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의 응답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저에게 질문이 총 아홉 개의 질문이 들어와 있는데요. 이 시계는 제가 누르기 시작하면 이제 줄어듭니다. 한시간 20분에 집회를 마치도록 계획돼 있습니다. 그 시간을 사용해서 최대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순서를 약간 바꿔서 두 번째 질문부터 다뤄보겠습니다.
* "자매님들이 꼭 너울를 써야 하는 집회와 시기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저희들이 고린도 전서 말씀을 따라서 자매님들이 이제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두고 있죠. 그런데 이걸 언제 해야 하느냐? 그다음에 언제 쓰느냐? 한 건데요. 우선 하나님 말씀을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전 11:10).
우선 첫 번째로는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1장은 이제 너울과 만찬을 다루고 있고요. 그다음에 12, 13, 14장은 이제 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은사가 나오고 13장은 은사를 사용하는 동기인 사랑을 다루고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은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왜 은사를 사용하는가? 하는 그 동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은 지역 모임 내에서 여러 집회 가운데 은사들이 어떻게 질서 있게 이렇게 무질서하게 사용되면 안 되고 질서 있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이 14장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래서 11장부터 14장을 전체로 묶어가지고 이름을 붙인다면 '교회의 실행'입니다. '교회 진리'입니다. 저희들이 말하는, 그래서 이제 너를 언제 쓰느냐? 이제 첫 번째 답입니다. '교회의 집회 때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고린도전서 11장부터 어떤 단어가 나오냐면 11장 예를 들면 17절 보시면 "저희의 모임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너희가 모일 때에" 라고 하는 '너희가 모일 '때라고 하는 이 표현이 11장에서 14장까지 7번 나옵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교회가 모일 때 해야 되는 실행 중에 하나로 너울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첫 번째 대답이 너울은 언제 쓰느냐? 교회가 주님 이름으로 모여서 집회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7개의 집회입니다. 저희들이 믿고 있는 대로 예배드리고, 기도 집회, 말씀 집회, 이렇게 할 때, 7개의 집회에서 쓴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그러면 나머지 교회로 모일 때 말고는 안 써도 되느냐? 이거에 대해서 이제 이 원칙을 적용할 때 이제 약간 지역마다 실행이 다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어떻게 지금 현재 실행을 하고 있냐면 그러면 교회로 모였다라고 하는 것은 7개의 집회죠. 그런데 이 일곱개의 집회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집회에서, 일곱개의 집회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집회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적용을 합니다. 이 부분은 적용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7개의 집회에서만 너울을 쓰게 돼 있습니다. 나머지 경우에 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 덕을 위해서,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저희들이 실행하고 있는 건데요. 가장 많이 실행하는 원칙이 뭐냐 하면 교회이기 때문에 첫 번째, 어떤 분들은 모임에 교회의 인도자들이 있을 때, 인도자들이 그 자리에 있을 때 너울을 써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고 두 번째는 말씀과 기도가 행해지고 있을 때, 말씀이 전해지고 기도하고 있을 때 너를 써야 된다. 이제 이런 것들을 적용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이제 장례식하고 결혼식입니다. 결혼식하고 장례식에서, 이 결혼을 제정하신 분이 주님이시거든요. 그리고 주님이 참 신랑이고 신부는 교회지요. 그래서 이와 같은 신랑과 신부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나타내는데 그것을 이 땅에서 이제 결혼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와 같이 이와 같은 말씀이 나가는 결혼식에서 너울을 쓰는 것이 합당하다. 교회가 너울을 쓰듯이, 이렇게 보고요. 그다음에 장례식 같은 곳에서 이제 그분이 주로 이제 믿는 분이겠죠. 혹시 믿지 않는 분이라 할지라도, 하여간 주님께 가고 주님의 십자가와 또 용서와 그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와 이런 것들을 다 이야기하고, 혹시 장례식장에서 믿지 않는 분들에게 주님을 믿어서 구원받아야 되는 중요한 그런 원칙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때 이제 쓴다, 이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 이제 여기까지는 이제 주로 그런 식으로 집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예를 들면 어떤 성도님이 이제 가게를 하나 오픈을 했어요. 그래서 성도님들이 같이 모여서 이제 기도도 하고 이제 이렇게 할 때 그러면 혹은 신방을 갔을 때 이때 너울을 써야 되느냐? 자매들이 노를 써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원칙적으로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 모임의 정서는 어떻게 가르쳐 왔냐면 이 너울을 교회적인 집회 때 써야 된다라고 가르치지 않고 거의 모든 때 항상 써야 된다고 예를 들면 이제 저희들이 교회에서 지역 모임에서 실행하시는 걸 보면 교회 집회가 이제 아침에 이제 예배드리죠. 이때 너울 쓰죠. 말씀 집할 때 너울 쓰죠 맞죠. 