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복음 말씀

복음 : 누가 죄인인가? / 이명인bro

박이레 2024. 4. 11. 04:23

< 복음 : 누가 죄인인가? > 이명인 형제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하나님 말씀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계시고, 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복된 복음의 말씀으로 구도하는,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앞에 선 형제는 그냥 전하는 자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냥 심부름꾼, 전달하는 자, 옛날에 군대, 군 나라의 전쟁 중에 어떤 소식을 전할 때 전령이라는 사람이 있었죠. 어떤 상황을 다른 편으로 이렇게 사실을 전달해 주는 사람일 뿐이죠. 그래서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질 겁니다. 그래서 조금 딱딱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 약을 먹어라, 그러면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건강해진다고 하니까, 그리고 병이 난다고 하니까, 그 약이 뭔지 모르지만 먹잖아요. 그렇죠 어떤 약은 써요. 그런데도 건강해지기 위해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약을 먹잖아요. 우리 주님께서 의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인생을 아시는 주님께서 필요한 영적인 약을 처방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달하는 전달자일 뿐이기 때문에, 이 시간 하나님 말씀에 집중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1).

우리 주님께서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셨어요. 그리고 거기서 이제 밤을 새시고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이제 성전으로 들어오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2절에 "아침에"라는 동의어는 이른 아침이라는 뜻입니다. 매우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은 습관을 쫓아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침에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다 나아오는지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여기에 보면은 네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왔어요. 예수님을 따르는 부류가 있어요. 두 번째 부류, 주님과 함께 생활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준비하고 왔겠죠.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본인이 의도치 않았지만 간음 중에 잡혀서 말씀대로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잡혀서 끌려온 여자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죄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자를 간부나 음부를 돌로 쳐 죽이라, 간음한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소하고 시험하고 죽일 죄목을 찾기 위해서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데려온 것입니다. 이게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고요. 간음 중에 잡힌 누가 봐도 죄인인 여자. 네 번째 부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에요.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철저해요.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서신서에서 말하고 있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율법이 말하는 대로 내가 죄를 짓지. 그러나 율법이 그 죄를 이렇게 하면은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어, 내가 그것을 다 했다. 나는 모세의 율법으로 하면 흠이 없다.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교회를 핍박했던 그 사울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9장에서 다른 나라 성까지 가서, 얼마나 그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대단했냐면 다른 나라 성에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할 정도였죠.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네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네 부류의 사람을 잠깐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 그리고 이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중에 이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께 고백했던 사람이냐 하면,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보면은 "주는" 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요. 그리스도라는 뜻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구약에 보면요. 기름부음을 받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왕과 선지자, 제사장, 왕이 선지자 겸할 수 없어요. 왕이 제사장을 겸할 수 없어요. 제사장이 왕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왕이며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알고 선포하는 분, 우리 주 예수님이에요. 이분을 가르쳐서 유일한 그리스도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이분을 압니다. 주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그 오시기로 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보니까 "살아계신"이라고 되어 있네요. 