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헤미야 02. 느헤미야의 연설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어제 저희들이 느헤미야 1장 말씀부터 시작해서 느헤미야가 4개월동안 예루살렘 형편의 소식을 듣고 기도한 후에 페르시아왕을 만나서 요청한 내용, 그리고 기도 내용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주님의 선하신 역사를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그가 묵도하면서 왕 앞에 답변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말씀을 드렸을때 오래도록 그가 기도했던 내용이 응답된 모양을 그가 경험했습니다. 왕에게 그는 "나를 보내주십시요. 그리고 나에게 공급해 주십시요." 라는 요청을 했지요.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미 응답해 주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한 것 중에 세가지 정도 먼저 살펴보고 오늘 내용들을 저희들이 보고자 합니다.
그가 오랫동안 비록 술관원이었지만 예루살렘에 관한 관심,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들, 민족과 또 거룩한 성에 당하는 어려움을 그는 마음 속에 염려해 오고 부담을 가지고 왔는데 어느날 그는 그의 형제 하나니를 만나게 되죠. 작은 일인데, 이 작은 일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가 매일과 같이 행하던, 목동으로 아버지의 양을 치던 그날 사무엘에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았죠. 모세, 마찮가지죠. 40년 동안에 양을 쳤습니다. 어느날 그가 떨기나무 앞에서 부름을 받았을때 그것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그가 충실하게 살던 도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가 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던 그들이 매일매일 행하던 일들, 책임을 이해하던 도중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 같이 보이는데 작은 일 같이 보이는 어떤 순간에 커다란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하고 성실해야 되겠다고 하는 점을 느헤미야에서도 보게 됩니다. 커다란 문이 작은 돌짝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처럼 그는 하나니를 만난, 그것은 아주 대단히 일상적인 사건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날로부터 놀라운 일이 시작되죠. 사개월동안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눈물과 금식과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부담, 그것을 하나님 앞에 이제 토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던 거죠. 그가 그와 같은 길을 시작하게 될때, 그는 인내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있었던 목표와 또 마음 속에 있었던 구상,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는 기다렸습니다. 룻기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 3:18).
우리가 어떤 일을 놓고 인도자로서 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느끼는 성도들로서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 것인가, 라는 겁니다. 안절부절 하거나 조급하거나 성급하거나 이런 것들은 저희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해롭다라는 점이죠. 여기 나오미는 룻에게 자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이것은 그냥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 오늘날 이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그분은 쉬지 않을 것이다. 느헤미야도 마찮가지 였습니다. 사개월동안 기도할때에 그는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투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며 하나님의 일을 그는 마음 속에 두었고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마음 속에 같은 부담으로 안고 있었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사개월 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순간을 주셨지요. 아무때나 왕에게 나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지요.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반던 때에 어제 저희들이 본 것처럼, 주전 444년 그가 왕 앞에 나갔을때, 니산월이었죠. 언제 기슬르월부터 시작해서 니산까지 그 기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셔서 그가 나갔을때,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예루살렘 성에 대한 건축, 그리고 성문에 대한 건축, 예루살렘 거민들의 복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을때 그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니엘서 9장 말씀을 보십시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단 9:24).
이는 다니엘이 회개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만에 포로 기간이 끝나고 귀환하리라 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보고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때 가브리엘이 가지고 온 하나님의 응답이었죠. 그 응답은 칠십 이레의 예언에 관한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서 전해 졌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요. 그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또한 다니엘의 백성과, 다니엘의 거룩한 성입니다. 그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해서 이제 예언이 전달이 되었는데, 25절 내용은요.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 9:25-26).
여기 칠십 이레의 예언, 그 예언의 시작, 그 시발점은 언제인가? 그것은 약 100년 전에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에게 나가기 약 100년 전에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말씀입니다. 그 칠십 이레의 예언은 거룩한 성과 거룩한 백성을 위해서 주신 약속인데요. 이 놀라운 파노라마의 예언, 이 예언의 시발점이 바로 느헤미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왕 앞에 나갔을때, 바로 왕이 영을 내립니다. 이제 성벽을 건축하라는 영을 내립니다. 그 영을 내리는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예언이 이제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또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이죠. 저희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 마음을 바치게 될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느헤미야 2장 말씀에 가면 어제 느헤미야가 왕의 응답을 받고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2장 9절 말씀부터 저희들이 보겠습니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느 2:9-10).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1차 귀환, 오래 전에 있었지요. 5만명이 돌아왔습니다. 2차 귀환이 기록된 것은 에스라가 돌아올때입니다. 458년, 그리고나서 이제 느헤미야가 돌아갑니다. 444년, 약 14년 전에 에스라가 돌아오게 될때 에스라는, 에스라서 8장 말씀을 보면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왕에게 무슨 군대나 무슨 호위병을 준다해도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경우는 호위병이, 즉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서 호위하며 귀환하게 되지요. 이 경우는, 느헤미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그가 돌아가게 될때 성전을 위해서 돌아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건축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좀더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제 술관원이 아니라 페르시아왕의 총독으로서요. 팔레스타인을,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될 총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왕의 명에 의해서 군대 장관이나 마병이 호위하게 되는 그런 왕의 지시하에 왕이 준 패스포드를 가지고 강 서편, 강 서편이라고 하는 것은 유브라데스, 티그리스강을 건너면 이제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되죠.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이 책들 속에 자주 '강 서편'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페르시아 쪽에서 볼때 팔레스타인입니다. 강서편, 시리아나 사마리아나 팔레스타인이나 이 여러 지역, 모압, 암몬, 이 여러 지역은 페르시아 편에서 볼때, 강 서편입니다. 그곳에 가서 이제 패스포드를 총독에게 제출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임의로 온 것이 아니고 왕의 명령에 의해서 왔다고 하는 것을 이제 알려 드리죠. 이로 인해서요. 여기의 말씀을 읽게 될때, 하나님의 일이 2장에서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왕이 응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기도를 응답하신 이 놀라운 일로 인해서 산이 막 움직이는 놀라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는 역사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영적인 현실,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될때, 원수는 함께 날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잠잠하고 졸고있고, 또 게으르다면, 원수는 기뻐하고 원수는 아마 잠잠할 겁니다. 여기에 느헤미야가 돌아왔을때요. 즉각 원수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지요. 암몬 사람 도비야, 또 호론 사람 산발랏, 이 사람들이요. 이스라엘 자손을 흥황케 왔다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요. 어떤 소식입니까? 페르시아왕이 인정한 총독이다.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려고 온 사람이 있다. 이 소식을 들었을때 그 사람들은 근심했습니다. 이제 제일 첫번째 원수의 바람은 뭡니까? 느헤미야가 왕을 만나기 전에, 거의 한 1년 전에 아닥사스다왕을 향해서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 왕에게 로비한 것을 우리가 보지요. 그 일로 인해서 아닥사스다왕이 예루살렘 성 건축,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중단 되어야 한다고 하는 영을 내렸습니다. 이 당시에 정치적인 흐름, 이것을 느헤미야는 잘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돌연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강 서편에 있는 총독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주시하고 있고 절대로 그것은 다시 중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지론이었습니다. 그것은 1,2년 간의 견해가 아니었고 바벨론왕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후에 오랜 기간동안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원수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반발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총독이 페르시아왕의 명을 받고 예루살렘을 중건한다. 예루살렘을 흥왕케한다. 이스라엘로서는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이것 참 원수들이 근심하게 될만한 이유가 된다고 하는거죠. 원수는요, 하나님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왕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왕이 인정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근심하게 되었지요.
