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7일 화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사무엘상 19장>
여름이 가고 있고 수양회도 끝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새학기가 돌아옵니다. 새학기가 돌아오면 자녀들이 자라나는데 주님께서 저희 마음에 은혜 주셔서 저희들의 아이들만 자라는것이 아니라 저희들도 자라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복음의 역사가 있고 저희들의 마음에 어려움이 있어도 시련과 유혹이 있어도 견고해지고 주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모임이 계속해서 주님가운데 가기를 원합니다.
지난시간에 이어 사무엘상 19장을 보겠습니다.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삼상19:1-7, 개역한글)
주님께서 읽은말씀에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18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윗이 궁안에 들어가서 일하고 결혼에 대한 제안을 받고 그가 모든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18장 마지막 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나올때마다 그가 사울의 다른 신하들보다 지혜롭게 행하매 그의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라고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의 궁전안에서 여러번 지혜롭게 행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별히 30절 마지막절 알씀을 보면 블레셋이 공격해 들어올때마다 다윗이 나가서 지혜롭게 행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군사적으로 지혜로웠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격파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경에서 전쟁에 나갔을때 졌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그는 군사적 영웅이었습니다. 특히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모든것은, 블레셋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안에 살던 족속 이었습니다.
블레셋을 생각하게 될때 이는 기독교 계에 있는 기도하고 성경을 알고 교회에 나가는 거듭나지 않은 기독교적 종교인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와같은 세상적인 요건들, 블레셋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삼손이 드릴라에게 반했습니다. 완전히 자기 생명을 다 빼앗길정도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이 주장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의 원래 고향은 지중해의 섬입니다. 애굽에서 살다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점에서는 이스라엘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차이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건너게 했고 만나로 광야에서 먹었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가나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레셋은 기독교계의 참된 생명없이 겉모양과 매력적인 것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그룹인 것입니다.
블레셋이 다윗시대에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는 것은,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가장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역사가 2000년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공격해보게 될때, 삼손으로부터 블레셋의 공격을 차단하려 하였지만 블레셋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종지부를 찍은사람은 다윗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는 기독교계에 있는 이와같은 사이비, 기독교를 말하지만 참된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부르지만 정말로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는, 응답이 없는 기독교적인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의 역사,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정말로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차단했다는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기독교계에 어려움을 주는 것을 정말로 차단할수 있습니다. 육적인 싸움이 아닌 신령한 영적인 참것을 가지고 막아낼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독교계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다 성경을 가지고 찬송가를 가지고 다 하늘나라 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와같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공격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릴수 있을까요?
다시말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그와같은 것을 차단할수 있습니다. 공격을 물리칠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와같은 일을 했을때에 19장에 들어오면, 사울이 그동안은 몰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이제 19장에서는 다릅니다.
'사울을 천천 다윗은 만만'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 노래를 듣고 사울은 시기심에 불타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시기심이 들어올수 있습니다. 질투심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수 있습니다. 경쟁심, 성령에 충만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 빠져있거나 육적인 것에 빠져 들어가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비교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속의 육을 자극해서 시기심을 격발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미움과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언사에서 대단히 불쾌한 언사를 하게되고 실제로 싸우기도 합니다.
사울이 이 시기심 속에 빠져들어갔을때 악신이 역사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심각한 범죄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는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사울의 이와같은 공격에 다윗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블레셋에게는 지혜롭게 처신하였지만 그 안에 있는 원수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울에 대한 처사에 대해서는 자기가 어떻게 감당할수 있을까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테스트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모양으로 인도해야 할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인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반대에 부딧치게 됩니다. 또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럴때 어떻게 할까요.
그와같은 케이스에 가장 전형적인 예가 있다면 다윗입니다. 요셉도 그런 사람이었고 모세도 그런사람입니다.
그들이 시기심으로 인한 반대에 부딧쳤을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위대한 교훈입니다. 19장에 보면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어야 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 시기를 받은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혀 생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불러서 그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사울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공개적으로 그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시기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시기의 대상이 되는것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된것입니다. 이와같은 다윗을 옆에서 지원해주는 세사람을 소개 합니다.
하나는 요나단, 두번째는 아내인 미갈, 세번째는 사무엘입니다.
다윗이 시기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둘때 그를 방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위에 올려놓을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테스트위에 올라가면 쉽게 불평합니다.
