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성경 인물

< 삼손_나실인 >

박이레 2021. 7. 26. 02:59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오후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삼손_나실인 >

 

이시간에는 삼손과 관련해서 교회에 관한 교훈을 끌어내고자 합니다.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16:16-20, 개역한글)

 

삼손과 드릴라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여기 사랑과 음모, 국가간의 갈등이 있기 때문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야기 입니다.

삼손에 관련해서 교회와 관련된 교훈을 살피고자 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삼손은 사사기 13-16장까지 긴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기록된것은 로마서에 기록된대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삼손은 날때부터 나실인입니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어머니에게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신약에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구약에서도 역사하셨습니다.

구약에 천사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자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분이 있는데 가끔,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된 분이 하나님 자신일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 있을 때 하나님이 천사 두명을 대동하고 나타나십니다. 소돔을 직접보고 심판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소고기를 드리고 식물을 드립니다. 그분께서 식사하고 가십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시고 사람이 보고도 죽지않는 하나님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서 살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아버지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가 염소 한마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교정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거든 번제로 드리라." 그리고 주님께서 번제불길을 타고 올라가십니다.

삼손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대화한 상대가 하나님인줄 알고 우리는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이렇게 나타나서 이야기 하지 않으셨을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이기고 살아납니다. 그곳을 야곱은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삼손도 주님께서 그의 탄생을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

구약에 위대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출생을 미리 예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손만 그 탄생이 예고됩니다.

교회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창세전에 계획되었습니다.

삼손은 가장 힘센 사람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두세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합심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 산을 옳기워 바다에 던지우라 할찌라도 될것입니다.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기도하여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나님도 하늘에서 풀겠다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힘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을 가진 삼손이 비극적으로 죽습니다. 그가 블레셋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잡니다. 그리고 머리털이 밀리우고 체포되고 눈이 뽑힙니다. 눈이 뽑히는 이것은 상징적입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삼손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비극적입니다.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체포되어 죽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이땅에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굉장한 비극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과 축복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삿16:15, 개역한글)

 

드릴라가 이렇게 묻는것은 삼손의 힘을 파괴하려고 묻는것입니다.

이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것으로 교훈을 받지 못하고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잡니다. 이것이 다 상징적입니다.

잠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잠자면 밖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벌어지는일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16:20, 개역한글)

 

삼손은 그들을 제어할수 있다고 확신하고 일어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이미 그를 떠나 있습니다.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삿16:17, 개역한글)

 

<나실인> 이것의 삼손의 힘의 비결입니다.

성경에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은 세명뿐입니다. 삼손, 사무엘, 침례요한 입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는것은 이스라엘의 경우, 구약경륜으로 우리들과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을 섬길수 잇는 사람이 레위지파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만 나옵니다. 그 들중 아론의 후손만 대제사장이 됩니다. 아론의 후손만이 대제사장이 되고 그가 일년에 한차례 지성소에 들어갈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을 직접 섬길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실인 제도를 직접 두십니다.

그들이 비록 레위인이 아닐찌라도 내 생애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두고 싶을때 <나실인>이 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때 나실인은 이 세가지 조건을 지키면 그는 나실인이 됩니다.

 

1. 술을 먹지 않고 2. 머리를 기르고 3.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돌아가셔도 장례식에 참석할수 없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을 지키면 그는 나실인이 됩니다.

 

나실인이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애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계신것과 하나님이 어떤 능력으로, 무엇을 하시는지 그를 사용해서 입증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실인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나실인 서원을 평생동안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한달이나 육개월동안으로 그 기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안에 계시기 때문에 평생동안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수 있습니다.

힘의 비결은 나실인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온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그에게 역사하는 이유는 그가 나실인기때문입니다. 그가 자기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받으셔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나실인 해야 하는것을 보겠습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그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

(삿13:3-10, 개역한글)

 

이 두사람은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부부가 자녀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자녀가 없으면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낳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인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약속된 것입니다.

<여자와 네가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최초의 하나님 약속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리스도 주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야 합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인류의 모든 불행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 위대한 일에 사용될수 있는 여자가 이스라엘인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잉태하면 혹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인가하는 소망 속에서 잉태하는 것입니다.

마누아의 가족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들을 낳을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가지를 명령하십니다.

1.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

2. 부정한것을 먹지 말라.

3. 삭도를 대지 말라.

 

그리고 삼손을 주시는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치는 것>입니다.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식민지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를보면, 이러한 역사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숭배하면 이웃나라를 강성하게 하셔서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고난을받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이 사사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게 하고 태평성대가 옵니다.