이제 예루살렘에 느헤미야는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꿈에 그리던 오랫동안 그가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제 그 마음 속에 있었던 비전, 구상을 가지고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라고 하는 점에 그는 당도 하지요. 대단히 커다란 일입니다. 거의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일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 오늘까지, 돌아온 날까지 하나님은 인도하셨다. 그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이제 어떻게 이 일을 추진할 것인가? 그것이 그의 숙제였지요. 사흘을 그는 휴식을 취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지 삼일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느 2:11-12).
여기 이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의 삶은요, 시시각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민감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에서 발견합니다. 무언가 그가 할때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감동하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뭔가 행하고 결정하고 추진하고 일하게 될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 하시는가? 우리는 만찬 예배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감화 하셔야 우리는 찬양하고 예배하지요.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걸어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감동하시는가?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말씀해 주시는가? 이와 같은 교신, 교통, 대화, 지식, 지시하시는 것에 대한 감각, 이 모든 것들은 철저히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화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느 2:12).
그는 예루살렘에 와서 사흘동안 쉬었습니다. 뭐 여독 때문에, 또는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과 대화 하면서, 이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야 대단히 중대한, 위대한 일을 추진하게 될때 하나님의 인도하심, 새로운 인도하심, 이것을 그는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쉴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운 교제 속에서 이제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추진할 것인가를 하나님과 대화 가운데 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추진하게 될 때는요.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작합니다. 그는 이 순간 예루살렘에 돌아왔을때 주변에 이런 원수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이원수들에게 조금도 자극하지 아니하고 조금 건드리지 않고 그는 먼저 예루살렘에 관해서 자기가 들었던 내용들을 그는 확인하고자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말씀드리고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게 될 때요. 우리는 이 일에 보면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밤에 나가서 현장을 살펴 봅니다. 현장을 정찰하고 밤에 그것을 살펴 보았을때, 하나니로부터 들었던 이 모든 내용, 물론 그는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었지만 하나니에게 뉴스를 들었는데 그 뉴스가 현장에 와서, 몇달 이후에 현장에 와서 보았을때 그것이 말과 같았다. 사실이었다, 이것을 그는 확인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언가 일을 추진하게 될때, 우리의 상상이나 우리의 막연한 기대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의 정보를 우리가 알고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지혜지요. 그는 이제 밤에 나갑니다.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느 2:12-13).
이것이 느헤미야 당시의 예루살렘성입니다. 그가 만든 성벽과 성문들인데, 그것은 이미 훼파되었지요. 잠깐 예루살렘에 관해서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아닥사스다왕에게 보낸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그들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악하고 패역한 성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보고있는 견해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루살렘 성은 어떤 것입니까? 느헤미야의 기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곳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이죠. 한 가지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48편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예루살렘 성을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시 48:1-2).
"우리 하나님의 성" 입니다. "큰 왕의 성" 입니다. 또한 그곳은 "터가 높아서 아름답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이곳은 고지입니다. 지리적으로 말씀드리게 될때, 예루살렘은 지중해에서 약 55km 내륙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쪽에서 55km 들어 오고요. 동쪽으로 가면 사해가 있죠. 사해에서 약 22km 서쪽으로 가면 예루살렘이 나오는데요. 해발 약 800m~900m 정도 되는 고원입니다. 그리고 사해는 해발 -400m죠. 그래서 예루살렘은 사해서부터 올라간다면 약 1200-1300m 정도 높은 곳에 있습니다. 다른 도성과는 달리 이곳은 높은 곳에 산 위에 있는 그런 성이다. 그래서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또 큰 왕의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룩한 성도들이 보는 예루살렘은 다릅니다. 원수가 보는 성은 악하고 패역한 성입니다. 그렇다면요, 저희들은 이제 지리적인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살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 높은 산인 이유는 사실 그 주변에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첫째, 저희들이 잘 아는 골짜기, 예루살렘에 있는 성에서 이리로 내려가면 내려가는 거지요. 여기 기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기드론 골짜기를 넘으면 이제 감람산이 있지요. 예루살렘 주변에 산이 있습니다. 첫째 감람산, 그리고 감람산 저 위로 더 올라가면 스토프산이 있습니다. 또 이제 서쪽으로 오면 여기 성전이 있는데요. 여기 성전 자리가 모리아산이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지대를 가리켜서 성전산, 템플마운트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 산이 있다면 여기에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가리켜서 치즈제조자의 골짜기, 타이로포레온 벨리, 또는 중앙 골짜기, 여러가지로 말씀을 드리는데, 예루살렘성, 다윗성은 이 아랫부분이 다윗성입니다. 여기가 원래 여부스가 장악하고 있었던 곳이고 다윗이 이제 이곳을 점령함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왕의 도시로 점령하게 되지요. 그 후에 다윗은 범죄 후에 징계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천사가 징계하게 될때 아라우나 타작마당, 그곳이 바로 모리아산이 있는 곳이죠. 그곳이 바로 성전지대, 그곳을 샀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은 그곳에 성전을 짓지요. 그래서 확장이 됩니다. 이 오벨이라고 하는 곳은 다윗성 위쪽으로부터 해서 더 높이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성전 산쪽으로 올라가게 되는 경사진 곳입니다. 이 골짜기가 있고요. 이 아래 가로지르는 골짜기, 결국 기드론 골짜기와 만나는, 이곳을 힌놈의 골짜기라고 말하죠. 여기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쓰레기들이 분문을 통해서 이 힌놈의 골짜기로 가서 불타서, 사실은 여기를 게헨나, 지옥이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하는 그런 골짜기 입니다. 또 한가지 네번째 골짜기가 있다면 이것은 가로 골짜기입니다. 행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네번째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와 그리고 남으로 내려오는 치즈제조자의 골짜기, 이것으로 이어지는 여기 한 덩어리의 산악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악, 서쪽 언덕입니다. 일명, 이서악을 가리켜서 시온산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성은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동악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서악의 반대로 해서 동악, 여기의 높은 지대, 여기에 이제 예루살렘성이 시작 되었고 그것이 확장 되었고 그 후에 이제 더 예루살렘성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까지 성은 이 정도 크기로 존재 했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오면요. 느헤미야서 2장 말씀에, 그가 골짜기 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떠납니다. 밤에요, 이 골짜기 문으로 떠난다. 골짜기 문을 떠나서요. 그의 정찰, 밤의 정찰한 주행 방향은 남쪽을 향해서 내려와서요. 그 다음에 돌아가지고 이쪽, 골짜기 반대편에 가서 아마 이 성을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아래로 돌아서 올라가게 될때 점점 파괴가 심해서, 이 말씀을 읽어보면 짐승이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더미들이 거기에 쌓여있었다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요. "그 밤에" 그는 밤에 떠났습니다. 우리가 그 밤에 떠났다는 말씀을 보면요. 그는 인도자입니다. 인도자 마음 속에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과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고 밤에 떠났는데요.