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1 : 몸인 교회와 지역 모임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제가 사도행전 하는 걸 잠깐 멈추고, '교회 진리'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몸인 교회와 지역 모임의 차이, 저희들이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1-23).
그다음에 조금 더 뒤로 가 보겠습니다. 17장 지역 모임입니다. 17장 2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4-27).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20).
교회에 대해서 저희들이 성경에서 '교회가 뭔가'라고 하는 것을 이제 찾아보려면 저희들이 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교회라고 하는 단어의 뜻을 살펴봅니다. 여기 '교회'라고 하는 단어는 이제 이건 헬라어로 가야 되죠. 원어로 가면 '에클레시아'로 돼 있습니다. 이게 하도 유명한 단어니까, 에클레시아가 뜻이 뭐냐 그러면 이제 '불러낸 무리'라는 뜻입니다. 어딘가에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따로 불러내서 따로 구분시켜낸 무리다.' 이런 뜻입니다. 쉽게 이해하면 이런 뜻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죄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복음으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죠. 한 명, 한 명, 복음으로 죄 용서하고, 이렇게 거듭나게 해서 모아놓은 무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불러 모인 무리들이다. 이렇게 이제 단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단어가 그런 뜻이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 그다음에 그러면 교회라고 하는 단어가 성경에서 어디에 쓰였냐? 성경에서 나온 곳 특별히 '맨 처음에 나온 곳이 어디냐?' 이걸 이제 살펴봅니다. 그랬을 때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게 이제 예수님이 하신 교회에 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가서 "내 교회", 예수님의 교회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나온 곳이 어디냐 그러면 마태복음 18장입니다. "한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두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다음에 교회에게 말해라." 여기 두 번째로 나옵니다. "교회에게 말해라."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첫 번째 교회를, "내 교회를 세우겠다." 예수님이 친히 세우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단이 아무리 공격해도 그 공격이 소용없는 완벽한, 예수님이 직접 세우고 사단이 공격해도 전혀 무너지지 않는 교회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걸 저희들이 '몸인 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 '완벽한 교회'라고 할 수 있죠. 이 교회가 하나 있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보니까 18장은,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게 말해라." 그래서 이제 여기 모여 있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조금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말을 안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회는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문제가, 그래서 이제 마태복음 18장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걸 저희들이 '지역 모임', 이렇게 부릅니다. 아까 마태복음 16장의 교회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시고 사단이 공격할 수 없는 교회니까 이건 완벽한 교회입니다. 여기는 흠이 없습니다. 그런데 18장에는, 지역 모임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그랬을 때 이 성도들 사이의 갈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곳이 지역 모임 교회다. 이렇게 이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흔히 그렇게 말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만 성경적으로는 그렇게 말해서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무슨 교회가 이래?" 자기가 어느 교회에 속해 있는데, "교회가 세상에 사랑이 없다. 교회가 막 이래!" 했을 때는 지역 모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역 모임을 말하면서 몸인 교회의 완벽함을 들어다가 "교회 안에는 뭐가 없고, 뭐도 없고, 막 이래야 되는데 왜 지옥 모임에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주적인 교회는 문제가 없죠. 그런데 지역 모임은 항상 문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 가운데 있는 문제는 '왜 이런 문제가 있느냐?'라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원래 있게 돼 있습니다. 항상 그런 건데요.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느 지역 모임에 속해 있다가, 나 이제 교회 안 나와. 나 이제 갈래. 딴 데로 갈래. 다른 모임으로 가든지, 세상으로 가든지, 뭐 나 교회 안 나와. 왜냐하면 아니, 교회가 나를 대접하기를 나를 무시하고,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나 도저히 기분이 나빠서 나 이렇게 하는 교회 다닐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댔어도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마태복음 16장은 교회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머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 지역 모임은 예수님이, 나중에 여러 가지 걸 보면 '주님'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대접받고 있느냐가 교회의 주제가 아닙니다. 