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4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29>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5-9)
전체흐름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흔히 산상수은으로 말합니다. 산상수은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를 말씀하시며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이 잘못된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5장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됬습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은 살인하지말라는 십계명의 하나님의 말씀을 살인이라는 행위만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이해 했습니다. 하지만 5장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래 의도는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행위뿐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세가지를 다루십니다.
1. 구제 2.금식 3.기도
말씀에 대한 이해가 틀리면 삶이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살피는 이유는 정확하게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살인만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이라는 율법을 행위로 지켰다 생각하고 자기를 의롭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하게 하였지만 속이 더러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태도 세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번째는 구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였습니다.
금식도 보이려고 금식하였습니다.
세번째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기도가 부패했고 틀려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는 다른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금식은 내 자신에 대한 태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몇가지 전제적인 상황을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을 살때 가장 중요한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 말씀부터 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보지 않고 교회에 와서만 말씀을 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며 하나님앞에서 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마태복음 6장을 통과하면서 살펴볼 내용입니다.
저희들이 다른것을 다 못해도 절대로 빠트려서는 안되는것이 말씀과 기도 이 두가지 입니다.
심지어 기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쉬지않고 기도하는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모든 생활에 있어서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 우리들이 살피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는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보지않고 기도할수 없습니다.
그중에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분이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해서 성령을 받을수 없습니다. 믿으면 성령이 오십니다. 구원받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조건 하는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섬길수 있을만한 능력과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이것도그럴듯해 보이지만 틀린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이렇게 쓰여 입니다.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안맞는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항상 말씀의 근거위에 해야 합니다.
강사 : 한봉래 형제님
<마태복음 강해 29>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5-9)
전체흐름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흔히 산상수은으로 말합니다. 산상수은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를 말씀하시며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이 잘못된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5장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됬습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은 살인하지말라는 십계명의 하나님의 말씀을 살인이라는 행위만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이해 했습니다. 하지만 5장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래 의도는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행위뿐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세가지를 다루십니다.
1. 구제 2.금식 3.기도
말씀에 대한 이해가 틀리면 삶이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살피는 이유는 정확하게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살인만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이라는 율법을 행위로 지켰다 생각하고 자기를 의롭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하게 하였지만 속이 더러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태도 세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번째는 구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였습니다.
금식도 보이려고 금식하였습니다.
세번째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기도가 부패했고 틀려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는 다른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금식은 내 자신에 대한 태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몇가지 전제적인 상황을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을 살때 가장 중요한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 말씀부터 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보지 않고 교회에 와서만 말씀을 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며 하나님앞에서 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마태복음 6장을 통과하면서 살펴볼 내용입니다.
저희들이 다른것을 다 못해도 절대로 빠트려서는 안되는것이 말씀과 기도 이 두가지 입니다.
심지어 기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쉬지않고 기도하는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모든 생활에 있어서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 우리들이 살피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는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보지않고 기도할수 없습니다.
그중에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분이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해서 성령을 받을수 없습니다. 믿으면 성령이 오십니다. 구원받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조건 하는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섬길수 있을만한 능력과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이것도그럴듯해 보이지만 틀린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이렇게 쓰여 입니다.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안맞는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항상 말씀의 근거위에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것은 소위 말하는 '주기도문' 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제가 과거 교파에 있을때는 잘 외웠는데 이제는 잘 안하다보니까 조금 잊어버렸습니다만은 이 주기도문이 어떤 문맥에서 주어졌는지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가 어떤 문맥에서 나오냐면 " 너희들은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고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다르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나온 기도입니다. 이것이 이 기도가 나온 문맥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이 내용은 구약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진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색깔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잘못을 지적하시고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은 행위로도 지킬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18:26-28, 개역한글)
제가 과거 교파에 있을때는 잘 외웠는데 이제는 잘 안하다보니까 조금 잊어버렸습니다만은 이 주기도문이 어떤 문맥에서 주어졌는지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가 어떤 문맥에서 나오냐면 " 너희들은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고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다르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나온 기도입니다. 이것이 이 기도가 나온 문맥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이 내용은 구약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진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색깔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잘못을 지적하시고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은 행위로도 지킬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18:26-28, 개역한글)
이 구절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유명한 대결중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이방인의 기도와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구원과 똑같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인 것입니다. 이 신에 대해서 아침부터 낮까지 기도합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응답하지 않는 신에게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큰소리로 부릅니다. 그래도 혹시 신이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을까봐 자해까지 합니다. 이것은 자학적인 기도입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사람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구원받지 않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는 기도가 이와같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18:36, 개역한글)
여기에 이방인의 기도와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구원과 똑같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인 것입니다. 이 신에 대해서 아침부터 낮까지 기도합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응답하지 않는 신에게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큰소리로 부릅니다. 그래도 혹시 신이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을까봐 자해까지 합니다. 이것은 자학적인 기도입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사람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구원받지 않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는 기도가 이와같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18:36, 개역한글)
엘리야가 바알선지자들과 내기를 합니다.