이게 현재형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이 의미는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무질서하게 되겠죠. 사람도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이 천지만물을 히브리서 1장에 보면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어요.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 계셔요. 그리고 그 법칙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사람들이 똑같이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어요. 뭐냐면, 발견할 수 있지만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 이런 게 있죠. 모든 물체는 당기는 힘이 있다라는 것이죠. 지구만에도 이제 중력이라는 것이 있죠. 대기권 지나니까 중력 법칙이 없어요. 그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온 우주가 지금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조금도 오차 없이 질서대로 지금 보존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정확하냐면요. 세계의 표준 시계를 몇 년, 몇십 년, 몇 백 년에 한 번씩 이게 고친다고 그래요. 지금 시계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그런데 그 시계가 오차가 있대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창조물에는 오차 없이 정확하게 1초, 1초, 움직이는 거예요. 세계의 표준 시계를 거기에 맞출 정도로 정확한 거예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제자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 전에 예언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세상 사람들을, 저희의 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구원자다라고 제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부류가 예수님을 계속해서 자기의 생업을 다 내려놓고, 버리고 주님만 따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고,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청중입니다. 아침부터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아침부터 나온 거예요. 다시 얘기하면 저녁에 그때는 알람이 없었겠습니다만, 내가 아침에 5시씩 일어나야지. 그리고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또 어떤 분은 아침에 머리 감을 시간이 없으니까 밤에 감고 주무시는 분 있더라고요. 우리 딸들이 그렇더라고요. 전 좀 이해가 안 가요. 베개베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 이렇게 머리가 이렇게 산발이 될 텐데, 어떻게 또 아침에 손질하려고 빨리 가려고, 그리고 조금 더 자려고, 그래서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중이에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사도행전에 있는데 한번 소개해 드리면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찾지 않고요. 사도행전 10장 33절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고 싶었으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이 청중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요. 그런데 알고 싶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요? 이 사람들이, 대중들이 이분을 선지자라고 하는데 나는 이분이 어떤 분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고 그러는데 이분이 어떤 분이야? 이분이 무슨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이야? 하고 궁금해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고넬료 같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여" 이렇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저녁 식사하고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스르르르 졸음이 올 수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고넬료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 조금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다 듣기 위하여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믿고자 하는 사람, 또 주님에 대해서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와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잘 귀기울여 들으시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귀로 듣고 알 수 있으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해요. 이 시간에 잘 들어야 되는 거죠. 그러면 이들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입니다. 이 여자는 억지로 끌려왔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내가 오늘 죽을 수 있구나. 내가 오늘 죽어도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다는 모른다고 해도 이거는 분명하게 알아요. 왜냐하면 모세의 십계명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여인은 나는 내 죄로 말미암아 오늘 죽는다 이렇게 알고 나온 겁니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는 정제받아야 돼.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야 돼. 어떻게 간음죄를 저지를 수가 있어? 