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서 개요, 느헤미야 1장 : 느헤미야의 기도 / 기드온 쿠 형제님 / 26년 10월 5일 월요일
여러분 모두를 환영드리며 이 자리에 이렇게 교제할 수 있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 이 장소에 또 처음 오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 이 중에 어떤 분들도 이 새로 옮긴 곳에 처음 방문하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주제는 느헤미야서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1장 말씀을 보고 다음 시간에는 2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3장은 대전에서 함께 나눠볼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주제를 함께해 보고자 한다면 대전까지 같이 오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또한 여러분이 녹음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왜 이 주제로 이 책을 선택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항상 제가 대답하는 것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입니다. 수년간, 또 한국을 방문하면서 여러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아마도 아직 다루지 않은 주제가 이것이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제를 살펴보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인도하심 가운데서, 또한 이 주제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개인 생활에서, 또 우리 가정에서, 또 각자 속한 모임에서 이 느헤미야서가 말하고 있는 주제가 오늘날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먼저 배경으로 에스라서 6장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스 6:14-15).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8-10).
느헤미야서 1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느 1:1-11).
우리가 이러한 장들을 함께 살펴볼 때에 주님께서 복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사실 역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면서 저도 역사의 일부분이 되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 역사를 좋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책 중에 가장 놀라운 역사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이 성경의 모든 지역에 대한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질문하기에 "그것은 어떤 역사길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역사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모든 인류의 문명의 역사에 그 주된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핵심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지역의 역사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변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그 주된 흐름을 지지하는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이런 게 중요한 사건 아닙니까?" 사실 우리 인류의 문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은 사실 이 하나님의 역사의 배경으로서 이용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그 사건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48년도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또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인류의 역사의 다른 부분들이 모두 이 하나님의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알렉산더 대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 세계를 정복한 것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연구해 볼 만한 아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결국에 이 느헤미야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세상을 정복할 때 사실은 그때 당시에 모든 세상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온 세계를 헬레니즘화로 통일하였고, 그 문화를 하나로 하고, 그리고 헬라어가 온 세상에서 통용되게 한 것입니다. 이제 국제어로 헬라어를 사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가 신약 성경에 사용된 언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자를 세우시고 온 세상을 하나의 언어로 표준화시켰습니다. 신약 성경을 제공하는 기반이 되고 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시적인 언어입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언어입니다. 그런데 공통 그리스 언어는 기술적인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교리를 기술하기에 아주 적합한 언어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잘 모르지만 그들은 단지 알렉산더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만 말합니다. 그 알렉산더 대왕의 삶과 죽음, 그가 이루어낸 성공들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단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하나로 표준화시키시고, 헬라어를 사용케 하시고, 그러한 가운데 신약 성경을 기록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기 나와 있는 많은 이방 왕들은 이 하나님의 역사에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그러한 사람 중에 한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데 사용한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추방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시고, 거기에 고레스 왕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라서 1장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조서를 내립니다. 그것이 에스라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엘서에 나온 그 4개의 금속으로 된 신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꾼 것이고 다니엘이 해석한 꿈입니다. 그 금은 바벨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과 그 가슴은 페르시아 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놋은 헬라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이 나옵니다. 그리고 철과 진흙이 섞여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고 싶지만, 저는 그 마지막 철과 또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이 로마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로마는 그리스의 일부에 속하는 제국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문화도 헬레니즘 문화를 주요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잠깐 제쳐두고 말씀을 더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 각각의 다른 금속들은 다른 제국들을 상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 그분의 나라를 이와 같이 다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제국을 다스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세우시고자 할 때 그와 같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패망하게 할 때 그 나라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고, 그리고 그를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부분입니다. 바벨론은 그렇게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메데 바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그때 페르시아 왕국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에스라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세우십니다. 