의를 펼수 없게 됩니다.
나하스가 공격하고 위협할 때, 야베스 사람들이 공포에 빠졌습니다.
나하스는 얼마나 잔인한 사람입니까? 약조를 한다해도 야베스 사람들의 한쪽 눈을 다 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약조한 후에 혹시나 있을 반란이나 전쟁에 대비해서 야베스 사람들이 전쟁할 수 없도록 불구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4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7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삼상11:4-7, 개역한글)
그리고 이 사건을 누가 고합니까?
이 일은 사울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에 암몬이 와서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고 아무도 와서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이때 기름부은 왕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가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쟁에 나가서 야베스를 구합니다.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그의 생애 속에서 사울의 공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다 눈이 뽑혀야 할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후에 사울이 능력이 없을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골리앗이 누군가가 나와서 나와 겨루자고 했을 때 이스라엘은 또다시 공포에 빠졌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윗이 나와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죽었고 그 시체가 능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밤에 벧산에 가서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릅니다.
화장을 합니다. 왜 화장을 했을까요?
만일 그의 시체를 땅에 묻었다면, 블레셋이 그것을 알고 부관참시를 할 것입니다. 다시 꺼내 능욕했을것입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치릅니다. 사무엘상 31장 말씀은 사울의 죽음으로 그 내용이 끝납니다.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삼상31:13, 개역한글)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그가 비록 쫓겨난 왕이고 악한 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으로서의 위치에 예우와 존경을 표했습니다.
다윗을 생각할 때, 다윗은 거절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잘 묘사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가만히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입니다만, 사무엘상만을 봐도 그의 생애에서 여러가지 약점들이 보여집니다.
그런 약점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일까요?
그의 삶에 있어서 그의 약점이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분, 왕으로서의 위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거절 당하신 주님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사울이 왜 죽었는가 하는 이유를 보았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이 보시는 견제에서 사울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말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호13:11,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분노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둘때에 진노로 폐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같이 되기를 구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다 왕이 있는 우리는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저조해 졌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갔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말씀으로부터 이탈하고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불신속에 빠지면 우리의 모든 결정,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했던 것이 왕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떼를 쓰고 아우성 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분노하심으로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를 폐하게 될때 진노 가운데 폐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등극과 폐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정의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게 될 때, 떼를 씁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구하고 간청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파리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가 남아를 하나님께로부터 얻기 위해서 고뇌 가운데, 통곡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제사장이 없었던 시대 입니다. 성소는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던 시대에 슬픔을 가진 한나는 고통과 고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인도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아름다운 제사가 시작됩니다.
희생제물이 짖밟히던 이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도력이 나옵니다. 그것이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무엘상 마지막장을 마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봅니까?
이스라엘의 인도력의 부재입니다. 지금까지 왕이 아닌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하던 시대가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길보아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도력이 없어졌습니다.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를 생각하고 고통 가운데 통회하는 마음으로 울부짖으면 이제 누가 나타납니까?
다윗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입니다.
저희는 거절당한 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거절당한 왕이 보좌에 오르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훈련을 받는가를 보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수많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제련하시고 훈련하시고 그를 새롭게 만드시고 구비하셨습니다.
다윗이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도 다윗과 함께 고통 가운데서 동거동락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것은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신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이땅에 살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이 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의 개인의 삶에서 가정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모임을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할 때 위대한 간증을 드러냄으로, 진리의 복음을 드러 내는데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저희들의 찌끼를 없애고 저희들을 구비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미없이 막연히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게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그것을 하루하루 실천해 나가고 주님의 의를 이루고 그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기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일과 같이 점검하고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훈련과 징계로 우리를 만들어 가실때에 우리는 주님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계속해서 맛보고 주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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