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스가랴 2 >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6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슥3:1-10, 개역한글)
주님께서 읽은말씀에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어제 세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은 당시 유다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뇌와 낙심과 좌절 가운데 가지고 있던 하나님 앞에서의 질문들을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께서 답변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3장 말씀에 와보면 4뻔쨰 환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네번째 환상은 복음에서 많은 인용을 해오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죄인이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모습입니다. 대단히 독특한 말씀입니다. 오늘 네번재 환상에서 백성들은 "우리의 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답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나 하나님앞에 섰습니다. 사단은 여호수아 우편에 섰습니다. 사단은 고소합니다. 사단이라는 말의 뜻은 '대적하는 자'로 형제를 송사하고 고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정죄하는 자입니다.
욥을 볼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르고 거룩한 것을 봅니다. 그때에 사단이 온세상을 돌아보다 하나님앞에 나아와 욥을 고소 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이롭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것은 그가 받은 많은 재물과 특권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단의 고소 때문에 욥이 어떤 지경까지 내려가고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신약에서 베드로가 또한 어떠한 시험을 받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사단은 믿는자를 공격하고, 대적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소합니다. 이것을 간헐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있을때 사단은 그를 고소합니다. 사단의 고소는 법정 앞에서 하는 합벅적인 고소가 아니라 항상 헐뜯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요.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때 여호수아 개인의 더러움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를 할수 없다고 사단은 고소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때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대변할수 없고 대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슥3:3)
<더러운 옷을 입고>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먼저 자기를 위해서 희생제사를 드린후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드리러 나갑니다. 사단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어떠한 형태로든 언제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소하고 넘어뜨려는 작정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꺼리 입니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3:2)
여호수아는 깨끗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고소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택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어제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보았습니다. 또한 두번째 대적을 어떻게 하실것인가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 세번째, 도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빙자해서 고소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귀히보시고, 눈동자로 여기시고 절대로 건드릴수 없는 대상으로 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말 자체로도 '평화의 성' 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지금까지 파괴와 전쟁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택한 성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께서 택했다는 것 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둔하고 지원하실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택하셨을뿐 아니라 그 백성을 보호하실때, 그들의 죄를 그 아들을 통해서 온전히 갚기전에는 이런 말씀을 하실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이런말씀을 하신다면 의롭지 않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인해 사단에게 그렇게 말씀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사단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대답도 할수 없습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불에서 꺼냈다고 할때에, 사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갈떄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나갑니다. 그가 입은 더러운 옷은 이스라엘 민족의 더러움 입니다.
그리고 이 환상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정결한 옷으로 갈아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셨고, 여호수아에게 정결한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일의 터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이스라엘과 온세상의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실때에,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인 온 세계 사람의 죄를 없애셨습니다.
구약의 이 그림은 죄의 용서가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3:4)
<아름다운 옷>
출애굽기 28-29장에서 제사장의 옷을 이야기 하게 될때 어떠한 표현을 씁니까?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출28:2)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출28:40)
이것은 단순히 정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보혈을 통해서 저희들도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때, 단순히 죄용서함을 받은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영화롭게 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통해서, 스가랴 당시 뿐 아니라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메시아로 다시오시게 될때 이스라엘 백성이 죄에 대해서 정결케 될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 정결케 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동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오셔서 각인을 책망하게 될때 하나님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앞에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전에는 구원받을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가를 회개하게 될때, 그리고 의지하게 될때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단순히 정결하게 되는것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영화롭고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줄수 있는 민족이 될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태와 신분 모든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결케 될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써 그들이 어떻게 역사할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슥3:5)
여기 스가랴가 지켜보기만 하다가 끼어듭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가 사단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제사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곧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께서 나타나게 되실때에 그들은 정결한 민족이며, 아름다운 민족이며, 제사장 나라가 될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절망속에 빠져 있던 이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건립을 재개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계속해서 이 일이 추진되도록 학개와 같이 사역합니다. 이당시 이스라엘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문제를 <정결케 될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써 위대한 역할을 할것이다> 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보다 더욱 크게 우리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것보다 더많은 주실 뿐 아니라, 또한 백성에게, 믿는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많은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기대하고 계신분이 있다는것은 좋은 것입니다.
