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복음 말씀

복음 : 죄인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 이명인bro

박이레 2024. 4. 18. 15:56

< 복음 :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 이명인 형제님

안녕하세요. 어제 말씀은 요한복음 8장에 가는 중에 잡힌 여인을 통해서 그 간음 중에 잡힌 여인만 죄인이 아니라 그를 고소하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창세기 1장 31절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섯째 날 짐승들과 사람을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날들은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날만큼은 "심이 좋았더라" 베리굿, 하셨습니다. 무엇을 만드셨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이날 특별히 다른 날과 다르게 심이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짐승들과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2장에서 다시금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2:4).

이렇게 말씀하시고 1장의 내용을 2장에 다시 반복하시는데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대략 이러하니라" 이것은 요점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 출처 기원이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고 있는 뜻입니다. 2장 5절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처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라는 걸 알 수 있고요.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이때 아직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기 전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지금 6일 동안 창조하시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여섯째 날 사람을 만드셨다. 그전에는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줄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만들었다. 5일은 사람이 없었고 6일째 사람이 있었다. 6일 동안 창조하시는데 하나님이 온통 어디에 지금 신경을 쓰고 계시냐면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짐승이 아니고, 하늘과 땅 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그때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런데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그 후로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통 하나님의 생각은 지금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까 사람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셨다고요? "심히 좋았더라"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사람에게도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있죠.
언제 심히 좋으셨습니까? 내 인생 중에 가장 좋았을 때가 언제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내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예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우리 큰딸, 또는 우리 큰아들, 낳았을 때 그때가 제일 좋았다, 아니면요. 우리 막내 낳았을 때, 아니면요. 딸 아니고 아들 낳았을 때, 그때 심히 좋았다.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좋았다라는 그 사건들 중에 자녀를 낳을 때가 좋지 않으셨나요? 맞나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만들 때 힘이 좋았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했는데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는 사람이 없던 때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사람이 있는 때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태초부터의 시간은 사람이 있는 때와 사람이 없는 때로 이렇게 나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시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낳았을 때처럼. 그런데 그 자식은 사실은요. 뱃속에 자녀를 10개월 동안 잉태하고 있을 때 아들인지 딸인지도 몰라요. 낳아봐야 알아요. 요즘에 의학이 발달돼서 속을 이렇게 들여다보죠. 부인과 가면 이렇게 들여다 본다며요. 그리고 몇 개월 되면은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알려주나요? 그때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우리를 창세 전부터 아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이때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다시 얘기하면 사람을 창조하기 전의 시대와 사람을 창조한 후의 시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온 우주의 중심은 사람인가요? 공산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뇌시키는 것처럼 신은 없다. 온 우주의 물질의 중심은 사람인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온 만물 가운데 으뜸 대시고 뛰어나시고 존귀하시고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홀로 하나님 한 분이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피조물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된 이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사람에게 있다. 시간을 둘로 나눈다면 사람이 창조되기 전과 사람이 창조된 후로 나눈다.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이, 그다음에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생기가 히브리어로는 '샤이 네샤마' '살아있는' 또는 '호흡' 또는 '코김', '숨', '목숨', 이렇게도 번역이 되고요. '영혼'이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혼을 영을 사람에게 넣어주셨어요. 그래서 짐승과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지만,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이 넣어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짐승과 사람은 다릅니다. 진화 이론이 잘못된 게 여기 이 부분인 것입니다. 사람은요 나라 인종, 언어, 세대를 막론하고 전부 나름대로의 자신의 신을 섬깁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섬겨요. 어떤 사람들은 나무의, 산의, 바다의 신들을 섬겨요. 뭔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희 가정에 이런 어려움과 병을 주실 수 있습니까? 안 믿는 사람도 이렇게 찾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 영혼의 출처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죽었어요." 이러면 좀 좀 지혜롭지 못하다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또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냐면 부모님 어디 계신가요? "천국에 계셔요."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 안 하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은 지옥에 가셨어요." 안 믿는 사람들이요, 하나님 안 믿는 사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고 다 뭐라고 그러냐면 천국에 가셨어요. 하늘나라 가셨어요. 이렇게 얘기해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영혼의 출처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고 있어요. 