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교회 2 : 지역모임, 질서, 관계, 목자

박이레 2025. 12. 19. 16:21

< 교회 2 : 지역모임, 질서, 관계, 목자 > 한봉래 형제님

지난 시간에는 제가 마태복음 16장을 통해서 몸인 교회에 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마태복음 18장을 통해서 지역 모임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1시간 약간 넘을 수 있겠습니다. 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마태복음 18장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1-22).

네, 여기까지. 여기 이 '교회'라고 하는 단어가 가장 먼저 쓰인 곳이 마태복음 16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 쓰인 곳이 마태복음 18장입니다. "교회에 말하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예를 들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 사도들의 경우는 교회 개념이 없습니다. 아직 교회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죠.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래서 이건 이제 지역 모임인데, 이 지역 모임 가운데는 이제 연약이 있는 거죠. 연약이 있고, 이제 죄가 있고, 그다음에 그걸 이제 지역 모임이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하는 게 나오는 이런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 18장에서 두 개의 질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설명들이 쭉 나오는데요. 두 개의 질문은 첫 번째 1절에 있는 대로 '누가 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몇 번 용서할까요?'라고 하는 이 두 개의 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지역 모임과 관련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생각해야 되는 거죠. 지역 모임에서 누가 큰 사람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역 모임에서 몇 번 용서해 줄까요? 라고 하는 것이 이제 지역 모임과 관련돼서 이제 주로 다루고 있는 두 주제입니다. 이제 이걸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한 절, 한 절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 조금 앞으로 가셔서 몇 가지 말씀들을 더 읽고 문맥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12장을 보시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마 12:14-15).

그래서 이제 배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님은 아시죠. 그리고 그들이 여기까지 결정했을 때,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을 때 주님께서 떠나가십니다. 그래서 이 '떠나다'라고 하는 게 이제 물리적으로 떠났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떠난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그들 바리새인은 영적으로도 분리됩니다. 그게 이제 12장에서 나오는 거고요. 12장에서 여러 가지가 나오죠. 그중에 하나가 죽이기로 하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 사단의 능력을 빌어서 한 것이다. 발알세불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렇게 나오죠. 성령 훼방죄가 뭐냐 그러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단의 능력이다, 이렇게 말한 거죠. 성령을 훼방한 죄입니다. 이건 용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마태복음 12장에서 이야기 된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13장은,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천국은 어떻게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것이 13장에서 나오고요.
다시 보겠습니다. 12장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셨는데, 12장이 이제 예루살렘과 가버나움, 이쪽에서 일어난 거고요. 그다음에 쭉 떠나서 마태복음 16장을 보시겠습니다. 그다음 16장 13절, 장소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거기를 떠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왔는데요.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입니다. 북쪽 국경지대입니다. 이스라엘을 저희들이 지도를 이렇게 놓고 보면 이렇게 되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은 맨 북쪽이 단이고, 이스라엘은 맨 남쪽이 브엘세바입니다. 우리로 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렇게 했을 때 단에서 브엘세바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가 단입니다. 이스라엘 국경 맨 북쪽입니다. 여기가 이방인 지역과 닿아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떤 느낌을 주냐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혹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님이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가 계시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누구냐가 계시됩니다. "사람들이 날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하죠. 그랬을 때 주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해 주셨다." 그래서 첫 번째 예수님이 누군지가 계시되고요. 그다음 두 번째 이제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것이 교회를 계시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단어가 최초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개시되고 교회가 계시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계시되는 곳은 16절, 17절에 나와 있죠. 그다음에 이 교회를 계시한 것은 18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시되는 것이 십자가가 계시됩니다. 예수님, 교회,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21절에 나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그래서 이제 세 번째 계시되는 게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십자가는 세 번 언급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언급되고요. 그다음에 17장에서 언급됩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 17:22-23).

