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서론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이 이번 성도 집회 기간에 사사기 6장, 7장 사사기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제가 사사기의 큰 흐름을 좀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는 사사기 1장, 2장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하나님 말씀을 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삿 1:1-7).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2-15).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삿 1:19).
이제까지는 이제 유다 지파를 쭉 살폈고요. 21절 이제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삿 1:21).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삿 1:22-26).
27절은 이제 므낫세 지파입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삿 1:27-28).
그다음에 29절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삿 1:29).
30절 스불론입니다.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삿 1:30).
31절 아셀 지파입니다.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삿 1:31-32).
33절은 납달리 지파입니다.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삿 1:33).
34절 단 지파입니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삿 1:34-35).
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사기 2장, 우선 8절이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8-11).
여기까지 까지 읽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사기는 총 21장으로 돼 있습니다. 그중에서 이제 1, 2장이 서론입니다. 1, 2장이 서론이고 이제 3장부터 16장까지가 이제 본론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론이 17, 18, 19, 20, 21장입니다.
저희들이 우선 이제 이 시간에는 서론을 보려고 하는데요. 사사기를 이렇게 설명을 할 때, 우선 이제 서론적으로 설명을 하고 그다음에 이제 이 본론은 본론은 간단합니다. 사상에는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이 범죄합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웃 민족의 식민지로 삼습니다. 이웃 민족을 강성하게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정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제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키셔서 다시 이스라엘을 자유로운 국가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제 그러고 나서 이제 세월이 지나죠. 그러고 나면 또 한 번 반복됩니다. 이걸 몇 번 반복하냐면 7번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다루어지는 사사가 일곱 사사입니다. 7개의 사사, 이제 저희들이 흔히 이제 대사사라고 부르는 사사 7명이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소사사가, 이름이 아주 짤막하게 언급된 사사가 6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총 13명의 사사가 이 본문 가운데, 본론 가운데 쭉 들어갑니다. 그리고 앞에 1, 2장이 서론이고, 그다음에 17장부터가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사사기 6장은 이제 이 본론 중에서 한 중요한 사건, 기드온 사건을 다룰 거고요.
오늘은 이제 서론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서론이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잠깐 다시 한 번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장 1절 보시죠.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게 이제 서문이 시작됩니다. 그다음에 2장으로 가시겠습니다. 2장 8절 보시면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래서 또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사사기는 이제 형제님들이 서론이 두개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이제 누가 죽고 그다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는 요셉이 죽고 나서 "요셉이 죽으매" 하고 출애굽기가 시작됩니다. 그다음에 여호수아는 어떻게 시작하냐면 "모세가 죽으매" 그리고 저기 여호수아가 시작됩니다. 그다음에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으매" 하고 사사기가 시작됩니다. 그다음에 열왕기상하는 "다윗이 죽으매" 그러고 나서 시작합니다. 그건 이제 구약 성경에서 많이 있는 이제 그 표현 중에 하나고요.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게 뭐냐 그러면, 그동안 우리를 인도하고 하나님 사람이고 우리가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이 죽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손들 애굽에 오게 하고 바로 총리가 되어서 그들을 이렇게 잘 돌봐주었죠. 아버지 야곱 장사도 지내고 이렇게 했죠. 그런데 그 요셉이 죽었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큰일 났나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도 요셉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셨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볼 일이 아니고 요셉을 총리로 삼으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모세 위대한 인도자죠. 출애굽 시키고 광야 40년을 이끌었던 모세가 죽었어요. 난리가 났나요? 아닙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사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누구냐 그러면, 모세는 출애굽을 시켰다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집어넣은 사람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게 만든 인도자입니다. 그가 죽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이게 사사기의 첫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두 개의 서문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에도 서문이 2개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첫째 날 하나님이 무엇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게 창세기 1장이죠. 창세기 2장은 다시 설명합니다. 이 천지 창조를 창세기 2장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시간 순으로, 역사적인 기록이라면 창세기 2장은 영적인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드셨냐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짓고 그로 하여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더라, 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목표를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구조입니다. 사사기 1장은 역사적으로, 시간적으로 쭉 기록합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변함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묻죠.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이제 여호수아 죽었는데 우리가 이제 정복해야 되는데 누가 먼저 갈까요?" 12지파가 있으니까 누가 먼저 갈까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직접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가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래서 알겠습니다 하고 유다 족속이 갑니다. 가서 이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게 나온 거죠. 그리고 이제 유다 지파는 갔고 그다음에 그다음 지파, 시므온 지파, 그다음에 베냐민 지파, 아셀 지파, 이렇게 쭉 지파들의 이야기를 쭉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모든 지파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정복했는가를 쭉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제 역사적이고, 현실적이고,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죠. 그다음에 2장에서는 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2장 한번 보시죠. 2장 8절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래놓고 그다음에 9절, 장사했다. 여호수아를 장사했다. 10절, 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얘기합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래서 여호수아와 동역하던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1세대라고 부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저기 여호수아 세대 여호수아와 함께 살던 세대가 1세대, 그다음에 2세대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이 부분은 사사기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그 지파 사람들, 이걸 2세대입니다. 2세대들이 다 죽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이게 3세대입니다. 이 3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도 모르더라"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사사기 3장부터 사사기 16장까지 7명의 사사들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다시 평안을 줬는데, 그러면 또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면 잠시 있다가 또 우상을 숭배하고, 이 일을 7번이나 왜 반복했냐? 이들은 왜 그랬냐? 이들이 누구냐 도대체, 3세대더라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이제 이제 살펴보려고 합니다. 3세대는 어떤 특징을 가진 세대인가? 그리고 그 세대는 무엇을 유념해야 되는가? 왜 그들 가운데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반복이 계속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이제 서론적으로 제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두 번째 서문은 영적으로 그와 같은 사실들을 해석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서론적인 이야기를 하면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이게 이제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원래 이제 갈대와 우르에 살고 있었죠.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두 가지를 약속하시죠. 하나는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후손을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결혼해서 자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말하면 불임입니다. 자녀 못 낳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별 같은, 바다의 모래 같은, 그리고 땅의 티끌 같은 후손을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시죠. 참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죠. 우리는 이 하나님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근거를 찾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이기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하나님이죠. 그래서 후손을 약속하시고 또 하나 약속하신 게 땅입니다. 그 후손들이 살 수 있는 땅, 가나안 땅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여기 이 땅을 너와 후손에게 주겠다." 그랬죠.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놀라운 믿음은 그와 같은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신은 이삭 한 명 낳았습니다. 물론 이스마엘 낳긴 하지만 이삭 한 명 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실제로 그는 독자 이삭, 그것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죠. 그리고 그는 이제 가나안 땅에서 살기는 살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살았냐면 나그네로 삽니다. 땅 한 평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가 소유한 것은 무덤 뿐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생애죠. 하나님도 놀라우신 분이고 아브라함도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죠.
