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2일 수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솔로몬의 생애 07_성전건축 >
열왕기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6:1, 개역한글)
37 제 사년 시브월에 여호와의 전 기초를 쌓았고
38 제 십일년 불월 곧 팔월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전이 다 필역되었으니 솔로몬이 전을 건축한 동안이 칠년이었더라
(왕상6:37-38, 개역한글)
6장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 됩니다.
사실 열왕기상의 시작은 다윗이 말년에 노쇠해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할수 없었기에 있었던 여러가지 혼란과 관련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 모든것을 다 극복하고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성전을 지을때까지, 제 4년이 될때까지 그는 3년동안 왕국을 견고히 하는일,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두가지 중대한 일에 대해서 기초를 쌓았던 시간이라 생각할수 있습니다.
사실 왕국을 견고히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있겠습니까?
다윗이 주님께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시고 오히려 내가 너의 집을 세워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일 내 말씀을 잘 순종하면 너의 후대의 왕들이 끊어지지 않을것이다. 내가 너의 집을 견고케 할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일 입니다.
솔로몬의 즉위 이후, 그는 왕국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솔로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맏기셨는데 그것은 성전 건축의 일입니다.
성전을 건축을 위해서 다윗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재료를 준비 했습니다. 식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즉위 했을때,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먼저 구한것이 아니라 기브온에 갔을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하셨습니다. 그럴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말씀 드렸습니다.
"나는 아이라, 잘 알지 못하고 통치할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요." 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다른 여러가지를 주셨습니다.
솔로몬 왕국 건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부 입니다. 이 두가지가 사실상 3장과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에서 그가 어떻게 지혜를 받았는지, 4장에서 그가 어떻게 거대한 풍요로움 부를 얻게 되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전부터 다윗과 함께 잘 지내고 있었던 두로의 왕 히람이 솔로몬이 즉위 했을때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축하 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레바논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재목들, 백향목과 전나무를 달라고 솔로몬은 요구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상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고자 하는 하나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이 자기에게 물려준 막대한 보물들이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그는 물론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자신도 성전 건축을 위해서 준비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거대한 돌들을 깎아 내려오고 또 성전 건축을 위해서 수많은 일꾼들과 감독들을 세우는 일들을 했습니다. 이것은 5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6장 말씀의 제일 첫번째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언제 건축이 시작되었는지로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그 시간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시간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떠난 이후 480년이라고 말씀 합니다.
480년이 지났습니다. 이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어느날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언약궤는 휘장속에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전을 지어드려야 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아들때에 가서 그것을 짓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아직 다윗이 지을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가 전쟁의 사람이기에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이 외에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때, 우리의 때가 있고 우리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인가 하는 것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 그 시점은 어디 입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즉위하고 제 4년 이월에 그는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말씀 하십니다.
솔로몬의 건축한 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 얼마가 지났다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출발점, 기준점은 솔로몬이 아니고 출애굽때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480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회막이 아니고 성전에 거하시게 됩니다.
애굽에서 나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며 회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회막은 휘장 입니다. 휘장안에 언약궤를 모셔두고 수많은 기구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이고 가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영구한 구조 입니다.
영구적인 구조를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전부터 두고 계셨는데 출애굽 이후 480년이 지난때에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때가 오기전에 왕을 달라고 요구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낭패를 보았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전에 구하게 될때, 그것은 항상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일 강행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때에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강요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하나님 내가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강요 했습니까?
"저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좀 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7장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전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는 전폭적으로 받아 들이고 그는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을 합니다. 전을 위해서 재료를 준비하는 일을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식양을 주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솔로몬의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온 것입니다.
그때는 출애굽으로부터 480년이 지난 때 입니다. 우리 잠깐 이 기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13:14, 개역한글)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을때에 사도바울이 회당안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 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위대한 비시디아 안디옥의 설교 입니다. 안디옥은 성경에서 흔히 두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나타난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입니다. 이것을 오로테스가 있는 안디옥이라고 해서 오로테스 안디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저 중앙부에 또 다른 안디옥이 있습니다. 이곳을 가리켜서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말하는데 이곳에서 사도바울이 말씀을 증거 하시는데 19,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13:19-20, 개역한글)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7-18, 개역한글)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19절 말씀에 450년동안 사사때까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럼 490년 입니다. 그 다음 사무엘 이후에 사울이 40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40년 다스렸습니다. 그럼 80년 입니다. 490년에 80년을 더하면 570년 입니다. 그리고나서 솔로몬이 3년 치리하고 4년째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573년 입니다.
사실상 이와같은 계산법으로 말한다면 출애굽부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는 사실상 573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6장 1절 말씀에서는 480년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은 기간의 간격을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함으로 인해서 여로 외국 이방 민족에 의해서 노예가 되고 그들 밑에서 학대받는 기간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것을 합치면 93년이라 계산 합니다.
