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7_청소년기 >
오늘 이 시간에는 청소년기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4:39).
이 말씀은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배 타고 가실때, 광풍이 있고 파도가 있었죠. 주님 주무시고 계실때에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주님을 깨우며 "우리가 다 죽는데 주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했었을때, 주님 일어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또 바람을 고요케 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청소년기를 생각할때, 10대 독특한 기간 입니다. 이 기간을 많은 사람들은 폭풍의 기간이다. 라고 생각하고 또 이때, 어떻게 우리 자녀들이 이 기간을 통과할수 있을까, 생각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두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폭풍 가운데 피도가 치는 기간이든지, 아니면 잔잔한 바람이 고요하고, 파도도 고요한 기간이 되든지, 그런데 이 기간은 그냥 파도도 없고 바람도 잔잔한 기간이 될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읽은 것처럼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계실때, 그때만 파도가 고요할수 있습니다. 이 10대 기간이라고 하는것은 어제 저희들이 잠시 생각해 본 것처럼 10대 자녀들 마음속에 혼란스러운 기간이다.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많은 도전이 오는 기간이다. 왜냐하면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의존되던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사는 기간으로부터 성인이 되 가는 과도기에 있는 기간이죠. 따라서 이 기간은 인생에 있어서 출생 이후에 첫번째 일년동안 아이들은 대단히 빨리 성장하죠. 그것 이후에 좀 잠잤다가 그리고 10대 이후, 사춘기에 들어와서 대단히 빨리 성장하죠. 급격히 성장 합니다. 육체의 변화, 이것은 이 기간의 특징 입니다. 특별히 2차 성징이 나타나고 호르몬이 활발하게 역사하고 그래서 몸이, 우리 자녀들, 남자 아이들이나 여자 아이들이 급격히 변화하는 그와같은 기간이기 때문에 놀라운 겁니다. 중세나 폐쇠된 사회에서 그것도 카톨릭 종교가 아주 강하던 이러한 시대에 우리 육체의 성장에 관해서 별로 잘 이야기 하지도 않고 또 말하고 대화하고 있지도 않았던 그런 시대에, 아이들이 10대에 들어와서 육체가 변하게 될때, 그들은 대단히 놀라고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할수 없고, 그런 시대도 있었습니다. 여자가 초경을 하게될때, 고민과 괴로움 속에서 사제에게 가서 자기는 다른 죄를 져서 내 몸이 썩어가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우리 자녀들 마음속에 언젠가, 자녀들의 성장을 대적하고 그들의 영과 혼과 육의 발달을 방해하고 또한 그들의 영원한 미래에 대한 길에 있어서 혼란과 그런 것들을 가중 시키고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단의 공격이 있죠. 우리 자녀들이 육체가 성장하게 될때 그런 육체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물론 그런것에 대해서 오늘날은 잘 이야기 해 주고 그런 모든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행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2차 성징이 새롭게 생기고 몸의 급격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욕구와 또 그로인해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잘 살피고 또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바른길로 가이드 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이것뿐만 아니라 10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 그리고 독립하고자 하는 그와같은 생각 속에서 나타나는 도전들, 독립하고자 하죠. 어른이 됬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따라오는 어려움들, 그 다음에 그들이 무엇을 믿느냐, 자신의 가치관, 또 자신이 생각하는 확신, 이런 것들에 대해서 혼란이 오고 이와같은 도전 속에서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점들은 저희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춘기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생각들이 있습니다.이런 사춘기에 대해서 저희들이 생각하고 10대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 합니다. 사춘기는 10대는 폭풍노도의 기간이다. 아이들은 반드시 반드시 폭풍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정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같은 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이와같은 일로 인해서 폭풍노도 속에서 배가 뒤집히고 그래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을 우리는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 구원받은 우리 자녀들은 십대를 통과하게 될때 전혀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10대를 통과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요건, 반드시 10대를 통과하기 전에 구원받는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말씀의 권면을 통해서 저희들이 발견하고 있는 해답 입니다. 반드시 구원받아야 합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래야 정체성을 확실히 알수 있다. 내가 누군가?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10대때에, 어릴때 구원받게 될때,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죄인이다. 죄 가운데 잉태되었고, 죄 가운데 태어났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하는 정체성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하늘나라로 가고 있다고 하는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것은 대단히 복된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원하시고 우리 부모에게 자식들이 그와같이 구원받고 앞으로 닥치게 될 여러가지 도전의 기간인, 십대 기간중에 잘 통과해 나갈수 있도록 하나님은 소원하시고요. 저희 부모들에게 그것을 권하시죠. 그런데 구원받았기 때문에 십대에 여러가지 여러가지 도전들을 자동적으로 쉽게통과할수 있는것은 물론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어도 이것은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의 육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육은 십자가에서 사실상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옛 사람은 죽었고 또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믿음으로 그렇게 여기고 또 우리는 그 위대한 사실을 믿음 가운데, 순종함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우리 몸이 성령님께 굴복하고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하는 그와같은 위대한 진리와 책임이 있죠. 이와같은 진리는요, 이것은 로마서 6-8장의 진리 입니다. 성경이, 서신서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진리 아닙니까? 이 진리를 우리 자녀들이 구원받고 난 이후에 배우고 이것을 이해하고 순종해야 될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줘야 됩니다. 이제 구원받고 침례를 받게 될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이 사실을 예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증인들 앞에서 우리가 실행하죠. 이것은 단순히 예시일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게 될때, 실제로 우리가 구원받았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이제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을, 어릴때 이와같은 진리에 대해서 구원받은 후 우리 자녀들이 배우고 또한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해가는 그와같은 생활이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부모님들이 가르쳐주고 물론 모임에서, 주일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그들 수준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제하고요. 십대에 닥쳐오게 될 여러가지 도전, 문제들, 가능한 문제들을 이길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십대가 되면 아이들은 다 각기 문제가 있는 것이다라고 단정짖는 그와같은 사고방식,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십대이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문제가 있는것은 대단히 정상이다라고 생각하는것, 그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런 생각들은 왕왕 대화가운데서 부모님과 이야기하게 될때, 쉽게 발견할수 있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십대가 지나면 십대 가운데 있었던 문제들이 저절로 그냥 사라진다. 이것도 잘못입니다. 또한 십대 기간중에 문제가 있었던 아이들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이것도 잘못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있고 알고 있고 또 그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어려운 시기에,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우리 자녀들이 이제 어떻게 그와같은 문제로부터 해결을 받고 또한 구원도 받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올수 있을까? 부모님들, 주일학교 반사들, 또 모임의 성도들, 기도하고 주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잠시 잠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7-9).
