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크랙 먼로 형제님

요 13:1-17 : 발을 씻기신 주님의 본

박이레 2025. 6. 5. 17:00

< 요 13:1-17 : 발을 씻기신 주님의 본 > 크랙 먼로 형제님

예, 안녕하십니까? 여기 서울에 오게 돼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마포 모임을 방문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한 형제님께서 옆에서 같이 통역을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그 형제님이 2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 기범 형제님도 스코틀랜드에서 계셨죠? 그리고 아마 3-4년간 스코틀랜드에서 사셨습니다. 그분들을 여기 한국에서 만날 수가 있어서 참으로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오늘 이 집회에 오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특별히 이번 주제에 대해서 다락방에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신 것을 말씀을 먼저 드렸습니다. 저는 이 마포 교회당이 이렇게 지상에 4층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이게 다락방인데요. 참으로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잘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이제 4일간 13장, 또 14장, 15장, 또한 16장 부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부터 17절까지를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17).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들은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로 나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밤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그 남겨진 그리스도인 무리들이 깨끗하고 또한 거룩한 무리로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락방에 모인 그 제자들을 통해서 모임에 그 태화와 같은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서로를 돌보는 모임이 되길 바라고 계셨습니다. 바로 여기 이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그 대야와 수건을 가지신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그 사역은 이 돌보는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3장과 14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1절부터 3절까지를 13장에서 보게 될 때에, 그래서 1절부터 3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이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그것을 준비시키시는 말씀의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우리는 특별히 '7가지 그와 관련된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에서는 주님께서 행하신 '7가지의 특별한 행동들'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6절부터 17절까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특별히 중요한 7가지 언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부분 1절부터 3절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7가지 특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중점한 상황'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그의 때'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람'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주님의 대적 마귀'가 나옵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의 배반'이 2절에서 또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자기 손'이 나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또한 '주님께서 가실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7가지 것을 간략하게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자기 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1절에 그것과 관련된 몇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그 때가 이르신 줄 아시고"(1절).

"주님께서 이른 줄 아시고" 이것은 이제 현재 형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때가 지금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의 죽으시는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나의 때'라는 표현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13절을 보게 되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8장 20절에서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또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 때가 이르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모두 '그 때'를 말하고 있었던 '그 갈보리의 때'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바로 이때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이제 이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이제 다른 세상으로 가시는 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다른 세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바로 그 다른 세상이 우리가 가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남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잘 알고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1절에서 "자기 사람들", 그분의 제자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들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속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가 점심에 한 형제님하고 우리는 모두 야벳의 후손들이라고 교제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이스라엘의 복지에 관여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양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가정 안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귀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께서 그 온전한 수준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참으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그분의 '대적'이 언급됩니다. 그것은 '마귀'입니다. 저는 왜 이 구절이 특별히 이 13장에 언급되었을지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의 때입니다. 이 유월절 음식을 먹는 때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쁨이 넘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앞에 그 가룟 유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을 팔기로 결심한 자입니다. 그래서 2절에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것은 완료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가룟 유다는 이미 이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의 주님을 이미 배반하고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주님께서 그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도 거기에 앉아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 구절이 13장에 언급되어 있는지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주님이 몰랐다고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 유다가 배반하는 그 사람의 정체를 몰랐다고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룟 유다의 발을 또한 씻겨주십니다. 이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분의 원수조차도 사랑하셨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미워하는 그를 향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가룟유다 배후에 마귀가 있었습니다. 그 지옥의 그 힘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실 때가 왔습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그 갈보리가 자신의 마지막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가롯 유다를 사용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3절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더욱 묵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을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그 모든 것이 이제 주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손을, 그 손을 사람들이 못 박으라고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다락방에 그와 같은 그림자가 드려져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고,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해야 될 그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루라고 하신 일을 이제 이루실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기 위하여 주님은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을 폐하시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3절이 그와 같은 우리 주님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부분에서 이와 같은 예비, 준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구절들을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전치사들이 사용됐는데요. '아포'라는 헬라어 전치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가 그것이 '아포'라는 전치사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을 설명할 때 사용된 전치사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전치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이 전치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는지 한번 여러분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8장 42절을 보게 될 때에, 그리고 요한복음 7장 29절에 각각의 다른 전치사들이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비슷한 표현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에서" 사용되는 그 전치사를 다른 것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다른 전치사가 왜 그렇게 사용됐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는 묵상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자면 전치사 ek, 그 헬라어는 어디서부터 나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분의 '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치사 '파라', para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치사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교제 가운데 주님께서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4절과 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4절과 5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7가지 행동'이 특별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행동입니다. 그리고 또한 '겉옷을 벗었습니다.' 두 번째 하신 행동입니다. 그리고 '수건을 가져다가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와 네 번째 행동입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행동입니다. 그리고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을 씻기셨습니다.' 주님이 이와 같이 7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 행동들은 아주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그분께서 친히 행동하심으로써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그 하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종으로서 임하셨습니다. 이 수건을 두른다는 것은 그분이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으셨습니다. 이 일은 다른 아무도 행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 다락방에 다른 제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도 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누구도 그 물을 대야에 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물을 떠서 대야에 물을 담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위대함은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낮아져야 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그런 가르침이십니까?