93년이라는 시간은 사실상 하나님의 견지에서 볼때, 출애굽부터 솔로몬의 건축 때까지는 대단히 중요한 기간 입니다. 이제 회막이 아니고 영구한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는 이 중대한 때를 가리켜서 573년 지났다고 말씀드려야 하지만 그 대신 480년이라 말씀 합니다. 그것은 93년을 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들은 해방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민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어린양의 보혈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얻는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들은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인해서 그들은 이방민족에게 짓밟혔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93년을 제했다는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시간은 낭비의 시간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될때,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잃고 학대받고 우리의 대적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꽁꽁묶어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와같은 기간은 낭비 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어떤생활을 했습니까?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은 낭비의 시간 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와같은때, 그것은 어두움의 기간 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 그것은 낭비의 시간 입니다.
그 기간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없습니다. 우리 원수에게 이용 당하고 쓰임받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슬픈 기간 입니까?
다시 말씀 드려서 성전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 건축물을 하나님께서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때가 왔는데 그때까지를 480년이라고 말씀하시고 93년을 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시각에 있어서 속박 당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는 이 기간은 순수하게 낭비의 기간인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와같은 말씀을 생각할때 주님말씀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우리 자신을 허송세월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신약 에베소에서 말씀한 것처럼 '너희는 세월을 아끼라' 하셨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세월을 구속하라는 말씀 입니다.
구속받는 백성이 세월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방신상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기간은 낭비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 진리들을 저희들의 마음속에 두고 저희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물론 저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만,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기회 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다시오지 않는 기회 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저희들이 충분히 하나님 앞에 살려서 낭비하지 않고 때를 구속하고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할것입니다.
저희들이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함으로 주님께 이 시간 이 시대에 영광을 돌려드려야 겠다고 생각 합니다.
솔로몬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전은 장이 육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삼십 규빗이며 (왕상6:2, 개역한글)
이것은 성전의 크기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전의 폭과 넓이와 길이를 말씀 했습니다. 폭은 이십규빗 약 10미터 입니다. 길이는 육십규빗입니다. 약 30미터 입니다. 높이는 삼십규빗입니다. 약 15미터 입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나온 회막의 크기를 대조해 보면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면적을 살펴보면 회막의 길이로는 두배, 면적으로는 네배 입니다. 회막이 성전의 1/4 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면 성전은 그렇게 큰 건축이 아닙니다. 회막의 길이로서 두배씩 입니다.
겨우 그것에 불과 합니다. 이방신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작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중요한가요?
왜 그것이 그렇게 독특할까요?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리 커도, 아무리 비싼 재료를 사용했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집, 건축물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전을 짓게 될때 무엇으로 지어야 하겠습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야 합니다.
값비싸게 지어야 합니다. 이것을 사도는 서신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전이 지어지게 될때 모임이 가장 고귀한 것은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건축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식양을 가지고 계셨고 다윗에게 식양을 주셨습니다.
재료를 다윗을 통해서 준비했고 솔로몬도 준비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할때까지 준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다윗이 준비했고 솔로몬이 준비 했습니다. 이 긴 기간을 통해서 다 준비가 된 이후에 건축에 들어갑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을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훈련하고 우리 자신을 단련하고 우리 자신이 주님의 합당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합당한 과정들을 기쁨으로 기꺼이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모임에 들어와서 교제하게 될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준비 기간입니다.
이 중요한 기간을 허송하지 아니하고 정말로 모든 때를 저희들이 아끼고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 다음 3절 말씀은 낭실 입니다. 현관을 통해서 전에 들어가는데 4-5절 말씀을 보면 여기 붙박이 교창이 있습니다.
4 전을 위하여 붙박이 교창을 내고
5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6 하층 다락의 광은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광은 여섯 규빗이요 제 삼층 다락의 광은 일곱 규빗이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왕상6:4-6, 개역한글)
뵥 제일 위에 붙박이 창이 있고 그리고 그 아래 3층에 골방이 있습니다.
회막은 조각목으로 널판으로 만들고 그것을 금으로 쌉니다. 길이는 30규빗 폭은 1.5규빗으로 해서 두개의 받침이 그 각 널판을 받치고 있습니다.
그 널판으로 세 면이 둘러 싸여있고 포장을 치게 됩니다. 그것이 회막의 기본 구조 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성전 자체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삼면에 북족과 서쪽과 남쪽에 골방들이 있습니다.
삼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층의 골방들은 나선모양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성전에 골방이 있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독특한 구조 입니다.
그 많은 방들이 아래층,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폭이 넓어집니다.
하층 다락의 광은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광은 여섯 규빗이요 제 삼층 다락의 광은 일곱 규빗이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왕상6:6, 개역한글)
이 골방은 제사장들이 이 곳에 와서 섬기게 될때 필요한 방들 입니다. 제사장이 옷을 갈아입는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할때에 이 골방이 필요하리라 생각 합니다.
