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열왕기하 성경읽기(요약) 완료

What the bible teaches 열왕기하 14장 번역_노지영sr

박이레 2022. 4. 24. 16:14

열왕기하 14장
분열된 왕국 – 선지자의 사역 (계속)
열왕기서 저자는 이스라엘 왕 여호와하스(요아스)의 치세에 대해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권력(13:12)”이라고 요약해서 언급하고 있고, 본 장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이 사건과 아마샤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아마샤에 대해서는 역대기서에서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필자는 열왕기서의 내용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열왕기서 저자의 관점은 북 이스라엘 왕국에 영향을 미친 주요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
1-10절 : 유다 왕 아마샤
전도유망한 시작
25세의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인 요아스가 두 명의 공모자에 의해 살해당해 나라가 불안정하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12:20).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1절)” 그는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하였으며 그 어머니인 여호앗단은 예루살렘 출신이었다 (2절). 역사가는 처음에는 칭찬으로 시작한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절)”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한명의 예외도 없이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5절)” 이 구절은 아마샤가 계승한 왕국의 불안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음모를 꾸민 자들을 제거하려는 확실한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5절)”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죽임에 있어서 율법을 준수했다.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6절; 신24:16)” 왕은 반드시 율법을 잘 알고 준수해야 했으며,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순종적이었다.
부왕의 시해자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아마샤는 에돔도 공격했다.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바위-5554)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하나님의 순종, 하나님의 존경-3371)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7절)” 에돔은 요람왕 때 유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8:20-22), 다시 쳐서 정복했던 것이다. “염곡(소금의 골짜기)”는 사해 남쪽과 에돔 지경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역대기 저자는 이 전쟁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나 열왕기 저자는 이 한 문장으로 설명을 끝내고 있다.
불완전한 출발
그 어떤 왕도 자신이 완벽함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아마샤도 예외는 아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라고 선언하자마자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대로 다 행하였어도 (3절)” 라고 추가하고 있다. 열왕기 상하를 통틀어, 다윗왕은 다른 왕들을 판단하는 표준으로써 나타나고 있으나, 다윗조차 완벽하지는 못했다. 아마샤는 이 표준에 한 참 미치지 못하여, 출발은 창대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던 아버지, 요아스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왕들이 그리 했듯이 산당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 (4절)”게 했다. 산당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던 시절에 백성들이 예배드리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열상 3:2) 지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산당들은 제사의 통일성을 해치고 다양한 제사 방식을 도입하도록 장려했고 우상숭배를 조장했다. 열왕기서에서 산당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는 언급이 이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산당들이 상징하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미워하셨는지를 말한다. 백성들에게 산당은 종교적인 풍경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으나 주님은 한 번도 허용하신 적이 없으시다. 비 성경적인 관습들이 그리스도인의 예배 가운데 스며들어 너무 익숙하게 되면, 그것들이 무해하고 심지어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예배에 사람이 고안한 것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으며 주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것들을 무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치명적인 오점
비록 아마샤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유다 왕으로써 통치를 시작했을 때는 앞날이 밝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 때(then - 개역한글에는 번역되지 않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으로 벌어질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 때)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8절)” 여기에서 그의 몰락과 굴욕을 가져온 중대한 결함이 드러났다.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잠11:2)”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잠 29:23)” 수 세기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군주들과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이 교만으로 인해 수치와 굴욕을 당했다. 뒤 이은 사건들은 그가 에돔 사람들을 패배시킨 후 교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내버려 두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큰 권력으로의 야망이 이미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아를 삼켰고, 그는 이 때야 말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사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8절)” 물론 이것은 우호적인 만남을 위한 초대가 아니었다.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교만은 아마샤의 눈을 가렸고, 그는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에돔사람을 진압하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과 그가 요아스에게 적수가 되지 못함을 보지 못했다. 요아스가 속담에 비유한 대답은 그의 어리석은 교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9절)” 만일 아마샤가 제대로 생각했다면 분명히 이 메세지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요아스의 힘에 비하면 그는 백향목에 도전하는 가시나무와 같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의 패자는 요아스가 분명하며 그는 마치 야수가 가시나무를 짓밟듯이 짓밟혀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는 교만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아마샤를 부추기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10절)”
이스라엘의 악한 왕 중 하나로부터 이러한 충고를 들었다는 것은 유다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아마샤가 자신뿐 아니라 유다의 백성도 희생시킬 것이 뻔한 어리석은 행동에서 구하시기 위해 상황을 통제하고 계셨다. 나라가 외적으로 분단되고, 또한 내부의 전쟁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것은 너무도 비극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만과 이기적인 야망으로 충동된 사람은 이러한 온건한 충고를 절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11절)” 그로 인하여 아마샤는 자신의 완고함에 대한 결과를 거두게 되었다. 두 왕은 유다의 북쪽 경계인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고(11절), 승패의 결과는 요아스가 예언한 대로였다.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집)으로 도망한지라 (12절)” 또한 이 전쟁에서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13절).
