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느헤미야

느헤미야 01. 느헤미야의 기도

박이레 2021. 8. 5. 14:41

<느헤미야 01. 느헤미야의 기도 > 2013년 / 정형모 형제님

형제 자매님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뵐 수 있어서 주님 안에서 감사드리고요. 이번에 두주 동안 저희들이 주님이 인도해주시는 은혜 안에서 특별히 느헤미야서에 있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이 느헤미야 시대에 있었던 어려움과 그 당시에 느헤미야가 느끼고 있었던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반대를 패배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가 분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모습을 저희들이 보게 될때,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고 저희들이 달려가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님께서 저희들을 계속해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첫날, 저희들이 느헤미야서 1장 1-3절 말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느 1:1-3).

느헤미야서 책은 이제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만난 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제일 먼저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사람, 하가랴와 느헤미야의 아버지죠. "느헤미야의 말이라" 하가랴와 느헤미야 이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사람은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이고요. 그런데 이 하가랴와 느헤미야, 부자관계요. 또 이 두사람의 이름을 생각하게 될때, 이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저희들에게 말해준다고 믿습니다. '하가랴' '주의 어두움'입니다. '느헤미야' '주의 위로'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 시대,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시대의 술관원이었죠. 느헤미야가 태어나서 그가 술관원으로 페르시아왕을 섬기던 이 당시, 여기에 자세한 내용은 소개되지 않습니다만 마음 속에 하나님의 백성과 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그는 많은 부담을 오래도록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가랴, 그리고 느헤미야, '주의 어두움', 그리고 '주의 위로', 이 두 말씀을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느헤미야 당시에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이제 연대표인데요. 주전 600년, 주전 500년, 400년, 그래서 3세기, 4세기, 5세기, 6세기, 주님 오시기 전의 시대입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유다 왕국은 605년에 느부갓네살 바벨론에 의해서 제 1차 침공을 당하죠. 그때 다니엘이 잡혀갑니다. 두번째, 597년에 두번째 침공을 당하는데, 그때는 에스겔 제사장, 그의 선지자가 됩니다. 그가 이제 바벨론으로 끌려가죠. 마침내 3차 침공이 있게 될때, 또 다시 느부갓네살 바벨론을 배반하게 될때, 3차 침공으로 인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에 남기로 했지만, 예레미야는 물론 애굽에 끌려가서 거기서 죽습니다. 어째든, 이 당시의 시대는 유다 백성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가는 어두운 때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70년의 포로 생활, 그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죠. 70년의 포로 생활에 관해서 연대적으로 두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차 침공으로부터 시작해서 첫번째, 고레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건립하면서 즉각 유다 백성을 고토로 돌아가라고 이야기 하던 때, 536년, 이때가 계산해보면 70년으로 이것이 포로 생활 중에 70년의 생활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또 한가지 3차 침공으로부터 만일 계산한다면, 그것은 귀환 이후에 성전이 한동안 재건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에 부딧쳐서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다가 520년 부터 516년 사이에 다시 재건될때,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하나님의 전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백성들을 고무시켰을때 일이 일어나죠. 516년에 성전이 완성이 되는데 3차 침공서부터 시작해서, 516년, 성전 완성때까지 역시 70년으로 이 두가지 시간 갭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이때를 70년의 포로때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70년의 포로시대, 어두운 시대입니다. 또 그들은 회복이 되서 고토로 5만명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귀환 했습니다만, 여전히 성전 재건은 반대를 받았고, 고레스 황제의 귀환령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받았고, 백성들은 크게 낙심했고 성전의 재건은 연기되었고, 이 모든 일들이 여전히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지요. 그 후에 성전은 재건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에스라서를 읽게 될때, 이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원수들의 수많은 반대, 항소, 편지, 페르시아왕에게 편지하는, 그래서 유다, 특별히 예루살렘에 관해서 성과 그 백성들에 관해서 중상하고 또 반대하고 그들의 재건에 대해서 여전히 압박을 가하던 이 시대, 여전히 어두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태어나서 페르시아왕의 술관원이 될 때까지 페르시아 사람으로 볼때 외국인으로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의 학식이나 그의 교양이나 그의 지식이나, 그의 매너나 또 술관원으로서 왕에게 술만 술만 진설하는, 또 술에 대해서 안전을 보장하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만 그가 일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왕 곁에서 대화하고 또 왕의 어떤 면에서는 모사와 같이 조언하기도 하는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관리로서 왕을 보필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도 모르는, 왕도 모르고, 그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도 잘 모르지만 느헤미야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부담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느헤미야서 1장 말씀을 읽게 될때, 그 마음 속에 어떤 부담이 있었을까, 라고 하는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첫째, 그의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에서 두어사람과 함께 돌아왔을때, 2절 말씀을 읽게 될때 그는 묻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물은즉" 예루살렘 형편, 그리고 사로잡히고 면하여 남아있는 유다 사람들과 그리고 유다성, 예루살렘 성에 관한 커다란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과 성에 관해서 물었는데 그때 대답합니다. 그 소식은, 그들이 전해준 그 소식은 그 곳에 남은 자, 그리고 그들은 능욕을 받고, 또 성벽은 훼파 되었고 성문은 불에 타서 소화되었다. 이 소식을 그는 듣죠. 우리는 느헤미야라고 하는 사람을 보게 될때, 이 어두운 시대에 그 마음 속에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외국에 가 있고,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1차 귀환했습니다만 그리고 성전도 지어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으로 볼때, 이것은 미흡하다라는 것을 마음 속에 부담으로 가지고 있었다. 마음 속에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뜻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공감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게 될때,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바라보시고 이 교회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대해서 하나님과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와같은 마음의 부담, 염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시민들, 잔존자들, 그리고 성벽의 훼파와 성문의 소화, 이런 모든 일들을 생각하게 될때, 그 전부터 그는 이미 이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라서를 보면 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는데요. 먼저 소개하고 싶은 것은 고레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건립하면서 유다 사람들이 고토로 돌아갈 것에 대한 칙령을 내리죠. 그래서 1차  536년 유다백성 5만명이 귀환합니다. 그 후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서요. 거의 100년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1세기 가까이 흘러서 458년 에스라와 함께 2차 유다 백성들이 귀환합니다. 그리고나서 약14년 후에 느헤미야 시대, 444년입니다. 이때 느헤미야와 함께 다시 돌아갑니다. 얼마 전의 역사를 보게 될때요. 이미 성전은 세워졌습니다만 이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거민에 대해서 주변의 많은 원수들이 페르시아왕에게 반대 편지를 썼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하수에로왕,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라고 나오고 있고요. 세계사에서는 크세르크스 1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의 남편입니다. 이 황제가 즉위했을때, 485년 그때 황제가 새로 들어오면 또 다시 유다를 반대하고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편지를 올렸습니다. 아하수에로가 떠나고 난 다음에 아닥사스다 롱기스무스, 세계사에서는 알타크세르크스 1세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즉위했을때 또 다시 같은 내용의 항소를, 편지를 보내지요. 그 다음에 느헤미야가 왕을 만나서 유다가 돌아가기 바로 1년 전인, 445년에 또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그 사건을 우리가 에스라서에서 보겠습니다.