또 하나 이 골방들은 성전안에서 성소와 지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분주히 일합니다. 이 성소에는 위대한 보화가 잘 저장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1장 말씀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성전에 들어와서 모든 보화를 다 빼앗아 바벨론으로 갑니다. 보화를 빼앗긴다고 하는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배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갖는 교제를 원하십니다. 사실상 지성소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곳, 대화하는 곳이라고 해서 오라클이라고 말씀 합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라고 하는 곳의 위대한 것은 보화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교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때 저희들 모임은 무한한 보화를 저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은 어디 골방이 있습니까?
우리 모임에는 골방이 없습니다. 물리적인 골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골방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골방 안에 엄청난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 조금후에 살펴보겠습니다. 이 위대한 보화를 모임은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을 저희들은 소중히 생각하고 이 보화를 뺏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 고레스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8 바사 왕 고레스가 고지기 미드르닷을 명하여 그 그릇을 꺼내어 계수하여 유다 목백 세스바살에게 붙이니
(스1:7-8, 개역한글)
이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의 다른 이름입니다.
9 그 수효는 금반이 삼십이요 은반이 일천이요 칼이 이십 구요
10 금대접이 삼십이요 그보다 차한 은대접이 사백 열이요 기타 기명이 일천이니
11 금, 은기명의 도합이 오천 사백이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때에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다 가지고 왔더라
(스1:9-11, 개역한글)
에스라 1장 말씀은 전에 빼앗겼던 것을 고레스 황제가 고토로 돌아가라 할때 세스바살이 다 받아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장에서는 느부갓네살이 와서 다 빼앗아 갔는데 이제 고레스가 가라고 할때 그 빼앗겼던 금은 기명 보화를 다 가지고 왔습니다.
보화를 빼앗길때가 있고 보화를 다시 찾을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저희는 모임이 안고있는 위대한 보화를 우리가 잘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보화를 얼마나 저희들이 귀하게 생각하고 그 보화를 간직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조금후에 저희들이 해 보겠습니다.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왕상6:7, 개역한글)
여기 갑자기 돌을 채석장에서 떠나가 그것을 석수장이들이 다듬고 정확한 치수대로 매끈하게 깎아서 그것을 전 장소로 옮겨와서 그곳에서 그것을 조립하는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건축 현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말씀 합니다.
어떤 소리인가요? 돌을 가지고 일할때에 돌을 깎고 자르고 하려면 철 연장이 쓰여집니다.
돌은 너무나 단단하기에 달인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채석장의 바위를 어느정도로 떼어내고 치수대로 잘 깎아서 매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표면이 우둘두둘하면 두개가 연접하게 될때 그 사이가 떠 버립니다.
그래서 새가 뜨지 않기 위해서는 그 치수가 정확하게 맞아야 합니다. 이와같은 일은 괭장히 많은 수고와 노동과 기술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전 지대를 놓고 성전을 지게 될때 성전 자체에도 돌을 놓고 백향목으로 덮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아무런 돌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돌이라 할찌라도 정확하게 떠서 그 안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건축을 우리가 생각할때, 하나님의 전이 건축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자재들을 생각할때, 그것은 적당히 만들거나 적당히 조합해서 되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이 밖에서 전혀 보이지 않아도 그것을 정확하게 떠서 깎고 마모하고 해서 정확한 사이즈로 그 안에 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주님 일을 하게될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보는 것 같이 그렇게 일을 하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일하게 될때 우리의 자세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게 될때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해도 주님앞에 참으로 전심으로, 주님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돌을 떠서 건축 장소에 그것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조합할 뿐 입니다.
거기서는 끌이나 정이나 망치를 사용하여 들리는 방망이 소리나 도끼 소리나 철 연장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철 연장 소리는 금속 소리 입니다. 우리가 대단히 듣기 싫은 소리를 가리켜서 금속음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듣기에 대단히 듣기 성가신 소리가 금속 소리 입니다.
그래서 음악에는 메탈 사운드라고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것을 즐겨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옆에서 막 그런 소리가 나오면 정말로 성가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속 소리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겠지요.
성전을 지게 될때, 여기에는 전혀 어떤 투쟁이나 다툼이 없습니다. 화평한 가운데 하나님의 전은 건축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때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질서와 저희들의 권위의 순복 하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건축되고 가동된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중요한가요?
성도들이 여기 와서 교제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봉사 할때 저희들 가운데 있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바로 성령의 역사 입니다. 여기 금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말은 성령님의 역사를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 말씀에서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말씀할때, 두가지 비유를 말씀 합니다.
하나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들에 내림과 같다고 말씀 합니다. 비가오고 폭우가 내리게 될때 대단히 큰 소리가 납니다.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질때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슬이 내릴때 전혀 소리가 없습니다.