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왔을때, 총독으로서 페르시아왕이 자기를 인정했다고 하는 권세, 이것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퍼레이드를 하고, 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런 것과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와서 그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성벽 재건입니다. 성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안전한 성이 되도록, 그리고 이 성으로하여금 거룩한 성이 되도록 성전은 이미 건설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위태하기 짝이 없는 성입니다. 이 성은 이방 사람들의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는 성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느헤미야는 감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돌아왔을때 무슨 퍼레이드를 하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또한 자기 권세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이런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조용히 밤에 현장을 정찰했다고 하는 건데요. 그 정찰하기 위해서 떠난 장소는 골짜기 문이었다. 조금 후에 여기 열개의 문이 있는데요. 열개의 문은 다 그 나름대로 영적인 의미가 있지요. 골짜기 문, 골짜기 문이라고 할때 우리가 즉각 생각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정상에서의 경험이 아니고요, 골짜기에서의 경험이라고 할때, 우리는 때때로 실패하고 때때로 저조하고 저 아래로 내려가는 그런 경험, 정상의 경험과는 정 반대죠. 골짜기, 그것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사실은 그의 예루살렘에서 제일 첫번째 일, 그 일의 개시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골짜기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도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될때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만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철저히 마음 속에 느끼고 있었다. 그 책임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그 순간도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을 돌면서 이것을 보고 돌아옵니다.
"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그 밤에 시내를 좇아..."(느2:14-15).
우리는 여기서 "밤에 일어나", 13절에 "그 밤에 골짜기문으로 나가서" 그리고 15절 말씀에 "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밤이라는 말씀이 세번 나옵니다. 인도자는요, 다른 사람이 잘때 깨어 있습니다. 인도자는 다른 사람이 쉴때 일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장로들이 인도자로서, 밤잠을 못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우리 성도들은 기억하십니까? 이런 문제, 저런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와 같은 장로들을 위해서 형제 자매님들은 기도하십니까? 또 장로들은 밤에 성도들을 생각하고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집행이 되어야 할 것인가? 성도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역사해야 할 것인가, 라는 점을 생각하고 복음 전도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야 될 터인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해야 될 터인데, 하나님의 모임이 이제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과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이 환히 드러나야 될 터인데, 라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잠자지 못하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인도자나, 또한 성도들이나 함께 생각해봐야 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밤에 그는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교제하며 이제 조용히, 겸손히 나갔습니다.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그가 본 것은 많은 폐허 상태, 이 폐허 상태를 한마디로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린다면 전에 쌓았던 성곽들, 그것이 다 무너져가지요. 거대한 돌덩이들이, 그것도 불에 타서, 시커멓게 되서 여기저기 나뒹굴고 더미가 쌓여있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감히 손댈 수 없고 어쩌면 아닥사스다왕이 성벽재건을 하려고 하는 노력을 완전히 중단시켜라고 할때, 원수들은 그것을 빌미로해서 와서 기존하던 성 마저도 다 부숴버린, 그린고 다 불태워버린, 그런 모습을 그는 보지 않았겠습니까? 돌들이 시커멓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질서하게 널려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다시 정돈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마음의 소원이나, 아예 소원 자체도 예루살렘 거민들 마음 속에 다 사라지고 말았지요. 누가 감히 페르시아왕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주변에 있던 원수들이 사방에 둘러싸여 있는데, 4장 7절 말씀을 보면요. 여기에 원수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요. 북쪽에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총독 그는 호론 사람 산발랏입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 동쪽에는 누가 있습니까? 암몬 사람 도비야가 있습니다. 암몬의 총독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페르시아 사람인데 암몬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와 있던 사람인가 봅니다. 암몬 지역의 총독,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총독,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남쪽에 후에 보면 또 다른 원수가 조인합니다. 그 원수는 게셈입니다. 그는 갓스무라고도 말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는 에돔의 총독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집니다. 또 서쪽으로 가면, 이쪽에는 블레셋, 그쪽에는 아스돗 원수들이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원수들은 이 성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죠. 느헤미야가 기드론 골짜기 이쪽편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될 때에, 무엇을 느꼈을까? 똑같은 무더기, 이 폐허를 보게 될때, 원수들은 기뻐 날뛰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거민들은 이 폐허를 보게 될때,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 폐허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다. 이 폐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조금도 어떻게 할수 없는 현실이다. 마음 속에 기쁘진 않지만 그것을 그냥 현실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 예루살렘 거민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 보십시요. 그런데 그 밤에 느헤미야가 이 폐허를 바라볼때, 똑같은 폐허를 바라볼때 느헤미야는 어땠습니까?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는 그 폐허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바꿔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폐허를 봅니다. 수많은 이 안의 거민들이 폐허를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할 수 없는거지. 라고 하는 그런 시선. 그러나 딱 한 사람, 느헤미야는요. 이것은 제거되어야 된다. 어떻게 제거되어야 합니까? 무질서로부터 흩어져 있는 이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쓸모 없는 것 같은, 시커멓게 타서 검은 돌 덩어리, 그것은 쓸모 없는 것 같은데 그 돌덩어리는 중요한 재료다. 그것을 다시 재 정비해서 성벽을 만들어서 전혀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하는 것을 바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느헤미야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까? 우리는 복음서에서요.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왔을때, 많은 사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도 자기 나름대로의 관심, 이런 것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왔지만 그들은 절대로 주님을 믿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오직 소수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들은 발견하고 기쁨과 확신과 또한 소망 가운데 돌아갔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요. 왜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데, 왜 어떤 사람은 못만날까? 왜 어떤 사람은 똑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보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보는 것인가? 왜 인도자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 비전을 가지고 볼수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들 마음 속에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면 좋을거다. 그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바다, 라고 다 공감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그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한 사람은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재정비 되어서 성벽이 쌓여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유다 사람들이 능욕과 수치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라고 하는 변함없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더미를 보았습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느 2:16).