짐승은 모릅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 교제하려고 하고, 언어를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하고, 어떤 짐승이 이런 짐승이 있습니까? 아무리 지혜로운 원숭이나, 침팬치나, 돌고래나, 까마귀나, 아무리 아이큐가 높아도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시는 것이죠. 까마귀 새끼가 부르짖으면 먹을 것이 없구나 하고 먹을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사람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교제하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사람밖에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사람에게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런데 이 존귀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합니다. 2장 17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은 조물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사람은 만족하고 기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주셨어요. 어떻게 예배하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리냐면, "신령과 진정으로" 이 진정이 진리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사람의 생각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드린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생각대로 들었죠. 땅의 소산으로 들였죠.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드렸을 때 하나님이 흠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려야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한 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이 법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자유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려고 했던 교만한 사단의 꼬임에 따라서 배의 말을 듣고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성경 말씀 다시 한 번 보면요. 창세기 2장 2절에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6일 동안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 6일 동안 창조하시고,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죠. 우리가 토요일이라고 하는 그날입니다. '주말'이라고 하는 일곱 번째 날입니다. 일주일의 시작은 일요일, 마지막 날은 토요일, 그날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한 이후로 더는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까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한 후에 한 번도 안식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기죠. 아니 하나님께서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모세에게 주셨는데,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아니 왜 하나님은 안 지키시죠?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하나님 법이니까, 신약에도 지켜야 되는 거 아닌가요?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분명하게 알면 하나님이 왜 안식일에 쉬지 못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왜 안식일에 반드시 쉬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말이죠. 구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안식일에 대해서, 출애굽기 찾지 않겠습니다만 23장 12절에,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죠. "6일 동안 쉬고 하루를 일하라" 그러면 안 되죠. 우리는 성실하게 일해야 됩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됩니다. 요즘에는 5일 일하고 이틀 쉰다며요. 많이 쉬네요. 사장님과 직원의 생각이 다르겠습니다만, 왜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날은 쉬라고 하셨는지 이런 이유를 말씀하셨어요.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이런 법이 없다면 아마 주인은 종에게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너는 쉬지 말고 가서 일해. 뜨거운 뙤악볕 아래서 땀 흘리면서 일해. 너를 먹여주는 것만 해도 어딘데!" 7일 동안 일을 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왜 안식일을 주셨는지를 알 수 있어요. 사람이 쉬어야 되기 때문에, 악한 주인들은 종들을 7일 동안 부려먹고 싶거든요. 법에 없으면 아마 5월 5일 날도 안 쉬게 할 걸요. 주인들은, 법정 공휴일로 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재정하셨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안식할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했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 것이 이치 아닌가요? 의사 선생님은 안 죽나요? 다 죽습니다. 권력자는 안 죽나요? 진시황제도 죽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죽은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죄인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약에 보면, 양을 잃었는데 누가 양을 찾냐 하면 양이 목자를 찾는 게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는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식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누가 찾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부모가 찾아요. 어떤 부모는 자식을 찾는데 온 생애를 다해서 찾는 부모들이 있더라고요. 우리 주변에 참 슬픈 일이죠. 자식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몇십 년 전에 찾아다녔는데 못 찾는 부모들이 있더라고요. 자식 얘기만 하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르, 우리가 그런 부모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범죄 하였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을 그렇게 끔찍히 사랑하시고 생각하셨는데, 이제 사람이 범죄한 후에 3장 7절에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부끄러운 거예요. 죄를 범하니까 자기가 벌거 벗은 게 부끄러워졌어요. 그래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였다. 저희 농장에 무화과가 있거든요. 아마 이때 무화과 잎은 더 컸던 것 같아요. 참 온도도 적당하고, 또 일조량도 좋고, 그래서 사람도 오래 살지만 이런 나무들도 아주 그냥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렸던 것 같아요. 잎이 컸어요. 그래서 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어요.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3장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식을 찾는 것처럼 네가 어디 있느냐? 저 청주에 있다고 누가 본 사람이 있다고 전단지를 보고 소식이 오면 그 밤이라도 내려간답니다. 내 자식일까? 가서 보면 아니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이상의 마음입니다. 찾도록 찾으시는 분입니다. 아담을 부르셨어요. 그런데 그때 아담은 어디 있었죠?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숨어 있어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죠. 하나님이 복음으로 다가오시면 거절해요. 하나님이 사랑의 목소리로 '누구야' 하고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부르시는데 난 듣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숨어버려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 마음을 모르는 거예요.