그 이슬은 헐몬으로부터 시온의 들에 내립니다. 그래서 타 들어가는 땅을 촉촉히 적셔 줍니다.
비가와도 적셔 줍니다만, 때로는 콸콸 쏟아져 급류를 이룹니다. 그래서 땅을 깎아내립니다.
탁튜가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슬이 내릴때는 그럴일이 전혀 없습니다.
모임이 건설되고 모임이 보존이 되고 모임의 간증이 유지될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저희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저희들 마음속에 평안과 고요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저희 마음 속에서 깊은 감동 속에서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말씀에서 성전에서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기록 합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디서 소리가 들려야 합니까? 어디서 이 돌을 준비해야 합니까?
채석장에서 준비가 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돌이 이 성전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에 산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전으로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우리는 산돌이 아니라 채석장에서 철 연장으로 자르고 깎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대한 소리, 철 연장 소리는 구원받기 전으로 족한 것입니다.
구원받고 난 후에 우리가 산 돌이 되어서 주님의 전이 되어갈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제하는 위대한 교제가 모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점을 우리는 7절에서 다시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계속해서 골방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나사모양 사닥다리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제 삼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왕상6:8, 개역한글)
위로 올라갈수록 방이 커집니다. 그리고 1층에서 2층으로 가고 2층에서 3층으로 올라 갑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1층에서 3층을 누르면 3층으로 바로 올라갑니다. 성전에 있는 골방은 1층에서 3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1층에서 2층에서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올라갈수록 방이 커집니다.
보화를 저장하는 용적이 올라가면서 커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게 될때, 성장은 1층에서 3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순서를 따라서 올라갑니다.
우리의 성장은 순식간에 버섯처럼 하루 아침에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실때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장시킵니다. 구멍이 숭숭 나서 크기만 큰 대나무처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자질이 빼곡하게 차도록 성장 시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쓸만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성장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니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 더 후에 보겠습니다.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왕상6:9, 개역한글)
사실 전체 건축은 아직 마치지 않았습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네부류의 건축이 나옵니다. 여기까지는 돌로 틀을 만드는 기반과 벽과 이런 것들을 만드는 일에 필했다고 믿습니다.
9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10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
(왕상6:9-10, 개역한글)
돌로 지어졌고 거기를 나무로 다 덮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기본적으로 틀을 만들게 될때 성전에서의 건축 과정이었습니다. 먼저 돌로 기반을 쌓고 바닥을 깔고 벽을 쌓고 안에 들어갔을때 전혀 돌이 보이지 않고 백향목이나 잔나무로 다 덮고 깔았습니다.
11-13절 말씀을 보면 이제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3장 말씀을 보면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기브온에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장차 성전을 지을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고 그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거대한 일입니다.
솔로몬은 그 일을 하게 될때 자신이 잠언에서 기록 했습니다. 보좌가 견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른말로 하면 통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인도하게 될때, 백성들 가운데서 불만이나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없이 평안과 만족이 있도록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공의와 의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습니다.
편벽이나 기울어짐이나 치우침이나 편견으로는 다스릴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를 다스릴때 뿐 아니라 모임을 다스릴때도 마찬가지고 가정을 다스릴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다 만족하고 구성원 모두가 다 불만이 없고 구성원 모두가 다 어떠한 결정이라도 합당하다고 인정할수밖에 없는 그런 통치 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원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실상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솔로몬 통치 초기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바른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라고 말씀 하실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라고 할때 우리의 대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노출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을 원하는가요?
만일 솔로몬의 마음속에 개인의 영달이나 사람들 앞에서의 인기나 자기 과시를 원했다면 다른것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아이라 통치할수 없으니 지혜를 주십시요."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 입니다. 모임에서 우리가 통치하게 될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건사건 케이스마다 바로 적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바로 다스리기 위해서 바른 통치를 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 뿐만 아니라 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원하는 바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습니다.
3장에서 그와같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셨는데 여기 6장에서는 두번째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의 생애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번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는 3장에서 기브온에서 나타나셨고 두번째는 6장에서 그가 건축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세번째는 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경고 하십니다. 네번째는 11장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판하십니다.
그의 타락을 향해서 그가 경고의 말씀에 응하지 않았을때 하나님께서는 네번째 나타나셔서 그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 두번째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전을 건축할 것이다.'
드디어 때가 되어서 솔로몬이 전을 건축하는 도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여기는 시작 전이 아니고 시작 직전도 아니고 순서로 보면 프레임을 다 만들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 하십니다.
즉 내부공사가 있기 전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말씀의 순서는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그에게 부탁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들로서 의미심장한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고 드디어 그 일을 추진 합니다.