고레스는 "나의 목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방인, 그 불신 왕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언급하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고레스에게 나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 가운데서 사용되는 왕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까지 그 앞에 어떤 왕들이 있었는지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에게 먼저 이 주요한 원리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느부갓네살 왕이든, 그가 헤롯 왕이든, 그가 트럼프 대통령이든, 우리 한국의 대통령이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컨트롤 안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투표장에 나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에게는 시간 낭비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투표로 세워졌습니까? 고레스가 투표로 세워졌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누구를 앉히는 데 있어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그것에 우리 이 인생들은 자신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에서 사도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워진 왕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왕도 그렇습니까? 아주 악한 왕도 그렇습니까? 제가 이것을 개요에 너무 시간을 많이 드리는 것 같은데요.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계셨던 시대에도, 누가복음 2장을 보게 되면 우리는 가이사가 온 세상에 명을 내려 호적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원래 그들은 나사렛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 가이사가 내린 한 명령이 그들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좋은 왕입니까? 여러분들이 그가 좋은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위에서 그는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금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내려고 한 것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이 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태복음을 보게 될 때, 여기에 헤롯이 등장합니다. 사실 그는 아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 죽여버리고자 하는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그것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아이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기록하기를 "성경이 응하여졌다"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서에 기록된 대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미친 헤롯 왕이 죽었지만, 그리고 그 왕이 죽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헤롯의 왕 아킬레오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봉왕으로 그 아버지처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킬레오 왕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요셉의 온 가족은 나사렛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마태는 "성경이 이루어졌다"라고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사람이라 기록된 말씀이 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때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왜 고대의 그같이 미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앉혀 놓으시는 것입니까? 왜 악한 사람들이 그 정권을 잡고 다스리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이루고자 하시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가운데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떨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상사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그와 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일하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그와 같이 허락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서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라서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을 떠나서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에 어떤 방해가 있었고 그러한 공사가 멈춰진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6장에 오게 됐을 때 그 성전 공사가 완료되고 온전히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왕의 586년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516년도에 그 성전이 다시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이 훼파되고 다시 세워질 때까지 정확하게 70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70년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그 예언서에 기록된 숫자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스더서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나옵니다. 성경 학자들이 이 아하수에로왕이 누구인지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스라서 1장에 나오는 고레스의 왕이 바로 그 아하수에로 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그가 또 다리오 왕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다리오 왕이 에스라서 6장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이라고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와 같은 견해를 취하기를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다리오 왕은 고레스의 손자가 됩니다. 이 다리오 왕이 에스더서에 나온 아하수에로 왕이라면, 에스더서 1장에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 무렵이 이 성전 건축 이후로 겨우 1, 2년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고 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이 건축되고 나서, 그리고 나서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이 일이 겨우 짧은 기간 떨어져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그것이 그 견해가 맞다면, 그때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미 이 성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였습니다. 이제 그 나라는 그 성전을 온전히 갖게 됨으로써 그 나라의 정체성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그 주위의 많은 대적들이 그것을 시기하고 그들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그와 같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만이 왜 그와 같은 죽이고자 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아주 그 유대인들을 완전히, 완전히 멸절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에스더서가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마포교회와 또 시흥에서 여러분이 어떤 사실을 들었을 때 엔터 키를 누르고 저장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포에서는 특별히 한 숫자를 기억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것은 특별히 '280'이라는 숫자였습니다. 여러분의 머릿속 하드 디스크에 아직 저장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님에 뜻이면 며칠 후의 집회에서 그 숫자를 다시 꺼내서 사용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특별히 이 '에스더 이야기'를 여러분의 머릿속에 잘 저장해 놓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 당장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 후에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이 나옵니다. 아닥사스다라는 왕은 아마도 다리오 왕의 손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에스라서 7장에 나오는 그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를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에스라서 1장에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것은 고레스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닥사스다 왕의 또한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서 7장에 있습니다. 