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이사야 6장 : 보좌에 앉으신 주

박이레 2024. 2. 2. 22:49

< 이사야 6장 : 보좌에 앉으신 주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특별히 이곳에 있는 또 성도님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게 돼서 저의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곳에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산물 음식이 있다는 것을 미리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애 처음으로 아구찜을 먹어보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가 그렇게 맛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의 신자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게 돼서 또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사야서 6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6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13).

이사야서 52장을 또한 보도록 하겠습니다. 52장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그리고 32절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37절부터 41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37-41).

하나님께서 그분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사야서 6장에서 얼마나 많이 이 시간에 다 다룰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특별히 중요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교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이사야서 6장을 보면서, 제가 의도하는 바는, 이 6장과 이사야서 52장과, 또 53장이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간 교제를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서 6장은 이 책의 초반부에 나와 있고, 이사야서 52장과 53장은 후반부에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많이 시간상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굉장히 그 두 부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이 이사야서 6장을 인용하면서, 또한 이사야서 52장을 인용하면서, 바로 이 이사야가 기록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가 확증하고 증거하는 것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기를, "이사야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사야가 보고 이사야서 6장에 기록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는 이사야서 53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의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서 53장에 나와 있는 그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을 먼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사야서 6장에 나와 있는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두 사이의 연관관계를 알지 못했지만, 하지만 요한은 그 두 개를 우리에게 강의하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와 같은 증거를 통해서 이사야서 53장에 나와 있는 그 상하고 매를 맞은 그분께서 바로 또한 이사야서 6장에 나와 있는 왕이라고, 동일한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사야서 6장에 처음 몇 구절을 읽어보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이름을 붙이기에 '하나님의 파라독스'라는 그런 부분이 여기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대전에서 대전 중구 모임에서 이러한 교제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또한 종이신 면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2장에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것을 지난 시간에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6장에서 부요하신 자로서 동시에 가난케 되신 분임을 교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능력 있는 분께서,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종과 같이 겸손이 낮아지신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만약에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낮아지고 종이 되었을 때 다시 위에 있는 그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주님께서는 동시에 왕이시며, 종이셨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종으로서 섬기시면서 그분은 한순간도 하나님이시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고, 또한 왕이시면서, 종으로서,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하나님의 파라독스'라고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살펴보게 될 때에 참으로 놀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사야서 6장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6장은 유대 한 왕의 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행복한 일의 배경이 아닙니다. "웃시아 왕에 죽던 해"라고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웃시아 왕은 누구입니까? 그는 사실 유대의 위대한 왕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 나라를 이끄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를 강하게 했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영적인 부흥을 일으켰던 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왕이 다시 한 번 옛적의 그 영화로운 왕국 시대로 부흥시킬 거라고 믿었던 왕입니다. 그 왕에 대해서 백성들은 아주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성공적인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어느 특정한 어떤 한 날에,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성전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향을 취하고 그리고 그 향을 제사로 드리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 그 왕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 것입니다. 아론의 제사장직을 그 왕이 함부로 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왕은 그것을 자기가 하기를 원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화를 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생긴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마의 문둥병은 그가 향을 드리고자 하기 시작할 때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그렇게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직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언제 문둥병이 생겼냐면, 그가 말리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낼 때 그 문둥병이 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조언을 듣기를 거부했을 때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그 화는 그 왕의 아주 교만한 것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진노하는 그 순간 그의 이마에 그 문둥병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전에 많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잘한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불행히도 아주 심각한 실수를 한 것도 있습니다. 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가 조금 덜 죄를 짓도록, 심각한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실수를 하든지, 안 하든지간에, 특별히 여기에 젊은 성도님들이 이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가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행해야 될지 조언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잘못에 대해서 교훈을 듣게 될 때 우리는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웃시아 왕에 대해서 그 치리의 손길을 내리실 때, 그가 그 잘못을 범하는 순간, 그 향을 드리는 순간, 그 손으로 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사장들이 그것을 막으려고 했을 때, 그들의 조언을 거절했을 때, 그때 하나님의 형벌이 그에게 내려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웃시아 왕이 이제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웃시아 왕에 대해서 솔로몬 다음 가는, 그 솔로몬의 일을 이루는 그런 왕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실망을 안겨주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6장의 배경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든지 간에 단지 사람일 뿐입니다. 여전히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어떤 위대한 한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의 지역 모임 진리는 오직 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뿌리를 굳게 박고 있어야 됩니다. 