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11_노부부 >
저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
오늘 이 시간은 하나님의 사람의 집의 주제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주제, 조부모에 관한 말씀을 저희들이 살펴 보겠습니다. 잠언 20장 29절 말씀에 두가지 영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젊은자의 영화는 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늙은자의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발이다. 젊은사람들은요, 육체에 힘이 있습니다. 청년의 때지요. 젊었을때 아름다운 영광은 힘이다. 올림픽에서 각종 경기에서 필요한것은 육체적인 힘이죠. 물론 거기 기술도 함께 동반이 되어야 되겠습니다만 젊은 사람의 영화는 힘이다. 육체의 힘 뿐만 아니라 기량, 에너지, 능력, 거기에 힘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것이라면 이상이라든지, 꿈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젊은사람과 관련이 있지요. 미래에 대한 포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인데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청년으로서 미래에 대한 꿈이나 이상, 이런것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어째든 젊은 사람의 영화는 힘입니다. 그러면 나이가 먹어가면서 서서히 힘이 없어지는데, 이 힘이 없어질때 노인들에게서 영화는 뭘까? 잠언기자는 저희들에게 백발이다. 백발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흰머리가 자꾸 나오고 나중에는 완전히 백발이 되겠지요. 백발은 뭘 말씀하고 있을까? 그냥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먹으면 다 백발이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가 영화일까? 아름다움일까? 그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백발이 말해주고 있는것은 지혜 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만 나이가 먹어가면서 지혜가 정말 나이만큼 있을까? 항상 두렵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저희들이 구하고, 지혜가 모자르면 주님앞에 구하라. 야고보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 지혜라고 하는것은 지옥으로부터 나오는, 마귀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있습니다. 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지혜, 그것은 악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것이죠.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이 지혜, 이 지혜를 갖고 이제 할아버지도 되고 할머니도 되고, 가정 안에서 이것이 필요하다. 젊은사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고 지혜의 시작이고 잠언은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백발이 지혜라고 한다면 이 지혜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죠. 어려서부터 만일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고 주님 말씀 가운데 걸어가면서 말씀에 순종하고 또 순종하면서 점점 지혜를 쌓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많은 지식을 얻게될때 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많은 지혜를 실제적인 생활속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을까? 라고하는 것이 지혜인데요. 지식뿐만 아니라 이 지혜가 함께 갖추어 져야되기 위해서 특별히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혜를 얻게되고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순종하고 살아가면서 지식을 얻게되고 또 이 지식 속에서 우리가 얻게되는것은 그것을 적용하는법을 우리가 배워가게 될때에 하나님께서 이제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시고요. 사실 그것은 위로부터 온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래서 백발, 노인의 영화는 백발입니다. 지혜 입니다. 그 앞에 잠언 16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16:31).
다른 영어 번역에서는 직역하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의에 길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이라면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이라." 다시 말해서 의의 길로 걸어가게 될때, 그 사람은 일생을 의의 길로 걸어가다가 노인이 되게 될때, 그 사람은 영화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말이죠. 노인이 되어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는다. 영화로운 면류관을 얻는다. 그런 조건은 뭔가? 일생 의의 길에서 걸어가야 된다는 말이죠. 다시말해서 구원받고 주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의 가운데서 걸어가고 거룩하고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세월이 가면서 그에게 영화의 면류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동적으로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의 가운데 걸어가면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또 주님과의 교제를 하지 않고 걸어가게 될때 육적이지요. 자기 중심적이죠. 그런사람이 나이가 많이 들었다면 그런 인생의 삶 속에서 어떤 영화가 있겠습니까? 잠언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것은 의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 거룩한 길을 따라간 사람, 이것은 주님을 믿고 구원받고 주님의 자녀로서 이제 일상생활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 주님의 임재를 느낄때에 우리는 불의함 가운데 있을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신데, 우리가 불의하게 갔다면,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갈수없고 주님앞에 자백합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정리하고 주님 앞에서 정돈하고 의로운 길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 그의 삶은 점점 그와같은 모습으로 이제 빚어지게 될 것이죠. 마치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빚게 될때에 돌리죠. 돌리면서 그 손이 모양을 잡아갑니다. 보통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때에는 저 정도면 된거 같은데, 도자기 만드는 사람은 아직도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만족이 없어요. 계속 돌리고 어떤때는 괜찮은거 같은데 탁 잡아서 땅에다가 던져버려요. 그래서 다시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고나서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 우리의 성품, 우리의 걸어가는 길, 이 모든 것들을 잡아가려고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저희들의 본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들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은 초기부터 주님 믿고 나자마자 우리가 교훈을 받는것은 경건을 연습하라.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백발은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백발은, 그것은 영화의 면류관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세월이 가면서 결혼을 하게되고 자식을 낳게되고 또 그 자식들이 성장해서 결혼해서 또 자식을 낳게될때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지요. 이제 그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3세대 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그 다음에 자식의 세대지요. 가정은 이와같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지고 있고요. 할아버지 할머니, 조부모는 가정 안에서 해야 될 역할이 있다. 그 점을 저희는 이 시간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92:12-15).
여기 시편 92편 마지막 부분에서 노인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보면 "늙어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조부모에 관한 주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가정 안에서 합당한 역할을 할수 있을까?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서 합당한 역할을 할수 있을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 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경우에서도 마찮가지지만 언제나 조부모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조부모 자신의 영성이 어떤것이냐 하는것이 대단히 중요하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 시편 92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노인이 되었을때 영화의 면류관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노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 92편 12절 말씀에 "의인"이라는 말씀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한다. 자란다. 이 두가지 나무를 저희들에게 심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아가서에도 종려나무를 말씀하고 있는데요. 아가서 7장 7절에 종려나무같이 키를 말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를 보면 굉장히 키가 크지요. 종려나무는 진짜 크가 크지요. 곧바릅니다. 곧바르고 키가 큽니다. 자주 이것은 의인을 잘 묘사하고 있는 말이지요. 의인의 길이라고 하는것은 꼬불꼬불 가는것이 아니지요. 그의 가치라든지 평가라든지, 그의 기준, 이런 것들은 기회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하지 않고 항상 같고 곧바르지 않습니까? 의인은 종려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첫째, 키가 큽니다. 그리고 품위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2-15).
