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리스도의 생명 > 존 쇼트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특별히 여러분과 함께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비록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한 번도 여러분 계시는 이 섬에 온 적은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이곳에 살고 계셨던 이 섬 사람인 한 분이 이제 중국 홍콩에 6년 전에 와가지고 오스틴 모임에 저희가 영접해서 함께 교제한 것입니다. 사실상 저는 그 자매를 저희의 가족으로 입양한 셈이고 참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매님은 홍콩 모임에서 또 같이 생활하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그 자매님의 부모님은 여기 형제님 자매님이고 이 모임에 소속된 지체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 이제 인애 자매님이시죠. 그 자매님은 이 제주 모임의 한 역사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홍콩에 있는 오스틴 모임의 역사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장소에 있든지 또 어디를 가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역사를 그 순간에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이름이 아시다시피 존 쇼트입니다. 또 쇼트라는 것이 이제 영어로 의미로는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키가 큰 게 아니라 이제 작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제가 또 입도 이 말하는 데 있어서 짧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점에 있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집회가 길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큰 수양에서 말씀을 전하는 그런 설교자가 아니고 저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또한 이번 주일에 제 간증과 함께 말씀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어떻게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또 어떻게 그것을 행했는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와중에 제 아내를 만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선교 사역을 14년 진행하고 있을 때에 저는 제 자매를 한 번 보고 주님께서 이 자매가 나에게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아내로구나, 라고 알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함께 선교 사역을 동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일요일에 말씀을 드릴 이야기인데요.
이제부터는 이제 금요일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저의 짧은 이 말씀의 주제는 생명, 우리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교회에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이제 빛이 켜져야지 그것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방 안에 들어갈 때 그 방 안은 완전히 어둡고 완전히 컴컴한 그런 방안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상황 가운데 굉장히 어려운 상황,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 들어갔을 때 내가 무엇을 해야 될까? 이렇게 먼저 먼저 무엇을 해야 될지를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어둠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헛된 말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아주 칠흙 같은 어두운 방에 들어갔을 때 여러분이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단 하나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빛을 켜시오!" 그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빛을 켜시오!"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가지고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빛을 켜가지고 그가 어디에 있고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 1장부터 3장까지 어떤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지를 금방 아실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4절,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구절은 얼마나 보배로운 구절입니까? 그리고 5절에 "빛이 어둠에 빛이 돼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서 "빛을 키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성육신하여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로 그 빛을 키신 것입니다. 9절, "참 빚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으니" 그리고 여러분은 이제 3장 16절에 이 위대한 구절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7절과 18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여기서 세상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에게 이 세 가지 것을 생명, 빛, 사랑 이 세 가지 것이 우리 주에서 그리스도 하나 있었다는 것을 집중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에 내일 더 이것을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지만은 거기에는 또한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생명 나무로 가기보다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들이 불순종하고 나서 2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시간은 먹지 말라 내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순종하였고 그리고 그 결과는 3장 마지막 2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주님의 뜻이면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 내일 밤 또한 다루고자 합니다. 여기에 생명나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어서 그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이 어떠한 민족이든지 간에 호주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모두 이 동일한 아담으로부터 우리는 상속된 그런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다루시고 그걸 다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악입니까? 오늘날 우상신으로부터 이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선이나 악이나 그냥 상대적이고 별 차이가 없다, 라고 말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가 내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와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여기 그리고 이 생명나무는 창세기에 처음 나오고 그리고 계시록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찾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 계시록에서 다시 생명나무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 후에 이제 그 하늘을 닫으시고 사람들은 이제 거리를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그 하늘의 문이 다시 열린 것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이제 그는 환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그 가운데서 구원을 잠깐 보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에게 환상으로 보여줬을 뿐입니다. 단지 그는 그 하늘이 다시 열릴 것의 가능성을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에스겔서 1장에서 그걸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에 와서 마태복음 3장 16절에 가서 보게 될 때, 마태복음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은 이제 침례 요한의 그 침례 장소에 나와서 "내가 침내 받아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태복음 3:16).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고 나오실 때 그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복음 모두 이 침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아들 위에 하늘이 열리고 무언가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은 죄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1장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하늘이 열리는 것을 예언적으로 말한 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실체가 마태복음 2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한 사람 위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요한복음 1장 51절을 특별히 집에 가서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나중에 이제 바돌로매이라고도 명칭이 되는 주님의 열두 제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때 우리 주님께서 그를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이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 야곱의 간사함, 그것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맥을 알기 위해서 45절부터 보게 된다면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서 말해줍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바로 이 사람이 우리가 찾던 메시아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이것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아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5절의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일을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그리고 46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리고 와보라라고 초청했습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가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49절에 나다나엘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단지 유대인의 왕일 뿐만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그 하나님의 아들 위에 그 인자를 위에 열렸다는 것은 그분은 온 세상을 위한 메시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구약 성경에서 이것이 말하고 있는 그 구약의 그림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야곱이 그의 형을 두려워하여 도망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야곱은 아주 꾀가 많은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사한 자, 속이는 자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내 자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어떻습니까? 우리는 죄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성품은 구원받지 못할 만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놀라운 점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그는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야곱의 형, 에서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용맹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것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참으로 야곱은 여러분과 저와 같이 참 가능없는 그러한 불쌍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으로서는 절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고 단지 팥죽 한 그릇으로 그것을 팔아버린 사람입니다. "아니 내가 지금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 하늘에 그러한 것들이 다 무엇이 소용이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의 장자권을 그냥 경홀히 여기고 동생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경홀히 여기는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런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에 대해서 작은 것을 말하였다라고 놀랐느냐? 