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누가복음

복음 : 삭개오의 구원,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박이레 2024. 4. 2. 22:13

< 복음 : 삭개오의 구원,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가?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 1-10절까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10).

아멘.
삭개오에 대해서 그가 구원받았는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케오는 두 가지가 되자 구원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삭개오가 보면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 때 구원받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주님께서 이제 말씀하셨죠. 주님께서 이제 이제 이 사람 구원받았다. 오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했죠.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삭개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자기가 누군지 알 때,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구나. 삭개오는 이걸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 두 가지를 알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잠깐 그러면 예수님이 누군가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은 10절 보시면 자기를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인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인자, 한자, 한문으로 돼 있는데 이게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에 온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시고 "내가 왔다." 이렇게 말합니다. 왔다라고 하는 것은 어디 계시다가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태어났다 하고 다릅니다. 인자가 태어난 것은 이렇게 하면 이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거죠. 그런데 인자가 왔다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에 있다가 다른 곳에 있다가, 사람이 사는 이 인간 세상 이 지구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잃어버린 자가 이제 여기서는 삭개오가 되겠죠. 삭개오도, 저희들도 잃어버린 자죠.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랬는데요.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분은 '찾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지만, 누가복음 19장에서 하나님은 찾는 분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하나님.
그럼 이제 이걸 성경에서 하나님이 찾는 내용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창세기로 한번 가시죠. 창세기 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8-9).

이게 이제 하나님이 이제 하신 첫 번째 질문인데요.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신 거죠.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죠. 이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한테 선악과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먹어버렸어요. 먹고 나니까, 이게 이제 죄의식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보기가 난처하니까, 숨어버렸어요. 이제 하나님이 오실 때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숨어버렸어요.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데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여기 숨어 있는 거 아세요. 그런데도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이렇게 대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 나무 사이에 숨었는데요."
이런 뜻이 아니고, "네가 왜 거기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첫 번째, 이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하나님 만나기 싫다. 꼭 하나님 만나야 돼? 그래서 숨어 있는 사람에게, "왜 거기 숨어 있느냐""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해서, 죄 때문에 나를 피하고 있는 게 아니냐?" 라고 자신의 위치,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인 위치, 나무 사이 말고, 자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위치, '죄인이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이다라고 하는 뜻은, 첫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이 아니냐?"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는 죄인이 아니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보겠습니다. 이제 신약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어떻게 찾냐 하면 요한복음 4장 한번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이 누구를 찾냐 그러면,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죄인이어서 하나님 만나기 싫어하고 그래서 숨어버린 그 죄인을 예배자로 만드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있어서 하나님이 찾는 게 아니고 예배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어떻게 해야 되냐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신령과 진정"입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우리 말로 해석이 좀 그런데요.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우선 육체를 가지고 있고요. 이걸 몸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할 줄 알죠. 동물들하고 다릅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추리하고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이걸 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몸과 혼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몸이 있고 본능이 있고, 이 혼이 아주 아주 약한 거고요. 하여간 혼이 있고, 그다음에 영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을 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령과" 그 말은 '영'을 가져야 합니다. 영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있어? 눈에 보여 봐, 내가 보면 믿지." 이게 안 보이니까 믿을 수가 없잖아요. 그다음에 "하나님이 나한테 한 번만이라도 소리라도 들려주면 내가 믿을 텐데, 뭐 나한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하나님 소리도 안 들리죠. 볼 수도 없죠. 그런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게 영입니다. 이게 거듭난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려면 첫 번째 영으로 예배한다, 거듭나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원래는 몸하고 혼밖에 없었는데 영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영으로 예배드리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제 "진정"으로인데 이거 진정, 이게 번역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보통 다른 종교는 이 정성을 요구합니다. 진심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거 요구 안 합니다. 