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솔로몬의 생애

< 솔로몬의 생애 14_솔로몬의 말년 >

박이레 2021. 7. 19. 21:04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솔로몬의 생애 14_솔로몬의 말년 >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상11:9-13).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이 솔로몬이 위대한 번영의 국가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기대 했던대로 성전을 짓고 그의 국민들이 태평 가운데 살게 되었고 또 온 세상을 향해서 위대한 간증을 나타냄으로 열왕들이 그 국가에 찾아왔던 다양한 일들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속에 이미 조금씩 뿌려져 있었던 타락의 씨앗, 그것들이 점점 성숙했고 말년에 가서 그는 나선추락을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쏜살같이 곤두박질하는 그런 추락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솔로몬 자신이 잠언 말씀에서 지킬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솔로몬 자신이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처음에 그가 여호와를 사랑했다는 말씀으로 시작했는데 11장 말씀은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말씀의 시작은 솔로몬이 여인을 사랑했다는 말씀을 귀결되고 있습니다. 원래 고대국가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정복된 나라는 정복한 나라의 신을 대게 섬깁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투 했을때 사무엘상 초기에서 블레셋에 패배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깁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다곤의 당에 들어가 버리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곤에게 굴복할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패배할수 없습니다. 결국 블레셋이 언약궤를 도로 이스라엘에게 돌려줄수밖에 없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복한 나라는 정복을 당한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정복한 나라의 신을 피정복민들이 섬기도록 만드는데 솔로몬은 반대 입니다. 그의 부친 다윗은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다 정복했고 솔로몬은 그의 위대한 부친이 그에게 남겨준 평화의 나라를 받았습니다. 평화의 나라를 받고 많은 나라들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많은 열왕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많은 이방의 여인들을 사랑했으므로 그 여인들을 위해서 신상을 섬기도록 산당을 만들어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정복국가가 피정복민의 신들을 섬기게 된 것은 솔로몬이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행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신명기에서 여인들을 많이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들의 마음이 미혹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옛부터 사실이었고 솔로몬은 그 말씀을 어김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이후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와같은 길로 접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응하는가, 이스라엘이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는가, 그와같은 일의 인도자가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인가, 이스라엘을 우상 앞으로 인도할 것인가, 솔로몬이 결국은 그와같은 지혜와 그와같은 영화와 그와같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선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자신이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미혹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백성들로 우상을 섬기게 하는 일로 그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9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왕상11:9-10).

 

두번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3장에서 꿈에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6장 말씀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꼐속 순종하라고 하는 말씀으로 그를 권면 했습니다. 전을 건축하게 될때 그의 마음이 전을 건축하는 건축일에 완전히 쏠릴까봐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너의 마음이 건축하는 도중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탈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생각할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섬긴다해도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주님앞에 드려져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 말씀은 소홀히 하면서 섬길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위험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6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도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두번째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9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왕궁도 건축을 완성 했을때, 즉 그의 생애에서 통치 20년째 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40년을 통치 했는데 그의 통치의 반을 건축을 위해서 성전과 왕궁을 위해서 시간을 보냈지요. 이 기나긴 세월끝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어요. 그에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고 지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전을 건축하고 왕궁을 건축하고 주의 일을 하게 되는 도중에나 이 모든일을 끝까지 마치게 될때가지 언제나 저희들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번이나 이야기 했는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말씀에서 떠났습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떠나게 될때 서섷 떠나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순종하는 듯 하면서 마음속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하나 둘씩 순종하지 않는것으로 옮겨 가지요. 그것이 전면적으로 불순종하는 모양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불순종의 진화 입니다. 불순종은 처음부터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은 순식간에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커에 찬물을 넣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었을 때 그것은 그 안에 가만히 있습니다. 만약 비커에 뜨거운 물을 넣고 개구리를 거기 넣으면 튀어 나갑니다. 그런데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밑에서 불을 때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 있다가 그냥 죽습니다. 온도는 서서히 올라가게 되고 거기 가만히 있다가 그냥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이 이와같이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사단은 그와같은 기저를 잘 알고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죠. 솔로몬에게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여기서 네번째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사실은 주님께서는 세번째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두번, 6장과 9장에나타나셨고 11장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나타나신 것은 무엇입니까? 6장과 9장에 나타나신 것은 경고 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미리 말씀해 두시는 것이죠. 그러나 11장에 나타난 것은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오래 참으시고 경고하시고 노파심으로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전에 계속 말씀 하십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듣지 않으면, 자기의 여러가지 이론을 펴면, 그리고 불순종하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는 그때는 경고가 아니고 심판 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왕상11:11).

 

여기 보세요. '결단코' 라고 말씀 했습니다. "내가 결단코 네 나라를 빼앗아"라고 말씀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요. 또 왕궁을 지었지요 그 다음에 열왕기상 역사에서 그것이 다 끝나고 20년째까지 다 완성하고 난 이후에는 여러 성들에 요새를 쌓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건축을 했습니다. 국고성을 쌓고 예루살렘에 밀로를 건축하고 또 남과 북과 사방의 도성에 요새를 강화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는 이것을 구축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가 주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두려운 값을 치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도 우리는 그냥 갈것이라고 하는 그와같은 불감증이 있습니다. 요즘 안전불감증을 많이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엄청난 값을 치뤄야 하는 그런 불감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지으 이 모든 왕국을 나는 너의 신복에게 주리라" 이것은 무엇 입니까? 솔로몬이 그렇게 오랫동안 건축하고 그렇게 많은 정력과 시간을 들이고 많은 마음을 들여서 이렇게 건축한 것들을 아들에게 물려줄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종에게 물려준다는 이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우리의 전대는 새어나갈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것을 쌓아놓는다해도 그것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수고 가운데 그것을 저축해도 한순간에 그것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주부들이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한푼 두푼을 계속 계산하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갑자기 충동구매를 하는때가 있습니다. 그런 충동구매를 할때는 엄청난 값을 주고 그냥 팍 사버립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2전 3전 때문에 들었다 놨다했던 모든 것들이 그런 모든 노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오랫동안 노심초사 했던, 그리고 수많은 수고를 했던, 그래서 건설했던 그 많은 부요함이 불순종으로 인해서 자기 아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반발한 종에게 갑니다. 열두지파 중에 열지파가 여로보암에게 가는 것입니다. 두지파,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하나를 줏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여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왕상11:12).

