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1일 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창세기8_하나님의 친구 >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1-8, 개역한글)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사실은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구약시대에서도 예수님은 나타나십니다. 구약에서 사람인데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분이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분이기에 보면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않고, 살아있는 경우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주님께서 천사 두명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의 거처를 심방하는 장면입니다.
한가지 성경 한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3, 개역한글)
세상에서도 이런일이 있습니다.
왕이 통치하던 시절, 예를들면 조선시대에 왕이 평복을 입고 민간을 사찰합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왕이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물론 신하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보고 합니다. 그러나 왕이 직접 백성들의 삶을 알아보고자 변장하고 어느곳을 가는 사건이 책에서도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대통령이 갑자기 어느 시장을 방문한다던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할 때, 만약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방문하신다는것을 알면-물론 불시에 왔으니 알수가 없었지만- 집 청소를 할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하면 집청소를 하고 여러가지 준비를 할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집에 오신다면-성도님들께서 각각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혹시 치워야 할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거실 한가운데 있는 tv를 치우고 성경책을 보는 책상을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점검해봐야 할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불시에 우리집을 방문하신다면 그분께서 편안하게 느끼실수 있도록 집이 평소에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셨고 그 하나님을 자기집에 모십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내 마음에 찾아오신다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친구라는것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않고 친구라 한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친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종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합니다. 그러나 친구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이 인생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이 지구의 역사를 어떻게 끝내실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본이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 입니다.
친구라는 특징 중에 하나가 오다가다 그 집에 들어갈수 있는 사이 입니다.
언제든지 와도 부담이 없는 사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시에 찾아오셔도 항상 대접할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언제든지 공중에 오셔도 항상 예수님을 맞이할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집을 한번 방문하셨습니다.
한번 방문하신다면 그분을 위해 집 정리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집에 사시겠다하면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세상끝날까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럼 우리라고 하는 집은 어떻게 달라져야 겠습니까.
사실 친구도 한번오면 괜찮은데 자주오면 곤란해 집니다. 그리고 아예와서 살겠다 하면 좀 난처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오셨을때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부담이 되는요소가 나타납니다.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18:12-15, 개역한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스마엘로 하시지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고 우리 수준에서 살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목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계획을 말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의를 거절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안된다. 반드시 이삭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삭을 주겠다고 하였을때 아브라함이 웃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100세 된 사람이 자식을 낳습니까?"
아브라함이 웃을때는 하나님께서 놔두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불시에 친구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는데 그 내화 내용중에 하나가 내년에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뒤편에 있는 사라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사라는 겉으로 웃지 않았기에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웃었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마음의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부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개역한글)
성도님께서 잘 아시는 대목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들 작은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했다고 하는것은 작은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실때 물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가요.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변함없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옛날과 동일하게 신뢰하실 것입니다.
두번째,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내 마음속에 좋은생각이 듭니다. 기쁨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성경에 나오는 전부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실때, 베드로가 '주님을 생각하면 제 마음속에 뜨거움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였을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양을 치라>
저희들이 만약 주님을 사랑한다면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렇게 나타나야 합니다. 곧,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양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양을 먹인다고 하였을때, 성도들은 말씀을 먹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하면 성도님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와서 나눕니다.
사랑은 이런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일때에 먼저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태도부터 지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각할수 있습니다만은 기본적으로 그 집회를 소중히 여기고 와서 먼저 준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두번째일입니다.
분량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나누는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세번 사랑하느냐고 뭍습니다. 베드로도 세번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한다고 하는 동사가 우리나라에는 하나이지만 헬라어로는 세개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세개입니다.
주님께서 첫번째로 뭍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들을 희생하시는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아카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 사랑에 아가페로 대답할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다른사람이 물을때에 "나는 저사람 모릅니다"라고 대답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의 수준을 한단계 낮춥니다. 그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인간들로써의 사랑을 합니다. 주님은 다시 아가페적인 사랑을 묻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대답합니다.
"주님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질문하십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질문하실때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필레오'로 낮춥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7, 개역한글)
이 사랑은 앞에 있는 첫번째, 두번째의 사랑의 단어와 다릅니다.
"네가 최고의 수준으로 사랑할수 없다면, 너는 필레오의 수준으로 사랑하는 것이냐?"
이렇게 주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라는 부분때문에 주님께서 세번이나 물으셔서 베드로 근심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아니고 동사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필레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아 주님께서는 내 말을 믿지 않으시는구나.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내 말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는구나.' 라고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마치 그가 주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을때 주님께서 "아니라 네가 닭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것과 같이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쓴 말이 이것입니다.
<주여 모든것을 아시오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할수 있고 모든것을 아십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이것은 첫번째는 부담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24시간 내가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을 다 아십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부담이 됩니다.