첫 번째, 그분은 일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게 될 때에 이사야서 6장 말씀을 떠오르게 됩니다. "거기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또한 히브리서 10장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주님께서 자원하여 이 일을 위하여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그 겉옷을 벗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될 것을 취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이 하나님이시지 않은 적이 한 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뭔가 특별한 것이 동시에 되신 것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새로운 것을 가지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시지만 이제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 그림이 우리는 여기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한국어 성경에서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6절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말 성경에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7-8).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자기를 비워" 하는 것이 이제 '쏟아지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다 버렸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신성 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분이 계속해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은 "자기를 비워"라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기 여기에 물이 가득 찬 컵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제 다른 모양의 컵을 저희한테 가져온다면, 제가 여기에 있는 물을 그 다른 컵에 다 붓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있는 모든 내용물이 이쪽에 다 옮겨졌습니다. 그러면 이 물은 아까 컵과는 다른 형태의 컵 모양 안에 담겨 있게 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그것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모든 것이 이 컵 안에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찬송가에서는 '영광을 버려'라고 되어 있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분께서는 그 영광을 가리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고 항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이제 가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림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참으로 이 땅에 계신 하나님이신, 또한 사람이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13장 5절에서 그 대야에 물을 담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대야에 그 물로 발을 씻기시는 것은 뭐고,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는 것은 뭐냐라고 그 차이점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해에서 집회 가운데서 젊은 성도님들이 어떻게 성경을 연구해야 되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여기 물이라는 것을 그 상징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단지 머릿속으로 '아, 그게 이런 의미일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을 반드시 찾아봐야 됩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5장 26절을 보게 될 때에, 주님께서 그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물이 상징하는 바라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깨끗게 하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교회당에 신발을 신고 들어와 계시죠? 제가 진해 교회당에서는 발을 벗고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그와 같이 발을 벗고 들어오는데요. 특별히 발을 씻고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기후가 더운 나라에서 샌들을 싣고 다니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나라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그 더럽혀진 발을 씻기실 때에, 그리고 그 후에 그 발을 말려주십니다. 그런데 왜 발을 또 말려주는 것까지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 물기를 다 말려야만 다시 그 발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대야의 물로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씻겨주시는 것은 다시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사역입니다. 이 대야의 물로 씻은 것은 과거에 행한 죄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수건으로 발을 씻기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대야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수건으로 씻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미래를 위해서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이 일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냥 우리가 문자적으로 서로 발을 씻기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 머릿속에 그러면 이걸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될까, 생각하실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다음 구절부터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6절 부터 시작해서 주님께서는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7가지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먼저 질문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6절에, 많은 사람들이 6절을 이제 이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주님 어떻게 내 발을 씻기십니까?" 이것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에서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그 대명사는 "내 발에서" '내'가 아니라 '주여 당신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읽어야 됩니다. "주여 당신이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분께서 내 발을 시키신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우리는 요단강에 그 침례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 나아오실 때, "제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되는데, 당신이 저에게 나오십니까?" 베드로는 이제 그와 같은 감정을 여기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는 그 진정한 인도력이 얼마나 겸손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면서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이건 너무나 주님이 낮아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낮아져야 된다.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까지 낮아져야 된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낮아져야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의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섬기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사랑 가운데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6절은 베드로가 그렇게 놀란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7절에서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첫 번째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7).

