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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를 준비하는 방법(요약) / 한봉래bro

박이레 2024. 9. 21. 16:18

성경읽기를 준비하는 방법 : 히브리서 11장 1-16절(요약) / 한봉래 형제님

원래 이 시간은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아니고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교제하는 비공식적인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님이 히브리서 11장을 요청하셔서 히브리서 11장을 살피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성경읽기라고 하면 지역모임의 주된 집회를 성경읽기 집회로 생각합니다. 은사가 있는 형제님이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시간입니다. 저희가 잘 듣고 성경을 잘 배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목표는 성도님들이 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고 가는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이 공부해 오셔서 교제에 참여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모든 형제님들이 입을 열어 참여하고 자매님들은 입을 열지 않더라도 들으면서 스스로 공부해 온 내용과 같은지 아닌지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 다 공부해 와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성경읽기를 준비해 왔는데 서로 분별이나 견해가 다를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충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북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성경읽기를 하면서 분별의 충돌이 일어난다 합니다. 그러나 충돌한다 할지라도 성경읽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 서로 마음상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을 저희들이 읽고 알게되고 또 그대로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안따라오는 이유를 고민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집회로 모이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히브리서 11장을 성경교제 한다고 할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샘플을 보이고자 합니다. 알아내는 과정을 보고자 합니다. 두가지 참고서적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윌리암 맥도날드 형제님의 신자주석 책을 참고할수 있습니다. 이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책은 왓더바이블 티치스(횟불주석)이 있습니다. 이 책은 꼭 집에 한권씩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성경어플, 이소드(마이소드) 어플을 통해서 성경 원문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히브리서 11장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단은 제일 처음에 해야 하는것은 성경 본문을 내가 이해하는 말로 바꿔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개역한글)

성경 본문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쉬운 성경으로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천국에 갈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사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것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영적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뵐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주님을 닮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해야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내가 이해하는 단어로 바꿔서, 내가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알수 있는 쉬운 단어로, 설명할수 있게 해야 합니다.
1절에 대해서, 1절이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해보면 잘 안됩니다. 틀릴때가 많습니다. 공부는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것은 처음 조금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공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은 잘 안되는 사람들이, 미숙한 사람들이 교제하는 표현을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잘 안되는 사람들은 앞선 형제님들께 물어봐야 합니다.

제가 10년 전쯤에 짐 베이커 형제님이 자주 한국에 오셔서 교제해 주셨습니다. 영국 모임에 대해서 소문을 듣기에 영국 모임에 늙은 성도님들만 있고 젊은 성도들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국에 가서 짐 베이커 형제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수양회에 참여했는데, 짐 베이커 형제님의 교제가 끝나고 나서 젊은 청년들이 짐 베이커 형제님께 물으려고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와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20명밖에 안되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회를 하면 몇백명의 성도들이 참여합니다. 이처럼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서로 돕고, 참여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11:2, 개역한글)

1절에도 증거가 있고 2절에도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증거입니까? 이 1절의 '증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하나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2절의 '선진'은 '구약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이와같은 믿음으로써 확신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2절에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의)증거입니다. 우리로치면 구원의 확신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2:4, 개역한글)

하박국은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보고 이대로 둘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벨론을 사용하실것을 말씀합니다. 하박국은 더 악한 제국을 사용해서 징계하는 것이 합당한지 물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이 문장을 신약성경이 세번 인용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가 인용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을 고백할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을 말하는 것은 로마서, 믿음은 갈라디아서, 살리라는 히브리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믿음은 삶을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강조점 "살리라"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제사를 드림으로" "증거를 얻었으니"가 강조점입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여러가지 기초정보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를 영어로 faith입니다. 앞에 the라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관사가 들어간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개역한글)  

I have fought a good fight, I have finished my course, I have kept the faith: (2Ti 4:7, KJV)