정성, 진심, 이런 거 요구 안 합니다. 무엇을 요구하냐면 '진리'입니다. 말씀대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이 거듭나서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찾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 때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알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내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 있는 위치에 있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시는구나. 나를 뭐 하려고 찾으시는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셔서, 이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죠.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만들려고 하는구나를 알 때, 그래서 삭개오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누군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세상에 신이라고 하는 게 많죠. 여러 다른 종교에도 신이 있고 그렇게 했는데, 삭개오는 성경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 이 하나님은 누군가? 이 하나님을 좀 보고싶다. 여기 이제 예수님을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요. 이게 예수님 얼굴을 한번 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얼굴 보려고 한 게 아니고, 그러면 뽕나무에 올라가고 막 이렇게 했는데, 얼굴 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얼굴도 봐야 되지만 예수님이 누군가? 이분은 어떤 분인가?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문을 들었냐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두십니다. 제자를 열 두명 사도라 부르죠. 아주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막 이런 분들이죠. 그런데 이 열 두 명의 사도 중에 누가 들어가냐면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마태가 세리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제 예수님에 대한, 이제 예수님의 별명이 뭐였냐 그러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세리와 죄인 했을 때, 이 죄인이라는 단어는 이런 걸 완곡 어법입니다. 그냥 부드럽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규절을 보면 '세리와 창기'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여자들 중에서 가장 사람들이 싫어하고 경멸하는 존재가 창녀입니다. 그리고 남자 중에서, 그러면 이제 여자로는 창녀에 해당하는 남자가 뭐냐 그러면 세리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고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친구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거죠. 아니,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죄인들을 미워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셨다 그래놓고, 아니 우리가 볼 때 진짜 죄인, 죄인 중에서도 이건 뭐 누구나 동의하는 여기에 반대할 사람이 전혀 없는 두 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친구로 찾아가셔서, 그 사람들에게 죄인인 것을 말하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특징이 뭐냐 하면 죄인이라고 말하면 아무 말 안합니다. 다 동의합니다. 죄인입니다. 죄인이라 그래도 동의 안 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 대표적인 분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제 이런 분들이 있죠 그런데 이 세리와 죄인은 지적 안 해도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런 잃어버린 사람, 죄인을 찾아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죄인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 놀라운 거죠.
그런데 이제 구원이 뭐냐 그러면,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게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하면 죄로 인한 심판을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로 인한 심판은 뭐냐 그러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구원인데, 그 구원의 핵심적인 요소가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죄 용서는 뭐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이제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죄가 용서될까? 에 대해서 여러 민족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용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가르쳐 주셨냐면 이스라엘에게 만약에 니가 죄를 지었다고 딱 판단이 되면 이거 죄 지었네라고 생각이 되면 이렇게 해라. 원래 죄를 지으면 그게 작은 죄건 큰 죄건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입니다. 목숨을 치러야 합니다. 이것보다 비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인이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지어서 죽어야 되는 죄인에게 살 수 있는 길을, 다시 말하면 죄가 용서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방법을 모르니까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생각하냐면 이제 막 고행을 하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울기도 하고, 헌금을 하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거죠. 100번 절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짐승을 한 마리, 양을 한 마리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양을 안 키우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양이 값이 싼 게 아닙니다. 그 농경사회에서 가축들이 있죠. 소, 양, 말, 이런 게 있죠. 양 한 마리 갖고와야 합니다. 이거 비쌉니다. 이거 계속 성경은 말합니다. 죄는 비싼 것이다. 죄의 대가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양 한 마리 가져와야 된다. 양은 뭐 짐승이니까, 이것들이 죄가 어디 있습니까? 법이 없으니 죄도 없죠. 이것들은 그런데 양에다가 내가 안수합니다. 양의 머리에 내가 손을 댑니다. 그러면 이제 비유적으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죄가 쑥 손을 타고 양한테 휙 넘어갑니다. 그래서 안수를 한 다음에 내가 칼을 가지고 양을 죽여야 합니다. 그럼 이제 양 죽이기도 쉽지 않죠. 양은 하여간 뭐 심장을 찌르든지, 뭐 머리를 어떻게 하든지, 죽여야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래는 네가 죽어야 되는데, 죄는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죽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피가 흘려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죽는 것은 피가 흘려지면 이게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죽어야 될 사람 대신에 다른 피가 흘려지면, 네가 죽은 것으로 간주해서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죄를 용서한다,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으면 얼른 양 가져와서 자기 대신 양을 죽이고 그 피를 하나님한테 갖고 갑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이 당신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죄가 용서됐구나, 이제 평안하게 살자 하고 하다가 또 죄를 지으면 양 또 갖고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지구상의 양이 남아날 수 없죠.