전을 건축하고 대단히 바쁜 때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고 그가 준비한 모든것을 가지고 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그가 전을 건축하게 될때 그의 바쁜 모든 마음이 전 건축이라는 기술적인 일에 매진할 것이 아니고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는 깊이 생각하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2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왕상6:11-13, 개역한글)
오래전에 다윗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기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 말씀을 네가 순종한다면'
이것은 오래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과 얼마나 똑같은 말씀 입니까?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정말로 순종하면 내가 너를 지키겠다. 내가 네 집을 보존하겠다. 내가 네 왕국을 지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말을 나는 집행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 합니까? 얼마나 많이 우리가 이 말씀을 듣습니까? 얼마나 많이 우리가 이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의 중요성을 우리 마음에 두고 그 의미를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세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우리 것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 말씀을 정말로 마음에 두고 그 일생을 통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로 순종하겠다는 것을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그가 말씀에 순종 했다면 그는 전혀 다른 역사를 썼을 겁니다.
그는 출발은 좋았습니다. 성전을 지을때가지 그는 좋았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 후에서도 그의 왕국이 절정에 도달하는 때를 기록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절정에 도달했다가 그 다음 추락해 내려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모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와같은 성향이 있을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이것은 솔로몬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와같은 성향이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기에 너는 내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순종하지만 앞으로도 순종할 것인가요, 앞으로 5년 후에도 순종할 것인가, 너는 이 세상이 끝날때까지 순종할 것인가? 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물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말씀, 언약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서 주님앞에 충성된 마음을 표해야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하는 도중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간곡히 확인해주는 말씀이고 그의 번영과 그의 왕국의 흥함을 하나님께서는 소원하시고 이와같이 말씀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 말씀을 듣고 계속해서 전을 짓습니다.
15절 이하 부터는 내부를 그가 건축 합니다.
15 백향목 널판으로 전의 안벽 곧 전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벽에 입히고 또 잣나무 널판으로 전 마루를 놓고
16 또 전 뒤편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전의 내소 곧 지성소를 만들었으며
(왕상6:15-16, 개역한글)
마루는 잣나무로 벽은 백향목으로 다 덮었습니다. 그래서 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위로는 금으로 다 덮습니다.
성전안에 들어가면, 그 모든것이 말하기를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나의 생전에 나의 소원은 내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싶다." "온 생애를 통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싶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어떤 것이냐고 하는것입니다. 다윗은 아직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성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쓸때 그런 시를 썼습니다. 그와같은 소원이 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솔로몬은 전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식양대로 전을 짓는데 그 전은 전체가 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런곳에 거하시는 분 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곳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소 앞에 있는 외소 곧 성소의 장이 사십 규빗이며 (왕상6:17, 개역한글)
여기서는 내소 외소라고 말합니다. 지성소, 성소를 내소 외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 안에 입힌 백향목에는 박과 핀 꽃을 아로새겼고 모두 백향목이라 돌이 보이지 아니하며 (왕상6:18, 개역한글)
돌이 있고 그 밖에는 백향목이나 마루는 잣나무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박과 핀 꽃을 새겼습니다.
나중에 29절 말씀을 보면 내 외소 사면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의 형상을 아로 새겼고' 라고 기록 합니다. 부조로 새겼습니다. 그것은 그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의 형상 입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호하는 천사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옆에서 경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이라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항상 경호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 합니까? 그분의 영광은 항상 경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하고 나눠 갖기를 원한다면 그룹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의 영광을 인간과 나누실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를 나도 나눠갖고 싶어하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룹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경호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종려나무와 핀꽃의 형상 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광야에 흔한 것들 입니다.
제사장들이 이와같은것을 바라보게 될때, 이 전은 평화가 깃들고 왕국이 번성하는때에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옛날 그의 조상들이 광야를 지나게 될때 어떤 어려움을 통과 했는가를 제사장들은 기억 합니다.
또한 이것은 부활의 영광을 즐기는 성도의 마음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 가운데 거할때에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현실을 매일과 같이 즐기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때, 불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죽음을 항상 눈 앞에 두고 노쇠하고 죄로 인해서 나타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이러한 현실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때에 주님과 같이 변하고 우리의 육체가 영광스러운 몸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 저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즐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광야를 통과 했듯이 우리도 이 땅에서 광야를 통과할때 어떠한 어려움을 저희가 경험 했는가 하는 것을 추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추억일 뿐 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우리가 매일과 같이 누리는 것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현실을 즐기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그것을 매일과 같이 보고 시뮬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을 그림자와 같은 모습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19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기 위하여 전 안에 내소를 예비하였는데
20 그 내소의 속이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단에도 입혔더라
(왕상6:19-20, 개역한글)
내소에 궤가 있습니다. 나중에 궤가 들어올 것인데 언약궤가 들어올 지성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다 완성이 되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휘장에 있었던 궤가 성전으로 옮겨 집니다.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순간입니다. 이것은 후에 열왕기상 말씀에 나타납니다. 나중에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내소가 있고 거기 궤가 있습니다. 궤 안에는 언약의 두 돌판이 있습니다.
사실 언약의 두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궤가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내소로 들어오면 내소가 궤를 안고 있습니다.