 

여기 부분적 심판이 있습니다. "네 세대에는 이 일이 있지 않다" 이런일이 히스기아 왕때에도 있었습니다. 히스기아가 하나님 앞에 범죄합니다. 히스기아는 선한 왕이거든요. 그는 위대한 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는 심지어 북방지파까지 편지를 보내고 도발군을 보내서 남방으로 와서 예배 드릴것을 제안하고 또 그 일들을 성취합니다.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고 18만 5천의 앗수르 군대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한순간에 멸절시켜 버립니다. 물론, 그가 한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와같은 구원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은 히스기아의 엄청난 위대함을 보고서는 놀랍니다. 어느나라도 앗수르의 이와같은 진격을 감당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으 유다 왕국이 앗수르를 격파시켰습니다. 그때 바벨론에서 대사를 보냅니다. 그때 그는 범죄하지요. 그때가 기회 였어요. 이방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동맹을 위해서 왔을때에 그는 그들에게 "이와같이 위대한 일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였다. 당신들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그는 입을 닥 다물었습니다. 마치 자기가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자의 보화를 보여주고 창고를 보여주고 안보여준것 없이 다 보여주었습니다. 자기자랑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네 신복들과 네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바벨론으로 옮길 것이다. 그러나 네 때에는 아니고 후대에 옮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언듯보면 이것은 참 다행입니다. 그 당시 솔로몬 당시에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럼 누구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때, 아들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 말씀을 불순종하면 우리때에 그 값을 치뤄야 하든지, 만일 여기 말씀처러 심판이 제한적으로 온다해도 우리 자식때에 가서 자식들이 그것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 줄것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인 유산을 남겨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앞에 수고했던것보다 훨씬더 앞서서 그들은 어릴때부터 주의 위대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더우 위대한 나라를, 더욱 위대한 모임을 건축할수 있는 기반을 유산으로 남겨줘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가 불순종하으로 인해서 우리도 손실을 받고 그리고 우리 다음때에는 우리보다 더 비참한 그와같은 삶을 그들이 경험하도록 우리는 허락할 것인가요? 여기 "네 시대때는 아니고 네 아들 때에 가서 빼앗을 것이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사실상 그것을 빼앗게 될때 르호보암은 어떻게 뺏깁니까? 르호보암이 잘하는데 하나님껫 빼앗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빼앗겠다고 말씀 하셨는데, 르호보암을 보십시요. 그는 너무나 우준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는데 그는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왕이었는지요. 그의 아버지의 지혜를 그는 받지 못했습니다. 잠언 말씀의 형식은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까? "내 아들아 내가 하는 이야기를 너는 잘 들으라"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으라 하는 형식으로 잠언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잠언을 기록한 것은 솔로몬인데 그 솔로몬의 말씀대로 르호보암은 듣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빼지않고 이 말씀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마음속에 세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면, 때로 우리는 소홀히 여길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길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소홀히 여김을 받을만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을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우리가 복받을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안전한 길입니다. 여기 또 한가지는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라고 합니다. 어떤 지파입니까? 베냐민 지파 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열 지파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요? 이제 그를 대적하는 사람에게, 그의 종에게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부터 11장의 긴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에 솔로몬의 세 원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두 원수는 외부에서 나타난 원수 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원수는 국가 안에서 나타나는 내부의 원수 입니다. 원수는 외부에서도 오고 안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벳 장로에게 고별사로 말씀하시게 될때 "내가 떠나면 밖에서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원수와 내부의 악, 이와같은 것이 모임을 뒤흔들려고 역사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모임을 소중히 여겨야 할까요? 모임이 정말로 말씀대로 번성할때 우리들이 복을 받고 우리 자식들이 정상적으로, 영적으로 자라고 그들 자신에게 유익을 얻게되고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안에서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거나 또한 사회 생활을 하거나 또한 그들도 결혼해서 자식을 기르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굳건하게 서고 그리고 가정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울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어 주고 세상에서 사회에서 일하게 될때 하나님으로부터 얻게되는 지식과 이 말씀이 그들의 영혼을 견고하게 세움으로 주님의 은혜와 믿음 가운데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복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모임을 보존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것 때문에 원수는 안밖에서 모임을 뒤 흔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모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한 상태에서 모이면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원수는 그와같이 인도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하는것은 간사한 것입니다. 궤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와같은 것에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궤궤를 모르는 바가 아니로다" 원수의 전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묘합니다. 대단히 어떤때는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차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정말로 읽고 이 말씀속에 담긴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분별하게 될때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로서 사단의 궤궤를 발견하고 분별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보호할수 있고 우리 후대를 보호할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제일 첫번째, 14절 말씀에서 에돔사람 하닷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철천지 원수 입니다. 이와같은 일은 이삭이 노년에 무분별함으로 인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못받아 들였을까요? 이삭은 왜 그것을 그저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저 노인이 되서 별미를 좋아함으로 에서를 좋아하고 에서를 좋아함으로 인해서 그는 에서에게 복을 주려고 하는 그와같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는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노년에 그는 분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와같은 것은 이제 그의 가정 안에서 형과 동생 사이에 쓸데없는 분쟁으로 나타나도록 그의 집은 쪼개져버렸지요. 이 일후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 정말로 원수된 이와같은 상태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계속 지속되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 시대에 요압이 에돔에 갔습니다. 그들을 정벌하고 그들 가운데서도 전쟁으로 자국민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그들을 학살해버립니다. 완전히 진멸하려고 하지요. 역사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전멸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수많은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역사에서도 100% 완전하게 전멸시킬수 없습니다. 여기 에돔의 왕족, 왕자인 하닷이 어릴때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애굽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애굽으로 도망가서 바로에게 갔습니다.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로 저의 아내를 삼으매 다브네스의 아우가 그로 말미암아 아들 그누밧을 낳았더니 다브네스가 그 아이를 바로의 궁중에서 젖을 떼게 하매 그누밧이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더라"(왕상11:19-20).

