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 형제님/복음 말씀

복음 : 유다와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는 하나님

박이레 2026. 7. 23. 21:27

< 복음 : 유다와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는 하나님 > 박용수 형제님 / 26년 7월 19일 일요일

오늘은 사람은 얼마나 악한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또 풍성한가에 대해서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창세기 38장은 자주 교제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일반 교파 교회에서는 잘 교제가 안 돼요. 하지만 저희는 이제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이런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저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뺄 것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창 38:1.)

"그 후에"라고 돼 있는데요. 그 후에는 그 앞에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고, 그 앞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37장이잖아요. 37장 20절을 한번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창 37:20).

요약을 하자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고요. 요셉에게 형들이 10명이 있었어요. 배다른 형들이 10명,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어요. 자기들이 좀 엉망진창인데 요셉이 그거를 별로 안 좋아해서 이제 아버지한테 이르고 그래서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이 동생이 미우니까 어떡하는지를 지금 얘기하는 거고요. 요셉이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형들이 어떻게 지내나를 살피기 위해서 형들에게 이렇게 다가갈 때 형들이 그 동생을 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자, 그를 죽이자." 아무리 배다른 형제지만 죽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거를 얘기해야 되나 말할 정도로 되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에요. 자기 동생인데 서슴없이 죽이자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생의 수준인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바른 말했다고 죽여야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왜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자기 동생이 옳으니까, 그리고 자기가 잘못됐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해서도 "가인과 같이 하지 마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사람의 살인 동기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어둡고 상대방은 의로울 때 그때 상대방을 죽이고자 하는 그런 악한 행습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10명의 형들이 자기 동생이 의롭고 자기들은 어둡기 때문에 그 의로움을 인하여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수준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속으로 아마 그러실 거예요.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주 그냥 저열한 수준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하는 자다. 성경이 말합니다. 모든 살인자들의 그 살인의 시작은 전부 미움에서 시작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 미움이 깊어질수록 살인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성경에서는 또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 거룩히 계시고 인생들은 이렇게 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20절에, "자," 자가 뭐예요? "자"는 나쁜 거 같이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자기 혼자 할 때는 자라고 말 안 해요. 그런데 나쁜 것을 같이 하려고 할 때 "자" 하고서 도모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같이 하면 굉장히 더 용감해지고 더 악한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왕따 문제가 요즘에도 심각하죠. 왕따 어떻게 합니까? 혼자 미워할 때는 그냥 별거 아닌 그냥 다툼이 되지만 어떤 사람이 미워서 같이 미워하기 시작하면 진짜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 아이를 죽는 데까지 몰아가는 것입니다. 또 예전에 유럽에서도 세계대전 때 나치라는 독일의 그 당이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은 혼자 있을 때는 괜찮았었는데 그렇게 군중으로 몰려가다 보니까 어마어마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쁜 짓인지 알면서도, 몰라서, 상관없이, 그렇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을 또 들어보십시오. 20절에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이렇게 얘기하죠. 아주 머리도 팡팡 돌아가요. 이렇게 나쁜 짓 할 때는 머리가 팡팡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핑계 댈 때 어떻게 핑계 대냐면, 아버지가 분명히 찾을 테니까 그러면 아버지한테 짐승한테 잡아먹겠다고 하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짐승입니까? 자기들이 짐승이에요. 자기들이 악한 짐승입니다. 자기가 자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악한 짐승이 잡아먹고 있는 것, 자기들도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는 "몰라서 그랬어요." 이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됐을 때 자기 혀가 자기 죄를 자복할 것입니다. 그때쯤은 알게 되겠죠. 자기가 얼마나 악한 행동을 해 왔었는지,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양심을 끌어올리고 끌어올려서 하나님 앞에 자백하지 않으면 나중에 진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스스로 자백하게 될 겁니다. "제가 정말 죄인이었군요." 그것을 저는 지금 지금 하시라고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인생이 너무 길어서 하나님 앞에 돌이키기가 민망한 그런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기회가 왔을 때 잡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하는 말 보십시오. 20절의 마지막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꿈이라는 거는 요셉이 꿈을 꾼 적 있어요. 꿈을 꿨는데 해와 달과 열 별이 자기에게 이렇게 절하는 꿈을 꿨어요. 그러니까 얘들이 얘기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셨다고? 그러면 좋아, 내가 하나님을 한번 대적해 보겠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정하셨다고 했? 그럼 네가 죽어도 그렇게 되는지 보자." 이렇게 인생에 악함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대해서, "그래요? 그러면 한번 이렇게 해도 그렇게 하시는지 볼까요?" 라고 하나님과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싸우려고 할까요? 자기가 왕이라서 그래요. 자기가 왕이니까 하나님이 왕이라고 하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하고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식을 양육했지만 거역하는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하고 싸우려고 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라고,
그리고 27절을 보시면 이제 또 그들이 하는 말이 나와요. 27절에는 누가 하는 말이냐면 오늘의 주인공 유다가 하는 말입니다.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창 37:27).