그러면 다시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숭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방나라로 이스라엘을 치케 하십니다.

이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삼손시대에 이스라엘은 블레셋 치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고통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아뢰고 돌이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습니다. 블레셋의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거기에 젖어버립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을 치면 이스라엘이 삼손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재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삼손시대의 비극입니다.

 

보통 블레셋의 정체성을 기독교 교파 종교로 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살지만 출애굽하지 않고 홍해를 건넌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에 모임이 다 정복된 것입니다. 그래놓고서 그것이 비극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개념도 없는 시기에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삼손을 약속하십니다.

 

블레셋 사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삼손의 임무는 블레셋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불순종으로 블레셋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하는때는 다윗때에 이루어집니다.

 

나실인의 조건이 세개 입니다.

1.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2. 부정한것을 먹지말고 3.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것입니다.

 

포도주는 성경에서 항상 상징하는것이 기쁨입니다.

포도주를 먹지말라는 것은 <너희는 세상에서 기쁨을 취하지 말라> 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의 첫번째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도, 하나님이 세상의 것으로 축복해 주셔도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는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누가 기쁩니까? 사도바울이 기쁩니까? 아니면 빌립보 성도들이 기쁩니까? 사도방울은 사도인데 체포되어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교회 개척도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기뻐할까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기뻐합니다.

기쁨은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 있고>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사람이 기쁜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성공적으로 일이 이루어지는것이 기쁜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영을 즐겁게 못합니다.

 

두번째, 독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세상은 포도주처럼 기쁜일보다는 슬픈일이 많습니다. 세상살이는 녹록하지 않습니다.

평범하게 사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평범하게 하는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더많은 좌절들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독주는 이 고통을 잊어버리고 싶을때 마십니다.

나실인은 세상에서 좌절되었을때 그것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와같은 문제를 주셨나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라고 자신을 살피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성경에서 술과 늘 반대되는것이 성령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것이니 성령충만을 받으라>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을때 제자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일부는 조롱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이 새술에 취했도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새술에 취한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성령충만한것을 술 취한것으로 비교합니다.

곧,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성령충만을 받으라는것입니다. 술과 성령은 반대되는것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장악합니다.

술을 먹으면 술이 그 사람을 장악합니다. 술을 먹으면 평소에 할수 없는 일을 합니다.

갈지자로 걷고 안하던 욕을 하고 안쓰던 돈을 물쓰듯 써버립니다.

 

성령이 그와같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평소에 그사람이 절대로 할수없는것을 합니다. 그는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삽니다.

 

두번째, 부정한것을 먹지 말라.

 

최고로 부정한 것은 시신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음이 가장 부정합니다. 죄때문에 사망이 왔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이는것이 부정합니다.

사람은 왜 부정합니까? 죄때문입니다. 죄때문에 죽고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부정한것의 반대, 생명은 믿으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리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책임은 죄로부터 떨어지고 하나님의 불순종하는 것에서 떨어져 나와서 참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나실인은 그 기간동안 부모님이 죽어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것은 순종한다는 표입니다. 머리가 긴것은 <나에게는 명령권자가 있습니다>라고 표시하는 것입니다.

 

나실은은 세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그는 술을 먹지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불순종과 죄악에서 떨어져 나와서 생명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세가지 표식을 가지고 나실인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3장에서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나타나시는데, 여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삼손의 어머니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버지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니 여인이 남편에게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다시 주님께서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주님께서 또 다시 여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남편을 주님께로 불러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적용합니다.

여자들이 더 영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가 영적입니다. 남편은 영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 문제가 됩니다.

원래는 남자들이 가정을 영적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영적인 아내들이 남편들을 영적으로 끌어들입니다.

남편에게 영적인 머리 노릇을 하도록, 계속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녀교육 문제입니다.

이 부부가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들에게 자녀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특별한 나실인인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기를까요?"

여기 우리들도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하신 자녀들입니다.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자녀들을 우리가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자녀들에게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계신지 알아내고 잘 길러내야 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포도주 마시지 말라, 부정한것 만지지 말라, 머리를 기르라 이것은 삼손이 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알리십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본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살았으면 하는 생애를 부모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성경을 보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기도해라 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이 그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자녀교육에 관한 하나님의 무서운 말씀입니다.

삼손은 세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술을 먹지 말며, 시체를 만들어내면 안되고 머리카락을 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해야하는 형식이 세가지 입니다.