"아닥사스다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서편에 있는 신복들은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에게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우리의 곳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우리가 이제 궁의 소금을 먹는고로 왕의 수치 당함을 참아 보지못하여 보내어 왕에게 고하오니 왕은 열조의 사기를 살피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스 4:11-15).

여기까지만 읽어도 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그들이 비난하고 또 반대하는 내용 중에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악한 성읍이라" 이렇게 지칭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 원수들이 같은 예루살렘을 생각하게 될때, 그들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패역하고 악한 성읍이라" 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서로 다른 견해입니다. 같은 성을 놓고 원수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에 염려하고 있는 사람의 생각은 이와 같이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이 보게 되지요.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느헤미야서 1장 말씀을 보면 이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하나니에게 그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앉아서, 4절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4-5).

4절에는 그가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서 그는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5절 이후에는 1장 마지막까지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루살렘의 현실을 들었을때, 그는 마음 속에 고통했습니다. 조금 전에 저희들이 에스라서 4장 말씀을 읽으면 원수들이 아닥스사다왕에게 편지하면서 이 악한 성읍, 그들은 왕을 반역하려고 한다. 그래서 페르시아 수산에서 볼때, 강 서편, 팔레스타인 쪽입니다. 그쪽에 있는 총독들이, 또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닥스다에게 이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건의 역사, 성전은 이미 재건되었습니다만, 비록 솔로몬의 성전보다는 초라하지만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곽, 이 성의 재건은 아직도 숙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재건하려고 할때 이들이 편지를 보내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이들은 반역하는 무리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강 서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제 이렇게 공격을 한 것이죠. 아닥사스다왕은 조서를 보내서 그들의 공사, 그들의 역사를 중단시키라, 이렇게 칙령을 보냅니다. 저희들은 하나니가 가져다 준 이 소식을 듣게 될때,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소화되었다. 이것은요, 옛날 바벨론 왕이 왔을때, 3차 침공때에 완전히 불타고 무너지고,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고토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이것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보낸 이 편지로 인해서 아닥사스왕이 보낸 조서에 의해서 그것은 단순히 중단시킨 것만이 아니라, 이 역사를 중단시키게 될때, 그들은 왕의 조서 이상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문을 불태워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이 소식을 이제 느헤미야는 전부터 염려 가운데 있었습니다만, 자세히 그의 형제로부터 소식을 들었을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전 444년 즉 아닥사스다왕 제 20년 기슬르월, 이때에 그가 들은 내용은 처음들은 내용이 아니었고, 그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을, 소식을 들었을때 그 내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더 악화되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는 마음 속에 고통하고 있었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느헤미야서는 1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우리가 살펴보게 될때, 우리는 1장서부터 느헤미야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음 속에 고통하고 괴로워하는데, 느헤미야서에 열두번의 기도가 나옵니다. 1장에도, 2장에도, 여러차례 기도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느헤미야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1장서부터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요, 이 어려운 시대에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가 어려운 시대였다면 오늘 우리 영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대에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까? 첫째요.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갖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겁니다. 둘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 세번째,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요.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을, 그 위대한 일을, 그것은 큰 일입니다. 그 큰 일을 마지막까지 완성시키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 느헤미야서는 바로 이런 점에서 저희들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의 본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현 시대, 그리고 다음 시대의 또 다음 시대, 앞에서 우리가 남길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확신과 비전과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이 일을 착수하는 일에 본을 보여야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바르지 못한 본, 이것은 저희들 마음 속에 엄청난 실망과 실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제 느헤미야와 같이 바른 본을 보여주는 사람, 사람들에게 엄청난 격려와 위로와 용기를 안겨다주고 또한 느헤미야는 혼자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이 일을 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느헤미야서에서 성공적인 인도력, 이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위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위로라고 했지요. 어려운 시대, 어두운 시대, 이때에 느헤미야는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일에대한 구상, 그 일로 인해서, 그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었던 환상, 비전, 이런 모든 것은 그가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격려해서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원수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려 하는데 어떤 계략과 전략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잘 대처해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번째, 그는 아무리 일이 어려워도,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 이제 진척되는 일에 많은 방해가 있다해도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진전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점에서 그는 인도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인도력입니다. 또 한가지 그는 어떤 점에서 위대한 인도자였는가?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없이 그는 하나님의 일을 결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복지, 이 두가지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추진시키는 일에 결단된 사람이었습니다. 인도자는 결단된 사람입니다. 또 한가지 그는 마음 속에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고민하고 있는 것을 그는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하나님의 유산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염려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도성에 대해서 염려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그는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그와 같은 것을, 술관원이지만 마음 속에 그것을 품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 주변에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주전 444년 아닥사스다왕 20년, 기슬르월 하나니를 만나고 소식을 들었고 이미 전에부터 생각했던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는 그 소식을 들었을때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경시되는, 하나님의 엄위함과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하나님의 온전한 수준,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경외를 받고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경외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단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와 같은 일에 결단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염려하고 하나님의 성을 염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그는 염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니의 이야기를 들었을때 기도하기 시작하죠.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하늘의 하나님, 고레스왕도 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을 귀환하도록 귀환령을 내렸습니다. 에스라도 이 칭호를 잘 사용했습니다. 다니엘도 이 당시에 이 칭호를 잘 사용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 유다 사람들이 주권을 잃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외국에 유리하던, 포로 되었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우상이 아니고 하늘에 계셔서 이 땅의 모든 역사와 또한 모든 흘러가는 일들에 대해서 주관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로 그 주관하는 하나님, 주권의 하나님에게 그는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그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두려워 해야 마땅한 하나님입니다. 경외하는 대상, 바로 그 분은 우리 하나님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저희들이 기도하게 될때 커다란 위로와 또 확신,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만일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기도 한다면 내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님을 향해서 떼를 쓴다면, 그것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땅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그런 소리일 뿐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이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담고 있었던, 그리고 하나님의 염려를 공감하던 그 마음을, 이제 하나님 앞에 토로하면서, "하나님이시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을 지켜 주십시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지요. 네가 내 이름으로 나에게 와서 기도할때 듣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너희는 입을 크게 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언약을 지키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은혜와 긍휼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저희들은 참 부족하고 느헤미야도 이제 기도를 하게 될때, 그는 예루살렘이 망하게 될때, 아마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었고 그는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조상들의 범죄에 대해서 자기의 죄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다니엘은 바벨론에 갔을때에 어느날 유다의 포로 생활이 70년만에 마칠것이다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책을 펴서 읽었을때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죠. 그때에 다니엘은 이 모든 불행, 이 모든 민족의 어려움, 그리고 유다의 멸망, 성전의 불탐,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욕,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될때 조상의 범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상 탓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그것은 자기의 범죄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갔지요. 다니엘의 영, 기도하는 영과 같은 영을 가지고 느헤미야는 이제 느헤미야서 1장에서 기도합니다. 약 90년 전에 다니엘이 했던 기도와 동일한 기도로 느헤미야는 이제 페르시아에서 기도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느 1:6-9).

