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1일 수요일 2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다윗과 언약궤_하나님의 방법 >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2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삼하6:1-15, 개역한글)
이는 언약궤를 다윗이 자기 성으로 운반해오는 내용입니다.
언약궤는 성막의 핵심 지성소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겨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빼앗아 자기들의 신 다곤 신상앞에 두었는데 그 다음날 다곤 신상의 머리가 잘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른곳에 옮기자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결국 블레셋은 언약궤를 감당할수 없어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돌려보내진 언약궤는 약 90년간 이스라엘에게 잊혀진채 있게 됩니다.
2 저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4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8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 가소서
(시132:2-8, 개역한글)
다윗은 어릴적부터 하나님이 주신 언약궤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셨음을, 지성소와 그 성막의 중심인 언약궤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어릴적부터 소원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가 이스라엘 가운데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함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합당한 곳에 없는데, 나는 좋은 왕궁에서 잠들지 않겠다는 소원을 갖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언약궤가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은 이 언약궤를 가져오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처음에 언약궤를 찾아 수레에 실어 옵니다. 그리고 소들이 뛰는걸로 인해서 웃사가 그 언약궤를 잡자,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십니다.
참으로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은 사람이 지은 책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 합니다. 그런데 소들이 뛰어서 언약궤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땅에 떨어지면 안됩니다. 웃사는 언약궤가 땅에 떨어지면 안되기에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웃사가 죽었습니다.
참 이상한 결과 입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그는 한번 범죄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가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잘못은 반석을 명해 물을 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반석을 두번 친것입니다.
저희 생각으로는 모세의 이 죄가 가나안땅에 못들어갈 정도의 큰 죄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성경을 지었다면 결코 이러한 내용으로 스토리를 전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때에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발견하고 애굽사람을 쳐서 죽여버립니다. 모세는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의 죄는 묻지 않으시고 반석을 두번 친 죄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들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웃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언약궤를 잡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죽었습니다.
훌륭한 책일수록 많이 읽으면 그 본래의 내용을 이해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구원받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자만이 알수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성경을 백번 천번 읽어도 결코 알수 없습니다.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삼하6:2, 개역한글)
언약궤가 상징하는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개역한글)
첫번째,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곳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신약으로 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레16:14-15, 개역한글)
두번째,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혹은 시은좌라고도 합니다) 그곳에 일년에 한차례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정확하게 상징 합니다.
이에 다윗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대상28:2, 개역한글)
세번째, 다윗이 성전을 지을 재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언급할 때,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합니다.
발등상은 의자에 앉으면 발 아래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에는 왕같이 높은 자만이 발등상을 썼습니다. 곧, 발등상은 왕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다시 정리하면 언약궤는 이와 같습니다.
1.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냅니다.
2.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3. 하나님의 보좌, 통치 장소입니다.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생애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당하게 살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리에 주를 모시라>
개인도, 지역모임도 주님이 '주'가 되셔야 합니다.
다윗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합당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합당한 위치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삼하6:3, 개역한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운반합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레위의 고핫자손이 고리를 어깨에 매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다윗은 수레를 씁니다. 그러나 수레는 블레셋 사람들이 쓴 것입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서 돌려보냅니다.
새끼를 낳은 어미소를 새끼를 떼어놓고 보냅니다. 그들은 어미소가 뒤돌아보지 않고 갈길을 죽 가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재앙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미소가 그대로 직진 하여 갔습니다.
수레는 세상의 합리적인 이동수단입니다. 안전하고 빠른 장치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썼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수레를 씁니다. 이것이 첫번째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레위 자손이 메고가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수레를 썼습니다. 합리적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쓴 것입니다.
두번째,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모를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왜 다윗은 그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운반하도록 하였을까요? 이는 언약궤가 그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집은 아비나답의 집입니다. 웃사와 아효는 아비나답의 아들입니다. 곧, 세습입니다.