그런데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제 수많은 상당히 하나님의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아브라함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원래 가나안을 주시기로 했는데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요셉 때 내려갑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의 숫자가 한 60명쯤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 그래서 한 이제 60명 정도의 한 가족이 기근을 피해, 가나안 땅에 먹을 것이 없으므로 곡식이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형제 중에 한 명 요셉이 총리로 세워진 그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내려갈 때 60명쯤 됩니다. 그리고 이 애굽에서 이제 이 자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몇 명이 되냐, 200만 명이 됩니다. 60명인데 200만 명으로 한 민족으로 큰 거예요. 이 200만 명쯤 되었을 때 출애굽합니다. 이제 모세가 인도해서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갑니다. 200만 명이 광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우리로 치면 사막입니다. 사막 지역을 200만 명이 이렇게 갑니다. 광야를 지나가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십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사막인데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그래서 그들을 40년간 광야에서 먹이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200만 명은 나중에 이제 가나안 땅 한번 이렇게 보시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에는 숫자가 적습니다. 광야에서는 많은 숫자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땅에 살기에는 이 200만 명의 수는 너무 적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여호수아가 이제 전쟁을 합니다. 여기 이제 가나안 족속들하고 전쟁을 했죠. 그래서 전쟁을 해서 이기면, 예를 들면 첫 번째 성이 여리고성이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자기들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은 그냥 열세 바퀴 돈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여리고를 정복합니다. 그러면 이제 정복했죠. 이제 자기들 땅이죠. 여리고에 앉아서 정착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수가 너무 적으니까, 그래서 여리고성을 점령해 놓고 그다음에 다시 진격합니다. 다시 다른 지역으로 또 진격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라고 하는 한 인도자에 의해서 12지파가 하나처럼 전부 진격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지역을 점령해요. 또 그러면 그 지역에 앉아서 또 정착하고, 그럼 여기 한 지는 여기서 여기서 살아라,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12지파가 점령하는데 다 동원됩니다. 그래서 이제 가나안 땅을 이렇게 점령을 할 때 보면, 그 지역을 정복은 했지만, 그 지역을 이렇게 소위 전쟁에서 이런 소리 나오죠. 전쟁은 언제 끝나냐? 보병이 땅을 밟아야 끝납니다. 공군이 가서 막 다 초토화시키고 뭐 해도 보병이 가서 국기 꽂아야 이제 그게 전쟁을 실제로 이 점령한 거죠. 그러듯이 이 이스라엘도 가나에 있는 족속들을 싹 물리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장부터 12장까지 보면 정복한 땅들이 쭉 나옵니다. 전부 정복합니다. 그런데 그 넓은 땅에 200만이 되는 이스라엘이 다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정복하고, 지나가고 정복하고, 지나가고 이렇게 하면,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 졌죠. 그렇지만 슬슬 다시 기어나옵니다. 또 다시 삽니다. 그래서 정복이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여호수아에 의해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 되어, 심지어는 요단 동편에서 살겠다고 한 사람들이 나왔어요.
두 지파 반, 처음에는 여호수아가 막 화냈죠. "아니, 왜 요단강 건너에 사느냐?" "여기 너무 좋으니까 여기서 살겠습니다." "너희들이 왜 또 우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이스라엘 왜 분리시키려고 하느냐?" 막 이래서 "아니요. 전쟁은 하겠습니다. 다 정복된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전부 하나로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이게 여호수아 1장부터 12장까지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3장에 이르러 이제 정복을 다 끝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군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가난한 족속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졌습니다. 전부 도망가고 이렇게 했죠. 이스라엘이 이제 승리자입니다. 이것을 12지파한테 지도를 그려가지고 나눠줍니다. 제비 뽑아가지고 너는 어디 땅, 너는 너는 땅, 이렇게 하죠.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가난 전체를 정복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난 정복된 땅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누가 하냐? 사사기에서 합니다. 이제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사사기에서는 이제 유다가 다시 어디로 올라갈까요?
저번에 다 이긴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 아직도 슬슬 기어나와서 좀 거기서 어떻게 발 붙이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는 일, 그리고 그 땅 위에서 이제 드디어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 일을 사사기가 합니다.
이걸 다시 영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특별히 이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죄가 용서됐죠. 그러면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사나요? 예수님이 사단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패배한 적입니다. 그런데 이 사단이 지금도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뭐 이렇게 자꾸 유혹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는 여호수아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게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싹 이겨놓은 거예요. 그래도 직접 들어가서 밟고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이게 열 두 지파 몫입니다. 이게 두 개가 다른 거죠.