제단을 쌓아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사르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내기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좋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알이 태양신이고 그와같은 기적이 있었을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알에게 유리한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일은 그들에게 전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기적이 전에는 있었을지라도 이번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 못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하기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이 내려옴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었습니다.
바알선지자들의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인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그신을 감동시켜 그신이 능력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잘보이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하신것을 드러내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방의 잘못된 기도는 신의 능력을 빌어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의 기도와 성경적인 기도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사건을 통해 기도라는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라는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명령하신것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그것을 모든백성이 보고 하나님앞에 무릎꿇게 하옵소서 라는것이 기도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주옵소서 이것을 이루어주지 않으면 저는 하나님 안믿을 겁니다.'
이러한 잘못된 기도로 변질되었습니다.
유다의 웃시아 왕은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져서 제사장의 일을 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분이 신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웃시아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좌에 앉아계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이사야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자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라고 합니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처음에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았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보신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보신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의 입술을 보고 신령하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때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때, 기도할때에 반드시 해야 할것은 죄에대한 자백입니다.
이방인은 자신이 신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백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개역한글)
제단을 쌓아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사르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내기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좋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알이 태양신이고 그와같은 기적이 있었을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알에게 유리한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일은 그들에게 전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기적이 전에는 있었을지라도 이번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 못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하기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이 내려옴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었습니다.
바알선지자들의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인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그신을 감동시켜 그신이 능력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잘보이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하신것을 드러내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방의 잘못된 기도는 신의 능력을 빌어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의 기도와 성경적인 기도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사건을 통해 기도라는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라는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명령하신것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그것을 모든백성이 보고 하나님앞에 무릎꿇게 하옵소서 라는것이 기도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주옵소서 이것을 이루어주지 않으면 저는 하나님 안믿을 겁니다.'
이러한 잘못된 기도로 변질되었습니다.
유다의 웃시아 왕은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져서 제사장의 일을 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분이 신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웃시아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보좌에 앉아계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이사야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자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라고 합니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처음에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았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보신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보신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의 입술을 보고 신령하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때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때, 기도할때에 반드시 해야 할것은 죄에대한 자백입니다.
이방인은 자신이 신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백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개역한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자백하였을때 천사가 숯을 가지고 와 그 입에 대고 깨끗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죄를 자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죄를 자백하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깨끗한척하고 강한척 합니다. 자기가 깨끗해야만 이방신이 이야기를 들어줄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자백하고 겸손히 모든것을 하나님 앞에 아뢸때 그 기도를 기뻐 받으시며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알고있는 내용들입니다.
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86:6-7, 개역한글)
사람들이 기도하는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움이 있을때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을때, 내힘으로 해결할수 없는일에 부딧혔을때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시86:8-9, 개역한글)
어떤문제를 안고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놓고 다윗이 하는 기도를 보십시오.
기도 할때 제일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른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시86:11-12, 개역한글)
이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와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답게 될때 이스라엘의 필요가 채워질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이스라엘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를 알수 있습니다.
에스겔 36장은 흔히 에스겔의 복음서라고 불리웁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겔36:2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고국으로 모으실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7년 대환란때에 이루어질것입니다. 아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5-26, 개역한글)
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깨끗게 하실것이며 새로운 마음을 주실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자백하였을때 천사가 숯을 가지고 와 그 입에 대고 깨끗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죄를 자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죄를 자백하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깨끗한척하고 강한척 합니다. 자기가 깨끗해야만 이방신이 이야기를 들어줄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자백하고 겸손히 모든것을 하나님 앞에 아뢸때 그 기도를 기뻐 받으시며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알고있는 내용들입니다.
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86:6-7, 개역한글)
사람들이 기도하는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움이 있을때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을때, 내힘으로 해결할수 없는일에 부딧혔을때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시86:8-9, 개역한글)
어떤문제를 안고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놓고 다윗이 하는 기도를 보십시오.
기도 할때 제일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른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시86:11-12, 개역한글)
이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와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답게 될때 이스라엘의 필요가 채워질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이스라엘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를 알수 있습니다.