느헤미야는 주님 앞에 범죄를 자백합니다. 이것은 참 고고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조상에게 돌리는 것은 쉽습니다. 문제를 조상에게 돌리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조상들은 떠났습니다. 과거의 실패,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례,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한 이 모든 범죄, 그 범죄를 행한 조상의 세대, 떠났습니다. 그때에 이 문제를 이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 세대는 떠나고 다음 세대는 옵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오늘날 우리 이 시대가 떠나면 우리 다음 시대가 이제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이행해야 될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앞에 펼쳐진 많은 폐허와 또한 성문이 소화된 것과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가 땅에 떨어져버린 이 모든 일들을 우리가 볼때, 그래서 주의 백성들이 한탄하고 경건한 백성들이 마음 속에 괴로워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이 역사하지 못하는 현실, 이 모든 것들을 보게 될때 우리는 안타깝지요. 또한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소홀히 여겨지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거부 당하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과 또한 진리의 말씀과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계명과 이 모든 것들, 개인의 생활과 가정의 생활과 모임 안에서의 생활과 사회 생활과 또한 국가 앞에서의 책임과 이 모든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뜻을 저희들이 분별하고 느헤미야가 했던 것처럼, 저희들도 이와 같은 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들, 그것이 과거부터 흘러내려온 것이라면 그 책임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고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희들의 책임이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고 이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전에 신명기 말씀에서, 레위기 말씀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면 외적이 쳐들어와서 너희들을 흩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에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머리가 되고 결코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 선진국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 유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 번영과 행복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생각하게 될때, 하나님의 뜻 밖에서 기도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 기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이 말씀과 기도 아닙니까? 느헤미야는 구약에 이 위대한 말씀에 대해서 그는 철저히 알고 있었다.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수많은 지식, 또한 정보, 이것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것으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라는 것을 저희들은 절감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 기도할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이 약속을 기억할때, 그는 자기의 민족 앞에 펼쳐진 그리고 최근에 들었던 소식을 마음 속에 상기하게 될때, 예루살렘에 닥친 잔존자들의 능욕, 그리고 성문의 훼파, 그리고 성벽의 훼파와 성문의 소화, 이 모든 현실을 생각하게 될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신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경홀히 여겨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저 무시 되어서 아무 영향력도, 아무 결과도 없이 넘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는 것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조상들이 범죄했지만 그 죄는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하감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돌이켜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성에 다시 모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했지요. 그가 한 호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호소입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감정적인 눈물을 흘리는 그와 같은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그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그러한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논리정연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게 될때 어떤 논리가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언약을 그대로 이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따라서 우리의 전 세대, 이 불행한 일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어침을 당했는가. 느부갓네살과 그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또한 마침내 그 안에 들어와서 왕을 죽이고, 왕의 눈을 뽑고, 왕을 끌고 가고, 많은 부녀자가 욕을 당하고 배가 갈라지고, 또한 청년들이 쓰러져 죽었고 이 엄청난 재난과 유혈과 또한 폭력과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느헤미야는 그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인정했다면 하나님이시여, 이것은 저희들의 범죄였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제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이 범죄를 마음 속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가게 될때,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위대한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오래 전에 레위기 말씀과 신명기 말씀과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모세를 통해서 언약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돌아가는 백성,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백성, 그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 기도를 그는 올려드린 것이죠.
여기에 두가지를 저희들이 볼수 있습니다. 8절에요,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이것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 한가지, 9절 말씀을 보면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신명기 28장 1-6절 말씀을 보면요,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엄청난 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그런데요. 이 같은 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15절부터 그들이 불순종하게 될때 그들이 받을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이 두가지 명백한 대조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저주하십니다. 그것은 명확하지요. 이것을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불순종하기 때문에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 것이죠. 그래서요, 그래서 같은 장, 저 뒷부분에서 보겠습니다.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 28:63-67).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을때 그들이 경험하게 될 두려운 저주, 또 두려운 결과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지요. 67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저주를 받게 될때, 불순종 때문입니다. 저주를 받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한탄할 것인가? 이 말씀은요, 이 큰 문장의 말씀은 저희들의 마음 속에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게 될때, 나타나는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이 되면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녁이 되면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순간도 평안과 안정과 또한 행복과 또한 즐거움, 희락, 이런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율법의 말씀 아닙니까? 느헤미야는 이 말씀을 외국에서, 페르시아에서 수산성에서 왕을 보필하게 될때, 그는 이미 이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몸은 먼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떨어져서 거기서 태어났을 것이고 거기서 자랐고 거기서 교육을 받았고 거기서 이제 고관이 되어서 왕을 보필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이국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의 백성들 가운데 또한 최근의 역사와 유다 백성이 당한 여러가지 재난과 수난과 능욕,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될때 그 마음 속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고통은 단순히 현실을 생각하게 될때 마음 속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 현실을 보게 될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이루어진 결과인가를 그는 명백히 분석하고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저희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기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양식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고귀하게 생각하고 어떠한 것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겨서 내가 이 땅에 살게 될때 그것을 토대로해서 나의 개인생활을 구축하고 나의 가정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하나님의 교회 ㅂ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힘쓰고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이 사회생활을 하게될때,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을 통해서 나의 개인의 간증과 모임의 간증을 드러내는 일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함을 따라 지켜 나가고 있는가? 