나중에 이렇게 18장을 보면 나는 어떻게 대접받아도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지역 모임 안에는 어린 아이가 돼야 합니다. 애들의 특징이 뭐냐 그러면 자존심이 없습니다. 어린이는 이제 아버지 부모님이 때려도 맞는 거고, 그런 거죠. 가르치면 잘 배우는 거고,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이 지역 모임에 대해서 하면서, 요즘 한국에서 이제 그 지역 모임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이제 나한테 세상에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교회 안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마는,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한다면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머리시고 주님이 주인이냐 하는 것이지, 내가 누구냐? 나에 대해서 어떠냐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게 이제 저희들이 이 교회 진리를 실행하면서 저희들이 적용하려고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하여간 교회가 뭐냐라고 하는 정의가 있고요. 그다음에 교회가 어디서 먼저 쓰였느냐 봤을 때 마태복음 16장에 쓰였는데 이건 완벽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되어서, 이때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고 '미래형'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안 세워집니다. 사도행전 2장 성령이 오시면서 세워집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주님이 공중에 오셔서 이제 모든 구원받은, 모든 시대에, 모든 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하늘로 끌어올릴 때, 이게 이제 몸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기 마태복음 18장이 "교회에게 말해라"라고 하는 것은 이제 교회에 '징계 집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을 읽었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냥 사소한 문제였어요. 어떤 사람을 상처 주는 문제였어요. 그런데 그게 어떤 걸로 연결이 되냐면, 교회 말을 안 들으면 이제 교회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 마태복음 18장은 징계를, 이제 출교시키는 건데요. "이방인처럼 여기라"라고 하는 것은, 그를 이 교회 바깥으로, 교제 밖으로,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도 구원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제 바깥으로 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교시키는 경우가 성경에 세 군데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도 출교되지 않습니다. 세 가지가 첫 번째, 고린도전서 5장에 있는 '도덕적인 범죄'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특별히 '음행' 같은 죄가 있죠. 이런 경우는 출교시킵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있는 대로 '교리적인 범죄'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든지, 뭐 이렇게 이제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면 출교를 시키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교회가 결정해서 어떤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걸 듣지 않으면 출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경우가 이 성경에서 말하는 출교의 죄, 출교시키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태복음 16장에 몸인 교회, 18장에 지역 모임, 그리고 교회가 또 쓰인 곳이 교회 아닌데, 우리가 생각할 때 교회가 아닌 데 쓰인 곳이 이제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사도행전 18장에 에베소에서 막 난리가 났을 때 그때 '민회'라고 하는 단어가 한 번 나오고요. 우리나라 말로는 민회라고 번역돼 있습니다마는 어 영어로는 '어셈블리'고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로 돼 있습니다. 그게 이제 한 번 쓰였고, 그다음에 이스라엘을 '광야교회' 할 때 한 번 쓰였습니다. 이런 약간의 예외가 있습니다만 이건 나중에 나중에 이해하기로 하고요. 하여간 성경에서 두 군데 지역 모임과 그다음에 몸인 교회, 두 군데의 교회라고 하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러면 우선 마태복음 1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6장에 보시면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세 가지 계시가,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계시가 주어집니다. 첫 번째 계시는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계시가 주어집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라고 하는 계시가 주어지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계시는 이제 예수님께서 '교회를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오고 그다음에 교회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게시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예수님이 누구냐? 그다음에 예수님이 세우려고 하는 교회가 나오고, 아마 이때 제자들은 이 교회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이 다만 이제 성령이 오시고, 특별히 사도 바울이 교회에 관한 비밀을 계시 받아서 이 서신서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에베소서' 이런 걸 쓰기 시작했을 때 알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냐'가 알려져야 되고, '교회가 무엇이냐'가 알려져야 되고, 그다음에 '십자가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예수님만 지는 게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이 져야 되는 십자가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제 이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 좀 집중적으로 보겠습니다.
