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히긴스 형제님

< 베드로전서 2장 >

박이레 2021. 7. 21. 11:21

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강사 : 히긴스 형제님

< 베드로전서 2장 >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2:1-25,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시간 1장에 관련하여 여러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2장을 시작하기 앞서 요약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흩어진 유대인 믿는자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흩어질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신분하락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1장에서 우리가 본대로 그들은 영혼의 구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영적인 진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가 믿는자로서 우선적으로 순종해야 하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고난과 인내에 대해서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목자와, 그들이 지역모임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장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그 십자가가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특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2장에서는 이 십자가가 우리 삶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양과같이 길을 잃었으나 우리의 방향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를 향한 새로운 목적과 목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복음의 말씀인 3장 1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인을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과 함께 우리 삶에 있는 징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제 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새로운 의무, 주님의 양을 치는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2장에서 우리가 많은 것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23절에서 우리가 거듭난것은 <말씀>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제 이 거듭난 자는 2장 1-2절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고 2장 4절에서 그가 이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9-11절부터는 이제 그가 걷기 시작 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고 이제 자라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말하고 걷는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비유로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우리는 <갓난아이>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산 돌>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나그네와 행인같은>너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종과같이> 라고 말하여 25절에서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주님의 그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이 돌로 여러번 묘사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산 돌입니다. 그분은 거절된 돌이며 요긴한 모퉁이 돌입니다. 그리고 보배로운 돌입니다. 그리고 거치는 돌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여러가지 돌로 묘사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21절에서 그분은 고난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그분이 또한 목자이십니다. 참으로 모든 장에서와 같이 2장에서는 우리 주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주님을 섭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경배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증거합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좇아 갑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다루었고 이제 보다 자세하게 2장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처음 세 구절은 자라는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는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4-5절에서는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집이 세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우리가 또한 경배를 드리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9-10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것을 또한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증거하는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11-12절에서는 육체의 정욕의 제어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제 13-20절 까지는 여러가지 모양의 권위에 대하여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함을 말씀합니다.

21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갈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그와같이 좇아가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은 이와같은 의로운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권면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넓은 이러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제 처음 세구절에 나온, 자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라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라가는것을(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말과 관련해서 다섯가지의 악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독과 모든 궤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악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것에 흥미를 잃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악한 것들을 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식욕을 두고 섭취해야 합니다. 여기 나온 갓난아이는 본능적으로 젖을 사모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신령하고 순전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을 자라게 할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맛보았을 때 참으로 그것이 좋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와서 주님을 다시 맛보고 자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께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젊은 성도님들이 상당히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나라에서도 학생들은 집에와서 많은시간동안 숙제를 해야 합니다.
또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을 절대 찾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시간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 시간을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합니다.
어떤 한 시간을 따로 떼어내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번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것을 말씀에 기록된것만큼 즐거워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인내를 갖고 그일을 계속 해나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오랜 시간동안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매일같이 성경을 읽는것을,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네 장이 '종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여러분이 잘 아는 장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사야 50장입니다.
50장에서 그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나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그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것을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에 매일같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해야 하며 또한 연속해야 합니다.
제가 단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구절과 한부분만을 취해서 읽는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장을 읽고 또 다른부분에서 한장을 읽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신서 전체를 읽고 그 전체적인 메세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읽으시고 연속적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조심스럽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단의 시험 앞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살것이라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각각의 단어가 놀라운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시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사의 시제까지도 영감을 주어 말씀하셨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단어의 복수 형태나 단수 형태도 주의깊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사가 능동태인지 수동태인지도 주의깊게 사용하셨습니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조심스럽게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배우는데 중요한 것 하나는 이 말씀을 배우는데 계속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의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확신 가운데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말씀 앞에 나올때 확신을 가지고 읽는다는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다는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때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또한 이 말씀을 읽을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것이 단지 영원한 형벌에서만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분과의 교제를 즐거워 하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나올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구절과 비교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읽을때에 문맥이 어떤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젊은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 분들은 기술적으로 진보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희게 된 우리 나이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와같은 기술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전화기가 다이얼을 돌리는 시절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때에 IBM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장은 이 세상에 컴퓨터 3대 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여러분의 집에서 컴퓨터 세대보다 많은 컴퓨터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 기술에 대해서 여러분은 익숙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것들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읽는것이, 기록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컴퓨터나 핸드폰에나 여러분이 읽는것을 계속해서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각 장에 대해서 따로 파일을 만들어서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것을 거기에 적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40세가 되었을때 그 적은것을 볼때에 참으로 놀라게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점점 읽고 적어나가면서 자라가는것을 그것을 통해 확인하게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느낄때에 그것은 참으로 금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기억에만 의존하고 읽고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젊은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가 여기서 별로 얻은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장을 읽을때에 여러분에게 네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질문하신다면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첫번째로 이 한장을 읽을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한장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이 장을 읽으셔야 합니다.