그래서 양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죄 있는 피는 자기 죄로 죽은 건데 뭐 누구를 용서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죄 없는 피가 흘려져야 되는데, 사람 가운데는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이분은 죄가 없으세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양에게 안수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는 거냐면, 예수님의 피는 내 죄 때문에 흘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이제 안수하는 것 대신에 우리 마음으로 그렇게 고백하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데, 내가 죽어야 되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럼 아니 그럼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그분이 나 때문에 나를 대신하여 피 흘리셨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게 지금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죄인을 심판하셔야 되는데, 죄인 심판하셔야 되죠. 그런데 죄인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를 버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를 구원하겠다고 하는 뜻이죠. 그런데 구원받으려면 제일 먼저 네가 죄인이다, 그걸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 사이에 숨어서 "이제 나 하나님 어떻게 보냐? 하나님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 피해 다녀야지. 하나님 만나면 큰일 나. 이제 나 죄인 죄 지었는데, 이제 이거 나 지옥 보낼 거 아니야?"라고 하나님을 피해가고, 피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싫고, 하나님이 밉고, 왜 하나님이 선악과는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 죄인 만든 거지. 막 이렇게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죄인을 하나님이 찾아갑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이 죄인이 예배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내 죄를 하나님이 대신 해결해 주시고, "이제 내가 해결했으니 나와라. 내가 해결한 이 길을 따라 나에게 나와라." 이게 이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이게 이제 저기 주일학교 암송 구절이거든요.
이거 맨날 외워야 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어떻게 구하시냐? 구약에 계속 가르쳐 주신 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던 그 일을, 사실은 그 양이 나다.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셨던 그 양은 맨날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되지만, 내가 단번에 영원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피를 가지고 왔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는 것입니다. 여기 누가복음 19장은 이제 저희들이 안 읽었습니다마는 지금 여리고로 들어갔는데요. 여리고를 들어가면 그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수님 여정을 보면요. 예루살렘에 가시면 어떻게 되냐? 십자가 지십니다. 십자가를 지기 직전 일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다른 말씀 좀 해보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는데요. 왜 보고 싶어 했냐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누구를 찾아갑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찾아가냐, 그러면 옛날에는 옛날에는 저기 뭐죠? 그 나무 사이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하나님이 찾아가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어떻게 찾냐?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누군가 알고 싶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한테 들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찾는 것이 하나님이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말씀을 듣고, 그런가 하고 성경을 펴고, 이게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게 삭개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럼 그가 왜 예수님 보고 싶었냐면, 이제 하나님이 찾으시는 건데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찾냐면, 이제 성경에 보면 이게 이제 명백하게 안 나와 있기 때문에 약간 추측을 좀 하겠습니다. 그가 키가 작다고 나와 있습니다. 키가 작다. 그러니까 이제 학교 다니면 1번입니다. 요즘에는 안 그러더라고요. 이제 요즘에는 뭐죠? 이름 순으로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손자, 한주원이한테 물어봤어요. "너 몇 번이냐?" 그랬더니 뒷번호예요. '한'씨니까, 그래서 내가 "너 키도 작은데 왜 뒷번호야?" 그랬더니 "그거 키로 하는 거 아니야, 할아버지." 우리 때는 키로 했거든요.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으면 어떻게 되죠? 이제 이건 성경에 안 나와 있으니까 약간 추측을 하는 건데요. 키가 작으면 힘이 없고, 친구들 사이에서 밀리고, 그러다 보면 열등감이 생기고,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여간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성경이 표현했을 때 아마도 그는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삭개오 대해서 또 한 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는, 아무도 그 사람하고 이야기 안 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 지나가면 "이 더러운 사람!" 이렇게 하는 그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에 대해서 성경이 뭘 말하고 있냐면, "부자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성경이 부자라고 하면 굉장한 거죠. 