여기보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지요. 그는 방백뿐만 아니라요, 높고 낮은 모든 계층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도자의 자질입니다. 그는 그가 행하는 일에 일치된 일치성이 있었습니다. 앞 뒤가 맞습니다. 또한 이 모든 일에 공평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방백, 유다 사람, 제사장, 귀인, 그 외에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모든 일이 추진되기 전에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고 이 은밀한 일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이제 추진될때까지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기서 때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1장에서요,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하나님 앞에 알렸습니다. 하나도 숨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2장에 와 보면 그는 하나님께는 알렸지만 아직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는데 이제 때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알려야 될 때가 온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입니다. "후에" 이 '후에'라는 말을 보십시요. 이것도 때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급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추진하는데서 차근차근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는 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느 2:17).
이제 그는 위대한 연설을 합니다. 그의 백성들, 높고 낮은 모든 예루살렘 거민들을 모아놓고, 그는 이제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을 하게 될때, 그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부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 이전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의 예루살렘을 향한 소원,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가진,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확신 가운데의 구상, 비전, 이것을 이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자기 자신이 예루살렘에 와서 서 있도록 인도하셨는지 이 전모를 그는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연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느 2:17).
여기까지 보십시요. 이 연설의 시작은요. 그가 보고왔던 파멸과 훼파, 소화, 이런 더미, 이런 무너진 것들에 대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도자는요,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인도자는 꿈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전개되어 있는 이 불행한 현실, 비극적인 현실,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 슬픈 현실, 이 현실을 그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성문이 소화되었고, 예루살렘 성이 황무하고 그것을 그대로 백성들 앞에 이야기 합니다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느 2:17).
그가 행하는 일은요, 첫번째,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벽 건축입니다. "자, 우리가 일어나서 성을 중건하자." 이것이 그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흔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을 건축한 사람이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며, 두번째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이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느헤미야서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요, 성문입니다. 그리고 성민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먼저 그가 해야 될 단계는 그는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들로부터 이제 예루살렘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천번째 단계거든요. 그 단계가 끝나면 그는 이 안에 거민들이 살아야 된다. 희소한 거민, 이게 아니다. 이 안에는요. 여기는 거룩한 성입니다. 하나님의 성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곳에 가득히 살아야 된다. 그리고 가득히 살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이 거룩한 것처럼 그 성이 거룩한 것은 그분의 이름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처럼, 그 성에 사는 거민들은 그것에 걸맞게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배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민에게 알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구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이 이제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 안에 거룩한 백성들이 살고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조소와 능욕이 아니라 이제 사람들이 그 백성을 바라보게 될때, 감탄하고 찬양하고 기뻐하고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그는 그와 같은 구상이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볼 때에 구약의 느헤미야서, 그것은 그 경륜에 합당한 인물이었고, 그 경륜에 합당한 사역을 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를 오늘날 이 시대에 교회시대에 우리가 읽게 될때, 우리는 지역교회와 뗄레야 뗄수 없는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느헤미야서, 거기에는 예루살렘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둔 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 안에, 우리는 어떤 것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그리고 각 지역교회의 지체들로서, 교제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해서 내가 사랑하는 모임, 내가 몸담고 있는 교제하고 있는 모임, 그 모임은 이러이러한 모임이 되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구상, 이 구상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내 마음 속에 구상하고 생각하는 그런 모임이 그 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그러한 모임, 그 모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임이다. 이 땅에 살게될때, 내가 소원하는 모임은 바로 이런 모임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마음 속에 구상하고 있습니까? 임의로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구상 말입니다. 느헤미야는요, 그는 백성들 앞에서 "우리는 성을 중건 합시다. 그래서 다시는 능욕을 받지 맙시다." 이말 속에는 이 많은 원수들이 뺑 둘러 있는 이 원수들이, 당신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페르시아왕을 꼬드기고 그 왕 앞에 로비하고 그래서 이 성을 공격하고, 이 성이 중건되지 못하도록 한 모든 역사를 당신들은 알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그와 같은 일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포기하고 현실, 이 폐허와 이 무너진 성을 바라보며 그냥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수 밖에 없다고 낙심과 좌절 속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건설해서 이제는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능욕을 받지 않을 때가 왔다. 라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권세를 가지고 지금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예루살렘성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보시는 견해, 그 견해를 통해서 그가 바라보는 예루살렘, 그것을 지금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18절 말씀을 보면 "또 저희에게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 입니다. "나의 하나님의 선한 손" 우리 말에는 "나의" 라는 말이 여기 빠져 있습니다만, "나의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그가 연설하게 될 때요, 그는 총독으로서 자기의 위엄과 또한 권력과 또한 자기의 지혜와, 어떻게 페르시아왕과의 대화 가운데 이렇게 그가 왔는가, 정치적인 그의 신장, 또 정치적인 능력, 외교적인 수완, 이런 것을 자랑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야기 한 것은 나의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지금까지 어떻게 도와서 여기까지 왔는가, 라고 하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간증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지요. 그는 자기에게 스포트라잇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인도자는요,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도자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시선이 하나님에게 고정 되도록 하는 것이죠. 그는 여기서 철저히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왕이 자기에게 이른 말,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기도했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셨는가를 말하는 것이죠. 어떻게 왕이 허락하셨는가, 그러나 왕이 허락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허락하셨는가, 이것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요. 그의 연설, 이 연설에 대해서 유다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것 대단히 중요하죠. 왜냐하면 유다 백성이 만일 이 연설에 대해서 거부한다면, 느헤미야는 아마 대단히 일을 하기 어려울겁니다. 그가 여기서 혼자서 일을 하겠습니까? 그가 총독으로서 무슨 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제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를 인도하신것처럼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인도하셨습니다. 