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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복음으로 돌아가 푸는 사도(요약)

박이레 2024. 3. 2. 18:41

<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복음으로 돌아가 푸는 사도 > 24년 3월 1일 금요일(요약) / 한봉래 형제님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4-9,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입니다. 굉장히 부러운 교회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는 집회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은사는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증거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회를 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많은 다양한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집회를 하는 최종 목적은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삼년간 주님과 함께 했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육체로 오신 주님이 아닌, 부활하시고 영광중에 계신 주님을 계시록에서 만납니다. 그때 사도요한이 그 앞에서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됩니다. 저희들의 최종 목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느날 주님을 눈으로 보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주님을 보았을때 잘 보실 수 있겠습니까? 사도요한도 그 앞에 엎드러져 같히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물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지만, 우리가 집회를 하는 것은 그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설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한번 하신 일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자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드님과 교제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가운데 은사를 주셔서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게 교회인가 싶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괜찮은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막 세워진 교회입니다. 저희는 21세기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과 많은 지식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루터가 읽었던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상황도 다 알고 어떤 믿음으로 했고, 그럼에도 어떤 실패가 있었는지 저희가 다 압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것이 아니지만 고린도 교회의 실패를 보고 저희가 배울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교회안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1:12, 개역한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바울은 이렇게 접근해 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고전1:13,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가 받은 복음으로 해결해 갑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는 바울에게"라고 말한다면, 바울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진리이지만 이 문제를 복음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교회안에 교회진리의 문제가 생기면 이것은 처음으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5:1, 개역한글)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5:7-8,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세상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할때 짐작해 볼수 있는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때, 죄와 사망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죄와 사망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속죄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사드릴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죄를 다시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다 해도 죄가 전부 용서받았는데 죄를 물어야 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마치고나서 무교절이 시작됩니다. 일주일간 누룩없는 떡을 먹습니다.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 이후부터 죄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 용서를 받았으니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유월절 이후에 무교절을 전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무교절 다음에 있는 절기가 초실절입니다. 그리고 괴악한 누룩에 해당하는 이 자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길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믿었는가를 다시 살핍니다.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1-3, 개역한글)

성도들이 성도들 사이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복음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1장) 두번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세번째, 사도바울은 미래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 용서 하나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당연한 권리를 말합니다. 나중에는 천사를 판단할 것입니다. 지금은 천사가 사람보다 높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섬기는 종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저희들이 아직 몸이 변화되지 않았기에 천사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천사들은 저희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실 때에 교회가 천사들을 판단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의 신분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놓고 우리가 통치해야 될 세상에 와서 우리를 판단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답은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개역한글)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0-12,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우상은 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이제 자유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자유를 약한 형제를 위해서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면 약한 형제가 강해져야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할수 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너는 네가 가진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억울하다 하느냐?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전10:21-22, 개역한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상에 참예합니다. 주님의 상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왕이 잔치를 베푸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차려놓으신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죄용서를 누리고 미래의 소망을 누리고, 현재의 삶에서 주님을 배우는 놀라운 혜택 가운데 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다른 날은 신전에 가서 최고급 고기를 먹고, 두개 다 하겠느냐? 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으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으로 고급한 것인지 알면서 다른 신전에 가서 주를 노여워 하시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자를 사랑할때 질투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복음과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11:21-22, 개역한글)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4-25, 개역한글)

만찬 자리에 와서 만찬을 할때, 저희들과 달리 그 당시에는 만찬과 애찬이 함께 있어서 자기가 먹을 것을 가져와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 자리가 무엇인가, 주님을 기억하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떡은 주님의 몸이고 잔은 주님의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하셨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형제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셨는데요.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기록해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배만 위하는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복음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31, 개역한글)

12-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집회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현은 혼란이고 무질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어나 방언을 하는데 여러명이 동시에 했습니다. 자기 은사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매들도 발언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14장에서 이것을 바로잡아 갑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은사있는 분들이 자기 은사를 나타내려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몸이다. 몸의 지체는 다른 몸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몸 전체의 기능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는 지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가요? 몸을 세우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는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고린도교회의 문제와 그 문제를 대처해 가는 사도바울의 방법이 전부 복음과 연관해서 말해가고 있습니다.

15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2, 개역한글)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5, 개역한글)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부활이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질문은 고약한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형태를 띄어서 성도들의 믿음을 허무고자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대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1, 개역한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3-4, 개역한글)

그들은 사람의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복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확실히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인간의 생각, 합리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논리가 아니고 영적인 논리를 씁니다. 세상의 논리와 다르지만 성경은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이 두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개역한글)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2-24,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장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다룹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시편 8편에 이런말을 하죠.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사람의 본질적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독특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만 사람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 영광과 운명을 맏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을 믿도록, 신뢰하도록 만드신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실패했습니다. 왜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지혜로 판단해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셨다고 고린도전서 1장은 말합니다. 십자가라고 할때 강조점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당대 최고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 총독이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를 쓰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고린도에서 똑똑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사회에서 못난 사람, 멸시 받는 사람을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광은 자기의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이 사람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십자가를 사용하셨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전도자의 복음의 능력에 근거해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복음은 받은 복음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시고 나의 생의 삶의 문제에 대한 절망 앞에 서게 하시고 유일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무기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골리앗은 어마어마하 무기,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방어구도 없고 물매돌만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갑옷과 무기를 취할 수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는 골리앗과 싸워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무기로 승리했습니다. 그때에 그 영광은 다윗에게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지혜를 구하고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고린도전서를 살피면서 고린도 교회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맞는 교회를 세우고 있는가? 또 영광스러운 주님을 뵐때에 믿음과 기쁨과 찬양으로 뵈며 설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