여기에 부족함과 보충되어야만 할 많은 부분들을 저희들이 생각할때 저희들은 하나님 앞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기에 부족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때 저희는 하나님과 함께 공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생각하실때 일곱교회를 보신 주님께서 어떻게 저희들을 평가하시는가? 저희들은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달려가지만 우리 주님께서 촛대 사이로 다니시면서 모임을 보실때 어떤 평가를 하실까? 주님께서 저희 가정을 보실때 저희 가정을 향해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 주님께서 나 개인의 영적인 삶을 볼 때에 주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실까?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 안에서 평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는요, 바로 이런 점에서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최근에 약 1년 전에 있었던 원수들의 편지, 그로 인해서 아닥사스다왕이 내린 칙령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은 이제 있었던 성벽마저, 그들이 쌓고 있었던 성벽마저 완전히 훼파되고 성문도 완전히 불타버린 이러한 피해를 그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예와 명예와 영광이 실추된 이 현실을 그가 보며 그는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를 보게 될때, 이 기도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열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근심과 하나님의 염려를 공감하면서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토로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토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에게, "하나님이시여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우리 가운데 부흥을, 변화를 일으켜 주십시요." 현실적으로 보게 될때 느헤미야는 술관원입니다. 그는 먼 수백마일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그가 과연 거기를 몇번이나 가봤을까? 아마 한번도 가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그것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수산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예루살렘에 가 있었다.
아,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 있는가? 그가 기도하게 될때, 예루살렘을 가리켜서 이야기하게 될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때,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그래서 택하신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그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원수는 거기는 패역하고 악한 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똑같은 성을 다른 각도에서 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름을 두신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모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몸이, 또는 우리의 모든 기능이 이땅에서 역사하게 될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이 시대에, 교회의 영성과 교회의 미래와, 교회의 복지와, 교회의 영광과, 교회의 간증과 이것을 언제나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이 기도에서 우리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할찌라도 우리의 집안에서 설거지를 할찌라도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를 할찌라도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내가 교제 가운데 있는 모임의 위대한 복지와 또한 하나님께서 두신 위대한 간증을 나는 항상 마음에 품고 살고 있는가? 이것은 느헤미야가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해 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조상의 죄와 또 저희들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을 저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에 약속하신 말씀처럼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회개해 돌아오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제 다시 모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답변하셔야 될 때가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답변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답변할 수 없습니까? 우리가 기도할때가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그랬죠,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치 아니하리라." 기도하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 기도하지 않는 사실 자체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나는 하나님 앞에 독립을 선언한 것이죠. 얼마나 커다란 범죄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 때문에요, 무관심 때문에요, 불신 때문에요,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실, 이것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흩어져 있는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들, 또 예루사렘에 있는 유대인들,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현실을 물리적으로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톡특한 것은, 느헤미야의 차이는 이 같은 시대에, 이 어두운 면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통해서 바로 평가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지금 기대하고 있는 일, 느헤미야가 계획하고 있는 일, 느헤미야 영적인 영안 속에 구상하고 있는 비전,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거대한 일입니다. 그가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아니 시작하기 위해서, 착수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왕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그는 혼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재물과 또한 많은 자금과 많은 인력과 많은 협동과 많은 마음에, 함께 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역사가 있지 않는 한, 이 일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의 혼자만의 열심으로, 그의 혼자만의 계획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 그것을 그것을 아직 이 일이 예루살렘에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거기에는 그저 훼파와 소화된 문과 또한 낙심과 사기가 떨어진 잔존자들, 그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폐허가 된 이 성, 성벽은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문은 소화되었습니다. 거기에 거민은 희소합니다. 이 현실을 그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기도하는 마음 속에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마음 속에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실 상 이 날로부터 아닥사스다왕 20년 기슬르월, 우리 달력으로 하면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이죠. 그때,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2장에 들아와서 왕을 만날때까지 사개월이 걸립니다. 사개월이 걸리는 동안에 그는 지속적으로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염려하시는 바, 부담이 점점 커 갔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요, 주님의 마음에 더욱 더 깊이 공감합니다. 동시에요, 우리가 기도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루어질 위대한 일들, 비전이 점점 또렸해지는 것입니다. 사개월동안 기도하게 될때, 그 기도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도는 무의미한 투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계속해서 정리하시고 그 마음 속에 결단을 더욱 더 강화시키셨다. 또한 그 마음 속에 있었던 구상이 점점 현실화 되도록 인도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다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 백성은,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이것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은, 이 멸시받고 지금 잔존자로서 핍박받고 탄압받고 또한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작은 무리,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무리,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그 민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때 우상 섬기던 우리의 조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어린양의 보혈을 통해서 구속하신 이 백성,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십시요. 그때도 구원하셨고, 구속하신 것을 기억해 주십시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은 하나님 앞에 설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위기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들을 세워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느 1:11).