두번째,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부담보다도 평안으로 다가옵니다.
<주여 모든것을 아시오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나의 말을 듣지 마시고 내 마음을 봐 주십시오.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음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랑은 베드로가 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랑을 주님께서 모든것을 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십니다. 사라가 웃은것도 아십니다.
사라가 자식을 낳는다는 말에 겉으로는 웃지않았지만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가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그 속을 아십니다.
이 나의 속을 아시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것을 아시는분이 나에게 계신다는것은 평안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연약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졌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광스럽게 변화될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도 모시고 우리의 집에도 모시고 우리의 삶속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우리의 주인인 것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18장을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인 아브라함의 집에 불시에 방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은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환영합니다. 주님을 집으로 모셔드리고 접대합니다.
표현이 죄송스럽지만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하나님과의 합당한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것인가가 주제 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친구의 관계입니다. 서로간에 비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정이 얼마나 더 확대될수 있는가 하는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가 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그네들을, 다른사람들을 접대할것을 말씀합니다.
문 형제님께서 다른 성도님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교제를 하는것은 성경에서 권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장로의 조건중에 하나입니다. 장로의 조건중에 하나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 장로는 없습니다.
영국에 있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모임에서 장로일을 하시는 분은, 주일에 저녁식사후에 저녁집회가 있습니다.그래서 장로일을 하시는 분이 반드시 자기집에 가서 점심을 먹이고 저녁을 먹인후 저녁집회를 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접대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나그네인것을 압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계속 살곳이 아닙니다. 나그네를 볼때 우리를 보는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를 편안하게, 잠시머무는것이지만 대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18:1, 개역한글)
히브리서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사접대보다 성도접대가 훨씬 중요합니다. 천사를 접대하는 것보다 성도를 접대하는 것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형제 하나에게 물 주는것이 내게 주는 것이다"
연약한 성도라 할찌라도, 성도 한명을 주님 이름으로 접대하면 상을 잃지 않을것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18:2, 개역한글)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봅니다.
사람 셋이 서있는데 한명은 예수님이시고, 다른 두명은 천사입니다. 이분들이 변장을 하고 모습을 숨기고 온것입니다.
<그들을 보자 곧>
이것은 보자마자 입니다. 보고 잠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왔을때 바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입니다. 달려나가기 곤란한 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려나갑니다.
그리고 3절에 보시면 "우리집에 꼭 들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18:3-5, 개역한글)
그리고 그렇게 허락을 받자 <아브라함이 급히> 합니다.
그는 접대에 대해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6-7, 개역한글)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아브라함은 한번도 느긋하게 하지 않습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분과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발전합니다.
치매의 가장 좋은 예방이 성경 암송입니다.
매일 성경을 정해놓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암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집회에 나와서 깨달은대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뵈었을때 했던 태도들입니다.
다시한번 말하면 세상 즐거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제까지 중국에 전도하러 갔다왔습니다. 한국은 재미있는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기는 아직 재미있는것이 덜합니다. 그러나 중국도 곧 있으면 한국을 따라올것입니다. 그리고 60-70년대 한국에 시골에서는 재미있는것이 없기에 성경영화라던가 성경 이야기를 하면 잘 와서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즐거움에서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읽고 외우고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참여해야 합니다. 내가 참여한 집회가 하나님이 계신 집회답게 되도록 헌신하는것이 필요합니다.
그랬을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7, 개역한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먹기좋은 송아지 중에서 최고의 것을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희생을 치뤄야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먹고 싶었던 것이고 아브라함이 가진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일 것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정신이 맑을때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루 중에서 내가 제일 정신이 총명할때 그때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기름지고 좋은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대가를 지지 않고 나갈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는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것을 더해 주실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8,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이때 최소한 300명 이상의 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을 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 내어놓고 자기는 옆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고 댓가를 지불하고 이 접대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먹는것을 보는것이 아브라함의 즐거움입니다. 혹시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추가 할수 있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이와같은것이 있을때에 주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갈것입니다.
또 하나 댓가를 지불하는것의 유명한 사건을 보시겠습니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24:24-25, 개역한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반드시 내가 값을 치루는것을 드리겠다 합니다.
여기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한 말씀을 보면, 희생을 치루는것,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때에 값을 치루는것을 분명하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더욱 발전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17:27, 개역한글)
어떤사람이 하나님을 환영하고 깊은관계를 맺을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할례의 의미를 아브라함이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할례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하나님을 환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움으로 여기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더욱 믿음이 커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내 친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표현이 나올것입니다. <너희는 더이상 내 종이 아니라 종은 주인이 하는것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다 말씀해 주시고 우리를 향한 인생의 목표에 대해서 다 일러 주시고 또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기뻐하는 개인이 되고 모임이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을 저희 가운데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창세기8_하나님의 친구 >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1-8, 개역한글)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사실은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구약시대에서도 예수님은 나타나십니다. 구약에서 사람인데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분이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분이기에 보면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않고, 살아있는 경우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주님께서 천사 두명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의 거처를 심방하는 장면입니다.