에스라는 이 7장에서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왕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성전이 완성되고, 그리고 7장에 에스라가 그와 같은 위임을 받게 되는 그 사이에 57년의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57년이라면 사실 상당한 시간이 떨어진 후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그다음 구절을 지나갔을 때, 또 한 장을 읽고 그다음 장을 넘겨봤을 때, 그것이 단지 그다음 날 일어난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전이 완성되고 나서 에스라서 7장에서 에스라가 다시 위임을 받아 나오게 되었을 때 그것은 5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느헤미야 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겠습니까? 다시 14년 또는, 15년의 시간이 에스라서 7장에서 느헤미야 1장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한 시간 가운데 예루살렘은 여전히 온전한 성장 없이, 보수된 벽 없이, 그리고 소화된 문 가운데서 있어야만 했었습니다. 성전은 지어졌지만, 에스라는 돌아와서 율법을 가르쳤지만, 하지만 예루살렘은 여전히 합당한 성벽과 성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서 그 벽을 보수하고 다시 그 문을 세우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벽을 세우는 일들이 몇 장에 걸쳐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6장까지 이어집니다. 6장 15절에 보면 "성 역사가 엘룰월 25일에 끝나매" 52일 만에 성 역사가 완성됩니다. 사실 세상에서 중국 사람들이 아주 이런 성벽을 빠르게 만든다고 알고 있는데요. 중국에서는 건축에 있어서 굉장히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한 병원을 중국에서 한 일주일 정도 아주 말도 안 되는 그런 시간 가운데 건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느헤미야 시대는 굴착기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냥 전동 기구가 없는 시대입니다. 여기는 어떤 크레인도 없고요. 하지만 그러한 시대에 이 벽과 문들을 52일 만에 완성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의 전심을 다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도우심이 있다면, 어떠한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할 때, 우리는 많은 장애를 겪게 됩니다. 참으로 그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둘러싸여 있는 그 대적들 가운데서 계속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들은 헌신하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 그들은 52일 만에 이 역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를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느헤야서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 성벽과 성문이 다시 세워져야 됩니다. 에스라 6장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서 7장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다시 가르쳐졌습니다. 하지만 이 성벽과 성문이 없으면 그 도시는 안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까? 이것은 사실 굉장히 실제적으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모든 지역 교회가 그 하나님의 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것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 벽과 또한 문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별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영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지역 교회가 분명하게 세상과 구별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구별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영이 필요합니다. 이제 장로들과 집사들의 역할이, 그들의 사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문을 언제 열고 언제 닫을지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또한 느헤미야에 나온 도전이었습니다. 그 문이 7일, 24시간 열려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현재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돈을 벌기 위해서 저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계속해서 문을 열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합당한 경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어떤 것이 들어오고 어떤 것을 내보내야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지역 모임의 경영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떠한 모든 것이 다 들어올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올 수 있도록 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을, 수입을 결정하는 그 책임이 이 모임의 성별을 중요하게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벽은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 성벽은 우리가 구별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호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지역의 여러 지역 모임을 방문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역 모임들에 직면한 어려움 중에 하나는 그들이 계속 구별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더 이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벽을 점점 허물어 내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벽을 높게 세워야 됩니다. 우리는 성전, 성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에 그 성막의 뜰의 장막의 경계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뜰은 세마포 장으로 그 경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은 그 돌과 벽돌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또한 어떠한 벽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 또한 어떠한 벽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3장 말씀을 보게 될 때, 우리는 3장에서 그 벽을 세우는 사람들이 자기의 집 앞에 있는 구역의 벽을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그 부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는데 그 집 문 바로 앞에 있는 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앞에 있는 벽을 채우는 책임을 맡았을 때, 그것은 이 성별의 벽을 세우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정의 아이들을 인터넷에 이상한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거기서 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가드레일과 안전바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벽은 또한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다른 불신자들과 교류를 나눌 때 어떠한 벽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사업에 있어서 우리는 누구와 협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많은 사람들과 이와 같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세상 사람들을 닮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그들과의 구별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 자체에도 그와 같은 성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그 성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임에도 성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것에 있어 실질적인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의 세세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에게 그 모든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2절에 보듯이 그의 형제의 '하나니'었습니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느 1:2).