그 답변을 보면 조금 전에 2장 초반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했을때, 왕이 응답한, 왕이 자기에게 답변해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도한 내용의 응답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죠. 여기서는요, 왕의 대답이 아니고 백성들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그 기도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요.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 어떤 답변을 주셨는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성의 대답 속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백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의 말이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 이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마음으로 이제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 느헤미야의 연설은요, 영감을 불어넣는 연설이었습니다. 그것은 말주변이나 아니면 설득력이나 이것이 아니고요. 그는 그가 믿고 있는 바,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연설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영감을 주었습니다. 동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다 하나와 같이, 얼마 전까지 그 무더기를 볼때,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현실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현실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그런 생각 가운데 똑같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더더군다나 아닥사스다왕이 명령하면서 성벽 건축 중단령을 내렸다면 그들 마음 속에 더 이상의 어떤 가능성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들은 느헤미야가 이야기하게 될때,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연설 속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고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 당시의 페르시아왕, 그리고 페르시아 궁전 수산성에 있는 정치적인 어떤 흐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의 연설 속에는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인도자의 본분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올라갔을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죠. 베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초막을 지읍시다." 이렇게 할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구름이 와서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 그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이것이 변화산상의 현실이죠. 여기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하나님만 나타나시는가?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연설을 했고 모든 사람이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성벽을 건축하자. 여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또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장 초반에는 왕이 허락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그가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갈때 필요한 물건도 공급했습니다. 주님의 일이 일어났죠.
그때, 예루살렘에 왔을때 원수는 근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여기,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연설 했을때, 그리고 백성들이 놀랍게 반응 했을때, 원수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다음의 말씀을 보면, 19절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느 2:19).
우리는 2장 10절에서 호론 사람 산발랏, 암몬 사람 도비야, 이 두사람을 보았는데요. 여기보면 이제 한 사람 더 추가됩니다.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면요, 원수가 반대하는데, 원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이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원수가 역사하죠. 아까는 근심했는데요. 이제는 업신여깁니다. 이 모든 그들의 자세, 태도, 그리고 전략, 이 모든 것은 다 변하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될때,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 우리는 더욱 더 골짜기로 내려가야 됩니다. 우리가 만일 복을 계속해서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점점점 더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시게 될때, 더욱 더 엎드려야 된다. 더욱 더 골짜기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원수가 이제 대적합니다. 어떻게 대적합니까? 첫번째 전략은요, 조소입니다. 멸시하고 업신여기고 비웃는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행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원수가 행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으로 하여금 이 땅을 보게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권력, 이 땅의 여러가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영향 받을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우리 눈 앞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왕을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페르시아왕이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죠. 만약에 페르시아왕이 지금까지 역사에서요, 한 두번이 아니었죠. 고레스왕은 돌아가라고 했지만 캄미세스, 다리오 대제,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롱기스무스까지 올 때까지 여러 페르시아왕이요, 이 원수들이 보낸 편지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이제 고레스왕, 초대 왕이 귀환령을 내리고 성전 건축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번복하는 많은 칙령을 내렸다는 것을 원수들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세기를 거쳐서 이루어졌던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원수들은 바로 그것을 즐겨 사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뭘 하는가? 너희들이 반역하려고 하는가?" 그래서 페르시아왕을 다시 로비하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런 얘기들을 다시 쉽게 했죠. 해묵은 전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수는요.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을 보게 했고, 원수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왕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우리는 마음 속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대답하죠.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여기 보세요. 느헤미야는 영적인 인도자입니다. 그래서 원수의 책략 속에 있는 핵심, 이것이 뭐냐고 하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첫번째 말로 그는 원수가 던져놓은 폭탄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원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왕을 보게 했을때, 느헤미야는요, 하늘의 하나님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우리 하늘의 하나님, 인간의 모든 역사를요. 다 주관하시고 통치하시고, 지배하시고, 섭리 가운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이 원수, 그들이 게셈이니, 도비야니, 산발랏이니, 아니면 그 외에도 수천 수만의 원수가 다 합친다 해도, 살아계신 하늘의 하나님을 당할 수 없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느 2:20).
하늘에 계신 그 분은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과 주인의 계획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이것은 반드시 되어져야 된다, 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다고 하는거죠. 형제 자매님들, 모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확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영원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오늘날도 조금도 다름없이 이루어지게 될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원수가 우리의 마음 속에 현실로 인해서 낙심하게 하고, 또한 이와 같은 일들은 잘 되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이 시대는 이것은 아니다, 라고 흔히 육적인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아계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향해 뜻을 가지고 계신 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엎드려 경배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하신 처방대로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과 또한 지혜대로 우리는 이 일을 집행할 뿐이다. 이것을 우리는 선언해야 되겠죠.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여기 또 한가지 폭탄과 같은 선언을 원수에게 던집니다. 2장 마지막 절 말씀에서요. 느헤미야는 이 연설 마지막에 그는 첫번째, 백성들을 향해서 영감을 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어나 우리가 성을 건축하자, 이런 방을 했을때 원수가 조소하지요. 원수가 조소하게 될때 그는 원수를 향해서 연설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향한 이 연설을 백성들이 듣습니다.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느 2:20).