첫째, 그가 호소한 것은 "주님 기도를 들어주십시요."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 기도를 들어주십시요. 저희들이 호소하고 있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요."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사 형통케 하사, 왕 앞에서 은혜를 얻을 수 있게 해 주십시요. 느헤미야는 술관원입니다. 그가 마음에 구상하고 있는 예루살렘, 느헤미야는요, 그가 마음 속에 소원하고 구상하는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성은 인구가 희박하고요. 성곽들은 다 무너져버리고요. 불타버렸습니다. 시커멉니다. 폐허입니다. 그저 검은 더미입니다. 이것을 향해서 이방 사람들은, 무엇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들의 조소와 그들의 멸시와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는 추락했고, 또한 전에 하나님께서 두셨던 위대한 이 하나님의 이름, 이것은 이제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조소거리가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 유다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엄청난 실의와 사기가 추락함으로 인해서 실망과 낙심 속에 있습니다. 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었지만 느헤미야 마음 속에 있는 예루살렘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향한 느헤미야 마음 속의 구상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여러분과 제 마음 속에 있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지역교회, 내가 교제하고 있는 이 모임, 이 모임에 대한 구상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어떤 모임으로 구상하고 계십니까? 어떤 모임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 모임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 땅에 이룸으로 성도들이 모임을 통해서 유익을 얻고,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위대한 간증이 환히 주변에게 드러남으로 인해서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믿음을 통해 돌아오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성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모임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구상이 아닙니까? 느헤미야는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 오늘날 종으로 형통케 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 기도 가운데 자원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요." 이것은 그의 교만입니까? 이것은 그의 한갖 마음 속에 있는 그의 오만한 의지였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1장 전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니를 만나기 전부터 그는 마음 속에 고민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의 근심을 그는 마음 속에 공감하고 있었고, 그 공감을 이제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현실화 시켰고, 이제 마음 속에 예루살렘에 대한 구상, 이와 같은 예루살렘의 현실을 우리는 회피해야 되겠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와 같은 현실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는 마음 속이지만 구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러한 구상을 저희 모임을 향해서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 구상은 내가 생각하는 구상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원칙, 신약교회의 원칙과 패턴, 그리고 실행, 여기에 대한 구상, 이것 말입니다. 이 구상이, 이 비전이 우리 마음 속에 있을때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게 될때, 그리고 착수하게 될때, 그것은 우리 모임 안에 이루어 집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마음이 없다면 절대로 우리 모임ㅍ안에 변화는 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하나님 앞에 소원을 올렸습니다. "주님 나를 왕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요." 그냥 단순히 돌아가는 것 아닙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많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반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불가능ㅊ같이 보이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만일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갖 망상 속에 빠진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떠한 것이 그의 앞에 있는 일이요, 그 일의 성격은 무엇이고 그 일은 어떠한 반대에 부딧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그가 믿음을 행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헸습니다.