 

여러해 전에 솔로몬은 열왕기상 3장에서 보면 바로의 공주와 결혼 합니다. 그는 이미 암몬 여인과 결혼 했어요. 그런데 또 바로의 공주를 아내로 들이지요. 그 이유는 솔로몬의 마음속에 애굽이라고 하는 대국, 그 대국이 혹시 자기의 국가를 침범해오지 않도록 안보를 위해 서 또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와같은 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을 많이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말은 애굽에서 옵니다. 그러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얼마나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까요? 여러분과 저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우리가 그 말씀을 약간 요리해서 어느 정도는 받아 들이고 또 다른 마음을 갖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하는것이 솔로몬의 삶 속에서 때때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갔어요. 이사야도 후에 이렇게 말하지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1-3).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서 이제 홍해를 건너게 하셨어요. 다시는 애굽으로 가지 못하도록 마른 따으로 건너게 하셨고요. 그 다음, 건넌 다음에는 물을 다시 하나로 합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 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애굽공주와 정치적인 이와같은 결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목적으로 결혼 했지요. 그래서 주님 말씀을 서서히 불순종하고 이제 심판을 받지요. 이제 그 결과를 보십시요. 하닷이 애굽으로 가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닷은 솔로몬의 원수 입니다. 솔로몬을 괴롭히기 위해서, 자기 민족을 학살한 그 사람을 그는 결코 용납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대를 기약하고 애굽에 가서 힘을 기르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의 아내의 여동생과 결혼 합니다. 그러면 솔로몬과 하닷은 친척이 되었습니다. 원수가 친척이 됩니다. 솔로몬은 이와같은 연혼을 통해서 그는 국가를 보호하고 안보를 확립했다는 그런 얇팍한 생각을 했습니다. 왜 얇팍한 생각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말을 많이 가져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은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의지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만 연혼을 함으로 우리나라를 잘 보호할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그의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간적인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해서 그의 원수를 세울때 그의 원수가 바로에게 가서 결혼하게 하십니다. 바로의 궁전 안에서 아내를 얻고 결혼함으로 인해서 솔로몬과 친척관계가 됩니다. 친척이 원수 입니다. 이제 그는 바로의 힘을 의지하고 솔로몬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생각으 가미한다면, 그것은 불신의 생각이죠. 그 생각으로 무언가를 이론적으로 '멋지다, 확실하게 될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은 다 허무한 것으로 결론이 날것이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23절 말씀을 보면 르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그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왕상11:23).

 

에돔은 유다 남부에 있고요. 르손은 아람 사람입니다. 북쪽에 있는 것입니다. 남쪽에는 원수가 있고 북쪽에도 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원수들은 물론 솔로몬의 생애 중에 솔로몬의 왕국을 넘어뜨리지는 못했습니다. 멸망시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지요. 하나님이 솔로몬을 심판하시게 될때 "네 대에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슬픈 일이죠. 솔로몬때에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정말로 기뻐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대에 일어난다면, 아들때에 가서 나라가 쪼개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일어나고 쪼개질뿐만 아니라 외부의 원수가 솔로몬의 옆구리를 계속해서 창으로 찌를 것이다. 괴롭힐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슴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일이 일어나냐면요. 인간의 얇팍한 생각으로 이렇게 저렇게 구려가고 이렇게 저렇게 요리하고 이렇게 저렇게해서 정책을 세우고 대책을 마련하지만 그 모든일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와같은 행사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코 복을 주실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할때 수많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때때로는 많은 반대도 있습니다. 때때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도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한다면 주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너의 선택은 바른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 생애에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에롭게 하는 사람에게 영예롭게 한다는 말씀을, 그런 약속을 어기시는 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르손 이외에 26절 말씀을 보면 안에서 일어나는 원수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왕상11:26-27).

 

이스라엘 의 열두지파 중에 두 강력한 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지파, 또 하나는 에브라임 지파 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이 쪼개져서 남북으로 갈려지게 될때 남쪽과 북쪽의 인도자가 되는 지파는 남쪽에서는 유다지파, 북쪽에서는 에브라임 지파 입니다. 이미 사사시대에서도 기드온이 미디안을 격파하고 승리해서 돌아올때도 에브라임은 그와같은 자신들의 강력함을 믿고 교만함으로 기드온에게 와서 시비 걸지요. "왜 전쟁에 나갈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이민족이 들어와서 자국민들을 압박하고 괴롭히게 될때 그는 분연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일어났습니다. 만일 자국민의 복지를 생각한다면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부르든 안부르든 그들의 수가 그렇게 강하다면, 교만하다면, 그렇게 자랑한다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기드온을 도와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전쟁할때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전쟁이 다 끝나서 승리하고 돌아올때에 그때에야 시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정말로 국가를 사랑하거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것은 자기 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그와같은 전통이 있습니다.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는 항상 지파간의 경쟁이 있었습니다. 유다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거의 맞닿아 있지요. 솔로몬은 유다 지파의 왕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 그는 공사를 하게 될때 감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하게 그의 일을 성실히 했고 솔로몬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임한 사람이 솔로몬이 국민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있다는 반발을 그는 느끼고 있었고요. 백성들의 그와같은 반발을 그는 대변하는 대변자가 그는 되었습니다. 상황은 참으로 묘하게 되지요. 하나님은 이미 11장 9절 이하의 말씀에서 네번째 하나님이 나타낫셨고 솔로몬에게 심판을 경고 했습니다. "네 나라가 쪼개질 것이다." 이 쪼개질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틀을 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게될때 우리는 두렵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돌이키라 경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 했을때그 순간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경고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그리고 또 다시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그것을 거부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세요. 심판하실때 이미 "너의 나라가 쪼개진다". 라고 말씀 했는데, 쪼개지는 기초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보암이 마음속에 불만이 있지만 솔로몬 앞에서 그것을 표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여로보암에게 보냅니다. 새옷을 입고 있었는데 들에서 만나서 새옷을 열두조각으로 쪼갭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열조각을 줍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것이죠. 이 나라가 쪼개질텐데, 열 지파는 여로보암 네가 다스릴 것이고, 두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에게 줄 것이다는 말이죠. 이와같은 중요한 메세지를 들판에서 여로보암에게 아히야 선지자가 주었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왕상11:31-33).