요아스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아마샤의 어리석은 결정이 초래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신 장소에 대한 경외함이 전혀 없었다 (열상 11:36). 그랬기에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600피트 약 182미터)을 헐고 (13절)” 이 성문은 도시의 북쪽 장벽에 있었으므로 (현재의 다마스커스 문), 향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북쪽의 다른 적들의 추가적인 공격에 노출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 만으로도 충분치 않았던지, 그는 주님의 성전에 대해 더 한 경멸을 보였다.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4절)” 유다의 요아스는 일찌기 하사엘의 예루살렘 공격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성전 보물을 약탈한 적이 있었기에 (12:18) 아마도 남아있는 보물과 기명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전의 보물을 약탈한 후 왕궁도 약탈한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14절). 이곳에 언급된 “볼모”는 그가 평화를 위한 특정 조건을 위해 유다의 몇몇 저명한 인물들을 데려가는 특이한 조치를 취했음을 알려준다.
아마샤의 교만과 완고함으로 인해 유다는 참으로 비싼 값을 치뤄야 했다. 역사가는 의도적으로 이전 장에서 이미 언급한 요아스 시대의 요약을 반복하며 (15-16절, 13:12-13) 아마샤의 시대를 마무리 하고 있다. 그가 전쟁에서의 패배와 볼모문제 이후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는 여호아하스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17절).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하지는 않았으나, 백성들이 그의 아들인 아사랴를 공동섭정으로 지명하여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타계하려고 할 만큼 오랜 기간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역사가는 그의 통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장 짧은 요약을 하고 있다.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8절)”
그의 치세에 어떤 성과가 있었던지 간에, 아마샤의 교만과 무모한 행동은 그의 신하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에돔 신들을 들여온 행동은 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을 것이다 (대하 25:14). 예루살렘에는 변화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모반한고로” 아마샤는 라기스로 도망했던 것이다 (19절).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30마일쯤 떨어져 있는 남쪽 저지대에 위치해 있다. 르호보암 시대에 열 부족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후 세운 요새 도시들 중 하나이다 (대하 11:5,9). 아마샤는 이 도시에서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느꼈을 것이고 만약 필요하다면 국경을 넘어 도망할 수 있으리라 여겼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모반자들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이 도시까지 쫓아와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왕에 걸맞는 장례를 치르도록 해 주었다.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하니라 (20절)” 이 구절의 의미는 아마도 그들이 왕의 전차를 사용하여 그 시체를 다윗성까지 옮겼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공모자들을 처단하면서 치세를 시작한 자의 끝이 동일하게 모반자들에 의한 죽음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21-22절 : 유다 왕 아사랴(웃시야)
아마샤는 다윗 계보를 이은 왕들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만장일치로 아사랴를 그의 후계자로 정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21절)”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자를 보좌에 올리면서 왕실 계보를 단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아사랴가 장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자신의 독보적인 능력 덕분에 백성들에게 선택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언급된 것 처럼 아사랴의 치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통치했던 공동섭정 기간이 포함되어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역사가들은 15장에서 아사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고 본 장에서는 오직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속한 일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22절).  아마샤가 죽고 나서 얼마나 빨리 엘랏을 건축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아마도 그의 통치 초반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다른 업적들보다 가장 먼저 언급된것으로 보아 엘랏을 건축한 일은 특별히 중요한 전략적 성취라고 보여진다. 아마샤가 에돔을 쳤을 때 엘랏도 복속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것이거나(7절) 아니면 요아스에게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한 이후 통제권을 잃은 지역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엘랏은 중요한 상업 항구였으며 (열상 9:26 참고 - 엘롯), 이 도시를 손에 넣지 못하면 에돔에 대한 진정한 통제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랑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새 왕이 이 도시를 복속하고 ‘건축’한 일은 그 도시의 기능을 확장했거나 아니면 강화한 것 중 하나이며 유다왕국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바로 그 때문에 아사랴의 치세 초반의 이 일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다른 자세한 사적들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23-29절 :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역사가는 이제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4대의 왕(10:30) 중 세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23절)” 그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앉았으며 그의 치세는 가장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에 대한 요약을 살펴보면 독자들은 왜 그가 이러한 장수와 풍요로움을 누렸는지 어리둥절 해 질 것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4절)” 다음에 이어지는 구원과 회복을 의미하는 구절들은(25,27절) 오래전에 그와 이름이 같은 왕이 벧엘과 단에 세운 황금 송아지에 대한 예배를 조장한 악한 왕의 문맥에 전혀 맞지 않아 보인다(열상 12:28-30). 오히려 그의 노골적인 우상숭배는 번영이 아니라 즉각적인 심판과 더 어울리는 것 같을 것이다.
