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 : 지역교회를 표현하는 세가지 비유 > 히긴스 형제님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딤전 1:1-3).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4-15).
이 서신서는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며, 특별히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에서 이때 당시에 사도바울은 로마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거기서 다시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함께 이 에베소로 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후에, 그는 마게도냐로 혼자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게도냐에서 디모데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이 서신서를 보내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신약성경에서 에베소 교회가 여러가지로 언급되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 모임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2년간 머물고 거기에 복음을 전하고 거기에 이 모임이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0장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권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에베소 서신서를 통해서 그 교회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또한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통해서 이 에베소 교회를 알수 있게 됩니다.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세워 졌으며 그것을 또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과, 그곳에 또한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첫사랑을 버린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우리가 목회 서신서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 자신이 목자의 역할로서 그 교회를 인도했을뿐만 아니라 디모데가 또한 그 교회의 인도자들에게, 목자와 장로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 디모데전서 3장에 이것과 관련된 중요 단어가 언급이 됩니다.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서신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서신서 입니다.
이것과 관련되서 그 주제는 세가지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금하게 할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지역교회의 여러가지 질서와 여러가지 집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이러한 문제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해 줍니다.
우리가 개요로서, 디모데전서의 각 장이 이 특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질서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경건한 모임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4절에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 이것이 1장의 주요 단어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더욱 이루게 하는것이 1장의 주요 주제입니다. 그리고 2장의 주요 주제는 그 집의 향기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그 하나님의 집에서 기능을 하는 장로들과 집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집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권위를 행사할 때에 공평하게 해야 하는 것을, 특별히 과부들과 장로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게 행했을때 어떠한 상급이 있는지를, 보상을 이야기 하면서 6장에 주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오늘 시간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각 장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보게될때 사도바울은 여러번 세가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1장을 보겠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딤전1:2).
여기도 은혜와 긍휼과 평강, 이 세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 이 세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딤전 1:13).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딤전 1:17).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2장 7절도 그렇습니다. 7절에, "내가 전파하는 자" 또한 "사도" 또한 "이방인의 스승"이라고 세가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믿음, 사랑 거룩함이 그 경건한 여자들의 특징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를 계속해서 보게 될 때에 사도바울은 항상 이 세가지 것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가지 것에 대해서 3장 14절에 15절에 나와있는 것을 이번 시간에 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지역교회를 표현하는 세가지가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이것은 지역모임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세가지 표현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게 될때 최소한 8개가 지역교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는 그것은 정결한 처녀로 중매한다에서, 처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지역교회에 대해서 등대라고 계시록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양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에서는 진리의 기둥과 터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성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지역교회가 무엇인지 각각 다른 각도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역교회를 성전으로 묘사하게 될때에 그 지역교회 성전이 거룩함과 성별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결한 처녀라는 표현을 보게될때, 그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정결한 그 태도와 애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등대를 생각하게 될때 지역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간증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표현이 지역교회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제 이 3장에 나와있는 세가지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 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보게 될때 생각하는 것은 여기에 누가 거하시는가, 그 거주자가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은 이 실체, 정말 그분은 거짓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는 우리의 책임을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것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그 각각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집'에서, 관사가 없는 '그 하나님의 집'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 하나님의 집'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격을 나타내는 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세,네가지 것들을 마음 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 집 주인이 누구인가? 그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 안에 살고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집에 살고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어떠한 규칙으로 경영되고 있는가? 그 집의 가풍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하나님의 집과 관련되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것이라고 그 사람들의 의무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강조점은 이 하나님의 집의 소유주가 누군가 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모입니다. 우리는 그 모임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그 모임에 속한 특권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모임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대해서 여러분의 집을 소유한 여러분이 그 집의 규칙을 정하고 어떻게 경영할지를 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집인 이 지역모임도 하나님이 그 운영을 정하실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대로 하게 되어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사람이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서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할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어떤 분이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무식한 자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지역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모임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반영해야 하는, 드러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가 살고있는 미국에서 때때로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아주 호화로운 저택을 보게 될 때에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다, 이런 말을 하면서 지나가게 됩니다. 아주 정원도 잘 관리가 되어 있고 집도 멋지고 깨끗하고 그리고 그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집이 잘 관리가 안되어 있고 잡초가 무성하다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에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방문자들이 이 지역모임 안에, 하나님의 집에 오게 될때에, 그 집에 모습을 보고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제가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을 위해서 잠깐 멈추고 다른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건물 자체가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이 성도들 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믿는 신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로 모이는 그 사람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바로 그 인격에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이 그것을 어떻게 세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집의 가치를 드러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집의 규칙이 어떻게 되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로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주제를 다루게 될때, 그것이 어디서 처음 언급됬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장을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16-22).