십자가가 두 번째로 언급됩니다. 이 17장, 이 부분은 18장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과 관련돼서 십자가가 두 번째로 언급됩니다. 십자가는 첫 번째 몸인 교회와 관련돼서 언급됐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세우리니" 몸인 교회죠. 그다음에 두 번째 십자가는 117장에서 언급되지만, 18장에 있는 지역 모임과 관련돼서 또 언급됩니다. 이게 이제 두 번째 언급인 거고요. 그다음에 십자가가 세 번째 언급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그래서 세 번째로 언급되는 곳이 20장인데, 20장은 문맥이 어떻게 돼 있냐면 예루살렘에 가시면서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실제로 지시기 위해서 가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대가'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되고, 그다음에 교회가 계시되고, 그다음에 십자가가 계시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님께서는 희생 없이 세우지 않겠답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위에, 그 죽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합니다. 섬김이 필요합니다. 지역교회는 그냥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거기 십자가가 필요하다, 이게 하신 말씀이고요.

여기까지 이제 배경을 놓고 다시 한 번 제 18장을 이제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18장인데 우선 17장 24절부터 읽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4-27).
그리고 18장 1절이 "그 때에"입니다. 가버나움은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그 장소를 이렇게 주목해 보면 아까는 '가이샤라 빌립보'였고 그다음에 18장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죠. 나사렛에서 자라나십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을 찾아보면 가보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본 동네, 그러니까 고향 같은, 사역에 관한한 여기를 가장 중심지로 놓고, 가버나움을 중심지로 놓고 주님께서 여기저기 방문하시고 이렇게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서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그 동네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물어봤습니다. "반 세겔 성전세 내야 되는데, 예수님 내시겠냐?" 물어봤습니다.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내시지."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집 안에 계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밖에서 무슨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 아십니다. 베드로한테 물어봅니다. "베드로야, 세금을 누구한테 받냐? 아들한테 받냐, 타인에게 받냐?" 그러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죠. "그거야 타인에게 받죠. 아들은 안 받죠." 그러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네가 낸다, 대답 잘못한 거다." 예수님은 성전세 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집'이라고 돼 있죠. 우리나라 성경에는 이게 전부 성전으로 번역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킹제임스를 전부 살펴보시면 전부 '하우스 오브 갓'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 이렇게 돼 있지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어가죠. 이게 건물이니까, 건물이라고 하는 건 가만히 놔두면 문제가 됩니다. 이게 색깔도 변하고, 그다음에 뭐가 좀 허물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유지 보수비가 필요합니다. 그걸 이제 받는 거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집을 유지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돈을 받느냐? 안 받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랬어요. 그래놓고 17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세를 내면 안 되는 거죠.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해 놓고, 성전세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 주님은 세를 내지 않는다."라고 대답을 못하고, 그러니까 지식만 있었죠. 지식만 있고 실제 문제에 있어서 알고 있는 지식을 적용하지 못한 거죠. 그런 면이 있고요.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실족하지 않도록 네가 낚시를 해서 한 세겔이 나오면 내자." 이렇게 '실족한다'라고 한 단어가 18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누구를 실족케 하면",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면", 이게 전부 같은 단어들입니다. 실족하다, 죄를 범하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돈을 내자, 이렇게 된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18장하고 연결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로 갔냐면 이스라엘을 거의 끝까지 가신 거예요. 경계선, 국경 끝으로 가셔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17장 가버나움, 예수님의 본 동네, 예수님이 늘 일하셨던 그 동네에서 예수님이 배척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베드로한테 "베드로야 나는 타인이다." 아들에게 받냐, 타인에게 받냐?" 이게 '타인'인데요. 이게 영어로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스트레인저입니다. 낯선 사람, 이방인,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절하기로, 이제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은 배척당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아닙니다. 예수님이 배척된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17장에서 예수님은 배척됩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교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제할 수 없는, 쫓겨난, 출교된 상태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쫓겨났다. 나는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 동료 시민이 아니다. 그리고 나랑 교제하는 너희들도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제 이게 17장 배경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 공동체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 국가에서, 이 민족에게서 배척되어 있습니다. 이제 배척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교제권을 만듭니다. 배척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과 교제하지 않고 배척된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지역 모임입니다. 지역 모임은 뭐냐?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세상에서 배척된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지역 모임이다, 입니다.
