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 믿음 소망 사랑 : 사랑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2-4).
이번 시간에는 사랑에 대해서 여로분들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에 있는 에베소에 있었던 그 지역교회의 상태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 2장 2절에 보면 행위, 수고, 인내가 나오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첫번째 시간에 읽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던 교회의 역사와 수고와 인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차이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에는 그 행위와 역사 앞에 은혜의 역사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수고앞에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사랑의 수고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내 앞에는 소망의 인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에베소 교회에는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급되지 않고 단지 그들에게서 보이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그 일들을 만들어내는 내적인 덕목들이 부족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것은 이 내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없이 이제 외적인 활동들을 만들어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있어 보이는것같은 그런 외적인 활동들은 우리가 겉으로 만들어 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 눈에 보이기에 칭찬을 받을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내적인 가치들에 더 평가를 하시고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거짓없는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주님을 향한 소망이 풍성함 가운데서 인내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거짓없는 사랑으로 행하고 있는가? 그것이 이 일의 동기인가? 주님께서 분명히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돌아볼것을 말씀하십니다. 항상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님의 평가를 귀를 귀울이고 우리의 내적인 면을, 그리스도의 덕목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시간에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는데요. 베드로전서 1장 말씀을 보고 사랑에 대해서 말씀교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1-22).
여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었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이 있게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순종하고 믿었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깨끗하여지고 우리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말입니다.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이르렀다. 저는 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구원받기전에 많이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는데, 저는 어렸을때부터 교파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해야 하는데 저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사랑을 하는데 그 가운데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아는 것이죠. 사랑을 하는데 그 가운데 거짓이 있는 사랑을 하는것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는 일이었는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나서 놀라운 것중의 하나는 우리가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놀랍게 병화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구원간증을 대전중구 모임에서 한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나는것은 장승훈 형제님 제 구원간증의 한 대목을 아마 마포에서 했던지 기억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승훈 형제님이 그 부분을 저에게 이야기 하셨거든요. 어떤 부분이냐면 제가 대학생때에 제주도 옆에 있는 우도에 놀러간적이 있습니다. 교파교회 친구들과 같이 놀러갔습니다. 얼마전에도 가족들과 함께 우도에 20년만에 우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바뀌었더라고요. 그때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때는 친구들과 함께가서 야영을 하면서 텐트를 치고 해변에서 자고 밥을 해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식당도 많고 식수대도 잘 만들어져 있는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가게도 없고 거기에 물이 나오는데가 있었는데 짠물이 나왔습니다. 수돗물이긴 한데 완전 바닷물은 아니지만 먹어보면 이게 물인가 하는 그런물이 나왔습니다. 여름에 놀러갔기 때문에 굉장히 덥고 햇볕은 뜨겁고 정말 그 텐트에 있을수 없는 날이었고 물은 없고 나오는 물은 짜고 하니까 갈증이 나고 여행을 하면 친구들과 보통 싸웁니다. 이제 상황이 어렵고 몸도 치지고 하니까요. 그래서 안되겠다 해서 가게게 가서 물과 아이스크림을 사먹자해서 그때는 한참을 걸어가서 가게에 가서 물을 사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물을 마실때도 서로 목마르니까 더 먹으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참 편치 않는거죠. 우리가 친구고, 교회친구고 서로 위한다고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몸이 힘드니까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려고 하고 사람은 어쩔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후에 교회 수련회도 가고 그럴때에 교회 수련회에서 제가 한것이 사람은, 왜 나는 교회도 다니고 하는데 사랑을 하지 못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해가지고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내놓고 삼일동안 금식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더 화가 나더라고요. 제가 한기도 안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기분이 안좋아지는 사람인데 삼일동안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해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구원받고나서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것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기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육신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함께 정죄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를 정하셨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동의하고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 것이고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육신은 정죄받았을뿐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적은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여러분과 제 속에는 이 생명이 있음을 분명하게 믿음으로 알고 그 생명을 따라서 살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다른사람을 거짓없이 사랑할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것으로는 여전히 똑같이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은, 그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른 그 생명은 이제 첫번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자라는것이 아들되게 하는것을 말합니다. 그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빈다. 아바라고 하는것은 그때 당시에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부르는 그런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경외하면서 부르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아버지는 헬라어로 되어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격식이 있는, 또 존경과 경외감이 있는 말이지만 친근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아들로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본능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서 여러가지를 따져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그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고 멀리 떠나고자 하고 숨고자 하는 그러한 사람이었으나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하는 그 생명이 있음을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것에 대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또한 다른 한구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8절입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8).