불평하면 복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승리할수 있는 지렛대를 잃어버릴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해 시험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윗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런 문제에 빠지는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많은 경우에 사단이 우리를 까불립니다. "네가 바르지 않아서, 하나님 뜻 가운데 있었으면 이러한 고난은 안당했을텐데 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 뜻가운데 있었다면 이런것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게 될때 많은 의인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우리를 훈련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구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테스트 위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다윗은 이와같은때에 그가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속에서 있을때에 하나님은 그가 생존할수 있도록 이러한 사람들을 마련하고 있으셨습니다.
요나단이 대변합니다.
다윗에게 들에 가있으라고 하고 요나단이 직접 방패막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 합니다.
"왕이시여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다윗은 요나단과 친척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만일 다윗을 죽이면 아버지가 범죄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마디로 못박아 버렸습니다.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삼상19:4,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이는 팩트입니다. 한 커다란 사실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격파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있는것을 요나단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보게 될때,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눈으로 볼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실만을 보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통찰력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보게될때 많은 사람들이 그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로 분석하는 평론가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건을 가지고 그 배후를 이야기하는것을 세상에서는 평론가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볼줄 아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쳐서 격파했는데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다윗이 이렇고 사울은 이렇다만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영적인 저조함입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것을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현실과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우리가 컴퓨터가 고장났을때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압니다.
그사람의 눈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라골짜기에서 역사하셔서 이일을 하셨습니다.
이일을 요나단은 알고 있었지만 사울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그것을 알았다면 사울은 감사했을것입니다. 이것이 통치자의 마땅한 바 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국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왕권을 쥐고 가는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격된 왕입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삼상19:5, 개역한글)
<무고히>
이는 근거없이, 이유없이 라는 뜻 입니다.
신명기 19장 말씀, 그리고 민수기를 보면 도피성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였을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죽일 의도가 없었지만 잘못해서 죽인 경우와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아닌것처럼 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전자는 도피성으로 도망가서 살수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의도해서 죽였다면 그는 어디를 가도 살길이 없습니다. 고의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 태어나서 죄인이라고 할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도적으로 죽인자가 아닌 실수로 죽인자로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떻습니까? 마귀는 고의로 죽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무고히라는 말은, "아버지는 왜 다윗을 근거없이 죽이려 합니까? 이것은 도피성으로 도망가도 피할길이 없는 범죄를 아버지가 저지르려는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요나단은 그런의미에서 상당히 구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을 잘 아는 사람은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른 판단을 내릴수 있습니다.
사울은 성경을 아는 것같이 여호와의 이름도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때 사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19:6, 개역한글)
경건한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현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바로 몇절뒤에 보면 다시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번복합니다. 위선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 현실은 없는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안보실거라고 생각하면 그런일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설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 우리는 범죄할수 없습니다. 주님앞에 나와서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고도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랬습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랬습니다. 위선적입니다. 말을 하고 행동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 감각이 없고 느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8절 이하 말씀을 보면 전쟁이 다시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가 블레셋을 도륙합니다. 대승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전에 사자와 곰을 상대로 싸우던 모든 실력, 하나님앞에서 훈련을 받았던 모든 능력,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힘을 가지고 그는 백전백승으로 승리하고 백성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는 일에 그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때 사울의 죽이려고 하는 계획은 전혀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접해서 사울이 다시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다윗은 죽을수 없습니다.
0.0000001% 라도 다윗은 죽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때까지 절대로 죽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이 운이 좋아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기에 사울이 아무리 다윗을 죽이려 해도 그는 성공할수 없습니다.
다시 다윗은 사울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도망갑니다.
집으로 도망갔을때 다윗의 아내 미갈이 도와줍니다. 미갈,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 딸입니다. 아버지가, 대행권위를 가진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을때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자녀들에게 주는지 모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집안입니까? 이 집안은 망한 집안입니다. 망해버렸습니다.
미갈이 다윗의 아내 입니다. 만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데 성공하면 자기 딸을 과부로 만드는 것입니다. 일생을 괴로움과 슬픔속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것입니다. 이는 악신이 역사하지 않는한 그렇게 할수 없는 것입니다.
미갈이 아버지에게서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꾀를 씁니다. 그러나 미갈의 방법은 육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미갈의 방법은 추천할만한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때 우리가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사건에서, 성공적이고 모범이 되는 사건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십분따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있으니 따라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는 교훈은 이와같은 경우가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교훈과 지혜를 얻습니다.
미갈이 두가지 방법을 씁니다.