그것은 죽음 외에, 사형 외에 다른 긍휼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분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이 여인의 죄를 심판치 않으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 율법에는 이러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간음 중에 잡힌 남자를 반드시 죽여라. '반드시' 예외 없이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이 이 여인을 심판치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그 모든 사람 속에는 누구도 들어가냐면 우리가 저 사람만큼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히틀러, 김일성, 그다음에 스탈린, 러시아에 나쁜 통치자가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지옥 가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요. 그런 사람도 사랑하신대요.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셔요. 이 죄인인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주님은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무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치 않으셨습니다.
자, 네 번째 부류, 고소하는 자들. 이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면서 또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요. 10분의 1을, 정말 소소한 것까지 10분의 1을 드려요. 심지어 어떤 것까지 드리는 거냐면은 요즘 세상으로 하면요. 용돈의 10분의 1을 드리는 거예요. 저도 못하는 겁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다녔거든요. 저도 기억이 없는데 어느 날 어느 교회에 가서 "안녕하세요." 그랬더니 "명인이 왔어? 난 몰라?" 그래요. "자매님 알겠는데요." 그랬더니 "내가 명인이 가르친 주일학교 선생님인지 몰라?" "그러셨어요." 사진도 없고 전해 들은 바도 없는데 듣고 알았어요. 내가 어렸을 때 나를 가르치신 분이구나, 자매님인데. 그래서 저도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고 그리고 좀 모범생이었어요. 그래가지고 어른 집회에도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림도 안 그렸어요. 그림 그리는 거 잘못했다는 얘기 아니에요. 왜냐하면 집중하는데 쉽지 않아요. 사실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이 막 다녀서 말씀을 하셔요.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떤 마음이 있었냐면, 내가 천국 가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돼, 라는 생각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스스로 세뇌했어요. 뭐라고 했냐면 '내가 이 정도 했는데 천국까지. 내가 천국 못 가면 누가가나?' 저는 주일 학교도 1년 내내 안 빠졌어요. 제가 무의도라는 섬에 살았거든요. 그래서 여름방학 되면 인천의 송림동에 고모님이 사셨어요. 그래서 고모님 댁에 갔다 와야 돼요. 그런데 어떤 열심이 있었냐면, 월요일날 갔다가 토요일날 와야지. 일요일은 주일은 교회 가야 되니까, 주일 학교 가야 되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겼다. 그러면 내가 정말 큰 죄를 하나님한테 졌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학교에 주일 학교 선생님들이요.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행함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갑니다. 이렇게 전하셨어요. 그런데 그건 하나도 안 들어와요. 듣는데 그게 안 들어와요. 희안하죠. 주일학교 때 그게 안 들어오더라고요. 동감되나요? 제가 그랬어요. 그래가지고 어른들한테 내가 칭찬받고 모범생이 돼야지. 그러면 내가 천국 가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리고서 누가 물어보면 "명인이 천국 갈 수 있어?" 그러면 초등학생인데 "그럼요, 가죠."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내 속에서는 '이렇게 가면 이렇게 가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겠지, 뭐.' 하고 넘어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오늘 준비한 말씀이 아닌데 다른 데로 가네요. 제 구원간증이 약간 나오네요. 그렇죠, 그래가지고 어른들이 하는 대로 하면 내가 천국 가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어른들이 하는 대로 하길 원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성도님들이 없는데 옛날에는 1970년대는 우리나라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가지고 성경들 성도님들이 잘 몰랐었던 것 같아요. 복음은 확실한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것을 했었어요. 뭐냐면 어떤 이렇게 사진을 걸어놓고서, 그리고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면 그리스도인이고 안 보인다, 그러면 좀 의심이 가는, 그래서 우리 집에도 그 그림이 있었어요. 액자로 이렇게 집집마다 성도님 가정에 방문하면 그 액자가 딱 있었어요. 어떤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대요.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하나님, 저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랬더니 뭐 내려서 사진을 찍어라, 이렇게 들었다나, 그래서 아무 데나 찍었대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눈이 있고 어떤 때는 눈이 녹았어요. 봄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데는 까맣고, 어떤 데는 하얗고, 흑백 사진이니까 까맣고 하얀 거예요. 딱 찍었는데 그 사람이 보니까, 사진을 빼보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 자매님들이요. 저희 집에 와가지고 "여기가 눈이고, 여기가 코, 여기가 어깨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뒤에서 가만히 보고 외웠어요. 저보고 질문합니다. "명인이는 저게 예수님 얼굴이 보여?" 