현재에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과 절망속에 빠져있을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토대로 미래를 기대하고 계신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수 있는 일을 할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행하셨습니다.
사단의 고소에서 사단의 입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옷에서 정한옷을 입게하셨습니다.
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슥3:6-7)
여기 세번째,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것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1. 네가 내집을 다스릴 것이요.
2. 내 뜰을 지킬것이다.
3. 여기 섰는자들중에 왕래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해서 하는 기대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이것은 장차 말일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정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만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히 여깁니다. 주님의 말씀의 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그럴때에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복이 있습니다.
<네가 내집을 다스릴 것이요>
제사장은 집을 다스립니다. 제사장이 하는일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질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제사장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두가지 기둥은 왕과 제사장입니다.
왕은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다스립니다. 제사장은 영적인 일을 담당합니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법도를 따라 살면 너희가 영적으로 선진국이 되리라>
꼬리가 되지않고 머리가 될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될때 그 말씀에 담긴 위대한 지혜와 힘과 은혜를 깨닫게 될때 하나님 백성은 변하는 것입니다.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 백성들을 인도하고 안온하게 살고 질서있고, 어려움 없이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첫번째 역할은 백성들이 그렇게 살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켜주는 것입니다.
<내 뜰을 지킬것이며>
제사장의 역할은 물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뜰을 지키게 될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것입니다. 그 뜰은 우리주님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보혈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백성들을 구원하신것의 그림자가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왕래하게 하리라>
물론, 신약 백성은 이보다도 더 위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고 산길이 열려서 임재해 계신 바로 거기까지 들어갈수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들어갈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정결케 되지 않고는 하나님앞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써 섬기게 될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고 계십니다. 기대하고 계실뿐만 아니라 이와같은 삼중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슥3:8)
여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5만이 안되는 잔존자들 중에는 지도자로 스룹바벨 총독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돕는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동료들은 <예표의 사람>입니다. 예표의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볼대에 기이하고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표증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와 동료들을 볼때 너무나 놀랍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개혁성경에는 '보라'라는 말이 그담에 빠져 있습니다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보라'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슥3:9)
그래서 여기에 보라라는 말이 세번 반복해 나옵니다. <보라>라는 말이 들어가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할때, '보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말입니다.
<보라 네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예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세상에 오시게 될때,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예표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7절까지 말씀은 여호수아가 정결케 된 것입니다 8절부터는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이 함께 나옵니다. 그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이땅을 정결케 합니다. 사실은 이들이 정결케하는것이 아니고 그들을 정결케 하신 그분께서 이땅을 정결케하는 것입니다.
3장 말씀에서는 여호수아가 정결케 되고 여호수아가 있는 땅이 정결케 됩니다. 이 모든것은 우리 주님께서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도록, 예표의 사람들이 이땅을 정결케 하는것이 가능하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주 그리스도 메시아임을 여기서 말합니다.
메시아를 여기서 어떻게 표현 합니까?
<보라,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순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은 <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을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예표의 사람들이 일하는 것입니다.
<종>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42장부터 시작되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명한 노래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 종이 실제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그분이 이와같은 종이시다라고 노래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일먼저 <이 종은 새로운 것을 선포하실것이다> 라는 주제로 노래합니다.
두번째, <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이 종이 어떻게 양육받을것인가> 라는것이 두번째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세번째 종의 노래 이사야서 50장에는 <원수를 무위로 돌릴수 있는 이 종은 어떤분이신가> 라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전 절에 거쳐서 나타나고 있는 노래는 <그 종이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실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종에 대해서 여러가지 모습이 있지만, 마지막에서 그분은 고난 받으십니다. 그 고난받으신 보혈, 죽음으로 인해서 여호수아가 정결한 옷을 입을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종, 그분께서는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실뿐 아니라 여호수아가 있는 땅, 임마누엘(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 땅은 정결케 됩니다.