첫 번째 보면 13절에 보시면 이제 예수님께서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어보시고 그다음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계시하는 거죠. 이 대목에서 하나, 우선 왜 하필이면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물어보셨는가라고 하는 의문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그러면 뜻이 뭐냐 하면, 이제 어느 지역 이름이 가이샤아라 빌립보입니다.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대로 '가이샤라', 그러면 로마 황제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의 애굽의 왕의 이름이 바로죠. 바로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바로가 우리로 치면 임금, 이런 단어죠. 그러듯이 로마 황제는 이제 시저죠. 저희들이 세계사에서 배운 걸로 보면 시저인데, 이 시저를 발음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가이사' 이렇게 돼 있죠.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왕 중에 '헤롯 빌립'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여기도 나중에 저희들이 마태복음 보면 이제 계보가 나오잖아요. 헤롯 그레이트, 헤롯 대왕이 나오고, 그다음에 또 뭐 헤롯 안디바가 나오고, 또 헤롯 아그리바가 나오고, 막 이러잖아요. 헤롯 가문들, 이스라엘에서 이제 왕 노릇을 했던 가문들 중에 '헤롯 빌립'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왕으로 책정해 준 게 로마 황제거든요. 그래서 이제 로마 황제를 위해서 왕이 되면 그렇게 하나 봐요. 도시를 하나 짓습니다. 시를 하나 짓는 거죠. 우리도 그렇게 하죠. 뭐 예를 들면 일산을 하나 지어버리고, 대전 근처에 뭐 신도시 하나 지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이름을 짓는 거죠. 그런데 지명을 쓰는데 그 당시에 왕들은 이제 어떤 도시를 하나 씁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도시다. 그래서 이름을 '가이샤라' 이렇게 붙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아시는 대로 가이샤라가 하나가 더 있습니다. 가이샤라가 저기 항구인데요. 항군데 가이샤라에 사도 바울이 2년간 갇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돼서 로마로 가기 전에 가이샤라에서 2년을 이렇게 갇혀, 가이샤라가 유명한 항구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시를 하나 지어서, 이건 로마 황제를 위한 도시입니다, 하고 가이샤라고 붙여놨는데 가이샤가 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헤롯 빌립이 잘 됐다. 내 이름도 하나 넣자, 구분하는 겸에, 그래갖고 자기 이름을 또 넣어요. 그래갖고 이 도시 이름이 가이샤라 빌립보입니다.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시저를 위하여 지은 도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이 물어보시죠. 그러면 이제 저희들은 영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빌립, 그러면 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로마가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이샤랴 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붙여져 있는 이 도시에서 주님이 물어봅니다. "나는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 왕이 아니고, 혹은 온 세상의 왕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왕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배경을 그렇게 놓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통치하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배경으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하필이면 물으셨다라고 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고요.
하나만 더 말씀드려 보면, 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저희들이 구약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 지도가 어떻게 돼 있냐면,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우리나라 우리나라는 이렇게 하잖아요. 이제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렇게 하죠. 그리고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일 북쪽이 단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제일 남쪽이 브엘세바입니다. 두 지명 이제 유명한 지명이니까 기억해 두시면 좋습니다. 이 가이샤라 빌립보가 구약으로 치면 단 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맨 북쪽입니다. 이스라엘의 맨 북쪽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냐면, 이스라엘의 중심은 남쪽 예루살렘입니다. 남쪽 예루살렘인데 지금 이 남쪽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종교적인 지도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그 사람들의 영향력에서 가장 먼 곳입니다. 단은 사실 구약 역사에서 보면, 단 지파 보면 뭐죠? 적그리스도가 거기서 나오지 않느냐라고 의심되는 지파고, 열두 지파 중에서 맨 먼저 우상을 도입한 지파고, 이게 굉장히 좀 이미지가 나쁜 지파죠. 그래서 남쪽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다시 말하면 이방적인, 그 이방과 섞여 있는, 이방과의 접촉이 지리적으로 활발하게 있는 지역에서 주님이 물어보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로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이방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이제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에서 주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랬을 때 대답을 보겠습니다. 14절, 하나는 "침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침례 요한이라고 한 사람은 아마 이런 근거를 가지고 침례 요한이라고 했을 거예요. 이제 나중에 보면 헤롯 안디바가 침례 요한을 죽이고, "침례 요한은 내가 죽였는데, 이거 도로 살아난 사람이 예수님 같다." 이렇게 미신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고요. 우선 여기서는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침례 요한과 같다라고 하는 것은 '메시지'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에서 보면 침례 요한이 뭐라고 말하냐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천국이 가까웠다." 이렇게 메시지를 하거든요. 그런데 주님도 동일한 메시지를 합니다. 6개월 후에, 주님이 오셔서 사람들에게 똑같은 메시지를 하십니다. "회개해야 된다. 천국이 가까웠다." 그래서 동일한 메시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침례이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한 거고요. 그런데 이제 침례 요한과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과 침례 요한의 차이, 성경에서 찾아보면 어떤 차이가 있냐 하면 침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그게 이제 차이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보시면 '엘리야'라고 합니다. 주님을 엘리야다라고 부른 이유는, 엘리야는 성경에 있는 선지자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을 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보통 이렇게 돼 있죠. 엘리야가 기도한 즉 하늘이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3년 반 동안 비도 안 내리고 이슬도 맺히지 않았습니다. 이게 엘리야죠. 그다음에 엘리아가 기도하니까, 그다음에 비가 다시 내렸습니다. 엘리야가 한 거죠. 그리고 갈멜산에서 어떤 신이 진짜 신인지 알아보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제물을 태우는 신을 진짜 신으로 하자. 그래서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기적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메시지는 침례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하셨는데, 주님은 어마어마한 기적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요한복음에 보면 이렇게까지 말을 하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 할지라도, 이분은 그리스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진짜 그리스도가 오셨다 할지라도 이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하겠느냐?" 