그래서 보인다고, 사실은 지금도 안 보여요. 제가 요즘에도 인터넷 들어가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렇게도 보고, 위에서 아래로도 보고, 옆으로도 보고, 자세히 뚫어져 봤어요. 희안하게 지금도 안 보여요. 우리 딸들은 보인대요. 사람 얼굴이 있대요. 예수님 얼굴이라는 게 이게 아니라, 사람 얼굴 같은 게 있대요. 제 눈에는 안 보여요. 그런데 속였어요. "저 보여요." 이렇게 그러면서 그때 알았어요. 내가 예수님 못 믿은 건가? 그런데도 고집이 세가지고 끝까지 믿었다고, 왜냐하면 지금 몇 년째 믿었다고 지금 계속 얘기했는데 저 못 믿었어요. 이러면 거짓말 하는 사람이 돼잖아요. 그래가지고 속였어요. 계속.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갔는데 학생이 선생님이 물어보는 거예요. "명인이는 예수님 믿었어?" 그래서 "그럼요." 그랬더니 간증문을 써오래요. 나름대로 잘 썼죠. '교회에 가면 즐겁고 행복하고 기뻐요. 교회에 가지 않으면 슬프고 가슴이 아프고 저는 그래서 교회에 꼭 빠지지 않고 참석해요.' 이렇게 썼던 것 같아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구원 간증을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아무 답변이 없어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답답하죠.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믿었구나. 교회 가면 행복하고 기뻐? 믿었네. 천국 가겠네." 이런 말을 듣고 싶은데 그런 얘기는 안 하고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나중에 이제 특별 집회가 있었어요. 이런 복음 집회가 있었어요. 그때 요한복음 5장 24절을 통해서 구원받았어요. 오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따가 우리 한번 생각해 보길 바라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해도, 또는 저렇게 얘기해도 고소할 수 있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온 거예요. 그게 뭐냐면 지금 이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요. 그래서 사람을 사형 판결 내리고 집행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없어요. 로마의 재판장을 통해서 할 수 있어요. 모세의 법에서는 간음 중에 잡힌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죽이지 마라." "죽여라." 둘 중에 한 대답을 예수님이 하셔야 되는 거예요. "죽여라.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의 뜻이니." 그러면 로마 법을 어기는 거예요. 로마 법에는 재판 없이, 총독의 재판을 받지 않고 그리고 사형 집행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거예요. 그러면 "죽이지 말아라." 그러면 모세의 율법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죽이지 말라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예수님은 걸려들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땅에다가 뭘 쓰시네요? 손가락으로 나무로 쓰신 게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까 손가락으로 쓰셨어요. 이것도 잠시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손가락으로 쓰셨을까? 성경에 보면은 손가락으로 기록한 것이 몇 가지가 나와요. 이따가 한번 생각해 볼 텐데 그중에 두 가지만 먼저 말씀을 드리면 시편에서 8편인가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늘과 땅을 손가락으로 지으셨다고, 진짜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특별히 그 동물들과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어요. 손으로 만드셨어요. 하나님은 영이신데, 손가락이 없잖아요. 어떻게 손가락으로 만들죠? 시적인 표현이면서 주님께서 지금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십계명도 하나님이 직접 새기셨어요. 처음에는 돌판까지 하나님이 파셨어요. 모세가 이제 던져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돌판을 새겨오라 해서 거기에 쓰셨어요. 그다음에 바벨론에 마지막 왕이 이제 벨사살 왕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치리자로 나와 있는데요. 이제 마지막 멸망하는 날에 아마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러한 하나님의 성서에 그릇들을 가지고, 금 그릇을 가지고 술을 따라 먹는 거예요. 갑자기 벽에 글씨를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네요.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이렇게 쓰네요. '세고 세고 그리고 저울에 달아보았는데 부족해서 나뉜다.'는 뜻이에요. 심판받는다는 뜻이에요. 모세의 율법도 사람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고 하는 말씀을 기록하셨어요. 바벨론의 벽에 벨사살에게 쓰신 것도 심판에 관한 글이에요. 주님이 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계시네요. 무슨 의미일까? 잠시 뒤에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안 하고 계시니까 그들이 막 말하라고 막 득달을 하네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너희 중에 간음 안 한 사람이 돌로 치라라는 뜻이 아니라, 범죄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돌로 쳐라. 그 한 사람이 돌로 쳐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양심에다가 말씀하신 거예요. 이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왜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한 명도 없도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그들의 양심에 말씀하신 거예요. 나이 많은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하나하나 돌아갑니다. 