땅은 어떻게 해서 더러워 집니까? 구약 말씀에서 '이 땅이 더러워 졌다'라고 할때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땅에 피가 흘려졌다> 살인했기 때문에 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땅은 갑자기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될때 땅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이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이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죄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용서함 뿐 아니라 그들이 건강하게 도덕적으로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3장은 '그 백성이 어떻게 정결케 될것인가' 또 '그 땅이 어떻게 정결케 될것인가' '정결케 된 그들이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죄때문에 <나의 종이 피흘려 돌아가지 않았는가> 가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하나 <내 종 순> 이라고 합니다. <순>을 보겠습니다. 이 <순>이라고 하는것은 다 죽어버린 그루터기에서 순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그루터기 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주님의 왕의 계보, 유다지파를 통해서 오십니다. 유대왕은 시드기야로 끝나버립니다. 그 후에 다시는 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주님께서 오시기 바로 전에 반란이 일어나죠. 유다마카비의 반란을 통해서 레위지파가 잠시동안 왕권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로마로부터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다지파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 왕가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썩은나무 그루터기였습니다. 그 계보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계보로 다윗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곧 썩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온것입니다. 이싹은 미래에 <위대한 열매>를 가져다 줄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내 돌>이라고 하는것은 그 후에 <위대한 통치>를 가져다 줄것을 말합니다.
여기 순에 관해서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렘23:5)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 이것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러나 스가랴서는 어떻습니까? <나의 종 순> 입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슥6:12)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
(싹=순)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우리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곧, 인간 순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여기 나온 순은 어떤 순입니까? 하나님이신 순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가리켜 <여호와의 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싹은 우리에게 인간으로 오시는 메시아, 그분은 왕이시며, 종이시며, 창조주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스가랴서에 나오는 순은 종으로 오시는 순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의 계보로 오실때 어떠셨습니까? 그분은 다 죽어가는 왕가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지날때에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보좌우편에 앉게하셧습니다. 원수가 발등상되기까지 그분은 앉아계실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실때에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위대한 번영을,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작은 순이 아니라 그것은 자라서 엄청난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될것입니다. 그 열매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맺게 하실것을 스가랴는 말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슥3:9)
여호수아 앞에 거대한 돌이 있었습니다. 그 돌에는 주님께서 세길것을 세기십니다. 크게 일곱눈이 있습니다.
이돌은 사실 메시아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11:1-2)
우리주님 위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십니다. 이 성령님에 대해서 일곱가지 다른 성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신 2. 지혜의 신. 3. 총명의 신 4. 모략의 신 5. 재능의 신. 6. 재능의 신. 7.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이것은 일곱 다른 영이 아니라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는데, 성령님 안에 담겨진 일곱가지 다른 성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앞에 돌이 있는데 그 돌에 일곱 눈이 있습니다. 이 일곱눈은 계시록에서도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분에게 강림하신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강림하십니다. 예수님꼐서 지상 사역을 하실때도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강림하시지요. 그리고 이땅에 계실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주님께서 어떤 일을하시던, 어떤 말씀을 하시던 성령의 능력없이 하신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주님의 행사는 대단히 완전하고 위대했습니다.
우리는 종으로 오신 메시아, 그리고 순으로 오신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로 오신 메시아를 봅니다.
돌에는 일곱눈이 세겨져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11장에 나온 성령님께서 그분께 강림하신것을 보았습니다. 성령님의 성품을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천년왕국때에 이와같이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경외로우시며 이땅을 의와 진리로 통치 하실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순으로 오셔서, 아무것도 없는 왕가에서 어떻게 위대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돌로써 어떠한 통치를 하실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결케 되는것은 이분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제사장 직분을 하게될 것도 바로 이분 때문입니다.
9절 후반부 말씀을 보면 <이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킬때 그땅은 정결케 됩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될 이 민족을 통해 이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슥3:10)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는 그늘이 많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달고 기쁨을 줍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이스라엘의 번영을 상징합니다.
그 이스라엘이 번영하게 될때 사람들이 서로 초대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복가적인, 시적인 표현입니다.
땅이 정결케 될때 사람들 가운데 안식과 기쁨과 안전과 안보가 깃듭니다.