그래서 잠깐만 한 가지 적용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뭐, 약간 논란은 있는데요. 그래서 지역 모임은 세상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지역 모임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운 자들'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한 교제권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정치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제 서양 가스펠홀을 보면 투표하지 않습니다. 약간 논란이 있는데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전부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몰라도, 하여간 저희들이 세상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게 세상에서 쫓겨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지역 모임이다, 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 모임에서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누가 높으냐?' 하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의 '질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지역 모임은 '용서'가 필요합니다. 여기 '소자'라고 돼 있고, '형제'라고 돼 있고, 그런데 형제라고 하는 표현을 보면 이게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입니다.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여기서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은 서로 용서해 줘야 합니다. 이게 지역 모임의 큰 두 축입니다. 지역 모임의 질서, 지역 모임의 용서, 이 두 개가 실행되는 곳이 지역 교회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8장 1절, 제자들이 이제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 갈 거다. 지역교회라고 하는, 이렇게 됐을 때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럼 우리들 가운데는 누가 제일 큰가요?"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린아이 한 명을 세워놓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첫 번째입니다. 이제 여기는 천국으로 돼 있지만, 지역 교회로 바꿔서 이해하겠습니다. 천국은 지역교회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하여간 이 지역 모임에 들어오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모임에 못 들어옵니다.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건 뭐 하고 연결시키냐면, 요한복음 3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게 육체적으로 태어났지만 영적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 영적으로 태어남, 어떻게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이제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러면 이제 이렇게 전부 주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함께 이렇게 모이고 있는 이 지역 모임에서 누가 제일 크냐?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4절, "자기를 낮추는 자가 가장 큰 자니라"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크냐?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게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크냐? 어른이 크죠. 어린아이는 "너, 조그마한 게 가만히 있어. 이렇게 되죠. 그런데 세상과 다릅니다. 이스라엘과 다른 것입니다. 지역 모임에서는 누가 가장 크냐?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그런 표현이 있죠. 2장 1절에 보면 주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 영광을 떠나 자기를 비우시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부끄러운 죽음을 죽기까지" 이렇게 돼 있죠. 그리고 그 이야기하고 사도 바울께서 "너희들도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마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된다." 내가 내가 낫다, 내가 옳다라고 하는 사람이 지역 모임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높이는 사람이 지역 모임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게 지역 모임에서 주어진 '새로운 질서'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입니다. 이게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기서 이제 '어린 아이'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어린 아이, 거듭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 용서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어린아이인데, 어린아이의 특징을 어린아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만 보겠습니다. 이게 이제 마태복음 18장에 계속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지역 모임에서 생활할 때 이 세 가지 특징이 잘 나타나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사람이냐? 첫 번째 자기가 제일 낮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있을 때 어린아이 보면 '아, 내가 제일 어리지. 내가 제일 낮은 사람이지. 나보다 더 훌륭하지. 딴 사람들이 키도 크고, 오래 살았고, 더 많이 알고,' 그래서 자기를 낮춥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춥니다. 어린아이가 잘난 척하는 거 보셨습니까? 여기서도 저기 자고 있습니다마는 의석 형제 아들 딸들, 제일 어리지요. 얘들이 잘난 척 안 합니다. 자기 주장 안 합니다. 이걸 잘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지역 모임 안에서 이런 어린아이가 돼야 합니다. 서윤이, 성윤이,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얘들의 특징을 보면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이제 첫 번째 특징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이들은 잘 배웁니다.' 어린아이는 잘 배웁니다. 가르쳐주면, "이거 이렇게 된 거야. 이건 이렇게 한 거지." 가르쳐주면 잘 배웁니다. 안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알거든요.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아는 지식과 이렇게 부딪히면 안 받아들이죠.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누가 뭘 가르쳐주면 잘 배웁니다. "그래요." 