이제 2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장 1절은 시간이 바뀝니다. 이제 첫째, 1장 1절에서는 아닥사스다왕 20년, 기슬르월입니다. 그러나 2장에 가서는 아닥스사다왕 20년 니산월입니다. 니산월은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이니까, 기슬르월서부터 니산월까지 약 4개월이죠. 우리가 기도하게 될때,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공감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도중에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할 것과, 내가 언제 그것을 할 것과, 내가 어떻게 할 것에 대해서 마음 속에 좀더 분명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기도해 보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영 못합니다. 기도하면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마음과 공감하고 있을때, 그것은 처음에는 너무나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미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엎드리지만 그 현실과 그 일은 내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하게 될때, 이 구상은, 이 비전은 점점 또렸해진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기슬르월서부터 시작해서 그가 울며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에 사개월이 지났을때, 드디어 왕 앞에 이제 나가게 되는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언제가 D-day 인가? 언제 왕 앞에 나가서 이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 드려야 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었던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요. 그는 기도 가운데, 성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서요, 성급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무관심 속에서 적당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자신을 인도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개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인도하시는 그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고, 느헤미야는 드디어 때가 되어서 이제 왕 앞에 나갑니다.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느 2:1-2).

이것이 이제 드디어 왕을 만나는 날이 되었죠. 1장에서는 그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2장에서는요, 그가 이 일을 추진하게 되는데요. 추진하기 위해서 그는 왕을 만나야 됩니다. 왕을 만났을때, 왕이 그를 보았을때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왜 네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우리는 상식적으로 잘 알지요. 술관원이 수색이 있다면 이것은 큰일나는 거죠. 왕의 마시는 술, 음료, 이것에 대한 안전을 그는 보장해야 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독살 당했습니까? 많은 왕들이 독살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술관원의 책임은 막중하죠. 그래서 그는 왕 앞에 나가게 될때 항상 왕의 동반자로서 왕의 또한 술관원으로서 왕의 안보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또한 왕과 대화하는 사람으로서, 왕에게 심지어 조언하는 사람으로서, 왕의 파트너로서요, 그는 왕 앞에 매너가 있습니다. 왕 앞에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밝은 표정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가 수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엄청난 위험입니다. 그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왕이 이렇게 질문하게 될때, 느헤미야는 무얼 느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느 2:2-3).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를 향해서 네가 왜 수색이 있느냐, 대단히 심각한 질문이죠. 이것은 지나가는 질문 아닙니다. 왕이요, 술관원에게 엄청난 책임을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는 그 순간에 예상했던대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자연적으로 말해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이나 두려웠겠죠. 그런데 그는 왜 얼굴에 수색이 있었을까? 그는 수색을 제거하고 나가야 될 터인데, 왕 앞에 그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되는 매너는, 왕 앞에 이런 얼굴을 가지고 나가서는 안되는데, 왜 그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나갔을까? 그는 왕 앞에 뭔가 동정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표정을 했을까? 아닙니다. 그는 왕에게 대답합니다. 그가 느끼고 있었던 현실, 그가 느끼고 있었던 감정, 그가 느끼고 있었던 그의 의지, 이런 모든 것을 왕에게 표현하게 될때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대답에서 우리는 느헤미야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지혜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미 아닥사스다왕은 예루살렘의 건축, 성의 건축, 그것을 중단하라, 이미 령을 내린 사람입니다. 그것이 1년 전에 편지를 통해서, 페르시아왕이 강 저편의 총독들, 그리고 권력자들이 예루살렘을 모함하는 편지를 받고, 성 건축 중단하라,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닥사스다왕 자체도 예루살렘 성의 미래를 놓고 볼때, 느헤미야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느헤미야가 기대할 수 있는것 아닙니까? 이와 같은 상태에서 느헤미야는 왕에게 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 속에 근심을 가지고 수색을 띄고 나갔을때, 그는 왕 앞에서 이와 같은 위기의 순간에 왕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정직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정치적이나 외교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사개월동안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구상하고 있었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었느냐라고 하는 점을 조금도 변질없이 왕에게 그대로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관점에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겁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일에 대해서 왕에게 정직하게 이야기 하게 될때, 그는 사실상 이 일에 대해서 정면돌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이와 같은 태도는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접근입니다. 왕에게 그는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얘기 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성은요, 아닥사스다왕도 성의 건축, 반대한 사람입니다. 원수는 물론 반대 했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그 성을 이야기하게 될때, 그 성은 패역한 성이다. 악한 성이다. 언제나 반역하려고 하는 성이다. 이것은 원수들이 아닥사스다왕 머리 속에 세뇌하고 있는 그와 같은 선전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요, 하나님이 주는 지혜 가운데 그는 정치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뭐라고 표현 했습니까? 여기 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이야기 하게 될때, 왕의 마음으로 하여금 참으로 예루살렘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볼수 있도록 유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얘기 했어요. 이 이야기는, 이 용어는 아닥사스다왕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 들어도, 특히 왕이 듣게 될때, 왕으로 하여금 순식간에 조상에 대한 존경, 그것은 모든 민족과 또한 종족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감정 아닙니까?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왕의 그와 같은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하여금 이제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조상의 묘실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돌봐야 할 장소다, 라고 하는 생각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요. 왕이 두번째 질문합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느 2:4).

좋은 진전 아닙니까? "그럼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때요. 조금 전에 느헤미야는 대단히 두려워 했지요. 그 두려운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는 지혜를 가지고 예루살렘 성이라고 말하지 않고요. 똑같은 내용을 "나의 조상이 있는 묘지가 있는 성입니다. 그 성이 이렇게 이렇게 훼파 되었는데, 성문이 소화 되었는데 어찌 내게 근심이 없고 얼굴에 수색이 없겠습니까?" 정직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에서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사개월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요, 순간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서 화살 기도다, 때로는 응급 기도다, 전보 기도다, 또는 샌드위치 기도다, 이런 여러가지 용어로 이야기 합니다. 왕이 질문 했는데요. 대답할 그 사이에는 아마 1초도 안될 겁니다. 왕이 질문했을때 대답하지 않고 한참 있으면 왕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이러 이렇게 물었다. 너 뭐하고 있느냐?" 하지 않겠어요? 왕이 질문 했을때 바로 대답해야 하는데 바로 그 간격은 그것이 1초 이상이겠어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말 성경에는 묵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화살 기도다. 찰나 기도입니다. 이 찰나 기도, 느헤미야는요, 왕이 질문했을때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순간에 느헤미야는 얼만큼 스트레스 속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만일 그가 이와 같은 긴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 순간도 이용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위대한 기도, 화살 기도, 느헤미야에서 발견하는 이 화살 기도는 참으로 놀라운 겁니다.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본을 보여줍니다만 이 화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 질문했을때 그는 그냥 바로 대답하지 않고요. 주님 앞에 먼저 기도하고 주님으로부터 답을 얻고 답변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바른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스코틀랜드에 조지 맥도날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하려고 할때, 그는 비참하게 실패하든지 아니면 그는 더욱 더 비참하게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 할때에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두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두가지는 다 비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왜 여기서 어떻게 화살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이 찰나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요.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뭔가 위기를 느꼈을때, 갑자기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하는 그런 기도 아닙니다. 화살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화살 기도는 그는 기도의 습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사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아니 사개월 이전부터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이제 현장에서 왕이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했을때에 그 답을 하기 전에 그 너무나 긴박감 속에서 너무나 찰나 속에서 1초도 되지 않는 이 순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답합니다.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느 2:5).