사실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은 궤가 포옹하고 있고 그 궤를 내소가 포옹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때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말씀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 안에 율법의 두 돌판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그 그림이 항상 우리 주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단을 말씀 합니다.
<백향목 단에도 입혔더라>
정금으로 입혔는데 핵향목 단을 말씀 합니다. 거기도 백향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입혔습니다.
옛날 회막에는 분향단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덮었는데 여기서는 백향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2, 개역한글)
내소에 속한 단이라 말씀 합니다.
사실 이 위치는 내소가 아니라 성소에 있습니다. 그러나 휘장 가까이, 내소와 외소를 가로막는 벽, 내소 바깥에 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능 상으로는 그것은 오히려 내소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에서는 항상 분향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향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조석으로 제사장이 와서 분향 했습니다.
시편 말씀에서는 다윗이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기도가 분향과 같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기를 원한다고 말씀 합니다.
내소에 속한 단에서는 사실 분향 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와 주님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내소는 무엇입니까? 내소는 대화하는 곳이라고 해서 '오라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실, 분향단인데 이 단은 외소가 아니라 내소에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기도는 얼마나 주님과의 대화, 교통을 말해주는가를 봅니다.
제사장들이 조석간에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분향을 드린것과 같이 우리는 은혜의 보좌앞에 끊임없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과 대화 합니까? 어떻게 대화 합니까?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사도바울이 말씀 했습니다.
그와같은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대화, 이것은 우리 삶의 호흡 입니다.
말씀과 기도.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기도는 우리가 주님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교통, 대화를 우리는 계속 유지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여기서 봅니다.
23절 이하에서는 그룹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들어오면, 그것은 상자 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속죄소가 있습니다.
상자 뚜껑이 속죄소인데 이 속죄소는 한 금덩어리로 뚜껑이 되는 바닥을 만들고 그것을 쳐서 날개를 편 두 그룹을 만듭니다. 두 그룹은 속죄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하고 계시는 주님의 보좌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는 내소에는 회막에 있는 이와같은 그룹만이 아니라 속죄소 위에 있는 그룹 입니다.
사실상 속죄소와 그룹은 뗄레야 뗄수 없는 한 덩어리의 금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속죄소에 있는 두 그룹으로만이 아니라 또 다른 그룹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백향목으로 벽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룹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금으로 씌웁니다.
그것은 거대한 그룹 입니다. 속죄소에 있는 바닥에 있는 금과 속죄소에 있는 그룹은 하나의 금덩어리로 되어진 것인데 거기에 있는 그룹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개의 거대한 두 그룹이 날개를 폈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날개를 폅니다.
이쪽 그룹은 날개가 벽에 닿았고요 저쪽 날개는 다른 그룹의 날개와 연하고 그리고 또 다른 그룹의 다른 날개는 저쪽 벽에 연합니다.
사실상 두개의 그룹은 두 날개, 네개의 날개 입니다. 네개의 날개는 이쪽 벽에서부터 저쪽 벽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그룹은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외소를 향해서 보고 있습니다.
작은 그룹들은 속죄소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거대한 그룹들은 외솔르 향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그룹이 서 있다고 하는것은 회막과 전혀 다른 모양이 내소안에, 지성소 안에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그룹이 날개를 펴서 연하고 있다는 것은 성소안에 있는 독특한 특징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연합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룹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은 연합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영광을 경호하는 일을 한마음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도 경호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눠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욕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마땅히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소안의 모습을 보게 될때 우리는 더욱 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 29절 이하에서는 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성소 내소에서 외소로 나가게 될때 문이 있습니다. 회막에서 볼때는 그냥 휘장이 있습니다. 휘장을 통해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성소를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 갑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벽이 있습니다. 거기에 문이 있습니다. 여닫이 문으로 열고 들어가게 되는데 그 위에 휘장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사실상 거기에 들어가게 될때 그는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첫째 휘장을 열때, 그리고 문을 열때도 문이 그렇게 높지 않다면 그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갈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때 감람나무로 지은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그 문은 금으로 다 덮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문은 어떻습니까? 외소의 문은 잣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이 두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열리고 닫히고 할때 서로 두가지가 겹쳤다 펴졌다 하는 그런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을 나가면 뜰이 있습니다.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로 둘러 안뜰을 만들었더라 (왕상6:36, 개역한글)
이 뜰은 제사장의 뜰 입니다.
그리고 그 뜰 밖을 나가면 회중의 뜰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열왕기상 6장은 성전을 건축하게 될때 틀과 내부의 건축을 어떻게 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남은 시간동안 다시 열왕기상 6장 초반에 나타났던 골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왕상6:5, 개역한글)
골방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폭이 넓어집니다. 한 규빗씩 넓어집니다. 그리고 나선의 계단으로 한층한층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골방은 성소의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데, 삼면에 에워싸고 있는 골방들은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일하게 될때 그들의 필요를 따라서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골방에는 성전의 보화를 그곳에 잘 저축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보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그곳에 와서 분향하고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성전에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보화가 아무것도 없는 성전이라면 그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보화를 안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말씀에서 모임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모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모임에도 골방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임에도 골방이 있습니다.
