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의 > 기드온 쿠 형제님
오늘도 타이머를 안 누르고 가셨습니다. 저에게 매우 많은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 안녕하십니까? 여기 새로운 형제님이 서 계신 걸 알 수 있겠습니다. 강 형제님께서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 대전 중구 모임의 여러 형제님들께, 성도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아내와 저는 여기 계신 형제님들, 자매님들이 베풀어주신 그 접대에 대해서 아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또 말레이시아에 돌아오시면 또 이와 같은 또 접대를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제 벌써 두 번째 시간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이 또 처음 보신 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성도님들이 말레이시아에 방문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뜨거운 날씨를 통과하셨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말레이시아에 한번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제 칭의입니다. 먼저 로마서 1장 말씀을 읽겠습니다. 16절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로마서 2장 12절 말씀 읽겠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로마서 3장 9절부터 26절까지 말씀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9-26).
로마서 4장 1, 2, 3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1-3).
로마서 5장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마지막으로 5장 8절부터 11절까지 말씀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8-11).
오늘 우리가 이 주제를 상고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칭의'이라고 하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저희들이 다 잘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이 '칭의'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책은 바로 로마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제 '속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속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잊으시고 이제 도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속죄에 대한, 신약에 대응되는 개념이 이제 '화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들이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이제 주님과 관련된 이제 칭의를 배울 텐데요. 이것은 또한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배우게 될 이 칭의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의 이 속죄라는 개념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가 이제 하나님과 화목된 이 사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로마서 5장에서는 이제 화목을 다룰 뿐만 아니라 또한 이제 칭의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계신 특별히 젊은 형제님들은, 특별히 성경을 연구하신 분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복음의 교리'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은 이 교리를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이 시간에는 이제 '칭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기 위해서 저희들이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마포 모임 여러 성도님들이 함께 계시는데요. 아마 늦게 끝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제 충분하게 한번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제목을, 이제 '칭의에 대한 텍 라인'으로 정하겠습니다. 나이키의 텍 라인을 아실 것입니다. '저스트 두잇' 그것은 '바로 해라'라고 하는 택 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텍 라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바로 무언가가 떠오르게 하는 그것을 텍 라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로마서를 봤을 때 한 문장으로 무엇이라고 정의를 하겠습니까? 이제 로마서의 텍 라인, 로마서를 보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 로마서 1장 17절일 것입니다.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그 구절이 이제 하박국으로부터 인용되었고, 이제 갈라디아서도 언급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도 동일한 구절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신약 성경은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는 칭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서신이기 때문에,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아주 정확한 텍 라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구절을 언급한 세 서신서에서 각각 무엇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하박국 2장 4절은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인은 " 첫 번째 부분이고요. "살리라" 두 번째 두 번째 부분이고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연구하게 되면, 이 세 부분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첫 번째 부분인 "의인은" 의롭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의롭다 함을 얻은 자입니까?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얻습니까? 이제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는 이와 같은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로 가게 되면, 갈라디아서 3장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이제 로마서는 의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에서는 "살리라" 이 단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그렇게 구원받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2절에서는 사도바울은 율법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율법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율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항상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 의미가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입니다. 이제 여기서 대비하고 있는 것은 "그 가운데서 살리라"라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는 믿음과 율법을 합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믿음의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그 삶의 특징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이 또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그와 반대되는 개념이 율법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이제 하박국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이 갈라디아서에서의 강조점은 "살리라"입니다.