물론 많은 훌륭한, 위대한, 형제님들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런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의 그 영적인 상태에 우리가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넘어질 때 우리의 모든 소망도 다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실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그 자신도 그 웃시아 왕에 대해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는 6장에서 이 순간에 특별히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난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선 6장을 보게 될 때에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은 그 웃시아 왕이 그와 같은 실패한 순간이라는 슬픈 배경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실망하게 됐을 때 우리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이사야가 기록하기를 "내가 본 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보좌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왕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이제 실수하고 죽은 것으로 이사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 인간 왕은 죽었지만 누가 과연 보좌에 앉아 있는지를 보라. 그 웃시아는 더 이상 그 보좌에 없지만, 하지만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참된 왕이 여전히 그 보좌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모든 시선은 웃시아 왕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넘어졌고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너희들의 시선을 사람에게 두지 말라." 그 보좌에 참으로 누가 앉아 있는지를, 오직 참된 왕을 보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제 이사야로 하여금 오직 보좌에 앉으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많은 왕들, 왕자들,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국의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레이시아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서커스단의 묘기와 같이 보여집니다. 정치인들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스럽게 활동합니다. 그리고 그 인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때때로 어떤 인도자가 이 나라를 아주 번영시킬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실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로마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권세들을 세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의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치 짐승과 같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오직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보좌의 왕들을 세우신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웃시아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여러 대통령들, 왕들, 그 총리가 세워지고 그리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참된 보좌에 앉으신 주님만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말레이시아에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시다'라는 그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고 계시다. 웃시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바로 이 보좌에 앉으신 참대신 왕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냥 우리에게 단순하게 어떤 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돼서 이사야서 52장을 또한 함께 읽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특별히 여기 "높이 들려서"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서 6장에 나와 있는 "높이 들린"이랑 같은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그 단어의 순서도 정확하게 똑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또 한국어 성경에서 어떻게 나와 있는지 모르지만, 히브리 원어에는 정확히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사야서 52장에서는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6장 1절에서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하고자 하는 그 힌트가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여기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이 52장과 53장에서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52장과 53장에 나온 그 종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나온 그 종에 대해서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그때 당시도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결코 이분이 메시아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세하게 묘사된 이 53장의 말씀이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사야서 6장에 나와 있는 그 왕이, 52장에 나와 있는 그 종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장 1절의 후반부에서는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본 것은 그분이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이 후반부 구절에서는 또한 이 보좌가 '성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듣지 못하였지만, 처음에 보좌라는 말이 나올 때 아마도 왕궁을 배경으로 하는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냥 성전은 별개의 다른 장소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보좌가 성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웃시아 왕이 이해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그의 보좌는, 웃시아 왕의 보좌는 오직 왕궁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오직 제사장들에게 출입이 용납된 곳입니다. 그 두 개는 서로 겹쳐져서 섬겨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만약에 누가 그것을 동시에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한 분만이 그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이 두 가지가 다 될 수 있는 분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그분만이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은 순식간에 성전이면서 또한 왕국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이사야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나 자신만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일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메시아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만이 왕이시며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창세기 14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멜기세댁이 나옵니다. 그는 왕이면서 또한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상징으로서, 그림으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스가랴서를 보게 될 때 그 그걸 알게 됩니다. 그가 예언하기를 제사장이 그 보좌에 앉을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그와 같은 보자와 성전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그리고 스가랴서에서는 제사장이 보좌에 앉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단지 왕일 뿐만 아니라, '왕 중의 왕'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단지 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큰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참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웃시아 왕은 아주 큰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오직 메시아에게만 허용된 것을 자기가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직 나만이 그 성전에 있는 보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라고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이 환상은 미래에 또한 이루어질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스가랴가 제사장이 그 보좌에 앉을 것을, 천년 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그때 이제 메시아는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있는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궁궐에 있는 보좌가 아닙니다. 성전 안에 있는 보좌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 옷자락은 그 끝이 이렇게 장식된 옷입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입는 그러한 겉옷입니다. 