여러분은 이 기록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속여서 그의 장자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서를 피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벧엘이라는 장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잠이 들었을때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한 사닥다리가 하늘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닥다리 옆에 서 계셨습니다. 이제 그 야곱이 말하게 됩니다. 야곱이 말하기를, "두렵도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기록된 성경의 부분입니다. 이제 최초 언급의 법칙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맨 처음 언급된 주제에서 말해주고 있는 그 원리는 항상 그 표현을 다루게 될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언급된 곳이 어디 입니까? 그것은 남자가 그의 아내를 사랑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창세기 22장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것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2장에서는 또한 이 영어 성경에는 '예배 드리다'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22장은 예배가 무엇인지 그 원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28장에서 하나님의 집과 관련된 원리들을 모아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참으로 "두렵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그 임재 앞에서 우리는 합당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나타내야 될 것입니다. 이제 나중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셨을때, 또한 동일한 원리가, 그 경외감이 그 가운데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때,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했을때, 그 영광 가운데 심지어 대제사장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곳에는 항상 우리가 마땅한 경외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곳은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미국의 문화에서는 문이라고 했을때, 그것을 그냥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문이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는 것을 분명하게 할 때에, 그는 문 앞에서 그 일을 하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례 지내기 위해서 그 굴을 사게 될 때에 그는 결정을, 그 흥정을 문 앞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롯도 그 소돔 문 앞에 앉아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에 대한 시편은 그 문에 앉아있는 자들이 나에 대해서 조롱한다고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문이라는 것은 그 성을 다스리는, 또한 경영하는 권위있는 자리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하늘의 문이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권위와 행정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지역모임 안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이 표현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모임으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으며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르쳐지고 실행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이날, 그는 한 서원을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지역모임 안에서 이와같은 헌신과 서원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역모임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헌신되고 구별되며 그분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집에 최초로 언급된 것을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이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지역모임에 대해서 천사들은 또한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너울에 관한 가르침에서 이것을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있는 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천사들이 여러분,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너울을 쓴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질서에 순복한다는 것을 이제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천사가 여러분이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천사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어디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지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성경에서 천사가 말하는 장면이 어디에 처음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갈이라는 한 여인이 사라를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하갈을 광야 가운데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가 하갈에게 처음으로 기록된 말을 하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순종하라고 말했습니다. 왜 천사는 그 순종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어느날이었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어느 한 날, 그 천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특권 가운데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가운데서 순종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사들에 대해서 자기 첫 처소를 떠나 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여기에 택하신 천사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면 다른 반역하는 천사들이 순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사들이 자매님들이 자원해서,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지적인 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 질서를 관심있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이 천사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는 그 순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닥다리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를 또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집이 처음 언급된 부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신약성경에 디모데전서 이 서신서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집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러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것을 알게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하고싶은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집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너희들이 가지고 오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지고 올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조심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아주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제 이것은 에베소에 있는 그 지역모임에 보낸 서신서 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에 가서 보게 될 때에 에베소가 어떠한 지역이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에베소에 아데미를 숭배하는 커다란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큰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그 우상에게 숭배하는 것을 멈추게 할거라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살아계신' 이라는 표현이 나올때는 그것은 항상 죽어있는 우상과 대조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에베소는 우상 아데미 신의 숭배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될때 그는 그 장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시편 115편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이 있지만 말할수 없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볼수 없으며 그들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존재다. 그 우상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없음을 여러가지 목록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서를 보게 될 때에 그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듣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디모데전서 2장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언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성경에서 가장 엄중한 권면을 듣게 됩니다. 