에스겔 36장은 흔히 에스겔의 복음서라고 불리웁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겔36:24,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고국으로 모으실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7년 대환란때에 이루어질것입니다. 아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5-26, 개역한글)
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깨끗게 하실것이며 새로운 마음을 주실것입니다.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7-28, 개역한글)
회복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길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겔36:31, 개역한글)
그리고 이스라엘은 스스로 과거에 범죄한 일을 기억하고 스스로 밉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겔36:3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그들을 정결케하시고 그들을 회복케하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미워하게 하실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것이 이스라엘을 위한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와같은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일까요?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36:22-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하나님의 이름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년 환란을 겪으며 알게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상재림을 하시기전에 회개하고 민족적인 회복을 받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복된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36:37,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없이 이러한 회복과 축복을 베푸시지만 단 한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기도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그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도록 하는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기도는 이방적이 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1.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2. 중언부언하기 시작했습니다.
3.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5-8, 개역한글)
이 변질된 기도를 원래대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7-28, 개역한글)
회복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길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겔36:31, 개역한글)
그리고 이스라엘은 스스로 과거에 범죄한 일을 기억하고 스스로 밉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겔36:3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그들을 정결케하시고 그들을 회복케하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미워하게 하실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것이 이스라엘을 위한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와같은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일까요?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36:22-23,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하나님의 이름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년 환란을 겪으며 알게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상재림을 하시기전에 회개하고 민족적인 회복을 받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복된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36:37,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없이 이러한 회복과 축복을 베푸시지만 단 한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기도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그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도록 하는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기도는 이방적이 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1.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2. 중언부언하기 시작했습니다.
3.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5-8, 개역한글)
이 변질된 기도를 원래대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원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종교적이 됩니다.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 맞춰서 기도하게 됩니다. (수능기도, 장례식기도)
이 모든 기도는 종교적인 기도 입니다.
저는 장례식때 운구할때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반대합니다. 찬송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좋아집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만 받아야 합니다.
장례식에 어색할찌라도 우리는 어색하게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했던 기도는 의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중언부언 기도는 무엇입니까?
중언부언은 말을 많이하고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세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번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서원한것에 대한 기도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밤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왜 세번 기도했습니까? 그 심령에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싱령 가운데 부담이 있어 여러번 기도하는것은 괜찮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은 계속 기도하면 안들어주실수 없을걸? 하는, 계속해서 쌓아가는 기도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릴레이 기도하는것, 하루는 이 형제님이, 하루는 저 형제님이 돌아가면서 하는것,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것, 이와같은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것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형제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동기로 기도하는것과 요즘사람들이 하는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하는 새벽기도는 그 동기가 다른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러한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것, 이벤트적인 기도,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기도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조지뮬러 형제님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필요가 있을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유일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헌금또한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것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 돈을 어떻게 쓰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핵심은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때 그는 겸손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대면하면 누가 말을 많이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많이 하셔야 합니다.
기도는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반복하고 사람들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기도는 원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종교적이 됩니다.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 맞춰서 기도하게 됩니다. (수능기도, 장례식기도)
이 모든 기도는 종교적인 기도 입니다.
저는 장례식때 운구할때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반대합니다. 찬송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좋아집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만 받아야 합니다.
장례식에 어색할찌라도 우리는 어색하게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했던 기도는 의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중언부언 기도는 무엇입니까?
중언부언은 말을 많이하고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세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번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서원한것에 대한 기도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밤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왜 세번 기도했습니까? 그 심령에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싱령 가운데 부담이 있어 여러번 기도하는것은 괜찮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은 계속 기도하면 안들어주실수 없을걸? 하는, 계속해서 쌓아가는 기도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릴레이 기도하는것, 하루는 이 형제님이, 하루는 저 형제님이 돌아가면서 하는것,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것, 이와같은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것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형제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동기로 기도하는것과 요즘사람들이 하는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하는 새벽기도는 그 동기가 다른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러한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것, 이벤트적인 기도,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기도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조지뮬러 형제님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필요가 있을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유일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헌금또한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것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 돈을 어떻게 쓰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핵심은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때 그는 겸손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대면하면 누가 말을 많이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많이 하셔야 합니다.
기도는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반복하고 사람들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기도는 사람의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람의 필요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면 사람의 필요가 채워짐을 주기도문을 통해서 배울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앞선 3개는 기도의 목적 입니다.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0-13, 개역한글)
후반부에 있는 구하는 기도의 내용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수 없으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해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을까요?