이 말씀에서 제일 첫번째 위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계명은 여호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계명은 그것은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입니다. 그것을 듣고 거기서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일 첫번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듣는것, 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요.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십계명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제일 첫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과 관련된, 하나님을 향한 책임 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번째부터 열번째 계명은 사람, 인간을 향해서 행해야 될 책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신을 섬기지 말라" "세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첫번째는 여호와를 향한 책임 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부분은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말라"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다 인간을 향한 책임이죠. 여기 순서도 마찮가지 입니다. 잠언에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이 말씀, 여기에서 첫번째 위대한 계명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시작이다. 지식의 시작일뿐만 아니라 9장 10장 말씀을 보면 지혜의 시작이라고도 말씀하고 있죠. 두번째, 여기 말씀을 보면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라 어머니의 법을 따르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은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말씀 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보게 될때,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에베소서 6장이나 골로새서 3장 21절 말씀을 보면 아비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어떻게 자식을 양육할것인가에 대한 말씀, 잠깐 골로새서 3장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
여기 아버지에게 당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노하게 하지 말라. 그런데 잠언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런데 잠언에서는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할때, 자녀 양육에서 최종적인 권위는 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골로새서 말씀이나 에베소서 말씀에서 아비들에게 말씀하고 있고 여기서는 어머니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데, 그 말씀은 아버지가 자녀양육의 최종적인 결정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최종적인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 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아버지만 자녀 양육합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양육을 합니다. 잠언 말씀을 보게될때 그것은 너무나 뚜렸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라. 어머니의 법을 따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자녀 양육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꼐 역사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견해차가 없이 자식을 훈련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 입니다. 자녀 양육에서 때때로 부부가요, 아이들을 양육하고 뭔가에 대해서 권면하고 또 그들을 안내하고 훈육하게 될때 이견차가 난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만일 그와같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이견 균열사이를 파고들어서요. 그들에게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일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길이죠. 그래서 잠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 그것을 자식들에게 하고 있다. 그것을 자식들은 들어야 된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잠언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를 존경하라.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것이 대단히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전체적인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될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의 훈육을 위해서 자식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하고 훈련하고 나가게 될때, 함꼐 역사해야 한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원칙으로 같은 방법을 통해서 행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하는것은 이 성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죠. 부모노릇에서 세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머리됨이라고 하는것은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 다음에 파트너쉽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때는 부부 관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관련해서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그것은 부모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지요. 이 모든것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저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관계 입니다. 첫째 우리는 이 말씀에서 잠언 1장 7-9절 말씀에서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을 듣고 거기에 붙어 있으라는 말씀을 했어요. 그렇게 했을때에 머리는 아름다운 면류관이고 네 목에는 금 사슬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고요. 자식들에게는 앞날이 밝은 것입니다. 그래서 면류관과 모든 금사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 말씀부터 보면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잠1:10).
악한자가 있습니다. 첫째, 8절 말씀에서는 부모의 음성이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여기 1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또 다른 자들이 하는 음성이 있어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찌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 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1:10-19).