잘 배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잘난 척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장 낮은 자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두 번째 가르쳐주면 잘 배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제 애들이다 보니까 싸우죠. 싸우고, 삐지고, 울고 하죠. 그런데 특징이 뭐냐 하면 잘 용서합니다. 잊어 먹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예를 들면 서윤이 성윤이가 좀 싸웠어요. 그리고 이제 엄마한테 혼도 나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 이제 한참 울고, 그다음에 5분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놉니다. 이 어린아이 같은 특징을 성도들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 모임이 주님이 원하시는 지역 모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해야니다. 내가 제일 낮은 사람이다. 내가 뭘 아냐? 내가 가장 뭘 모르는 사람이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가르치면 잘 배워야지.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면 잘 따라야지. 그다음에 세 번째, 조금 이렇게 문제가 있어서도 금방 용서합니다. 이게 어린아이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구체적으로 그 특징들을 보겠습니다. 이제 다 같은 어린아이니까 지역 모임에서 제일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은 뭐냐 그러면, 어린아이들끼리 모여 있는 이 지역 모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관계를 다치지 말아야 합니다. 관계를, 이제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우리는 다 거듭난 형제 자매들입니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아까 세상에서 배척 당했어요. 다 배척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또 배척하면 안 됩니다. 이제 이 배척당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일들이 지역 모임 안에 가장 중요한 일로 주님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하면 안 되냐 그러면, 6절에 보면 실족케 하면 안 됩니다. 어떤 형제가 이제 어린아이처럼 있는 거죠. 그런데 그 형제를 실족케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연자 맺돌을 메고 바다에 던지는 게 낫다. 실족케 하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악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7절,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한다. 세상은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족케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게 말이 되냐?" 이게 다 믿음을 흔드는 거죠. 세상은 그렇게 하죠. 그리고 그에 대해서 "화가 있도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를 들면 제사 안 지낸다, 또 모임의 주일 날은 꼭 가야 된다. 뭐 이러면 세상에서 이제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왜냐고 비난하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상의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이게 이제 6절 7절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경우는, 이 세상은 그렇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성도가 성도를 실족케 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이제 지역모임, 교회 진리가 뭐냐?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게 다른 성도를 실족케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반드시 징계해야 한답니다. 그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어떤 형제를 연약한 형제고, 갓 구원받은 형제고, 또 혹은 아직은 세상적인 때가 잘 안 벗겨진 형제일 수 있죠. 그래서 뭐 마땅히 그런 말을 들어도 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제를 실족케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 물으신다. 이게 지역모입니다. 그래서 이제 8절에 보면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이거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네" 그랬으니까, 이것은 형제에게 한 말입니다. 이건 세상이 아니고 성도에게 한 말입니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실족해 하려거든 차라리 손발을 찍어내버리는 것이 낫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잠깐 적용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른 성도를 실족케 하는, 전부 자기를 이렇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 보지 말고요. 다른 형제를 실종케 할 만한 것이 나한테 뭐가 있냐 그러면, 이제 일반적으로 말씀드리면 첫 번째 말입니다. 말이 빠른 사람, 어떤 사람이 잘못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잘못을 보고 못 참는 거예요. 자기 성격이, 그래서 지적을 해요. 이걸 고쳐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연약과 잘못에 대해서 바로 말하고, 금방 말해버리는 성격이 있다면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세상에서는 뭐 그래도 그럴 수도 있고 다 용납이 되지만,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와서는 어떤 성도의 연약을 보고 그것을 바로 말하거나, 그것을 바로 지적하려고 하는 이 성향을 주님이 고쳐주십시오. 이걸 저에게 바꿔 주십시오. 저로 인해서 어떤 성도도 실종하지 않도록,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혹은 이제 두 번째는, 말이 그럴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이제 저희들이 다 이제 그런 데가 있죠. 시기심, 질투, 이런 게 있는 거죠. 제가 그런 경험도 했는데요.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제 주일 학교에서 암송대회하고 막 이런 거 할 때, 1, 2등 자꾸 하지 말고, 박용수 형제님한테도 맨날 그렇게 부탁했는데 꼭 안 하거든요. 1, 2등 하지 말고, 상도 1등한테 좋은 상 주지 마라. 그건 세상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 교회는 세상하고 다르다. 그래도 꼭 1등한테 좋은 상 줘가지고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똑같은 동창이에요. 그런데 같이 구원을 받았어요. 똑같이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있어요. 그런데 이 자녀들이 이제 주일학교 암송 시간에 암송을 했어요. 