여기 두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은사와 관련해서 하고 있는 말씀인데요. 은사의 기능과 목적은 몸을 세우려 한다. 성도로 온전케하고 구비케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하는 것인데,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게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또한 15절 말씀을 보면 "그에게까지 자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완전하신 분입니까? 거기까지 자랄수 있도록 은사는 그런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인데요. 높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려서부터 말씀 안에서 성장하고 또 의 가운데, 경건함 가운데, 거룩함 가운데 걸어가고 그와같은것을 지금 종려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키가 큽니다. 다른말로하면 장성했다는 그 말입니다. 성숙했다는 그 말입니다. 성장할뿐만 아니라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품위가 있습니다. 위엄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합니다. 은혜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진리를 분명히 합니다. 진리를 사랑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해야지요. 그래야 주님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님같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죠.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게 될때 그분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더 닮아가지 않습니까? 의인은 종려나무 입니다. 그는 종려나무 일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위로 올라가요. 백향목이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을 보면요. 옆으로 퍼진것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잎사귀가요. 이 잎이 백향목 전체를 보면 항상 옆으로 퍼져있는 아름다움을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태는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여러분 레바논의 국기를 보면 국기 가운데 백향목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랑스럽습니다. 레바논 산맥에 있는 백향목, 그것은 성전을 지을때도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을 가져다가 짓지 않았어요? 레바논의 백향목, 그것은 썩지 않습니다. 오래 갑니다. 캐나다에 있을때 부촌에 가면요, 집들이 전부가 다 지붕이 백향목이어야 합니다. 집을 지을때, 그 동네에서 만약에 지붕을 다른걸로하면 그것을 허락 안합니다. 백향목 지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것은 그들은 자기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귀하고 비싸고 그리고 썩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백향목, 그것은 위엄이 있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바로 그런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다. 기상이 있습니다. 위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비루하지 않습니다. 그는 변명해야 될 그런것들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의로움 가운데 따라간다면 우리는 삶을요, 무슨 일때문에 항상 변면하고 비루하게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자태가 있고 무엇이 위엄이 있습니까?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확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가 아닌데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넌센스 입니다. 그것은 문제에 부딧칠때 커다란 사고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고 순종하고 그 말씀을 붇들고 간다면 변명할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가게될 때에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럼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잘못한 것을 자백하고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렇게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했을때라도 주님 앞에서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간다면 그는 변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앞에 자백은 하지만 그는 변명하고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기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의로운 자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장엄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완전하시고 주님은 위엄이 있고요. 장엄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분을 따라간다면 그 모습이 그렇게 변해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제 노인이 되었을때 의인으로서 그 모습은 종려나무와 백향목에 비유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런 사람이 어떤사람일까? 우리는 신약에 누가복음에 보면 우리 주님이 탄생하셨을때, 얼마 있다가 말씀의 기회를 따라서 주님께서 성전에 가신때가 있었죠. 아주 어릴때, 그때 누구를 만났습니까? 시므온과 안나를 만납니다. 노령의 사람들입니다. 한사람은 남성이고 한 사람은 여성이죠. 이 사람들은 주님의 구속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안나는 결혼한지 7년간 남편과 살았고요. 그 다음 84년을 과부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되었을까? 결혼하고나서 벌써 91년을 성전에서 살았고요. 그동안에 91년의 세월이 결혼하고나서 지났는데 이 노령의 성전에 살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주님, 탄생하신, 성육신하신 주님, 며칠밖에 되지 않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우리는 구속을 바라는데 그 구속자께서 오셨다는 것을 이 두사람이 만나 보았지요. 이 시므온, 안나가 이 당시 유대풍습으로 12살이면 대게 약혼한다. 아주 어린나이에 12살에다가 7년동안 남편과 함께 결혼해서 살았고 84년 과부생활을 했다면 약 103세 정도, 100세가 넘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구속을 바라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람들이 이런분의 모습이 아닐까? 여기 시편 말씀에요.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 그랬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을까? 여호와 집입니다. 성전입니다. 우리 신약시대의 성도들과 비교하면 무엇입니까? 노인이 되어 마음이 항상 주님이 계신 모임에 있다. 주님이 임재해 계신 모임을 사랑하고 모임에 있다. 그는 모임사람이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이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도 그곳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항상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는 살아왔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겨 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황한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하나님의 집은, 그것은 오두막이 아닙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고 궁정입니다. 그곳에서 번영하고 있다. 흥황하고 있다. 늙어도 결실 합니다. 이것은 참 놀랍죠. 보통 나무가 어릴때 점점 자라서 왕성할때 열매를 맺다가 나중에 힘이 진해서 더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보는것은요, 독특한 것입니다. 늙어도 여전히 결실한다. 에너지가 있는거죠. 힘이 있는거죠. 누구로부터 힘을 받을까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결실할뿐만 아니라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 이 두가지는요. 안 밖이 청춘이다. 그말입니다. 첫째, 진액이 풍족하다. 나무를 보면요. 뿌리에서 물을 흡수하고 여러가지 양분을 흡수하죠. 그래서 올라갑니다. 관을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잎사귀에서는요. 광합성을 통해서 거기서 만들어낸 양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또 관을타고 내려 옵니다. 이 식물은 올라가는 파이프가 있고 내려가는 파이프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동물, 사람들도 순환기가 있어서 돌지요. 양분이, 물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진액이 풍족하다. 여러분이 캐나다를 방문하시면 면세점에 들르면 가장 흔한 선물, 그것은 단풍나무에서 얻은 진액입니다. 메이플시럽입니다. 나무를 쿡 찌르면 거기서 진액이 나오죠. 그것을 끓여서 졸여서 만드는 것이 메이플시럽인데 이 나무가 왕성하고 나무가 힘이 있으면 계속해서 진액이 나오죠. "늙어도 진액이 풍족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또 "빛이 청청하다." 진액이 풍부하다고 하는것은 그 속에서 모든 일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빛이 청청하고 잎사귀를 보면 잎사귀가 너무 파랗고 윤이 나고 남해, 한국 남해에 가면 바닷가에 동백나무를 보면 겨울에도 추운겨울에서 잎이 대단히 반짝 거리죠. 그것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잎이 청청합니다. 이 두가지는 안밖이, 속에서 진액이 나오죠. 겉을보면 청청하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렇게 말할수 있겠습니다. 노인이 되어도요, 세월이 가도, 고린도전서에 보면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이제 겉사람은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앞에 가서 부활할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부활의 몸을 받게될때 영원한 청춘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늙어도"가 아니고 이제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늙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노령의 그리스도인이라해도 그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앞에 가기전에 이 땅에 있을때, 늙었을때, 여전히 결실하고 또한 진액이 풍복하고 잎이 청청한, 그것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고 노령의 성도의 모습이 아닐까? 시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여기 마지막절에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이런 노령의 성도는 여호와의 정직을 나타낸다. 우리 주님께서 정직하십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말에 진실이 있다는 거죠. 정직하다는 말은 말을 믿을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은 절대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액면 그대로 언제든지 받아들일수 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은 하나님은 말씀은 하나님 말씀하신 그대로다. 그것은 주님 말씀의 단순함이며 심오한 것입니다. 정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받게될때 우리는 마음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일생을 통해서 항상 그 말씀을 받아왔고 왜 일생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을해도 항상 그렇게 못믿는가? 