여기 이제 부모의 음성이 있는가 하면 동료의 음성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음성이 있다. 이제부터 저희들이 잠깐 동료 압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을 기울여 잘 따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기간에는 부모님들에게 함정이 될수 있는것은 "우리 아이들은 참 착하다. 잘 따른다."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심, 부모의 방심, 이것은 심각한 문제 입니다. 아이들이 구원을 받든, 안받든,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모임에 가게될때 잘 따라 옵니다. 또 집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할때, 기도할때 잘 복종 합니다. 참여 합니다. 거의 어려움 없이 참여한다. 이와같은 상황 때문에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이 구원을 안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그냥 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 이제 자녀들에게 곧 닥쳐오게될 십대의 폭풍, 이것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갈수있는 길을 둘수 있다. 라고 하는 현실 말입니다. 여기 동료 압력이라고 하는것은 어린아이들이 어릴적에는 어머니 말씀, 아버지 말씀을 비교적 듣고요, 따라 갑니다. 그런데 언젠가서부터 부모님들이 비로소 깨닫기 시작 합니다.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다니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모임 나가는 것도 서서히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 아이들이 이제 부모님이 말하는 것을 듣는때가 거의 끝나가고요. 그 다음에 외부에서 동료들이 하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더 솔깃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상적으로, 그들이 독립해 가야 하는 이런 과정속에 들어가게 될때 일어나는 과정이라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성경은 잠언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 아들아 악한자가 너를 꾈찌라도" 여기 꾄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혹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별로 아름다운 말이 아닙니다. 꼬인다. 유혹한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우리는 바다에다가 강에다가 낚시를 하게 될때 낚시줄을 던지죠. 거기에 미끼가 있습니다. 미끼 가지고 고기를 유혹하는거 아니예요? 그래서 물고기가 가까이 왔다가 경험이 없는 물고기는 덥썩 물어버리죠. 잘 걸리죠. 오래전에 토론토 주변의 몬트리오 호수에 갔을때 카티지에 가서 낮에 낚시를 했습니다. 물고기가 괭장히 많았어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던지자마자 순식간에 하나를 잡았어요. 그런데 얼마후에 가서 계속 똑같이 미끼를 놓고 물에 넣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잡히지가 않아요. 물고기는 있는데 안물어요. 이제 똑똑해진겁니다. 미끼를 넣었다. 유혹한다 이 말입니다. 이 악한자가 유혹한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말씀이 있고요. 동료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들이 동료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죠.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들이 이제 꼬이고 있다. "나와함께 가서" 무얼 합니까? 여기 성경 말씀을 보면요. "사람의 피를 흘리자." "산채로 삼키자." "빼앗자" 이런 이야기 입니다. 함께 악한 일을 하자. 라고 하는 일에 우리 아이들이 솔깃해질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음성, 그리고 동료의 음성, 우리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의 음성은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뭘 추천 합니까? 근면한것, 부지런 한거요. 정직한 것, 그리고 정절을 지키는 것, 그리고 도덕적인 것, 그리고 겸손한 것,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부 압력에서 들어오는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자만, 교만한 것, 그리고 정욕적인 것, 그리고 탐욕, 욕심, 그리고 사치 하는것, 그리고 육체적 쾌락, 육감적인 쾌락이죠. 그리고 방종한것, 그리고 편안것, 안락한것, 이런것을 가지고요. 친구들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멋지다. 이런것이 남자다움이다. 이런것이 어른다움이다. 라고 아이들 마음속에 불어넣는 것입니다. 굉장히 악한 것은 우리 남자 아이들, 아들들이 이제 십대를 통과하게 될때 그들이 겪게 되는 어려가지 어려움 중의 하나가 "너는 남자답지 않아." 라는 이야기죠. 그 다음에 "너는 아직 어린애 같애." 라는 애기에 대단히 약하죠. 그것은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수치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와같은 것을 통해서, 이 악한 자들은, 동료들의 압력은 아이들로 하여금 한 패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한 그룹의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드려는 것입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 이제 제외되는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동료의 압력입니다. 동료 압력, 동료압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호소하는 호소력이 있는데 무엇을 호소 합니까? 모험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해보자. 물론 그 십대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의존하던 기간을 떠나서 이 과도기 기간중에 성인이 되가는 과정으로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부모는 자녀들이 이제 궁극적으로 그들이 독립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가치관을 가지고 또한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고 돕는 배필이 되고 그래서 따로 독립된 단위를 가지고 그들은 살아야가야 할 미래를 놓고 부모들은 일하죠. 물론 독립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십대 기간중은 아직 독립한 기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독립할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독립을 위해서 그들은 배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야기는, 동료 압력에 의해서 하는 이야기는 이미 독립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독립 못했다면 그것은 바보다. 그것은 천치다라고 이야기 함으로써 그들의 프라이드를 건드림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걸어가는 악한 길에 함께 하도록 유인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동료 압력이 우리 자녀들에게 호소하는 또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쾌락, 또한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유행에 대단히 민감해지고 유행을 따르지 못하면 그 그룹에 끼지 못하고 이등시민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와같은 힘이 있지요. 이와같은 기간중에 동료 압력의 음성을 듣게 될때, 그들의 이야기는 프라이드가 밥먹여주는 기간입니다. 아이들 마음속에 그것을 대단히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만한것, 자만과 방종과 이런것이 합당한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사치가 합당한 것입니까? 심지어는 어른들도 어떤때는 오토바이가 20~40대가 쫙 가지요. 굉음을 내면서 갑니다. 자동차들이 지나가는데 자동차들을 다 제압해버리고 온길을 그들의 그룹이 막 달려가지요. 그들은 사실은 십대가 아니고 어떤때는 성인들이기도 한데요. 그들 마음속에는 사람들 앞에 그와같은 모습으로 군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린 마음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자랑하고 싶은것, 그리고 자기들이 특수한 그룹과 같아 보이고자하는 그런 마음, 이런것은 동료 압력의, 특별히 십대의 동료 압력의 음성으로써 대단히 강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된다면 성인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라고 해서 담배도 피어야 합니다. 담배도 피면 굉장히 성인이 된거 같죠. 그래서 아직 성인도 아닌데 그것은 대단히 해로운 것인데, 그들은 그런것과는 상관 없이, 담배를 핌으로 인해서 그들은 성인이 된것 같은 느낌 속에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들, 술을 많이 마시는것, 그것이 어른이 된것 같은 모습, 이와같은 그룹의 영향력 속에서 동료 압력 속에서 우리 자녀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활할까? 