이제 또한 이 동일한 말씀이 히브리서 10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38절 말씀,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저희들이 쉽게 알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으로 넘어가면, 이제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이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와 같습니다. 이제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참으로 성령님께서는 이 하박국 한 절의 말씀을 신약 성경에서 매우 아름답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을 문맥적으로 저희들이 이와 같이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에서는 '의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에서는 '살리라'라는 말씀이 언급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제 하박국 말씀이 이와 같이 이제 인용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하박국의 그 구절은 어떤 문맥 가운데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제 이 하박국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제 두 가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이제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점으로 생각할 수 있겠고요. 이제 이 의미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것이다.'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제 이미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 사람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이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또 다른 개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믿음으로 믿음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구절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이제 두 번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고, 이제 또 두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의롭게 된 사람이 계속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그의 삶도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이제 불신자들에게 만일 적용한다면, 이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한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계속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 하박국 선지자가 이미 신자라고, 믿는 자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하박국의 이 구절의 말씀을 이제 믿는 자들에게 주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하박국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미 구원받은 사람, 이제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박국은 이제 고민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제 하박국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번성하게 하시는가? 이제 왜 믿지 않는 자들을, 악한 자들을, 하나님은 부유하게 하시는가?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얘기합니다. "의인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이제 이 말씀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적용합니다. 이제 똑같은 말씀을 하박국 말씀으로부터 인용합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이것을 약간 다른 배경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동일한 말씀을 사도바울은 믿는 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받지 않는 자들에게 지금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이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의롭다 함을 얻고 싶은 사람은, 이제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갖고 싶은 사람은, 이제 여러분들 가운데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이제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제 구원을 얻는 길은, 의롭다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제 이것을 신분적으로, 사도바울은 이것을 신분적인 것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측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가 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하박국 그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께 이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그분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다른 측면에서로 말씀하고 있지만, 이제 로마서에서 대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의 행위입니다. 이제 '은혜와 율법'입니다. 이제 우리가 발견하겠지만 율법으로는 어떤 사람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박국 2장 4절에 있는 이 말씀의 두 가지 측면을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아마 당황할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이 말씀에 대해서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그리스어로 된 하박국 말씀을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이제 보통 70인역이라고 불리우는 그러한 성경입니다. 이제 히브리어로 기록된 그 구약 성경을 이제 헬라어로 기록한 성경이 이제 70인역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놀라게 되겠지만 구약을 언급하고 있는 이 신약 성경들은 다 70인역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구약의 말씀들이 신약에서 언급되고 있는데요. 심지어는 이제 히브리어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이제 성경학자들이 흥미롭게도 이제 주로 70인역에서 이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제 성경 연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렇게 좀 어렵기는 하지만 좀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70인역에서 이제 하박국 말씀, 그 2장 4절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히브리서 10장에 언급된 것을 또한 문자적으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10장 38절에서 그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제 70인 역에 기록된 그 하박국 말씀을 아주 문자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는 물론 사도바울이 그것을 하박국 말씀에서 인용하고 있지만, 그런데 단어를 약간 바꿔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하박국 말씀은 완전히 문자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성경학자가 되셔야 됩니다. 이런 것들을 찾아보셔야 합니다. 아, 그것은 너무 어렵고 너무 학구적인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학구적인 것을 좀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이거 자세하고 이게 구체적인 거 싫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여러분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여기 이제 설교자가 서 있는데요. 아주 꼼꼼하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듣는 자들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듣는 여러분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모든 여기 계신 형제 자매님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 가지 어렵고 구체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여기 젊으신 형제 자매님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하고 이제 의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반드시 가져야 될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이제 성장하면 나는 성경학자가 될 거야.
이제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돌아와서 이것을 한번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70인 역에 기록된 그 하박국 말씀과 이제 히브리서 10장 38절에 기록된 그 말씀이, 이제 그것을 열심히 연구해서 한번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것을 연구해보시면 굉장히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으로 로마서가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에 관한 이제 텍 라인입니다. 이제 이 '칭의;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칭의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특별히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칭의가 무엇입니까?