그곳은 제사장들이 필요로 하는 방 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제사장 입니다. 우리는 매일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룩한 제사장이고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나가서 선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양면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룩한 제사장이고 세상을 향해서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골방에는 보화가 담겨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보화 입니까?
우리 모임의 교제안에 있는 성도들은 위대한 보화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인격이라고 하는 본 입니다.
이 보화 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주님, 그 분의 인격의 고매함, 위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주님께서는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인격을 우리 마음에 담고 있나요?
우리는 따로 물리적인 골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골방이 있습니다. 이 골방에 주님의 위대한 인격,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순결하심을 우리가 바라보게 될때 우리는 한없는 보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건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하고 사는 그와같은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가 보화를 안고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보화를 우리는 보존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와서 성전에 있는 수많은 기명들과 많은 보화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르호보암때는 시삭이 와서 솔로몬때 만들었던 금방패를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르호보암은 놋방패로 만들어서 대체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와같은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때부터 내려왔던 이 위대한 금방패는 값비싼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7장에 가보면 솔로몬이 자기 궁전을 짓는데 레바논 백향목 궁전을 짓습니다.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둥들이 백향목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솔로몬이 집무하는 중요한 장소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와같이 금방패와 같은 장식품을 장식했습니다.
사실 금은 부드러운 금속이기 때문에 금방패로 실제 전쟁에 나가서 싸울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방패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예와 위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부요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금이 없습니다.
그 많은것을 다 대체하려면 놋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위대한 부의 유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산 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유산을 우리가 만약 상실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비슷하지도 않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우리의 보화라면 그리스도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수 있을까요?
아무 것으로도 우리는 대체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위대함, 아름다운것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감탄이 되고 나는 그런 주님의 모양을 닮아가게 될때 나의 삶은 경건을 연습하는 삶이 되고 경건한 삶이 됩니다.
이와같은 삶은 모임의 분위기로 이어 집니다. 우리 모임의 분위기는 어떤 분위기 인가요?
그것을 우리 각인이 한번 살펴보십시요.
우리 모임은 경건한 모임 입니까? 아니면 경건을 추구하지만 약간의 세속적인 것도 우리 가운데 상당히 역사하고 있습니까?
이 모임의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와서 숨쉬는 공기 입니다.
현재 2018년 한국에서 대단히 심각하게 문제 삼고있는 것은 공기 입니다. 공기의 질 입니다.
매일과 같이 일기예보에서는 미세먼지의 농도가 얼마냐고 하는 것을 방송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기의 질이 어떤 것이냐고 하는것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와서 어떤것을 호흡하고 있나요?
우리 자신이 정말로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호흡하고 모임에서 교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속적인 그와같은 공기를 매일같이 마시고 살고 있는가요?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신 위대한 보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로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분을 호흡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모임 안에서 그 분위기가 이와같은 것으로 변화게 될때 우리의 골방에는 엄청난 보화가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즐겨야 하며 우리 다음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분위기가 경건한 분위기고 이와같은 분위기로 고정이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을 끼치게 되고 그 다음에 우리 다음 세대들을 그와같은 곳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라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와같은 분위기를, 그와같은 공기를 계속해서 보존해야 할 책임과 위대한 특권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마시는 공기가 어릴때부터 세속적인 공기, 세속적인 미세먼지가 섞여있는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어쩌면 우리 자녀들은 그와같은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와같은 곳에서 사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하면서 그들은 성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남겨줘야 할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보화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항상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격하고 또한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살아 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대한 주님의 유산을 현 시대에 즐기게 될 것이고 다음 세대는 계속해서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대한 보화 입니다.
시편 말씀을 보면 시편 119편 말씀은 176절의 장장의 장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홉가지 다른 각도에서 말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씀 합니다. 주의 법이라고 말씀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여호와의 증거라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주의 도 라고 말씀하고 주의 법도 주의 율례, 주의 모든 계명, 그리고 주의 의로운 판단, 주의 말씀, 주의 규례 이렇게 아홉가지로 말씀 합니다.
176절이나 되는 긴 말씀 속에서 거의 몇절을 제외하고는 모든 말씀마다 한번, 적어도 두번 이상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은 각각 서로가 다른관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법,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서 인도하시는 그런 말씀 입니다.
여호와의 증거, 그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반복해서 전파되고 그것은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입증된 말씀 입니다.