이와같은 것을 도대체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여자아이들과 자 보면 그것은 어른이 된 것이다. 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에게 압력을 가하게 될때,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거기서 처신할까? 이것이 동료 압력이고요. 잠언 1장 말씀에서 어머니, 아버지 음성이 있고 동료들의 음성이 있다. 이 음성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은 처신할 것인가? 이것은 저희들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 입니다. 아주 어린시절에는 아이들이 여러가지 기술, 테크닉, 이런것을 다른 사람을 흉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십대가 아니고 아주 어릴때에 그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또 유명인사, 그리고 친구 중에서 좀더 멋진 아이들, 아니면 유투버 또는 연예인, 가수, 탈렌트 이런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라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동료 압력, 그것도 동료압력이긴 한데요. 그와같은 것에서 그들은 단순히 흉내내려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대가 되면 동료압력의 홀 마크라고 말합니다. 동료 압력의 가장 취약한 그와같은 기간은 십대다. 이 십대 기간중에 그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룹들이 있죠. 그들이 압력을 가하지요. 그 압력을 가하게 될때, 무엇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이 취약합니까? 스타일에 대해서 취향에 대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명품에 대해서 또한 외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어떤 철학 주장, 이런것에 대해서 가치관, 이런것에 대해서 대단히 취약하고 따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길만이 사실자신이 살아있는 길이다. 라는 그와같은 생각 말이죠. 성인인척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모험을 해보고요. 흥분의 도가니속에 들어가보려고 하고, 그런것이 대단히 성인이 되는 길이다. 라고 세뇌를 하려고 하는거죠. 동료의 음성입니다. 그것이 남자같은 길이고 거칠게 뭔가를 하게 될때 성인같아 보이는 그런 즐거움, 이런 것이죠. 그런데 동료 압력은 꼭 이와같이 부정적인 것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녀들이 구원받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따라가고 배워 간다면, 우리 자녀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압력을 가할수는 없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와같은 악한 일들에 대해서만, 거기에 대해서 귀를, 솔깃하려는 시험속에 빠져서 이제 때로 회복하고, 때로는 빠져들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다니엘은 열다섯살에 바벨론에 끌려 갔습니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고요. 그는 바벨론 왕이 주는 장학금을 통해서 그는 바벨론 궁중 안에서 학문을 배우죠. 갈대아 언어로 배웁니다. 그 다음에 히브리의 모든 문화, 그것을 다지워 버립니다. 갈대아 문화를 배우죠. 우상숭배가 가득한 그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살았죠. 다니엘서 1장에서 제일 첫번째, 그가 행한일은 이것이죠.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것을 정하고 왕이주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냥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고요.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환관장이 와서 이것을 먹어야 한다고 할때, 못먹겠다. 그것은 반항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장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떻게 열다섯살 먹은 소년이 하나님의 권위가 최고다. 느부갓네살의 권위보다 더 위대하다고 그는 굳건히 그렇게 믿고 있었을까? 그와같은 교육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그와같은, 완전히 둘러싸여 있습니다. 동료의 압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와같은데서 그는 그와같이 이야기할수 있었을까? 게다가 환관장이 이야기 하죠. "이것을 안먹으면 내 목숨이 위태롭다." 할때 그는 제안하지 않습니까? "열흘동안 시험 하십시요." 열흘동안 시험합니다. 그런데 열흘동안 시험한다고 하는것은 다니엘이 이제 고고하고 그가 원하는 음식을 열흘먹고 열흘후에 얼굴이 초췌하지 않는 그 상황을 입증하도록 그 기회를 주십시요라고 하는 겁니다. 열흘도안 과연 무엇을 했을까? 열흘동안 그의 친구들 셋과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는요, 자기의 어떤 소신을, 자기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확신을, 세 친구들과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열흘의 시험동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고요. 세 친구는 그의 리더쉽 속에서 그와 함께 행했다는 그 말입니다. 그는 적어도, 이 많은 학생들 가운데서 세 친구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세 친구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친구를 그는 리더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니엘이 행사했던 동료 압력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영행력, 그것은 우리 자녀들이 행사해야될 영향력이라 생각합니다. 동료압력, 있습니다. 그것은 적지않은 힘입니다. 커다란 영향력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고귀함과 그리고 동료 압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악한 것이다. 잠언 1장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들이 이와같은 동료의 압력에 의해서 끌려가게 될때 그들이 받게되는 슬픔, 비극, 결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것을 향해서 귀를 기울이겠지요. 그래서 동료 압력을 우리는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요. 동료 압력을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만 자꾸 생각하고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믿는 자녀들이, 믿는 자녀들과 함께 교제하고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함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확신과 담대함과 그리고 간증과 이와같은 것에 대해서 옛 선진들이 보여줬던 그와같은 본을 기억하고 오늘 이시대에 그와같은 일을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이 사는길일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길이고요. 이제 이와같은 선한 영향력을 위해서 믿지 않는 세상의 동료들이 구원받고 주님앞에 돌아올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희들은 또 한가지 십대 기간중에 동료 압력뿐만 아니라 친구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점에서는 이 두가지 이슈는 평행하게 달리는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친구를 사귈까? 우정에 관한 문제 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십대를 통과하는 우리 자녀들이 어떤 친구를 사귈까 하는 것입니다. 우정은 참된 우정이 있고요. 거짓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탕자가 먼 나라에 갔을때요. 그는 이제 많은 친구가 있었지요.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아버지로 받은 엄청난 기업, 많은 돈을 가지고 그는 밤마다 친구를 만나서 좋은 장소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요.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탕자 옆에서 함께 했습니까? 얼핏보면 탕자는 위대한 사람이고요. 탕자는 참 수완이 좋아서 많은 친구를 데리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놀라운 우정 가운데 사는 사람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돈이 다 떨어졌을때, 누가 친구냐 하는것은 분명히 드러나죠. 하나도 없었습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