그는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자기가 무시당하고 열등감에 쌓여 있을 때 그는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다 내 앞에서 아무 소리 못하게 해야지, 그 방법이 뭐냐? 그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지, 뭐. 돈 앞에 지들이 뭐, 나한테 돈 빌리러 오면 나 무시할 거야?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하면, 세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제 세금을 걷는데 우리처럼 이제 세금이 이렇게 집이 있고, 수입이 있고, 거기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이렇게 세금을 매기는 게 아니고,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았는데요. 이렇게 했습니다. 로마가 어느 일정한 지역을 어떤 세리에게 줍니다. 너는 이 구역에서 세금을 거둬서 나한테 가져와라 합니다. 그럴 때 이제 합리적으로 로마가 이 집에서는 얼마 걷고, 이 집에서는, 이 가게는 얼마 걷고, 이렇게 안 합니다. 통틀어서, 예를 들면 대전 중구에서 1억만 가져와라, 세금을 네가 누구에게 얼마를 걷든지 그건 상관 안 한다. 나한테 1억만 가져오고 네가 알아서 나머지 해라, 그럽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대전 중구에 있는 이제 가게, 집에다가 세금을 매깁니다. 자기 마음대로 매깁니다. 자기가 몇 억을 먹이냐면 ,총 액수를 한 3억쯤 매깁니다. 그리고 로마에다가는 1억만 갖다 줍니다. 자기가 2억 얼마 가져갑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부자가 되겠습니다. 그가 부자가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그를 싫어합니다. 나쁜 놈, 그리고 이제 세리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첫 번째 이유가, 이제 로마에게 세금을 갖다 바친다는 것, 그게 우리로 치면 '이완용'입니다. 우리를 배반하고, 우리 돈을 걷어다가, 우리 돈을 착취해다가, 일본에다 갖다 바치는, 굉장히 미운 거죠.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것만 가지고 이렇게 미움받지는 않습니다. 그 세금을 걷고 그다음에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잔인했습니다. 아니, 이제 뭐 좀 사업이 안 될 때도 있고, 또 이제 갑자기 병이 들거나 무슨 사정이 있어서 좀 이렇게 세금을 바로 내기가 곤란한 상황이 있죠. 그러면 이거 저기 좀 연기해 달라. 그리고 이번에는 좀 감면해 달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죠. 냉정하게, 무정하게, 잔인하게, 한 번 부과한 세금을 반드시 뺏어 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건 인간이 아니다. 저 사람하고는 말을 섞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이 안 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게 굉장한 건데요. 이스라엘에서는 '회당'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요. 여기가 이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회당에 출입 금지입니다. 랍비들이 세리하고 창기는 못 들어온다, 이렇게 한 겁니다. 이게 이제 삭개오가 그렇게 산 거죠. 그래서 이제 뭐 자기는 돈을 많이 벌었어요. 아마 여리고에서 제일 좋은 집, 아주 햇빛 좋은 곳에 명당자리 집 사고 자녀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좋은 옷 입히고, 매일 호의호식 하고 이렇게 살았죠. 그래도 자기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산다고, 성공했다고, 돈 벌었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삭개오가 그걸 느낀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제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알면 좋잖아요. 그런데 회당은 "너, 오지 마!" 그러니까 회당에 가서 뭐 저기 하나님께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와 같이 이제 율법 내지는 어떤 징계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립니다. 이분은 자기 같은 세리 중에 한 명인 마태를 사도로 삼으신 거예요. 이상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 거냐 하면, 저희들 입장에서도 이제 예수님 같은 이제 그 당시 많은 랍비들이 있고, 그리고 이제 자기 자기가 갖고 있는 사상, 혹은 견해를 이렇게 퍼뜨리고 제자들을 모으고 막 이렇게 하는 일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서 저 같으면 이렇게 딱 평가합니다. 제자들을 쉽게 모으려고 세리 같은 죄인한테도 가서 제자들을 삼는구나. 아니 도덕적이고, 건전하고, 이런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지. 치사하게 자기 사람 많이 불릴려고, 다른 그룹에서는 세리는 절대로 제자에 안 넣습니다. 회당만 해도 세리 못 오게 합니다. 창기 못 오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자신을 따르는 그룹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평가를 하냐면, 제자들의 혈안이 돼 있구만! 어떻게든지 제자들을 삼으려고 불리하고 딴 사람은 안 건드리는 사람을 하는구만!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부분은 나중에 다뤄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왜 일반적으로는 자기 같은 사람을 다 멸시하고 무시하고 거리를 두는데, 왜 예수님은 나하고 똑같은 마태를 제자로 삼으셔서, 함께 다니시고 이렇게 하시는가? 이분은 누군가? 이분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길래,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길래 저렇게 하는가? 정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욕하죠. "에이, 그 제자 수 늘리려고 하는 거야." "이거 치사한 방법이야. 정말 위대한 선생들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저 사람은 참된 교사가 아니야." 라고 사람들은 전부 평가해도 삭개오는 정말 그렇게 사람을 얻고자 나쁜 방법이라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면 거기 뭐가 있는가 이걸 알고 싶은 거죠.