 

여기 왜 열지파를 준다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까? 여기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가 나를 버리고" 중요한 이유는 저희가 나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립니까? 성전을 지은 사람인데요. 그의 출발은 여호와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를 사랑했다는 말은 솔로몬에게밖에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이 여호와를 떠납니까? 이와같은 가능성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같은 성향에 대해서 역사서를 읽게 될대 그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선지자가 아니다, 우리는 쓰러질수 있다는 것을 내안에 의식하고 주님 앞에 겸손하고 의지하게 될 때만 내자신이 자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끝까지 주님 앞에서 보존할수 있는 길이라는 이 말 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했지요. 다른 여러 신들을 그 여인들 때문에 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왕상11:34).

 

이 말씀을 보세요. 아까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심판을 경고할때 하신 말씀이 그대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음대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똑같은 메세지를 아히야를 통해서 여로보암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여로보암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두가지 케이스를 놓고 한번 비교하며 생각해 보십시요. 첫째,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직접 심판을 고합니다. 그 메세지를 하나님은 아히야에게 주었고 아히야가 솔로몬을 대적할 여로보암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엄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심판할 내용을 솔로몬을 괴롭힐 사람에 하나님이 똑같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읷이 심판 받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과 가가이 교제하고 그분을 영예롭게 함으로 그분이 우리를 영예롭게 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다른사람에게 가서 누설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말씀을 우리가 즐기고 갈수 있도록 우리에게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그 메세지를 전해 줍니다. 그리고 "너는 가서 그를 괴롭히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괴롭힘은 어떻게 어우러져 성취되나요? 르호보암이 어릭석기 때문입니다. 여기 또 한가지 말씀을 보십시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11:36).

 

같은 메세지를 전해주었지요. 그리고나서,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왕상11:37-39).

 

아까 앞에서는 아히야를 통해서 솔로몬을 심판할 것을 말씀했고 그 다음엔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너를 왕으로 이제 세울텐데, 네가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면 내가 네 왕국을 견고하게 세우겠다 하십니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에게 계속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그가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여로보암을 세워서 왕이 되게 할때 여로보암에게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러한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잘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 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바른 분별로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판을 할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비판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좀 쉽습니다. 비판보다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비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솔로몬을 비판하니 널 왕을 세우겠다. 그런데 너도 네가 솔로몬에게 이야기하는 것같은 말씀을 너도 지켜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집은 결코 견고할수 없다. 그러나 네가만일 지킨다면 내가 너의 집을 견고케 하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봐서 누구를 세워주고 펴벽되거나 기울어지거나 치우침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약간 붕순종해도 하나님께서 봐주시고 그런것은 없습니다. 여로보암에게 "네가 그렇게 비판 했다면 너도 비판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그 말입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비판하는 사람이 자기가 비판한 내용에 대해서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졌을때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까? 우리는 이와같은 엄중한 현실을,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럴때에 주님 앞에서 계속해서 우리 마음이 드려지고 우리가 정말로 비판하게 될때 바른 분별로 비판했다면 그 바른 분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순종해야 할 모든 특권과 책임으 우리는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순히 위선자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바로 그와같은 케이스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때 자기는 그렇게 못했어요. 자기는 자기가 비판했던 사람보다 더 못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악은 무엇입니까? 열지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두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이 왕국을 주셨습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 가운데 그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사실은 백성들의 불평을 대변함으로 인해서 그가 대표자가 되었고 백성들이 지지해줌으로써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에 왕이 된것은 아닙니다. 그는 솔로몬은 징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신 도구일 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다 왕국이 멸망으로 치달아 갈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반복해서 우상으로부터 떠날것을 말씀하셨나요? 결국에는 그들이 돌이키지 않자 멸망이 확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의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더이상 우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예요. 멸망이 확정되었으니 느부갓네살이 오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초기의 선지자들의 메세지가 아닙니다. 이제는 때가 늦었어요. 이제는 회복할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예레미야는 멸망이라고 하는것은 기정 사실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만일 살기를 원한다면 느부갓네살이 올대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준한 사람들은 끝까지 민족주의 민족주의 하면서 항거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해 버립니다. 유다는 완전히 멸망 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도구인데 솔로몬과 그의 아들을 징계하는 도구 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도구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멸망 시키고 유다 왕국을 완전히 노예화 시키고 승승장구로 나갈때에 자기는 무슨일을 해도 다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여러차례 징계했습니다.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그가 공중누각을 걸어갔지요. 느부갓네살은 평지의 사람입니다. 바벨론은 평지의 사람입니다.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것은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두 강이 만나서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가지요. 이 강 사이에 있다해서 페소포타미아 입니다. 그것은 평지 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메데에서 데려 왔습니다. 메데는 산악지대 입니다. 아내가 평지에 와서 사는데 답답함을 금할수 없습니다. 산에서 산 사람들이 평지에 와서 살면 얼마나 산을 그리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원래 살아서 평지에 살았습니다. 분지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캐나다로 이민을 갔을때에 산 옆에 살았습니다. 몇년을 산 옆에서 살았는데 높은 산 옆에서 살다가 그 후 토론토에 갔습니다. 그곳은 평지였습니다. 저는 산이 그리워지는 것을 처음 깨닳았습니다. 저는 원래 산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잠깐 산에 살았음에도 붉구하고  산이 그리워진다 그말입니다. 메데의 아내가 느부갓네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공중누각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누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테라스를 만들어서 마치 산과 같이 만들어서 거기에 나무를 심고 그래서 마치 산과 같이 만들었지요. 자기 아내를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의 이방 아내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산당을 만든것처럼 느부갓네살도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리고나서 어느날 이 공중 누각을 지나게 될때 이 위대한 바벨론 제국을 건설하고  이 어마어마한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 누구냐? 자기라고 자기 스스로 자화자찬 하고 있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치도록 만들었습니다. 7년동안 그는 들판에서 나무 밑에서 그는 풀을 뜯어먹고 미친사람으로 생활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루셨어요. 그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하고요. 그들을 심판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일을 해도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지 않았을때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너도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라보게 될때 주변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상태는 어떤가, 나의 모임은 어떤가? 나의 모임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모임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금후에 우리는 르호보암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볼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교훈을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부분에서 40절 말씀을 보십시요.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왕상11:40).