이제 1장부터 5장까지 계속 두 가지 단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첫 번째 단어는 '의롭다고 칭하다'입니다. 이것은 동사입니다. 의롭다고 말하다, 의롭다고 칭하다, 동사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어는 의롭게 된 사람, 의롭다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이제 1장에서는 또한 이것이 형용사로도 나타납니다. '의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이제 이 단어들과 이제 칭의라는 말이 이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단어가 칭의라는 것과 연관이 돼 있는데 그것은 '의'입니다. 여기에 많은 의라고 하는 단어가 언급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이 의라는 단어는, 이제 원래 이제 그리스도어로 '디카야 수네'라고 합니다. '의'라고 하는 이 명사가 '디카야 수네'인데요.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이제 '의롭다고 칭하다'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로 이와 같습니다. '디카요'입니다. 매우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제 의롭다고 칭하다는 동사는 '디카요', 이제 의라고 하는 명사는 '디카야 수네'입니다. '수네'라고 하는 단어가 뒤에 추가가 된 것입니다. 제가 왜 이것을 말씀드릴까요?
이제 '칭의' 의롭다고 칭하다라고 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이제 '의라'고 하는 이 명사는 그 동작의 결과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칭함을 얻었다고 하면, 이제 그가 '디카요'라고 하는 것을 얻었다면, 이제 그러한 칭함을 얻었다면 그는 '의'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의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 3절 5장까지 계속 이 단어가 '의'와 '칭의'와 '의'와 '칭의'와 그래서 이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반드시 동사로서의 의롭다 함을 칭하다를 이해해야 되고, 이제 그 칭하다의 결과를 이해해야 합니다. 굉장히 이 두 개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 '의롭다고 칭하다'라고 하는 것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이제 로마에서는 이제 법정을 사용했습니다. 법정, 판결을 하는 장소 법정입니다. 이제 그 로마에서 사용하던 법적인 단어를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이 의롭다 함을, 의롭다고 칭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단지 사람들의 법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을 지금 생각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사람 판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판사이신 그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이제 법정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는 무언가 잘못했을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저도 법정에 선 적이 있습니다. 뭔가 이 형제님이 잘못한 게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하실 텐데요. 속도 위반을 하셨다고 합니다. 카메라에 그것이 찍혔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이제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이제 경찰들이 사용하고 있는 그 기록을 통해서 저의 주소가 이제 찾아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집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주소로 계속 찾아왔기 때문에, 저는 이제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벌금 내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런데 제가 뭔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그 사람이 계속 벌금을 내 안 내서, 이제 형제님이 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계속 법정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법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판사가 저에게 유죄를 선언할까요,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얘기를 해줬는데 그 판사 앞에서 유죄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냥 형제님께서 "제가 죄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소집된 문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 그동안 못 나왔던 것입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이제 그냥 벌금만을 부과하겠습니다." 이제 50링깃을 벌금으로 물었습니다. 10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걸로 아주 끝났습니다. 저는 이제 3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3시간도 그 판사 앞에서 아주 굉장히 힘들고 불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그 판사를 만나기 전에 굉장히 긴장되고 걱정되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 판사 앞에 서본 적이 없습니다. 모임에 어떤 형제님 이제 법조계 일을 하시는 형제님이 걱정하지 마시라고, 이제 좀 더 나쁘게 된다면 당신은 3개월 동안 감방에 있게 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형제님이, 다행히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고 50 링깃만 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사람 판사 앞에 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판사이신, 하나님 판사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아직 이제 구원받지 못하신 분 계십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판사가 된다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으신 분은 이제 백보좌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재판하실 것이며 이제 영원한 불못으로 넣으실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칭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재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재판정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이제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판결을 내립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3장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10절 이하에서 시편의 말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범하는, 이제 죄들을 지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범하는 긴 목록의 죄들입니다. 참으로 이 많은 죄 가운데 나랑 관련된 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 죄인에게 부여되는 판결은 무엇입니까? 이제 그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얻는 판결은 무엇입니까? 이제 19절에 그 하나님의 판결이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제 하나님의 이 판결은 모든 세상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온 세상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제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의 후반부에 언급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한 죄인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 사실이 다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이 로마서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른쪽 왼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담이 머리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이기 때문에 이어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이것이 심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이 선언합니다. 우리는 간음죄를 범합니다. 우리는 아주 악한 죄들을 범합니다. 심지어는 동성애가 이제 로마서 1장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동성연애는 괜찮은 거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경은, 그 동성연애가 악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무슨 유전자나 이런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는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2장에서는 이제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나는 좀 의로운 사람이야라고 이렇게 어깨에 힘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이미 죄로 부패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로마서 3장에 보면 이제 이방인들에게 또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 유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죄로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판결도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기드온아, 너는 유죄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에 대해서 눈을 감아주실 수 있나요? 