다시 이런 이야기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이제 이런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히운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영혼 전에 계획하셨고 그리고 주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히운 자들입니다. 이게 여호수아하고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6장에 가면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싸워야 됩니다. 믿음의 방패, 이런 게 있는 거죠. 그럼 언제는 하늘에 앉아 있다고 그랬는데? 또 이제 히브리서를 보면 이렇게 돼 있죠. 우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안식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럼 이게 뭐 이랬다, 저랬다, 두 가지를 말하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여호수아서가 있고 사사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승리해 놓으신 것을 이제 내가 그 승리를 근거로, 이미 여호수아가 해놓은 승리를 근거로, 이제 열 두 지파들이 각각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 이미 이긴 승리입니다. 그걸 취하는 거죠. 마치 그걸 다시 승리하려고 싸우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여간 이게 이제 미묘한 게 있습니다. 이렇게 이제 그래서 이제 복음 전할 때 저희들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벽한 승리를 전하지요. 그러면 이제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믿었으니까 이제 뭐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할 거 없네. 이제부터는 그냥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기만 하면 되네. 아니요. 아직도 우리 가운데 죄가 남아 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혼란스러운 거죠. 그래서 나는 이제 십자가로 끝났으니까 죄 없다, 막 이렇게 이제 이렇게 다니는 사람이 있는 거죠. 이제 사사기를 읽으셔야 돼요. 그래서 이 사사기서의 의미는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대조해서 이미 온 이스라엘이 하나 되어서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승리해 놓은 땅을, 각 지파들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이제 차지하고 농사를 짓고 포도원을 만들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고 하는 일들을 사사기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사기에서 저희들이 보는 것은 이제 열 두 지파가 있는데요. 열 두 지파가 하는 걸 보면 유다 지파가 제일 강합니다. 여기서 왕이 나오는 지파입니다. 왕이 나옵니다. 나중에 다윗이 나오고 주님이 유다 지파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너희들이 먼저 나가서 싸워라, 이렇게 하죠. 유다 지파를 이렇게 보면 성공적으로 땅을 취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좀 문제가 됩니다. 제일 마지막에 언급된 지파가 단 지파인데요. 단 지파가 가장 처참하게 실패합니다. 단지파는 가난 족속들이 아예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단은 올라가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중에 이제 사사기 저쪽 17장 이렇게 후반부로 결론적으로 가보면 단은 "아이고 여기는 가나안 족속이 너무 강하니까, 하나님이 제비 뽑아서 여기서 살아라고 했지만 우리는 여기 못 살겠어. 여기 있는 가나안 족속은 너무 힘들어. 우리 다른 데, 좀 약한 적이 있는 땅 없을까?" 이래서 다른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 단입니다. 그러니까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하나님이 준 기업을 누리지 못하고 자기들이 스스로 기업을 찾아 나선 비극적인 지파가 단 지파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가운데 유다하고 단 사이에 여러 차이가 있는 거예요.
이거 다시 잠깐만 적용해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래서 이제 주님의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지죠. 우선 개인적인 성도의 삶을 보면,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놀라운 승리를 이루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는 죄 가운데 삽니다. 주님이 이미 끝내준 건데 그 죄에 붙잡혀 삽니다. 어떤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 죄를 이기고, 주님이 이기신 십자가의 그 승리를 누리며, 기뻐하며, 동일한 승리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차이가 있는 거죠. 다음 지역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이제 지파니까요. 지역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지역 모임은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놀라운 진리를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삼고, 경험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이름만 교회지,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 또 하신 말씀 명령, 아무 상관없이 삽니다. 그래서 이거 뭐 교회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교회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이렇게 차이들입니다.
잠시 이제 1장 좀 봐야 되니까요. 1장을 조금 더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 1장 유다 지파부터 보겠습니다. 1장 1절, 2절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지만 여호수아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가 없어졌다고 힘들어하거나 실망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정복해야 되는데 여호수아가 다 이루어놓은 거 이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우리 것으로 삼아서 살아가야 되는데 물어보죠. "우리 중에서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누가 먼저 싸울까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2절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놀라운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이 땅을 붙여주었다. 올라가기만 해라. 이 땅 네 거다." 하나님이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래서 3절 올라갑니다. 그런데 보겠습니다. "유다가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올라가자." 이거 잘한 겁니까? 못한 겁니까? 하나님이 유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올라가라. 네가 맨 문제 안 올라가라. 그리고 그 땅 네가 제비 뽑은 땅, 분배받은 땅, 내가 너한테 줬다. 거기 누가 살건, 거인이 살건, 어떤 사람이 살건, 내가 너한테 준 땅이다. 올라가서 취해라. 이 말씀을 순종해야 됩니다. 그런데 약간 옆으로 샙니다. 이거 꼭 죄라고 하기 좀 그렇지 않나? 아니 형제한테, 이게 유다하고 시몬은 어머니가 같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죠. "같이 갈래? 네가 나 이번에 도와주면 나도 너 저기 싸울 때 나도 도와줄게."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형제 간에 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기준을 어디서 잡냐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준으로 하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왜 시몬에게 올라가자고 합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올라가야 되죠. 그다음에 4절 칩니다. 올라갔어요. 그랬더니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붙이신지라" 그들이 잘 싸워서 이긴 게 아니고 그들은 그들 싸움도 잘 했겠지만, 그게 원인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이신지라, 그들이 만 명을 죽입니다. 놀라운 거죠.
이제 정복을 계속해야죠. 정복을 하다가 6절에 보면 '아도니 베섹'이라고 하는 왕이 그 인도자가 도망을 가는 거예요. 그를 쫓아가서 잡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땅 거인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잡아죽인 거죠. 그래서 엄지 손 손가락과 발가락의 엄지 첫 번째 거죠. 그것을 끊었어요. 6절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죠?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나중에 또 살펴보겠습니다만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하죠? 아각 왕을 살려둡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니까 변명합니다. 사울은 왕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여기도 엄지 손가락 왜 그걸 왜 끊어요? 죽여야죠. 그래서 이제 여기 계속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하라고 한 대로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1장 초반부부터 계속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왜 끊었는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그가 한 것입니다. 그가 자기가 정복한 땅의 왕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었던 것입니다. 이게 아도니 베섹이 한 행동입니다. 아도니 베섹이 뭐라고 말하냐면 내가 그렇게 했는데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시는구나 이렇게 한 거죠. 다시 말하면 유다는 아도니 베섹에게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그 '지역 관습대로' 한 것입니다. 그 땅에 아도니베섹이 그렇게 했어요. 정복하면 그걸 유다가 따라서 한 것입니다.