 

솔로몬이 바로의 공주와 결혼함으로 국가를 튼튼히 하려고 했지요. 그런 모든 인간적인 계획, 생각들을 하나님께서는 전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이 누구에게 찾아갔어요? 바로에게 찾아갔습니다. 애굽왕 시삭에게 찾아가서요. 도움을 구했고요. 그는 또 도움을 주었습니다. 보세요, 애굽왕은 솔로몬에게만 충성합니까? 아닙니다. 솔로몬의 원수와도 동맹을 맺습니다. 충성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로지 믿을수 있는분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입니다. "나를 의지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냥 역사에서 나온 이야기로 듣고 그냥 좋은 말씀이라고 하고 끝나서는 안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요. 우리가 개인의 삶 속에서 여러가지 위기와 위태로운 일이 있고 현실을 봐서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주님을 의지하고 결코 그 원칙을 버리지 마십시요. 주님이 반드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인간을 의지하고 나의 생각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될때 우리에게 오는 것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개인의 어떤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걸어가게 될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입증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려워 한다면 예레미야 17장 이하에 있는 말씀처럼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보답을 해주시는지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우하실것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가뭄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또한 결실이 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때때로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었을때 애굽에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불쾌히 생각하셨는데요. 만일 아브라함이 기근이 있었을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믿음을 행사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때때로 기근이 옵니다. 그 기근이 오게 될때 주님을 의지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같은 기간을 통해서 우리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 테스트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목적 때문에 주시는 가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간을 견뎌야 할 책임과 특권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면 주님께서 그 이후의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대우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바로 이렇게 하신다고 하는 것에대한 간증을 나타낼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간증을 우리가 보유하게 될때, 또다시 어려움이 오게될때 우리는 그 다음에도 여전히 주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열왕기상 11장에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교훈이라고 생각 합니다.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11:41).

 

여기보면 솔로몬의 '남은 사적'이라고 합니다. 그 앞에 성전을 짓고 왕궁을 짓고 번영하고 외국 사신들과 왕들이 찾아오고, 수많은 아름다운 일들 이외에도 그 외에 남은 여러가지 사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여러분과 저의 행적이 주님의 책에 다 기록이 된다고 하는것을 기억하십시요. 우리가 내딛는 발자국, 우리가 만드는 결정, 이 모든것들은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눈길을 걸어가게 될때 발자국 없이 걸어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발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교제하면서 우리의 바른 선택을 통해서 우리의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발자국을 영원히 남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게 될때 주님을 경외하지요.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요. 주님의 인도를 저희들이 두려움 가운데 따라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공하게 되겠지요. 여기 '저의 행한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었다' 라고 합니다. 행장이라는 말은 그의 행사, 그가 행한 모든일을 다 기록한 책이라 이 말입니다. 그와같은 것을 기록한 사람이 세사람이 있습니다. 역대하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대하9:29).

 

나단과 아히야와 잇도 세사람이 솔로몬의 시종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을 바라보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데요. 그 이외에도 사람들 중에 중요한 사람, 세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을 대단히 분별력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은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항상 어떻게 결정 했는가, 그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분석하고 생각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기록들, 그리고 그의 모든 삶, 통치 40년만에 이제 그는 주님께 갑니다.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하9:31).

 

