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장승훈 형제님(요약)

복음 : 탕자의 비유

박이레 2024. 2. 11. 13:25

< 복음 : 탕자의 비유 > 24년 2월 11일 일요일(요약2) / 장승훈 형제님

저도 동일하게 복음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잘 알고 있는 탕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1-2, 개역한글)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같이 드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원망한다 하더라고 그와같은 일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7, 개역한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0, 개역한글)

여기 죄인이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신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15:11-24, 개역한글)

두 아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있고 세리와 죄인들이 있습니다. 이 두 아들은 각각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또 주님으로도 볼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는 과정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회개로 들어갈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를 죽은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유산을 요구하는데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부모된 입장으로서 어떠한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패역한 것이고 부모를 부모답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법을 가지고 이 아들을 본다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재산을 주었습니다. 죽여 마땅한 아들인데 오히려 그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큰 아들에게도 그 분깃을 준 것입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15:12, 개역한글)

분깃을 줄때 아버지가 그것을 다 돈으로만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형태의 분깃도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받은 것을 다 돈의 형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돈을 막 쓴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분깃을 긴 시간동안 돈으로 바꿨다면 합당한 가격을 받았지만 급하게 처분하느라 싼값에 그 분깃을 팔아버렸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부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패역한 아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매우 신사적으로 그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이 내용만 보면 아버지에게 드러나는 잘못은 거의 없습니다. 아들에게 그 잘못과 죄가 드러납니다. 이 둘째 아들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먼나라로 갔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먼나라로 간 것으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여러가지 은혜로운 것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특별히 주신 큰 은혜는 저희를 교회안에 두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것을 따분하게 여기고 성경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둘째 아들과 같은 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은혜와 지식을 이곳에서만(모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가운데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각 성도님들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모임을 떠나고 말씀 시간을 지루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몸은 여기 있을지라도 이미 떠난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해서 재산을 다 소진해버렸습니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15:14, 개역한글)

아버지께 부끄러운 요구를 했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하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이제 흉년이 들어서 궁핍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갔을때 맞딱뜨리게 되는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한 궁핍합니다. 세상은 저희들이 원하는 것을 줄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궁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비참한 것입니다. 돈이 많고 높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재산과 명예와 지위를 가질수록 고통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사망 원인 중의 50%이상이 자살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까? 돈이 없는 것입니까? 근원적으로 가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5-16, 개역한글)

참으로 비참한 상태를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내려갔을때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서 저희가 모임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가, 내가 탕자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해서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세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 가운데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들어야 그 말씀이 마음판에 세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모임안에서 자랐지만, 모임을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내 마음에 채워진 말씀은 얼마나 되는가? 그것을 모르고 우리 안에 말씀이 얼마 없다면 이 비참한 가운데 있는 둘째 아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15:18, 개역한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할수 없는 큰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받는 시작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19, 개역한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랬을 때에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19절까지는 아들이 주인공이지만 20절부터는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0, 개역한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들이 잘못을 해도 그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식을 용서합니다. 자식을 혹독하게 치리하는 부모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부모님의 사랑을 다 받고 자란 자녀이고 또 자녀에게 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무리 패역한 자녀라 할지라도 그 자녀를 사랑으로 품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기의 아버지또한 그러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먼 발치에 보였을 때 달려나가서 그 아들을 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신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21, 개역한글)

이것은 아들의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15:22-24, 개역한글)

여전히 그를 자기 아들로 여기는데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측은히 여겨"(20절) 이를 단어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이 어디갔는지 모르고 죽었는지 어떻게 사는지 모르다가 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피골이 상접하고 비루한 몰골로 돌아옵니다. 그것을 보았을때 그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것입니다. 그 아들이 떠날때와 돌아올 때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요? 달려나가 그 아들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그리고 선대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생각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22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에 자신의 상태를 아버지께 온전히 맡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영적으로 얼마나 궁핌한지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것을 알고 돌아올때 진정한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2:4, 개역한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다리심을 멸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