이게 당시 사람들의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라고 했던 사람은 그렇게 했었고요. 아마 그런 이유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다음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이제 성도님들이 아시는 대로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갈 것을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선지자지만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해야 했던,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소망이 없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질 것이다. 이걸 예언해야 했던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고 사역을 하면서 늘 울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 한 사람은 주님의 눈물을 보면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 메시지를 하셨지만, 그 메시지 중에 많은 부분들이 눈물로 하신 것들입니다. 예수님 우신 장면 세 군데 성경이 기록하고 있죠. 나사로 무덤에서, 또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우셨잖아요.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보통 이사야서 53장, 저희들이 살펴봤죠. '슬픔의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예수님을 예레미야다. 어떤 사람은 그냥 특정 엘리야, 예레미야, 이렇게 특정하지 않고 그냥 선지자다, 이와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답은 틀린 것입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대답이지만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왜 앞에 이와 같은 것들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냐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최고로 분석해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 알아봐야 되겠다, 이분 중요한 분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신 말씀, 행적, 또 이런 것들을 다 조사해서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은 이렇다라고 말해도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사람 쪽에서 내가 구원받아야지, 예수님 믿으면 된다는데 예수님이 누군지 내가 한번 성경으로 조사해 볼 거야. 내가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읽어보고, 그리고 거기서 이렇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하고 이렇게 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이제 베드로가 말했을 때 이렇게 말하죠. 주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누가 알게 했느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걸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앞에 이렇게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조사하고 살펴보고 그리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들이 다 틀렸다. 이 방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게 지금 현재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이제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리스도이시요." 그리스도는 성도님이 잘 아시는 대로 이제 '메시아', 구약의 메시아고 그걸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돼 있고 뜻은 '기름을 부은 사람이다'라는 뜻이고,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은 사람이 늘 3명입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이 3명에게 기름을 부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선지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분이다. 그다음에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우리에게 하나님 알려주시는 분이고, 제사장은 우리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서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게 제사장입니다. 죄를 지으면 양 가지고 제사장한테 가면 제사장이 해결해 주잖아요. "죄 용서됐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 그리고 왕입니다. 이분이 온 우주를 통치하실 분, 그리고 이제 저희들의 경우는 '내 인생을 통치하시는 분', 이렇게 이제 고백하는 거죠. 그리스도가 이제 그런 거죠.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돼 있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한테 아들이 있다 이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삼위일체이긴 하죠. 하나님 아들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신 분, 이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그 앞에 뭐가 붙었냐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 이렇게 돼 있죠. 이건 우상하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 우상은 입을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말을 못해요. 우상은 눈을 그려놨어요. 사람들이 그려놓은 거죠. 그런데 우상은 보지 못해요. 우상은 귀를 만들어 놨지만 우리 기도를 못 듣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이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 가이샤라 빌립보, 혹은 단 지역에 여러 가지 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상과 대조돼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네가 알아낸 게 아니다." 네가 앞에 침례 요한이다, 엘리아야, 예레미야다, 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똑똑하게 좋은 자료로, 좋은 결론을 낸 게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 보겠습니다.
몸인 교회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모인 교회에 들어가는 방법,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누군지 알게 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은 다릅니다. 지역 모임의 영접은, 이렇게 충격적인 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예루살렘 교회가 안 받아요. 바나바가 이렇게 가운데 이렇게 해서 겨우 들어가요. 그래서 지역 모임의 영접하고 몸인 교회의 영접이 다릅니다. 몸인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참 어떤 분인지를 알 때, 몸인 교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다 구원 간증 이렇게 하죠. 구원 간증할 때,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다음에 이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토록 용서해 주신 것을 믿고, 그래서 이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런 구원 간증을 주로 하고 그러면 이제 영접하고 이렇게 했죠. 구원으로 분별하고 그렇게 했죠. 그런데 이때 이제 그와 같은 스토리 중에서 핵심적인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다.'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그가 이제 나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려면 지금도 베드로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심령 속에 계시해 주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그게 항상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보고 이제 우리가 저기 구원받았구나,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런 요소가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18절 보시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하나, 이 반석에 대해서는 이제 형제님들이 두 가지로 해석을 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반석을 '고백'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고백 위에,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교회, 몸인 교회에 들어가게 된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고요.