그런데 저 집 아들이 암 등 암송 1등하고, 자기 집 아들은 암송 잘 못한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비교 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자매님이 우는 걸 봤어요. 자기 아들이 주일학교 암송에서 상을 못 받으니까 여기서는 아니고 혼자 저쪽에 가서 울고 있더라고요. 이게 주님이 매우 매우 조심해라라고 하는 일입니다. 누구를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관계는 세상에서 배척되어서, 이제 우리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해주고, 하는 관계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뭔가 이와 같은 것과 반대 방향으로 되는 일이 없도록, 내 성격이나, 내 말이나, 내 행동이나를 조심해야 된다. 이게 지금 강력한 말입니다. "손을 찍어버리라." 이게 이제 사실은 성도한테 하는 말이거든요. 이게 믿지 않는 사람한테 한 말인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지금 구원받은 성도들의 지역 모임 안에서 주님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손을 찢고 눈을 빼버려서라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저희들이 이제 무겁게 받아들이길 바라고요. 그다음에 이제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소자" 이 어린 성도를 함부로 업신여기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돌보고 계십니다. 그가 상처받고 있을 때 그 성도를 돌보는 천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성도지만, 연약한 성도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천사를 통해서 또 누가 보고 계세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다음에 두 번째 주님께서 목자로서 이 성도를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약한 성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나님이 돌보고 계시며, 그와 같이 변화되도록 지역 모임 안에 넣어놓은 겁니다. 그런데 지역 모임 안에서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그가 그런 연약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로 인해서 마음을 어렵게 만들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안 된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 18장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앞에 부분은 6절부터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성도를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 케이스는 15절입니다. '어떤 형제가 나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그럴 때 어떻게 할 거냐?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런데 이 부분은 어떤 킹 제임스에 의하면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이 죄를 범한다라고 하는 것이 전부 실족케 한다고와 같은 겁니다. 마음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이것을 반드시 이렇게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희들이 영적이 되지 않으면 굉장히 처리하기 어려운 건데요. 상처를 받으면 이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그 형제가 나한테 세상에 이렇게 했어." 이렇게 할 일이 아니고, 쉽지 않은데요. 그 사람하고만 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내 편을 만들지 말고 그 사람하고, 그 사람과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으면 그 사람하고만 말해야 합니다. 이게 이제 저희들이 참 쉽게 잘 못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말씀을 순종해서 지역 모임 가운데 이 같은 실행이 있기를 원합니다. 상대 해서 말을, "권고하라"는데요. 권고하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성경을 들어서 그와 같은 행동이 실족케 하는 일임을, 성경을 들어서 입증하고 그리고 사과하고,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있지 않도록 합의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들으면, 이제 목적은 뭐냐 하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가능성이 있습니다. 16절 "듣지 않으면" 자 그러면 이제 두 번째입니다.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그다음 두 번째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고,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문제가 생겼으니까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들으면 된 거죠. 만약에 안 들으면 그다음입니다. "교회에 말하고" 교회에 말한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이렇게 이해하겠습니다. 교회의 인도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말한다고 그랬으니까 성도들이 다 인대에서 성도에게 말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교회의 질서를 돌보고 있는 장로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장로들이 보고, 두 세 증인의 증인도 있고, 그래서 장로들이 듣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러니까 세 번이죠. 이제 본인이 이야기하고, 두세 증인이 이야기하고, 세 번째 교회의 장로들이 말을 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출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가? 이방인처럼 여긴다고 하는 것은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임 안에 들어왔지만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리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예를 들면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거죠. 유대인, 이방인, 세리, 세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이고, 이방인은 구원받지 않은 겁니다. 형제 하는 거 보니까, 구원간증도 하고 모임에 들어왔지만, 사실은 구원 안 받은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세리는 이게 유대인이죠. 구원받은 사람이죠. 그런데 죄인이죠. 그래서 모임 안에 못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출교시킬 때 두 가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분명하다. 그래도, 이제 그런 사람도 있고, 이렇게 이제 그 사건의 성격이나 그다음에 교회적으로 처리할 때의 태도나 보니까, '이건 구원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구원 안 받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이 생기는 사람이 나오는 거죠.