이건 잘못한 것이에요.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유다에 대해서 하나만 더 보시죠. 19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하신 고로" 유다가 강해서 쫓아낸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 고로 산지 거인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골짜기 거인들은 쫓아내지 못했어요. 왜요?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요.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 골짜기 거미는 못 쫓아냅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왜 못 찾아냈느냐, "철병거가 있으므로" 이게 그들보다 무기가 다른 거죠. 예를 들면 우리 조선시대에 우리는 이제 활하고 칼로 싸우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일본 사람이 조총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붙죠. 뭐 조선 군인들이 전멸합니다. 일본은 거의 안 죽습니다. 게임이 안 되는 거죠. 무기 때문에 이게 안 되는 거죠. 철병거는 마치 그런 식입니다. 요즘 우리로 치면 핵무기에 해당하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죠. 이제 우리는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게 무기 때문에 게임이 안 됐겠구나라고 하는 걸 현실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는데, 철병거 때문에 못 쫓아낸다? 말이 되나요? 하나님이 철병거만 못한가요? 이런 의문들을, 이런 구절들을 들으면서, 이제 유다지파, 지금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지파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이제 유다 지파 중에서 이제 긍정적인 사람들을 조금 보면, 12절 보면 갈렙하고 그다음에 13절 옷니엘이 나옵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갈렙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면서 이거 하나님이 준 땅이다. 이거 치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 그랬더니 옷니엘이 가서 치고 갈렙의 딸을 아내로 얻습니다. 그래서 이제 결혼할 때 이제 그 지역에 있는 밭을 주십시오. 그랬더니 딸이 아버지 밭만 주지 말고 샘물도 주십시오. 밭에 물을 대야 되죠. 물까지 주세요, 해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 다시 한 번 이제 반복됩니다. 나중에 보면요. 하여간 이런 얘기가 있고요.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21절 베냐민 자손입니다. 베냐민 자손은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기서 이제 베냐민 자손은 왜 못 쫓아냈을까요? 유다가 못 쫓아냈다라고 하는 것하고 그러니까, 19절에서 못 쫓아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냐면 능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거죠.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다음에 21절에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하려고 했는데 힘에 부쳐서, 적이 너무 강해가지고 못 쫓아냈다는 의미가 아니고 베냐민은 쫓아낼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쫓아냈어야 하는데 쫓아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게 베냐민 자손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22절부터 26절까지는 이제 요셉 족속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에브라임하고 므낫세죠. 이 지파의 이야기는 이제 벧엘을 치는데 정탐꾼을 보내고 그다음에 정탐꾼이 그 성에 가장 취약한 부분을 어떤 사람에게 알아내고 그다음에 그래서 그 성을 정복하고 그다음에 약속한 대로 그 사람은 살려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딴 데 가서 동일한 이름의 성을 지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저희들이 이제 금방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절에 어디를 가냐면 이제 여리고를 정복하려고 정탐꾼을 보내죠. 그런데 이제 여리고 왕이 이걸 알고 정탐꾼을 체포하려고 했을 때 기생 라합이 살려주죠.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이 이제 여리고를 정복할 때 기생 라합을 살려주죠. 그 가정을, 그 이야기하고 비슷한 거죠. 지금 그런데 뭐가 다르죠?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에 속하게 됩니다. 심지어 주님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여기는요? 여기도 그 사람을 살려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이스라엘로 편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죠? 하나님이 무너뜨려야 되는 성을 그가 다시 세웁니다. 이게 지금, 이게 여호수아 시대와 다르다 라고 하는 것들을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27절 보면 므낫세가 쫓아내지 못합니다. 쫓아내지 못하니까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해버립니다. 쫓아내지 못하니까, 이제 우리 이거 죽겠구나가 아니고 어디서 살 만하네, 여기 여기서 살 수 있겠네. 우리가 가나안 땅에 살 수 있겠다. 우리가 가나안 족속이지만 가나안 땅에 살 수 있겠구나라고 적이 판단합니다. 그리고 거기 거합니다.
그다음에 29절 에브라임 지파도 마찬가지죠. 쫓아내지 못하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거기 거합니다.
30절은 스불론은 쫓아내지 못하니까, 역시 "가난한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스불론은 뭐가 또 문제냐면 그들 가운데 거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으면서 당신들 종이 될게요. 당신들을 위해서 물도 길러다 주고, 나무도 해주고, 당신들 섬길 테니까 우리 살려주세요."라고 계약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금한 것입니다. 이익이 되면 살려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31절은, 이제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 어디까지 지금 문제가 되냐면, 31절은 아셀 지파는 쫓아내지 못하고, 31절은 못 쫓아냈죠. 그다음에 32절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더라" 이제까지는 어떻게 됐냐면 이스라엘이 주된 민족이고 가난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이에서 살았더랍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 하니까, 그냥 아이고 여기 붙어서 산 거죠. 이게 역전이 됩니다. 어떻게 됐냐면 이 아셀 지파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살고 아셀 지파가 그 가운데, 이게 지금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이냐? 누가 주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이냐? 가나안 사람이다.