여로보암이 왕국의 국경을 넓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5절)” 하맛은 북쪽 국경선이며 (민34:7-8) 아라바 바다는 사해(수3:16 염해), 즉 남쪽 지방의 국경선을 나타낸다. 아라바는 요단의 척박한 골짜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골짜기는 홍해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두 국경선을 넓히고 강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북으로부터 남까지 왕국의 총 길이는 약 200마일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백성들은 이처럼 좋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로보암2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는 그 성공을 오직 그 자신의 능력 덕분에 얻은것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풍요와 번영의 뒷면에는 주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만일 주님이 허락치 않으셨다면 그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고자 했을 때 그를 도운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그를 격려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5절)” 이 사람이 요나서를 기록한 그 선지자라는 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는 니느웨와 같이 먼 곳까지 가서 사역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국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가드헤벨은 북 왕국의 나사렛에 가까운 곳이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며, 그랬기에 그분은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그의 행동을 지시하셨던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것보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여로보암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감정이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6절)” 즉, 잡혀있든지 자유롭든지 간에 백성들이 도움을 구할 곳이 전혀 없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아람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동정하셨다. 여로보암은 자기 자신이 주님의 주권적인 손 안의 도구로써 그분의 백성들을 회복시키도록 했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주님의 오래참으심이 여로보암을 장수하게 했다. 주님께서는 아직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 (27절)” 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분께서 여로보암을 포함한 백성들을 다루시고자 하셨다면 왕국은 훨씬 전에 종말을 맞아야 했다. 주님께서는 심판이 닥치기 전에 또 다른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과 정 반대로 그들을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 (27절)”하셨다.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아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 것을 여로보암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생각했지 주님의 주권의 손이 그 뒤에서 움직였다는 것을 보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을 향한 그분의 오래참으심을 깨닫는 것을 실패하고 계속하여 우상숭배를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왕국의 부요함과 안정된 왕권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가는 여로보암의 더 많은 업적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그 권력으로 싸운 일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 (28절)” 냅(Knapp)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다윗이 복속시킨 적이 있었던 (대상 18:3-6) 다메섹과 하맛은 두 도시 모두 한 때 부강했던 왕국의 수도였다. 그들이 유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적어도 150년은 지난 시점에서 여로보암이 이 두 도시를 다시 이스라엘로 복속한 것은, 북쪽 국경에 있던 적대적인 두 나라를 정복한 이스라엘의 무력이 얼마나 강했으며 성공적인 전략을 사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모스 6장 2절에서 “대 하맛”으로 불리던 하맛은 아람 상부지역의 주요 도시였으며 남쪽 지방까지 이르는 오론테스강 전 계곡을 다스리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성과는 사람의 기준에서는 매우 인상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록에서는 상세히 기술될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고 단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28절)”에 기록할 뿐이었다. 열왕기 저자는 여로보암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보다 오직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두 선지자 호세아와 아모스가 사역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외적인 부요함이 백성들의 내적인 영적 부흥과는 상관 없었음을 보여준다. 호세아와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 5:4, 21-22)” 부패, 부도덕함 그리고 우상숭배가 백성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더 부자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41년간 그들의 제멋대로 행함을 참으셨고 때가 오자 여로보암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셨다. “여로보암이 그 열조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9절)” 스가랴는 이스라엘 왕조가 멸망하기 전 예후에게 약속하신 4대의 왕 중 마지막 왕이었다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