너는 더 큰 것을 보리라 그것은 바로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 자신을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5장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역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내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그 도망가는 길에 누웠을 때에 그는 꿈 가운데서 한 사닥다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서 그 가닥다리는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그 부활의 증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열흘 후에 주님께서 다시 돌아오시게 됩니다. 그분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시게 된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그분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오리라라고 약속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그분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자신 안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느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 가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네 번째 게 나와 있습니다. 55절과 56절입니다. 스데반은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였고 그 메시아를 싫어한 만큼 또한 스데반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을 던져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좌의 우편에 계신 것을 그는 바라보게 됩니다. 휘장이 열리고 그리고 그 안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인자께서 그 영광 가운데 계신 것을 하늘이 열린 가운데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 그 하늘이 다시 한 번 열린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하늘이 열리고 이제 음식이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 세대에서는 부정한 것으로,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 구별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하늘이 열린 것이 계시록입니다. 4장 1절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아시아의 교회들에 대해서 편지를 말한 후에 이제 4장 1절에 하늘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들이 모두 하늘로 휴거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장 1절에 이 열린 하늘은 이 땅 가운데 내려지는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다시 한 번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7번째 하늘이 열린 것이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하늘이 열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9장 11절입니다. 거기에 하늘이 열린 것이 7번째로 나오게 됩니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7개의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 3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에 대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네 가지를 찾아보았는데요.
우리는 이렇게 하늘과 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영을 이 땅에 하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한 몸인 그 교회로 온 우주적인 교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200번이 넘게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가장 놀라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가 단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좀 낙심한, 그러한 상태 가운데서 종교적인 상태로 보내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좌절한 상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들은 진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어려움들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구원받을 때 그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동일한 경험을 여러분도 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서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 질 그릇에 이 보배를 가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지만은 참으로 우리 안에 그 질 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이제 믿는 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요.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 위대한 서신서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리스도 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반복해서 이 위대한 서신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하나님 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 가서 보게 될 때, 그리고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주님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처럼 나도 그들 가운데 믿는 자들 가운데 있고 그들이 내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
참 믿는 자들이 그들 안에 있는 그 부활의 생명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생명이 얼마나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능력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야곱처럼 옛 성품을, 그런 간사한 것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못해. 나는 너무 연약해." 아주 교만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날 봐. 나는 능력이 있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나는 슈퍼맨처럼 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항상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사단이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미혹할 때에 그가 가장 유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성경에 그 믿음의 조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러분과 저보다 굉장히 어떤 점에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여러분과 저처럼 많은 실패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도 그랬고 그의 아내도 거짓말을 연약한 가운데 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어떠함이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 또 그는 범죄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0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모든 믿는 자들이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제 생애 많은 세월을 공산주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참으로 북한은 굉장히 강력하게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무기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공산주의 나라가 두려움을 가지고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믿는 자들도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단지 은혜로 그냥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해서 제가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러분이 믿을 때에 그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 이름처럼 쇼트, 짧습니다. 내일 밤 다시 와서 또 이야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이 보다시피 큰 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코은 어떤 냄새를 맡냐면은, 이 큰 코는 믿음의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그 냄새를 맡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제 사랑하는 형제 중에 한 명은 아주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21년하고 8개월 되는 시간을 거기서 보냈습니다. 76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76년도에 모택동이 죽었고 3년 후에 등소평이 그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1년과 8개월 동안 감옥에 잡혀 있었던 그 윤승찬이라는 저의 사랑하는 형제는 그 시기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는 계속적으로 신실하게 그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명의 아이를 둔 그의 아내는 믿음 안에서 그들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참 이게 더 이상 선과 악을 아는 그 지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인, 생명인 것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나는 베이징에 그 풀려난 형제를 만나러 가야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가깝게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가깝게 그 형제와 옆에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형제를 제가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런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몇 년 전에 그는 하늘로 소천하였습니다. 그런 항상 작은 카드를 만나면 주곤하였는데 거기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을 의지해라.'라고 여러분이 나눠준 작은 메모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형제인 송승찬이라는 형제님은 이 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가정교회를 방문해서 이곳을 나눠줍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기만 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정말 한국 분들이 제 호주 사람의 노래보다 더 잘하는 것을 제가 알고 있는데요. 참으로 여러분이 두려움이 있을 때에 이것을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 (1절)
주님의 깨끗한 보혈을 날마다 입으로 간증해 담대히 싸우며 나가세.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너희게 하셨네. (3절)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이 믿음의 용기가 용기를 항상 발휘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이렇게 죽은 물고기같이 움직이는 믿음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믿음, 용기를 내는 그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