여기서 이제 '알다'라는 것이 두 번 나오는데요. 그것은 다른 원어의 단어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것은 네가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그것을 다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그런 의미를 갖고 있고요. "이후에는 알리라" 이 두 번째 나온 '알리라'는 그가 경험적으로, 점진적으로 '아, 이게 무슨 뜻이었구나.'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지금 당장 설명해 주시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점차적으로 알려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그러면 언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베드로에게서는 그 이후가 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그가 하늘나라 갔을 때, 또는 우리가 하늘나라 갔을 때? 물론 그가 하늘나라 갔을 때 그는 왜 이것이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많은 우리 삶의 어려움들, 그 문제들, 이제 그 영광 가운데 들어갔을 때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베드로가 그것보다는 더 빨리 알았을 때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이것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그 시몬, 그 피장의 시몬의 집에서 알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가 알게 된 게 있었습니다. '그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다니!' 여러분도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갑자기 깨닫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는 베드로가 몇 달 후에 혹은 몇 년 후에 그것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듣는 말씀 집회, 그것의 유익을 여러분이 미래에, 며칠 후에 누리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1993년도에 제가 속해 있는 그 스코틀랜드의 모임에서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강사를 정하지 않고 하는 수양회였기 때문에 어느 누가 말씀을 전할지 알지 못하는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분의 형제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제 3시간 동안 그렇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모든 강사님들은 동일한 주제로 '성도들의 삶에서의 고난'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좀 실망하였습니다. 저는 수양에서 좀 다른 여러 가지 주제로 언급이 되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옆에 있는 형제님에게, "형제님, 말씀 집에서 좀 더 다양한 주제가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분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집회가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이 집회가 내일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몇 주 되지 않아서 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42세 되는 제 이모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삼촌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할아버지께서 또 돌아가셨습니다. 그 3년간에 걸쳐서,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참으로 그 무덤이 가까이 있습니다. 저는 그 다섯 분이 전한 그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여러분에게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년 동안 그분들이 전한 그 말씀을 통해서 제가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 집회에 가게 될 때에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이제 8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여기서 이제 베드로는 아주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제 베드로 그 형제님에 대해서 좀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제가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베드로 형제님을 만나게 되겠죠.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다른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참 여기 있는 모든 사람보다도 더 많은 영적인 경험을 했던 분이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분이 행한 그 실수가 우리를 위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동일한 실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절대'라는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됩니다. 이건 아주 강한 단어죠. "난 저 집에 다시는 안 가." "나는 저 형제하고는 다시는 말도 안 해." 이런 말, 정말 강한 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그 하는 말들 조심해야 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주님이 자신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 경외심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기 뜻을 강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하나님의 지혜, 그 주님의 낮아지심, 그분의 섬김에 대해서 배워야 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두 번째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건 참으로 베드로가 듣기에 너무나 놀라운 그런 발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의 안에 있지 않다."그러니까 'in'이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with'라는 전치사를 사용해서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그 표현은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내 안에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건 구원과 관련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교제와 그들이 주님과 나누는 교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발을 씻기지 않는다면 너에게는 그 교제에 기쁨과 어떤 열매와 그 가운데 교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그들이 배워야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실제적인 물은 단지 그 물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깨끗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물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만드는 것, 그 더러움을 씻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제 그러한 상태 가운데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발을 깨끗이 씻어야 됩니다. 내가 어디로 그 발로 발을 딛고 가는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발로 술집이나 어떤 다른 파티하는 노래방이나, 그런 데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그런 경기장이나 그런 곳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발이 그런 장소에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깨끗함과 그 교제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때, 우리가 너무나 쉽게 우리는 더렵혀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스마트폰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는 말을 들을 때에,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오염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교제의 기쁨을 누려야 됩니다. 참으로 여기에 젊은 형제 자매님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모임이 바로 그 젊은 성도님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도님들이 그 머리가, 그 마음이 깨끗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계속적으로 깨끗한 백성이 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다른 교회들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교파 교회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세상이 너무나 쉽게 그분들에게로 스며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세상적인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사용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 가운데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삶을 또한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님과 도대체 어떠한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지금 발이 더럽혀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기 8절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의미를 말해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아버지 옆에 그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로 계십니다. 