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장승훈 형제님(요약)

야고보서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시체를 보는 것과 같다

박이레 2021. 8. 8. 14:24

2021년 8월 8일 일요일(요약2) / 장승훈 형제님
< 야고보서 2장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시체를 보는것과 같다. >

오늘 야고보서 2장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14-26, 개역한글)

지난 시간에 23절까지 교제를 했습니다. 그 나머지를 이어서 교제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교제한 것을 잠깐 언급을 하면 어떤 형제나 자매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이 드러나는 상태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라고 말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성도의 필요를 알고 있지만 말로만 하는 것에 대해서 야고보 형제님은 이것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또한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 믿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다른 종교에서 독선적이라는 질타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알고 있다 할찌라도 정확한 지식이 바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문맥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행함이라는 것은, 잘못된 복음 때문에 선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린 가르침 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행함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행함과 함께 가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믿음을 행함으로 드러낼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개역한글)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26절) 이는 아브라함을 예시의 결론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함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자연스럽게 나타낼수밖에 없는 행함입니다.
또한 지식적인 믿음(말로만 하는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 사람이 믿기만 해서는 안되고 선한 행동을 해야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잘못된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그 사람의 구원받음을 구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삶의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방향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의 가치관이 세상을 향해 있는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거지를 하고 씻은 그릇을 건조기에 올려 놓습니다. 그러나 그릇을 바로 놓느냐, 뒤집어 놓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지난후 에 그릇이 다 말라 있느냐, 물이 고여있는가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4절, "이로 보건데" 이 말씀이 영어로는 "Ye see"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22절에서는 "내가 보거니와" 라고 할때 이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야고보 형제님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수로 반박하시다가 24절에 와서는 복수로 일반화 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었을때 구원받았을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수 있는 기지를 주십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개역한글)

이때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다기 보다는 앞에서 아브라함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더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때 이미 그 행동이 믿음의 행동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말씀드린 이유는 이 부분이 성경에서 최초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로 여기시고' 이는 칭의입니다. 의로 여기심도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한 부분입니다.
최초 언급의 법칙을 생각해 볼때,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었을때 그냥 믿은 걸로 끝나지 않고, 마음에만 담아두지 않고, 계속 드러냈지요. 결국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데까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기생 라합이 25절에 등장합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5, 개역한글)

여호수아서에서는 정탐꾼으로 말씀하지만 야고보서에서는 사자라고 말씀합니다. 사자는 어떤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라합은 이 정탐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의 믿음의 행동을 볼때 '접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을 평안히 영접하고 또 그들을 잘 숨겨주고, 집에서 잘 쉴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하게 발각이 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여리고왕 입장에서 보면 정탐꾼은 스파이고 그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배반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드러나면 당장에 라합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라합은 그들을 잘 접대하였고 그들이 돌아갈때에 그냥 보낸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망갈지를 잘 안내해준 것입니다. 그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라합은 굉장히 부도덕한 여인이고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믿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볼때에 굉장한 마음의 감동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브라함보다 사실은 라합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저희들은 더럽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당연한 사람들이지만 라합의 믿음처럼 그 믿음을 드러냈을때에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라합은 여리고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친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하나님께로만 방향을 정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온전히 하나님께만 자신의 운명을 받기고 하나님께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 개역한글)

영혼없는 몸은 쉽게 말해 시체입니다. 시체를 우리 곁에 계속 둘수는 없습니다. 시체는 장사하고 빨리 땅에 묻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이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는것, 지식적인 믿음은 마치 우리가 시체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을 봤을 때에 그와같이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때도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믿음이 행함으로 서서히 드러나야 합니다. 구원받으면 하나님께서 서서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인한 복음만을 전한다면 구원받은 이후에 말로만 말하는 믿음,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