첫째는 다윗을 창문에 달아 도망가게 합니다.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삼상19:8, 개역한글)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삼상19:12, 개역한글)
여기 두가지 도망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블레셋이 다윗에게서 도망합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다윗이 사울앞에서 도망합니다.
어떻게 도망합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인을 보내서 문앞에 매복시켜 아침이 되어 다윗이 문에서 나오면 죽이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그집을 포위하지 않았기에 다윗이 도망할수 있었습니다.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삼상19:13, 개역한글)
마치 다윗이 잠자고 있는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다윗의 집안안의 모양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일부러 우상이야기를 하려고 한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집, 미갈의 집에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의 집안에서 미갈이 우상숭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여기 우상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다윗으로부터 무엇을 배웁니까?
다윗은 이런 아내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이 다윗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까요?
사울이 그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삼상25:44, 개역한글)
다윗이 이 날로부터 완전히 사울을 떠나서 들로, 동굴로 도망다닙니다.
그러던 도중에 어느날 사울이 또다시 왕권을 행하고 부권을 행하여 미갈을 발디에게 그냥 주었습니다.
이혼없이 그냥 다른사람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 것이 이런 일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여인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린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될때에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와서 화친을 청합니다. 그때 다윗이 "네가 만일 나와 화친하려면 반드시 미갈을 데려오라. 미갈을 데려오지 않으면 나를 보지 못할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브넬은 군장으로 미갈을 데려옵니다. 그 남편이 울면서 쫓아왔습니다.
정권의 힘으로 결혼시키고 다시 짜개는 일을 마음대로 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당시의 하나님 앞에서의 커다란 악이었습니다.
슬프게도 다윗이 이와같은 일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미갈은 두가지 변명을 합니다.
"그가 병들었습니다." 우상을 덮어서 자는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군대를 보내 체포하려는 작전을 썼는데, 이제 집안으로 들어가서 "침상째로 들고와라 내가 죽이겠다" 라고 합니다.
이 대화의 내용을 보면 대단히 거칩니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안고 육의 인도를 받고 자기 생각대로 하면 언어가 이렇게 거칠어 집니다.
오늘 저희들이 소금에 대해서 보았고 소금의 간을 맞추는것이 우리의 언어나 행동으로 결부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악신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행하는것은 살인, 폭력이었습니다.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삼상19:17, 개역한글)
미갈은 요나단처럼 "아버지 의로운 사람을 왜 죽여야 합니까?"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 하나님 앞에서의 실책에 대해서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 앞에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속에 우리의 자세가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미갈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면 그는 의지하는대로 이야기 했을것입니다.
아버지가 얘기할때 둘러댔습니다. 둘러대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믿을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의지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이 "나를 놓아 가게하라"고 말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야기 할때 그 앞에서 무서워 했습니다.
잠언에 사람을 무서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올무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면 절대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행했을때 "아버지께서 왜 그런 악을 행하십니까?" 라고 요나단처럼 똑같이 이야기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못하고 자기가 어쩔수 없이 해야 했던 것처럼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이야기 합니다.
다윗을 아내를 죽이려고 협박하는 사람처럼 아버지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윗의 영예는 실추되어 버립니다.
가정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사람처럼 드러나버렸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두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 다윗을 방어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무엘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삼상19:18, 개역한글)
다윗은 어디로 도망갈까요?
다윗의 마음속에는 자기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해준 그분에게 가서 도움을 청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힘을 길러 사울을 대적할 방법을 찾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찾아간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일을 다 고했다>
이것은 자기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다 토해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때, 해결할수 없는 막다른 길에 봉착한것과 같은 상황속에서 어떻게 합니까?
나의 이 모든 괴로움의 답이 있든 없든, 내가 괴로운것을 이야기 할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것이 다 비밀이라면 여러분의 가슴과 머리는 터질것입니다.
우린 적어도 주님 앞에가서 괴로움을 토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한 파트가 토하는 것입니다.
모든것을 말씀드리기 때문에 내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고 죽어버리는 이유가 아무도 그 괴로움을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가장 어려울때라도, 절대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로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가서 다 토할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여기에 사무엘이 있다고 하는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와같은 일을 들을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그것은 더 복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열세명의 사사중 마지막 사사입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로서 사울이 이미 왕이 되었고, 사람들이 자기를 많이 떠난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실망을 가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사사로 있었고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라마 뿐 아니라 사역하는 여러장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가서 이야기를 할때 영적으로 신뢰할수 있는 사람들이 들어주었다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대화를 잘못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나발입니다.