어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제가 그랬어요. 저희 집이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빚을 많이 지시고 그래서 제가 군대도 빨리 지원해서 갔어요. 이 빚쟁이로 쫓겨다니는 이 소굴에서 내가 벗어나고 싶다. 한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 그래서 군대를 빨리 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제 신발을 사주는데 다른 애들은요. 옛날에 나이키, 프로스펙스, 이렇게 사줘요. 저는 시장 가가지고 제일 싼 거 골라봐. 내가 사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서 막 "나 싫어! 안 싫을 거예요. 나 이런 거 안 살 거예요!" 그리고 집으로 혼자 막 가버렸어요.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부모 마음을 못 헤아리는 거죠. 제가 그랬어요. 못된 자식이죠.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계속 부르시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나와라, 아담아. 그러지 말고 하나님 말씀 들으러 나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게 첫 번째예요. 그래야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내가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죠. 그래야 회개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는지 알게 되죠. 그리고 어떻게 해야 천국 가는지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나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 나오셨으니 참 잘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셔요. 아담을 불렀더니 아담이 "숨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아니 무화과 잎을 엮어서 가렸는데 왜 숨어 있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앞에서 첫 번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게 원죄예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예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생에 지은 죄들이 있는 거예요. 어제 말씀드린 대로 형제를 노하거나, 또는 욕하거나, 저주하는 것, 그 지옥불에 들어가는 죄라고 하나님 말씀하셨잖아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면 살인죄와 똑같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우리가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죄인이에요. 그런데 이 죄가 어떻게 나타나냐면 속으로 처음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 부리고, 짜증 나고, 그리고 그게 폭발하면 살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랬죠. 아담이 이것을 안 거예요. "제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부끄러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요. 죄는 미워하셔요. 그 죄 때문에 사람이 심판받게 됐어요.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죄인이라는 증거가 우리 삶 가운데 계속 나타나요. 화로 나타나고, 욕심으로 나타나고, 미움으로 나타나고, 이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 볼 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욥기 2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5-6).

우리가 밤하늘의 달을 볼 때 정말 깨끗하죠. 옛날 어떤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섬긴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때인가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간 적이 있어요. 달에 가보니까 깨끗질 않아요. 직접 거기 가보니까 황폐해요. 사막보다 더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낮에는 뭐 100 몇십도 된대요. 또 그 반대쪽은 항상 밤인데 거기는 영하 100 몇십도 된대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막한 곳이에요. 오히려 지구에 있는 사막이 더 나아요.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달이 명랑치 못하다" 밝지 못하다. 러시아에서는 그 단어가 밝지 않다라는 단어도 있지만 '빛을 내지 않는다' 이런 뜻도 있어요. 실제 가보니까 빛이 없어요. 자기 빛이 없어요. 그리고 삭막해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밤의 달이 빛나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죠. 그래서 보름달에는 누구나 하늘을 이렇게 한참 쳐다보잖아요. "와- 아름답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깨끗질 않은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죄인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을 계속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 앞으로 나와라. 네가 죄인인 것 안다. 내 앞으로 나와라."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이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해 입혀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해주신 것, 세 가지를 오늘 배워보기를 원하는데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의식주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식주를 주셨어요. 첫 번째 의복입니다. 아담에게 창세기 3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여기에서 가죽 옷을 입히셨다. 이게 원어에서 보면 복수로 되어 있어요. 이 아담과 하와는 두 사람이죠. 그러면 두 사람에게 옷을 입히려면 예를 들어서 여기는 양이라고 나와 있지 않지만 정결한 짐승일 거예요. 그러면은 몇 마리 양이 있어야 두 사람을 입힐 수 있을까요? 최소한 두 마리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양이.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로 아담의 자녀들이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요. 그러면은 뭐가 필요하죠? 더 가죽 옷이 필요해요. 그래서 아벨이 양을 키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죽 옷을 입히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고기는 번제로 들이고 피는 이제 생명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 이때는 노아 방주 홍수 이전에는 동물을 짐승을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식물만 먹으라고 하셨어요. 노아 방주 홍수 이후에 사람들에게 동물 소고기, 닭고기, 양고기를 먹게 해 주신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이제 땅에 쏟고, 또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쏟게 돼 있죠. 그리고 고기는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었죠. 이게 아벨의 제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젠가 하면, 두 번째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 이제 먹을 걸 주셨는데 창세기 9장 3절입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 9:3-4).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는 먹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정결한 짐승들 예를 들면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비둘기 고기 정결한 짐승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그 피를 쏟고 그리고 그 고기를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찾지 않고 읽어드릴게요. 