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글렌 베이커 형제님

05. 자녀 양육 : 반항이 만드는 실수들

박이레 2021. 12. 29. 14:52

< 05. 자녀 양육 : 반항이 만드는 실수들 > 2019년 / 글렌 베이커 형제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결혼에 대해서 다루어 왔고요. 이제는 자녀 양육에 대해서 다른 말씀 집회 시간에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성품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에 성품이 무엇이고 성푸이 무엇을 하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결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에, 남편의 인도력과 또한 아내의 순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녀 양육은 그 범위가 넓고 또한 깊게 다루어야 되는 주제입니다. 많은 방향으로 또한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주제입니다.
이번 시간에 제가 특별이 집중해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반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반항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때에도 내 자신 안에도 그런 반항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여러 부모들도 이런 반항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먼저 이 반항이 어떠한 실수들을 만들어 내는 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눅 15:11-26).

제가 26절에서 일단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씀드릴 것이 한가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첫째 아들은 종을 불러서 물었을까요?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요. 이것은 그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좋은 교류 가운데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맡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교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그는 아버지께 묻지 않고 종에게 물었습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 15:27-28).

이 맡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화가 난 상황을 생각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우리의 힘을 빼앗아 버리는 것들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여러분이 여기서 특히 후반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냬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내 가족과 즐긴 일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와 즐겁게 한 일이 없었나이다, 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 맡아들은 아버지와의 교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의 말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위해서 제공해 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는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 그 파티의 자금을 대는 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와 자기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서, 그 교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0-32).

이 맡아들은 자기의 동생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매" 라고 말하고 이습니다. 내 동생이라고 내 형제라고 그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 형제에 대해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 가산을 다 탕진해 버린 둘째 아들과는 자기가 전혀 관계도 없음을 그는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표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는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아버지는 그런데 그 동생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이는 너의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맡아들에게 이 가족 관계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맡아들이 둘째 아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친절하게, 자상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읽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반항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많은 실수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않게 한다 할지라도 그는 실제로 반항 가운데 실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런 반항 가운데 일어나는 실수에 대해서 가능하면 빠르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반항이 저지르는 첫번째 실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안의 쓴 마음을 이제 그들은 정당화 합니다. 이 반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 그들이 반항하는 것을, 그 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이 성경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쓴 마음은 모두 하나님이 합당하게 주신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해서 우리가 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왜 그것은 큰 실수입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그 쓴 마음은 여러분이 대항하는 그 사람을 절대 괴롭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 반항하는 자들이 갖게 되는 쓴 마음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권위에 대해서 대항하는 것이 문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쓴 마음이 자신을 교육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는 쓴 마음이 그들 자신을 다 삼켜버릴 때까지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쓴 마음은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아주 파괴적으로 망가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쓴 마음은 실제로 생물학적으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스트레스를 받을때 나오는 호르몬 레벨이 점점 더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받을때 일어나는 호르몬이 점점 더 많아질때 이제 그에 대항하는 다른 화학 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 축적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화학 물질이 여러분 체내에 점점 더 쌇이게 될 때에, 그 화학 물질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전자가 잘못 형성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그 사람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나쁜 호르몬을 만들어 내며, 그리고 그 순간에 코르티스라는 화학물질이 나와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혈압이 올라가게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떠한 선택을 할 때에 장애를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인식해서 내리는 판단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명확학 그 상황 판단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인 것처럼 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그런 정신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술취한 사람이 휘청휘청 걷는 것처럼 그렇게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정신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도 파괴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욱 화를 만들어 줍니다. 당황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그 쓴 마음은 여러분을 영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시편 51장 12절에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떠 받쳐 주소서"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개역한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주의 자원하는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시 51:12, 킹제임스).

