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덕언 말씀

덕언 : 참된 교사이신 주님 / 강성찬bro

박이레 2023. 6. 5. 23:34

덕언 :  참된 교사이신 주님 / 강성찬 형제님

마태복음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내게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많은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선생님들은 특별히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아는 게 많고 그리고 아는 게 많을 뿐만 아니라 그걸 잘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지식이 있어도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은 아는 것도 많으시고 가르치기도 잘하시는 그런 분이 있는 것입니다. 영어 단어로 이제 선생님을 '티처'라고 하잖아요. 근데 잘 가르치는 분을 '티처블'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단어가 잘 가르치기도 하고 잘 배울 수도 있는 그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실 그 두 가지가 성경에서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그런 덕목입니다. 사람은 잘 배울 수 있어야 됩니다. 잘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잘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가장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데 귀를 닫고 완악하게 고집을 피우는 게 이제 불신자들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이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 배우기를 원하고 그 마음이 부드러워서 잘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르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게 필요하고 또한 잘 배우기 위해서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잘 배우는 데도 필요한 것이고 잘 가르치는 데도 필요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이제 아비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을 가르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교양과 훈기를 양육하라"라고 돼 있습니다. 우리가 잘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의 성격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높아가지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해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냥 화만 돋구고 마는, 이제 이렇게 끝나버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근데 이제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그 배울 때 기쁘고 더 배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상한 게 조금 뒤로 넘어가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런 말씀인데요. 12장에 보면 사람들이 주님께 배우러 오지 않는 것을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

남방 여왕은 이제 아주 먼 길을 그가 이제 아프리카 아마도 이 에디오피아 그런 지역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먼 거리를 걸어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와서 솔로몬의 말을 듣고 정말 솔로몬으로부터 가까이 서가지고 그 지혜로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가 이렇게 말을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계시는데 사람들이 주님께 물으러 또는 배우러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배우러 계속 나오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남방 여왕이 책망 할 정도로 그냥 별로 관심 없이 질문 없이 나오지 않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방 여왕이 가졌던 그런 질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 번 우리보고 생각해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세상 사는 일이 바빠가지고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질문이 많습니다. 이 지혜로운 분께 물어보고 싶은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질문들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그렇게 질문해 보라고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들고 주님께 나와서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런 질문들을 하고 대답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힘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그러한 매일 매일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그럼 배운 것을 어떻게 실습을 하는지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배우면 그것을 배운 것을 그냥 배웠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습 문제를 풀어보잖아요. 우리가 실제로 실습을 해봅니다. 그 실습이 뭐냐면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데요.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이 멍에라는 것은 소 두 마리가, 또는 다른 짐승이 같은 방향으로 일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구속하는 그런 도구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그 일하는 대로 우리가 동일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구속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우리를 구속하는 원리라고 말씀을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땅 가운데서 섬기실 때에 주님께서 따르셨던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또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섬기면서 따라야 되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여기 요한복음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여기 보면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서 주님이 사역하셨을 때에 일관되게 따르셨던 한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그리고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새로 이사한 곳에 1층이어가지고 우리 집 앞에 조그마한 땅이 있어가지고 이제 거기서 여러 가지 작물을 키우고 또 이제 씨를 심으면서 이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의 씨를 심었는데 거기서 많은 열매가 나오는, 그 씨는 보이지도 않는, 정말 제가 인터넷으로 씨를 샀는데 배송돼서 딱 와서 보니까 씨가 너무나 눈꽃만해가지고 보이지도 않더라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씨에서 많은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 우주의 원리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건 항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는데 거기서 또많은 열매가 나올 수도 있고, 잘 되면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안 나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의 원리가 그런 것처럼 씨를 하나 심으면 많은 열매가 나온 것처럼, 이거는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원리를 따라서 그 명에를 매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 주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시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기까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시고 많은 열매를 맺으셨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도 그처럼 따라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배우는 원리가 그것입니다. 하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 자연에서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은 항상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은 자기가 지켜야 된다. 그러지 않으면 망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세상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내 자신은 죽어야 된다. 그래야지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게 우리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주님의 멍에를 매고 그것을 실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나를 희생했는데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생명을 얻으려고 열심히 추구했을 때는 항상 그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힘을 얻으리니" 그 말이 사실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이 놀라운 주님의 가르침은 또 조건이 필요합니다. 항상 우리도 뭘 배우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물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는 그 준비물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진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겠다." 이게 29절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께로 와서 주님께 우리의 모든 짐을 내어드리고 주님께서 쉬게 하는 그 힘을 누려야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 주님의 생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있는 자가 주님의 멍에를 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준비물입니다. 대전 중구 모임의 성도님들이 우리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생명을 얻고 이 준비물을 갖추었으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또한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이 행하신 그 원리를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고 내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내 자신이 보존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참 이런 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증 나지 않는 그런 과목입니다. 항상 주님으로 나와서 또 배우고 싶고 또 배우고 싶고 한 그러한 과목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을 이 복된 배움을 우리의 평생 가운데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