만약 내가 읽고 있는 한장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유일한 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네게 말씀하시고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각 장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무언가를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두번째로 이 장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할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항상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또한 대조적인 방법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있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여러가지 상징들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게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미래에 대해서 많이 기도하고 계실것입니다. 직장에 대해서 결혼 상대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장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답변을 하고 계시는 지에 대해서 귀를 귀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장에서 배운것을 내 삶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지 실제적인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 네가지에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있나요? 두번째, 그리스도에 대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네번째 그 장에서 내게 가르치신것을 살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와같이 섭취할 때 우리는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말씀 집회때에 참석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다른사람이 말해주는 것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섭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아침마다 내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고 이사야서의 종이 말씀 합니다.

2장의 초반 몇구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 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촞점을 산돌로 옮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 돌은 사람들에게 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거절 당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에 이 돌은 적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그 돌은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입니다. 이 부활을 통해서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바로 그분을 요긴한 모퉁이 돌로 두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그분은 보배로운 돌입니다.
사람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달리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산돌같이 그분께 나아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령한 이 집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다 포함되는 것이며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가지 다른것으로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거룩한 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 지역모임을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어찌 우상과 함께 하리오> 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또한 이 교회를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이 성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거룩한 제사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부름을 받았으며 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서를 보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때 당시 가지고 있는 특권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론의 한 가문은 제사장 가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적은수의 사람만이 제사장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한된 날에만 그들은 제사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제한된 날에만 거룩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 모든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이제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는 특권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서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아올때 어떠한 제한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만을 예배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매일이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다가 주일에 그 부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를 드리는 특권은 은혜의 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형제님들 뿐만아니라 자매님들도 이 예배를 드리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때에 자매님들은 잠잠한 가운데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형제들은 소리를 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집중하고 예배를 중심으로 다른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예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13:15-16, 개역한글)

여러분이 히브리서에 대해서 자세히 읽어보신다면, 히브리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희생제사가 더이상 드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13장에서 다시한번 이 제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입술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 이것을 찬미의 제사라고 언급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신령한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라는 단어는 우리가 드리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30분동안 페이스북이나 다른 인터넷을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내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면 그 예배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령한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제사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주님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것만 찾으려고 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아들에 관해서는 그 무엇도 그분께서 영원토록 즐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것을 발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주님에 대해서 더 알고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알고 기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부모분들 중에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실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다른사람이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칭찬하고 좋게 말할때에 여러분은 그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와같은 좋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다른분의 자녀에 대해서 좋게 말할것이 없다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좋게 말할때에 여러분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고 있는 좋아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알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쁨의 생각들을 우리와 더욱 나누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9-10절에서는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믿는 자들은 한때 택하신 족속 가운데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로 그 나라의 백성의 일원이었습니다.
이제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표현들은 이제 믿는 자들에게 적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잃어버린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같은 제사장들은 이제 하나님의 덕을 세상 가운데 선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즐거움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베드로전서의 이후의 후반부에서는 이 아름다운 덕을 어떻게 우리가 실전에서 선전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버지를 증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후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덕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선전될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이제 노예도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나타내기 위해서 로켓을 연구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모든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전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덕을 여러분의 학교에서도 선전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도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장소에서도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반부에서는 우리의 삶의 여러 분야에서도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수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나그네는 집으로부터 떠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행인은 집으로 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그네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행인은 거주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성격을 말해 줍니다.