출교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출교는 세 가지 경우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아니면 절대로 출교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고린도전서 5장입니다. 도덕적인 범죄를 했을 때입니다. 이제 우리로 치면 이제 음행했을 때죠. 그때 이제 출교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디모데전서 1장입니다. 교리적으로 잘못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다라든지, 또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부정한다든지, 이렇게 하면 그건 출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아주 중대한 문제잖아요.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 출교 케이스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어떤 경우죠? 형제 간의, 성도 간의 관계를 교회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복시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 사람 사이의 문제였어요. 그런데 이게 교회적인 문제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은 화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척되고 지역 모임 안에서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어렵게 하지 않도록 자기의 성격과 말을 고쳐나가고, 그리고 모임 안에서 가장 어린 자라 할지라도 천사가 돌보고 있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주님이 목자가 되셔서 구원한 작은 형제를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이르도록 지역모임 안에서 돌보고 있는 겁니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출교한다. 이 세 가지,
그다음에 이제 출교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이 부분은 지역 모임이 출교를 결정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정하신다라고 이제 해석될 수 있죠. 이제 우리나라 성경에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걸 많은 형제님들이 "그러면 지역교회가 독단적으로 막 해도 하나님이 다 승인하신단 말이냐?" 그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동사나 이런 걸 따져가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18절을 이렇게 해석하겠습니다. 지역 모임은 '하늘에서 결정된 것을 땅에서 집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교로 결정하신 것을,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5장, 디모데전서 1장, 그리고 여기,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 것을 했을 때 지역 모임이 출교하는 것입니다. 이건 잠깐만 하나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으로 가시겠습니다. 5장 2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5장은 음행을 했는데도 고린도 교회가 출교를 안 했습니다. 하지 않은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거 출교해야 된다."라고 하는 내용이죠.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해야 된다는 거죠. 그다음에 13절 보시죠.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 죄를 범해도 그건 교회가 개입할 일이 아니죠. "이 악한 사람은" 그런데 지역 모임 안에 있으면서 그와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아야 된다." 출교해야 된다, 이런 말이잖아요. 그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3절을 보겠습니다. 출교해라, 그러면서 그 근거를 이렇게 듭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 5:3).

이제 사도바울은 다른 데 있죠. 지금 고린도에 없죠. 그렇지만 이미 판단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은 출교에 해당한다 라고 이미 판단한 거죠. 이미 판단한 것을 지역 모임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하나님은 아닌데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고전 5:4-5).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영적인 사람이 이미 결정한 거죠. 이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교에 해당하는 거다. 그러니까 지역 모임이 출교해야 된다, 이렇게 한 거죠. 이게 이제 아까 이야기한 대로 하늘에서 결정된 것을, 지역 모임은 권한이 없습니다. 지역모임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냥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하늘에서 결정된 것을 땅에서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하늘에서 결정된 것을 지역 모임이 땅에서 집행했을 때 두 가지 결과가 옵니다. 첫 번째, 지역교회에서 출교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갔을 때 그 죄를 하나님이 묻지 않습니다. 지역교회에서 징계받으면 지역교회에서 징계 받는 게 훨씬 낫습니다. 지역 교회에서 징계 안 받고 숨겨놓고 있다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지역 모임에서 징계받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다시요, 지역 모임에서 징계 받으면 하나님이 다시 묻지 않는다. 이게 첫 번째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서 보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9).