항상 속아만 살았는가? 보통때 그런말을 하지요. "속아만 살았는가?" 왜? 말을해도 믿이 못하죠. 그렇게 맏지 못하도록 그는 이 사람에게 치이고 저 사람에게 치이고 사기꾼에게서 손해보고 매일 그렇게 산 사람은 믿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읽고 이 말씀에서 기쁨을 누리고 이 말씀을 순종하고 이 말씀을 따라가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직하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알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기도가 당장에 응답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따라 우리가 기도할때, 언젠가 주님의 때가되면 이루신다. 그래서 주님은 정직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약속은 절대로 공으로 허사로 가지 않는다는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있지 않습니까? 일생을 통해서 그것을 배우고 실행한 사람은 그래서 노령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삶 속에서, 그의 생각 속에서, 그의 실행 속에서 그는 여호와의 정직을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나타낼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 말씀은 언제나 사실이다. 우리가 구원 받을때 단 한구절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을때, 그 약속은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같은 구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모든 삶의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왔고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의지하고 그렇기 살았기 때문에 노령이 되어서도 우리의 말과 행실은 언제나 그렇게 전해지고 그렇게 들려지고요. 그래서 노인이 되어서 자식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수 있을까? 우리의 손자들에게 손녀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수 있을까? 바로 여호와의 정직을 나타내고 도움을 줄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거짓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액면 그대로 언제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칠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워온 경험을 통해서 그 아이들에게 우리 자식에게 그것을 계속해서 전해줄수 있고 손자 손녀에게 그것을 전해줄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요. 그것은 삶이고 경험 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죠. 우리 잠깐 시편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다윗은요, 이렇게 시를 썼어요. 이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그의 일생의 소원은 여호와의 전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고싶다는 말입니다. 이런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요, 우리는 이 시대에 여호와의 전, 성전이 아니고 모임이죠. 모임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의 권위가 있어서 그 말씀대로 우리가 순종 합니다. 그안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애를 통해서 계속해서 보고 살았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그 사람의 생각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심취가 되면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미술에 심취된 사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수 있는사람, 아니면 작곡하는 사람, 그들은 참 탁월한 유명한 화가나 유명한 음악가나 작곡가나 이런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저는 작곡가들이 그냥 머리속에서, 문학가들은 시상이 떠오르고 작곡가는 악상이 떠오르고 그래서 그냥 오선지에다가 점을찍고 콩나물을 그려가면서 적어놓으면 그것을 연주를 하면 말로할수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런사람을 알지만 우리가 주님의 전에 모임 안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 아름다움속에 우리가 젖어들어갈때,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나는 앙망하고 싶다. 그것이 그의 생애의 소원인데요. 그와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게 될때, 노년이 되었을때 그의 마음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까? 마치 아름다운 선율이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게 될때,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가는것처럼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일생을 보고 살게될때 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라고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마음을 여호와의 정직을 드러내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감상할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야기 할까? 자기 손자 손녀들에게 무엇을 전해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기업, 이것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을 남겨줘야 되겠다. 얼마나 많은 돈을 안겨주느냐? 이것이 아니고요. 그 아이들 마음속에, 손주들 마음속에 여러해 전에 있는 주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그의 삶을 통해서 전해지도록 하는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소원이라 믿습니다. 시편기자가 92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리라 그렇게 믿습니다. 조부모가요, 조부모 자신이 주님 안에서 이렇게 번성하게될때 진액과 진액이 넘치고 그리고 잎이 청청하고 그리고 열매를 계속해서 맺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녀들과 함께, 또 손자 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무엇을 전해줄까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시128:5-6).
여기 자식의 자식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해서 우리들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낳은 자식들이 어릴때 어떻게 젖을 먹이고 어떻게 기저귀를 갈고 어떻게 그 작은 아이들이 성장했는가를 보았는데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요. 결혼해서 또 다시 자식을 낳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자식의 자식을 보게되는, 이것은 참으로 커다란 복이죠. 저희들은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요. 아브라함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것을 묘사할때, 3세대가 같이 천막 속에서 살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11:9).
이 3세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삭과 야곱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삭만 아들이 아니예요. 이스마엘도 있습니다. 또 이삭에게는 야곱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에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에서가 같이 살았다. 이런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이런 말씀이 있죠.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장막에 함께 거했을 수도 있습니다. 뭐 아들이니까요. 물리적으로 그렇게 거할수 있었겠죠. 그것을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동일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라는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의 자녀가 동일한 믿음 속에서 살고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양육하기를 원하고 그 일을 위해서 모든 노력과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주님앞에 기도하고 살아야 하지요. 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의 자식이 동일한 약속, 동일한 믿음 가운데 거하는가? 라고 하는것이 지금 히브리 저자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령의 성도가 되어서요. 자식들에게 여떻게 영향할까? 그리고 자식이 낳은 자식들, 손자들에게 어떻게 영향할까라는 것을 생각할때,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세사람이 어디 살았습니까? 집이 아니고요. 장막에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건축자가 되신 그 성, 그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니고 하늘에 본향이 있다. 그래서 이 땅을 지나가게 될때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장막을 치고산다. 그들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는 말씀에서 보게 될때 조부모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어야 될까? 하늘의 소망이 있어야 된다. 거기에 영원한 위대한 것이 있다.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거기에 모든 보화가 있다. 그리고 거기를 우리는 소망하고 있다. 그 말이 할아버지 할머니 마음속에 있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손자 손녀와 함께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이 3세대에 대해서는요, 성경에서 여기저기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는요. 여호수아 시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순종해야 한다고 전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세대는 어떻습니까? 그 말씀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에 그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3세대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와같은 3세대의 위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세대가 위험일까? 아니면 3세대가 복이될까?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첫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줘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해주기 전에 먼조 본인들이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들이 이제 그것을 받아서 그들도 순종하고 그 다음 세대에 그들도 똑같이 전해준다면 3세대에 가서 그것은 복이 될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같은 믿음을 장막에 거했던 것처럼 그것은 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첫세대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무언가 이제 빠진것이 있다면 그 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3세대의 위험입니다. 3세대는 복이 될수 있고 위험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78편, 조금전에 그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아삽이 쓴 시인데요. 여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시78:1-8).