또한 이 쓴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빼앗아 가 버립니다. 요한 일서 4장 20절에는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 하는 자니 자기라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의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이 쓴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한가지 작은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쓴 마음이라는 것은 수류탄을 그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계속 자기가 던지지 않고 쥐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쓴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쓴 마음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 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파괴되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계속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그 쓴 마음은 다른 사람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은 오직 그 자신을 생물학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파괴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항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실수는 그 쓴 마음을 자기가 계속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정당화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그들은 그 쓴 마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파괴 했는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 반항은 그 가운데 큰 혼란을 가져다 주는 것을 두번째 실수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가장 큰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반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10장의 일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니므롯이라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우리가 반항하자' 또는 '반항자' 입니다. 우리는 11장에서 그 니므롯이 한 탑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도시를 둘러싼 그 큰 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탑은 바벨 탑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바벨의 뜻은 '혼란'입니다. 이것은 그냥 우연히 그 이름 두개가 연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반항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여러분은 곧 그 가운데 큰 혼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란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존재하는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리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반항하는 자들이 자신은 실제로 어떠한 혼란 가운데 있는지 자기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는 이제 큰 혼란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갔을 때에 그는 영적으로 큰 혼란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2).

"아버지여 주소서"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잠깐 이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에 이 둘째 아들이 그 아버지와 합당한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는 단지 단지 주소서 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지금 다른 나라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것을 원하고 있지만 제 머리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저에게 조언을 해 주십시요. 제 약한 부분을 고치고 강하게 할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아버지, 저를 도와 주십시요." 이렇게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말했다면 어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까? 그는 아버지와 가져야 되는 그런 대화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와 충분한 교제를 갖지 못한 그 아들은 그 마음의 문을 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 볼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지 그냥 아버지께 찾아와서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주십시요."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큰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떠난 반항하는 자들이 많이 겪는 문제가 바로 이 동일한 혼란입니다. 그냥 단지 하나님에게 주세요, 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참으로 이 반항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서 "주님, 저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지 않습니다. 그 반항하는 자들은 단지 하나님께 나아와서 "저에게 직장을 주세요."라고 말할 뿐입니다. 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저는 이것 저것이 필요합니다, 라고 단지 요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제 삶을 만들어 가는 데는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 사람을 큰 혼란으로 이끌 것입니다. 저는 동일하게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구할 때, 하나님은 어느 사람이건, 어느 상황이건,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실 의무가 없는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도응답을 주시지 않을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화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셔야 되는 의무가 있는 분입니까?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즉시로 주셔야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한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경외함으로 나아와야 되는 그런 하나님인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 어느것을 주실 의무가 없는 분입니다. 왜 그런데 이 어린 아들은 나에게 주라고 하는 요구하는 자세로 나왔습니까? 왜냐하면 반항에는 항상 많은 혼란이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는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아들에게 재산을 주었을때 그는 그것을 다 가지고 먼 나라로 갈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이 그 모든 재산을 다 허랄방탕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그 아버지는 그 재산을 나누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줬습니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그 재산을 가지고 다 낭비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나는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그렇게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성경은 그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그 분깃을 이미 다 나누어 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다. 만약 어떤 반항하는 자들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때, 하나님은 그것을 단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해서 어기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강제로 못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떠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심기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자원해서 그 일을 선택하고 섬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을 강제로 억압해서 그 일을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택권을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 선택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택의 자유는 항상 그 결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반항하는 둘째 아들이 그 선택의 결과로 어떠한 고난을 받는지 여러분은 그 결과 까지도 보고 계십니다.
제가 한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아버지가 각자에게 분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빈털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지만 자기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나누어 주는 그 산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산수법과는 굉장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준다 하실지라도 그분은 여번히 아주 풍성한 분으로 남아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그 분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그 반항하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대해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역시 큰 혼란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그냥 단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보다 먼 나라에 가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유망한 미래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먼나라에 가는 것이 단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보다 자신의 인생을 더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혼란이었습니다. 동료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하늘의 집에 있는 것보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이루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큰 혼랍니다. 그것은 전혀 진실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다른 곳에서 더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저는 영적으로 혼란 가운데 빠져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과 관련되서 도전이 되지만 또한 건강한, 해 봐야 되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만찬 예배를 드린 것 외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는 너무나 바빠서 그런 교제 시간을 나누기 어렵다고 변명하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하늘의 아버지와 교제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일찍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세상에서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면 우리는 영적인 혼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를 돌아 볼때에 저는 이 비유에 있는 둘째 아들과 같은 영적인 상태에 제가 종종 빠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그 복을 받는 것은 매우 빠르게 좋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있어서는 굉장히 더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가서 그냥 "주세요." 하는 것은 쉽게 합니다. 하지만 이 하늘의 아버지께 우리는 얼마나 주고자 하고 있습니까?

