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로마서 9장 19-23절(요약)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9:19-23, 개역한글)
- 최재홍 형제님 사회 : 오늘 교제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과 오래참으심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을거 같습니다. 또한 토기장이와 그릇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인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자신의 상태를 통해서도 알수 있지만, 열왕기서의 여러 왕들을 보았을때도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19-29절까지 교제 부탁드립니다.
- 김윤철 형제님 : 9장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전제가 있는데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를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주권적으로 사람을 선택하실수 있는 분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반론자들의 질문을 예상하고 답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9:19,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팍하게 하셨다면 어째서 강팍케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는가라는 질문과 그런즉 누가 하나님을 대적할수 있느냐는 질문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한 질문을 피조물이 하나님께 할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것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만들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심을 알수 있었습니다.
- 최재홍 형제님 : 19절에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거나 강팍케 하심이 하나님이 주권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의문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 외에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수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심판을 할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참되신 주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피조물이 하나님께 그러한 질문을 할수 있는 위치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힐문하느뇨" 이는 계속해서 시비하다, 말대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께 이와같이 시비할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이와같은 질문을 할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저희가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인간이고,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서 사도는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향해서 선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에서에게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처럼,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셨으므로 강팍케 되었는데 왜 진노를 하시느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가 강팍케 했기에, 그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릇은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쓰임을 받던지, 어떤 대접을 받든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고 9장에서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이야기하고 지금 서신을 받은 로마 성도님들께,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토기장이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그릇의 쓰임에 맞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의 위치와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가 있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은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8, 개역한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사도는 계속해서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와같은 것에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만 구원하신다면 이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19절부터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항의할 수 없는 측면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고 다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 어떤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과 구원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항변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사람만을 구원하신다해도 마땅히 모두가 지옥에 가야 하는데 한명이 가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조차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만 구원을 받고 강팍케 하는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볼때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긍휼을 입었다는 것에 큰 감사가 됩니다.
- 최재홍 형제님 : 하나님께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2:4, 개역한글)
애굽의 바로를 생각할때에 그가 마음이 강팍케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완고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진노받기로 정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킬수 있는 기회를 여러번 주시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회개하는 자들을 모두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개역한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회개할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이기에 그 죄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길에서, 강팍함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아까 형제님께서 힐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0, 개역한글)
피조물이 조물주를 탓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시면 그것이 힐문이 되겠습니다. 그 내용이 옳고그름을 떠나서 그 말을 하는 자가 질문을 받는 대상에게 그런 질문을 할수 있는 상태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애초부터 바로의 마음을 강칵케 하셔서 바로가 그렇게 행동함으로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게 되고 바로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걸보고 하나님이 그렇게 바로를 강팍케 하셔서 바로가 그렇게 된게 아닙니까? 하고 질문할수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로는 대단히 억울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얼핏보면 그 질문은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저희들이 구원받은 것은 구원받을만한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구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우리의 어떠한 것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길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인정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를 만나러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가 강팍하게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팍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가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반문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내용이 질문내용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힐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지않는 자를 심판하실 권한이 있으시고, 진노를 입어야 하는 자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긍휼을 베푸실 권한이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바로를 강퍅케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공의로우심)이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김태우 형제님 : 힐문이라는 단어 자첵 책임을 물으면서 질책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생각에 벗어나는 것들을 따져묻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밥먹는 밥그릇이 "오늘은 나 국그릇 할래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만들때에 정해진 쓰임을 가지고 만들듯이 하나님께서 저희를 만들때에 정해진 쓰임을 가지고 만드셨고, 우리가 왜이러한지를 질문할수 없다는 것으로 저는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하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힐문입니다. 그 내용이 맞다 하더라도,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내용이 맞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교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맞는 것입니다.
사람의 질문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타당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힐문한다면 하나님 위에 우리의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타락한 것이 하나님과 비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하는것이 하나님보다 우리의 생각을 위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고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순종으로 이 길을 나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대현 형제님 : 18절의 말씀이 계기가 되어 19-29절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모든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서 진행되어지는 것입니다.
22절에는 진노의 그릇이 있고 23절에는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에는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에는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9:24, 개역한글)
유대인이고 이방인이든 부르시고 쓰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모든것은 주님의 주권이고 주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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