지역 모임의 결정은 최종 법정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법원 결정입니다. 지역 모임이 결정하면 지역 모임보다 더 높은 법원은 없습니다. 이게 최종적입니다. 지역 모임에서 결정이 됐는데 "이거 억울하다." 그래서 어디 딴 데 갈 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역 모임의 결정은 주님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제 19절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에서 19절 20절에 있는 "두 세 명" 혹은 19절에 있는 "두 사람"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그런데요. 장로들입니다. 지역 모임의 책임 있는 일꾼들입니다. 지역 모임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성숙한 책임 있는 일꾼들 2명이 기도합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이 어떻게 돼 있습니까? 이게 그 경우에 해당합니?"까라고 구하면, 왜냐하면 이제 지역 모임에서 이런 일 처리할 때, 지역 모임이 제일 장로 일 할 때 제일 난처한 대목입니다. 교회에 죄가 있는 것도 굉장히 괴로운 일이고, 그다음에 그 죄가 출교에 해당했을 때 이걸 처리해야 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왜냐하면 특별히 이렇게 성도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지역 모임에서 계속 생활해 오다가 이게 있으니까 고통스러운 거죠.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마음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징계를 위해서 교회의 책임 있는 일꾼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겠답니다. 그대로, 응답해 주시겠다. 그리고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했을 때, 주님이 함께하신답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의 결정은 주님의 결정이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장로들에게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교회 앞에서 그 결정을 이제 알리고, 그와 같이 집행하고 했을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지역 모임 이후 결정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지역 모임의 결정보다 높은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역 교회를 어떤 관점에서, 지역 모임에서 생활하고, 지역 모임에 있는 조치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하는 것이 마태복음 18장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21절로 넘어가시면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용서하면 됩니까?" 베드로가 굉장히 뭐랄까, 인심을 쓴 거죠. 7번까지, 굉장히 용서한 거죠. 주님이 말씀하시죠. 490번 해라는 뜻이 아니고, 무한히 용서해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지역 모임은 성도들이 가까이 생활합니다. 서로 굉장히 가까이, 친밀하게, 감출 것도 있는데, 이게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까 여러 가지가 보이는 거죠.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곳이다. 서로 소중히 여기고, 실족하지 않으려고 자기를 변화시키고,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그렇게 해도 눈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잘못들이 있고, 이런 것들을 용서해야 된다.
용서에 대해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용서는 에베소서 4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서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랍니다. 어떻게 용서하는 거죠? 주님이 어떻게 용서하셨나요? '은혜'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연약할 때, 원수 되었을 때, 용서하신 것입니다. 단번에, 영원히, 주님의 용서하심처럼 용서해랍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건데요. 이 땅을 살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누가 하냐 그러면 하나님만이 합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용서하겠습니까? 그래서 용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는 행동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누가 복음 17장 4절입니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회개해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아까 말한 것과 좀 다르죠. 에베소서 4장은 우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왜죠?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옥 갈 죄를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성도가 나에게 한 죄는 언제든지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그가 회개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건 현실에서 일어날 때입니다. 실제로 일어날 때는 그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용서하면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용서에 대해서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든지 용서해야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해야 되고, 그다음에 실제로 용서하고 화목하고 하는 일이 일어날 때는 구체적인 행동들이 있어야 된다.
그다음에 하나 더 보겠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18장으로 오셔서요. 12절 보겠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이 비유는 누가 복음 15장에 나옵니다. 목자가 있었는데 양을 잃으니까, 한 마리를 소중히 여겨서 99마리 놔두고라도 찾아오는 거죠. 누가복음 15장에서는 그 목자는 주님이시고, 여기서도 목자는 주님이시죠.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다음에 99마리는 누구냐 그러면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하고 자기는 잃어버린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 배경이고요. 그다음에 여기는 양 100마리가, 잃어버린 양도 전부 성도입니다.  양 99마리는 실족하지 않은 성도입니다. 모임 지역 모임에서 평안하게 모임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다음에 한 명은 실족한 형제입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듯이, 주님께서 지역 모임 안에서 실족한 형제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목자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실제로 성도를 실족해 되지 않도록 자기를 연단하고, 변화시키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아이가 돼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배우고, 그러니까 배우고는 여기 뭐라고 돼 있냐면 "누가 죄를 범하거든" 찾아가서 권면하는 거죠. 말씀을 따라,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건 말씀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린아이는 어떻게 하는 거죠? 잘 배웁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면 자존심 생각 안 하고 잘 배웁니다. 그때 이제 자존심 생각이 나죠.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말해?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기분 나쁘네. 말은 맞아도.' 이렇게 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잘 배우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아이들 보면 그러잖아요. 아이들은 잘못하면, 그렇게 하면 안 돼. 