이 과부를 대하는데 있어서, 장로를 대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너를 명한다고 엄중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너를 명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역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를 친히 보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에게 공적으로 읽는 것에 착념하라는 권면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다르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며 우리가 행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며 또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분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 모이고 있는 이 교회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는 여러가지 권면과 도전은 참으로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한 방문자가 올때에 참으로 우리는 그 방문자에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기도집회 때에, 기도하실때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듣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저의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될때, 때때로 그냥 듣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채, 그냥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때에 그 기도를 듣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말씀을 드려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에, 이 지역교회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 집회에 참석하게 될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라는 기대를 가지고 오시게 됩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해주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 있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지역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오직 구원 받아서 믿는 자들만,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들만 이 하나님의 교제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교회는 오직 믿는 자들로,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이라는 표현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바울이 그들로부터 따로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참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이제 거룩함으로 특징 지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교제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은 항상 지역모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여기 또한 '하나님의 교회들' 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지역모임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있는 그 하나님의 교회들을 하나처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항상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묶어서 지칭하게 될때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이라고 부르지, 그들 여러개를 한꺼번에 '아시아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한 지역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고, 한 지역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모임으로, 이 교회로 구원받고 그리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야 되는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제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삶 가운데서 드러나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이 기둥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받들어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터라는 것은 어떤 것을 방어하고 있는, 보호하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 진리를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 진리를 계속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가 이것을 여러번 반복하는 것이 네게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정결한 마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깨워 지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되는 첫번째 일은 이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분명하게 붇들고 있을때 우리가 다른 일들을 그것에 따라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내게 받은 것을 또한 충성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충성된 사람들이 그 후대에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교훈, 또한 이 진리에 대해서 언급이 되게 될때에, 항상 복수가 아니고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 교훈이 복수로 사용된 것은 사단의 교훈, 사단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 4장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 말할 때는 항상 단수형으로만 언급을 하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냥 성경의 여러 교리들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를 우리가 임의로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성경에 영감에 대한 교리를 뺀다면 여러분은 그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교리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1세기에 있던 어떤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그 구속의 모든 교리를 다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것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어느 한 가지만 부분적으로 손상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교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이 지역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한 교리가 보존되고 또한 가르쳐져야 하는 곳입니다.
이제 이 디모데전서 각 장에서는 사도바울이 그들이 보전하고 전파하기를 원했던 그 각각 틀별하 교리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그 복음의 분명성 입니다. 사람들이 전파하고 있는 복음이 아주 혼란스러운 것이었던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혼합해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그 복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만을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그 복음을 전파할때, 단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가 전파해야 하는 그 복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해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십자가 없이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것을 전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으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십자가는 어떠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십자가에 대해서 분명한 복음을 우리가 전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전하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하면 죄인이 구원 받는지를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복음에 여러분이 다른 것을 혼합시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영광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장에서는 디모데가 그 복음의 순결함을 유지하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기도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기도를 하기를 원한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가 기도집회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이 하나님의 집의 건전함,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3장 16절에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가 보존해야 되는 그 진리의 부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성이며 또한 그분의 인성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승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분의 구속의 능력을 말합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보존하고 또한 선전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존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4장에서 그들이 어디로 부름을 받아서 오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돌봄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특별히 과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물질적인 것과 관련되서 장래에 오게되는 나라를 생각할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에베소에 있던 아데미 신전은 127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기둥에는 그 이방 우상신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그러한 에베소에 있는 지역교회에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너희들이 그 기둥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우상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붇들고 있는 기둥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맏겨져 있다는 책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다른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모임들에 대해서 비방하고자 이 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지역모임 안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하게 보존되고 전파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내일 오후 시간에 보다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것은 여러분 각자가 이러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외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그 표현은 우리가 항상 살아계신 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 모임 가운데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 진리를 붇들고 또한 선전해야 되는 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 보낸 그 세가지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도우신다면 4장에 나와있는 또다른 세가지 것들에 대해서 두 그룹을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이름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필요와 관련된 세가지 것을 보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일꾼으로서 디모데가 세가지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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