이 하나니라는 사람은 7장에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됩니다.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느 7:1-2).
'하나니'와 '하나냐'는 나중에 문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고 그리고 그 문을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기록된 것처럼 그의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무리에서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니와 하나냐과 같은 이런 성품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 하나니가 예루살렘의 그 벽과 문에 대한 그 소식을 들고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인도자들이 과연 누가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친해하는 여러분, 참으로 이와 같은 성도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백성의 상태를 살피는 그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그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그 안 좋은 소식을 걱정 가운데 가져온 그런 사람입니다. 이 하나니는 느헤미야에게 듣기 좋은 소식을 전해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좋은 소식만 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예의 바르게 생활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만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니와 하나냐는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까지 좀 더 좋아지겠죠."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이렇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들은 그곳에서 그래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에 또 괜찮은 소득을 올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하나니가 그렇게 이야기하였습니까? 그렇게 말 한다면 그것은 실체를 정확하지 않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점을 그들은 끄집어내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인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도자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리고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다." 참으로 아주 어둡고 절망적인 그런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평가하고 말해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복의 시작점입니다. 부흥의 시작점입니다. 그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이 그 회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는 이 간증을 지키는 데 아주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주일 학교에 초청해서 데리고 오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사람들을 초청해서 복음집회에 오게 하는 것이 아주 힘듭니다. 성도들을 격려하고 세우는 것이 엄청 힘듭니다. 그런데 이 모임 생활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도자가 해야 되는 일은 이것입니다. 그냥 모든 것을 다 잘 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 지내도록 그냥 지금껏 하고 있으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체적인 모임의 영적인 상태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실체를 그러한 현상을 직면하기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부흥의 시작은 그 실체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니가 말하기를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었고 그리고 성문은 소화되었다"라고 전했습니다. 참으로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들어야 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장래의 인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젊은 성도님들도 그와 같은 짐을 마음에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젊은 성도님들을 격려합니다. 이 지역 모임의 삶이 그냥 꽃밭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그냥 코스모스가 핀 그런 길들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냥 잠자리와 나비들이 나는 그런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면, 여러분이 세세한 상황들을 살펴본다면, 여러분의 영적인 성숙을 더 이뤄낸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들이 다 완벽하게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마음의 짐을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이 문은 수선되야된다라고 알아야 됩니다. 어떤 곳에 어떤 부분의 벽은 지금 훼손되어 있고 그것이 다시 수리돼야 된다고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자들을 우리는 존중해야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주 교만했는데요. 그래서 저는 수년간 많이 배웠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장로가 되면 "우리가 연속 보고 집회를 안 합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그 보고 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 연속 복음집회를 안 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때 16세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 그러한 마음의 짐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 성도님들은 올바른 것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바랍니다. 장로 형제님들은 그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고 한번 계획을 세워보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게 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가요? 그냥 수요일 일요일 우리가 하겠다라고 선언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너무나 천진난만 했습니다. 그분들은 저에 대해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제가 한 것처럼 그렇게 행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짐은 여러분 마음속에 가지고 있길 바랍니다. 그 성벽이 어느 곳이 문제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벽이 수선되어야 된다고 마음을 가지고 있기 바랍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장로 형제님들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도울까요?"라고 말한다면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 성벽에서 어떤 부분, 제가 특별히 도와줄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좋은 것입니다. "제가 어떠한 연장을 가지고 나올까요?" 참으로 젊은 성도님들이 그와 같은 마음의 결심을 가지고 나온다면 굉장히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신약 성경의 교훈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글로에의 편의 소식'을 들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의 하나니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글로에의 편에 듣기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 함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합당한 평가를 가지고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냥 사도 바울이 와서 "찬 형제님이 기드온에 대해서 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별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분쟁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든 사실을 사도 바울에게 전했고, 바로 그 결과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우리 자신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직면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개선하고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된다면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참으로 진정한 인도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들었고, 그리고 앉아서 울며,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그 실체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점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느헤미야가 여기서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런 부분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는 아주 놀라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위치에서 '나는 얼마나 이 자리에 편한가' 그는 그 자신의 지위에 집착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그 성벽들과 붙어버린 성문들을 고치고 있으라고?', '그 성벽 고치는 그 수고를 나보고 하라고?', '지금 나는 얼마나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냥 하나니에게 "그래 기도해 볼게." 이렇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기도해 볼게."라는 말을 변명으로 사용합니다. 그냥 자기의 일상적인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참으로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라운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그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에서 그의 '특별한 기도'를 주의 깊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숫자를 맞게 세었다면 느헤미야의 12번의 기도가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한 가지로 4절에 "하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2장 4절에 그의 짧은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그리고 4장에 와서, 4장 4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기도입니다. 그리고 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리고 5장 19절에 다섯 번째,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리고 6장 9절에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는 자들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곱 번째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9장 4절에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기에 이 기도가 그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데 그것은 느에미야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 14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 13:14).