성경에서 인도자는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인도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질 수 있는 인도자를 세우십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삼하6:5, 개역한글)
구약에서는 악기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입니다. 지성소가 있는 장소에서는 악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맏기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그 일을 진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쓰면, 계속해서 사람의 손을 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불순종 하였을때, 소가 뛰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민4:15, 개역한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언약궤를 만지지 말라 하였습니다. 만지면 죽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또한 아무나 보아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오직 택함을 받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차례 지성소, 언야궤가 있는 곳으로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6:9, 개역한글)
다윗은 두려워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움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가 있을 때 사람은 두려워 합니다.
이때에 다윗은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제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합당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이 일의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하시거나 실수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에게서 잘못을 찾습니다. 언약궤를 그는 오벳에돔에 두고 석달간 다시 살핍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6:13, 개역한글)
이제 언약궤를 맵니다. 그 석달간 말씀을 살펴본 것입니다.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대상15:1, 개역한글)
왕이 합당한 장소, 궁궐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합당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왕의 궁궐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3 이스라엘 온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여호와의 궤를 그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리고자 하여
4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으니
(대상15:2-4, 개역한글)
<가로되 레위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으니>
12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족장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케 하고 내가 예비한 곳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대상15:12-13, 개역한글)
다윗은 이스라엘과 레위족속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만 가능 합니다. 동기가 옳으면 다 옳은것이 아닙니다. 동기가 옳아도 방법까지 옳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6:13, 개역한글)
이 장면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들이 분명히 알고 행한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 궤를 하나님 대우하듯이 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개역한글)
<한가지 일>
우리가 한가지 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한가지 일을 구했습니다. 이는 마르다의 섬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것이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도 자기 생애의 한가지 일만을 구합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헌신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가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가지 하나님 앞에서 상받기를 구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가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는 전쟁의 용사요, 전쟁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구한 한가지가 무엇입니까?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그가 구한것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의 하나님의 집은 성막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리에 계신 것, 그리고 그 앞에 있는것이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모>라고 되어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질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주님앞에 앉아서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약의 성막이 신약에서는 지역모임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한가지여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8것입니다. 이것보다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구해야 합니다.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듣는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소원처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역모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고 배우고 묻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맹세 했습니다. 언약궤를 찾기까지 잠들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찾았습니다. 삼만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삼개월간 실패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일로만 해결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오늘날 지역모임에서 계속 잊어먹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합리적으로 보이는 많은 것을 할때마다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처럼 말씀을 찾아 돌아가야 합니다.
실패하는 것은 잊어먹었거나, 부주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서신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롬1:13, 개역한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두번 부정했습니다. 이는 강한 긍정입니다. 이 표현을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여섯번 씁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아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반드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내가 갈려고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쓴것일까요?
우리가 복음과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사도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로마성도가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에 이러한 일이 있을때에 이와같이 처리해야 함을 모르면 육신적으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시아> 에서 아마도 아베소 교회에서 당한 환난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 회 성도들이 고난과 환난에 들어갔을때 어떻게 성경적으로 처리할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1, 개역한글)
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경험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물을 마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두사람을 빼고 다 죽었습니다. 이를보고 "그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정하고 어리석었을까?" 해서는 안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10:11, 개역한글)
그들이 당한일이 내 얼굴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조금만 위험이 오면 불평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이 어떠했는지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강하게 칩니다. 이방인은 놔둡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잘못하면 엄하게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잘못 할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실히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이스라엘을 보고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12:1, 개역한글)
'신령한 것' 은 은사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은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지금도 기도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지역모임의 성도님들이 자기의 은사를 알고 은사대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희생의 길을 걷는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를 자기를 높이는데 쓰면 안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4:13,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알지 않기를 원치 않은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미래 '휴거'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5, 개역한글)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미래 입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미래는 다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예언에 대해서 장래 있을 일에 대해서 모르면 안됩니다.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보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나단도 좋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밤에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거절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때, 사도바울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이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래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또한 지역모임의 은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이러한 것을 충분히 알지 않고 있으면 어떠한 일을 할때 영적으로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일로만 가능하며 영적인 일을 육신적인 일로 해서는 안됩니다.
이와같은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지역모임과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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