이 말씀에서 아삽이 마음에 두고 기록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위대한 비밀의 말씀, 이 말씀이 다음세대에, 후대에 전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아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부모의 역할, 부모의 역할은 자신들이 믿는 믿음이, 특히 그리스도인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들도 구원받고 그들도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지요. 조부모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자식이 그와같은 일을 하게될때, 자식들을 후방에서 지원해야 되겠다. 자식들의 결혼과 자식들이 가정을 이루는 일들에 대해서 조부모들은 기도하고 그것을 계속 지원함으로 인해서 자식이 그들의 자식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하고 양육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대해서 지금 저희들이 말씀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3세대가 동일약 약속과 믿음을 가지고 장막에 살았다는 말씀처럼 이 진리의 말씀이 계속해서 세대에 거쳐서 전해질수 있도록 하는것, 그것이 조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고 또한 기름이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제 손자 손녀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할 이유 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식에게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자식이 자식을 낳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 합니다. 자식에게 건강 주신것. 두번째는요, 가정 안에서 손주를 볼수 있는, 손주 자체 때문입니다. 손주의 건강입니다. 그것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태어난 아이, 손자 손녀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식을 낳게 될때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는 약속입니다. 자녀는 가능성입니다. 자녀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자녀는요,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약속이고요. 그들이 가능성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어떻게 펼칠수 있도록 하는가? 특별히 영적인 면에서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럼으로 그들의 삶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그리고 보람있고 성취감을 느낄수 있도록 그들이 그들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 가능성을 어떻게 펼칠수 있게 하는가? 라고 하는것을 부모도, 조부모도 생각해야 되겠죠. 뿐만 아니라 그들속에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 잠재력을 펼때에 일어날수 있는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아들 딸들이 건갱해서 자식을 낳을수 있으니 아들 딸이 건강한 것이 주님앞에 감사하고요. 그 다음에 그렇게해서 태어난 손자 손녀가 건강하니 주님앞에 감사하고요. 그 다음에 그 손자 손녀가 그 마음속에 또한 그의 육체속에 그의 영혼속에 잠재하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것이 미래의 어느날 가서 우리에게 펼쳐지게 될때 우리의 미래에는 어떤 위대한 일들이 있을까? 우리는요. 이스라엘의 성경 말씀안에 담겨있는 이스라엘 역사속에 나타난, 갑자기 지평선 속에 나타난 어떤 인물을 보게 됩니다. 때때로는 서서히 나타나고 때때로는 갑자기 나타나는 그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삼손을 보게될때 삼손의 시대는 대단히 비참한 시대였죠. 왜냐하면 그 전에 사사 시대에도 여러 사사들이 있었는데 그 전에는요. 어려움을 당하면, 잘못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어요. 그런때가 있었어요. 그들 자신이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때는 어땠습니까? 사사기 말씀을 읽어보세요. 삼손이 가서 뭔가 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블레셋을 섬기는것이 합당한데 당신은 왜 와서 우리르 이렇게 괴롭히느냐?"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있으면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암흑한 시대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되는데요. 그러나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일수 있는 비참한 시대인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를 통해서 사사를 일으키려고 했죠. 다른때는요. 그 부모에게 찾아와서 "네 아들이 일어나서 사사가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한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직접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 슬픈 시대에는요. 더욱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그 다음에 양육해서 성인이 되 가지고, 어느날 그가 이제 사사로서 일을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자와 손녀를 보게될때 그 아이들이 주님앞에서 어떻게 자라갈 것인가? 그들이 위대한 기둥이 된다면 이제 모임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영적으로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이 뒤집어진 세상인데 불의와 또한 죄와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높아진 마음과 이런 것으로 가득한 세상인데 그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을만한 우리의 후대가 나올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손자 손녀를 바라볼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이 아이들이 잘 가라게 될때 앞으로 몇년후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 라고하는것에 대한 기대. 그 말입니다. 그 기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만일 그것을 감사한다면요. 우리는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펼수 있도록 해 줘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조부모의 기능은 뭘까? 자녀들이 그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 일을 잘 할수 있도록 강력하게 지원해야 된다. 그리고 그 일을 하게될때, 옆에서 측면으로도 지원해야 된다. 부모가 그 아이들을 가리키지만 조부모도 옆에서 가리킬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을 선용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조부모가 그렇다면 손자 손녀를 다룰때, 그들과 대면해서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하고 또 놀아주고 할때, 어떻게 해야될까? 라는 점에서 몇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손주는 귀히 여겨야 된다. 당연한 말씀이죠. 귀히 여겨야죠. 그런데 왜 귀히 여겨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내 손주니까? 내 식구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죠. 자식은 내 자식은 아니지만, 내 자식의 자식입니다. 자식은 기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상급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청지기 직분을 가지고 있죠. 조부모는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조부모도 청지기 옆에 청지기 입니다. 그 아이를 잘 기를수 있도록 도와줄수 있는, 부모가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옆에서 도우미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요, 이 손주를 귀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 기업과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낸 아이가 아니고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셨죠.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할때 언제나 아이를 볼때 아이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봐야한다. 그러면 아이들을 귀히 생각할수 있죠. 만일 손주가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첫째, 하나님에게 잘못하는거죠. 자식들에게 범죄죠. 그리고 순주 자신에게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주를 귀히 여긴다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귀히 여긴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요. 자식을 존중하는 것이고 손주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손주의 성장과 발달, 직접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조부모는 그런 직접적인 책임을 담당하는 자식들에게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 우리는 이것을 주님 앞에서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다. 손주를 다룰때에 성숙한 손, 성숙한 손길입니다. 경건한 손길로 다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유리는 유니게와 로이스가 디모데를 잘 양육했습니다. 여기서봐도 3대 입니다. 여기 3대를 보면 로이스가 할머니죠. 외할머니예요. 그 다음에 유니게가 어머니 입니다. 그 다음에 디모데 입니다. 그의 디모데 아버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그 아이를 양육하게 될때 어머니와 할머니가 양육하게 될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양육 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때도 참 암울한 시대였죠. 다 하수에 가져다 던지라고 그를 죽이라고, 남아를 다 갓다 버리라고 했을때에 아므람과 요게벳은 바로의 음성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용감하게 용기있게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갈상자를 만들고 구원했지요. 그 용기, 그 용기는요. 그 아이를 살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식들이 태어났을때 우리는 영적인 전쟁속에 들어갔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역사가 마귀로부터 있다. 오늘날도 마찮가지 입니다. 이 그림에서요. 아이를 불에다가 드리죠. 여기다가 불땝니다. 이 우상은 뜨겁게 달궈져 있어요. 대단히 뜨겁습니다. 이 아이를 여기다가 올려놓을때에 이 아이는 불에서 타 죽습니다. 이것은 옛날 가나안 족속들이 행했던 악한 행실이다. 이렇게만 짚고 넘어가지 마십시요. 우리들은요, 아이들이 구원받는 가능성이 있을때에 그들을 내버려두는것은 이것과 거의 비슷한 짓입니다. 구원받아야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 그 말씀이 그들을 살린다라고 하는데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이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서 탤런트나 가수나 또 BTS나 이런거에 몰두해가지고 가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둔다. 세상의 가치속에 빠져들어가는데 그냥 내버려둔다. 이것은 아이로하여금 멸망으로 가게하는 그와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도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멸망 하라고 하는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이와같은 일에 이 사람들이 행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우리도 할수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의 아이를 앗아가고 그리고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지 못하도록 그렇게 부단히 역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전쟁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일에 대해서 부모가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기에 함께 가담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겨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 말씀앞에 서야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손자 손녀가 믿기에 그렇게 자라게 될때, 모임 안에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수 있는 그런 재목이 되지 않을까? 형제라면 자매라면, 가장으로서 돕는배필로서 미래에 이런 위대한 일을 할수있지 않을까? 형제가 그와같은 일을 할수 있고요. 