이 세개 중 두개를 그가 어깁니다. 머리카락 기르는것 하나만을 그가 합니다.

 

삼손이 포도원길을 갑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포도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취하지 말라> 라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어떤분이 이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먹기만 하고 취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술을 먹으면서 취하지 않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술을 안먹는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포도원길을 가고 사자를 만났을때 사자를 찢어죽입니다. 그는 시체를 만들어냅니다.

 

돌아오는길에 그는 또 포도원길을 갑니다. 그리고 보니 그 사자 시체에 벌들이 꿀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그 꿀을 먹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는 시체를 먹은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삼손이 술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만 저는 삼손이 술을 먹었다고 믿습니다.

그가 결혼식을 합니다. 블레셋 여인과 결혼합니다. 싸워야 하는 적대국의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그의 부모가 이스라엘에 여자가 없어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 결혼식에 어머니가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결혼식에 흥에 겨워서 수수께끼를 합니다. 그 결혼식은 며칠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틀림없이 술을 먹었을 것입니다.

 

세개중에 두개를 삼손은 어겼습니다. 세개 중에서 머리카락만 그는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릴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밀어버립니다.

 

삼손은 형식을 붙들고 내용이 없습니다.

내용과 형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눈이 뽑히고 죽을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았을때 죽인 블레셋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그는 죽었어야 더 유익인 사람입니다. 그는 죽으면서 제대로 일합니다. 살았을때 엉터리로 일했습니다. 그가 죽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나요?

 

조금후에 자세히 살펴볼 내용이지만, 삼손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인데 개인적으로만 행동합니다.

블레셋과의 싸움도 전부 개인적입니다. 누구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결혼이 깨지고 결혼식에 했던 내기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옷 30벌을 빼앗아 오고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로서 싸우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극입니다.

 

하나는 내용과 형식이고 두번째는 그가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살지 않은것입니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23:25-26, 개역한글)

 

마태복음에 세개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먼저해야할것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바리세인은 겉을 깨끗하게 하고 속이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외식하고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세인들의 행동은 흠잡을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을 깨끗하게 하면 겉도 깨끗해진다>

 

첫번째 우선순위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입니다.

세상의 먹고살것을 걱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것은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먹고사는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두번째,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의 티를 빼리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내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형제로 네눈의 티를 빼라 하겠느냐>

 

7장 1절을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너도 흠이 있는데 다른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해야 합니다. 잘못했으면 공개적으로 면책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면책한것처럼 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다른 형제와 같이가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출교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네 눈의 들보를 빼고> 상대방의 눈에 티를 빼야 합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둘다 문제가 있으니 사랑으로 덮고가자' 하는것은 문맥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내 들보를 놔두고 상대방의 눈의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내눈의 들보를 빼고 그다음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를 빼야 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입니다. 기준을 정확하게 세워야 합니다. 기준이 성경이어야 합니다.

 

'다른사람은 왜 나처럼 하는것이 아닐까?' 라는것이 들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진리의 기준을 확보하고 말해야 합니다. 내 성향이다, 전통이다, 그런것들을 기준으로 빼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세번째, 속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삼손은 겉을 깨끗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길렀습니다.

머리를 기른다는것은 '나는 권위아래 있습니다. 나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머리를 기르고 실제적으로는 블레셋 여자의 무릎을 베고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자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데 같이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울때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그날 저녁 이스라엘이 군사작전을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진 이유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언약궤가 없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홉니와 비느아스가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다시 전쟁했지만 더 많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겨 버립니다.

 

사람들이 형식을 붙든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이길 군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지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편이 아니기에 언약궤를 진에 가지고 온것입니다. 언약궤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게 하자 하고 언약궤를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언약궤는 형식입니다. 언약궤가 주어졌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 함께하고 언약궤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지 진단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죄때문입니다. 그것을 자백하고 해결하지 않고 언약궤를 가져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다윗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습니다. 압살롬측의 세력이 강해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갑니다.

그때 제사장이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뒤쫓아갑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는 굉장한 의미입니다. 다윗이 도망가도 언약궤가 다윗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다윗이 이길것입니다.

 

도망가는 중에 제사장이 언약궤를 매고 다윗을 따라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다윗이 고맙게 여기며 기뻐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언약궤를 갖다 놓아라. 만일 하나님께서 내편이면 내가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편이 아니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두 극단이 있습니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극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에서 어긋나면 막 판단합니다.