그리고 제 최악은 34절에 있는 단 자손입니다. 단 자손을 쫓아버립니다. 지금 뭐 어떻게 된 게 거꾸로 된 거죠. 지금 단 자손이 아모리 사람을 쫓아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쫓아버립니다. 어디로? 산간 지역으로, 그리고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치 아니하고" 너희들은 평지에 와서 농사 못 지어, 산에서 나무나 하고 살아, 하고 쫓아버립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하나님이 이 땅을 단 자손한테 주셨죠.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내가 손에 붙였다 그랬죠. 그런데 현실은 어떻게 됐냐? 단 자손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지만, 그래서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이렇게 지도 그려가지고 이제 이건 유다 네가 가져가고, 여기는 누가 살고, 그래서 하나님이 다 주신 땅이에요. 이건 싸우면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붙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이게 지금 우리들에게 그대로 사사기처럼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며 삽니다. 죄 용서 확신과 기쁨 속에서, 죄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서 말씀을 순종하고 말씀을 경험해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교회가 있어요. 그런데 저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건 알고, 믿고, 그래서 구원도 받고, 그래서 교회라고 불리우지만 형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러면 이제 잠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1장에서 예를 들면요. 아도니 베섹은 이렇게 말하죠. "아유, 내가 내가 남한테 이렇게 나쁜 짓을 했더니 내가 그걸 당하는구나."라고 아도니 베섹이 고백합니다. 아도니 베섹은 누구를 가리키냐 그러면 구원받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서 자기가 행한 악행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를 지옥에 보냈는지, 그 슬퍼함에 이를 갈며 자기의 잘못된 행동들을 하나님 관점에서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아도니 베섹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이제 갈렙이 "저 지역 점령하면 딸까지 줄게." 그래서 당연히 그 지역 점령해야 됩니다. 저기 유다 지파한테 준 땅인데 가서 점령해야죠. 뭐 마땅히 할 일인데 거기다가 상까지 얻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또 이제 아내 된 악사가 "아니, 아버지 저기 밭만 주시지 말고 샘물도 주세요." 그래서 이게 저기 옷니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신약 성경에 있는 대로 있는 원칙을 하나 가져오면 "많이 가진 자가 많이 얻을 것이다. 적게 가진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이게 이 원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 길로 더욱 매진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님 은혜 가운데 이게 얼마나 영적으로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못 누리는 사람은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옷니엘과 관련된 영적인 교훈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갈렙입니다. 갈렙의 경우는, 갈렙은 제가 볼 때 참 억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점에서 억울하냐면 출애굽 1세대들이 가나안 입구에 옵니다. 가나안 입구 이름이 가데스 바네아 입니다. 여기 와서 정탐을 각 지파에서 1명씩 정탐을 12명을 보냅니다. 정탑을 왜 보냈냐? 이유 딱 하나입니다. 지리를 알려고, 가나안이 너무 넓으니까 어느 지역부터 점령해 가야 되는지, 그래서 이제 사실 나중에 보면 여리고를 치거든요. 그래서 꼭 우리로 치면 인천 상륙작전 6.25 때 그렇게 하듯이 합니다. 여리고를 쳐서 가나안 지역을 양쪽을 딱 분열시킵니다. 그리고 이제 남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가고 이렇게 이제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가나안 지역을 어떻게 점령할 것인지 점령 통로를 알기 위해서 보냈는데 10명이 와가지고 말합니다. "우리 못 간다, 이거 가나안." 두 명만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래서 이제 항상 우리가 하면 안 된다는 거죠. 다수결, 모임은 다수결 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거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원하는 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게 뭐죠? 10:2 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못 가겠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1세대가 그리고 1세대 중에서 40년간 살아있는 사람이 여호수아, 갈렙 2명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들어갑니다. 2명이 들어가죠. 그런데 이제 갈렙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갈렙은 억울합니다. 자기는 으로 믿음을 발휘했는데 40년간 허송세월해야 합니다. 40년, 소위 요즘에서 뉴스에 나오는 잃어버린 40년입니다. 자기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자기도 40년간 헛살이 한 것입니다. 아무 무익한 세월을 보냈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렙은 손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 인도로 들어가서, 이제 갈렙의 나이가 80세가 됐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80세인데 기력이 여전하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헤브론을 그가 차지하죠. 그래서 갈렙은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우리가 믿음에 순종하면, 하나님 말씀을 따르면,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손해 보게 하지 않는다. 이게 갈렙을 통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갈렙이 튼튼하게 80세가 되었어도 그 몸이 전쟁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갈랩을 통해서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순종하여 손해 보지 않는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요셉 지파입니다. 요셉 지파는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사건과 유사하지만, 굉장히 유사하지만 결과가 달랐답니다. 이게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제 이건 조금 이따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땅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단지 정복한다는 게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땅이 하나님의 땅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제 똑같이 정탐을 써도, 어떤 사람하고 정탐을 알려주면, "당신 이성 주민이잖아요. 이성을 우리가 치려고 하는데 당신이 알려주면 당신은 살려줄게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 때는 왜 그랬나요? 하나님께서 기생 라합을 만나게 하시고 기생 라합이 이 정탐꾼에게 용기를 줍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뭘 알 수 있냐면 그 여호수아 잘 보시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간담이 녹았었다. 그때 40년 전에 너희들이 왔다면 이 땅은 너희들 것이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그래서 이제 매우 유사하지만 영적이지 않은, 영적인 것을 닮아 있지만 굉장히 육신적인 것들이 있다. 이게 요셉 지파를 통해서 저희들이 영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제 2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제 사사기 2장은 다시 가나안 정복이 갖는 의미는 뭐냐 하면, 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이 가나안 정복입니다. 출애굽보다 오히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꽃입니다. 출애굽이 중요한 게 아니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누리는 거죠. 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왜 가나안 땅에 넣냐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는 거죠.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하셔놓고 약속하시기를 후손과 땅을 약속하시고 그 후손들을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에서 한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면서 왜 한 민족이 되게 했냐 하면, 가난안 족속을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200만이 돼야 가난한 족속들을 점령하는 거예요. 가나안 족속을 왜 하나님이 심판하시죠?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해서 가나안 족속을 정복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이 죄를 지으면 이 가나안 족속이 지은 죄를 만약에 이스라엘이 또 지으면, 또 지면 어떻게 되죠? 우리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가나안 족속은 이제 불신자들이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전멸을 시키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자녀니까 죄를 지어도 봐주실 것 같죠?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말하죠. 오히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하십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동일한 죄를 지으면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뽑아버릴 것입니다. 그게 바벨론 포로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하고 똑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라고 봐주시나요? 안 봐주십니다. 만약에 봐주시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통해서 북이스라엘 열지파를 없애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두 지파 유다를 바벨론 포로로 데려갔다가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을 이스라엘을 사용해서 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죄는 하나님이 미워한다. 우상숭배하는 것,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걸 가르치시는 거죠.