한가지 성경 한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3, 개역한글)
세상에서도 이런일이 있습니다.
왕이 통치하던 시절, 예를들면 조선시대에 왕이 평복을 입고 민간을 사찰합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왕이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물론 신하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보고 합니다. 그러나 왕이 직접 백성들의 삶을 알아보고자 변장하고 어느곳을 가는 사건이 책에서도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대통령이 갑자기 어느 시장을 방문한다던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할 때, 만약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방문하신다는것을 알면-물론 불시에 왔으니 알수가 없었지만- 집 청소를 할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하면 집청소를 하고 여러가지 준비를 할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집에 오신다면-성도님들께서 각각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혹시 치워야 할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거실 한가운데 있는 tv를 치우고 성경책을 보는 책상을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점검해봐야 할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불시에 우리집을 방문하신다면 그분께서 편안하게 느끼실수 있도록 집이 평소에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셨고 그 하나님을 자기집에 모십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내 마음에 찾아오신다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친구라는것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않고 친구라 한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친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종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합니다. 그러나 친구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이 인생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이 지구의 역사를 어떻게 끝내실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본이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 입니다.
친구라는 특징 중에 하나가 오다가다 그 집에 들어갈수 있는 사이 입니다.
언제든지 와도 부담이 없는 사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시에 찾아오셔도 항상 대접할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언제든지 공중에 오셔도 항상 예수님을 맞이할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집을 한번 방문하셨습니다.
한번 방문하신다면 그분을 위해 집 정리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집에 사시겠다하면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세상끝날까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럼 우리라고 하는 집은 어떻게 달라져야 겠습니까.
사실 친구도 한번오면 괜찮은데 자주오면 곤란해 집니다. 그리고 아예와서 살겠다 하면 좀 난처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오셨을때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부담이 되는요소가 나타납니다.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18:12-15, 개역한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스마엘로 하시지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고 우리 수준에서 살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목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계획을 말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의를 거절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안된다. 반드시 이삭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삭을 주겠다고 하였을때 아브라함이 웃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100세 된 사람이 자식을 낳습니까?"
아브라함이 웃을때는 하나님께서 놔두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불시에 친구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는데 그 내화 내용중에 하나가 내년에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뒤편에 있는 사라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사라는 겉으로 웃지 않았기에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웃었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마음의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부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개역한글)
성도님께서 잘 아시는 대목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들 작은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했다고 하는것은 작은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실때 물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가요.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변함없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옛날과 동일하게 신뢰하실 것입니다.
두번째,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내 마음속에 좋은생각이 듭니다. 기쁨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성경에 나오는 전부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실때, 베드로가 '주님을 생각하면 제 마음속에 뜨거움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였을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양을 치라>
저희들이 만약 주님을 사랑한다면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렇게 나타나야 합니다. 곧,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양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양을 먹인다고 하였을때, 성도들은 말씀을 먹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하면 성도님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와서 나눕니다.
사랑은 이런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일때에 먼저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태도부터 지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각할수 있습니다만은 기본적으로 그 집회를 소중히 여기고 와서 먼저 준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두번째일입니다.
분량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나누는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세번 사랑하느냐고 뭍습니다. 베드로도 세번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한다고 하는 동사가 우리나라에는 하나이지만 헬라어로는 세개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세개입니다.
주님께서 첫번째로 뭍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들을 희생하시는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아카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 사랑에 아가페로 대답할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다른사람이 물을때에 "나는 저사람 모릅니다"라고 대답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의 수준을 한단계 낮춥니다. 그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인간들로써의 사랑을 합니다. 주님은 다시 아가페적인 사랑을 묻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대답합니다.
"주님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질문하십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질문하실때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필레오'로 낮춥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7, 개역한글)
이 사랑은 앞에 있는 첫번째, 두번째의 사랑의 단어와 다릅니다.
"네가 최고의 수준으로 사랑할수 없다면, 너는 필레오의 수준으로 사랑하는 것이냐?"
이렇게 주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라는 부분때문에 주님께서 세번이나 물으셔서 베드로 근심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아니고 동사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필레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아 주님께서는 내 말을 믿지 않으시는구나.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내 말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는구나.' 라고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마치 그가 주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을때 주님께서 "아니라 네가 닭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것과 같이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쓴 말이 이것입니다.
<주여 모든것을 아시오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할수 있고 모든것을 아십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이것은 첫번째는 부담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24시간 내가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을 다 아십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부담이 됩니다.