우리나라 말로는 믿음이 믿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는 두가지입니다. faith와 the faith가 있습니다.
복음시간에 말씀이 전해질 때 우리가 발휘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믿겠다" 이것은 관사가 없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말할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 믿음의 내용을 말할때는 관사가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고백의 믿음은 내가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 왔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믿음이 그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하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주관적으로 그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저희가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문맥입니다. 11장은 10장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장에서 무슨 내용이 있기에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10:38-39, 개역한글)

히브리서의 저자는 안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받는 독자가 누구인지는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갈 위험속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성전이 세워져 있고 제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안보이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를 보면 뭔가 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은 뭔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약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합니다.
"뒤로 물러가면"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영혼을 구원할수 없는 믿음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구약성도들의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 봐야 하는것이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에 대해서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가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11:23, 개역한글)

모세를 이야기하는데 첫번째로 모세의 부모님의 믿음을 얘기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4, 개역한글)

이제 모세의 믿음이 나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5-26, 개역한글)

모세가 의식과 관련되서는 28절부터 설명합니다. 유월절과 홍해라는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11:28-29, 개역한글)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받고 가르치는 것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를 전체적으로 쭉 보면, 1장과 2장은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성을 쭉 얘기합니다. 그리고 3-10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뛰어나시다. 다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시며 예수님으로 충분하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믿음을 말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가 실질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함을 12-13장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서 의문을 가질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인, 아벨부터 시작해서 모세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모세 이후로는 간단하게 넘어가 버립니다. 모세가 중점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온 믿음의 사람들이 연약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연약을 나타내는 것은 노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포도주를 먹고 벌거벗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고 사라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분은 우리 주님 외에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 사람의 연약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다윗을 평가할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며, 훌륭한 분이지만, 간음하고 살인합니다. 성경이 다윗에 대해서 평가할 때에 어떤 경우에서는 다윗이 이것 하나 빼고는 다 잘했다. 그런데 다윗의 잘못이 있음에도 그것을 넘어가고 다윗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한 연약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와같은 기본적인 관점으로 가서 내가 이해하는 단어로 바꿔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정의가 아니라, 믿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나타내는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은 첫번째가 창조이며(3절) 두번째가 제사입니다.(아벨) 세번째가 하늘로 가는것(에녹)입니다. 네번째가 심판입니다.(노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다 믿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3절)

유투브에 창조과학을 보면 창조가 합리적인을 말하는 영상들이 있습니다. 혹은 학생들의 복음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과학과 일치하는가를 욥기 말씀들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럴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믿음으로" 입니다. 합리적인 설명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설명은 믿음이 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개역한글)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 하나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말씀을 믿었을때에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3절) 세상 만물은 분자 원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아담은 한번도 죄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면서 죄인이 되어 죄를 경험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창조되었을때 그는 죄를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나누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완전한 사람에게 모든 자유를 주시며, 단 하나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이것입니다. 마음대로 해도 좋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의 제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것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사단이 말하는 자유가 좋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약 가운데 있는 자유가 참 자유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죄인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는 받고 하나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랬을때 가인이 기분이 나빴습니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을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 주셨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앞에 나올때에 제사를 드려야 함도 얘기했을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합니다. 피를 가지고 갑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온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분을 내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네가 나오는 조건을 내가 정한다. 내가 정한대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높아져 밖에 있을때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다고 자기가 좋아집니까? 아벨이 없어지면 자기가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열납되나요? 이것이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모습입니다.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누구는 이땅에서 축복을 받고, 누구는 이땅에서 축복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이 있고, 또 믿음으로 패배한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은 뭔가를 잘 했다는 부분이 안나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믿음은 그 삶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내용을 설명하기 보다 이와같은 성경이 주어졌을때, 어떻게 그 의미를 알아낼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연습을 해보고 가정에서 먼저 가정집회를 하고 형제님들과 교제하고 교회에서 집회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저희가 말씀을 중히 여기고 살폈던 과정들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