유다가 뭐라고 그래요? 이제 동생을 구덩이에 일단 넣었어요. 요셉을 구덩이에 넣어놓고 이제 죽이려고 했더니 유다가 "야, 죽이는 것까지는 좀 그렇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게 뭘까요? 유다가 자기 동생을 살려주려고 하는가? 그게 아니라 유다가 뭐라고 그래요?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기껏 내린 결론이 살려주자가 아니라 팔자입니다. 이게 유다의 수준인 것입니다. "야, 동생 죽이면 뭐가 유익하냐? 그러니까 팔자." 이게 무슨 코미디인지 모르겠어요. 동생을 죽이면 뭐 하냐? 팔면 돈이 되잖아. 이렇게 자기가 동생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지금 죄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입니다. 동생을 죽이는 건 좀 그러니까 노예로 팔자,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말이 좀 웃기지 않습니까? 27절에 그 뒤에 붙이는 말이 "그는 우리 동생이요. 우리 골육이다." 동생을 팔자고 하면서 "야, 동생을 죽이면 어떡하냐? 팔자. 동생이잖아." 너무 웃기잖아요. 동생은 팔아도 되나요? 동생이 팔면 안 되지. 자기 동생을 왜 팔아요? 저기 아기들한테 물어봐요. 이게 말이 되냐고, 동생을 죽이는 건 좀 그러니까 팔아버리자. 이 주인공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유다입니다. 유다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알겠죠?

다시 이제 38절로 돌아가서 유다가 그 요셉을 팔고 나서의 삶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셉으로 상징되는 우리 예수님을 부인한 인생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두운 모습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1절에 보시면 "형제에게서 내려가서"라고 합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이제 형제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타락하게 될 때 첫 번째로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형제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세상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2절에 보면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취하여 동침하니"라고 돼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이방인이죠. 그리고 지금 유다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족보에 들어가는 사람이라서, 이 사람이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면 안 돼요.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로 이방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가나안 사람은 절대 안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이렇게 저주를 한 적이 있어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 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가나안은 노아가 저주한 그런 족속으로서 결혼을 절대 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기 시작하니까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아들을 낳았어요. "그 이름을 엘이라 했고" 3절에 그리고 "또 아들을 낳아서 오난"이라고 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 38:7).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셨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때로는 슬픈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해요.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사람은 멈춰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주변에 많은 일을 겪었을 때 아무 일 없이 행복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안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슬픈 일이 생겼을 때, 혹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을 때, 혹은 인생이 아주 망해버렸을 때, 그럴 때 사람들은 드디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전까지는 하나님이 뭐냐고 살던 사람도 힘든 일이 생기고 슬픈 일이 생기고 그럴 때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보통 저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이게 좋은 거예요. 그럴 때 목을 곧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슬픈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준비를 하셔야 되는 거죠.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치시는데도 무시한다면 더 큰 슬픈 일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계기가 됐든 하나님께로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걸 떠나지 말기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말씀을 더 읽기를 이렇게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이제 동생한테 네 형을 위해서 아이를 또 낳아줘야겠다. 예전에 그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형의 씨를 잊기 위해서 동생이 그 자녀를 낳아주는 그런 풍습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 동생도 형 재산이 욕심이 났는지 9절에 보면은 형한테 아들을 얻게 안 하려고 아들을 낳지 않게 합니다. 그랬더니 또 10절에 그것도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죽입니다. 자기 자녀 자식 둘이 죽었어요. 유다는 이때쯤이면 이제 알아야 돼요. 내가 뭐 잘못하고 있구나 알아야 돼요. 불행의 연속으로 닥치면 이제 깨달아야 돼요.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지 않죠 11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창 38:11).

