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베데스다 못으로 오신 하나님의 의 / 25년 4월 6일 일요일(요약1) / 방광식 형제님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1-9, 개역한글)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요5:14, 개역한글)
요한복음 5장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방문하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에 오셨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 긍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못에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못을 치면 누구든지 처음 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 나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내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 근처에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까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에 세상에 있는 많은 일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내려와 못을 터칠때에 제일 처음 들어가는 딱 한사람만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인가? 그렇기에 많은 병자들이 그 물만을 쳐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이 생깁니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성공했더라,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은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얻지 못한 사람은 좌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성공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가운데 살 것입니다. 여기 베데스다 못에 모인 사람들도 같을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선착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훈련받다가 선착순으로 한 사람만 쉬게 해줍니다. 세상의 모습니다. 또 일등만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물이 움직였는데, 그것이 천사가 와서 움직였는지, 아니면 바람이 와서 움직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은 로또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못에 몸을 던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천사가 물을 움직인게 아니라면 그는 가라앉아 죽을것입니다. 도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릴수 있게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못에서는 그런것들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성공한 삶, 염려없는 삶, 보장이 되는 삶을 생각하고 그것이 어디서 나에게 주어질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찾아볼수 있스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38년된 병자가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 심한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 38년된 병자의 병이 그의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병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병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가 봅니다.
죄의 특징은 많은것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38년이라는 이 소중한 시간을 이 죄는 빼앗았습니다. 그가 하고싶은 것을 하고 원하는 곳을 가는 자유가 있었을 텐데, 죄는 그에게 이 모든것을 빼앗았습니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누릴수 있는 많은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모두 낭비되고 얻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동냥하는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가 가장 누릴수 없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38년이 아니라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참혹함과 무서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죄는 모든것을 다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위대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호 관 씌우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생각하시냐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존귀와 영광을 다빼앗겼습니다. 외냐하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연락은 부고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게 되어 있고 죽어갑니다. 얼마전 강동 지역에 땅꺼짐 사고가 발생해서 그곳을 지나던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땅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병들지 않아도, 불의의 사고가 아니더라도 죽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결국 사람은 죽습니다. 사람이 죽는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죽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70-80 살고 죽으면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말합니다. 살만큼 살았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은 땅으로 내려가지만 사람의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사람이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개역한글)
그리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사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길게 잡아서 100년동안의 삶동안 살아가면서 있는 잠깐있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모든것을 누리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70-80년 살다 죽는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모든것을 말씀하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람은 그래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죄인입니다. 겉으로 깨끗한척 하고 괜찮은척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결코 깨끗하지도, 의롭지 않음을 말하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도서 9장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전도서' 참으로 신기한 이름입니다. 도를 전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책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전9:3-5, 개역한글)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죽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죽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죽는것이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죽음으로 귀결되는데도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미친 마음을 품고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산자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반드시 죽을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죄 때문에 반드시 죽을 줄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전도서의 가장 큰 지혜는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할 날이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12:7, 개역한글)
하나님은 우리를 죄 때문에 죽을자로 지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이르기 전에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6, 개역한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이 오랜줄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주님께 그에 대해서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마지막 3년 차에 주님을 보고자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이 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바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모든것을 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전지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이 병자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께서는 38년이나 된 병자에게 왜 물어보실까요? 그 이유는 낫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7, 개역한글)
이 사람은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력, 아무것도 할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유능한 의사에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이유는 그가 내 병을 고칠수 있을거 같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결국 나로 하여금 죽게하고,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5:8, 개역한글)
주님의 말씀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정말 듣게될 때, 그는 이제 일어납니다. 38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를 다시 일으켜서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러한가 확신 할 때에, 그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사형수가 사형 언도를 받으면 바로 사형을 당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있다가 어느날 사형집행날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순간 불림을 당하면 사형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오토바이 탄 사람이 그날 죽을것을 알았을까요? 몰랐겠지 않습니까? 어느 부자가 자기 소산을 창고에 채워놓고 이제 즐기자 했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오늘 찾겠다 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그날 밤에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죽음이 기대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형수가 언도를 받아 불려 나갔는데 짐을 싸주면서 나가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저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저희를 위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저희가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만 믿으면 다 용서를 받는다는 말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보내셔서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죄를 그 아들에게 쏟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몫이 로마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워만 해도 살인죄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는데 그 아드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아드님께 그 심판을 쏟으신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한 심판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희생할수 있습니까? 사랑이 아니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 그리고 말로 할수 없는 풍성한 은혜, 주님의 하신 일, 이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3:26, 개역한글)
이 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의입니다. 이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곁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시는 의 입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개역한글)
'특별집회 > 하루 방문(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도 : 세상에서의 합당한 성도의 삶(요약) (0) | 2025.04.06 |
---|---|
덕언 : 주님이 사람이 되셔서 취하신 영광(요약) (0) | 2025.04.06 |
성도 : 주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날 / 전경렬bro (1) | 2024.12.08 |
복음 : 십자가의 도 / 전경렬bro (0) | 2024.12.08 |
성경읽기를 준비하는 방법(요약) / 한봉래bro (5) | 202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