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덕언 말씀(요약)

덕언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박이레 2025. 3. 23. 11:19

덕언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25년 3월 23일 일요일(요약) / 한봉래 형제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무엇무엇이다"하신 구절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개역한글)

문맥상 잠깐 앞을 살피겠습니다. 마르다와 대화하신 것인데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1-26, 개역한글)

우선 마르다는 이렇게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실 때에 안타깝게 병으로 죽은 나사로도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 믿음에 주님께서 더하십니다. "내가 부활이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시키시는 분입니다. 마지막날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믿는자들의 부활이요, 둘째 부활은 믿지 않는자들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일을 하실뿐 아니라 하나님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다라고 하셨을 때에 믿는 자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믿는 자 안에 계시기 때문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부활의 핵심입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이 오셔야 부활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친히 오십니다. 그리고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왕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가 자기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고 그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낫게 해 달라고 했을때에 말씀만으로 고치십니다.  
주님은 멀리 떨어져 있으셔도 살리실수 있으시지만 오셔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것은 상징적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시 부활시키실수 있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임재하실때, 임재해 계신 사람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주님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심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주님은 죄없으신 분이므로 주님은 부활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대속은 아버지의 뜻이므로 아버지께서 주님을 살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이 생명은 죽음이 건드릴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공중에 오셔서 휴거시키실 때에 두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의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끌어올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할 때에 현재형입니다. 미래형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오라비가 죽은 것에 대해서 시간과 장소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멀리있고, 늦게 오셔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시간과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부활과 생명을 믿는 마르다에게 부활이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음을 더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은 믿는 자에게 이와같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9, 개역한글)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고전15:29, 개역한글)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0, 개역한글)

...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2-33, 개역한글)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습니다. 많은 해석이 이 구절에(29절)에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의 전체적인 교회를 놓고 보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럼 그 죽은 성도를 위해서 침례를 받습니다. 그 사회적인 배경으로는 침례를 받으면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극단적으로는 살해를 당하는 사회입니다. 그렇기에 그 믿음으로 죽은 성도의 증거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침례로 그 증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활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성도들이 일어나도 그것으로 뒤로 물러가지 않고 담대하게 순교하는 성도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이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님 중에 부모님이 임종이 다가와서 믿는 자녀에게 다시 하늘에서 만나자고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녀에게는 다시 만나자는 소망을 말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가 예수님을 믿어서 다시 만날수 있는 소망을 얻기를 원한다고 임종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녀는 부모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일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해석은 구원입니다. 부활은 구원을 얻을수 있는 동기를 줍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0, 개역한글)

31절의 "날마다 죽노라"는 매일매일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매일매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그가 그렇게 살았을까요? 부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보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수 있는 동기를 줍니다.

세번째, "부활이 없으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참된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거룩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로 인한 세가지 동기를 말씀합니다. 첫째, 구원받는 것입니다. 두번째, 죽음의 위협속에서 생명보다 더 귀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번째, 짐승처럼 살지 않고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저희가 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참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