네가 그동안 착하게 살았으니까 좀 봐주겠다라고 할 수 있나요? 지옥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서 뭔가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좀 봐주겠다. 내가 눈을 좀 감아주겠다. 잠깐, 너는 그냥 통과, 이것은 세상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저를 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고민은 그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가 이제 긴장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지만 저의 죄에 대해서는 눈 감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죄를 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셔야 될까요? 이제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께서 치르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아드님의 피를 그 대가로 취하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의 죄에 대한 영원한 비용을 그 아드님을 통해서 지불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저희 같은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구속의 대가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온 세상에 있는 돈을 가지고 모아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제가 범한 한 죄의 값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나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분의 아드님께서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제 저에 관한 얘기를 계속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이제 다음 이야기를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이제 판사가 이제 보고 너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봐주겠다. 그런데 저는 이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이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자기 죄를 자기가 지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제 기드온아 네가 유죄다. 그런데 너의 죄를 위한 대가가 내 아들을 통해서 치러졌다. 이제 네가 그 아들을 믿는다면 너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제 너는 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판사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판사이신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내 아들이 너를 위해서 죽었다. 그 값을 치렀다. 이제 네가 그것을 믿는다면 너는 자유다. 오, 불쌍한 죄인인 기드온! 그는 지금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제 죄인인 그는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그 그리스도의 대가를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아드님께서 저를 위해서 죽이신 것을 제가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가 얘기한 것들을 들을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너는 내 아들을 믿었기 때문에, 이제 너는 무죄야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미 유죄입니다. 저는 무죄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을 믿는 그 기드온 형제님에게 너는 무죄야라고 선언하는 대신에, 너는 의로워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의 법정과 하나님의 법정에 다른 점입니다. 이제 사람의 법정에서는 당신은 무죄입니다. 죄가 없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무죄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법칙에서는 두 가지 단어만 있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유죄야! 또는 너는 의롭다라고 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칭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단순한 의미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었다, 칭의이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죄 상태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가 유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통해서 그가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인에게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이제 나에게 어떤 신분을 부여하십니다. 이제 저를 의롭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저를 자유롭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걸 또한 주십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21절에 보면, 로마서 외에 또 이 의에 대한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저를 의롭다고 칭하셨습니다. 이제 저를 자유롭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를 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다른 의로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저를 의라는 것으로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을 주의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처럼 의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의롭게 행동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의로운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떤 죄인을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의 모든 죄가 씻겨 나갔기 때문에 그 이제 너는 의롭다고 칭함을 얻고 자유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저를 의로 보시는 것입니다. 저는 '디카야 수네', '의를 얻은 것'입니다.이제 '디카요'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셨고 저희들은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칭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로마서 1장에 기록된 그 많은 죄들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로마서에 기록된 아주 중요한 단어가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제 저는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1장으로부터 3장까지 많은 죄 리스트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 죄로 말미암아 저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입니다. 이제 저는 그 판사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저는 믿게 돼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가 이제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죄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저를 옷 입혀주신 것입니다. 이제 저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게 이제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이제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것에는 이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칭의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지난밤에 속죄라고 하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이제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새롭게 들리나요? 이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항상 있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 그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제 3장 21절에 여러분들이 형광펜을 갖고 있다면,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씀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전환점입니다. 이제 1장부터 3장까지 이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실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3장 21절에 "그러나 이제는" 이제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러나'가 없지만 이제 영어 성경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우리는 19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상태라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22절에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가 모든 인류에게 이와 같이 미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니라.