그들은 지금 분명하게 모세의 율법을 들어서 간음 중에 잡힌 사람은 반드시 돌로 치라고 하셨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돌로 쳐 죽일 수 있다,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그들의 양심에 말씀하신 거예요. 그들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주여, 저희가 죄인입니다." 저 여자만, 간음 중에 잡힌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저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그 옆에 사람이 어떻게 해야 돼요? 저도 죄인이에요. 저쪽 사람도, 저도 죄인이에요. 제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하루 종일 그날 왜 이렇게 힘들게 훈련을 시키는지, 그리고서 이제 해가 뉘역뉘역집니다. 그랬더니 어깨 동무해 앞으로 굴러 뒤로 치침 1시간을 또 굴려요. 그러더니 어버이 노래를 부르래요. 그런데 눈물바다가 되는 거죠. 병사들이, 집에서는 말도 안 듣고 속썩이는 아들들일 텐데, 군대에서 그렇게 훈련을 받고 어버이 노래를 부르는데 저도 막 눈물이 떨어져요. 내가 불효자구나. 내가 부모님 앞에 죄인이구나. 또 한 번은 자대배치를 했는데, 선임이 그러는 거예요. 라면 끓여오래요. 그래서 라면을 맛있게 끓여다 드렸어요. 나이가 비슷해요. 그런데 이제 몇 달 군대 빨리 왔다고 라면 끓여다 그랬더니 "불었잖아. 다시 끓여와." 그래서 또 끓여다 줬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부모님께는, 나를 위해서 헌신했던 부모님께는 한 번도 라면을 끓인 적이 없는데, 끓여달라고 한 적도 없으셨어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저희 집이 좀 가난했었어요. 사과를 깎는데요. 꼭다리 부분이잖아요. 가운데 심 맨날 그것만 드세요. 그래서 왜 그거 드세요? 그랬더니 그게 제일 맛있대요. 저는 그게 제일 맛있는 줄 알았어요. 커서 알았어요. 이게 부모님의 사랑이구나. 군대 갔는데 깨달은 거예요. 내가 제대하거나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정말 잘해야겠다. 내가 부모님께 너무 죄인이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그래가지고 집에 돌아와가지고 몇 년 동안 정말 잘했던 것 같아요. 자, 지금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제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제가 이 죄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저 간음 증에 잡힌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저도 죄인입니다.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근데 다 돌아갔어요. 그리고 죄인인 이 여자만 남은 것입니다. 누가 봐도 죄인인 그 여자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여기서 "여자여"라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어머니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 아들이니다" 할 때 그 같은 단어, 이게 높여주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자야" 그러는 게 아니라 상당히 존칭해주는 말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주님이 인격적으로 높여주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이방 여인을 만나셨을 때도 이 호칭을 사용하셨어요.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비인격적으로 대화하시는 게 아니에요. 인격적으로 대화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송과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셔요.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잘못한다고 자랄 때까지 계속 때리지는 않아요. 짐승과 같이 대우하지 않아요. 저기 말이 달리라고 말 기수가 막 때리죠. 자식은 그렇게 대우하지 않아요. "공부하랬잖아!" 그래서 맨날 때려요? 소은이 아버지가 맨날 때려요? 안 그래요.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셔요. 이게 부모님의 사랑이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셔요. 누구까지요? 누가 봐도 죄인인 이 여자까지도 말이죠.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아니 이 여자가 죄인이잖아요. 근데 정죄하지 않으시네요. 정죄하지 않으니까, 죄 있다고 하지 않으니까, 심판받지도 않아요. 이 여자는 어떤 마음으로 왔어요? 나 오늘 죽을 수 있다. 나 오늘 돌에 맞아 죽겠네. 나는 평생 이렇게 살다가 돌에 맞아 죽는 여자였구나, 이러고 왔는데, 예수님만 심판하실 수 있어요. 예수님만 죄가 없으셔요. 예수님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세요. 끝내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7가지 심판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심판입니다. 흰보좌 심판, 또는 백보좌 심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만, 그중에서 죽어 있는 자들을 부활시켜서 두 번째 부활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지옥 가는 심판,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지옥 가는 데도 차별이 있어요. 더 뜨거운 데가 있고 덜 뜨거운 데가 있나요? 어쨌든 다 지옥 가는데 더 흉악한 사람은 더 큰 벌을 받는 거예요. 그 재판이 마지막 재판이에요. 흰보자 또는 백보자 심판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심판장이 예수님이셔요. 그런데 이 여인에게 죄에 대해서 묻지 않으십니다. 이게 뭐냐면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이에요. 그래서 이 여인의 죄를 잠깐 보류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죄까지 예수님이 담당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 여인은 이 예수님을 끝내 믿어야지 구원받을 수 있어요. 이 여인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러면 후에 지옥 갈 수 있어요. 지금 구원받았다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심판은 하지 않으셨어요 유예하신 거예요.