왜냐하면 종과 순과 돌의 메시아께서 오시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가랴 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11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슥4:1-14)
주님께서 역시 읽은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4장에 들어와서 다섯번째 환상에 들어갑니다. 다섯번째 환상은 전과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에 있는 절망과 좌절가운데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대답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간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은 잔존자들은 참으로 합당한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땅이 정결케 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증은 어떻게 될것입니까?" 라는 고민과 고뇌가 하나님 앞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타락하면 우리에게 간증이 없고 사람들에게 밟힐것입니다. 소금이 발에 밟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멸시하며 조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탈선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상처를 받으시며 얼마나 멸시를 받는지,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모독을 당하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잔존자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답변하십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했습니다. 그들은 2000년 동안 온세계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다 말로 할수 없습니다. 그러자마자 즉시 독립전쟁으로 돌입합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기 전, 1949년 2월 10일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 이스라엘의 상징을 제정합니다.
그상징을 오늘 보여드리려고 하였지만 내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상징은 일곱가지가 있는 등잔입니다. 양편에 감람나무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이 상징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스갸랴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번째 환상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이스라엘 정부도 스가랴서를 펴서 '간증'이 어떠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그러한 간증을 온세계에 나타내야할 국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상징을 이것으로 만든것입니다.
오늘은 <증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가랴가 자고 있었습니다. 예언서를 보면, 다니엘의 예언서를 보면 다니엘이 마치 죽은자같이 쓰러진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라고 하는 사람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과 예언을 받게 될때 우리의 영혼은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 육체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쓰러져 자게되고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본 환상은 자면서 본 환상이 아닙니다. 누워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 보여진 환상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잠간 피곤해서 쓰러졌습니다. 그때 깨우셨습니다. 다섯번째 환상을 보라 하셨습니다. 스가랴는 일어나서 보았습니다.
등잔이 있습니다. 등대가 있는데 일곱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이 등잔은 성소에 있는 등대와는 다릅니다. 성소의 등잔은 일곱개의 가지가 있고 등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등잔은 일곱의 주발과 금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옆에 두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이 감람나무에서 계속해서 받는 기름이 주발에 모이고 이 주발에 흐르는 기름이 금관을 통해서 각각 일곱개의 등잔에게 전달되어 계속해서 불이 꺼지지 않고 밝혀집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연 영적으로 그런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세속적이지만, 그럴찌라도 메시아께서 오시게 될때 그들은 천년왕국때에 진짜로 그렇게 할것입니다. 이 환상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속에 있는 우리 교회가 간증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빛으로 증거할수 있도록 책임을 주셨는데,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보고나서 스가랴가 뭍습니다.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천사가 책망을 합니다.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느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써 이것을 모르느냐?" 라고 가볍게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책망입니다.
왜냐하면 스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등대에 대해서 제일 잘아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조금 책망했습니다. 그때 스가랴는 정직하게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를때는 우리는 정직하게 모른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커다란 오만이요, 실수입니다.
그가 정직하게 답변했을때 이 환상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4:6)
이 환상의 제일 첫번째 의미를 전달해 주면, 그것은 <능력>입니다. 가능케 하시는 능력,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 전 1949년 2월 10일 이스라엘 정부가 만든 이스라엘의 상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상징은 가운데 등대입니다. 양편의 감람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밑에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이 스가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의 상징은 단순히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밑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고 나의 신으로 된다' 입니다.
그 백성은 정말로 그 신으로 될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첫번째, 간절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고, 성경에서 위대한 미래와 약속을 이야기하게 될때 사람들은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질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하게 될때 필요한것은 육적인 힘이 아닌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사실 많은 간증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증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히브리어로 '힘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군대'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라고 할때 이 능은, '인간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군대의 힘으로도 인간의 힘으로도, 어떤것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만 우리가 증거할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때에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같이 하지 않고서 우리는 절대로 능력을 행할수 없습니다.
첫번째, 간증이 가능케 하는것을 6절에서 말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닙니다.
모임이 힘이 없습니다. 여러가지 힘을 필요로합니다. 여러가지 반대가 있습니다. 세상의 반대, 사단의 반대, 육신의 활동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려 할때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가랴서 4장 6절은 그것은 안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떨어져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같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시보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드리게 될때, 성령은 역사합니다.