그런데 2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가난한 족속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심판하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에, 이 하나님의 평가에 동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2장의 내용입니다. 다시 쉽게 우리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죄인이다. 사람은 어떤 선한 행위로도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이 하나님의 선언에 동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사람은 그가 어떤 선한 행동을 해도 사람들이 볼 때 저건 정말 놀라운 놀라운 헌신이다. 예를 들면 그때 노벨 평화상을 받았나요? 테레사 수녀, 이런 분들 평생을 나환자촌에서 평생을 이렇게 보냈던 어떤 분도, 그걸로도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하는 복음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것입니다. 이 가나안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분별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보니까 뭐 나쁜 점도 있네. 심판받을 만하네. 그런데 괜찮은 면도 있는데?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을 다 이들이 다 죽어야 돼? 그래도 아니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살 수도 있지 않아?' 라고 생각하면서 가난한 족속과 언약을 맺기 시작합니다. "살려줄게." 또 "너희들이 이 일을 하면 살려줄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분별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심판받아 마땅하고 진멸해야 된다라고 하신 분별에 이스라엘이 동의할 것인가? 우리도 계속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에 동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침례받을 때 이렇게 배우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나도 죽었다. 이것이 침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침례받는 것입니다. 그거에 동의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새로운 생명으로, 나도 새 사람으로, 옛 사람이 아니라 보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도다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불러 태워버리시겠다고, 그런데 우리는 그래도 이 세상도 괜찮은 게 있지 않나? 그러면 우리가 사사기 2장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속 말씀 가나안과 언약하지 마라. 가나안과 어떤 약속도 하지 마라. 가나안은 내가 심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분별에 동의하고 순종해서 가난과 어떤 경우도 약속하지 마라라고 하는 말씀을 2장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2장에서 다른 부분을 좀 보겠습니다. 제 3세대 문제를 보겠습니다. 2장 10절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호수아 세대 1세대가 있습니다. 1세대는 이제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거듭난 경험을 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교회를 세워낸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 세대가 가고, 그다음에 두 번째 세대가 2세대는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산 걸 본 거예요. 그런데 이 세대는 아버지처럼은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에 동의하고 자기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말씀을 경험하고 동일하게 살았던 이게 2세대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 그다음에 3세대입니다. 3세대는 이제 어떤 게 나오냐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알지 못하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3세대부터는 거듭난 경험을 못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할아버지는 거듭난 간증을 했어요. 아들 세대도 거듭났어요. 그런데 이제 이게 좀 약화되죠. 할아버지는 분명하죠. 언제 어떤 말씀으로 어떻게 거듭난지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교파 딱 떠나서 아무리 초라할지언정, 지하에서 방석을 깔고 모여도 말씀대로 모이는 교회 교회 해야 된다, 이렇게 한 거죠. 그런데 이제 이게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점점, 그래서 3세대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오면 거듭나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할아버지가 섬겼던 그 교회 가운데는 들어와 있어요. 이게 이제 망한 거죠. 거듭나지 않은 사람, 그러나 잘 알아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자기는 경험한 적이 없어요. 이게 이제 3세대의 문제점입니다. 저희들도 지금 한국 모임이 이제 60년대 되고 지금 이제 2세대들이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제 여기 주일 학교가 이제 3세대들입니다. 이때 이제 잘해야 됍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보통 저희들도 이제 그런 많이 하죠. 벌써 2세대에서 그런 많이 하는데, 이제 친구들이 구원 간증 막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들어보니까 이제 제가 마포 모임에서 들은 경험입니다. 어떤 자매인데 중고등학교 때 보니까 딱 후원 간증을 해가지고 다 침례받고 영접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후원 간증하는 거 보니까 그 간증은 자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자기도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해요. 그래서 자기도 교회에서 저기 침례받고 들어왔어요. 그래놓고 커서 보니까 구원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이제 고민을 하는 거예요. 이제 이런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이 3세대의 특징을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3세대의 특징은 이제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제 땅을 이렇게 줬어요. 땅을 주고 이 예를 들면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너희들이 이 땅을 다 차지해라, 그러면 이게 상당히 넓은 땅이에요. 그리고 아직 이스라엘의 수가 적어요. 그러니까 그 넓은 땅이 필요 없어요. 그 지역 중에서 제일 노른자 땅에서 잘 살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뭐냐면 이 기업으로 제비 뽑은 땅을 다 점령하랍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 뭐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라고 현상에 만족하는 특징이 3세대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합니다. 더 하려고 안 해요. 하나님은 더 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거룩해라고 하는데, "아 뭐 사람이 어디 뭐 그렇게까지, 뭐 아니 뭐 그렇게까지 살아야 돼?" 그래서 자기 수준에 만족하는 현상이 3세대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다음에 3세대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앞세대의 어떤 희생을 통해서 주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앞세대가 어떻게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 그 대가로 자기들이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많은 걸 누리면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요. 오히려 불평하죠. 이게 3세대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3세대는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하는데요.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거든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마실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 라고 약속이 돼 있거든요. 그 여러 가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요. 그러면 이 약속을 실제로 믿고 그대로 살았더니 이 말씀이 사실이네라고 하는 경험이 없어요. "뭐, 맞겠지."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안 구합니다. 먹을 거 다 확보하고, 안전하게, 그래서 실제로 어떤 말씀을 경험했는가? 이 말씀은 실제 내가 경험한 말씀이다라고 하는 게 없어요. 이게 3세대의 세 가지 특징들입니다. 현실에 안주한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없어요. 그리고 세 번째, 실제로 경험한 말씀이 없어요. 이게 3세대의 위험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 지적하고 이제 다음 번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사기 2장 2절,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 거인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해야 될 사람으로 보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심판해야 될 대상으로 안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단을 헐라." 그들이 세운 우상, 이거 정말 하나님은 미워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기도 일리가 있는 게 하나는 있구만, 그래도 뭐 이런 건 좋네, 우리보다. 라고 하는 게 있는 거예요. 이게 이제 하나님께 지적합니다. 3절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선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살아라." 이게 저주입니다. 이게 좋은 게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쫓아내지 않겠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랬을 때 4절에 백성들이 소리 높여 웁니다. 그래서 이제 2장에서는 이제 이 부분을 보겠습니다.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잘못을 지적하고 벌을 예고하셨을 때 그들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 울음이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잠깐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잘못을 지적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처벌을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는데요. 이 회개의 눈물이 이제 진짜 회개가 있고 가짜가 있어요. 이제 가짜 회계의 대표적인 사람을 보면 바로 왕입니다. 출애굽할 때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모세한테 와서 이제 막 파리떼 생기고, 막 우박 나오고 그러니까, 이게 현실적으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바로 저기 모세한테 와서 "내가 잘못했다. 너희들을 보내줄게." 이렇게 하고 "그러니까 우박도 피해 다시 복구해 주고 하나님께서 다시 징벌을 풀어주시면 좋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말대로 하세요." 하고 징벌을 풀어줍니다. 그랬더니 도로 말을 안 들어요. 그러니까 바로가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이거 가짜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들이 많이 비교하죠.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은삼십 받은 것을 대제사장에게 갖다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가짜입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후회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 후회하는 것하고, 회개한 것하고 차이가 뭐냐? 라고 하는 것을 잠시 잠시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보고 제가 다윗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울에 대해서 하나만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 13:11-12).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명 가량이라"(삼상 13:15).