이것은 두려운때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솔로몬의 말년에 그의 실패와 불순종 때문에 이제 드디어 그의 아들대에 심판이 떨어진다고 하는 이와같은 시기가 온 거예요. 솔로몬은 그와같은 유산을 남겨주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현실을 보게 될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게 될때 나는 다음 세대에 어떤 유산을 물려주고 죽을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저 살아가고 그저 오늘도 하루 지나고 내일도 하루 지나고 그렇게 가는 삶으로 그저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데, 내가 주님께 가게될때, 만일 주님께서 내가 사는 동안에 오시지 않는다면 내가 주님께 가게될때 나는 어떠한 유산을 내 후손에게, 내 자식들에게, 다음 세대에 남겨두고 갈 것인가 하는것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남겨줄 것인가, 아니면 나는 그들에게 유산을 남겨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보다 훨씬 나은 시작을 할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반을 쌓아줄 것인가요? 사람들은 물질과 유산과 또한 재산을 남겨두기를 원하고 그것 때문에 일생 노력 하지요. 그리고 자식을 사랑한다고 애기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경우에 그와같은 재산 때문에 형제들은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경우를 우리가 보지요. 그런 유산 말고요. 영적인 유산을 통해서 그들이 싸울 필요도 없고 그들이 이 위대한 유산으로 엄청난 풍부함을 그들이 누릴수 있도록 우리는 다음세대에 그와같은 유산을 남겨줄수 있을까요?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와같은 유산을 남겨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답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가 이야기 한들,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와같은 유산을 남겨줄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같은 진리를 말씀에서 보게 될때 주님께서 저희들 마음을 도와주시고요. 주님의 음성을 저희들이 깊이 생각하고 주님 말씀을 알고 순종함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저희들 자신에게, 후대에게 유익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대하10:1).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그는 세겜으로 갔어요. 르호보암은 한살이 되었을때, 솔로몬은 아비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41세 입니다. 그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이 될때 세겜으로 갔습니다. 왜 세겜으로 갔을까요? 솔로몬은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곳에서 대관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하지 않고 세겜으로 갔을까요? 세겜은 옛날에 육적인 사사 아비멜렉이 세겜 출신이고, 기드온의 첩이 세겜 사람 입니다. 그래서 그는 폭력을 통해서 그드온의 배다른 형들을 다 죽이고 자기가 사사가 되고 자기가 지도자가 될때 그는 세겜 사람들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기드온은 사람들이 "왕이 되어 주십시요"라고 했을때 "나는 왕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인데요. 그런데 그의 말에 모순되게 그는 세겜에 첩을 얻고 아들을 낳았을때 아비멜렉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네 아비는 왕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왕이 안된다라고 말해놓고 그렇게 이름지었습니다. 여자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자에 의해서 그 마음에 미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는 본인 자신의 소신은 "나는 사사로서 생명을 걸고 내 백성을 구했다"고 말했지만, 그래서 그는 고결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낳았을때 첩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르고 골라서 지어줬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이것은 그가 한 말을 스스로 번복한 것과 같습니다. 세겜은 바로 그런곳입니다. 세겜은 유다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그는 왜 거기로 갔을까요? 그는 알량한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요.이제 분열되어가고 있는 이 두 강력한 지파의 중간지점에 갔습니다. 이 분열의 조짐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어리석은 결정을 통해서 순식간에 나라는 쪼개지지만 아히야를 통해서 이미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이 예언의 말씀은, 이제 이루어지고 있고 성숙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심지어는 르호보암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제스쳐를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겜으로 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대관식을 함으로 인해서 두 주요한 인도하고 있는 지파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세겜에 갔습니다. 이와같은 모든 것들은 인간의 지혜와 또한 사람의 생각, 그리고 사람의 최고의 생각입니다. 연합을 위해서 그러나 정말로 연합을 위한다면, 이와같은 제스쳐가 아니라 실제로 연합을 위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뒤에 애굽에서 여로보암이 오지요. 솔로몬이 죽었으니 더이상 애굽에 망명할 필요가 없다. 애굽에서 돌아오시오. 라고 했을때 그는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의 연합된 의견을 새 왕에게 제출하지요. "왕은 너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부과 했으니 이제 짐을 가볍게 해달라" 이것이 여로보암이 왕인 르호보암에게 요구한 말씀이었습니다. 만일 르호보암이 세겜에 가서 대관식을 한, 그와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이 하나 되기를 원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연합되기를 원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지혜로움을 가지고 그의 백성들에게 대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보시면 그는 실제로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교만 합니다. 백성들을 우습게 압니다. 백성들을 막 징취합니다. 백성들을 억압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관식을 할때에는 세겜에 가서 하는 그와같은 지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정말로 연합을 위한다면 연합은 언제 가능한 것입니까? 연합은 우리가 그냥 하나됩시다. 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제 사람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때는 악을 위해서 하나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선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요. 악을 위해서 이상하게 하나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빌라도와 헤롯은 보통때는 그들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죽이는 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악을 위해서 때때로 많은 사람들은, 군중들은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일을 상당히 쉬운 일입니다. 정치인들은 이와같은 일을 하는데 달인 입니다. 그래서 자기 표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게 될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똑똑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다윗 몰래 성문에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성문에 와서 아우성이었습니다. 거기가서 아무도 해결해 줄 사람이 없는데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했지요.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 함으로 인해서 자기 세력을 규합하고 그리고 부왕도 처치하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하는 이와같은 악한 일에 상당히 똑똑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에 있어서 상당히 악한 방법을 통해서, 악한 목적과 동기를 통해서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연합이라고 하는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진정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 뜻에 엎드리게 될때만 온전한, 진정한 연합이 있습니다. 여기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에게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요" 라고 했을때에 르호보암이 한가지 지혜가 또 있어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삼일동안 생각해보고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삼일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삼일동안 그는 모사들을 동원하지요. 카운슬러를 동원했습니다. 제일 첫번째로 그는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셔섰던 노인들의 교도를 초청합니다. 노인들의 카운슬러 입니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세가지를 추천했습니다. 첫째, 왕은 백성들의 종이 되십시요. 둘째, 백성을 섬기십시요. 셋째, 백성들에게 좋은말로 하십시요. 백성들에게 은혜 가운데 지혜 가운데 하십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말을 듣고서는 르호보암은 성에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또 다른 카운슬러가 있습니다. 소년 카운슬러 입니다.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소년들입니다. 그들은 젊습니다. 그들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패기만만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강점은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의 약점은 그들은 지식에서 모자랍니다. 경험에서 모자랍니다. 그들은 쉽게 교만해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사람들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면서 순종함으로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기간을 통해서 자기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이 소년들의 교도가 르호보암 왕에게 무엇을 추천해 주었습니까? 첫째, 당신의 새끼 손가락이 당신의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것도 주제넘은 말이겠지만, 이들이 한 말을 보십시요.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요? 당신의 새끼 손가락이 당신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라고 말했습니다. 르호보암 자신은 그 말을 들을때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아첨을 원합니까? 아첨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첨입니다. 대놓고 하는 거짓말을 검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필요에 따라서 살짝 거짓말 하는것을 흰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요. 아첨은 그중에 하나 입니다. 첫째, 손가락을 가지고 얘기했고요. 두번째, 당신은 백성들에게 더 무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당신 부친은 채찍은 백성을 다스렸는데 당신은 전갈로 다스리시오. 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르호보암의 이고를 참으로 높여주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계속해서 긁어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는 진리를 원합니까? 아니면 아첨을 원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겸손한 길을 걸어가고 이제 배척을 당하고 주님이 배척을 당했으니 나도 동일하게 배척을 당할 것이다 라고 각오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경우에 아첨을 원하고 실적을 원하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위대함을 광고하기를 원합니까? 여기 두가지 카운슬러를 저희들이 비교해 주십시요. 노인들의 카운슬러는 부친때부터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국가를 다스리게 될때, 솔로몬이 즉위하게 될때 그의 마음속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하면 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몇명 되지 않는 가족들, 자식들을 다스린다고 하는것부터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편애하지 말아야 하지요. 아버지가 자식들을 편애하지 않기 위해서 보통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신경을 써도 어떤때 기껏 하고나면 "형을 더 나보다 더 사랑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모든일에 있어서 공평하고 평등한것으로 다스린다고 하는것, 더군다나 그렇게 많은사람들의 모든 요구를 다 맞춰주고 공의 가운데 그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나는 아이라 내 백성은 너무 커서 나는 다스릴수 없습니다.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것을 감당할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인데요. 이 지혜가 르호보암에게는 없었습니다. 르호보암은 무슨 세월을 보냈습니까? 그가 41세가 되어서 왕이 되었는데 그의 부친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없었고 그의 후에도 그렇게 지혜로운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없는데 그분이 자기 아버지입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가까이에서 그가 지혜를 배울수 있었을텐데 그는 그 시간에 뭘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사무엘이 죽었을때에 수많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 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사무엘이 살아서 이야기 할때 그들은 듣지 않았어요. 그많은 기간을 그는 허송세월 했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에서 "너희는 시간을 아끼라" 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는 얻을것을 계속해서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를 아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 거기서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바로 다스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다스리는 일에 관여하게 될 것입니다. 결혼하면 다스립니다. 아내로서, 돕는배필로서 다스립니다. 다스림을 위해서, 남편의 다스림을 도와주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가장으로서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자는 이 말씀의 다양한 케이스와 여러가지 다양한 사건들과 상황들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도록 주님에게 구해야 합니다. 여기 르호보암은 어떻습니까? 두 그룹의 이야기가 삼일동안 끼어 있었을 거예요. 노인들의 이야기는 별로 시덥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뭡니까? 백성의 종이 되십시요. '백성을 섬기십시요. 백성에게 좋은말을 하십시요.' 그것은 참으로 듣기 거북했습니다. 왜 듣기 거북했나요? 그는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노인의 말이 얼마나 달가운 말인가 하는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보좌에 올라가서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백성을 희생하고 백성을 자기의 어떤 도구로 삼고 언제나 자기의 영화가 1번이고 이러한 삶을 산다면 노인의 교도라고 하는 것은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입니까? 즐기고 살고 백성들을 짓밟고 살고싶어하고 그렇게 짓밟게 될때 자기는 더욱더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노인의 교도라고 하는것은 그에게 너무나 쓰디 쓴 약이었습니다. 젊은이의 카운슬은 어떻습니까? 참 듣기 좋았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2-5).