많은 친구를 얻는자는 오히려 해를 당한다 말씀 했습니다. 단순히 많은 친구라기 보다는요. 이 많은 친구, 그들은 참 친구가 아니다. 참 친구가 아닌 그런 많은 친구들, 그런 친구들과 함께 사귀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가깝다.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죠. 그리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참 친구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
나의 친구는 누굽니까? 시편기자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친구다. 그리고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친구다. 여기 친구의 조건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친구의 조건, 그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친구다. 우리 십대 자녀들이 이 기간을 통과하게 될때, 우리 자녀들은 이런 친구를 사겨야 합니다. 이와같은 친구들은 믿음 안에서 친구 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그와같은 친구들 입니다. 사실상 다니엘과 세친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악한 시대에, 동료 압력이 엄청나고요. 동료 압력뿐만 아니라, 상부에서의 압력, 온갖 압력이 가득할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요. 환한 별빛과 같이 간증을 드러냈고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렸습니다. 이방의 왕들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로 참 하나님이다." 이렇게 감탄한 것이 여러번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우리 자녀들이 참된 우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거짓 우정속에서 속을 것인가? 거짓 우정이라고 하는것은 무가치한 것이고요. 거기에는 성실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배반하는 것이고요. 그와같은 우정 가운데만 있다면 잘못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인해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그들이 경험속에서 쓰디 쓴 것을 경험 한다든지, 뱀의 독 이빨이 자기를 무는것과 같은 쓰디쓴 경험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떤 친구를 사귀는가? 믿음 가운데서 정말로 그들이 모임에 나오고 모임 가운데서 같은 믿음을 나누는 또래들, 또한 자기의 연배들, 후배들 그들과 사귀며 그들 가운데 서로 교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들의 마음속에 확신이 더욱더 강해지고 이와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즐길수 있는 기간, 그것이 우리 자녀의 십대가 아니겠습니까? 참된 우정은 상수리 나무가 있습니다. 폭풍이 와도, 뜨거운 해가 비춰도 그 안에 그늘이 있고요. 바람을 막아줍니다.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 성을 바라보면서, 그가 앉았을때 박넝쿨이 올라왔죠. 박넝쿨이 그늘도 만들어 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의지할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 우정, 거짓 친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박넝쿨과 같아서 잠깐 있던 그늘들 다 사려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고 변치않는 그와같은 우정, 그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친구로 사귀게 될때,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밝아지고 또한 마음속에 기쁨을 피차 나누게 되고 믿음을 서로 공유하게 되고 같은 목적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나갈수 있는 그런 친구,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참 의지할수 있는 그런 친구, 도움이 필요할때, 중보가 필요할때 충언할수 있는 그런 친구, 그와같은 친구들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말씀 했는데요.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보지 못해도요, 주님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 참된 친구를 사귀는 것, 그것은 참으로 복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특별히 십대를 통과할때, 특별히 동료 압력이 대단히 강한 시대에 친구들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이제 세상을 향해서 오히려 압력을 가하는 이와같은 친구들이 되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다윗의 케이스를 기억합니다. 다윗에게 참된 친구가 있었어요. 요나단 입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친구 관계, 우정, 그것은 얼마나 탁월한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대단히 어려운 순간에 그리고 잠깐 동안이 아니고요. 지속적으로 장기간 사울에게 쫓겨서 그는 죽음을 때로는 눈 앞에 두고 어려움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을때에 요나단이 그에게 찾아 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삼상23:16).
사울이 다윗을 뒤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피곤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그의 마음이 때로는 좌절도 있고요. 때로는 고통 가운데 침울해 있는 그와같은 상태도 있습니다. 시편을 읽게될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저조해 있었는가를 잘 알지요. 그때, 적절한때에 요나단은 수풀속에 들어가서 그를 격려합니다.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 여기 보세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그는 우정을 가지고 그에게 가서 그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십시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다. 지금 처해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 특히 나의 아버지가 너를 쫓아가고 너는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 두사람 사이에는 믿음을 공유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어려울때에 격려하고 낙심 했을때에 세워주고 또한 즐거울대에 그 기븜을 함게 나누고 이와같은 친구 말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친구 입니다. 그 두 친구는 서로 철이고 철입니다. 그래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해준다. 이와같은 관계는요, 우정, 그리고 친구관계, 그리고 친구로서 서로 대화하고 만나서 즐거움을 나누고 또한 즐거움을 나눌뿐 아니라 격려하고 때로 친구가 바른길로 가지 않는듯 해 보일때에 찾아가서 바른말을 하고 충고하고 세워주고 격려하고 그리고 세상을 함께 주님을 의지하고 나갈수 있는 그와같은 친구, 여기 특별히 전도자는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이것이 참된 친구 입니다.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참된 친구는요. 상대를 영예롭게 만들어주는데 피차 역사하는 것입니다. 악한 친구는 어떻습니까? 이용합니다. 속입니다. 부정직합니다. 배반합니다. 기회주의자입니다. 이런 모든것은 참된 친구가 아닙니다. 마치 가룟유다가 주님을 따라가다가 배반하고 주님을 팔아버렸지요. 이 세상에는 친구라고 말하지만 친구가 아닌, 배반자와 같은 그런 존재가 있다. 우리 자녀들이 십대를 통과하게 될때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가이드를 해줘야 됩니다. 무엇이 참된 친구인지, 무엇이 거짓 친구인지, 제일먼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다.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이 참된 친구 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고요. 어린 자녀들이 십대를 통과하게 될때, 그들이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그들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할까? 그래서 어떻게 자기의 믿음을 보존하고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해 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와 함께하면 지혜를 얻습니다. 어리석은자와 함께하면 어리석음을 얻을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희들, 자녀들에게 이와같은 교제를 아주 가깝게 계속해서 해줘야 되겠다.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이것은 우리 자녀의 미래에 대단히 지대하게 영향 하고요,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압살롬은 어떤 사람입니까?