이제 마지막 몇 가지 포인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법정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제 여러분들이 유죄 판결을 받기로 예정돼 있다고 합시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판사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정 안에서 판사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증인을 또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유죄지만 이제 거기에 나의 증인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제 조슈와 형제를 데리고 올 수 있고, 그레이스 자매님을 데리고 올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형제님, 여기 자매님이 있습니다. 기드온아 너는 유죄야! 형제님, 저를 위해서 좀 하나님께 좋은 말 좀 해주세요. 아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 형제님이 저한테 좀 좋은 일을 해 주신 적이 있었어요. 겨우 한 가지? 이제 그레이스 자매님한테도 제발 하나님께 나에 대해서 좋은 말 좀 해줘. 이제 30분 동안 머리를 긁더니,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저는 증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증인들을 저를 위해서 성공적으로 증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증인을, 저를 위한 증인을 하나님의 법정에 데려온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판결을 뒤집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법정은 아주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인에게 증인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판사이신 분께서 그분의 증인을 데리고 오십니다. 그 하나님의 증인이 누구이십니까? 여기에 율법과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21절의 말씀, 거기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제 하나님의 증인들은 이와 같이 얘기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신다는 이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그 진실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그 구약 성경이, 이방인을 위한 그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 이거 좀 놀라운 일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해오셨나? 일반적으로 이제 증인들은 그 죄인의 죄를 아주 크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데려온 증인들은 그 죄인에 대해서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 증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이 참으로 진실한 것임을 그 하나님의 증인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법정입니까? 얼마나 인간의 법정과 다른 하나님의 법정입니까? 참으로 한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오셨습니까. 참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하지 않는다라고 증언해 왔습니다. 참으로 그 구약의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24절과 25절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서울로 가는 기차 타기는 틀린것 같습니다. 예, 25절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끝나고 포도 먹을 때 많은 질문하지 마십시오, 빨리 올라가야 되니까(웃음) 질문해도 괜찮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이제 제가 이제 마지막 아주 최종적인 결론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칭의이라는 것의 텍 라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제 칭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저희들이 함께 배웠습니다.
이제 이 마지막 시간에는 이 칭의에 대한 이제 구약의 예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4장에서 이제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뭔가 굉장히 새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인을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그렇게 믿음을 통해서 사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이 아브라함은 아주 고전적인 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칭하신 것입니다. 이제 구약 성경에 이제 믿었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있는데요. 이제 그것을 히브리어로 '아만'이라고 부릅니다. 뭔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멘'이라는 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이제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히 많게 해주겠다. 이제 해변의 모래와 같이 그렇게 해주겠다. 이제 너를 통해서 많은 왕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 아멘."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을 발휘한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의롭다라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로마서 5장에 보면, 이제 동일한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로마서 5장 1절에 이와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제 9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제 우리는 1절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여기에서는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이 나에게 그와 같은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5장 1절은 이제 그러한 주님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그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이제 내가 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다 함을 얻는데요.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포인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마 저에게 이제 질문을 하면 더 좋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셨다고?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지? 그는 그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었나? 그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지는 않았는데요.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어떤 사람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가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주의 깊게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가 설명드리자면 이게 '점진적인 계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계시를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계시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성경 66권을 다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어떤 성경책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6천 년 기간 동안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뜻을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6천 년 동안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 메시아를 보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제 지저스라고 불리우는, 예수라고 불리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것이다, 성취하실 것이다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아브라함이 믿었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믿는 내용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을 다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완벽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도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칭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좀 격려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로마서를 계속 깊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속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토대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알아야 되고, 아주 중요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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