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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 부활에 관한 논쟁과 원칙들(요약)

박이레 2024. 3. 2. 18:43

< 사도행전 3장 : 부활에 관한 논쟁과 원칙들 > 24년 3월 2일 토요일(요약) / 한봉래 형제님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3:1-10, 개역한글)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2, 개역한글)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19-21, 개역한글)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3:25, 개역한글)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4:1-2, 개역한글)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주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십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앞에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과 은혜로 구원받는것이 충돌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사두개인들과 충돌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두개인이 옳은가? 아니면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이 더 합리적인가? 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누가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가? 어느것이 더 이성적인가 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아까 선교보고를 하면서 돈이 중요하다. 돈을 어디다 쓰는것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재정은 돈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물질을 다룹니다. 물질을 다루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토록 계실, 영광스러운 몸에 십자가의 상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봤을 때에 제자들은 주님 같은데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 들 중에 단 한명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번 말씀하셨음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간 여자들,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이 사람이 주장하기를 삼일만에 살아난다고 했으니, 혹시 제자들이 그 시체를 가지고 갈수 있으니 대비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베다니 마리아 한 사람만 주님의 부활을 예상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것들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한 배경하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이전의 육체와는 다른거죠. 그런데 똑같으신 주님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런것을 느낄 때에 주님께서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만질수 있을뿐 아니라 음식을 드십니다. 주님은 몸으로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몸을,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다른 철학과 다른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제약합니다. 성경은 몸을, 물질을 악하게 보지 않습니다. 헬라 철학이 보통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것은 거룩하고 육체는 부정하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와 반대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놀랍게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도 하늘만 있지 않고 땅만 있지 않고 하늘과 땅이 있습니다. 저희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물질, 몸을 성경은 부정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첫번째 기적이라고 하면,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탑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이 두번째 기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계속해서 기적들이 나옵니다. 많은 기적 가운데 사도행전 3장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것은 방언의 기적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방언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단번의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경험한 성도들은 죄 용서와 영적인 축복가운데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3장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확산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3장에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성전에 여러가지 문이 있습니다. 미문이라는 아름다운 문이 있었고 날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구걸하기 좋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고칩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생애의 고통을 돈이 경감해줄 수 있습니다. 돈은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다른 많은 것들을 줄수 있으나 돈이 해결할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르노니 일어나 걸어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 바로 옆에 불쌍한 장애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시면서, 사랑이시면서, 왜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이렇게 많을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의 현실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는가요? 이것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겁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기드온 쿠 형제님이 아삽의 시를 쭉 다뤘습니다. 그 내용에는 악한 사람이 왜 잘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하는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문제에 대해서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렇게 하시지만, 하나님의 복된 나라를 주실 것이지만, 그것이 연기된 이유는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천지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6일만에 해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팔 한번만 휘두르면 금방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방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알고 그 방법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이것이 천년왕국입니다. 그날이 올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잠깐 다른 대목을 보겠습니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19-23, 개역한글)

예수님의 부활은 뭘 보장하고 있느냐면 믿고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보장합니다. 주님께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몸의 구속을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구가 회복될 것입니다.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동, 식물도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고통스럽게 삽니다.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만드실 때에 본능대로 살라고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물들도 영광스러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이 의인화해서 하는 말이지만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탄식의 모든것을 보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임을 설명합니다.

교회는 날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 사회에서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두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은과 금으로 도울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 핵심적인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이와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전하고 주님의 다시 오실때까지 찬송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유쾌하게 되는날, 천년왕국, 주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날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3장에서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4:16-17, 개역한글)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행5:33, 개역한글)

사두개인은 두가지로 반대합니다. 첫째, 복음을 금합니다. 복음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모든 믿는자가 주님처럼 부활함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기적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고친것을 보고서도 안믿습니다.
그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안 믿는것이 합리적이냐? 저는 대학 1학년때 처음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독일문학을 전공을 하니 선배들이 독일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볼 것을 권했습니다. 공부하려고 읽었더니 첫 느낌이 말도 안되는 내용이다 입니다. 특히나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비과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과학을 모르던 시절에,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에 쓰여진 신화이다.
사두개인들도 명백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 기적을 설명할 수 없어서 의도적으로 외면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현대 과학인들, 지식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대제사장 가문입니다. 백성들이 가져오면 양을 잡고 그 피를 단에 뿌리고 백성에게 가서 죄가 용서되었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도 인정하고, 죄도 인정하고, 피가 죄를 속한다고 하면서 영도 없고,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모순되었습니까?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 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헬라 철학을 취했습니다. 세상 견해를 취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 그 중에 한 견해를 자기가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견해를 도전하는 견해가 나타나면 생각해야 합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도전하는 현상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빌립보 간수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지진이 나서 옥토가 무너졌을때 그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간수의 생각으로는 자기는 죽는것이 낫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큰 소리로 이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수 있느냐고 질문했을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다른 해결책을 바울은 제시합니다. 우리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확실한지를 듣고 받아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견해의 문제점이 드러났을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사두개인이 왜 그랬을까요? 사두개인은 그 당시 제일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또 대제사장은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권리를 팔아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들은 특권층이고, 부를 누리고 있고, 그들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자기들의 삶을 위협하는 저 세상이 오면 안됩니다.
복음은 두가지를 도전합니다. 삶의 방식에 대해서 삶의 스타일에 대해서 도전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입증합니까? 그럴때에 정직하게 열린 생각을 가지고 이 생각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것을 끝까지 고집하고 눈을 감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좋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증거하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사람은 거짓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