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와 특히 머리털, 꼭 그런걸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정말로 미치게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요, 영적으로 저조한 시대는 외모에 충실한 시대 입니다. 외모만능주의, 그래서 이와같은 것으로 어필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압도하고 그래서 때가 되었을때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역하지요. 그때, 사무엘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기가 어떻게 된것을 알지 못하고 압살롬을 따라갔다.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고 압살롬을 따라갔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외모에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 어떤면을 보고 따라 갑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탈렌트나 또한 가수나 이런 사람들에게 미쳐 있습니까? 우상입니다. 그들이 외부에서 공항에 들어오게 될때, 사람들은,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막 소리를 지르면서 그 앞으로 나가지요. 이와같은것이 세상인데요. 사람들은 압살롬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서 따라갔어요. 따라가다가 어떻게 됬습니까? 파멸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전쟁에서 패했을때, 나귀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수리 나무에 머리털이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렸어요. 나귀는 가 버리고 그가 가장 자랑했던 머리털, 그 머리털로 인해서 이스라엘 모든사람들이 완전히 그에게 반해 버렸던 그 머리털, 그 머리털은 그가 죽음에 이르게하는 그와같은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의 인기와 그의 사람들 앞에서의 멋진 모습, 우리 자녀가 만일 이런것을 따라 간다면, 가수를 따라가고 탈렌트를 따라가고 연예인을 따라가고 그들의 행하는 모습과 그들의 외모와 그들의 연기에 반해 있지는 않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정말로 참된 가치,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요. 이 십대를 통과할수 있도록 우리는 가이드 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 사춘기는 이차성징이 발달하는 시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연히 호르몬이 왕성해 지고요. 이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고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 시기에 그와같이 되야 됩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그와같은 모습으로 변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들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과도기의 그들의 육체적인 변화가 있을때, 그들이 서서이 이성에 대해서 눈 뜨지요. 이 이성에 대해서 눈뜨게 될때, 그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잘 소화하고 넘어가야 할까? 하는것이 대단히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게 될때, 세겜앞에 장막을 친것이 아니라 집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 했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냥 세겜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거기서 살았어요. 세겜 성앞에요. 어느날 야곱의 딸 디나가, 여러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쭉 나오죠. 딸은 딱 디나 하나가 이 창세기에 소개 됩니다. 이 디나가 세겜 성 안에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러 들어갔어요. 무슨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성의 추장, 아들이 그를 연애 했고요. 결국은 그들은 성행위로 들어가버렸어요. 그 오빠들은 격노 했지요. 우리 동생을 더럽혔다. 그래서 계교를 꾸미고요. "너희가 할례를 하면 우리가 통상하겠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할례를 하고난 다음에 그 성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학살해 버렸지요. 이 불행한 사건은 야곱이 잊을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거기서 도주하게 될때 그 마음은 너무나 공포속에서 도망 했습니다. 야곱은 죽는 순간에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디나의 이 불행한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이성에 눈을 뜨게 될대, 어떻게 이 일을 잘 아이들이 현실로 받아들이고 또한 우리 자녀들이 믿는 아이들이라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미래를 위해서 자기 준비를 제대로 할 것인가? 십대는 아직 결혼할때가 아닙니다. 십대는 준비할 때 입니다. 이제 소년에서 소녀에서 성인으로 옮겨가고 있는때 입니다. 그때는 많은것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많은 것에 대해서 준비해야 할 때 입니다. 미래에 만일 결혼한다면 자기 자신을 순결함 가운데 보존해야 됩니다. 자기의 미래의 배우자에 대해서 자기는 그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장에 육체적인 쾌락이나 또한 흥분이나 또한 육체적인 어떤 새로운 경험, 그런것은 대게 어디서 나오는 이야기 입니까? 동료 압력에서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악한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성인과 같이 되라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성행위를 한번도 안해본 사람은 바보다하는 그런 가치관 속에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악한 자들의 말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우리 자녀들은 어떤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 말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다말을 생각해 보세요. 암논에 의해서 그는 더럽혀졌습니다. 다윗은 그때 왜 다말을 보고 암논에게 가서 떡도 만들어 주고 과자도 만들어주고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 왜 다윗은 자기 딸을 보호하지 못했을까? 왜 암논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자기가 범죄 했기 때문에, 자기는 이와같은 일에 대해서 뭔가를 조언하고 뭔가를 가이드 하고 뭔가를 안내할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됬다. 대단히 슬픈 일이죠. 우리 자녀들이 이성과 관련해서, 성인 문제와 관련해서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면, 성 교육을 받습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이야기, 그런일들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들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들이 출산이 되고, 어떻게 임신이 되고, 이 모든 생리와 과정과 이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교육을 시키게 될때, 학교에서 성 교육은 거기에 도덕적인 영적인 그와같은 가르침은 전혀 없습니다.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피임만 하면된다고 합니다. 아기만 낳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임도구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사회, 그와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고, 우리 십대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와같은 가르침 속에서요. 거기에는 모든것이 다 틀린것은 아닙니다만은, 모든것이 바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가르침 속에서 잘못 생각할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같은 성교육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부모들이 그냥 방치해 둔다면 우리는 많은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들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이 십대를 통과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해줘야 할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두가지 종류의 여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여인, 이방 여인에 관해서는 많은 장에서 여러번 다루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5:3-6).