여기 보면 이제 블레셋과 전쟁이 있는데 사무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라." 그런데 사울 왕이 생각을 해보니까, 이제 일주일을 기다려요. 6일 기다린 게 아닙니다. 7일을 기다려요. 그런데 상황을 보니까 백성들은 흩어지고 적은 점점 진 형태를 갖추고 그러니까 다급해진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제사를 지내버립니다. 제사는 제사장만 지낼 수 있습니다. 사무엘만 가능합니다. 자기가 지낸 거예요. 그리고 이제 사무엘이 와서 죄를 지적합니다. 죄를 지적할 때입니다. 지적할 때 반응을 보면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압니다. 사무엘이 뭐라고 말하냐 그러면 11절에 사무엘이 말합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책망한 거죠. 그랬을 때 12절 "부득이했다."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어쩔 수 없는 거다. 이거 이 경우에 그러면 안 그럴 사람은 누가 있냐? 이렇게 말하는 게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상대적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상대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 사무엘이 일어나 가버립니다. "당신의 나라가 길지 않을 것이다." 선언하고 사무엘이 가버립니다. 그랬을 때 사울은 자기 나름대로 행동합니다. 군대 가지고 한번 싸워봐야지. 사무엘이 일어나서 갈 때 그가 말했어야 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 당신 없는 싸움은 안 됩니다.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 것입니다. 사울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가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시간 관계상 나머지는 그다음에 진짜 회개, 사무엘 하로 가겠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 11:1-4).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삼하 12:7).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다윗의 경우를 보면 다윗은 이제 사실 사울보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훨씬 더 큰 죄를 짓습니다. 간음과 살인입니다. 훨씬 더 우리가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짓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저한테 자기는 딴 건 몰라도 다윗 이 죄는 용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한 가정을 파괴해버렸다. 그렇죠. 분노할 만한 죄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선 잠깐 보면요. 이제 제가 옛날에, 한 10년 전에 마포 모임에서 청년들, 요즘에 막 이렇게 너무 성적으로 문란하고 모임에서 그런 일도 생기고,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 이 교훈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같이 성경 공부를 해보자. 순결하게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는 예를 한번 찾아보자. 그래서 저기 누구 누구 같이 공부하면 좋을까, 그랬더니 첫 번째로 나온 게 요셉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렇게 유혹해도 안 넘어간 요셉. 그리고 이제 이제 반대편으로 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라고 해서, 이제 다윗 이 부분을 봤었는데 잠깐 설명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이유입니다. 첫 번째, 왕이 출전할 때가 되었는데 출전을 안 한 것. 이게 첫 번째 죄의 출발 지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왕이라고 그러면, 우리는 조선시대 왕은 권한이 막강하잖아요. 이거 왕이 전쟁 나가기 싫으면 안 나갈 수도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왕이 출전할 때가 되었는데 안 갑니다. 그리고 이 죄를 나단 선지자가 지적할 때,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부터 지적하냐면 "내가 너를 왕으로 삼았다."라고 하는 것을 첫 번째로 지적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왕은 뭐 하는 사람이죠? 전쟁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을 구합니다. 목적이 뭐죠? 전쟁하려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 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열방처럼 왕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하나님이 싫어하셨죠. 그렇지만 그들이 왕을 구한 이유가 뭐냐 하면 전쟁하려고 입니다. 우리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를 미리 모집해서 훈련시키고, 그다음에 적이 오면 이렇게 어떤 작전을 서서 싸우고, 이거 하려고 왕을 구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첫 번째로 주신 왕이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사울 왕을 잘 보시면 사울 왕은 첫 번째만 전쟁을 합니다. 암몬 나하스가 눈을 뺀다고 그럴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의 일, 이때 전쟁하고요. 그리고 나서 사울은 전쟁을 안 합니다. 자기가 전쟁하기 위해서 왕으로 뽑아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전쟁을 안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뭐냐 하면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이 40일을 나와서 "한 명 보내라. 나랑 싸우자." 안 나갑니다. 40일 동안 그 모독을 받고도, 아니 그거 하자고 저가 뽑혔는데? 전쟁을 누가 하죠? 다윗이 합니다. 그가 왕입니다. 다윗은 그다음에 이제 왕이 되었는데, 그가 전쟁을 안 해요. 이건 자기의 첫 번째 부르심은 안 하는 겁니다. 이게 이제 첫 번째 죄고요.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죠? 우리를 부르신 최고의 목적이 뭡니까? 예배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주님이 말씀하셨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그리고 지금이 그때다." 우리는 거듭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영으로, 말씀을 따라, 예배드리는 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합당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거 안 하면 우리 딴 거 아무리 잘해도 이거 소용없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지역 모임도 마찬가지죠. 지역교회가 뭐 하는 데냐? 예배드리는 곳이야 합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사람만 드릴 수 있고요. 왜 구원받은 사람만 드릴 수 있냐면, 그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렇게 찬양하고 높일 수 있는 이거 안 하면, 성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가 이 땅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해서, 서로 은사를 따라 섬겨서 주님이 구원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돕는 것, 이게 이제 성도들이 해야 될 일이죠. 다윗은 이걸 안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왜 그럼 왜 안 했냐? 이제 사무엘하 12장인데요. 8장에 보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 승리합니다. 8장에 1절 보면 블레셋을 이깁니다. 2장에 보면 모압을 이깁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국가를 전부 점령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윗의 군대, 그 당시에 했던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을 이렇게 해보면 이 군사력은 세계 제국을 일으킬 수 있는 군사력입니다. 예를 들면 앗시리아,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에 해당하는 군사력을 갔습니다. 다윗이 그는 이 군사력을 가지고 그 일대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공격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만약에 일반 국가가 그와 같은 힘을 가지면 점령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안합니다. 왜요? 그가 하나님이 세운 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왕들이 이제 힘을 가지면 점령할 수 있는 대로 다 점령해야죠. 그래서 가장 큰 나라 만들고 자기가 거기서 자기가 원하는 통치해야죠.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왕인 나라의 영광을 보이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자기 나라의 어떤 부강을 과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8장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합니다. 누구하고 싸워도 이깁니다. 이게 다윗이 전쟁에 안 나간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안 나가도 이긴다. 이 전쟁은 이기게 돼 있는 전쟁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깁니다.