두번째,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부담보다도 평안으로 다가옵니다.
<주여 모든것을 아시오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나의 말을 듣지 마시고 내 마음을 봐 주십시오.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음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랑은 베드로가 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랑을 주님께서 모든것을 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십니다. 사라가 웃은것도 아십니다.
사라가 자식을 낳는다는 말에 겉으로는 웃지않았지만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가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그 속을 아십니다.
이 나의 속을 아시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것을 아시는분이 나에게 계신다는것은 평안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연약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졌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광스럽게 변화될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도 모시고 우리의 집에도 모시고 우리의 삶속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우리의 주인인 것이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18장을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인 아브라함의 집에 불시에 방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은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환영합니다. 주님을 집으로 모셔드리고 접대합니다.
표현이 죄송스럽지만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하나님과의 합당한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것인가가 주제 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친구의 관계입니다. 서로간에 비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정이 얼마나 더 확대될수 있는가 하는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가 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그네들을, 다른사람들을 접대할것을 말씀합니다.
문 형제님께서 다른 성도님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교제를 하는것은 성경에서 권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장로의 조건중에 하나입니다. 장로의 조건중에 하나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 장로는 없습니다.
영국에 있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모임에서 장로일을 하시는 분은, 주일에 저녁식사후에 저녁집회가 있습니다.그래서 장로일을 하시는 분이 반드시 자기집에 가서 점심을 먹이고 저녁을 먹인후 저녁집회를 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접대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나그네인것을 압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계속 살곳이 아닙니다. 나그네를 볼때 우리를 보는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를 편안하게, 잠시머무는것이지만 대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18:1, 개역한글)
히브리서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사접대보다 성도접대가 훨씬 중요합니다. 천사를 접대하는 것보다 성도를 접대하는 것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형제 하나에게 물 주는것이 내게 주는 것이다"
연약한 성도라 할찌라도, 성도 한명을 주님 이름으로 접대하면 상을 잃지 않을것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18:2, 개역한글)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봅니다.
사람 셋이 서있는데 한명은 예수님이시고, 다른 두명은 천사입니다. 이분들이 변장을 하고 모습을 숨기고 온것입니다.
<그들을 보자 곧>
이것은 보자마자 입니다. 보고 잠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왔을때 바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입니다. 달려나가기 곤란한 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려나갑니다.
그리고 3절에 보시면 "우리집에 꼭 들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18:3-5, 개역한글)
그리고 그렇게 허락을 받자 <아브라함이 급히> 합니다.
그는 접대에 대해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6-7, 개역한글)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아브라함은 한번도 느긋하게 하지 않습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분과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발전합니다.
치매의 가장 좋은 예방이 성경 암송입니다.
매일 성경을 정해놓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암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집회에 나와서 깨달은대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뵈었을때 했던 태도들입니다.
다시한번 말하면 세상 즐거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제까지 중국에 전도하러 갔다왔습니다. 한국은 재미있는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기는 아직 재미있는것이 덜합니다. 그러나 중국도 곧 있으면 한국을 따라올것입니다. 그리고 60-70년대 한국에 시골에서는 재미있는것이 없기에 성경영화라던가 성경 이야기를 하면 잘 와서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즐거움에서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읽고 외우고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참여해야 합니다. 내가 참여한 집회가 하나님이 계신 집회답게 되도록 헌신하는것이 필요합니다.
그랬을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7, 개역한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먹기좋은 송아지 중에서 최고의 것을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희생을 치뤄야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먹고 싶었던 것이고 아브라함이 가진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일 것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정신이 맑을때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루 중에서 내가 제일 정신이 총명할때 그때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기름지고 좋은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대가를 지지 않고 나갈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는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것을 더해 주실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8,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이때 최소한 300명 이상의 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을 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 내어놓고 자기는 옆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고 댓가를 지불하고 이 접대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먹는것을 보는것이 아브라함의 즐거움입니다. 혹시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추가 할수 있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이와같은것이 있을때에 주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갈것입니다.
또 하나 댓가를 지불하는것의 유명한 사건을 보시겠습니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24:24-25, 개역한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반드시 내가 값을 치루는것을 드리겠다 합니다.
여기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한 말씀을 보면, 희생을 치루는것,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때에 값을 치루는것을 분명하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더욱 발전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17:27, 개역한글)
어떤사람이 하나님을 환영하고 깊은관계를 맺을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할례의 의미를 아브라함이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할례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하나님을 환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움으로 여기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더욱 믿음이 커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내 친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표현이 나올것입니다. <너희는 더이상 내 종이 아니라 종은 주인이 하는것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다 말씀해 주시고 우리를 향한 인생의 목표에 대해서 다 일러 주시고 또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기뻐하는 개인이 되고 모임이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을 저희 가운데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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