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구원받을때 받은 이 생명은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할뿐만 아니라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특별히 이 서로 사랑하는 말씀에 대해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고 둘째되는 계명이라고 이미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것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새' 라는 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내용과 그 내용의 성취에 있어서 온전케 되기 때문에, 그 계명이 새로운 차원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범위를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것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이 그것을 행할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할수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냥 율법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율법으로 해야하는 그 의미로서가 아니라 우리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 새로운 생명이 그것을 할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처럼, 주님이 하신것만큼 100% 완벽하게 하는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시고 우리의 몸이 구속함을 입기 전까지 그것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말씀에도 저희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참된것이라는 것은 그 계명이 어떤 사람에게 참된것이 되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서 실제로 이루어져야지 참된 것이라고 부를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성취 되었습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 가운데서 온전히 성취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명은 그분에게 있어서 참된것이라고 말씀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에게도 참된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계명이 이루어질수 있기 때문에 참된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그분과 우리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와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서와" 먼저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서" 참된것이라고 약간의 차이를 두고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차원이 그 의미가 축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전에 생각할수 없었던 그 놀라운 사랑을 구원받은 우리는 그 사랑을 할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읽고 그것을 따라서 행하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로 가서 2장 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여기서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비슷한 말씀인데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여기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고 4장 12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는구나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한번 읽어서는 의미가 쉽게와닫지 않는 것인데요. 참으로 깊이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것을 특별히 아카페라고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사랑이고 조건없이 의지적으로 행하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뭔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어떤 사랑하는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 먼저 의지로 시작하는 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하는것인데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형제를 사랑한다고 했을때에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니"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시작을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켜야지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놀랍게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감정들이 더욱 만들어집니다. 의지로 먼저 시작하고 그 감정들이 더욱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것들이 되었을때, 이제 사랑이 온전해 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킨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되겠네. 그것이 사랑이다. 라고 했을때 우리는 그것은 조금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냥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의지적으로 지키고 그런것이 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온전해지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감정, 그 기쁨, 그 평안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때도 마찮가지 입니다. 정말 다른사람에게 사랑할만한 어떠한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그 생명을 따라서 사랑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의지적으로 먼저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무미건조하게 끝나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시작한 사랑은 거기에 사랑의 감정과 사랑의 기쁨이 더해져서 온전케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번에 거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참으로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경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그 사랑을 참으로 경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정말로 하나님이 이제 내 안에 거하시는구나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머리로만 아는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것도 마찮가지 입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그냥 딱딱하게 시작하는 것이만 사랑을 시작하였을때 금방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온전케 해주시는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면 아버지께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것이고 아버지와 내가 그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킴으로서 이 사랑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방법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정적으로 매력을 느끼고 잘해줘야지 생각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여기서도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해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두가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고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특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있어서 용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서로 용서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4장 말씀도 같이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8-10).
여기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것을 말하는데요. 그 사랑의 특징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고 서로 대접하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접하는 것이고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이 용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8장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1-35).
우리의 사랑의 실행중에 많은 부분이 다른사람을 용서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용서에 대해서 중요하게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이 용서가 굉장히 중요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여기 18장과 또 뒤를 이어서 19장에 보면 여러가지 관계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제 18장에서 보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지역교회 안에서의 관계를 말하고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금방읽은 이 부분에서는 또한 형제간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19장 전반부에서는 가족간의 관게, 특별히 부부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유지될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때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것은 우리가 서로 용서할때 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 모든 관계들이 전부 깨어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자들로서 서로 상대방에게 용서를 받아야고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관계들은 계속적으로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용서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8장 35절에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세 입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범했을때 우리는 그 마음 속에서 바로 그를 중심에서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갚을수 없는 그 죄를 탕감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기본적인 이유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 17장 말씀을 잠깐보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3-4).