음녀, 이방여인, 이방여인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매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파멸을 말하고 있습니다. 매력은 무엇입니까? 입술은 꿀 같고요. 아주 답니다. 그리고 입은 기름과 같이 미끄럽다. 이것은 매력적인 겁니다. 육감적이고요. 이와같은 어필을 하게될때, 우리의 마음이 끌릴만한 그런것입니다. 삼손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삼손에게는 세 여인이 있어요. 딤나에, 가사에 기생, 그리고 드릴라. 삼손이 끌렸습니다. 블레셋 여인라고 할때, 블레셋은 세속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고 그리고 호소력이 있고 매력적인것이라 말합니다. 삼손이 끌린것은 바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육적으로 대단히 매력에 끌릴만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말하는 것처럼, 드릴라로 인해서 그는 눈이 뽑힙니다. 그는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실패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했지만 구원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 이방여인의 매력이 있지만 이방 여인의 파멸에 대해서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지요. 그 걸음은 음부로 나갑니다. 생명의 평탄한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에 비슷한 말씀들이 잠언에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음녀에게 찾아가는 사람은 푸추간으로 가는것과 같다. 그 간이 완전히 꿰뚫린다. 죽음으로 이끌린다고 하는것을 누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녀와 간음한 자는 잠언 말씀에 무지한 자로 영혼을 망하게 한다고, 능욕을 당할자고 아무리 돈을 줘도 보상할수가 없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를 받을수 있을까? 왜 하필 여인만 이렇게 말할까? 이것은 반드시 여인만 말하는것은 아닙니다. 남자도 마찮가지 입니다. 남자도 이와같은 성질의 사람들이 있지요. 이와같은 데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이 보호를 받을수 있을까?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잠2:16).
첫째, 무엇이 구원 합니까? 무엇이 이방 계집으로부터 구원 합니까? 지혜가 구원합니다. 왜 지혜가 구원합니까? 이 지혜는 음녀의 매력을 볼수 있을뿐만 아니라 그 매력이라고 하는것은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것이 지혜 입니다. 그래서 지 혜가 이방여인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매력만 보는것이 아니라요. 매력 저편에 파멸로 끌어가는 힘, 그것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잠6:20-25).
말씀은요, 어떻습니까? 다닐때에 인도합니다. 잘때에 보호합니다. 깰때에 나와함께 대화 합니다. 말씀은 계속해서 나와함께 합니다. 말씀은 나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위험에 대해서 경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 말씀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죠. 십대에 우리 자녀들, 마음속에 이 말씀이 저장되어 있고 그 마음속에 잘씀이 세겨져 있고, 이와같은 길만 우리 자녀들이 음녀의 매력, 그 매력이 끌어당겨서 결국 파멸로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그 길에서 보호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말씀 입니다. 잠언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을 기억해 보세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길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난번에 보았습니다. 자녀양육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삼손이 태어난 이후에 잘 길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손이 잘 자라면서 그의 출발에서 어떻게 그는 활동했는가를 말씀에서 발견 합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13:24).
삼손이라는 이름의 뜻은 햇빛이라는 말입니다. 슬픈것은 햇빛인데 그는 나중에 햇빛을 못봤어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삿13:25).
마하네단이라고 하는것은 단지파의 지형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여황의 영, 성령께서 비로소 그를 움직이셨다. 감동했다. 참 아름다운 시작이죠. 멋진 시작입니다. 그는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요. 자녀 교육을 위해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질문했던 그 부모 밑에서 그는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그가 자라게 될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역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14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삿14:1).