그 옷자락이 처음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은 출애굽기 28장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28장에서 아론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그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진 옷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의 끝에 이제 거기에 종이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옷자락이, 그 제사장의 그 옷 끝에 달려 있는 그 끝이 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더 주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것과 관련돼서 이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잠깐 옆길로 가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떤 형제님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제 속죄일에 아론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아주 엄중하고 심각한 날이기 때문에 그는 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 돌아올 것을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론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될 때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아론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올지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론이 그 모든 일을 다 마쳤을 때, 아론이 나올 때 그 종이 이제 소리를 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론의 종소리를 듣고 아, 그가 지금 살아있구나,라고 알게 된다." 저는 그것을 아주 그래 좋은 설명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사실 틀린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죄일에는 이 출애굽기 28장에 나온 그 대제사장의 옷을 아론이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오직 베옷을 입고 그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주 단순한 옷만을 입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속죄하는 제사를 먼저 드릴 때도 그렇습니다. 단지 한 사람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설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 레위기 16장에 아론이 그 속죄 제사를 드리러 갈 때, 비록 그러한 부분이 우리 주님과 많은 유사성이 있지만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순간에는 아론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론은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서 먼저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그 사실을 들어서 오직 그리스도만 자기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라고 아론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속죄일에 입은 옷은 다른 대제사장의 옷과는 전혀 다른 옷이었습. 그런데 이 가장 자리가 장식된 그 대제사장의 옷이 언급될 때 우리는 28장의 옷을 살펴봐야 합니다. 28장에서, 그리고 또한 이사야서 6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입으신 옷은 굉장히 특별한 옷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옷자락이 그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그 옷을 입었을 때, 그 옷 가장자리는 그 제사장의 맨 아랫부분이 됩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왕이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이제 그 옷 가장자리는 그의 발 끝에 이렇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발끝에 있는 그 맨 끝에 옷의 가장 자리가 성전 전체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왕의 맨 밑바닥, 맨 끝이 성전 전체를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전의 가장 끝 구석 자리, 제일 먼 곳까지도, 주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주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이 성전이 가득 차 있다라는 표현을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까? 예를 그것은 이제 솔로몬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그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을 때, 주님의 영광이 그 성전을 가득 채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한 성전 건축을 완성하였을 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봉헌해 드렸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장에 다시 한 번 그 성전을 가득 채우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분의  옷 가장자리가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그 성막에 가득 찬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성전이 영광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장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 성전이 온전히 나의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서 6장 1절에서 우리 주님의 세 가지 묘사를 이와 같이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첫 번째가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보좌에 앉으시기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분은 바로 또한 왕이시지만 52장, 53장에 나온 종이시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분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 대제사장입니다. 왕이며, 종이며, 제사장이십니다. 참으로 누가, 어떤 한 사람이 이 모두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것을 말씀하시길 원하셨고, 또한 우리에게도 바로 이 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제 피조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분 주위에 스랍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 '스랍'이라는 것은 '사랍'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불타는 것을 말하는 단업니다. 아주 강렬한 그 불을 말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피조물은 아주 빛을 밝게 빛내고 있는 그러한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섯 날개가 있습니다.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그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둘로는 날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종들의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타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하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둘러싼 스랍 천사들도 그들조차도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보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으신 보좌라는 것을 기억해 두고 계속 말씀을 듣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들은 얼굴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아주 가볍게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찬송가를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좋은 친구인지' 하지만 그런 찬송을 통해서 여러분이 그분을 낮추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하늘나라에 갔을 때에, 하늘나라 가서 "아유, 예수님." 이렇게 어깨동무하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이 땅에서의 친구처럼 그렇게 가볍게 대하는 사이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교파교회에서는 "내 형제, 예수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과 동일한 수준의 그런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물론 겸손이 낮아지신 분입니다. 그분은 종으로서 섬기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이 되셨고 또 영원히 사람이실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에 대해서 이와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면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스랍 천사들처럼 행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서 이 가운데 임재하시다는 그 실체를 인식하고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석에 대해서 그것은 결정을 지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참으로 이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한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한국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마치 부페해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 것을 먹을 거를 정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김치는 내가 좋아하니까 먹고, 그런데 낙지는 싫어하니까 안 먹고, 그는 이제 아구찜은 먹고, 그런데 번데기는 안 먹고, 그래서 그들은 이제 집회 스케줄을 보고, 여기는 내가 가고, 여기는 내가 안 가야겠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참석하고 원치 않는 것을 그냥 안 오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스랍 천사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그러한 것을 배워야 됩니다. 