유다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다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며느리 다말이라고 생각해서 "야, 너가 문제니까 너한테 보내는 아들마다 어떻게 된 게 다 죽는다. 그러니까 너 잠깐 아버지 집에 가 있어라. 내가 아들 하나 더 셀라가 있는데 장성하면 너한테 보내줄게."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뭐라고 그래요? 저주받은 저주받은 며느리가 내 집에 들어왔구나, 하죠.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 안 해요. 자기 잘못인데 지금, 우리는 알잖아요. 유다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는데 '저주받은 며느리가 우리 집 안에 들어왔구나~' 하고서 "네 집에 가 있어라." 이렇게 합니다. 뭐가 웃긴가요? 저주받은 며느리가 혹시 있나요? 이 유다가 이제 겨우 막았다. 아들 둘 해서 막았다. 그러고서 양털도 깎고 해서 흘러갔어요.

세월이 흘러서 14절에 보면 이제 셀라가 다 자랐습니다. 셀라가 다 자라서 다말은 아버님이 셋째 아들을 자기에게 남편으로 줘서 그 형들의 계보를 있게 하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말도 대단해요. 하나님 없는 인생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진짜 대단해요. 할 말이 없어요. 과부가 된 그 다말이 뭘 하냐? 이제 시아버지를 유혹해야겠다. 이것은 이제 우리 실화 탐사대, 이런 드라마에서도 다루지 않는 내용이에요. 너무 말도 안 되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이래요. 이게 사람입니다.
유다도 보세요. 다말이 우리 시아버지를 유혹해 버려야겠다, 해서 창녀인 척하고서 성문에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유다가 뭐라고 그래요?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창 38:15-16).

유다의 평소 행실이 이렇습니다. 창녀가 있네, 그러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우 창녀야 하고서 피해 가야 되잖아요. 그러면 창녀가 있네. "저랑 거래를 합시다." 하고 다가가는 거예요. 평소에 이랬다는 거예요. 창녀가 있으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갈 사람이 창녀가 있군요 하면, 나는 그럴 것 같아. 예수님의 계보가 될 인물이라면 거룩한 인물이고 이래서 악을 멀리하고 그래야 되잖아요. 그런데 "창녀가 있네, 거래를 하실까요?" 이 유다의 평소 행실이 이방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 따르면 창녀와 간음을 행하면 둘 다 죽어야 됩니다. 창녀도 죽고 간음을 행한 사람도 죽어야 됩니다. 유다가 그런 중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은 유다가 또 얘기를 합니다.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창 38:18).