지난시간 여기 나와있는 이 비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속되어 떠나온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그네와 행인들로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간 광야에서는 이제 거스려 싸우는 전쟁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전쟁에 대해서 1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에 대해서 육체의 정욕과 싸우는 것으로 성경은 집중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는 사회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물건을 팔기 위해서 광고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과 관련된 수많은 전쟁에 우리는 직면합니다.
또한 이 전쟁은 인터넷으로 통해서 우리를 더 어렵게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을 존중하며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인터넷에는 너무나 많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악이 인터넷에 있습니다.
참으로 포르노 영상은 많은 수익을 올리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을 뿐아니라 너무나 우리가 접근하기 쉽게 되어져 있습니다. 단지 두번 클릭만 하면 그것에 접근할수 있습니다.

참으로 가장 악한 세상이 여러분에게 접근할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값싸게 여러분에게 접근합니다. 거의 공짜로 그런 것들을 즐기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미끼이고 여러분을 유혹해서 거기에 중독되게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또한 그것을 이용하게 될때 아무도 여러분이 그러한 것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러한 익명성을 여러분에게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매우 중독성이 강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약처럼 여러분을 끌어당기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직면한 전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제일 안전한 것은 그것을 클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실수로 그런 것들을 열게 되었을때 가능한 빨리 그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와같은 어려움에 빠져 있다면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중독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싸우는 육체의 정욕의 여러가지 형태중의 하나입니다. 육체의 정욕에는 물질주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를 더욱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 시대는 소비하도록 만드는 시대입니다.

참으로 물질을 위해서 많은것들을 투자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위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복음과 일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악한일로 특징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이 우리삶의 특징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한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것이 무슨 뜻인가요?

어떤 분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날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날에 이 믿는 자들이 옳았고 죄인들을 판결하시는 날이라고 말씀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나온 이 구절이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의 <권고하신다> 라는 것의 큰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다 하는 것은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거기는 노래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셨는지를 찬양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시기 위해서 오신것을 찬양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그 이방인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셨다(찾아오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제 12절에서는 우리가 선한 행실을 가질때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얘기 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을 권고 하실때에 그들은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 믿는 자들의 선한 행실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어떠한 전쟁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 안에 육체의 정욕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그 육체의 정욕을 계속 자극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최근에 구원받은 젊은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난 후에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까? 이전의 나쁜 생각과 소망이 얼마나 많이 변화가 되었습니까?

제가 그런 분들에게 나쁜 소식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것들은 점점 나빠집니다. 이 전쟁은 멈추지 않는 전쟁입니다. 이 육체가 남아 있는 한 이 전쟁은 계속 될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본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아말렉과 싸웠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전쟁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분들이 나이가 들면 그것이 없어지냐고 물으신다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정부와 사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될때 우리는 주님의 권위를 따라야 할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법칙을 다 어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규정에 대해서 여러분은 좋아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저는 세금을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법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될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부에 대한 책임을 받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네군데서 정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말씀합니다.