그들은 그 스랍 천사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발을 가리웁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항상 그 흙을, 그 먼지를, 더러운 것들을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로 얼굴을 만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에 그 먼지와 진흙과 여러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이 지금 그 먼지들로 더럽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발도 그와 같이 먼지로 더럽혀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 말아야 될 곳을 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이 아닌데 그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하지 말아야 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의 발을 더럽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주님 앞으로 나올 때, 그렇게 더럽혀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중 스파이처럼 행동합니다. 이제 스파이처럼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 가지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이거는 내 삶이야.'라고 삽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이제 거룩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한 주간을 또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평일에는 이건 내 삶이고 내 사업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 평일의 삶과 이 주일의 삶이 완전히 다른 삶을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삶이고, 이것은 모임 삶이고, 나눠져 있지 않습니다. 내 가정사, 내 직장의 삶, 내 개인적인 삶, 그것이 이 모임의 삶과 연결돼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임에 그 육체로 지금 있지 않는 다른 상황 가운데 있어도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나는 그 순간에도 모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순간에도 내 모임을 대표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임을 대표해서 그 다른 영역에서 모임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이 발을 주님의 임재 앞에서 가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알고 있는 날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빠르게,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보좌에서 명령이 나오면 즉시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곳에 그들은 즉시 이동합니다. 그들이 날고 있는 그 날개는 그 보좌의 왕의 명령에 즉시로 반응하도록 이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날고 있는 두 날개는 즉각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이 지역 모임의 특징이 돼야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를 듣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한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 책, 이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직면하는 환경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주는 책입니다. 어떠한 일이, 어떠한 문제가, 또한 이 지역 몸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이 책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가? 그래서 이 천사는 얼굴을 가리웠고, 발을 가리웠고, 그리고 재빠르게 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지역 모임은 번성하는 지역 모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얼 말하고 있습니까? 3절에서 "서로 창화하였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참으로 우리 한국어 성경이 히브리어의 "거룩하다"라는 단어가 '코데시'라는 히브리어 단어와 발음과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는데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에 대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처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에 이 장면을 읽을 때에 스랍 천사들이 그 보좌에 앉으신 일을 바라보면서 그분에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스락 천사들이 서로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그분이 거룩하다는 것을 상기 받을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오직 그 주위를 둘러싼 스랍 천사들이 서로를 향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제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서로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서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말씀을 교제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주님의 임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또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제 편리한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게으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계속 다시 상기를 받아야 되는 그러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 스랍 천사들도 분명히 서로를 향해서 이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창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도다라고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앞에서 그분의 옷자락이 그 성전을 가득 채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3절에서는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그 장차 올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앉으신 그 성전은 이 온 땅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스가랴서에서 이 온 열방 민족이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올 것을 예언을 보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이제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워싱턴 dc가 아니라, 또한 베이징이 아니라, 또 서울이 아닙니다. 쿠알라룸프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 천년 왕국 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시는 바로 예루살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성전 산이라 불리는 곳에 성전이 있고 그 안의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이 성전을 가득 채운 그분의 영광은 또한 온 땅을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이 가득 찬 성전이 그 온 땅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성전을 채우시고, 그리고 그것은 이제 온 땅을 그분의 영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 온 땅은 그분의 온 영광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가랴가 어떻게 말했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그때는 아주 놀라운 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론이 그 머리에 관을 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에 명패가 붙어 있게 됩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최고의 거룩함을 말해주고 있는 그러한 물건입니다. 그리고 스가라는 이제 그 날이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그릇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 성결하게 될 것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어떠한 그릇에 김치를 담아두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제 성전에 있는 어떤 그릇보다도 그 그릇이 더 성결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 천년 왕국 시대에는 어떠한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함이 이미 온 땅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차고 있는 그 방울에도, 그것이 그때에는 성결하고 거룩하게 된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 가정집에 그냥 일반적인 그릇도 성결하고 정결케 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 안에 있는 어떤 물건들만 성결한 물건이 아니라, 그 밖에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성결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적어도 천년왕국 초기에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날은 얼마나 놀라운 날이 될 것입니까? 우리가 믿기로 우리는 그때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얘기하기를 우리가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중에 어떤 분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목포를 다스리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로 그분께서는 다스리는 권한을 우리에게 각각 맡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이 사라진 이 세상에 여러분이 여러 가지 것들을 투자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은 계속 언덕 아래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멸망할 세상입니다. 여기에 모든 여러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에 모든 것을 투자하지 않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미래가 우리에게 더욱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제 15분 남았는데요 이제까지 여러분이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제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 6:4).