느헤미야는요, 그들을 향해서 대단히 철저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칼로 선을 그어버렸습니다. 무엇을 그었습니까? 첫째, 기업도 없다. 너희들 기업도 없다.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너희는 기업이 없다. 두번째 너희에게는,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너희는 권리가 없다.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너희들에게는 명록도 없다. 명록, 이것은 이름입니다. 등록된 이름, 예루살렘의 과거와 예루살렘의 현재와 예루살렘의 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주시고자 하시는 유산, 그리고 거룩함과 또한 그 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가지고 계신 위대한 계획, 그리고 그 성의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이름, 그 이름으로 인한 위대한 특권, 또 특권과 함께 그 성이 안고 있는 위대한 소망,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어떤 것도 너희들에게 돌아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저희들은요, 느헤미야 책은,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성별입니다. 느헤미야는요, 보십시요. 이 성을 건축한다고 하는 것은 선을 긋는 겁니다. 밖과 안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밖과 안을 구별하게 될때 여기에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무엇입니까? 이 문은 이 성이 고립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성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데 어떻게 고립되지 않게 하는가? 성별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고립되지 않는가? 이 성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이 성은 거룩한 성입니다. 이 거룩한 성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간증이 이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악한 영향력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상숭배나 또한 이방신들을 믿는 사람들의 허튼 마음이 이제 이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문 관리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과 위대한 영광이 밖으로 나가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믿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별이지요. 느헤미야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서부터요, 6장까지 이 이야기는 이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다음 7장서부터 마지막까지는요. 이 성은 건축되었는데 성 안의 거민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별입니다. 느헤미야가 구상하는 성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산성에서 사개월동안 느헤미야는요, 기도했지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부담은 점점 커 갔고, 그의 비전은, 그의 구상,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생각과 계획은 점점 뚜렸해 갔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을때, 하나님께로부터 이제 응답을 받았습니다. 수산성에서 그는 예루살렘 아직 가기 전에 그는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 참 놀라운 준비입니다. 현장에 가기 전에, 때가와서 우리가 뭔가를 집행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은 기초입니다. 그것은 준비입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소원과 또한 그것에 대한 구상, 내 마음 속에 하나님꼐서 주시는 계획, 그것을 우리는 마음 속에 가져야 된다, 라는 거죠.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예루살렘 현장에 왔습니다. 현장에 왔을때, 그는 첫번째 탐사를 했습니다. 반에 가서 탐사하고 그리고 그가 들은 소문을 확인했습니다. 확인한 그 현실, 정보 위에 그는 백성들을 소집하고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 위대한 구상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향해서 선을 그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던 구상 즉, 성별이죠. 예루살렘성을 향한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성별이 없게 될때요. 성별의 부재, 그것은 안전과 안보의 부재를 가져옵니다. 모임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성별의 부재로 인해서, 우리가 성별하지 못함으로 인해서요. 우리가 당하게 되는 여러가지 손실을 보십시요. 우리는 자녀를 빼앗깁니다. 세상에 빼앗깁니다. 자녀들의 생각이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세대들의 생각이 육적으로 변합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성별이 사라지는 거죠. 그로 인해서 당하는 엄청난 손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이요. 주일학교, 청년반들이 폐쇠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임은 이제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점점점 안락을 추구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따라 교제하고 증거하고 또한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제 세월이 가면서 점점 안락을 추구하게 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성별의 부재로 인해서 오는 결과입니다. 청, 장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패션을 따라갑니다. 세상이 얼마나 인기 가운데 나를 추종해 줄 것인가, 나를 바라봐 줄 것인가, 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성별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길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간다면 그가 이제 받게 될, 많은 손실과 또한 많은 파멸, 이러한 것들은 어떤 것일까요? 이와 같은 마음이 이제 일년가고 이년가고 삼년이 간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와 같은 세속적인 흐름이 우리의 모임 안에 조금씩, 조금씩 파고 들어올때, 향후 이년과 오년 안에 우리의 모임은 어떤 모양으로 바뀌게 될까? 복음의 열의는 점점 식어지고요. 복음집회는 사라져 가고요. 영혼들이 이제 이곳에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 속에 영혼에 대한,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입니까? 구원받지 않는다면 모임은 점점 줄어들겁니다. 모임 안에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일들은 점점 사그러져 갈 것입니다. 우리는 정기집회가 성별이 이제 사라지게 될때, 정기 집회는 점점 무너져가고 주중 집회는 점점 사라져 가게 될 것입니다. 청소녀들은 어떻습니까? 청소년들이 학교에 갔을때, 또한 직장에서 주위의 사람들이, 이제 동료들이 자기들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왕따 당할거 같아 대단히 무서워 할 겁니다. 청년들 마음 속에 세상에 나가서 핍박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터부시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핍박을 피하고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급급하며 그것을 소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나약한 마음을 가진, 그런 그리스도인들로 산출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임의 미래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의 자녀들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옛날 바로가 남아들을 다 하수에 던지라고 할때, 그 아이들은 다 죽는 겁니다. 그 아이가 죽는 것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 현실에 순응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이 사람은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력이 없었습니다. 권력이 없었습니다. 바로 궁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 없었습니다. 바로 궁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무력, 이런거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년, 모세를 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소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말살시키려고 하는 이 소년을, 다음 세대를, 그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해서 바로를 멸절 시켰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정치적인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돌아가는 여러가지 흐름, 이것을 당장에 바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안에서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 거기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보존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인 가치가 계속해서 지켜질 수 있는 곳, 그가 그래서 그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보호함 가운데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들이 즐기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그와 같은 곳, 그것은 바로 느헤미야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수산성에서부터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있고, 현실을 그는 배격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의 마음 속에 주시는 위대한 비전과 위대한 구상을 그는 마음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는 그것을 점점점 자라게 했습니다. 그 구상을 점점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그는 현장에 온 것이죠.
이제 3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느 3:1).