로마서 13장에서는 위에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씀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위에있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할것을 말씀 합니다.
디도서 3장에서는 정부의 권세에 우리가 할수 있는 한 선한일을 할것을 예비하라고 말씀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정부에 우리가 순종할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세상의 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권세자인 빌라도 앞에 서셨습니다. 빌라도는 아주 거만하게 "내가 너를 죽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참으로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 앞에서 빌라도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한 그 부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빌라도의 권세를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한번 우리가 정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또한 다른 어떤 한 부분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는 선한 행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5절에서는 이제 이 선행이 잠잠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의로운 삶을 살찌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구원받는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무식한 말을 막게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17절에서는 각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대해서 인정할 것을 말씀을 통해 말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왕을 공경하지만 하나님께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왕은 그 당시의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아주 악하고 나쁜 왕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핍박한 왕입니다.
믿는 자들을 고문하고 콜로세움에 세워서 화형시킨 사람입니다. 바로 그 왕에 대해서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공경해야 할 자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제 이 모든 말씀을 한 후에 18절에서 사환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사환은 한 가정의 종을 말합니다. 부유한 어떤 집의 노예로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인 중의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하기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인들은 그들을 때리고 아주 어렵게 한 주인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덕은 우리가 그 가운데서 어떻게 놀랍게 반응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원리는 단지 어떤 가정의 노예로서의 합당한 수준에서 넘어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쳐지고 있는 이 원리는 믿는 모든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다른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어떠한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그들에 대해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신뢰하며 반응하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참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2:19, 개역한글)

여기에 세번째로 여러분의 행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말씀합니다.
어떤사람들은 여러분의 행실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입이 다물어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행실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을때 그것을 잠잠히 참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그 아들이 받으신 고난을 우리가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우리는 주님의 삶을 똑같이 반복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가신 방향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갈수 없으나 그분의 가신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있는 뉴저지에는 최근에 20cm나 되는 눈이 내렸습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간다면 아이 앞에 아버지는 커다란 발자국을 남길 것입니다. 그의 보폭은 괭장히 깁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그 커다란 보폭을 똑같이 다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이의 보폭은 짧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은 보폭으로 따라갈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이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밟은 발자국 자체를 밟을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받은 고난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고난에 대하여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 고난에 대한 분노도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주님께서는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고난을 받을때 따라야 하는 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제가 잠시 우리 주님의 범죄하실 수 없는 성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여러 성도님들께서 알고 있는 세가지 놀라운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는 죄를 알지도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서 요한일서 3장에서 <그의 안에는 죄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는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할수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실때에 천사는 <거룩한 자가 네게 나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짖는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죄를 범할 가능성조차 없는 분이라면 그분이 어떻게 인간일수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거룩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으며 잉태된 순간부터 거룩한 자이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깐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 땅가운데 계실때에 죄를 범할수 있는 분이셨다면 그분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 상태에서도 죄를 범할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죄를 범하신다면 모든 구원의 근거는 다 사라져 버리고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죄를 범하실수 있는 상태로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면 우리 주님의 인성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대적들이 완전히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어떠한 죄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한 행위 가운데서 어떠한 흠도 찾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대적 조차도 그분의 죄 없음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그것을 찾고자 여러가지로 노력하였습니다. 주님의 육신의 형제들도 주님에게서 죄를 발견할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과 같은 집에서 자란 두명의 사도가 이 신약 성경의 두권을 작성 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유다가 주님과 육신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야고보가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불렀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부분에서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유다도 그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분과 같이 자란 형제들도 그분에 대해서 가장 높은 표현을 사용해서 주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제 그 아버지가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온전한 인성 가운데서도 죄 없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분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서신을 받고 있는 많은 신자들은 그들의 잔인한 주인으로부터 많은 채찍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당하셨던 채찍에 대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 채찍은 사람에 의한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사람이 내리는 채찍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케 하는 그 채찍은 하나님께서 내리는 채찍이며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라고 할때 내려진 채찍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받으신 채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목자로서 주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우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 집의 노예로서 그들은 아주 잔인한 시기를 그들은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하늘에 그들에 대해서 완전히 공감하시고 동정하시는 그들의 목자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로서 사는 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필요를 목자이신 주님께서 채우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 장의 초반부에서는 주님에 대해서 맛보고 그분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산돌로서 그들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오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것을 말씀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께서는 그들이 받는 고난 가운데 모든 본이 되심을 말씀 합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의 목자와 모든 감독으로서 그들의 위로와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 합니다.

1장에서 우리는 그 큰 구원에 대해서 강조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2장은 우리의 위대하신 구세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자라며 주님에 대해서 맛보아 더욱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모든 분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