한번두번 말씀한 것이 아니라 수차례 반복해서 말씀해서 마치 증인으로서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 라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도라고 하면 주님께는 많은 생각이 있는데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의 생각이 바다 모래보다 더 많도소이다>
주님의 생각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의 법도 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이 아니고 거기에는 가치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말씀을 보면 <주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고 주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달라서 그것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있고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과 길이 있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을 두가지 각도에서 또 다르게 말씀하고 있는데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길이요, 주님의 생각의 원칙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의 길을 따라서, 원칙을 따라서 우리가 걸어가게 될때 내 생각대로 내 길대로 가는 것으로 파멸이나 손해를 보지 않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정도로 갈수 있고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주의 율례라고 말합니다.
주의 율례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어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득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말씀 입니다.
우리가 그 권위를 받아 들이고 그 말씀을 얻드려서 받을 뿐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의견이나 추천해주는 것이나 권해주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 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안에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을 규제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게 될때 우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확립된 말씀 입니다. 주님의 계명이라고 할때 이것은 확립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변론하고 타협하고 협상할만한 그와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말씀 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의로운 판단 입니다.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웃과 내 주변의 사람과의 관계를 규제해주는 말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을때에 재판장에 갑니다. 재판관이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관계를 규제해 주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편벽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공의와 의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주의해야 하고 그 말씀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주의 규례라고 말씀 합니다. 왜 규례이냐면, 우리 실행에 대해서 규제해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 실행이 어떤것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일일히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이와같이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다른 아홉가지 각도에서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을 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골방이 있습니다.
위대한 보화를 우리가 저축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입니다. 시편기자가 말씀한 이 위대한 말씀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것을 다 규제하고 있고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가게 될때, 그리고 엎드려서 그것을 받게 될때, 그리고 그것을 순종하게 될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을 하나님께서는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임의 성도로서 이와같은 보화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 모임의 위대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우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보화가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이해하고 이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소화하고 이 말씀에 순종하게 될때 우리의 보화는 점점 늘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속에 또한 지혜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지요. 이 지혜를 얻게될때 말씀속에 있는 위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이 지혜를 얻게 될때, 우리는 실제적인 수많은 삶에 있어서 주의 말씀은 규례라고 말씀 했습니다.
실행하는 모든일에 있어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갈때 우리가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모든 유익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실제적인 문제를 만날때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어떻게 실행할까 할때에 우리는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 능력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 뿐만 아니라 말씀을 적용할수 있는 능력, 그것은 지혜인데요. 이것또한 위대한 보화 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라고 하나님 앞에 말씀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을 다스려야 하고 모임을 다스려야 하며 모임을 다스리는 형제님의 인도를 꼭 따라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이와같은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보화 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만해서 보화인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나라의 성서공이야 말로 하나님의 보물창고일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위대한 성경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성경을 우리가 읽고 그 성경 말씀을 내것으로 하고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때 그것은 위대한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게 될때, 우리는 이런보화를 가질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모임안에 한 사람, 한 형제님, 한 자매님, 각 지체가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게 될때 우리 모임안에는 전통이 생깁니다.
어떤 전통 입니까?
인간의 전통이 아니고 말씀을 순종해 왔던 전통입니다. 말씀을 토대로 한 전통 입니다.
인간의 유전이 아니고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한 유전 말입니다.
이와같은 전통이 우리 모임의 모든 삶에 있어서, 교제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해주고 있다면 우리 모임은 위대한 유산을 우리가 보유하고 후대에 남겨줄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전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는 전통 입니다.
그와같은 전통이 우리 가운데 보유 될때에 모임은 엄청난 보화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고 우리의 후대가 이와같은 공기 속에서 호흡하고 이와같은 전통으로 보고 살아감에 있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럴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놀라운 보화를 보이지 않는 골방에 가득히 전시하고 보유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정말로 주님께서 사시고 그 피로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이 모임을 통해서 위대한 간증이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각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매일과 같은 삶 속에서 유익을 얻게되고 힘을 얻게 되고 슬픈 세상에서 여러가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수 있는 그런 삶을 살수 있도록 주님께서 위대한 보화를 주셨습니다.
그분 자신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인해서 일구어 놓은 하나님의 유산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와같은 은혜를 주셔서 저희들의 모임안의 골방을 많은 보화로 계속해서 채워놓고 이 보화를 인해서 저희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서 저희들 가운데 위대한 일을 모임에서 행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소위 고린도전서 3장 말씀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모임)는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오늘 주신 은혜를 인해서 감사 드립니다.
'정형모 형제님 > 솔로몬의 생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솔로몬의 생애 09_ 언약궤 내전 안치 > (0) | 2021.07.19 |
---|---|
< 솔로몬의 생애 08_궁전, 성전기구 > (0) | 2021.07.19 |
< 솔로몬의 생애 06_성전 건축 재료 준비 > (0) | 2021.07.19 |
< 솔로몬의 생애 05 _솔로몬의 정부 > (0) | 2021.07.19 |
< 솔로몬의 생애 04_솔로몬의 아내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