잠깐 저 보겠습니다. 성경을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누가복음 19장을 보고 있는데요. 누가복음 19장에서 동일한 계속 동일한 사건인데 그 앞에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5절, 16절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5-16).

그다음에 쭉 밑으로 가겠습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눅 18:35-42).

여기 보면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게 나옵니다. 믿음이 왜 중요하냐면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뭐냐 하는 건데요. 우선 첫 번째는 제가 아까 읽어드린 대로, 첫 번째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믿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게 뭐냐? 구체적으로 이건 조금 그렇더라고요. 하여간 이거 기억해 두시고,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여기 소경이 있는데요. 이제 소경은 이제 거지죠. 소경이 됐으니까 뭐 하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거지로 구걸하고 있는데 이런 소식이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라고 하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8장 37절에 보시면, 이제 지금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유월절 양, 진짜 양이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제 많이 지나가죠. 그러니까 그가 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지나가지? 하고 물어봅니다. 주위 사람들한테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사람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가요?" 그랬더니 37절, 저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릅니다. 예수님 지나가시는데, 예수님 따르는 사람도 있고 병 고치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많이 가는 거야. 이렇게 대답합니다. 소경이 이렇게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소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죠. 지금 눈이 멀쩡해서 주님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부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렇게 합니다.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말합니다. 소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누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있습니까? 소경이 더 잘 압니다. 그거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경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왕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 존경받는 왕입니다.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자손이니까, 이거 왕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경이, 소문만 듣고 직접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는데, 그리고 그래서 이제 두 번째입니다. 믿음은 뭐냐? 첫 번째,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이 오신다니까 이제 자기가 눈 뜰 기회가 생긴 겁니다. 내 눈을 뜨게 해달라고 누구한테 말합니까? 사람한테 말하면 되겠습니까? 눈 뜨게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구한테 말하면 되죠? 하나님께 이야기하면 되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죠. 그런데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분한테 나 눈 뜨게 해달라 해야지,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한 겁니다. 이거 이제 나중에 보면 눈 뜨게 해달라고 한 겁니다. 그랬더니 39절 쭉 가고 있는 사람들이 "조용히 해. 뭐 어따대고! 지금 소경 따위가, 어딜 소리를 질러? 잠잠하라!" 그랬더니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이제 이 사람은 누구냐 하면 거지입니다. 사람들한테 잘 보여서 조금 동양 얻어서 먹고 삽니다. 이거 사람들한테 잘못 보이면 안 되죠. 사람들이 "조용히 해! 어디 시끄럽게 해?"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먹고 살려면 조용히 해야죠. 그런데 그는 지금 먹고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동냥 몇 푼 얻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까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불러와라. 뭘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봐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얘기하시는 거죠. 믿음이 뭐냐라고 하는 건 어린아이 같은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그리고 장애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게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삭개오한테 오겠습니다. 삭개오도 어떻게 돼 있냐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삭개오가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이 더 잘 압니다. 이상하게,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보고 싶었는데 이 사람 특징이 뭐냐 그러면, 키가 작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예수님이 이렇게 온다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도로가에 있는 나무에 올라갑니다.