또 많은 어떤 형제님들 가운데는 이 반석 자체를 '주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이 반석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이 반석이 전부 주님을 가리키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비유를 그대로 들어서서 "이 반석 위에" 예수그리스도가 친이 토대가 되는, 예수그리스도가 그 밑받침이 되는 교회를 세우시겠다. 뭐 이렇게 이해하시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몸인 교회, 예수님이 세우시고 사단이 건드릴 수 없는 이 교회를 주님께서 세우신다. 돼 있고, 이제 이 대목에서는 이제 몇 가지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일단 '미래형'이다, 이렇게 돼 있고요.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게 우리나라 성경에는 좀 애매한데요. 이게 시제가 미래형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교회는 성령께서 오셔서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고요.
하나 보겠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 그러셨습니다. 내 교회, 마태복음 16장 이전까지는 '교회'라고 하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 교회는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여간 신약에 와서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성도들은 교회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은 거죠. 그래서 이제 이 교회는 새로운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32).
이제까지는 그 사람을 분류하면 이제 이렇게 분류할 수 있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러니까 둘로 분류합니다.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로 분류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유대인, 이게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그다음에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 이 둘로 나뉘는 거죠. 그런데 이제부터는 셋으로 나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그래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고요.
이게 이스라엘이죠. 유대인은 이스라엘, 이제 우리들이 흔히 쓰는 용어로 보면 이스라엘, 헬라인은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닌 민족, 우리도 이제 이방인이죠. 그리고 또 하나 세 번째가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교회" 셋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인류가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로 구분되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이때까지 없었던,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 없었던 새로운 존재가 하나 나옵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보면 유대인도 되고 이방인도 됩니다. 그런데 혈통과 관계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그분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는 독특한 무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 교회를 세운다"라고 했을 때 이제부터 인류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여기서 이제 교회 진리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내 교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죠. 그래서 이제 질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데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냐?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있을 때 아직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적인 진보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자가 되도록, 교회가 존재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세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목표가 있는데,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게 가장 먼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런 말이 가능하거든요. 우리가 이번에 복음 집회를 하는데, 복음 집회를 할 때마다 걸림돌이 뭐냐 하면 자매들의 너울입니다. 이제 구도자들이 와가지고 복음은 안 듣고, "아니 여기가 개신교인 줄 알았는데 성당처럼 너울을 썼네." 그래서 그 질문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복음을 안 듣고 그거 설명 해야 되니까, 이제 이렇게 교회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복음 집회 때만 너울을 벗자. 구도자들을 위해서, 구도자들이 쓸데없이 관심을 복음 아닌 다른 곳에 자꾸 관심을 쏟게 되니까, 복음을 위해서 복음 집회 때만 너울을 벗자. 이게 교회가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방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구도자들이 설사 넘어진다 할지라도, 교회가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지, 물론 구도자들이 구원받아야죠.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우선순위상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제 두 번째 교회가 성도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주님을 닮아가도록 이렇게 교회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 "그렇게 말하면 성도들이 좀 어려워한다. 그런 말씀을 하면, 아니 지금 모처럼 말씀 들으러 온 성도들한테 막 이렇게 아주 비난하고 책망하고 하면 되겠냐? 좀 위로의 말씀, 또 격려의 말씀 위주로 합시다."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 말씀을 듣고 누군가가 마음이 어려워지건 말건,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을 가지고 넘어지는 사람들 배려하는 게 좋죠. 넘어져라, 이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성도들이 잘 듣기를 바라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이제 보호 장치를 하지만 그래도 전해야 된답니다. 예를 들면 "헌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맙시다."라든지, 또 헌신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헌신해라고 하면 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데 강요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느냐?" 그래서 이제 그런 메시지 빼고, 이렇게 성도들이 듣기 좋은 부드러운 그렇게 말씀이 나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기 "내 교회" 예수님께서 내 교회,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입니다.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보다 우선적인 교회, 그 교회를 몸인 교회다. 이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계시'가 돼 있고, 그다음에 '교회에 대한 계시'가 나와 있습니다. 이건 잠깐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십자가에 대한 계시'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21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군지가 드러나고, 주님이 세우시려고 하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신 다음에, 그다음에 그 교회를 세우는 핵심적인 방법으로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이거 유명한 거죠. 아니 아까 그렇게 칭찬받은 베드로가 몇 분이 안 돼서 굉장한 책망을 받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세상에 이런 책망을 받는 거죠.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죠. 사랑하고 주님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거죠. 그 베드로의 충성심을 사단이 사용해서 십자가를 반대하는 이제 이런 일이 생긴 거죠. 그랬을 때 이제 23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나를 넘어지게 한다."