 

때가되면, 어떤 때가 오는 것입니까? 그 앞, 디모데전서 3장에 말한 것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이럴때에 사람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채워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꼭 불신자에게만 적용하지 마십시요. 물론 불신자들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 귀가 가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싶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사람은 나의 참 친구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

 

나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친구는 주의 법도를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의 친구인가, 내가 교제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인가요?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면 서울에 올때마다 자주보는 캣치 플레이즈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서를 하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는 내용의 표어가 가을에 흔히 거대한 건물위에 붇습니다. 나의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교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교제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교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가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인가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요?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주의 말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인가요? 그리고 자기의 지혜를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이기적인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가요? 여기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만고의 진리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본문에 돌아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을때 솔로몬이 돌이켰어야 하는데 돌이키지 못했죠. 그래서 심판이 떨어졌습니다. 돌이킬수 없는 심판이 솔로몬때에 떨어졌고 그의 아들대에 가서 나라가 찟겨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잘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할까요? 보십시요. 하나님은 이미 앞을 다 내다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두렵다 이 말입니다. 소로몬때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르호보암때에, 아들때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아들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만약 노인의 교도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고 열조각, 두조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편 119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혜의 근원은 뭘까요? 지혜는 말씀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여기 주님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종일 묵상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직장도 가고 그런데 어떻게 종일 말씀을 묵상할까요? 데살로니가 말씀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말씀이 있지요.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24시간 계속 기도합니까?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기 있으면 기도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데요.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종일 묵상 했습니다. 아침에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저장해 두고 일터네 가서 일하면서 그것을 다시 꺼내서 묵상할수 있습니다. 묵상하게 될때 내가 하는일을 제쳐놓고 산만해서 일을 할수 없을 정도로 그런 묵상이 아니고요. 시간을 잘 사용함으로 낭비하지 않음으로 짬짬히, 여기서 '종일'이라는 말은 내가 해야할 책임을 하면서도 짬짬히 시간이 있습니다. 그 짬짬히 시간, 그 조각의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 믿는사람이 얼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될까, 얼만큼 신령한 사람이 될까, 얼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차이 입니다. 내가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에 드려서 내가 몇년을 어디가서 공부했다 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말로 성공하기 원한다면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투리 시간, 이 시간을 내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내가 앉아서 말씀을 읽을수 없어요. 그래서 읽은 말씀을 마치 소가 들판에 가서 빨리 풀을 먹고 안전한 곳에 돌아와서 그곳에서 계속 씹는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묵상을 자투리 시간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와같은 묵상은 내 마음속에 엄청난 보화로 채워 집니다. 내 삶 속에서 잊을수 없는 것들로, 필요할때 언제나 꺼내 쓸수 있는 것들로 말씀은 내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기 98절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119:98-100).

 

"나의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고" "명철함이 나의 스승보다 승하며"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다"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편기자는 대단히 오만한 사람이 아닌가요? 스승보다 자기가 낫고 노인보다 자기가 낫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스승보다 낫다' 라고 하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98절에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가 낫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기에 낫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크래딧은, 모든 업적은 자기에게 두는것이 아니고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지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이 함께 하고요. 둘째, 말씀을 묵상하기 때문에 세번째는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순서를 보십시요. 말씀이 함께 합니다.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킵(순종)니다. 말씀은 탁상공론으로, 이론으로,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이제 실제적으로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그 말씀의 지배를 받으므로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가 얻는 비결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얻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올때, 두 카운슬러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데 삼일만에 르호보암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왕상12:12-13).

 

첫째, 포악한 말로 했습니다. 노인이 카운슬을 할때 뭐라고 했습니까? 세번째로 '고운말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포악한 말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교만으로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죠.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친구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조언을 하느냐, 이것은 나의 삶을 결정해주는 정말로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나의 친구가 나에게 피가되고 살이되는 그런 조언을 하는가, 아니면 나로 하여금 멸망으로 밀어 붇이는가요? 여기 보세요. 소년들의 교도는 르호보암으로 하여금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밀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런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때때로 우리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는 그런 중요한 시기, 또 결혼을 해야 하는 그런 중요한 시기, 이와같은 때에 청년들의 조언을 구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왜 청년들의 조언을 구하는가요? 왜냐하면 청년들은 자기가 원하는 소욕에 맞춰주는 이야기를 할것이다. 라는 것 때문에 청년들에게, 같은 연배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언을 구했을때 보면, 정말로 그의 결혼에 저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리서치를 합니다. 그 결혼은 어느 방향으로 갈까요? 만약 그렇게해도 정말로 성공적인 결혼을 했다면 하나님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까요? 우리는 르호보암이 이와같은 두가지 종류의 카운슬을 했을때에 그의 선택은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두 그룹의 카운슬이 왔을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르호보암 입니다. 다시 말해서 르호보암의 가치관, 르호보암의 삶의 분별, 이 모든것을 그의 지혜에서 나오는데 그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인의 교도의 가치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사실상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보좌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지혜서에서 이런 말씀을 보게 됩니다. '왕의 나이가 어린 나라는 참으로 비극적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식도 경험도 지혜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부지가 백성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임안에서 장로를 인기 몰이로, 투표로,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으로 장로가 세워집니까? 장로는 성경 말씀에서 성령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본인 마음속에서 선한 것을 사모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면 그 성도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선한 것들을 보고 같은 성령은 인정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모든 일들이 주님의 위대한 뜻 가운데 주님의 지혜 가운데 일어나게 될때, 모임은 위대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모임이 주님의 뜻 가운데 행하지 않을때에 모임의 미래는 많은 슬픔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두가지 교도를 저희들이 볼때에 무슨 결과가 나왔습니까? 이제 르호보암은 선택했어요. 노인의 교도를 버렸습니다. 청년의 교도를 쫓아서 그들이 말하는대로 했습니다.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다스렸지만 나는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12:15).