여러분 14장을 흔히 '내려가다 장'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계속해서 내려가다, 내려가다, 내려가다가 나옵니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부터 그는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죠. 저희들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삼손은 좋은 가정에 태어났고요. 좋은 양육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출발을 했습니다. 성령님꼐서 그에게 역사하고 감동 했어요. 그런데 왜 그는 그의 다음의 이야기를 우리가 쭉 살펴보면 항상 마음에 실망이 됩니다. 좋은 출발을 한 사람인데, 좋은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요.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왜 그는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징크스가 있었을까? 이 문제에 있어서 그는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첫째, 이 삼손의 역사를 우리가 살펴보면서요, 우리는 부모로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때, 자녀의 구원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받은것,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방심 한다면, 그래서 성령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내주하지요. 그가 하나님의 말씀도 읽지요. 또한 하나님 말씀을 사랑도 하죠. 그런데 그가 이와같은 문제, 십대에 가서 이성에 눈을뜨고 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교훈을 받지 못한다면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왜 삼손이 이와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사기 14장 이후에 잇는 모든 사건을 우리가 살펴보게 될때 내리는 결론은 삼손은 가정 교육에서 그와같은 좋은 것들을 받았습니다만, 그가 보인 취약점은 그는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것이 아닌가? 그의 부모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아들과 이야기 한 것이 없지 않는가? 있다해도 그는 그 말씀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은 강합니다. 육이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강합니다. 구원받아도 육이라고 하는것은 너무나 강합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어릴때, 성에 관해서 노출이 된다면, 우리는 십대가 되서 이성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그런데 십대가 되기 전에 성에 대해서 눈뜨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ㅅ회의 수많은 성에 대해서 눈뜨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 입니다. 이 많은 영향력들, 포르노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이 노출이 된다면, 여러분 어린아이에게 그와같은 것이 노출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이 그 아이들 마음속에 뇌리속에 어떠한 것을 세길 것인가? 그들이 그것에 노출이 되면 다른것에 신경쓰기 어려워 집니다. 학업에 전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에 노출되게 될때, 그들의 삶을 보게 될때는요. 경험적으로 보게 될 때도, 그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발육할수 없습니다. 사단은 이와같은 것으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손이 계속해서 내려가고 이 여자, 저 여자 계속해서 만나고, 나중에는 잠언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처럼 그는 푸추간으로 들어가고 이제 멸망으로 들어가는 그와같은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될때, 우리는 십대에 이성에 관한 문제, 세상 성이 문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21세기에 정상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렇게 하는것이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을 이와같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보존할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적절한 교육과 또한 기도와 그들에 대한 관심과 또한 그들과 대화와 그들과 지혜 가운데서의 교류는 이제 그들로 이와같은 위험에서 보존하고 이제 그들은 이후에 결혼에 들어가서 정상적인 때가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복을 그들이 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들에게 이야기 해 줘야 합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이 아니고요. 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이제 이와같은 문제를 다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몇가지를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는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그와같은 교육에 정말 확고한 교육을 받을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이제 이런이야기를 해줘야 될 것입니다. "너는 앞으로 만일 결혼으로 주님이 인도한다면 너는 미래의 배우자를 위해서 너 자신을 보존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결혼의 인도에 대해서 우리 자녀들이 기대감 속에서 배워야 됩니다. 둘째, 결혼이라고 하는것은 이미 저희들이 지난 시간에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혼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과 같이 결혼은, 혼인은 존귀한 것입니다. 영예로운 것입니다. 왜 혼인이 영예로운 것인가?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창조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를 의도적으로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가 이 둘 사이의 결혼을 통해서 번성하고 번영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 창조의 질서와 창조의 목적, 남녀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부모들로부터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인류가 번성하는 길은 성을 통해서 번성합니다. 그런데 이 성은 결혼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역사한다고 하는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그것을 배우게 될때, 결혼을 귀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존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이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만나서 이제 성관계에 들어가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성 관계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또한 어떠한 비난이나 누구에게도 비루하다고 하는 손가락질 받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하신 영예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성 관계라고 하는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을수 없다. 우리가 결혼 관계를 통해서 가정 안에서 자녀가 날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축하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알립니다. 축하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할때 뭐라고 말합니까? 부부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할때 그러면 당연히 축하합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닌 사람이 아이를 가졌습니다.라고 하면 광고하고 다닙니까? 쉬쉬 하죠. 죄책감을 갖지요. 죄책감이 없다고 오히려 큰 소리로 떠들지요. 그러나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얘기할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것에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게 여기는 것인가? 그리고 이와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은 십대에 아직 성인이 되지 않고 이제독립을 위해서 나아가게 될때, 바른 독립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에서 어떻게 자기를 준비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 그리고 만일 나중에 독립을하게 될때 나는 어떻게 가정을 부양하고 가장이 되고 그리고 돕는 배필이 되어서 행복한 미래를 건설한 것인가에 대해서 미래에 대한 기대와 준비 가운데서 우리 자녀는 자기 자신을 주님앞에 드려야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교육을 받게 될때 이성의 문제 대해서 그들은 외부에서 동료 압력이 어떤 형태로 들어온다 해도 그들은 움직이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녀가 그와같이 보호받을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고한 길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부모가 이 시대를 통과하는 자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전달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자녀가 이 결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고 막연히 알고 있다면 이제 외부에서 동료들이 이야기하는 잘못된 생각들, 아이들이 친구로부터 수많은 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많은 호기심 속에서 그것을 은밀히 듣고 아니면 공공연히 듣고 그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는 어른보다 훨씬 전문가 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교훈하고 있는 결혼의 정의와 남녀를 왜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 가운데 있는 질서와 아름다움과 또한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우리 자녀가 알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부모들은 부끄러워 하거나 이 문제에 대해서 피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이들과 이야기 하고 또한 그 가치를 공유하고 그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줌으로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순결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내가 만날 배우자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해 가는 것, 그것은 십대에 평온한 바다로 주님과 함께 항해할수 있는 그와같은 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떠나서 파도와 폭풍 속에서 통과할수밖에 없다. 두가지 입니다. 십대의 가능성은 파도와 폭풍인가? 아니면 잔잔한 바다인가? 그러나 잔잔바다에는 반드시 거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저희들은 이 말씀을 저희들이 생각할때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저희 귀한 자녀들이 십대를 통과하게 될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저희들이 인식하고 또한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안내하고 말씀속에 그들을 굳게 하는것, 그것은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바라시는 깊은 뜻이라 생각하고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형모 형제님 > 하나님의 사람의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9_소성인 > (0) | 2021.07.20 |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8_청소년기2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6_자녀양육2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5_자녀양육1 > (0) | 2021.07.20 |
< 하나님의 사람의 집 04_부부의 삶 > (0) | 2021.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