그리고 마지막으로 22절입니다.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 13:22).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느 13:29).
그래서 29절이 11번째고, 31절이 12번째입니다.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 13:31).
그래서 이 책은 '기도의 책'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고 기도로 끝납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핍박과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인생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들을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에 둘러싸여서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처한 그 환경과 우리 가정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들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이 느헤미야서는 동일하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도움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늘이 열리고 갑자기 번개가 쳐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100 달란트 되는 그 돌을 악한 자에게 떨어뜨려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과 유황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느헤미야서에는 있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집회에도 언급을 드렸는데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느헤미야 시대와 유사합니다. 여기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이 느헤미야서에서는 세키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어떠한 기적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우리는 에스라서 7장에서 볼 수 있는데요. 느헤미야서 2장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라는 표현이 잘 나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데 그분의 '섭리'로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직접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서는 섭리적으로 역사하셨고 분명하게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분의 보좌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그분은 역사하십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역사를 지금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우리를 시험하고 핍박합니다. 그들은 밀어붙입니다. 그들은 위협합니다. 하지만 결국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성벽이 다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서 역사하셨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적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서는 계속 대적들이 그들의 방법을 바꿔가면서 공격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다른 형태의 공격을 하나님께서는 다 제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느헤미야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억하소서"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억해 달라고 그는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어떤 것을 잊어버리신단 말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 느헤미야는 자주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께 여러 번에 걸쳐서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제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약속을 하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다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긍휼에만 온전히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떤 것도 잊지 않는 하나님 앞에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돌보심을 붙들고 그분 앞에 그분이 하신 약속을 들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께 "기억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동일한 그 사람은 자신의 작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잊지 않음을 말하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 자신은 아주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더럽습니다. 참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수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인 그런 미천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은 얼마나 죄악되고 작은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억해 달라고 요청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느헤미야 그 이후의 일을 보게 되면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떠한 선하심을 행했는지를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징계를 내리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의로우신 가운데 그와 같은 징계를 행하셨고, 또한 은혜로우신 가운데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핍박을 받는 것인지 아주 두렵다"고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지 당신은 모르느냐"고 말합니다. 저는 항상 그러한 신자들에게 말해 줍니다. 만약 어떠한 드론이 여러분의 얼굴 앞으로 날아온다면, 그 드론이 부딪혀서 떨어져 이웃집에 들어가게 됐을 때, 그리고 그 이웃집이 망가지는 그러한 세상 가운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미사일들이 여러분의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세상 가운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이 고난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는 수많은 날을 주린 가운데 견뎠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의 파선하는 것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언제 해가 뜨는지 모르는 그러한 가운데 수일을 있었습니다. 그 대적들의 채찍을 맞았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밤에 그는 잠 못 들고 몇 날을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계속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제가 그러한 고난의 목록들을 보게 될 때 저는 사실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는 그때야 내가 받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은 사도 바울 같은 고난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이 받는 어려움들을 그냥 다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각각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도의 고난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고난은 우리가 참을 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은, 어떠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길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한데도 그렇게 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더하면 더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점점 더 작은 것을 돌려드립니다. 