우리의 심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에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죠. "저는 주일학교도 잘 나오고, 요절도 잘 외우고 저도 그랬거든요. 달달달달 외웠거든요." 그래서 주일학교 때 1등을 하려고 요즘 대회가 있었어요. 요즘 암송대회가 1년에 한 번 있어요. 1년 동안 외웠던 요절을 그날 다 외우는 거예요. 그다음에 플러스, 더 외우고 싶은 요절이 있으면 더 외워라. 그래서 제가 다 찾아가지고 앞뒤로 몇 장을 한 달 동안 외웠어요. 그래가지고 아마 한 4장은 달달달달, 한 자도 안 틀리고 쫙 외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욕심이 있어가지고 남들보다 더 많이 외우려고 하다가 보니까 그게 실수였던 것 같아요. 채점 방식을 제가 잘 이해를 못했어요. 많이만 외우면 되는 줄 알았더니 채점 방식이 뭐냐면, 많이 외워서 되는 게 아니라 많이 틀리지 않은 사람일 때 하는 거래요. 앞엔 잘했는데 뒤에 더 많이 외우려고 그러니까 뒤에서 막 틀려버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냥 2등을 해버렸어요. 얼마나 서운한지, 1등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래도 천국 못 갔어요. 그때는, 왜요? 내가 무엇을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교회에 잘 나오기 때문에, 요절을 잘 외우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는 거예요.
예수님은요. 누가 봐도 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심판하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심판 안 하시네요. 그리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다." 이 여인만 죄인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이 누군지 알죠? 가인이 세상의 첫 번째 살인자입니다. 참 첫 번째 태어난 아들이면서 아담의 장자죠. 첫 번째 아들이면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나요? 아니에요. 미움, 시기, 질투, 아니 하나님이 내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거예요. 어린 양의 피의 제사만 받으신 거예요. 농사지어서 그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받으셔요. 저는 어릴 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일부 숨겨놓고 조금만 드렸나 보다. 그거 다 드렸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텐데, 어릴 땐 이렇게 생각했어요. 주일 학교 때. 그런데 좀 커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어린 양의 피의 제사예요. 다른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세요. 사람이 땀 흘려서, 정말 노력해서, 그것을 내가 하나도 안 갖고 100% 다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요. 그랬더니 가인이 시기하고 질투하네요. 창세기 4장 5절에 이렇게 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살인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하고, 화가 나가지고 그게 폭발하면은 살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알고 계시냐면은 "전지하시다" 그래요.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얘기인데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에 아시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까지도 보시기 때문에 아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에게 아벨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어요. 계속, 그런데 듣지 않고 그 화가 질투가 폭발해서 어느 날 돌로 동생을 쳐죽인 거예요. 그 뒤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네요. 그 사람은요. 가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사람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창세기 4장 23절에 "나의 창상을 인하여" 누가 날 탁 건드렸는데 상처가 났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죽였대요. 또 뭐라고 이렇게 돼 있냐면 "나의 상함을 인하여" 누가 나를 툭 쳤어요. 그랬더니 화가 났다고 소년을 죽였대요. 이게 시예요. 시인이에요. 시인, 성경상의 최초의 시가 '살인 시'에요. 라멕이 지었어요. 황당하죠. 누가 나를 주먹으로 탁 쳤다고 기분 나쁘다고 그 사람을 때려 죽인 거예요. 그리고 시를 져서 읊는 거예요. 양심이 화인 맞은, 이때는 양심 시대거든요. 그런데 양심이 제대로 작동 안 되는 사람이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에서는요. 야곱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힘 중에 이르기를 창세기 27장 41절인데요.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 즉" 이제 아버지가 나이가 많으시니까 곧 돌아가시겠지, 아버지 돌아가시면 내가 동생 죽인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이게 화가 났는지 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동생 야곱을 죽여야지, 이것을 이제 어머니가 들었죠. 그곳에서 야곱이 밧단아람, 하란으로 외삼촌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는 거지요. 이게 이제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있어요. 또 뭐라고 얘기하냐면, 창세기 37장 20절에 "그를 죽여" 요셉을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열 형이 이런 논의를 하고 있네요. 끝내는 죽이지는 못했지만 끔찍한 일을 하죠. 동생을 팔아먹었어요. 노예로 은 20에, 주일학교 때 배웠죠. 소은이, 형들이 이러면 안 되죠. 오빠가 이러면 안 되죠. 그런데 아니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의 조상들이 이런 짓을 하네요. 그런데 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형제를 미워해요.