여기서 "집이 연기로 충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화하는 하는 자의 소리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창화하는 자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앞에 나온 그 스랍들이 서로 외치는 소리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외칠 때에 그 성전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말해주고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문지방은, 그 문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그 입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성전의 안과 밖을 구별해 주고 있는 지점입니다.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나누고 있는 경계가 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스랍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칠 때에 그 문지방의 터가 요동합니다. 그것은 그 거룩하다는 소리에 공진하면서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스랍 천사들의 외침에 그 문지방이 요동하면서 공진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역 모임은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물질적인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이 모임의 교회 당의 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지역 모임의 문과는 다른 그냥 물질적인 문입니다. 지역 모임은 분명히 영적인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역 모임은 그 문을 통해서 무엇이 들어오게 되는지를 지키고 있어야 됩니다. 아무것이나 그 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이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것이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적인 것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가, 그냥 구원받은 자처럼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지역 모임은 이와 같은 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역 모임의 안과 밖을 구별해 주고 있는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그 문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작동하는 문입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임 안으로 뭔가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준으로 심판해 봐야 됩니다. 그 성경의 거룩함의 교리에 테스트를 해봐야 됩니다. 이 성전의 그 기둥이 거룩함에 공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역 모임의 문도 그 거룩함에 공진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임은 무엇이 이와 같은 거룩함에 맞는지, 거룩하지 않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지역 몸의 문은 이 진리에 지금 동일하게 공진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누리고 있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모임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참으로 확신 가운데서 누리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연기가 충만한데요. 다시 그 성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그 성전과 성막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각인시켜 주시기를 원하기 위해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에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보좌에 앉으신 이로 말미암아 성전이 충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사야에 대해서는 다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앞의 장을 보면 "화 있으리로다" 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심판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화 있으리로다" 그의 불순종하는 형제들을 대상으로 말하였습니다. 제가 맞게 체크를 하였다면, 6번,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화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7번째, 그 화가 나한테 미쳤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됩니다. "아, 저 형제는 저렇고, 저 자매는 저렇고, 저런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하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는 "화로 다 나여"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얼마나 자주 나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랑받게 됩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때 그런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내 자신을 그와 같은 사람들과 동일시하게 됐을 때에, 단지 형제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제 그가 그 형제들 가운데 동일시하면서 서게 되었을 때에, 그것은 인도자에게 필요한 그 겸손함과 회개입니다. 이사야는 그와 같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동일시하였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위대한 인도자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도 그랬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릴 때에, 단지 다른 사람의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위대한 인도자들은 "우리가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세개의 위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에스라서 9장입니다. 느헤미야 9장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 이 세개의 장에 나와 있는 기도가 구약에 나와 있는 위대한 세개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하였나이다."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화로가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이사야가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이제 그 후에 나와 있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그 고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마치면서 한 가지 것을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전에서 요한복음은 우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음서다라고 교제하였습니다. 그 앞에 나온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모욕과 수치를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특별하게도 그 갈보리 십자가를 다른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세 복음 기자들이 그 갈보리 십자가에 대해서 수치와 모욕인 것을 강조하였다면, 요한은 이제 그 십자가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기자들은 그 십자가의 수치와 그 낮아짐을 말하였고,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이제 때가 이르렀사오니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라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대해서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나이다"라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히 그 십자가가 높이 들리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러한 가운데 아주 특별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들린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 3장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들린다'라는 단어는 '높이 들린다'라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사용해서 요한은 십자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그와 같은 영광이 있다라고 요한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러한 단어를 어디서 찾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이 이사야서 6장을 통해서, 이사야서 52장을 통해서, 그러한 것을 깨달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서 52장에서 "내 종이 형통하여 높이 들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6장에서 "지극히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받은 종이 바로 모든 주권을 가진 왕이신 것입니다. 그 종이 죽을 때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그 종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높이신, 그 모든 주권을 가지신 왕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지금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우리와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영광스럽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가린 채 섬깁니다. 우리의 발을 가리고 섬깁니다. 그리고 우리의 날개로 빠르게 날면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