자매라면 그 사람 옆에서 돕는 배필이 되어서 그를 지원해줄수 있는 그와같은 사람이 될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한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여러 아이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라는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것들이 이 기업속에, 상급속에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한 손으로, 경건한 손으로, 우리 아이들을 손자, 손녀를 그렇게 다뤄야 되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이 이렇게 오게될때, 아이들을 봐주잖아요. 여러가지 집집마다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봐 줄수 있는 상황, 봐줄수 없는 상황도 있겠고요. 봐주게 될때 얼만큼 봐줄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아이들을 봐주는 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능으로 전부라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이들을 봐줄때에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 라고하는것을 조부모가 생각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놀아주게 될때 그냥 놀아주는것이 아니고 그 아이들과 함께 부모도 그런일을 하고있죠. 그런데 조부모가 어떻게 이 아이들에게 그 어린 아이들일 구원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 안에서 잘 성장할수 있을까? 라고 하는 기도와 그와같은 노력이 이와같이 주어지는 시간안에 주님앞에 드려져야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기회를 포작해서요. 우리 손주들에게 가르쳐야 됩니다. 조부모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아버지쪽이 없었습니다. 헬라인이고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고요. 어쩌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그에 대해서는 성경에 별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편에 결여되어 있는 사람, 이것은 참 어떤 면에서는 기능적으로 결손가정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믿음안에서 결손 가정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 어머니의 영향력,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틀을 만들어주고 그리고 표준과 기준과 권위와 이런것들을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틀이 있다면 그안에 아름다운 내부공사, 내부장식, 그런것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함이 있다면 어머니의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잘 조화가 될때, 아이들은 '아, 남자의 역할은 이런 것이구나. 아버지의 역할은 이런 것이구나. 어머니의 역할은 이런 것이구나.' 라고하는것을 균형있게 받아들여서 성장하게 될때 정상적인 발육을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점에서 보게될때, 믿음에서도 마찮가지죠. 디모데의 가정은 결손가정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공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경우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사실 많은 부족이 이 가정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디모데는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을까? 여러분, 우리 가정의 결손이 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나 자신이 우리 가정을 생각할때 대단히 불행한 가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만일 여러분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이제 구원을 받고 모임에 들어오게되면 내 가정속에 내가 살고있는 가정속에 결손이 모임을 통해서 많은것이 보상이 됩니다. 남자쪽에 영향력이 없었다. 모임안에 들어와서 다른 영향력을 통해서 그 부족한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채워주십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디모데의 경우는요, 어머니가 있고 외할머니가 있고 거짓없는 믿음이 전달이 되었거든요.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결손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믿음이 전달이 되었다. 어떤때는요, 이런 결손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사라져 버리고요. 그런 애기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이 될수도 있어요. 그러나 디모데의 집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게다가 사도바울을 만났을때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쪽의 기능을 사도바울이 맏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안에서 가능한거죠. 이것은 오늘날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기회를 포착해서 손주를 가르쳐라고 할때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수 있습니까? 우리 손자 손녀가 볼때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전달해 줄것이 뭘까라고 하는것을 생각하고 만난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만나는것이 아니라 이번에 만날때는 무엇을 전달해 줄까? 영적으로 어떤것을 전달해 줄까? 라는 생각을 해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참 합당한 태도, 기능을 우리가 발휘할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한가지요. 할아버지 할머니는요. 손자 손녀들에게 이것을 얘기해 줄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인이 일생동안 주님을 믿고 살아온 것에 위대한 경험을 이야기해 줄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이것이 다윗이 고백한 자신의 경험 입니다. 그는 주님을 믿고 따라오면서 그가 살펴본 모든것을 통해서 결론내린것은 의인이 걸식하거나 그 자식이 무언가 부족해서 방황하는 그런것을 본적이 없다. 그것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노령의 다윗이 그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것은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거든요. 이 경험을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을 얘기해 줘야 된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구원을 받았고 또한 믿음 안에서 자라는 손자, 소녀들이라면 그들은 말씀을 배웁니다. 말씀에서 위대한 주님의 진리를 배웁니다. 어떻게하면 주님을 믿고 따라갈수 있을까? 어려울때도 여전히 주님을 믿어야 된다. 또 어려울때면 주님앞에 기도해야 된다. 또 인내하고 기도해야 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믿고 따라가고 또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인해서 그것이 이루어질것을 기대해야 된다. 이런 모든것들을 그들이 배웁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요. 일생동안 주의 말씀을 믿고 따라오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다. 때로는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했지만 그래서 어려움도 경험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다라고하는 경험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믿음 가운데 살아왔다면 그것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재산입니다. 이 재산을 아이들에게, 그들은 지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게 살아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책임을 져 주셨다. 라고 하는사실을 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 줄때 그것을 산 경험으로 그들은 받아들이게 되고요. 그들이 배워온 이 위대한 진리를 이제 먼저간 할아버지 할머니의 믿음과 같이 자기도 가야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동기를 강하게 부여해줄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할아버지 할머니가요. 아들 며느리, 또 딸과 사위, 그들이 때때로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워지고 사회적인 어려움들, 그리고 때로는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고요. 또 재정적 압박속에 빠져들게 될때,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할까? 라고하는 문제를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어려움 때문에 마치 옛날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었을때 어려워서 포기하고 이집트로 갔던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이 성숙한 결혼한 자녀들이 여러가지 다양한 경제적인 어려운 상황속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그렇게하다가 결국에는 믿음의 길로 가는것 보다는 현실로 타협해야 되겠다고 하는 시험을 받게 될때, 우리 조부모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조언을 해줘야 할까?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험을 비추어봐서라도 주님앞에 좀더 기다려야 되지 않겠는가? 조급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주님을 우선으로 하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찌라도 이제 말씀을 중심으로해서 모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것을 옆에서 격려해줘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입니다. 그와같은 격려를 하게될때 우리 자녀들이 힘을 얻게 되고요. 비록 어려워도 이제 믿음을 중심으로 하고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선택하는 그런 자녀들이 되어서요. 그들이 기르고 있는 손자들이 이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것은 너무나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모임을 떠나거나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원인이 있습니다. 모임을 떠나서 가게될때 자녀들이 이제 방황하고요. 믿음으로부터 떠나가게 되는 분명한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일차적으로 부양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울때에 그들은 그 현실에 굴복해 버린다면 본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손자 손녀가 어려운길로 갈수 있다. 그래서 이와같은길에 있어서 이제 큰 틀에서 이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격려하고 주님 안에서 인내하고 주님을 좀더 믿음가운데 기다리라고 하는 그와같은 권면, 이와같은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와같은 일로 인해서 순종하는 자녀들이요. 자기들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자식들, 할아버지 할머니 편에서 볼때, 손자 손녀들도 다 주님 안에서 보존될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믿음 가운데 권면하고 권면을 자식들이 받아들이고 손자 손녀들을 어려움 가운데 사단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와같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멀리 감으로 인해서 아이들을 잃어버리는 것, 아이들을 뺏기 위해서 사단이 그렇게 하죠. 그와같은 관점을 우리 자녀들이 볼수 있도록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와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또 믿음 가운데 권면하는것은 꼭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구원이 꼭 필요하다. 우리 손자 손녀에게 구원이 꼭 필요하다. 이거는 그들이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들었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듣고 주일학교 선생님에게서도 듣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두번째 그들이 구원받고나서 주님의 보호를 그들이 받고 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야 된다고 하는 가르침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뿐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도 받는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행복이겠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구원받고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것은 실제적인 것이고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 것이다. 손해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라고 하는것을 자녀들에게, 또한 분만아니라 우리 손자 손녀에게 가르쳐줘야 되겠다고 하는거죠.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창48:5-6).