 

여기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이렇게 카운슬을 받아들이지 않는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라가 쪼개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결단코 내가 심판하겠다. 결단코 내가 나라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라고 하셨지요. 그 사실은 말씀 그대로 입니다. 절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일어난다면 르호보암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시지만 사람이 자기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서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하나님만 일하는 것은 없어요. 우리 구원도 마찬가지고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성령의 인도를 우리는 따라갈까, 아닐까?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간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르호보암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의 부친의 위대한 지혜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다스리겠다고 보좌에 오른 처지에서 그는 치명적인 그와같은 선택을 합니다. 그의 치명적인 선택은 국가를 완전히 쪼개는 일을 스스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이와같은 일을 알지 못하고 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자기가 선택하게 될때 무슨일이 일어날지 만일 알았다면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한 마음은 부풀어져서 높이 높이 올라갔습니다. 이와같은 말씀을 보게될때 그 후에 반역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왕상12:16).

 

르호보암은 이제 멸시와 조롱가운데 빠집니다. 그의 역군인 아도니람은 18절에서 돌에맞아 죽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은 수레를 타고 얼른 세겜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옵니다. 대관식에 갔다온 왕이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충성맹세를 받아도 모자를판인데요. 이제 그의 중요한 장관 아도니람은 돌에맞아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역군을 모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갈로 다스린다고 했을때에 역군을 모집하는 이 사람을 먼저 죽이고 그 다음에 르호보암도 위태로왔습니다. 그래서 도망 왔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대관식이었습니까? 사흘동안 있었던 이 사건은 얼른보면, 그저 왕이 죽었고 아들이 왕이 되는 그런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때 내리는 결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그 이후의 수많은 사건들을 지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결정할때, 내 개인이 주님 앞에서 사를수 있습니다. 내 가정이 어렵더라도 주님 말씀에 돌아와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한다면 주님은 우리 가정을 세웁니다. 우리 모임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이제 주님의 말씀을 내가 순종하기 시작할때 모임은 주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를 생각해 보십시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말씀에서 교회는 집이다. 건물이다. 말씀 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의 터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에다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터를 닦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이 그 위에 세운다라고 말씀 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터 입니다. 그리스도가 터이기 때문에 그 위에 세워지는데 그것은 총 교회가 아니고, 몸이 아니고 모임 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말씀은 모임을 말씀하고 있어요. 모임은 그리스도가 터예요. 그리스도 터 위에 사도바울은 무슨 터를 닦았습니까? 교회 진리에 대한 것을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받았고 그 위대한 진리를 다른 열두사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른 사도를 세워서 신약 성경의 반을 쓴 사도바울을 통해서 교회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교회는 이런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구성이 된다. 교회는 이렇게 치리가 된다. 교회는 이와같은 모습으로, 성도들은 처신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교제한다." 모든 말씀을 그 말씀 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터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도바울이 세운것이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 교회진리를 아는 교사 입니다. 이 교회진리를 아는 교사가 이 교회진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상세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장로들은 이 교회진리를 철저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알고 순종하고 양들을 이 교회진리 가운데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다른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도들입니다. 이 말씀을 교사를 통해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소화하고 인도하고 있는 장로들의 인도를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교회 입니다. 우리는 르호보암이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평화의 나라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어마어마한 인도를 했습니다. 세계의 그렇게 유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유산을 받은 듯 했으나 솔로몬은 말년에 범죄함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 하셨지요. "네 아들대에 가서 다 빼앗겠다" 다 빼앗겠다 했을때 다 빼앗겼습니다. 누구에게 갔습니까? 솔로몬의 아들에게 간 것이 아니고 솔로몬의 종에게로 갔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될때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지혜는 어디서 옵니까? 시편 119편 98-100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함께하고 또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함으로 지혜가 우리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승하다고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르호보암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실패해야 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이 우리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개인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맏아서 간증을 나타내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가정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이루는데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부관계는 어떻습니까? 자녀들의 양육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전파되어야 하고 가르쳐져야 하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이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신약교회의 원리와 실행을 따라서 이 말씀이 순종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주님께서 이 가운데 위대한 이름의 명예를 얻게되고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의 시대에, 그의 건전하던 시대에 번영하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지혜에, 그리고 그 질서에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에 순종하는 이와같은 아름다움에 그들이 감탄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모임이 그와같이 건설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르호보암에게 그 시대에 심판함으로 이와같은 슬픈일이 일어났고요. 그 후에는 다시는 이 두 가랄진 나라가 연합되지 못한 그와같은 역사로, 그리고 그 두 나라는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포로되어 가는 그와같은 슬픈 역사로 남게 됩니다. 다시 돌아갈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엄위한 역사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역사를 역사가의 손에 의해서 쓰셨을까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이 행했던 이와같은 위대한 일들은 우리가 본받고 그들이 행했던 여러가지 슬픈 불순종의 역사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 우리의 이 시대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이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우리가 승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건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저희들이 르호보암의 또한 솔로몬의 역사를 볼때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고요. 우리는 그와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따라서 우리가 걸어갈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들 모두를 힘주시고 붇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