드디어 그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냈습니다. 사개월동안 적어도 이 문제를 놓고 이것을 가지고 마음 속에 고민하고 있었고 이제 중요한 날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 중대한 이야기를 과연 했을때에 우리가 한번 역사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당시의 상황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 전에 이 왕은 예루살렘성, 건축 중단하라고 령을 내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더구나 술관원이 수색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위험을 가지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위험을 하나님 앞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할때 지혜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 속에서 그가 이야기 하게 될때, 모든 이야기를 그가 숨김없이 왕 앞에 다 토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왕에게, 왕은 높은 사람이예요. 그는 이제 술관원을 그만두고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간다 할찌라도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사개월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드디어 때가 왔을때에 하나님께 응낙을 받았고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왕에게 가서 이제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죠. 왕에게 허락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첫째, "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주십시요. 그래서 성을 중건하게 해 주십시요." 그는 단순이 여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요. 성을, 성벽을, 그리고 성문을 쌓고 문짝을 달고 하는 일에, 나를 보내주십시요. 라고 하는 겁니다. 첫째, 그는 가는 겁니다. 첫째, 그가 왕에게 요청하고 주문한 것은 나를 보내주십시요,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요. 이 순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에게 허락을 받는 것, 이것은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난관들이 있습니다.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 라고 주님의 뜻 가운데 분별하고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를 먼저 구합니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내가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야곱이 에서가 찾아왔을때, 그는 하나님 앞에 나중에 기도합니다. 먼저 에서에게 나아가서 협상을 합니다. 다 해놓고나서 그 다음에 나중에 기도하지요. 이것은 잘못된 기도 아닙니까? 느헤미야는요. 먼저 하나님 앞에 허락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 현실적으로 현장에 가서 허락을 받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간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게 될때, 이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여러가지 계획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가지 논리를 통해서 상황을 짜 맞춰서 일을 어떻게 추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순서에서 옳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허락을 받고 이제 왕에게 나를 보내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왕이 어느때 돌아오겠는가?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느헤미야가 왕에게 이야기 할때, "왕이 저에게 은혜를 주시면" 또 "왕이 즐거하시면" 이런 예절을 가지고 당연히 왕에게 그렇게 얘기 했지요. 그런데요. 왕의 대답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 속에는 아!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마치 물의 담겨있는 보, 보자기를 주인이 주무를때, 주무르는 모양처럼 변하는 것처럼, 왕의 마음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있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왕이 나를 보내시기를 즐겨하시기로" 그는 감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고 현장에 가서 일을 추진하게 될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에 대한 감을 잡습니까? 주님께서 느헤미야를 지금 인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기한을 정하고 내가 또 왕께 아뢰되" 두번째 요청입니다. 그것은 보내주십시요, 라는 것이 첫번째 요청이라면 두번째 요청은 제게 공급해 주십시요, 라는 겁니다. 느헤미야는요, 술관원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고관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부자였겠지만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첫째, 이 험난한 이 많은 총독들이 있는, 그 총독들은 자기의 원수입니다. 그 총독들이 지배하고 있는 땅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첫째, 패스포드가 필요합니다. 둘째, 자기의 안전, 안보를 위해서 패스포드가 필요하고 왕의 패스포드입니다. 두번째, 그가 성을 건축하고 성벽을 이루기 위해서, 또 그가 살 집을, 궁을 생각한다면 재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는 패스포드 뿐만 아니라 재목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느 2:7-8).

두가지 구했습니다. 패스포드와 재목입니다. 느헤미야는요, 임기응변으로 왕에게 나가서 갑자기 나에게 필요한 것, 이러이러한 것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요. 이 말씀을 보게 될때,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는 이미 모든 정보에 대해서 알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일을 추진하게 될때 어떻게 현실적으로 추친할 수 있느냐? 라는 정보를 오랫동안 수집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왕에게 이야기 할때, 삼림 감독에게 재목을 저에게 주실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주십시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삼림감독 아삽에게 이렇게 이렇게 명령을 내리십시요.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는 막연한 요청이 아니고요. 대단히 구체적인 요청을 왕에게 드렸어요. 저희들이 기도할때도, 저희들은 하나님 앞에 막연한 기도가 아니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기도, 이거 필요한 겁니다. 왕에게도 마찮가지였습니다. 그는 계획된 것을 가지고 이제 왕에게 나갔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기도 할때 기도하지 않고 우리의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게 될때 우리는 이 일을 추진하게 될때, 우리는 정확한 지식을 최대한으로 얻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한 책임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그렇게 일했습니다.

우리는 잠깐, 조금 전에 그가 왕 앞에서, 왕이 두번째 질문을 했을 때에 그가 대답하기 직전에 그는 묵도했다는 말씀을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묵도, 화살 기도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샌드위치 기도, 왜 샌드위치 기도인가? 왕의 질문과 그의 대답 사이에 끼어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샌드위치 기도라고도 합니다. 또한 그 기도를 화살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기도의 날개가 순식간에 주님에게,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곧 짧은 기간이라 할찌라도 이미 주님에게 날아올라갈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화살기도입니다. 응급 기도, 전보 기도, 다 똑같은 의미이지요. 그 기도의 특징, 무엇이겠습니까? 그 기도는요. 첫째, 질문을 받았을때, 내가 뭔가 결정하기 전에 주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른 순서지요.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왕뿐만 아닙니다. 저희들의 생활 속에서요. 여러 사람들을 저희들이 대면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인터뷰도 받습니다. 때로는 중요한 사람과 대화해야 됩니다. 때로는 나의 윗 사람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 그래서 중요한 일이 결정되기 위해서 이 대답을 하게 될때, 대답 전에 주님에게 말씀드리는 기도를 하는가? 이것 화살 기도입니다. 화살 기도의 특징입니다. 두번째요, 찰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그렇게 짧은 순간에 그 순간이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와 같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기도의 생활 가운데 주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우리에게 화살 기도가 필요합니다. 화살 기도는요, 현장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형식, 또한 어떤 특별한 골방이라고 하는 어떤 장소, 다니엘은 자기 집에 와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현장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화살 기도입니다. 화살 기도의 특징은  현장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 기도의 날개가 순식간에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게 될 때요, 우리는 두려울때 기도합니다. 우리는 혼란할때 기도합니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졌을때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딜레마에 빠졌을 때만 기도합니까? 이것은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영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본을 보십시요. 그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이와 같은 일치된 영 안에서 그는 현장에서 주님 앞에 기도의 날개를 타고 올라갔다. 1초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을 그는 확실히 활용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 화살 기도는요. 그렇게 효율이 높은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기도였는데도,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그는 그 시간을 이용하고 있었다. 기도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 사개월 동안 그는 기도했는데요. 그 기도는 충분한 것이 아니고, 그는 또 기도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더 기도하고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 기도는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보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딜레마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위험 속에서 우리 기도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저희들에게 이런 본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기도의 모습, 화살 기도입니다. 이 화살 기도, 우리가 노크를 합니다. 그런데 이 화살 기도는요, 사개월동안 그가 노크를 했다면 화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강타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기도입니다. 사실상 사개월동안의 기도를 이제 왕 앞에서 답변을 얻어내게 될 때에 그는 이 짧은, 대단히 찰나의 기도를 통해서 이제 확실하게 왕으로부터 답변을 얻는 결론적인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기도가 아니라 사실은 오랫동안의 기도와 연결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또 침묵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묵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나처럼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기도처럼 뭐 손을 올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다른 포즈를 취하거나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과 교신입니다. 이 교통을 통해서 그는 놀라운 것을 이뤄 냈습니다. 그 기도는 그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사개월동안, 아니 그 전부터 마음 속에 있었던 부담과 하나님의 뜻과 공감된 이 모든 영혼이 하나님 앞에 퍼부어지는 이와같은 기도였다.
오늘날 우리는요, 기도에는 어떻습니까? 나의 개인의 생활에서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저희들이 이 기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기도에는 정말로 이와 같은 간절함과 또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를 실제로 느끼고 와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요, 우리는 시간낭비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 문제는 이제 주님 앞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 모임 안에서 느끼고 있는가? 가정도 마찮가지 입니다. 나 개인의 미래에 관한 문제, 내가 생각하게 될때 대단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러한 문제, 많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노년들, 중년들, 청년들, 소년들, 있습니다. 우리 모임 안에 수많은 성도들이 이런 문제로 인해서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와 같은 난감한 문제를 놓고 우리는 항상 불평하거나 아니면 불가능 하다고 체념하고 있거나 그래서 내가 속해 있는 이와 같은 여러 체제 때문에 나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여러가지 불행한 환경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나는 겪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충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막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불신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가?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가?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기약의 기도뿐만 아니라 화살 기도를 주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위기의 순간, 저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기도를 해 왔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 현장에서 찰나의 기도를 드릴 모든 자격이, 주님이 주시는 그런 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화살 기도에서, 두번째 기도죠. 두번째 기도에서 그가 보여준 모양을 한번 보십시요. 습관적으로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화살 기도를 했죠. 또 하나는 그는 본이 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일상 생활의 루틴을요, 일상 생활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행하는 일들을 하나도 깨지 않고 기도했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회에 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에서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거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본입니다. 또 한가지 이것은 추천할만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온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요, 놀랍게 응답을 받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생생한 믿음 속에서 드려진 기도입니다.