참 성경의 독특한 그런 사건인데요. 오랫만에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지 꽤 오래 되었죠. 어느날 소식이 왔습니다. 아들이 살았을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기절할뻔 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서 온 수레를 보고 오늘날로 말하면 롤스로이스나 벤즈나 이런것들이, 왕이 보내는 총독이 보내는 위대한 자동차, 수레 왔을때요. 그는 힘이 났습니다. 그는 깨어났어요. 그리고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하는것을 알았어요. 야곱은 말년에 가서 그는 옛날에는 육적이었던 사람이었고, 물론 하나님의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의 속한것에 대해서 그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을 얻는 방법은 육적인 것이고 자기 꾀를 사용했어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오랜세월동안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징계 이후에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고요. 그래서 우리는 요셉을 기르게 될때 요셉과 그의 형들은 성격적으로나 그의 삶에 있어서 전혀 다른사람이다라는 것을 우리 알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아버지로서 영적인 사람이었느냐? 아니면 육적인 사람이었느냐? 라는것때문에 그로인해서 나타난 결과 입니다. 요셉은 불의를 싫어했습니다. 의를 사랑했습니다. 우리 주님을 잘 묘사하고 있죠. 그런 탁월한 아들을 데리고 있다가 잃어버렸어요. 그리고나서 아들의 초청에 의해서 애굽으로 들어왔습니다. 애굽에 들어와서 그는 살면서 17년을 살지요. 그가 살면서 요셉이 흉년이 되기 전에 얻은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요셉지파가 있지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있다고 하는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죠. 그 연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 합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요셉도 내 아들이지만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 아이들도 내 아이들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애착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야곱은 요셉이 애굽에서 그는 히브리 사람이지만 상황속에서 거의 애굽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요셉 마음속에는 자기는 절대로 애굽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어디서 압니까? 그는 총독의 직분 때문에 히브리로 간적이 없지만, 자기 아버지의 장사 외에는 간적이 없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독으로서 공무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나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 그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것을 믿음으로 그는 자기뼈를 해골을 가나안으로 가지고 갈것을 명령하지 않았어요? 요셉은 애굽인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 인이었어요. 우리 서양에 살면서요. 동양인인데 마음은 서양인인 사람을 바나나라고 부릅니다. 밖에는 노랗고 안에는 하얗기 때문에 바나나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냐? 요셉의 마음은 히브리에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약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이 아들들도, 손자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왔을때, 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아직 흉년이 오기전에 이 두 아들을 얻었을때요. 제일 처음에 얻은 아들, 이 아이들을 얻었을때 요셉은 자기가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형들을 자기를 얼만큼 미워해서 이제 죽이고 싶은 상황까지 갔다가 그는 어떻게 어떻게해서 이제 팔려서 노예가 됬고 그렇게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나서 그는 이제 바로에게 불려와서 꿈을 해몽하고 총독이 되었죠. 그가 총독이 된 이후에 얻은 첫번째 아들, 그 아들을 생각할때요. 나의 아버지의 집의 모든 일들을 잊었다고 했어요. 요셉의 마음속에, 요셉이 만일 그의 본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총독이 되었으니 내 형들을 만나면 나는 보복할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요, 자기의 모든 과거의 억울함과 도한 울분과 도한 분개와 이런모든것으로 그는 자기연민에 빠질수도 있고요. 괴로움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이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것을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극복하고요. 이제 아들을 얻었을때 나의 아버지 집의 모든것을 잊었다. 우리는 과거의 슬픔과 괴로움 이런 모든것들 때문에 화병이 나고 괴로워하고 이렇게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이길수 있을까요? 요셉은요, 하나니을 의지했고요. 이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위대한 은혜를 생각할때, 과거의 이런 모든 것들은 자기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기 마음속에 와 있지도 않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병이나 분개, 또한 적개심 그리고 보복감, 이런것을 이길수 있는 유일한 힘은 나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풍성한 것을 허락하시게 될때 그 풍성함이 나는 너무나 넘쳐서 내 영혼은 그 안에 넓은 바다를 헤엄치다가 과거의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므낫세 입니다.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두번째 아들을 낳았을때 그 아들은 창성함입니다. 이제 과거의 이런 모든것을 잊어야만 우리는 번영합니다. 여러분과 제가만일 과거의 나의 모든 슬픈일들, 나의 억울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안고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번성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요. 우리가 이 모든 과거에 슬픈 일들을 극복할수 있도록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로 우리의 영혼과 마음속에 채워주십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사람이었어요. 너무나 많은것을 받아서요. 과거의 그런것들이 자기의 마음속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므낫세 입니다. 이 두 아들을 야곱이 만났을때 "이 아이들은 내 아이들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아이들은, 그 아이들은 이집트에서는 귀족입니다. 귀족 앞에서 영예로운 이라는 말씀이 들어갑니다. 타이틀입니다. 캐나다에서도요, 국회의원들 앞에는 영예로운이라는 칭호가 들어갑니다. 이것은 귀족계급입니다. 애굽의 귀족계급입니다. 므낫세는 귀족입니다. 에브라임과도 귀족이예요. 그러나 그를 자기 자식으로 입양한다고 하는것은 애굽인인이 아니고 히브리 사람이라는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이을사람이라고하는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마음으로 이제 찾아왔어요. 그리고나서 8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창48:8).
여기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두 아들을 보고 "이들이 누구냐" 다 압니다. 그 아들이 누군지 다 알아요. 그런데 왜 누구냐고 묻습니까? 결혼식할때, 신랑 신부가 있는데요. 주례하는 사람이 이렇게 묻지요. "누가 신부를 신랑에게 주시겠습니까?"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아닙니다. 예식입니다. 예식이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데리고 신랑에게 건네주지 않습니까? 그때 질문하는 그와같은 비슷한 느낌입니다. 축복하는 이와같은 시간에 "이들은 누구냐?"라고 그와같이 물었어요. 분명히 요셉은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주신 아들"이라고 말하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고 말했어요. 이 아들을 축복하게 될때, 이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아들이예요. 야곱의 두 아들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또 두 아들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축복하게 될때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창48:15-16).