23절,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렇게 돼 있는데, 이 대목을 잠깐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이제 책망받는 대목이 네 번 나옵니다.
베드로 네 가지 책망입니다. 첫 번째가 여기서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마태복음 17장에서입니다. 17장 어디서냐 하면 변화산에서 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이제 너무 황홀한 광경을 본 거죠. 모세도 오고 엘리야도 오고, 이거 보고 이렇게 말하죠.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좋지요. 거기 있는 게 좋지요. 그런데 그다음에 말합니다. "초막을 셋을 지어놓고 여기 사십시다." 이 말이 뭐가 문제였냐면,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건 뭐냐 하면, 초막 셋, 예수님을 엘리야하고 모세 수준으로 놓은 거죠. 이게 일단 문제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이렇게 가리시고 모세, 엘리야는 사라지고 그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저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하죠.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된다. 이게 이제 두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첫 번째 책망은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그 변화산에서 책망받는 이유는, 이게 나중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나오는데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순서를 빼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7장에서 곧 책망을 왔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자기를 내려줘서 "잡아먹으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죠.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세 번,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말을 하는 거죠.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말은 이게 문장이 모순되는 문장입니다. '주님', 해놓고 '그럴 수 없나이다.' 이게 둘 중에 하나 해야 됩니다.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든지, 주님이라고 부르면 "주여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그럴 수 없나이다." 그러려면 아예 주님이라고 안 부르든지, 이제 세 번째 책망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네 번째 책망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면책하죠. "왜 안디옥에 도착해서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온다니까 식사를 안 한 척해가지고" 그래서 베드로가 네 가지 책망을 받습니다. 그중에서 두 가지가 여기에 나옵니다.
이거 조금만 설명을 드리면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 안 하고 사람의 일로 생각하는 도다." 이 대목은 누가 복음으로 가셔서 한번 예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로 가고 계실 때,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을 보고 슬퍼 우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가? 이 좋으신 분이, 이 놀라우신 분이, 우리에게 맨날 말씀을 전해주시고, 또 기적을 행해 주시고, 우리가 그분의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데, 이분이 뭔 사정인지 모르지만, 이제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으니까 우는 겁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눅 23:27).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말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님의 그 십자가 행을, 십자가로 가시는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하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울 일이 아닙니다. 찬양해야 될 일, 감사해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이렇게 한 거죠. 그래서 이제 이들이 예수님을 뭐랄까,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거죠.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아버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의 뜻을 버리고, 그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는, 인류를 구속하려고 하는 이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셨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의 일로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멜 깁슨이 만든 영화 중에 '패션오브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저예산으로 만들어서 어마어마하게 돈 벌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게 보면 굉장히 사실적으로 만들었거든요. 그 영화에 보면 그 말도 아람어,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함께 쓰셨던 그 아람어로 서로 막 대화도 하고 그래서 영어를 오히려 장막을 넣고, 그다음에 이제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보면 한 번 이렇게 못질을 하면, 실제로 못질을 했을 때 그 못이 사람의 신체에 어떤 충격을 주는가, 그리고 그 충격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됐는가를 완전히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를 했거든요. 그거 보면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죠. 주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신 거죠. 그걸 이제 사람들이 지금 현재 알려져 있는 어떤 과학적 사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대로 다 묘사를 한 거죠. 굉장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를 잘해 놓은 거죠. 그런데 문제는 성경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은 주님이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가가 그쪽에 포인트를 안 맞추고, 주님이 하나님 어린 양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어두운 3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이제 이쪽으로 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가 더 우선적이다. 더 중요한 관점이다. 이게 이제 십자가와 관련해서, 그다음에 마태복음 이제 두 번째는 항상 저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은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나와 있는데요. 고난을 받은 후에 영광에 들어가야 된다. 이게 이제 '십자가와 관련된 이제 두 가지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에 대한 계시, 교회에 대한 계시,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계시 세 가지가 마태복음 16장에 몸인 교회하고 관련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이제 18장으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17장부터 제가 읽었는데요. 우선 세금을 받는 건데요. 반세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세금을 모두 내야 되는데요. 이제 우리도 세금을 내죠. 예를 들면 재산세가 있고, 뭐 무슨 세가 있는데 이건 '주민세'입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내는 세금이 있습니다. 그러듯이 이스라엘도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내는 세금이 있습니다. 이게 반세겔을 내야 됩니다. 세금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한테 물어봤습니다. "예수님 세금 안 내시냐? 지금 세금 내야 되는 때인데, 기간인데 내냐 안 내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세금 내신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들어왔는데요.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죠. 베드로가 누구한테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했는지 다 아십니다. 베드로한테 질문합니다. 그때는 왕국이죠. 왕이 그 나라에 세금을 이렇게 쭉 걷어서 그 나라를 이렇게 운영하는데 아들한테는 받냐, 안 받냐, 물어본 겁니다. 그러니까 "안 받는데요." 그렇게 됐죠. 예수님은 세금 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분은 세금 낼 신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오해한 거죠. "세금 내신다." 이렇게 잘못 대답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물고기 한 마리 잡아서 이제 세금 냈는데요.