참으로 느헤미야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게 너희들을 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와 같이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기 있는 젊은 형제 자매님, 여러분은 기도하고 계십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길게 기도하는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1시간 기도해야 됩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백하기로 저 자신이 1시간 동안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길게 기도할 수 있다면 놀라운 것입니다. 1장에는 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9장에도 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주 짧은 기도가 계속적으로 느헤미야서에서는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냥 단지 한 줄입니다. 그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또 어디서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그 도움이 필요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냥 20~30초, 2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하늘에 빠르게 외칠 수 있습니다. 짧지만 아주 강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길게 기도하는 것보다 짧게 여러 번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24시간 항상, 항상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에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께서 기도 집회에 나오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 만찬 예배에 참석하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평일에 있는 기도 집회에 나오고 계신지를 물어봅니다. 이 성도들이 기도하러 함께 모일 때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들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기도가 중요하지 않은 거라고 혹시 생각합니까? 이 기도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외에 더 배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다 배웠을 때 배우게 되는 한 가지 교훈이 있다는 것은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4절부터 이 마지막 장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그는 왜 기도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1절 후반부에 그는 이렇게 결론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여기서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2장에서 그가 아닥사스가 왕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지금 왕 앞에 나가서 그를 만나게 될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휴가를 얻어서 예루살렘으로 갈 그 요청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합니다. 이제 2장에서 그는 짧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오랜 기간 가운데서 그는 계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제가 각각 구절에 대해서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그의 기도의 첫 번째로는 그가 자백하고 있습니다. 6절 후반부에 "나와 나의 아비의 집이 범죄하였다"라고 자백합니다. 단지 이 이스라엘 사람들, 이 쓸모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성벽의 벽을 아직도 건축하고 있지 않는 게으른 저의 형제들을 보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는 이 젊은이들을 보세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떠넘기기가 쉽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더 해야 된다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인도자는 자신을 그 백성들과 함께해 두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자백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드릴 테니 잊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읽는다면 제가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온 위대한 세 가지 자백의 기도입니다. 에스라 9장입니다. 느헤미야 9장입니다. 다니엘서 9장입니다. 그것을 집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부 9장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찰관을 부르는 말레이시아에서의 전화번호입니다. 에스라 9장, 느헤미야 9장, 다니엘 9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약에 나온 위대한 자백의 세 가지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 가운데 자신의 책임으로 그것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자신을 두고 있습니다. 그 자신을 그 나라와 함께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죄를 지었고, 그리고 나도 죄를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나의 조상이 범죄였고, 나도 범죄였다라고 말합니다.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였다. 그리고 7절에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이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인도자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낮은 상태에 있던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던지, 그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자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중재자로서 그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죄였다라고 자백합니다. 이제 출애굽기 33장에 가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2장의 출애굽기에서는 금 송아지를 만드는 범죄를 합니다. 33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 앞으로 달려나가서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백이 먼저 있었습니다. 이 자백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반부에서는 이제 느헤미야는 '언약'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백은 내가 행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언약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돼야 됩니다. 어떤 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냥 불필요한 것들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가 끝난 후에 여전히 그들은 기도의 효과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합당한 분이심을 기도하며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기도를 마친다면 우리는 위안과 평안 가운데 기도를 마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씀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 가운데 기도를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백은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이고, 언약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길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1절에 나와 있듯이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느 1:11).
"하나님 저를 위해서 이 일을 행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이것을 기도의 공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것들은 영적인 기도에 들어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참으로 내가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정직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우리는 항상 자백할 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하신 일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심을 알고, 그리고 "저의 손을 형통케 하옵소서"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적이고 여러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약간 초과였는데요. 이후에 시간을 계속해서 함께 교제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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