우선 첫 번째, 지금 이게 세리장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경멸하건 말건, 나이도 있고, 저기 직책도 있고, 사람들한테 세금도 걷는 힘 있는 사람입니다. 키가 작을 뿐이지. 그런데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걸 뭐라고 그러냐?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한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제가 이걸 이때 광경을 안 봐서 이제 이건 제가 추측하는 건데요. 나무 위에 못 올라갑니다. 나무 올라가 보셨습니까? 이제 나이도 있고 한 사람이 아무리 뽕나무가 저기 바로 밑에서 쓱 올라간다 해도 이거 못 올라갑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제 경험에 비추어서 추측해 보건데 몇 번 미끄러집니다. 미끄러지다가 저처럼 옷이 찢어집니다. 손에, 발에 상처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올라갑니다. 이게 뭐냐 그러면, 장애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장애가 있습니다. 항상, 소경의 경우는 "조용히 해, 너! 시끄럽게 굴면 동양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의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더 소리지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불러와라.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습니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경우는 소리 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삭개오 경우는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제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제 겨우 올라갔어요. 모르긴 몰라도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있죠. 세무서장, 나무 위에 올라갔네. 키가 작은데 어떻게든지 그 올라갔네. 옷은, 바지는 좀 찢어지고, 이러고 있는 겁니다. 지금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그 나무 밑에 정확하게 서셔서 삭개오한테 이렇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름을 부릅니다. "삭개오야."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내 이름을 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 보통 이제 문법적인 이야기를 조금 하면요.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가 이게 'must'가 들어간 단어입니다. '반드시'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만 한다. 딴 집이 안 되고 반드시 너희 집에만 머물러야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제가 찾아드린 요한복음 4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시는지라"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로 가셔야 합니다. 왜요?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하나님이 예배자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생수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거기를 가야만 합니다. 영원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야만 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 전에 아버지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삭개오 집에 가기로 약속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삭개오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이때 삭개오가 어떻게 했을까요?
삭개오의 첫 번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았을까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 이게 이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런 분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있었는데요. 이제 친구가 빌립이 나다나엘한테 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분이 나사렛 예수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오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편견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복음 잘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나사렛'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분은 나사렛에서 사셨을지라도 베들레헴 출신이다. 그리고 이분은 영원 전에 오신 분이다." 이렇게 복음을 해야죠. 그런데 나다나엘한테 딱 걸림받게 복음을 전합니다.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합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나사렛 출신 같으면 나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랬더니 빌립이 잘못했네. "와보라." 그래서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엘이 어떻게 하죠? "어떻게 나를 낳으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시요, 왕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하죠. 삭개오도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분을 보려고 왔는데, 이분이 누군지 보려고 왔는데, 이분이 나를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죠. 이때 삭개오가 말은 안 했지만 예수님이 누군가 알고 싶었는데 나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요? 죄 없는 피를 흘려야 내 죄가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게 사람들한테 세금을 거둬서 혼자 부자로 살고 있는 이 죄, 그리고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든지 돈으로 자기의 삶을 치켜세우려고 애썼던 죄,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 이것을 어떻게든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태도를 보시면 자기가 내려올 때 어떻게 내려옵니까? 즐겁게 내려옵니다. 왜요? 예수님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많았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그 말씀, 그 예수님의 태도, 이런 것에 대해서 그가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집으로 가자. 네 집에 가야 되겠다."
이제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니 예수님은 왜 죄인들이 집에 가서 이렇게 쉽게 쉽게, 제자들을 삼으려고 하는가?" 삭개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다 보면서 수근수근,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불평하는 사람, 뭐라고 불평하냐면, "왜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가?" 했더니 삭개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예수님을 주님, 이렇게 부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놓겠습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그랬습니다. 왜 삭개오는 절반만 내놓죠? 절반은 어디에다 쓸 거냐면 내가 착취한 거 있으면 네 배를 갚겠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싹 내놓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는 자기의 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재산을 내놓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돈 벌려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돈 벌려고 그 욕을 먹어가면서 이 돈을 벌어온 것입니다. 이게 나를 사람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걸 내놓습니다. 이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 집에 들어가죠? 의인의 집에 들어갑니다. 죄인이었지만 용서된 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세리다. 죄인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가 피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의 피를 믿음으로, 아직 이제 십자가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이 죄가 용서된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 나는 사람들을 쉽게 얻기 위해서 죄인들을 접촉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내가 그들에게 간 것은 그들을 쉽게 얻고자 함이 아니고, 제자의 수를 늘리고자 함이 아니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다. 구원은 죄 없는 피가 흘려지고, 그 십자가의 피를 나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믿을 때, 일어나는 그 구원을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삭개오가 이렇게 구원받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삭개오는 자기가 누군지 압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뒤이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아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찾으셨기에 내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제 이 둘이 만난 것입니다. 뽕나무에서, 그리고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행위로 드러납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삭개오를 죄인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분으로 생각하는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쉽게 사람을 얻고자 하는 분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죄 용서된 사람은 그 과거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다시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내가 누군지 알 때 구원이 일어납니다. 이 같은 일이 저희들 가운데 계속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