우리가 비난을 받으면서도 구태여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주님께서 외우라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것은 '이와같은 정신으로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복음서에서 두번나옵니다. 만일 외우라고 주신것이라면 이 주기도문이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주기도문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온 주기도문이 내용이 다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11:4, 개역한글)
사람의 필요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면 사람의 필요가 채워짐을 주기도문을 통해서 배울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앞선 3개는 기도의 목적 입니다.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0-13, 개역한글)
후반부에 있는 구하는 기도의 내용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수 없으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해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을까요?
우리가 비난을 받으면서도 구태여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주님께서 외우라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것은 '이와같은 정신으로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복음서에서 두번나옵니다. 만일 외우라고 주신것이라면 이 주기도문이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주기도문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온 주기도문이 내용이 다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11:4, 개역한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개역한글)
여기서 사용된 '죄' 라는 단어가 원어로 서로 다른 죄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죄는 '빚'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온 죄는 '목표물을 맙추지 못함' 입니다.
만일 외워야 한다면 다른 단어를 가르치실리 없습니다.
2.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회시작하기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집회할때 외우고 집회끝나고 외우고 가정집회때 외운다면 이것은 중언부언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기도입니다. 이방의 기도입니다.
3.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기도를 그대로 사용한 기도가 없습니다. 단 한번도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집회때마다 반복하는것은 이방기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할수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 개역한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첫번째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때 항상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단 한번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실때 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64:5, 개역한글)
여기서 사용된 '죄' 라는 단어가 원어로 서로 다른 죄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죄는 '빚'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온 죄는 '목표물을 맙추지 못함' 입니다.
만일 외워야 한다면 다른 단어를 가르치실리 없습니다.
2.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회시작하기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집회할때 외우고 집회끝나고 외우고 가정집회때 외운다면 이것은 중언부언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기도입니다. 이방의 기도입니다.
3.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기도를 그대로 사용한 기도가 없습니다. 단 한번도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집회때마다 반복하는것은 이방기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할수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 개역한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첫번째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때 항상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단 한번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실때 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64:5, 개역한글)
5절은 범죄가 너무오랜 시간동안 이어졌기 때문에 이런 우리가 구원을 얻을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사64:6, 개역한글)
우리에게는 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바람처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구원을 추구할수 있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64:7, 개역한글)
절망적인 죄인이기에 주님앞에 나아와 죄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64:8, 개역한글)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68:5, 개역한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사64:6, 개역한글)
우리에게는 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바람처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구원을 추구할수 있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64:7, 개역한글)
절망적인 죄인이기에 주님앞에 나아와 죄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64:8, 개역한글)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68:5, 개역한글)
아무런 도움을 받을수 없는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가 고아와 과부입니다.
그런 고아와 과부라도 돌보시는 이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3-14, 개역한글)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자초한 결과지만, 우리가 기가막힌 웅덩이에 빠져 있을찌라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렘31:9, 개역한글)
그런 고아와 과부라도 돌보시는 이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3-14, 개역한글)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자초한 결과지만, 우리가 기가막힌 웅덩이에 빠져 있을찌라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렘31:9, 개역한글)
여기 아버지가 나와있습니다. 그 아들의 관계가 나와있습니다.
아버지는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끌고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갈때, 길을 알지 못할때, 사망에서 헤메일때 내손을 잡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32:6, 개역한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이스라엘은 그 자녀입니다.
자녀가 하나님께 이렇게 보답하면 안됩니다.
아버지란 무엇입니까?
1. 나를 긍휼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2. 나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3. 내가 순종해야 하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 한 연고로다 (신32:19, 개역한글)
잘못하면 징계하시는 분이 아버지 입니다.
이 모든것이 아버지라고 부를때에 포함된 것입니다.
내가 절망가운데 있을찌라도 긍휼이 여기시고 변함없이 나를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뜻은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때 이 모든것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잘못했을찌라도 나가기만 하면 변함없이 나를 인도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
이와같은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도입니다.
이방의 기도와는 다른것입니다.
이방기도의 특징은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세요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입니다.
만약에 내가 양보할수 없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꼭 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이것은 이방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생활이 분명하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분명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은 말씀에대한 너희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은 말씀에 대한 너희들의 실제적인 삶이 잘못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은 이에대한 하나님의 경고 입니다.
이와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주님말씀을 알아 주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저희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심령을 붙들어 주실것입니다.
[출처] 마태복음 강해 29|작성자 강단 말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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