지금 여기서는 마태복음 18장이 지역 모임이 나오는데, 지역 모임 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냐면 예수님이 이렇게 됩니다. 26절 보시죠. "타인에게니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타인'으로 빼버립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금을 걷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하나가 아니고 빠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에서 배척되신 후에,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하시고, 이제 예수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십니다. 그게 '지역 모임'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관계 문제입니다. 지역 모임 안에서 성도와 성도들 사이의 관계 문제입니다.
'관계'는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지역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2절을 보면 '어린아이'입니다.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전부 어린아이들을 영접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죠. 우리가 다 어른이 돼서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게 요한복음 3장에 있는 거듭남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가치관이 있고, 자기 경험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어린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낮춥니다. 애들은 자존심이 없습니다. 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무조건 이렇게 말하면 듣는 거예요.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이 지역 모임 안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 안에 영접될 때는 이렇게 겸손한 사람, 그다음에 또 뭐죠? 돌봄을 받는 사람, 어른들이 "이제 이렇게 해라." 그러면 하고, 그다음에 어른들이 잘 돌봐주고, 그래서 자기를 낮추고,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배우려고 하고', 이제 나름대로 다 견해가 형성돼서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내 생각은 있는데, 이게 지역 모임 안의 관계가 아닙니다. 지역모임 안에서 자기를 낮추고, 그다음에 어린아이들은 배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냐?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뭐 이런 것 때문에, 이런 의도로 말했을 거야, 이렇게 안 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배우려고 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지역 모임 안에 성도들의 관계다. 이게 마태복음 18장의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어린아이들이 어린아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 이게 지역 모임 안에서의 관계의 핵심입니다.
두 번째, 4절에 보시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 이렇게 돼 있죠. 어린아이,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12절 보시면 지역 모임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를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헝데 이거 12절부터 잘 읽어보시면 어떤 사람이 양이 100마리가 있었어요. 한 마리가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99마리를 놓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요.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잖아요. 누가 복음 15장입니다. 누가 복음 15장에 나오잖아요. 어떤 드라크마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이야기 나오잖아요. 그리고 이제 탕자 이야기 나올 때, 그런데 누가 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은 죄인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죄인 한 명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목자가 다시 찾아가고, 찾으면 다시 어깨에 메고 돌아오고, 하는 게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여기 잃어버린 양은 구원받지 않은 죄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는 마태복음 18장은 구원받은 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도 구원받아놓고, 지역 모임의 교제 안에 들어와 놓고, 그다음에 또 나가버립니다. 이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제 모임 안의 교제 혹은 관계에서 뭔가 상처를 입고 그래 나가버리는 거죠. 그러면 이걸 찾으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목자가 양을 찾는 것보다, 마태복음 18장의 목자가 찾는 게 더 어려울 거로 느껴집니다. 죄인을 구원시키는 것하고 실족한 형제를 다시 교제 가운데로 들어오는 일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보겠습니다. 지역 모임은 성도들을 비유하자면 '어린아이'입니다. 두 번째는 '양'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배우려고 하고, 단순화해도, 또 이런 이런 지역 모임, 이런 어린아이들 중에 또 잃어버린 양들이 나옵니다. 이게 지역 모임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나오는 겁니다. 이들을 다시 찾아서 모임의 교제로 회복하는 일이 지역 모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 모임 안에는 어린아이 같은 성도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중에서 또 나가는 사람이 나오면 지역 모임에서 또 찾고, 돌보고, 회복시키고, 용서하고, 하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 이게 지역 모임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를 듭니다. 그리고 이제 지역 모임 안에서 첫 번째 '실족케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성도의 마음을 어렵게 해서 그 성도로 하여금 교회에서의 교제를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이거 주님께서 굉장히 커다란 죄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두 가지 경우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이제 내가 실족케 하면 안 되고요.