암몬과의 전쟁인데요. 실제로 이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 겸손해야 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을 때 낮아져야 됩니다. 그것이 자기 것인가? 자기 힘으로 된 것인 것처럼, 다윗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 나가도, 요압 나가서 싸워서 요압이 조금 있다 그러죠. "지금 거의 점령했는데, 오셔서 마지막 마무리하셔서 이름을 얻으십시요." 이렇게 하죠. 그래서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안 나갑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 그가 왜 안 나가냐면 이게 이제 보통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공성전입니다. 전쟁이 그 당시에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냐면 이제 암몬 자손이 지금 전쟁하거든요. 다윗하고, 그런데 암몬이 세력이 약합니다. 그러면 어떡하죠? 성을 딱 닫아놓고 그 안에서 꼼짝 안 하고 수비만 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윗은 공격을 해야 돼요. 공격할 길이 없어요. 성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대요. 그럼 어떻게 하냐? 성을 포위를 합니다. 그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끊어버립니다. 양식 못 들어가게 합니다. 물 못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성들은 이제 막 자급자족이 되는 성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여기는 그게 아니니까 성을 싹 포위 공격을 하고 이제 시간을 끄는 겁니다. 양식 떨어질 때 기다리죠. 그리고 이제 내분 일어나고, 막 이제 이럴 때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면 그가 전쟁에 나가면 뭘 해야 되냐면, 장막을 치고 야전에서 자야 됩니다. 그런데 그는 왕궁을 지어놓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다시 그 야전 생활을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내가 왕국에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또 거기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윗이 첫 번째 본분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자기가 해야 될 부름받은 그 일을 안 합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과신함으로써 안 합니다. 안 갑니다. 이 세 번째,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에게는 늘 육신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육신이 남아 있습니다. 이 육신을 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죠.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은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도리어 버림받을까 함이라" 계속 우리는 육신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육신을 안 칩니다. 편안한 쪽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2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하냐? 저녁 때 일어납니다. 아침에 못일어나도 낮에는 일어나야죠. 저녁에 일어나는 게 뭡니까? 완전히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그동안 너무 피곤하고 힘들고 뭐 그랬으니까, 이제 이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때가 저녁 때니까, 이제 군인들은 다윗의 군대들은 이제 전투를 마치고 다시 텐트로 돌아올 때, 그때 자기가 일어난 겁니다. 이게 죄를 짓게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단 선지자가 찾아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안 합니다. 딱 한마디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나이다." 다시요, 저희들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당시는 왕국입니다. 왕국하면, 왕은 뭐 할 수 있냐면 왕만이 가진 권한입니다. 어떤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법에 의하지 않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왕국입니다. 그다음에 왕은 자기가 원하는 여자 취할 수 있습니다. 이게 왕국입니다. 그래서 물론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지만, 이게 지금 우리 시대, 우리 감각하고는 달리 이제 다윗 시대를 이제 그와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놓고 보자면 그럴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 법에 의하면 틀린 거죠.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세바한테 못할 짓을 했다. 우리아한테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 이렇게 말한 게 아니고, 그것도 사실이지만 이걸 포함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이에 나단이 이걸 지적하기 전에 하나님이 직접 다루십니다. 다윗은 시편 32편, 시편 51편에서 다룹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다루실 때 그가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고,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다." 그랬을 때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나이다." 하고 단순하고 명쾌하고 분명하게 자백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2장에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안 합니다. 울기만 해요. 이 눈물이 진짜 눈물이면 어떻게 해야 되죠?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첫 번째, 있는 현상으로 만족하지 말고, 지금 많은 은혜 가운데 있지만 이 현상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내가 결정하면 안 됩니다. "뭐 이 정도 하면 되지." 아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감사하고 경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말씀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경험한 말씀이다. 이렇게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안 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 3장부터 16장까지 7번 돌고, 돌고,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사기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교회를 향한 놀라운 약속과 역사를 하고 있는 이 은혜를 내 개인과 우리 지역 모임이 어느 수준까지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고, 또 개인적으로 저희들이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도전받을 사항들을 개인적으로 살펴보고, 주님 앞에서 실제로 회개하는 삶의 변화로 일어나는, 이런 기간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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