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께로 반드시 가져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로 이끄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9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그는 절대 씻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젠 또 다른 극단으로 가서 다 씻겨 달라고 말합니다. 이제 차가운 데서 뜨거운 걸로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그냥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요동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너무나 흥분하면서 마땅히 해야 될 바를 넘어서고, 또 안 하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떤 압박 가운데서 주님에 대한 충성을 너무 과장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실제가 맞는지 시험을 받을 때에 그것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9절에서 그가 뱉은 모든 말들이, 그는 그전에 주님께서 씻겨주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주님과 교제를 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더러운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들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말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잘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언급입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교제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하시는 것은 '깨끗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주님께서 이 목욕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제 완전히 그 몸이 깨끗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어떤 의미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했다면, 여러분은 다시 샤워하거나 목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깨끗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하루를 살아가면서 손이 더러워졌을 때 그 손을 깨끗게 씻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발을 때때로 씻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의 전반부에서는 우리 모두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씻는 것을 구분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깨끗하니라." 참으로 이것은 아름다운 그런 의미를 말해줍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 구원받은 모든 분들은, 저는 이렇게 여러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 깨끗합니다. 이제 온전히 다 씻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언제 일어난 것입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 10장 22절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히 10:22).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제 죄가 피로 깨끗이 씻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그래서 이 다락방에 주님의 말씀을 또한 특별히 의미를 듣고 좋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주의 만찬을 제정하고 계십니다.
이제 가롯 유다가 그 방을 떠난 후에 주님께서는 그 만찬을 시행하십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그 만찬을 직접 기록하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 복음이 그 만찬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한참 뒤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 주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이미 4번에 걸쳐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의 만찬을 이제 그 '성격을 기록'하는 것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끗게 하고, 그리고 겸손하고,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 한 무리를 통해서 주의 만찬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에 이제 분명히 한 잔이 놓여져 있습니다. 또한 한 떡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피가 중요하다고 사실 말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나니" 참으로 이 요한복음에 그 침례 요한이 한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피가 이 죄를 깨끗이 씻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대야와 그 담긴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상징이 모두 깨끗이 씻는 것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이 '피'라는 것은 '죄의 형벌을 처리'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이라는 것은 '죄의 능력을, 그것을 없이하는 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라는 것은 죄의 형벌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고, 물이라는 것은 죄의 능력을 제거하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9장에서 11절과 14절까지 이 피가 우리의 그 죄에 대한 그 죄책감을 깨끗이 씻는 것에 사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라는 것은 죄를 계속해서 짓는 그 습관을 깨끗이 씻는 것에 강조해서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을 때에, 내 죄가 다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형제 자매님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의 모든 죄가 그 피로 깨끗하게 사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는 날,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게 에베소서 1장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여기에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너희는 깨끗하게 되었나니"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도 사실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10절의 후반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게 무슨 말인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서 11절에 요한은 더 설명을 놓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리고 네 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약속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언급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를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리고 이제 이 시점에서 가룟 유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분명히 우리 주님의 그 마음에 고통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그 눈에 눈물을 가지시고 이 말씀을 하셨을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보시면서, 여기 다 구원받고 이제 다 깨끗해진 그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룟 유다를 보면서 "다는 아니니라." 그도 역시 ‘오병이어의 떡’을 먹은 사람입니다. 참, 나사로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날 때 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실제로 보지 못한 그 일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를 바라보면서 주님께서는 그 마음에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 주님의 그 마음에, 그 마음을, 그 동정심을 생각할 때 감동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이제 그는 그 방을 나가버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의 발을 주님께서 먼저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행할 일이 뭔지를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41편 9절에 기록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12절에 그분께서는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다시 입으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주님께서 다시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내려오셨으며,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와 제가 창세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영광을" 이제 그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시고, 수건을 가지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 갈보리에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앉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 110편에 어떤 말씀을 보게 됩니까? "내 우편에 앉았으라."