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맻돌을 매라는 게 더.. 어마어마한 말씀이에요. 그다음에 또 어떤 성도가 나한테 죄를 범하면, 우리 생각에는 죄를 범하면 그냥 용서해버리면 되죠. '죄를 범했어도 형제가 몰라서 그런 건데 ,뭐 내가 참으면 되지.' 이렇게 가는 게 아닙니다. 죄를 범하면 지역 모임 안에서는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치가 있어야 돼요. 물론 우리는 나중에 보시면, 물론 우리는 용서합니다. 누가 나한테 뭐 좀 어렵게 한 거 그거 용서 안 하면 되겠습니까? 나중에 베드로가 말하죠. "한 7번 용서할까요?" 주님 말합니다. "70번씩 7번이라도 해라." 그 말은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죠. 영원토록 용서하라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뭘 용서를 못 하겠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용서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죄는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은 무조건 용서입니다. 그런데 용서라고 하는 행위를 할 때는 그가 회개할 때입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항상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해야 합니다. 그걸 문제를 삼겠습니까? 그런데 구체적인 지역 모임 가운데에서 교제의 회복시는 그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회적인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제 실족시키면 안 되고, 그다음에 어떤 형제가 잘못을 하면 이건 이제 다룹니다. 어떻게 다루냐면 찾아가서 이야기합니다. "잘못된 거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말하면 그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말로 회개하면 용서하고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꼭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이제 사단이 늘 틈을 타가지고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이제 한 사람 데려갑니다. 증인을 세우는 거죠. 그래도 안 들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이제 최종적입니다. 교회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이제 징계하는 것입니다. 징계했다고 하는 것은 구원을 취소한다는 게 아니고, 그가 교재 가운데 그의 생명이 없어졌다가 아니고, 교회의 교제 가운데서 나가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최종 권위는 지역 모임에 있답니다. 지역 모임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답니다. 주님은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만일 너희들이 지역 모임 가운데 문제가 있어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성경적인 방법으로 다루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말을 듣지 않아서 징계하면 최종적이다. 하늘에서도 묶는다. 그래서 지역 모임의 결정이 이 땅에서의 지역 모임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다. 이게 지금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세 명이 순종했을지라도, 두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은 무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모이고 있으면 내가 거기 임재하겠다. 이게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이제 지역 모임의 교제입니다.
말씀을 다쳐 보겠습니다. 몸인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가 누군가를 알 때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 이런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만 알죠? "하나님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는 하나님만이 계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경우에 '주님이 누군가'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시는, 이게 우주적인 모임에 들어가는 조건이고, 그렇게 됐을 때 그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어떤 경우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지역 모임, 모인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또 이렇게 지금 현재 세이워드 형제님 초청해서 복음 집회하는데요. 하여간 이렇게 성경을 풀어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제시하고, 이 부분이 자기의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그가 깨달아지길, 이게 이제 저희들이 구원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그다음에 이제 지역 모임은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것이고,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어린아이와 같은 관계가 유지되는 곳이어야 된다. 이게 이제 지역 모임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어떤 질문으로 시작되냐 하면 "누가 크니이까?"라고 시작됩니다. 18장 1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묻습니다. "누가 큽니까?" 천국에서, 지역 모임에서 누가 크냐? 맨날 나온 대답입니다. 누가 크죠? 섬기는 자가 큽니다. 가장 밑에서 자기를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인 것입니다. 이거 자꾸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질문입니다. "몇 번 용서할까요?" 영원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옥갈 마땅한 죄를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성도의 어떤 것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게 이 지역 모임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축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교회'라고 했을 때 몸인 교회, 지역 모임 두 개를 나누는데, 이 각각의 경우에 여기에서 핵심적인, 지역 모임에서 핵심적인 것, 이 두 개를 저희들이 잘 알고 지역 모임 가운데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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