아무 자존심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용서해라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용서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세 가지 특징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잘 배우고, 권면을 잘 듣고, 그리고 용서하고, 잊어먹고 용서하고, 이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와 같은 특징을 못 갖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18장 3절에 보시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때 형제님들이 동사들을 보고 이렇게 표현하시거든요. "돌이켜"가 뭐냐 그러면 '수동태'입니다. 자기가 돌이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자기가 돌이켜야 되죠. 그런데 성령님께서 마음을 감동하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이 아니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변화시킨 거죠. 그래서 정말 구원받았으면 이제 어린아이가 된 겁니다. 정말 구원받은 성도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특징을 지역 모임 안에서 잘 서로 나타내야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낫다. 그게 실제든지, 아니든지 간에,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면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나한테 어떻게 했던 것들을 잘 잊어먹는 것입니다. 그걸 뭐 쓴 뿌리가 되도록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도록 지역 모임 안에서 주님이 목자가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말씀으로, 삶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누가복음 15장 같은 목자인 거죠. 주님이 이 잃어버린 양 한 명, 마음을 어려워하는 한 명을 돌보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목자에 대해서는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리고 이제 주님이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임의 모임에 인도하시는 분들이 목자죠. 목자가 무슨 일을 하는가 했지만.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가시죠. 주님은 항상 목자를 인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그러고, 다윗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습니다. 세 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1절, 모세가 목자로서 했던 행동을 보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모세가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제 '모세'의 목자로서의 기능은 '양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이게 목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모임에서 장로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역 모임의 목자로서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다. 하나님께 간다. 하나님 앞에서 결정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인도하는 것이 모세의 기능입니다.
두 번째도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장, 다윗이 목자죠. 양들을 칠 때 어떻게 쳤냐면 참 특이하게 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삼상 17:34-35).

여기 보면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지킵니다. 목자는 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보호를 했냐면 사자하고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킵니다. 이게 목자입니다. 자기가 죽는다 해도 양은 살려내야 된다, 라고 하는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이렇게 표현하셨죠.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렇게까지 하셨죠. 그럼 다윗은 왜 양들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돌보고 보호할 수 있었냐? 이스라엘의 목자가 그렇게 했다고 하잖아요. 양들한테 이름을 붙여줘요. 양들한테 각각 이름을 붙여줘요. 그리고 이름을 부르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목자와 양 사이에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이건 내 양이다. 이름으로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친밀감 때문에, 서로 관계가 너무 좋기 때문에 상대방을 위해서 내 목숨을 거는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의 모습이고 모임에서 인도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이제 자기를 보게 하지 않고, 자기를 따르게 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말씀 앞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일이고, 두 번째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거는 게 목자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창세기 31장 보시죠. 야곱입니다. 창세기 31장 38절, 외삼촌 라반하고 논쟁을 하면서 야곱이 한 말입니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창 31:38-41).

여기 보시면 야곱은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이제 외삼촌 라반이 양떼를 맡겼거든요. 그런데 이 양떼가 처음에 맡길 때는 뭐 별로였는데 이 양떼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납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돌아가는 거죠. 그리고 이제 에서한테 다 뺏깁니다. 뇌물로 주고, 선물로 주고, 이렇게 했는데 하여간 자기 것은 안 되는데, 그래도 그 양떼가 건강하고, 어려움이 없고, 잘 크고, 수가 늘어나게 만듭니다. 이게 야곱 목자입니다. 어떻게 했나요? 그가 밤에도 자지 못하고, 낮에도 수고하고, 그래서 그가 헌신과 희생으로 양떼들을 건강하게 길러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3명의 목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걸 저희들이 지역 모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희생하셨고, 그리고 우리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모든 조치를 다 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의 인도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모임 인도자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고, 그다음에 인도자들이 항상 희생하고, 자기가 먼저 본을 보이고 희생하고, 그리고 모임 후 성도들이 건강하고 번성하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이 계시고 이런 목자들이 있을 때, 지역 모임 안에서 성도들이 자기를 겸손하게 하고, 잘 배우고, 그리고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역 모임이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지역 모임 안에서만 이와 같은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과 세상에서 배척당하신 후에 이제 지역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 지역 모임 안에서 이제부터 이와 같은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만약에 이 관계를 원치 않고, 이 관계를 파괴하고 하는 사람은 출교한답니다.

주님께서 계속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들이 속한 지역 모임 가운데 성도들 사이에 합당한 관계들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자신을 살피고 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희들이 헌신하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