히브리서 2장 14절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얼마나 뛰어나신가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중에 그분이 그렇게 뛰어나신 분인데, 혈육을 입고 이 땅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혈' 피를 가지고 육체를 가지고 오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체가 없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육체를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분은 피와 육체를 가지고 오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주님이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아니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죠. 주님을 '먹는다'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노아의 방주 이후에 하나님이 짐승을 이제 비로소 먹으라고 하셨죠. 왜 그전에는 짐승을 먹으라는 말씀이 없으셨는데 왜 노아 시대 이후에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깊이 있게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고기나 먹으면 안 돼요. 율법을 통해서 모세 율법을 통해서 정결한 짐승의 고기만 먹을 수 있어요.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어요. 아무 종교나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정하다, 하는 것만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고기를 먹게 하십니다. 그런데 피는 반드시 땅에 흘려야 됩니다. 그래서 짐승에게 찢겨 죽은 고기는 못 먹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그 몸속에 피가 아직 엉겨 있었기 때문이예요. 유대인들에게는 못 먹고 이방인에게 팔 수 있어요.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살아있을 때 피를 땅에 흘려야 됩니다. 또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로 드리든가요. 이것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우리들에게 영적 만나, 영적 양식, 영적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정결한 짐승을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모세의 율법에서 아무 고기나 먹으면 안 된다. 정결한 짐승만 먹어야 된다. 흠 없고 점 없는 분만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군가요? 혈육을 입고 오신 예수님. 그런데 성경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죽은 자 가운데 3일 만에 부활하셨죠.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의도적으로 주님이 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으로 들어오실 때는 혈육을 입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너희 보는 바와 같이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 나를 만져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의미는 십자가에서 피를 다 흘리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잠시 뒤에 끝에 한 번 다시 한번 살펴보고요.
세 번째, 처음에 의복, 그다음에 '식' 먹는 것, 세 번째 '집'입니다. 우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5절부터 7절입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5-7).

그리고 13절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출애굽할 때 달력이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출애굽하는 달을 1월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이때는 1월 14일 해질 때입니다. 처음에 양을 1월 10일에 양을 이제 점 없고 흠 없는 것을 깨끗한 것을 이제 준비해요. 그랬다가 그 유월절 해질 때에 양을 잡습니다. 그러면 피를 받죠.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이며, 받아진 피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은 바로 피를 바르는 것이고 문에 문설주와 인방에 그리고 피를 뿌리는 거예요. 이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피뿌림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게 믿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영접했다. 예수님이 저의 구원자입니다. 저의 죄로 말미암아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내 죗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핏값으로 지불하신, 죽으심으로 내 죄의 형벌을 받으신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이렇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저를 죄악 가운데서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셨으니 저의 주인이십니다. 제가 평생 영원토록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이날이 이집트로부터, 애굽으로부터 구원받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만히 있네요.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하고 가만히 있어야 되죠? 그 양의 피를 받았어요. 그리고 피 흘린 양고기를 집 안에서 먹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피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이거의 모형이에요, 그림자예요. 그리고 밖에는 양의 피가 발려져 있어요. 심판의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피가 없는 집을 심판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피가 없다면 이미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망의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지옥 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하죠? 최종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 못하는 법칙들이 많이 있어요. 대기권 안에는 중력의 법칙이 미치고요. 대기권 바깥으로 지나니까 사람이 둥둥둥 떠다녀요. 산소가 없으면 죽겠습니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칙들이 있어요. 이 세상에는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창조하신 분이고, 보존하시는 분이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다면 지옥에 가지 않는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죗값을 지불하신 그 예수님을 먹는 것,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먹는 것, 다시 하면 영접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잖아요. 그 양을 1월 10일부터 14일 해질 때까지 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양이에요. 집에서 키운 양이에요. 이게 새끼 양입니다. 다 자라가지고 병든 양이면 좀 덜 불쌍할 텐데 내가 부르면 쪼르르 뛰어와요. 그리고 나한테 폭 안겨요. 내가 안으면 어떻게 아는지 가만히 교감을 해요. 그런데 그 양을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아픈 것이죠. 그런데 그 양을 보니까 점이 없어요. 그리고 흠도 없어요. 이분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모형입니다. 그분의 피가 갈보리에서, 십자가에서 흘려졌습니다. 땅으로 다 쏟아졌어요. 그리고 우리의 죄의 형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뿐만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짓고 있는 그 모든 죄를 다 씻고도 남을 만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어요. 구속을 이루어 주셨어요. 죗값을 다 지불해 주셨어요. 그리고 영원한 속죄는 죄를 가려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다시는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기억지 않는다." 그것은 심판치 않겠다라고 약속하시는 것이죠.