소은이는 오빠를 미워한 적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있는 건가? 이렇게 영어를 잘하니까, 영어에서 항상 긍정이면 '예'거든, '예스'는 예거든, 솔직해서 고맙습니다. 오빠도 미워한 적 있어요? 사랑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미워해 본 적 있어요? 그런데 저도 그렇거든요. 너무 많이 미워했거든요. 자꾸 군대 얘기하는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먼저 군대 온 고참이 저를 엄청 괴롭히는 거예요. 심지어 옛날에는 구타까지 했어. 마포자루로도 막 맞아보고, 야구 배트로도 맞아보고 속으로 막 엄청 미워했어요. 그리스도인이니까 참았지, 속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어요. 죽여버리고 싶다. 이게 미움이예요. 이것을 참지 못하면 정말 살인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그 구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있었어요. 우리 부대에서, 제가 마지막 말년 휴가 신고하려고 아침에 준비하고 있는데 그 밤에 칼부림 사건이 났다. 휴가 캔슬, 그래서 그 상처받은 그 병장을 제가 병간호했어요. 제대 며칠 앞두고, 그래서 누구나 이 세상 사람들은요.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가인만 살인자가 아니라, 라멕만 살인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살인자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간상 찾지 않겠습니다만 마태복음 5장 22절에 세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노하는 자" 화내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을 받게 되고" 이게 이제 미래형으로 돼 있어요. 그래서 화를 내면 곧 심판을 받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고. "형제에 대해서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이 공회는 지금으로 하면은 법원, 죄인을 심판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죄인을 심판하는 곳에 지금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더 진전된 거죠. 이제 화를 내면 심판받게 돼, 이거 미래형이고, 그리고 형제에 대해서 라가라. 이 라가는요, 욕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욕해 본 적 있잖아요. 저도 있거든요. 저도 많이 그랬거든요. 그리고 어떨 때는요. 지금도 그래요. 어쩔 때 냐면 입 밖으로는 안 나와요. 그런데 갑자기 1, 2차선이 좌회전 차선인데 1차선에 좌회전 깜빡이를 안 켜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 그런 경험이 있어가지고 저 차가 좌회전 안 하고 직진하면 어떡하지? 사고 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옆에 차를 자꾸 지켜봐요. 그 차가 좌회전하면 저도 따라서 좌회전해요. 1, 2차선이 다 좌회전, 2차선은 직진해도 되고 좌회전해도 되고, 그런데 아니 이런, 그 차가 직진해버리네. 그러면 속에서 욕을 하는 거예요. 그죠? 겉으로는 안 해요. 아무도 몰라. 옆에 아내 된 자매도 몰라. 저만, 하면서 속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구나. 예수님 믿어서 천국까지, 내 의로 천국 갈 수 없는 죄인이구나. 지금도 깨달아요. 세 번째는 이제 "미련한 놈" 저주예요. 이게 원어에서는 저 사람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벼락 맞아 죽어라. 이런 수준의 저주예요. 이런 사람은요. 어떻게 돼 있냐면은 말씀에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결론적으로 죄인은 심판받게 되고요. 공회에 잡히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게 죄인이 받는 순서예요. 심판을 받을 것이고, 심판을 받는 것이고,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순서예요. 근데 누가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 이 마지막 시간에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요. 요한복음 8장 6절에 "끝부분에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나무로 우리는 땅에다 쓸 때 손으로 쓰지 않아요. 어떤 나무 나무 쪼가리를 가지고 이렇게 땅에다 쓰죠. 그죠? 근데 예수님은 희안하게 손가락으로 쓰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지금 손가락을 사람들이 주목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말씀하시기 전에도 손가락을 쓰셨고 말씀한 다음에도 손가락을 쓰고 있어요. 이게 뭘까? 성경에 이거에 대해서 나와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왜 손가락을 주목해 하셨을까?
