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계시록 3장 18-20절(요약)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18-20, 개역한글)
- 최재홍 형제님 사회 : 오늘은 18절부터 교제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 교제가 미진한 부분도 이어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칭찬 없이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또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심을 말씀합니다. 연단한 금과 흰옷, 안약에 대해서도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것, 그리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것과 같게 하리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윤철 형제님 : 라오디게아 지역은 부로 유명했음을 교제 했습니다. 풍토병 중에 눈병이 유행했는데 라오디게아는 안약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에 필요한 세가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유일한 공급자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와서 사라고 말씀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금의 순도를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부유해서 금의 순도를 한눈에 알아봤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이 잘 아는 것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흰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상징합니다. 곧 오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흰옷을 입고 주님의 신부로서 맞이할 것입니다.
또한 그 지역의 유명한 안약으로 이들의 영적인 어둠을 치료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시장에서 물건을 전시해서 파는 것처럼, 금과 흰옷과 안약을 전시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공급받을수 있을 것입니다.
- 전의석 형제님 : 라오디게아 교회는 저희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너를 권하노니"(18절) 주님께서는 우리를 강요로 이끄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구원도 그러했듯이 회복도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권하고 계십니다.
"내게서"(18절) 연단된 금, 흰옷, 안약을 다른곳에서 사는것이 아니라 주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정은 다른방식이 아니라 주님께 가야지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19절) 이들에게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모습같은데요. 저에게 이 라오디게아 같은 자이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책망한다고 말씀하시고 열심을 내라고 촉구하십니다. 윤철 형제님이 마치 상인이 물건을 진열해서 사는 것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요.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것을 사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문은 다른 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열린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주님께서 문밖에 계십니다. 그리고 문이 닫혀 있기에 주님께서 두드리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열린문을 두셨고 들어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와같이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12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충성된 증인을 찾고 계심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20절) 이 편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어떠함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문밖에서 두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라오디게아 교회 밖에 있는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신 형제님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제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18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입니다. 저희들이 아이들을 훈육할때 조심해야 하는것이 정말 자녀들을 옳은방향으로 가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화를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책망만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는 권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금을 사면 부요해집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이 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개역한글)
주님에게로 나가서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금을 사는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인 상태는 가난하고 곤고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으로 단련한 금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당한 믿음을 행사할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차갑지도, 더웁지도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원래 합당한 믿음을 금을 사서 영적인 풍요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19절에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권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주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한다면, 분명하게 책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 김보영 형제님 : A. 형제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주님을 문밖에 세워놓고 있는 교회를 교회로 볼 것인가는 큰 관심사입니다. 일곱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일곱교회가 주님이 오시기까지의 모든 교회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어느 시대의 교회로 볼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교파교회를 보면 교회라고 모이고 있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소수나마 남은 성도들이 있었지만 이 교회는 전혀 그런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문밖에 세워둔 교회,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고 부를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집단적인 종교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 분별입니다.
형제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묻고 싶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A. 형제님 말씀해주신 것처럼 20절 말씀을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분별하면 여러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분별하면 교회가 아니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아직까지 교회를 권하십니다. 그렇기에 촛대가 옮겨지는 심판까지는 아직까지 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주님께서는 여전히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20절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 중에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개인적으로) 촉구하시는 것으로 저는 분별합니다.
더 나아가서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가를 살펴본다면 교회 안에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 안에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영향력을 발휘하면 믿는 자들이 영적인 활동을 하려고 할때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 영접의 문제가 이러한 문제를 불러오게 됩니다.
- 최재홍 형제님 : 19절부터 교제하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원어가 필레오입니다. 개인적인 애정과 사랑하는 이에게서 취하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받지만 이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 가운데서 영적으로 빈곤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시는데 책망은 말로 꾸짖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면 징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여러가지 책망을 받을 때에 이들에게 슬픈일이 아닌것을 보게 됩니다. 책망이나 징계가 있다는 것도 주님께서 사랑하시기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시련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19절) 그들은 차갑거나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뜨겁게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책망하고 계십니다.
20절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일곱교회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교회로 인정하시는 상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도 교회로 인정받은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가운데 계시기에 주님이 절대로 모임 밖에 계실 수 없습니다. 20절만 놓고보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문맥적으로 보았을때 문밖에 계시는 것은 성도들 각 개인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 마음 가운데 계셔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답게 섬기고, 중심 가운데 모셔 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셔야 하는 곳에 있지 못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희가 반응해서 저희 마음 가운데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과 기쁨 가운데 교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시지만 저희에게 동의를 구하며 제안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한 것은 맞지만 매일의 삶 가운데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해 드리고 있지 않다면, 내 삶의 결정을 온전히 주관하시도록 맏겨 드려야 합니다. 20절은 주님께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교제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을 온전한 주님으로 모셔 드렸을때 주님과 놀라운 교제가 시작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내 영혼을 살리시고 풍요롭게 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상적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 카질라 형제님 : 19절 말씀을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또 히브리서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징계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양육 과정에서 지상에 있는 부모가 우리를 어떻게 징계하는지 비교해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구주께서 사랑으로 어떻게 책망하고 징계하시는지 다시한번 보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권면 받습니다. 여기서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뜻은 끓는 모습을 의미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끓는 모습은 미지근한 교회에 딱 맞는 부분이고 그들은 늘 끓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끓어야 한다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들은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2:14, 개역한글)
또한 선한 일을 하는데 열심인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 선한 일에 열심하기를 권고를 받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안약에 대해서 교제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엘리 제사장은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이 뽑혔습니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두눈이 뽑혔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마지막의 때에 이와같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얼굴이 하나님과 같이 빛나고 그가 늙어서도 그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마지막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입니다.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모세와 같이 얼굴이 빛이나고 그 눈이 어두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 김대현 형제님 :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해 보이나 가난하고 영적으로 소경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버려두고 책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21절에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참으로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샘플이 되었지만 모든 교회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교만했고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왕성한 활동덕에 그들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해 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대전 중구 모임을 어떻게 보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헌신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영접과 징계에 대해서 교회가 느슨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주적인 제도가 교회안에 들어와 말씀을 듣기보다 다수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를 주님 앞에 돌아보며 열심을 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저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제 자신의 숙제로 남기를 원합니다. 20절 말씀도 그렇지만 19절 말씀도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것이 구원을 촉구하는 것이라는 교제도 많이 있고요. 연단한 금, 흰옷, 안약도 구원과 관련해서 보는 교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측면에서 여전히 이것을 교회로 볼 것인가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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