이제 우리 마음속에서는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에 대해서 이미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용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7장에서 이렇게 교훈해주고 계십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가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때에 그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용서의 행위는 그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주는 행위는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했을때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돌아와 회개한다 할때에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용서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때에 우리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정말 나에게 피해를 준, 나를 모욕 준,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때에,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만큼 용서를 해야 하는가?' 그래서 저는 베드로가 이렇게 묻게 되는것을 볼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까"라는 말을 볼때에 제가 그분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만약 저라면 그런 마음으로 물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실때에 그러면 내가 얼마나 참아야 됩니까? 이런 의미로 물어보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용서와 다른사람을 사랑하는 가르침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라 사실 다른 주제보다도 믿음이나 소망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부담없이 잘 받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주제는 사실 좀 어려운 주제 입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본적인 나타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랑에 대해서 듣게 될때에 항상 이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부담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사랑과 용서의 주제는 복된 주제이고 정말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런 복된 주제 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부담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를 다시 되세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많은 부담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큰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일반달란트라고 했을때에 그것은 우리가 셀수도 없는 값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계산 했을때에 그것이 몇십조가 된다고 계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 사랑과 용서를 행하기를 바라면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이 용서는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것이, 이 위치, 이 용서받은자의 위치에 계속 있기를 바랍니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의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것처럼 금방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의 위치를 벗어나서 "나는 지금 백데나리온 빨리 돌려받아야 되는데"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과 용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입니다. 베드로도 "그럼 내가 얼마나 많이 용서를 구할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자기가 용서를 구해야하는 입장을 금방 떠나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럼 나는 용서를 해줘야하는 입장으로 자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항상 그렇습니다. 용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을때에 항상, 이제부터 나는 용서를 해줘야 하고 나는 절대 잘못이 없고 다른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사람이 아니고 문제는 내가 얼마나 용서를 해줘야 하는가, 그것을 보게 되는것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위치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 많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 분이라는 것을 계속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 해주는 사람보다도,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어려우니깐 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먼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왜 용서가 어렵냐면, 다른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기도 어렵습니다. 다른사람이 와서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면 용서해주기가 더 쉽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구하지 않느냐면 18장 15-20절에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놓고, 다른 형제에게 잘못해 놓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느냐면 자기가 잘못을 범한 그 피해자가 와서 말하는데도 "에이 내가 뭘 잘못했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두세사람이 와서 "네가 잘못한게 맞아."라고 하는데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교회가 와서 말하는데도 "그것은 내가 절대로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지를, 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이 지역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지역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말씀이라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바로 이 말씀 다음에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항상 일어나기 때문에 지역교회는 그것을 의롭게, 그리고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해결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역교회가 바로 그 점에 달려 있습니다. 지역교회가 이것을 이것을 정말 의롭고 사랑 가운데서 해결해 나가느냐? 그리고 항상 일어나는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 그것을 성경적으로 해결해 나갈때에 그 지역교회는 계속적으로 주님의 간증을 이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에 이 지역교회는 이제 다툼과 갈등속에서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처럼 하지 말고 내가 잘못했을때 그것을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고 다른사람이 그것을 지적했을때에 겸손하게 인정하고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까 에베소서 4장 말씀에서 본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사랑을 계속 베풀고 계속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볼때에 용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내가 용서를 구하는것임을 보게 됩니다. 내가 용서를 해줘야 하는데 이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서 4장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8-10).
여기서 사랑에 대해서 실제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접하고 우리의 은사로 서로 섬기는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것이 죄 입니다. 내가 대접하고 내가 은사로 섬기려고 하는데 그 상대방이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싫어하는 어떤것이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대접하기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접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면 대접할때 원망하면서 하는거죠. 해야 하니까 그냥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허물과 죄가 있을때 은사로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데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처럼 봉사하는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섬기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빼놓고 이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처럼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허물이 있다 할찌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죄를 묻어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용서하고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일일수도 있고 그가 성경적으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나타내고 그래서 용서해주는 그런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죄를 덮어가면서 사랑하고 대접하고 그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같이 할수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시작할때에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 사랑을 먼저 시작할때에 먼저 용서하고 먼저 용서를 구하고 또 먼저 사랑하고 그리고 또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죄를 버리고 정말 대접을 받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또 대접에 감사를 표하고 그 보여준 관심에 대해서 사랑을 다시 보답을 하고 또 우리가 은사를 따라 섬김을 받을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또 은사를 따라 그분을 섬기고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 또 사랑스럽게 되어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것에 그런것을 포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랑을 우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더욱 지역교회의 간증이 밝게 빛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때에 사랑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동안 이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덕목,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보았습니다. 참 이 놀라운 덕목들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그것을 할수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가기를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럴때에 더욱 우리 마음이 기쁨이 넘치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특별히 대전 중구 모임에서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또 함께 모여서 말씀집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또 말씀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계속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성찬 형제님 > 성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벧엘_하나님의 집 > (0) | 2021.07.23 |
---|---|
< 본이 되는 사람 > (0) | 2021.07.19 |
< 그리스도인의 성장 > (0) | 2021.07.19 |
< 믿음 소망 사랑 : 소망 > (0) | 2021.07.19 |
< 믿음 소망 사랑 : 믿음 >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