여기 하나님께서 축복하는것은, 내가 복을 주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복을 주시라고 요청하는것이 축복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요청하는 겁니다. "이 두아이들에게 하나님 복을 주십시요."라고 할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어요? 첫번째,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자기만 섬기는 하나님이 아니고요. 아버지도 섬겼고 할아버지도 섬겼습니다. 이것이 3세대 아니예요? 이것이 3세대 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그다음 두번째,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먹이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나의 출생때부터 나를 돌보시고요.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야곱은 알고 있어요. 야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야곱은 먹고 사는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철저히 잘 알고 있고 열심히 일한 사람입니다. 라반에게 속아서요. 모든 셀러리를 다 뺏기고 그리고 나중에 요셉이 태어났을때 뭐라고 했어요? "삼촌은 내가 이렇게 노렸했어도 다 가져 갔지만 나는 무얼 가지고 내 집을 세워야 되겠습니까?" 야곱은 그런데 굉장히 고민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축복하게 될때, 하나님을 가리켜서 "내가 났을때부터 지금까지 그분께서 항상 나를 먹이셨다. 나의 모든 필요한것을 공급하셨다." 이것이 야곱이 노령때에 이제 주님께로 가기 거의 직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경험 아닙니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다. 경험 입니다. 그의 경험이예요. 산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누구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자기 아들들, 사실 손자죠. 손자들에게 지금 이야기 하고 있어요. "내가 믿은 하나님은 항상 나를 먹이셨다. 절대로 너희들도 굶게하지 않는다."라고 하는것을 지금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확실히 안다면요. 일억 수십억 수백억을 주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왜? 그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공급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들은 위엄있게 생활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간증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요. "나를 모든 환난에서 악한 사건에서 건지신 사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했을뿐 아니라 또 필요한 것이 있어요. 내가 위기에 빠졌을때, 내가 생사가 어려워지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속에 빠졌을때, 그때도 하나님은 거기서 나를 건져주신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교제해 주어야 될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님을 믿고 따라온 이 모든 세월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돌보셨다. 그 돌보심은 너무나 철저해서 한번도 쓰러지거나 넘어진적이 없다라고 하는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줄때, 그것을 그 아이들이 확신 가운데 받아들이게 될때 그것은 얼마나 강력한 믿음 가운데 살수 있겠습니까? 손주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실천하거나 실행하거나 그럴만한 겨를이 없습니다. 지식으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지식에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해 주게 될때, 그들의 믿음은 점점 강화될 것입니다. 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아직도 그는 그런것을 경험을 못했다해도 그들 마음속에 이미 기대하면서 실행하게 되고 또 실현하면서 그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자 손녀들과 감동적인 시간을 갖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감동적인 시간을 갖습니까? 인간생활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실제적으로 도우셨다는 것을 나눌때에 그것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때 그것처럼 감동적인것이 없어요. 특별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는것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손주들을 위해서 이와같은 이야기를 해주게 될때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우리 하나님은 신사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사가 무엇입니까? 신사는 말하는 것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 이것이 신사입니다. 신사복 입는 사람이 신사가 아니고요. 신사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요. 절대로 지키는 그런사람이 신사인데 그런사람의 가장 위대한 본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요. 절대로 우리를 공수로 보내거나 우리로 하여금 실망하게 해서 보내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을 반드시 지킵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에게 우리 하나님은 신사다라고 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말씀해 준다고 하는 겁니다. 손주들을 어떻게 우리는 다뤄야 할까? 손주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손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요. 손주들과 함께 기도해야 됩니다. 손주들을 안고 기도해야 됩니다. 따로 앉아서 손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상은 손자 손녀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24시간 365일 지키고 봐야되는 존재 입니다. 부모가요, 자식을 24시간 365일 보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아이들이 조금 커서 학교를 갈때, 또 나가게 될때, 아주 어릴때는 진짜로 24시간 365일 봐야지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고치죠.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씩 크면서 자기 혼자있는 시간이 허용이 되겠지요. 학교를 갑니다. 몇시간동안 부모가 같이있지 않는 기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바이바이 하면서 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게 될때, 거기서 나쁜 아이들도 만날수가 있고요. 길 가다가 사고가 날수도 있고, 온갖 가능성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그 시간을 맏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도록 맏기는 거죠. 그리고 그 시간에 무얼 합니까? 맏길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서 돌보시겠지라고 하는것이 아니죠. 그 아이들이 떠나가서 돌아오는 순간까지 아버지 어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 아이들을, 손자 손녀를 학교에 보냅니다. 그 보내는 자녀들 마음속에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요.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염려를 주님앞에 의지 합니다. 그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 마음속에 주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자녀를 생각하고 주님이 돌봐주실 것을 염려하고 기도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가정은 참으로 견고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소원하시는 가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이와같은 네트웍을 원하십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기 자녀, 그것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죠. 또 부모 자식, 아들 부모자식, 아들 부모들이 그 자식들과의 또 관계가 있어요. 이 전체적인 관계를 묶어주는 것은 기도 입니다. 우리가 일일히 학교에 가서 그 아이들을 볼돌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그렇게할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안전하게 보존되고 악한 영향력에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구원받고 성장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부모와 조부모는 기도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올때 어떻게 했습니까? 탕자가 멀리서 올때에 뛰어나가서 그를 맞지요. 그 아버지의 마음속에 아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관심과 기도와 돌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때때로 조부모가 세대차이 때문에요. 요즘 아이들은 우리와 말도 안하고 생각이 다르다. 이렇게 그냥 일축해 버리고 그냥 현실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우리는 점점 세대차이를 만들어 버리죠. 그 아이들과 절대로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대차이가 있고 시대가 달라져도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이 변치않는 가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하고 다루고 될때 우리는 세대차를 충분히 극복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세대라도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것은 우리의 가장 커다란 행복이다라고 하는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남은시간동안에 손자 손녀를 돌보고 있는 우리 자식들에 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인이 된 자식은 가능성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한 자식. 아니면 독신으로 살지만 성인이 된 자식. 이 자식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첫째, 결혼한 자식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될까? 첫째, 우리는 자식들이 결혼하고 부부 사이의 관계가 아주 좋은관계에서, 금슬이 좋아서 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다른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가정의 간증을 보존하고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같은 소원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부부생활이 어떻게 될 것이냐? 우리는 모릅니다. 부부생활속에 우리는 다 들어갈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가 구원받은 자녀로서 결혼한 자녀로서 결혼생활을 하게될때, 부부들은 어떻게 살까? 내 아들은, 내 며느리는 내 딸은, 내 사위는 그 부부사이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까?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때도 있지만 어려울때도 있습니다. 대화가 잘 될때도 있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견이 생길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측할수 없는 수많은 상황, 우리는 다 알수 없습니다만 이 모든일에 대해서 주님앞에 의탁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금슬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관계 속에서 행복한 관계 속에서 갈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 주시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요,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때때로 여러가지 직장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거나 또한 여러가지 직장 안에서 상관과의 관계. 상관이 어떤때는 불의할수 있습니다. 대단히 악질적이고 부하를 이용하거나 그런 악한 상관도 있습니다. 그와같은 직업 상태에서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서 지금 일하고 있을때 그들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어떠한 상황속에 들어갈까? 어떤 위기속에서 그들은 일터에서 돌아와서 부부사이에 무슨 대화를 할 것인가? 여러가지 상황이 어려워 졌을때 그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갈 것인가? 