그는 말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소한테 가서 경을 읽지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말만 계속하고 남의 이야기는 절대로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는 대화할수 없습니다. 대화라는것은 내가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또 즐기고 그다음에 또 내가 이야기할때 저사람은 내 이야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다 이야기 했을때 그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상처가 났을때 고약을 바릅니다. 어릴적, 고약이 없으면 밀가루를 반죽해서 거기에 붙입니다.
가지에 소염제가 있기에 가지를 잘라 상처에 발라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마음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무엘에게 가서 다 이야기 할때 그것을 사무엘이 다 들어주었을때 그것은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를 받았을뿐 아니라 사무엘이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갑니다. 그 소식이 사울에게 들려집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자기가 행하려는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것처럼 영향력 있는사람에게 다윗이 간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쫓아갑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19:20, 개역한글)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첫째, 사무엘과 예언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저조한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40일간 블레셋과 대치하게 될때 한번도 하나님앞에 나가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공포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윗이 나타나서 승리하니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시대는 어두운 시대가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감각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만났을때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행으로 이기면 기뻐하고 골리앗에게 협박을 당하면 두려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런 갈길을 알지 못하는 양처럼 영적으로 저조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려움이 있을때 세상을 이기려고 할때 우리 방법을 씁니까? 내 생각대로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우선으로 두고 승리해도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울때 주님께 구하고 가면서 답을 얻습니까? 아니면 그냥 요행으로 되면 좋고 아니면 짜증 냅니까?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랬습니다.
어두운 시대라는것은 다른말이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라는 것은 우리 일생활에서 주님이 역사할 자리가 없는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사무엘과 선지자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무리가, 바로 우리가 그러한 사람인가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별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멋진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두운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위대한 빛을 드러내는 시대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나 에돔이나 모압이나 암몬에 부스러기같은거라도 얻어보려고 하는 시대가 어두운 시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마냥 그 밑에 가서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는것이 어두운 시대입니다.
사울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 쫓아간 사람들이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당시에 주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저분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유가 됩니다. 영적인 힘, 도덕적인 힘입니다.
체포하러 갔지만 잡지 못하고 오히려 체포하러 간 사람이 예언을 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게 될때, 구약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멸망시키려고 할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령께서 그입을 딱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축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두번째 또 보냈을때 똑같은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세번째에는 사울이 친히 갑니다.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삼상19:22-24, 개역한글)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이 말은 옷을 싹 다 벗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18장에서 요나단이 다윗의 업적을 놓고 그를 너무나 사랑하고 기릴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자기옷을 벗었습니다. 요나단이 황태자고 왕이 될사람인데 옷을 벗었습니다. 그말은 공적으로 다윗이 왕이 된다는것을 자발적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옷을 벗었습니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언을 할뿐만 아니라 옷을 벗고 거기에 누워있었습니다. 물론 다윗을 체포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당시에 사무엘이 끼쳤던 영적인 영향력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려움을 겪게 될때 주님께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도 가지않고 신령한 사람에게도 가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길어가기 때문에 많은 실패를 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사야서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 모사요, 기묘자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카운슬러입니다. 주님의 카운슬러를 받는사람이 다른사람에게 카운슬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카운스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다른사람을 카운스 할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도피할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신령한 사람을 찾아가면 신령한 방법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딘가로 도망가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올때 그들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롯이 소돔에 들어가서 한참 세속적으로 살다가 갑자기 천사가 와서 그곳이 멸망할것을 이야기하자 그때서야 갑자기 사위들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때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깁니다.
사울은 왕이긴 왕이지만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사람들이 뽑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신령한 사람이 아님을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예언을 하니 그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당시에 영적인 사람이 아님을 이야기해 줍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듣는사람이 "세상적으로 잘 살다가 갑자기 무슨소리요?" 라고 한다면 우리는 마치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될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세사람이 다윗을 방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려움 가운데 두시면 하나님이 직접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두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분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만 돕는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뜻 안에 있을때 주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을만한 분이고 주님은 언제나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시련이 올때, 때때로 하나님을 의심할 만큼 어려움속에 빠지게 될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향해서 반기를 드는 자세가 아닌, 여전히 주님앞에서 엎드리게 될때, 주님앞에서 도움을 구하게 될때 주님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마음이 다윗처럼 어려울때 다윗이 어떻게 걸어갔는가라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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