우리는 3장을 읽게 될 때요.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독특한 특징 중에 하나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요. 우선 이 요약을 한번 보십시요. 3장에 보면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이 됩니다. 마태복음 1장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 1장은 수면제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잠이 솔솔 옵니다. 참 지루하죠. 그 의미를 알수 없고 그 내용을 알수 없는데, 더군다나 이름이 반복되는데 얼마나 지루합니까? 느헤미야가 바로 이 비슷한 곳이 많습니다. 3장이 그렇습니다. 두번째, 7장이 그렇습니다. 또 8장, 10장, 11장, 16장에 가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그냥 수도 없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장을 이렇게 읽을때에 참 지루하다. 그리고 이 책을 덮고 우리는 그냥 넘어갈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요.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을 절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장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졸업식에 가면요. 가장 지루하다고 소위 알려진 것은요, 졸업식사, 여려가지가 있습니다만, 예를들어서 약 1000명의 졸업생들이 있는데 천명의 졸업생들이 한 사람씩 나오면서 총장이나 교장이 졸업장을 건네주고, 사람들이 박수치고 나가고, 또 호명하면 또 오고 나가고 이것 참 지루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졸업식에서 그 파트를 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래도 그와 같은 파트를 계속해서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 지루한 파트에서 절대로 지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입니까? 내 아들이, 내 남편이, 내 동생이 그날 졸업장을 받는 그 순간이기 때문에 온 사람들, 절대 지루하지 않습니다. 뭐 자기 아들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참 지루할지 몰라도 아들의 이름이 나오면요. 온 식구가 일어나서 막 소리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아들의 미래, 아들의 소망, 그것 때문에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많은 사람들의 이름,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이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특별히 느헤미야 시대에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역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하나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의미를 이 장을 통해서 갖고 있습니다. 놀라운 영예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청사에 빛나는, 영원히 빛나는 하나님의 영예가 이 사람들 위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영예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영예는 느헤미야가 이 일을 위해서 일어났을때, 그 인도력과 함께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의 모든 수고와 영예를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시고 그것을 여기에 소상하게 적어놓고 있고, 느헤미야는요, 꼼꼼하게 이것을 적었어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느 파트를 건축했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일을 했으며,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참여자들은요, 이 거룩한 성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확신 가운데, 어떠한 기대 가운데, 어떠한 소망 가운데, 이 성을, 그의 이름을 두셨는가, 이것을 이제 아는 사람들이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3장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 이것은 우리가 일일히 다 정확하게 알수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의 현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3장의 명단, 주님을 향한 봉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빚지는 분이 아니시고 그들의 영예를 환히 드러내신다. 우리는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느헤미야서는요, 인도력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위대한 인도자입니다. 이 일을 이제 추진하는데 드디어 예루살렘에 왔어요. 그래서 연설을 통해서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로 일을 합니다. 일을 하게 될때, 예루살렘성 안의 거민만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사방에 여러 도성에서까지도 사람들이 왔습니다. 여리고라든지, 드고아라든지, 리스바라든지,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 일을 도왔습니다. 인도자는요,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중요한 몇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이 3장과 관련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도자는요. 함께 일하는 백성들, 그들 가운데서요. 자기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느냐, 자기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느 2:17).
이 성의 건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차적인 것은요, 성 건축입니다. 무더기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건축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목적은 능욕을 더 이상 받지 말자, 이 비전에 대해서 백성들이 확실히 알도록 했다. 인도자는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위대한 확신, 그것은 주관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객관적인 확신입니다. 이 확신을 따르는 사람들, 성도들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알려주고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 성도들은, 어떤 성도들은요. 마치 자기는 그 모임의 성도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때가 있어요. 뭐 보이콧을 한다든지, 아니면 태만해서, 마치 자기는 그 모임 성도가 아닌 것처럼요. 이것 참 문제지요. 인도자는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일에 지금 동참해야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특권이라고 하는 것, 위대한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느 2:18).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 거기의 모든 사람이 다 거기에 참여 했습니다. 인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가 다 함께 동참해야 된다, 이것은 거룩한 특권임을, 또한 책임임을 알려줘야 되겠다라는 점,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세번째요. 누가 참여할 것이냐. 3장을 보면요, 제사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일할것 같지 않은 사람, 제사장은 성전에 가서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는 제사장도 일합니다. 레위 사람도 일합니다. 또 어떤 때는 대장장이가 와서 일합니다. 또는 어떤 약사가, 향품 파는 사람이 와서 일합니다. 또 여자가 와서 살룸의 딸들이 와서 일합니다. 또 상인들이 일합니다. 심지어는 다스리는 사람, 권력자들이 와서 일합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와서 자기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누가 참여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봉사가 어렵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고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아니면 우리 마음 속에 때때로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성안에 사는 사람들이요. 드고아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도성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하겠다고 할때, "당신네들은 예루살렘성 사람이 아니니까 여기서 일하지 마시오." 이것 편견이죠. 그와 같은 것은 일하게 될때 합당하지 않지요. 그것은 지역적인 분파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성의 보전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것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여하게 될때 편견은 합당하지 않다. 마음에 없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을 저해한다고 하는 거죠. 따라서 인도자는 구상에 대해서, 백성들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 성도들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둘째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이 일은 어떤 종류의 봉사가 되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적당히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요, 싸구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요, 저렴하게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게 될때, 하나님은 가장 값비싼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봉사는 무엇입니까? 그 봉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봉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인 인도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봉사는 명품 봉사다, 라는 것을 알려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선, 가장 최고의 것, 가장 귀한 시간, 가장 귀한 에너지,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사, 가장 귀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것들, 나 자신,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요구해야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백성들에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주문해야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기준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이것은 적당히 아무거나 흙벽돌로 쌓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쌓게 될때 어떻게 됬습니까? 더미를 봤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더미, 이 더미들은 쓰레기가 아니라 대단히 고귀한 성벽의 재료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보고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모임을 건설하게 될때, 지금까지 불신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 유익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그와 같은 부분, 그것이 위대한 재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이 재료는요, 딴데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어요.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왔을때, 더미를 봤는데 그는 어디서 다른 곳에서, 채석장에서 돌을 또 잘라다가, 들여와서, 더미 쓰레기들은 다 갖다 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돌을 가져와서 짓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돌, 그 돌은 사실 고귀한 돌이었습니다. 