많은 다양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런점을 우리가 다 알수 없지만 주님앞에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자녀들의 결혼한 자녀의 부부생활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앞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하고 대화를 잘 유지하고 또한 문제가 있을때에 서로 잘 화해하고 용서하고 너그럽게 대하고 또한 어려움 가운데 서로간에 화해함으로 극복하고 도와주고 세워서, 가정을 세워가고 부부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또한 자녀교육의 문제가 있습니다. 결혼한 우리 자녀들이 자녀들을 기르는 일에 있어서 이것은 한마디로 자녀 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얼마나 다양한 사건들이 있습니까? 아이들의 나이도 다르고요. 또한 그들이 성격도 다 다르고 또한 그들이 이제 학생이라면 어린 학생으로 유치원이나 또한 초등학생이라면 그들이 학교에서 아이들, 손자손녀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른 여러가지 또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그와같은 문제를 부모가 어떻게 해결하고 또한 그 문제에 어떻게 조언하고 어떻게 훈육하고 간다고 하는것은 상당히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과 이와같은 문제들을 놓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할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앞에 이와같이 결혼한 자식에 대해서 '이제 결혼했으니까 본인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해야 됩니다. 그들은 독립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책임은, 1차적인 책임은 부모가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부모의 역할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부모를 돕는일에 있어서 조부모는 기도로 또한 그들과 만나서 조언으로 격려로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아들 딸에게 조언을 조언을 주고 지원을 할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과도 만나서 지원을 하고 기도하고 이와같은 일은 주님께서 저희들을 향해서 원하시는 그런 소원이시겠죠.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자녀들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결혼으로 들어갈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에 들어가서 결혼한 이후에 그들이 사는삶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앞에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성인 자녀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알수 없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한것처럼 그들을 주님이 독신으로 인도하시고 그런 은사를 주시던지 아니면 이제 장차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 할런지,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독신자녀가 주님 앞에서 청성되이 주님을 섬기고 마음속에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며 섬기고 나갈수 있도록 격려하고요. 계속해서 위로하고 또 붇들어주고 또 기도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독신자녀, 성인 자녀를 통해서 빨리 결혼하라고 압박을 주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에게 얼만큼 더욱 더 힘들겠어요. 이와같은일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조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와같은 일은 해서는 안되겠죠. 그대신 그와같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의 결혼을 위해서 본인도 생각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와같은 일에 곁에서 기도와 격려로 그들을 계속해서 도울수 있다면 주님앞에서 잘하는 일이라 그렇게 생각 합니다. 결혼한 자녀들, 바쁜 삶 속에서, 얼마나 바쁩니까? 조부모는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제 은퇴하고 더이상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 자식들을 생각할때, 우리는 조금 편한 그런삶을 살고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직장전선에 나가서 지금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겠죠. 그래서 그들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는 그냥 집에 있는 동안에 그들은 지금 무엇을할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수많은 일들로 인해서 업무상의 많은 책임. 또는 사업상의 성공을 위해서 고민하는 일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 나름대로 이 일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주님앞에 기도하는 그와같은 상황속에서 그들이 마음속에 염려로 고민으로 괴로움으로 무거운 짐의 부담으로 괴로워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이 시간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그들의 마음이 평안을 유지하도록 주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일을 할수 있도록 뒤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지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직장에 나가서 대인관계, 수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일합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직종도 다 다르고 또한 상황도 다 다르고 동료들의 성격과 상관과 부하직원과 모두가 다 다른 상황속에서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만날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또 그들이 마음속에 분노 때문에 격분함으로 인해서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직장 안에서 일하게 될때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계속해서 보존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반응하지 않고 세상 사람처럼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가지고 자제하고 또한 인내하고 또한 악한 상관이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우리 자녀가 잘 그것을 감당할수 있도록 그리고 하급 관리에게, 또는 자기 밑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대해야 될까? 동료들과 어떤 관계속에서 가야할까? 라는 점에 대해서 부모님들은 생각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부부생활 속에서 아들이면 나의 며느리, 나의 아들의 아내를 향해서 어떻게 대화하고 어려움이 있을때, 격분하거나 또는 용서하지 않거나 또는 과격하거나 혹독한 말을 하지 않도록, 그래서 부부관계가 위험한 상황속에서 계속해서 잘 보존될수 있도록 부모는 기도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원수가 우리 그리스도인 마음속에 찾아와서요. 우리의 간증을 망치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험을 하거나 유혹하는때가 있죠. 그래서 이 상황은 너무나 악하다. 나는 너무나 불의한 것을 당했다라고 해서 우리가 이제 격분함 가운데 나온다면 우리 간증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원수가 원하는 것이죠. 그런점에서 주님께서 원수로부터 우리 아들 딸들을 보호해 주시도록 그래서 우리 손자 손녀를 잘 양육할수 있도록, 그리고 본인들의 삶이 주님 안에서 행복할수 있도록, 간증이 계속해서 유지될수 있도록 기도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이 선한 남편이 되고요. 너그러운 남편이 되고 용서하는 남편이 되고 잘 인도력을 가지고 가정을 이끌어갈수 있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남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가지고 바른 선택과 바른 분별을 통해서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마음이 될수 있도록 그는 인도력을 발휘하고 발휘해서 아이들을 잘 교육할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들 마음을 계속해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딸들은 결혼한 딸들은 남편에게 돕는배필로서 남편에게 선행을 하고 남편이 믿을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이것은 현숙한 여인의 잠언 31장에서 나오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죠. 그래서 남편이 선행을 하고 그리고 남편이 항상 믿을수 있도록 하고 또한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과 하나가 되어서요. 인도력에 잘 순종하고 나갈수 있도록 그래서 그 집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대행권위가 잘 설수 있도록 그래서 자녀들이 그 권위 하에서 순조롭게 잘 자랄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요라고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자식들 마음속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유지될수 있도록 염려 대신에 기도하고 또한 근심 대신에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될때 주님의 은혜가운데 믿음을 행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붇들고 나갈수 있도록 그래서 그와같은 경험이 그들 마음속에 확고하게 세워져서 자식들에게도 그와같은 것을 잘 가르칠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요. 우리 자식들이 주님을 위한 소원과 또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위대한 일들이 되어지기 위해서 꿈을 가지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소원을 가지고 그렇게 모임을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행할수 있도록 주일학교를 돕고 젊은 형제자매들의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을 그 가족이, 남편과 아내가 한 심이 되어서 모임 안에서 일조할수 있는, 힘을 보탤수 있는 그와같은 가정이 되도록 조부모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결혼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들 딸의 언어생활에 있어서요. 그들이 서로 대화하게 될때, 이 대화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대화가 잘 이어질수 있도록 친절한 말로 은혜를 서로 나눌수 있는 말로, 어려울때 격한 말로 이제 험악한 말로 서로 대화함으로서 부부관계가 깨지고 또한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주님께서 도와 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요. 이와같은 말을 통해서 오히려 은혜를 끼칠수 있도록 그래서 가정안에서뿐만 아니라 자식들 앞에서 자식들을 인도하게 될때 언어생활이 자식들에게 본이 되도록, 그리고 모임 안에서 이와같은 언어생활로 인해서 덕이 되도록 주님께서 우리 자식들을 도와 주십시요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업에서, 일터에서, 직장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모임에 형제 자매로서 또한 역할이 있습니다. 또한 사회생활에서의, 칙척 관계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을 길러야 하는, 양육해야 하는 엄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일에서 "주님 이들을 도와 주십시요. 주님께서 그들을 그들을 도우심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 합니다. 오늘 저희들은 조부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와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조부모는 백발을 가지고요. 이것은 사람들 앞에 나이를 과시하기위한 그런 백발이 아니라 지혜를 가지고요. 우리 자녀들을 지원하고 손자 손녀들에게 엄청난 유익을 끼칠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요 우리 가정이 견고할뿐만 아니라 이것은 모임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또한 주변 사회에 복음을 위해서 위대한 역할을 할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들을 조부모가 된 형제 자매님들을 도와주시고 또한 아직 조부모가 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조부모를 바라고 계신 성도님들을 도와 주시고 또한 그보다 훨씬 아직 먼날을 바라보고 있는 형제 자매님들은 이와같은 지식을 가지고 미래를 대비하고 주님앞에서 도움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끝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사람의 집 차트 (0) | 2021.07.20 |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10_독신생활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9_소성인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8_청소년기2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7_청소년기 > (0) | 2021.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