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행동하신 그 행동들이 놀라운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그때 입은 그 옷을 또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어떤 영광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이사야서 6장 1절에서는 그 영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때에 그 높이 들린 보좌에 주께서 그 보좌에 앉으시고,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45편에 참으로 그 ‘왕의 향’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그와 같은 영광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어떠한 옷을 입고 계셨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 2장 12절에서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마구간의 구유의 강보에 쌓여서, 그것을 옷으로 가지고 계셨던 분입니다. 참으로 그 변화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옷을 입으셨습니까? 참으로 해가 빛나는 것 같이 하얀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 병정들은 그 옷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홍포를 입히고 그분을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이 주님을 사로잡아 가면서 그들은 그 옷을 벗기고 제비 뽑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무덤 가운데 주님은 세마포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영광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주님의 다섯 번째 언급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12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내가 이렇게 낮아져서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의 의미를 너희가 알겠느냐? 내가 방금 행한 일의 영적인 의미를 알겠느냐? 저는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일에 너무나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제가 잠깐 멈춰서 이런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주'고 '선생'이십니다. 제가 구원을 받을 때에 로마서 10장 9절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 "네가 이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저는 이 한국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주 예수'이십니다. 제자들은 단 한 번도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주님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선생이고 주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주님께서는 그 '주'와 '선생'의 순서를 바꿔서 말씀하십니다. 13절에서는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라고 돼 있었는데, 14절은 "내가 또한 '주'와 '선생'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아, 이건 뭐 큰 차이가 없는데요?”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또 형제 자매님 여러분, 이 성경의 그 작은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먼저 주로 알아야 된다. 그리고 나서야 너희가 내가 선생으로서 하는 말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먼저 나에게 순종하면 이제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여기 한국어 성경에 마지막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옳으니라'라는 영어 표현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의무와 그것을 마땅히 갚아야 되는 빚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분과 저는 이 발을 씻기는 것이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그 대야의 물의 영적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다 깨끗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리고 나서 발을 씻기라고 하실 때에 이제 새로운,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의식을 도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이것을 '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제 '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비슷한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금 행한 것 그대로, 그걸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이제 너희도 해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방식을 따라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 그것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그 특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어떤 더운 나라에서는 또 허리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실제로 씻겨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섬긴 것을 실제로 보게 됩니다. 제가 이제 한국에 와서 저는 여러 번 발을 씻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이제 여러 차례로 여러분들이 많은 음식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제가 뭔가 필요한 것만 있으면 여러 성도님들이 그것을 즉시로 공급해 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언어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단순한 단어인데도 굉장히 한국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께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참 모임에서 이와 같이 서로 돕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께서 이 주간에 또 방문한 성도님들을 서로 돌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주에 이와 같은 형제님들을 서로 돌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주에 다른 성도님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어서 격려합니다. 또한 문자를, 말씀을 보내서 성도님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병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필요한 분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야 됩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님 여러분, 이것이 정말 모임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하고, 서로를 돌보는, 이 섬기는 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복이 있다는 것은 많은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모임에 오는 축복 중에 하나가 많은 친구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을 베풀어야 됩니다. 어떤 성도가 이제 다른 침체되는 길로 가고 있을 때에, 다시 그 성도님을 돌봐주고 회복하도록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때때로 그렇게 발이 더럽혀지는 존재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돌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룰 때에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는데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때는 그 물의 온도를 잘 살펴봐야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에게 잘 의미가 전달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섬김에 있어서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참 민감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외교적인, 어떤 방법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 그리고 바로 그 상전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도 낮아져야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나에 대해서는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나는 그러한 섬김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바로 그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여러분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에 힘을 쏟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참으로 이제 며칠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에 필요한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해야 되는지를 배우고 싶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이 밖은 그러한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무자비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운데 이 모임이 깨끗하고, 또한 친절한 무리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 13장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축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