아주 뭐라고 해요? 18절에 창녀가 이제 다말이죠. 다말이 "약조물을 주셔야겠는데요. 염소 새끼를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셔서 주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무슨 약조물을 줄까?" 그러니까 "당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십시오." 이 정도 되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완전 망신 당하겠는 걸, 해서 멈춰야 돼요. 자기 공인인증서 아니에요? 자기 공인인증서를 주는 거예요. 죄인 인증서가 되는 것이죠. 이거 나중에 죄인 인증서 돼요. 진짜 인증서가 돼요. 이거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잠깐만, 이건 좀 그런데." 하고서 하고서 멈춰야 돼요. 여기서 그런데 범죄에 몸이 다른 유다는 이제 그 열정으로, 범죄를 향한 열정으로 자기 공인인증서를 다말에게 맡겨버립니다. 판단이 흐려져 버린 거예요. 그리고 다말은 성공을 했어요.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습니다.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

그리고 석달쯤 후에 이제 유다에게 소식이 전해집니다.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 그랬더니 유다가 뭐라고 합니까? 너무너무 무심하게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남에게 이렇게 잔인한 것입니다. "아, 잘 됐다. 저주받은 며느리. 드디어 그 저주가 여기서 끝나는구나. 가서 불 사르라." 불에 태워 죽이라고, 제가 만약에 이런 유다와 같은 삶을 살게 되면 저희 아버지께서 저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죽여야죠. 맞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좋네요. 이런 거 죽어야 돼요. 호적에서 파야 돼, 이거는 박 씨 집안에 이런 호로 자식은 나와서는 절대 안 되는, 인간적으로도 진짜 사람 같지도 않고 그렇죠. 이런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려야지. 이런 이런 놈은 없다. 우리 집안에,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아득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이었으면요. 폐기 처분이에요. 아버지 하신 말씀처럼 유다는 희망이 없다. 내가 메시아의 족보로 이 사람을 선택했지만 완전히 실패해 버렸다. 나는 이걸 깨끗이 정리하고 새로운 요셉의 씨로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유다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신약 성경은 우리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족보는 얼마나 거룩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굉장히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 3절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 1:3).

제가 앞선 얘기를 안 해줬다면 그냥 이 족보를 읽을 때 그런가 보다 했을 거예요. 유다가 어련히 거룩한 사람과 결혼해서 거룩한 자녀를 낳았겠지 했는데, 저희가 앞선 얘기를 듣고 나서 보면 정말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여기 1장 1절이 뭐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세계라는 족보라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다라고 시작을 해요. 제가 만약에 마태복음의 저자라면, 용수복음의 저자라면 제가 뭐라고 적겠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다 그러면, 좋은 얘기만 예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좋은 얘기만,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에게서 족보가 이어져 와서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태어났습니다. 해야지 믿겠죠? 그래야 믿잖아요. 사람들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극 초반 3절부터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라고 합니다. 유다가 다말과 행음하여 난 그 어떻게 보면 개족보, 우리 인생들이 말하는 개족보입니다. 며느리와 행음하여 자녀를 낳았어요. 그 계족보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그리고 유다가 죽일 정도로 미워했던 그 요셉처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께서 죄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대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악한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요셉을 팔았어요. 은 30에 팔았어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 의해서 은 30에 팔리십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어두운 유다의 그 암흑기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암흑 속에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아주 거리낌 없이 불살라 죽이라 했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번제물로서 그 단에서 불살라지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계시록에서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 '유대 지파의 사자', 자기 스스로를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 부르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하고 그 하나님의 애를 훼방을 놓을지라도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그 악함이 하나님의 거룩을 덮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그 무기력함, 무악함, 무익함,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다행인 것입니다. 왜 다행이냐? 마태복음 9장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시죠. 정말 다행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유일한 조건이 죄인인 거죠. 만약에 의인이었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저 같은 사람도, 유다 같은 사람도, 여기 박성권 부친 같은 분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원래 유다의 이름 뜻은 '찬송'이라는 뜻이에요. 우리 말로 하면 찬양이 정도 돼요. 이제 유다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자기 이름처럼 찬양할 뿐인 것입니다. 자기는 범죄만 저질렀어요. 그것도 호적에서 파일 정도로 아주 극악, 흉악 무도한 그런 범죄만 저질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시고 자기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걸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삶을 살아오신 분들께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치 마시고,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권해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