저희들이 1장과 2장, 이제 8절까지 생각해 봤는데요. 느헤미야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환경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마치 그의 아버지 하가랴, 주의 어두움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성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져 버리고,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포로가 되어서 다 끌려가고, 그리고 난 후에 세기가 지나면서 있었던 여러가지 반대와 또한 탄압과 이런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는 대단히 불우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장 불우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을때,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표에 대해서, 하나님의 소원에 대해서 그는 이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믿음을 행사하면서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 본을 보였습니다. 잔존자는 사기가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변의 백성들은, 이방인들은 조소하고 있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습니다. 그래서 그가 해야 될 일을 생각할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적으로요. 오늘날과 같이 막강한 종교계의 흐름, 기독교의 타락,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모임으로 모이게 될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회의 속에 빠지죠.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연약하다. 성도들의 마음은 너무나 사기가 떨어져 있다. 영적으로 우리는 실의 속에 있다. 현실을 보게 될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뭐 여러가지 이런 일들요. 우리 자녀들의 문제, 또한 모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여러 종류의 문제들, 이 문제들을 우리가 보게 될때, 때때로 우리는 실망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시고 부탁하시고 또한 소원하신 이 문제들이 과연 우리 가운데 모임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 때문에 때로 실패의 감옥 속에 빠집니다. 좌절합니다. 낙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동일한 문제 가운데 그가 해야 될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는 일을 그는 마음 속에 품고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행사해서 그는 구상했습니다. 그 성은 이렇게 훼파된 성이 아니고, 여기에 성민들이 가득하고 성벽이 완성된, 이런 성, 그것이 내가 구상하고 있는 성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구상하고 있는 성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성을 이 땅에 이루어 주십시요. 주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갈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재목과 재료를 주십시요. 왕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이제 그 이후에도 예루살렘에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수많은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가 어떻게 자기를 대적할 것인가 그는 너무나 눈에 보듯, 뻔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어려운 일들, 이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성읍을 세운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의 원수들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잔존자의 사기는 떨어져 있고, 그리고 이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게 될때, 이 일은요.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52일 만에 이 일이 이루어집니다. 두달도 채 되지 않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벽이 완성이 됩니다. 이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기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사개월 기도했죠. 그가 페르시아에서, 수산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하는데 적어도 사개월이라면 그리고 성벽 건축이 52일, 두달이라고 한다면 약 10개월입니다. 10개월 안에 이 일이 이루어졌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기적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요,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이 마음을 드린 헌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추진할 수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놀라운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생각할때요. 여기서 비결은 뭘까? 세가지 생각해 보십시요. 첫째, 느헤미야는요. 하나님을 으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그는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했다. 그는 자기가 총독이기 때문에 했다, 자기가 술관원이기 때문에 했다. 자기의 계획이 착착 맞아 들어가서 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둘째, 그는 기도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천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우리 앞의 일들이 어려우면 우리는 제일 처음 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형제 자매님들, 오늘 이 순간에도 마음 속에 컬컬하고 괴롭고 모임에 와도 마음 속에 산란해서 앉아 있기가 어려운 그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 안의 문제, 모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생각할때, 너무나 괴롭고 또한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또한 학생이라면 학교 안에서 동료들 사이에서 미래에 관한 불확실이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마음 속에 괴로울때, 어떻게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 우선권을 드려야 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식을 얻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공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모든 것이 된다. 모든 기쁨의 근원이다." 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됩니다. 세가지 기억하십시요. 첫째,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시작해 보십시요. 우리 모임에서 이렇게 시작하십시요. 우리 개인의 삶에서 이렇게 시작하십시요.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시작하십시요. 주님이 저희들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서 13장입니다. 저희들이 2주 동안에 열번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는데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한장 한장 가면서 주님께서 느헤미야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이 불가능한 것 같이 보였던 일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래서 이 위대한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는지 그의 본은 우리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개개인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 모두를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