몇 말씀을 더 한번 생각해 보면은 찾지 않고 읽어드릴게요.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에덴 범죄한 사람이 에덴 동산에 들어가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죄인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살지 못하게 하시려고 화염검과 불칼과 그리고 그룹 천사를 두셔서 지키게 하셨어요. 거기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성소와 지성소를 지으라고 하시고 그 성소에도 아무나 못 들어가요. 지성소는 더더욱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데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휘장이 쳐져 있고 금사슬이 띄어져 있어요. 거기는 금단의 구역입니다. 왜냐 들어가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를 막으신 것입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의 죄인이구나. 피의 제사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구나. 그래서 율법에서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사람이 죄 지을 때마다 염소, 송아지, 양이 죽었어요. 무엇과 똑같으냐면 오늘 맛있는 요리 잘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티본 스테이크를 먹었어요. 맛있죠. 그런데 이게 1년 동안 배부른 게 아니예요. 어제 그 맛있는 비싼 티본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하루 지났는데 또 배가 고파요. 그리고 또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럼 어떻게 돼요? 소 한 마리 또 잡아야 돼요. 사람이 배고프면 또 먹어야 되고, 짐승이 또 죽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정결한 짐승의 고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피의 제사, 사람이 죄 지을 때마다 또 짐승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정절한 짐승이, 왜요? 오늘 죄 짓고 내일 또 죄 짓고 모레도 죄 지을 테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 아니고요. 한 말씀만 더 읽어드릴게요.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셨어요.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피를 다 흘리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랬더니 그중에 군병 중에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그러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화는 속죄을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지성소에, 천국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면 마지막 말씀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영접하는 자" 이거는 이제 받아들이는 것이죠. 삭개오가 주님을 집으로 영접했던 것처럼, 베다니의 마리아가, 마르다가 주님을 영접했던 것처럼, 우리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죠. 다시 얘기하면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처럼, 고기는 어떤 짐승이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죽은 거 아니에요? 그것을 먹어야 내 생명이 유지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짐승이 계속 죽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눈앞에서 죽인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우리 딸들도 맛있게 먹습니다만 맛있어요. 먹어요. 그런데 짐승 죽이는 걸 차마 못 보겠다, 그래요. 그 짐승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생명이 유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짐승이 계속 죽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숙제를 이루어 주셨어요.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영접하면,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옥도 하나님 말씀대로 반드시 갈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구원받고 싶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너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담당했노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 가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영접하는 자, 제가 알고 있는 러시아어에서는 이 영접하는 자, 이게 이제 '뿌리니 마지' 해가지고 다른 말로 '복용하는'이라는 것도 번역이 됩니다. 어떤 거하고 똑같냐면, 약을 복용하죠. 그런데 우리가 약을 복용할 때 사실은 우리가 의사가 아니잖아요. 약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약이 뭔 약인지 잘 몰라요. 저도 처방받아가지고 약을 조제해서 와서 먹을 때, 하얀 약, 빨간약, 노란 약, 기다란 약, 캡슐약, 주는 대로 먹어요. 그러면 호전되더라고요. 그게 복용하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알아야, 박사가 돼야, 12년 동안 박사학위를 받아야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님이 들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런데 그 기뻐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왜 하나님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을까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하늘 아래 인간들 중에 사람을 구원할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면 솔로몬의 재판에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재판을 받습니다. 서로 자기 아들이래요. 죽은 아들은 상대방 아들이라 그러고 살아있는 자식이 자기 거래요. 솔로몬이 이야기합니다. 칼을 가져와라. 살아있는 아들을 반을 잘라서 반은 저 어머니에게 반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랬더니 한 여자가 막 소리를 치면서 울면서 제가 소유권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저 여자에게 주십시요. 그랬더니 그 여자가 그럽니다. 내 것도 말게 하고 네 것도 말게 하고 그럽니다. 솔로몬이 그러면 뭐라고 재판해야 될까요? 아버님? 칼로 죽여라, 그럴까요? 아이를? 아니죠. 솔로몬이 이것을 안 겁니다. 무엇을 알았죠? 사랑, 어머니의 사랑. 솔로몬의 지혜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거든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거기에 하나님과 아버지가 나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한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려라. 이게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에게도 이 말씀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기도를 응답지 않으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요.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죽는 데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영접한다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을 복용한다 그럽니다. 그 약에 대해서 박사가 아니에요. 제조 회사가 아니에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 약사 선생님의 조제를 받아서 그대로 순종해서 먹었더니 낫는다는 거예요. 죄도 병인 것입니다. 죄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지만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 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죠. 그래서 주 예수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셔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죄악 가운데서 예수님의 핏값으로 구원하셨기에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토록 이 권세를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 앞에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