구약에 보면은 모세의 성막이 나와요.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이 나와요. 모세의 성막은 그 식양을 모세가 받았고요. 솔로몬의 식양은 다윗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었죠. 7년 동안. 근데 거기에 나와 있는 그 길이를 재는 단위가 전부 손과 관련이 있어요. 성전을 짓는데 그 모든 길이 단위가 손과 관련이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볼까요? 손가락이 있어요. 시간상으로 다 찾지 않습니다. 손가락인데 검지 손가락이에요. 검지 손가락에 반지를 꼈다면 여기다 끼겠죠. 요기를 잰 거예요. 여기가 1.85cm입니다. 이게 손가락이에요. 구약에 나오는 지리 단위예요. 그다음에 손바닥이라고 나와 이 손바닥은 네 손가락에 바닥,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다음에 뼘, 이 뼘은 한 뼘이에요. 저는 뺨을 잴 때 제일 긴 데가 약지에서 검지까지가 제일 길더라고요. 보통 이렇게 되는데 성경에서 어떻게 재냐면요. 검지에서 새끼 손가락 끝까지예요. 이게 길이가 사람마다 좀 다르겠지만 약 22.2cm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규빗이 있어요.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위예요. 길이 재는 단위, 규빗은 중지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 끝까지 약 45cm. 성경을 이제 푸는 분들에 따라서 쉽게 50cm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게 한 큐빗이에요. 다 손과 관련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은 '한 길'이라고 돼 있어요. 깊이를 재는 거예요. 한 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세요? 한쪽 손에 중지의 끝부터 반대쪽 손의 중지의 끝까지 한 길이에요. 이게 1m 80입니다. 전부 예수님과 관련이 돼 있는 거예요. 우리 마지막 말씀 한번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아까 간음 중에 잡힌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어요. 왜요?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와 같이 찔리시고, 상하시고, 죽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없어요. 예수님 피로 다 용서가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죄를, 죄의 값을 지불하기까지 주님은 얼마나 찔리셨고, 손발에 못에 찔리셨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셨고, 머리에 가시가을 찔리셨잖아요.

그다음에 시간은 다 됐습니다만 하나만 더 생각해 보면은 계시록에 보면은 천성을 재는 단위가 있어요. 1만 2천 아시는 분? 왜 1만 2천, 천성의 길이가 장과 광이 똑같은데 1만 2천 모요, 어렵죠 계시록에 나오는 거, 스타디온 들어봤어요. 185m 정도 된다고 그래요. 이게 무엇을 재는 단위인 줄 아세요? 경기하는 자가 뜀박지라는 것을 재는 단위예요. 옛날 고대 올림픽에서 뜀박질하는 그 거리에요. 뭘로요? 발로 뛰는, 스타디온이라고 돼 있어요. 서신서에 보면은 또 뭐라고 나와 있냐면 운동장에서 다름질하는 자 이 운동장이 스타디온이에요. 영어에도 그래서 '스타디움'이라고 돼 있는 게 같은 단어, 여기서 온 거예요. 운동장 발과 관련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발이 십자가에서 못에 박히셨어요. 손이 못에 박히셨어요. 그것도 양팔을 벌리셨어요. 그래서 성전인, 각 성도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지역 교회 성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지역 교회가 6장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교회를 지으시기 위하여, 주님의 손이 찔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천성으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발이 그렇게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기까지 내 죄를 감당해 주셨던 것이죠. "피 흘림이 없음 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죄의 삭은 사망이요" 내 죗값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피 흘리심으로 죗값을 다 지불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죄 없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속죄'라는 뜻은 '가리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구속은 값을 지불한 것이고요. 속죄는 가리웠다. 어느 날 길이 더러운데 하얀 눈이 하얗게 내린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거기를 걸어가지 않은 길을 볼 때 얼마나 깨끗한지 그래서 막 사진을 찍는 거죠. 차각차각차각. 근데 사실은 그 거리에는요. 라면 봉지도 있고, 담배꽁초도 있고, 더럽잖아요. 그런데 눈이 온 세상은 온 세상이 하얀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졌는가? 이게 이제 믿음이거든요. 예수님을 영접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는가?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시고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 앞에 소망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