그 돌은 어떤 돌이었습니까? 그 돌은 돌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와서 때려부시고 또한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명령하게 될때, 예루살렘 주변의 원수들이 때려 부시고 그렇게해서 무너진 거예요. 그 돌들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끗히 닦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것을 제자리에 올려 놓게 될때, 위대한 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쓰레기같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귀히 여기지 않았던, 우리의 편견 때문에,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고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귀히 여기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사용해서 성벽을 건축해야 된다. 성별을 이루어야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요, 인도자로서 3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두번째, 명품 봉사다, 그 말입니다.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고고한 기준이다. 이것을 먼저 인도자가 알아야 됩니다. 느헤미야는요,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사모하는 도성, 내가 구상하는 도성,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똑같은 그 성이다. 그것은 가장 고고한 스텐다드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느헤미야는 찾아왔어요. 세번째, 그는 인도자로서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봉사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빚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에 3장에서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일하게 될때, 그 사람들은 전부 자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뭔가 급료를 받고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대의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연설하게 될때 마음 속에 공감하고 영감을 받고 동감하고 동기를 부여받아서 이제는 그 일에 착수해야 되겠다. 이제 발벗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느헤미야 마음 속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모든 봉사에 대해서 특히, 명품 봉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 이것에 대해서 확신하게 됩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확신하다면요, 느헤미야는요. 여기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고 어떤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들은 성벽에서 어떤 파트를 재건했고 문짝을 했고, 또한 그들은 어떻게 헌신했고, 이것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면서 살피고, 그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느헤미야는요, 감사의 표를 보냈습니다. 그 감사의 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3장에 그가 회고록에서 그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성경은 누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좌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명품의 봉사를 하다가 도중하차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가지 기억하십시요. 첫째, 선명하게 자기의 구상, 비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두번째, 하나님의 기준은 고고한 것이다. 명품 봉사를 우리에게 원하시고 계시다. 이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됩니다.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은혜로운 분이시다. 우리는요, 로마서 16장, 또 고린도전서 16장, 이 서신서 끝에 가면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예를 들어서 뵈뵈를 천거하지요. 그 다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그들은 사도바울이 그 서신을 쓰게 될때 "그들은 나를 위해서 그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감사한다." 이야기 합니다. "많이 수고한 마리아", 많이 수고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어에는 어프리시에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게 될때 그것에 대해서, 그가 한 일에 대해서 깊이 알고요, 그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이것을 어프리시에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요, 로마서 16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서, 수고에 대해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서신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상급이죠. 가장 영예로운 상급입니다. 그것은 이름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스데바나의 집, 아가에서 가장 처음 구원받은 사람의 가정이죠. 이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소개하게 될 때요. 천거하고 추천하고 칭찬하게 될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성도 섬기는 일에 중독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을 인정해 주라." 스데바나, 브드나도, 또 이사람들, 내 부족을 보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알아주라,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추천할 정도면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상급을 주십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특히 느헤미야서 3장을 읽게 될때요, 여기에 건축된 이 성벽, 무더기가 변해서 성벽이 됩니다. 불탄 문들이 이제 아름다운 성문으로 변합니다. 그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이 이제 밖으로 나갈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들이 공격해오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성벽은 막아 줄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안연히 사는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 성전에서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간증이 이제 아름답게 드러나도록 우리는 느헤미야서 12장에 가보면 성벽이 완성되었을때, 그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들이 봉헌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봉헌하게 될때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먼 곳까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소리가, 먼 곳까지 들렸다. 참 이들의 회복에 있어서 절정인데요. 느헤미야는 그것을 수산성에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엔지니어가 디자이너가, 건축 설계자가, 과학자가, 그가 만들고자 하는 어떤 아티클에 대해서요. 어떤 물품에 대해서 그가 아는 지식과 그가 아는 지혜, 모든 것을 동원해서 아직 생성되기 전에 마음 속에 구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죠. 위대한 작곡가들이요, 그 아름다운 선율이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울려퍼지기 전에 청중들이 그것을 듣기 훨씬 전에, 그 아름다운 선율과 또 그 아름다운 음표들은 이미 작곡가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생각을, 그런 구상을 수산에서 오래 전에 하고 있었고, 기도 가운데, 그리고 순종 가운데,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드디어 3장에 와서 이 성들을 재건했습니다.
여기에 열개의 문이 있습니다. 사실은 열두개가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개의 문이 있거든요. 그것은 행정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통치하실, 다시 말해서 가장 완벽한 통치, 가장 완전한 행정, 오늘날 세상의 수많은 나라의 행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탑을 달린다고 하는 나라도 그 행정상에 수많은 에러와 행정상의 수많은 모순과 부패와 또한 타락, 또한 범죄, 이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얼마나 많은 돈들이 낭비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돈들이 부패 가운데 사라집니까? 예산이 낭비되고요.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도적질합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어떤 나라도 마찮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주님이 오시게 될때, 우리가 기도하는 바 대로 "나라에 임하옵시고" 그분이 오시게 될때, 그 예루살렘성은 열두개의 문입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 시대에, 열두개의 문이 있습니다만은 왜 열개만 성령은 소개하고 있을까요? 어떤 분은 그렇게 말씀했어요. 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열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 도성, 예루살렘 도성, 이것은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간증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성별해야 할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위대한 책임이다, 라고 하는 점에서 열개의 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이 여기서 다 해서요. 마쳐야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3장 남은 조금의 부분을 우리가 생각 하고요. 이제 4장서부터는 6장까지 이제 전쟁입니다. 사실 6장에 가서 준공이 됩니다. 52일만에 성이 왕성이 되지만 그 사이에 느헤미야가 돌아온 다음부터 이제 준공될때까지 이것은 그냥 순조롭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느헤미야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략, 그리고 전쟁, 그리고 이 전쟁에서 어떠한 용기, 그리고 이 전쟁을 어떻게 지혜롭게, 그리고 용기있게 수행해 나가느냐, 하는 점, 그리고 특히 4장과 6장은 원수의 반대, 외부에서 오는 반대입니다. 그리고 5장은 이 전쟁은요, 외부와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내부에서 오는 싸움이 있습니다. 내부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장애물, 이것도 제거해야 될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대로, 3장 남은 부분과 이제 4장 이후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저희들의 마음을 감동해 주시고요. 느헤미야서에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또 교훈들이 저희들이 받아서 이 마지막 때에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책임을 주님 앞에 확실히 드려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희들도 느헤미야와 같이 성을 건축하고 그래서 우리가 능욕을 받지 말자,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성을 건축하고 하나님께서 위대한 영광을 받도록, 그리고 성도들이 기뻐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질서와 아름다움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기를, 저희들이 전심으로 주님앞에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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