내용을 중요시하는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보시니 형식이 어떠해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주일날 형제들이 평상복을 입고 자매들은 치마도 입지않고 옵니다. 내용이 중요하니 예배드릴때 떡말고 밥을 올려놓아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합당합니까? 혹은 형식을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중에 직장에서 집으로 들릴시간이 없어 부득히 교회로 옵니다.

제대로 집회에 참석할만한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이 복장으로 가느니 그냥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삼손처럼 형식을 취하고 내용이 없는 사람을 반대합니다.

주님은 속을 깨끗하게 하면 겉이 깨끗하게 될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속이 깨끗한데 노란머리를 하는 형제는 없습니다. 그가 어떤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그 형태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삼손이 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는 부분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삿3:11, 개역한글)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삿3:31, 개역한글)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삿5:31, 개역한글)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날 동안 사십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 (삿8:28, 개역한글)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삿10:1, 개역한글)

 

사사들이 죽고나면 성령님께서 그들을 평가합니다. 사사가 통치하던때는 항상 태평성대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만 다릅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 (삿16:31, 개역한글)

 

삼손은 그냥 사사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평안을 주지도 못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한 개인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극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한번도 행동한적이 없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살았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개역한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누구든지, 모든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일군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심 사역자들에게만 말씀이 아닙니다.

 

교파에는 성직자가 있고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나쁜 단어입니다.

우리는 다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둘로 나눕니다. 우리 가운데 성직자가 있는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입니다. 우리는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은사와 직분의 차이는 있지만 헌신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주님을 따르겠느냐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 암시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내 생각을 따를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겠다는 결단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제가 상도동 모임 수양회를 갔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말씀을 교제하셨습니다.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정년퇴직을 하시고 또 다른 직장에 다니십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이것이 형제님의 간증제목입니다.

그 형제님은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시고 헌신되이 섬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 마음 가운데 이러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제로 많은분들이 고민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리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100% 헌신된 사람 한명을 주십시오 그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꿀것입니다."

 

90% 헌신된 사람 100명 말고 100%헌신된 사람 한명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드리면 손해볼것 같습니까? 주님께 안 드리면 이익이 될것 같습니까?

 

내 삶의 목표를 주님이 결정하게 할 것인가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목표는 교회를 이땅에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 말씀대로 교회를 이루고 사는것만큼 고급한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언제까지 뭔가를 해야 하는데 돈이 안생기고 아이들의 학교때문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임이 성경대로 안되는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교회집회가 잘 세워지지 않는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주님말씀앞에 설수 있습니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댓가가 지불됩니다.

 

제가 간증을 드리면, 저는 81년도에 선교단체를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파에 있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성경과 제가 섬기는 교회나 인생이 맞지 않음에 고민했습니다.

4년동안 고민하니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결혼했고 아파트가 있고 자녀도 셋 있고 원하는 직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모든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 모든것을 가져가시고 성경적인 교회를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빨리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10년 걸려서 모임에 왔습니다. 그런데 모임에 와서보니 제가 버리고 온 교파를 모임이 따라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모임이 이렇게 간다면 저는 모임에 있고 싶은생각이 없습니다.

 

강서모임 형제님께서 제가 모임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가던 중이 성경을 펴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왜 당신들은 이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희는 주저없이 그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할것입니다."

제가 그말을 듣고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

 

그리고 <날마다> 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때나 위기때마다 제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것이 완벽하게는 하지 못하지만 변함없이 그의 삶을 끌어가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날마다> 로 요구하십니다. 그 맹새가 한번으로 족한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리세인중의 바리세인이요,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것을 내가 배설물로 여기노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 모든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

한번 하나님께 충성하는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그 삶을 끌어가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정말로 주님을 아는것이 가장 고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전심으로 나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무엇을 하시든지, 내 최고의 목표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세우는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럴때에 우리의 삶이 고난으로만 가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상급을 준비해 주십니다.

<풍성한 삶>을 주십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문득 이것이 다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충분히 헌신하고 있지 않는것입니다.

우리는 받은만큼 충분히 주님께 드리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식을 붙듭니다. 저희 모임이 말씀대로 하지 않는것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을 말씀대로 합니다. 삼손처럼 형식을 딱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교파처럼 하는것입니다. 블레셋여인의 무릎을 베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에 걸맞는 내용들이  채워져야 합니다.

술과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과 비교할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좌절할때마다 그것으로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앞에 더욱 큰 믿음의 발판으로 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살리지 못한것입니다. 죽인것이 아닙니다. 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내는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모든면에서 인정하는것입니다.

저희들이 이 나실인의 삶을 살고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칭찬과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삶을 인도해 주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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