이 반항하는 자들은 영적인 혼란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그들의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 15:13).

'허비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흔히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탕자'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탕자라는 단어의 뜻은 '다 허비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말씀대로 허비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허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허비하다는 단어를 살펴보게 될 때에, 이 말씀은 그가 먼 나라로 가서 그의 가진 '재산을 사용하였다'라고 기록하지 않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용하였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가진 재산을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한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받은 재산이 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가 먼 나라로 가서 그것을 사용하였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먼 나라에 가서 그 돈을 투자하였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 재산을 올바르게 투자했다면 그의 재산은 얼마나 증식이 되었겠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 경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 재산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허비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재산을 모두 유익하지 않은 데에 다 그냥 낭비해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재산"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그의 '기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재산에는 그가 받은 기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산이라는 말은 더 큰 범위를 가진 단어이고 단지 기업만을 말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할 때는, 그가 받은 그 기업만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며, 그의 시간을 낭비한 것이며, 그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낭비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단지 낭비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하루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무가치한 것들을 하느니라고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한 모든 선택들을 한번 되 돌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거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모임과 관련되서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이 낭비했던 것과 같은 그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부느이 교회를 하늘로 데리고 가신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 그 분께 헌신되이 드려졌던 그 인생을 그분앞에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그 분에게 중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는 그 인생을 그 분에게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단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으로 채워진 그 인생이 아니라 그 분께 중요한 인생을 그 분에게 보여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과 관련되서 우리의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자라면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묻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이렇게 묻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질문과 대답이 되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가 가지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요." 제가 내가 원하는 일을 옆으로 제쳐놓고 그런 겸손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내 삶 가운데서 구하는 겸손함이 있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요. 그것이 바로 제가 자랐을 때에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제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이 갑자기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전날에 충분히 잠을 자지 않았는데 그 다음날에 일찍 일어나서 성경을 펴서 읽으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로 바쁜 상황 가운데 있을때,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드리는 시간이 갑자기 생겨나게 됩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직장과 다른 일로 바쁘게 살고 있는데 여러분이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나게 됩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일이 갑자기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는 그러한 삶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큰 아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 비유를 볼 때에 둘째 아들에 집중해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비유에는 두명의 반항하는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큰 아들도 역시 집을 떠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큰 아들이 둘째아들만큼 멀리 떠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집 뒤뜰 정도 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둘째 아들이 떠났을때, 그가 그렇게 나간 것입니다. 그 큰 아들에게도 그의 기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큰 아들도 바로 그날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집을 떠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 옆에 계속 있고 싶어요. 저는 둘째 아들이 한 것처럼 그런 반항하는 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기업을 정해진 날까지 아버지께서 맡아 주십시요." 하지만 큰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큰 아들도 역시 그 기업을 받아서 집을 떠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도 그 먼나라까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그 풍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에 와서"라고 그가 했던 것을 성경이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정도만큼 집을 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큰 아들도 아버지를 떠나 집을 나갔습니다. 그도 역시 영적인 혼란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행위를 해서 그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그 정도로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그 둘째 아들보다 아버지 앞에서 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영적인 혼란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항하는 자의 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그 둘째 아들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아버지께 반항하여 먼 나라에 있을 때에, 그는 영적인 혼란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큰 아들은 둘째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기와 함께 그 가산을 먹어버린 동생" 그것은 좋은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은 도덕적인 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지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그 둘째 아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거의 시간이 다 되서 큰 아들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들겠습니다. 하지만 그 둘 중에 큰 아들이 더 큰 반항자임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아들은 그가 어느 지점에서는 자시느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여 돌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아버지와의 교제를 다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 큰 아들에 대해서는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그의 교만과 자기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그는 여전히 집 밖에, 들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원한 것은 염소 새끼를 잡아서 자기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서 파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마음 속에 아버지와의 교제를 원하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반항하는 사람들은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단지 오늘 이 시간에 두가지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이 반항하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쓴 마음을 스스로 정당화 하고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실수는 그가 반항함으로 인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혼란 가운데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