그렇기에 모임에 여러가지 계획이 있고 일이 있을때에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의 프로그램, 우리의 꾀는 아무런 효혐이 없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스룹바벨이 잔존자들과 돌아왔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격려를 통해서 성전재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많은 반대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주님께서 여기에 <큰산>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큰산은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이 어째서 성전을 짖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이 무너졌을때 이방사람들은 즐거워 조롱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했고, 그들의 간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방사람들은 이것을 즐거워 했습니다. 그것을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을 다시 중건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때 위대한 간증은 사방에 퍼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간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재건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큰산>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우리가 너희와 같으니까 도와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과연 돕겠습니까? 그들은 도와주는것이 아니라 도리어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산이 있었습니까? 카운슬러들이 얼어나서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조언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은 거절했습니다. 원수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이 반역을 위해서 이렇게 일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에게 말해서 너희의 일을 중단시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것들이 중대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들을 하나님께서 평지로 만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머릿돌을 내어놓았다>
머리돌이라는것은 마침돌입니다. 이것은 성전이 완성되게 될때 제일 꼭대기에 올려놓는 돌입니다.
머리돌을 올려놓는것은 건축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주님께서 성전을 지으실것입니다. 환란시대의 성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시게 될때, 감람산이 갈라지고, 이방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주님께서 스스로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성전은 완성될것입니다. 이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 당시 앞에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많은 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지가 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제 2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46년만에 완공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뭐라고 외쳤습니까?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은혜와 간구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메시아를 거절한것을 깨닫고 돌이킵니다.
하나님 앞에 민족적으로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완성됩니다. 이 말씀은 이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은총, 은혜가 압도하는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은혜가 압도하는 왕국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때의 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가능케 하신다> 7절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하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슥4:8-9)
전 지대를 놓았으니 이제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진행하고 전진하고, 그리고 이 모든일이 끝까지 이루어져 마치는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은 위대합니다.
수많은 사역이 있지만 십자가의 사역은 무엇으로 끝납니까? <다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고 도중에 하차해 버리고 맙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달려갈길을 다 달려갔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한일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시작할때 그 일은 마쳐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속에서 나의 모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주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각인의 마음속의 좌우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와같은 소원이 우리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것을 네가 안다고 합니다.
우리주님께서 천년왕국때에 성전을 건축하십니다. 세상사람들이 이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지 어떻게 압니까?
많은것을 통해서 압니다만, 여기서는 특히 그 일을 마치신 것을 통해서 아는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 뿐만이 아니라, 2000년전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신 후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고 도중에 중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이나 그의 백성들도 마찮가지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날이 도래하게 될때도 마찮가지가 될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일을 마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위업을 다 이룬다고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그것이 8절 9절입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슥4:10)
여기 <작은일의 날>이 있습니다.
작은것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작은것입니까? 우리는 작은것의 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별것 아니다. 하찮은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한 모든것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자란다는 것은 대단히 비극입니다. 대단히 돌이킬수 없는 영원한 비극속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것에 속한것은 대단히 고귀한 것이다. 가장 귀한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환영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야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요, 예배요, 섬김과 봉사, 성도들과 함께하는 교제,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모든일들은 가장 고귀한 것이요, 가장 넓은 것이요, 높은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짖는데 고심하고 있을때, 그러한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성도들의 마음도 마찮가지 입니다. '과연 이일이 작은것인가, 작은 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문제에 당면하게 될때,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시야에 대해서 점검해봐야 합니다.
어떻게 점검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때, 하나님이 보시는 각도에서 봅니까? 아니면 인간의 각도에서 봅니까?
이것이 과연 큰것인가, 작은것인가를 결정할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봅니까? 아니면 세상사람이 보는 것처럼 봅니까?
교회에 관해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십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 보혈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고귀하고 높은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교회는 작은것이요, 무시할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일의 날>이라는것은 하나님의 성전건축과 기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일에 대해서 세상사람들이 보고있는 관념입니다.
우리주님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탄생하셨을때, 어린아이였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하겠는가?'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땅을 걸어가실때 세상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작은자라고 한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산위에서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관해서, 주님의 것에 관해서 어떻게 평가 할것인가에 대한 주님으로부터 받는 도전이 있습니다.
<작은일의 날이라 멸시하는자가 누구냐>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 일곱은 온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온세상을 다 전지하게 아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주님의 전지하신 눈입니다. 지혜이며 지식입니다. 그런눈으로 우리는 세상을 봅니까?
세상이 타락해서 흘러가게될때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으로 평가하게 될때, 하찮은 것, 가치없는것을 금과 은이라 생각하고 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전지하신 눈으로 다 보시게 될때 하나님이 보시는것처럼 우리가 본다면 우리는 미래도 볼것이고, 현재도 볼것이며 과거에 대해서 평가할때도 하나님의 평가대로 평가할 것입니다.
이제 여기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손은 성전을 완성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제 2 성전은 왕공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시기에 앞서 스가랴는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가 천사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다시한번 질문합니다.
11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슥4:11-13)
이는 똑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두번째, 세번째 질문입니다.
천사는 이도 책망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그때 스가랴는 "주여 모릅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슥4:14)
이 등대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천년왕국이 도래했을때 그들은 어떻게 간증하겠습니까?
이 간증은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등잔이 필요하고 등잔에는 불이 계속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이 계속 켜지기 위해서는 기름이 계속 들어와야 합니다. 기름이 없이는 불을 킬수 없습니다.
이 기름은 감람나무에서 나옵니다. 감람유가 주발에 담기고 관을 통해서 일곱등잔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는 등대와 다른것은 성전의 등대는 성전안에 있지만 이 등대는 밖에 있습니다. 또한 이 등대는 단순히 등잔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성소의 등대는 계속가서 심지를 다듬어야 하고 기름을 다시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등대가 계속해서 보존될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일상 사역입니다. 많은 사역중 하나가 꼐속해서 기름을 공급하고 심지를 다듬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등대는 그럴필요가 없습니다. 주발로 들어오는 관을 통해서 기름이 꼐속해서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시오실때에, 강림하실때에, 천년왕국때에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향해서 빛을 발하는 모습인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간증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간증은 감람나무를 통해서 옵니다. 거기에서 오는 기름을 통해서 오는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령의 능력을 말해주는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온 세상에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람나무는 누굴까요?
이 당시에는 이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총독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그당시 이스라엘앞에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인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두 감람나무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예표하고 있는 그분입니다. 후에 뒷장에 가서 우리는 말씀을 보게 될것입니다.
<제왕이시요, 그분은 제사장이시다>
왕과 제사장직을 가지고 계신 유일하신 주님입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예표되고 있습니까?
다윗은 우리주님을 고난의 주로 예표했습니다. 솔로몬은 영광을 받으실 예수그리스도를 말했습니다. 우리주님은 두사람이 아닙니다. 솔로몬과 다윗은 다른 예표를 하고 있지만 그 예표는 동일한 한분을 가리킵니다.
마찮가지로, 스룹바벨은 왕을 예표합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을 예표합니다.
그 두사람이 예표하고 있는 한분은, 메시아입니다. 제왕이며 제사장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천년왕국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온세상에 이스라엘의 간증을 드러낼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은 현재는 역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야기하는 간증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임안에, 교회시대에서 성도들이 어떠한 간증을 나타낼 것인가는 대단히 커다란 주제입니다. 숙제입니다.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감람나무에게서 기름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와 그와같은 역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스가랴서 3-4장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네번째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과 그들이 제사장으로 어떻게 역사할것인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제사장 나라의 기능을 우리는 마음속에 두어야 할것입니다.
다섯번째 환상에서 <간증>을 생각할때, 이 시대에 주님께서 교회에 두신 간증을 마음속 깉이 생각하고 주님앞에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 > 정형모 형제님(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가랴 강해 4> (0) | 2022.07.09 |
---|---|
<스가랴 강해 3> (0) | 2022.07.09 |
<스가랴 강해 1> (0) | 2022.07.09 |
<디모데전서 강해 7> (0) | 2022.07.09 |
<디모데전서 강해 6> (0) | 2022.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