그다음에 식사할 때, 애찬, 요즘에 애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예를 들면 이제 애찬을 교회에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식당에서 애찬을 한다고 그랬을 때 이때 너울을 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를 들면 수양회를 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를 들면 지금도 상당한 기간 동안 교회로 모여 있거든요. 그런데 교회로 모여 있는데 집회는 끝났어요. 그런데 이제 가운데서 차를 마시고 이제 이렇게 환담도 하고 그래요. 이때 쓸 거냐 안 쓸 거냐는 거죠. 이게 지금 교회 집회의 연속성이냐? 아니면 일단 끝난 거냐? 그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마포 모임에서는 안 씁니다. 이제 집회 끝났으니까 너울 딱 덮고 그다음에 거기서 커피도 마시고 할 때 안 씁니다. 그런데 또 어떤 모임은 교회로 모이는 아침부터 저녁에 내 씁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를 들면 자기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 있죠. 이때 이제 성경 공부하는 거죠. 가정 집에 이때 쓸 거냐 하는 거죠. 그리고 혹은 개인이 자매님이 혼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너울을 쓸 거냐? 이제까지 어떻게 가르쳐 왔냐면 명백하게는 아니지만 암시적으로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자매님들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었어요. 어떤 구도자, 또 혹은 전화로 어떤 성도님 아픈 입원 소식을 들었어요. 기도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때 너를 쓰는 것이 맞는 것처럼 가르쳐 왔어요. 그때에도 그리고 자매님들이 혼자 집에서 성경 보고 기도할 때에도 너울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이렇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르쳐 온 거죠.
그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이제 그렇게 하기 실행하기가 조금 어려운데요. 하여간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일곱개의 집회에서 너울을 쓰게 돼 있답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교회로 모일 때 실행하는 것이지, 교회로 모이지 않은 곳에서 실행한다고 돼 있지 않답니다. 이게 첫 번째 원칙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원칙을 어디까지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지역 모임마다 또 상황마다 조금 다르다. 이런 것들을 좀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다음에 이제 저희들이 이게 이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모자를 쓰기도 하고 자매인들이 모자를 쓰기도 하고 너울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너울이고요. 서양에서는 이제 모자를 많이 쓰는 거죠. 어떤 게 더 성서적이냐, 이렇게 따질 필요까지는 없어요. 하여간 머리를 덮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제 어떤 문제가 나오냐면 그러면 너울을 언제 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언제 쓰냐? 예배당에 들어와서 착석하고 씁니다. 이 너울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길거리 갈 때 이렇게 쓰는 것이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는 안 쓰고 예배당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아가지고 씁니다. 예배당 홀에 들어와서 이제 집회가 시작되니까 쓰는 거죠. 그런데 이제 저기 마포 모임에 서양 형제님이나 이런 분들이 이제 같이 생활하실 때가 있어요. 이분들은 모자를 쓰시잖아요. 이분들은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모자를 씁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쭉 모자 쓰고 옵니다. 그래가지고 예배당에 들어왔어도 당연히 모자를 쓰죠. 그런데 이제 그분들이 볼 때 마포 모임 성도들은 너울은 내 안 쓰고 있다가 예배당에 와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약간 문화적으로 다르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약간 좀 언제 쓰느냐? 교회 집회에서 쓰니까 저희들은 교회 집회 때 쓰는 것이 우리의 감각으로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모자를 쓰는 문화에서는 그 모자를 길거리에 다니면서도 쓰고 있다. 이 점이 조금 다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여기서 이제 "여자"라고 돼 있습니다. 자매라고 돼 있지 않고요. 여자라고 돼 있기 때문에, 너울이라고 하는 것을 저희들 감각으로는 구원받아야 쓴다, 이렇게 감각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 표현을 여자라고 돼 있기 때문에 이게 구원 여부보다도, 그리고 이제 창조하고 관련돼 있습니다.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이유가 남자를 먼저 창조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어 있고 천사를 인하여 쓰고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구원 여부와 관계없이 여자인 경우에 쓸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약간 그렇게 적용하고 있는 서양 모임이 있어서 저희들하고 약간 좀 실행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난다. 이런 점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양 모임에 갔을 때, 얘는 틀림없이 아직 구원 안 받았을 것 같은 어린 여자앤데, 예를 들면 소은이라든지 혹은 서윤이 이런 애들이 너울을 씁니다. 엄마 너울을 갖다가 이렇게 했나? 엄마가 쓰니까 갖다가 쓰고 싶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인정하는 이런 식의 문화도 있더라고요. 이 단어 자체가 이게 구원 여부가 아니고 여자다, 창조 질서와 관련돼 있다. 이런 식의 약간 좀 저희들하고 문화적인 차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근데 하여간 저희들이 너울에 대해서는 자매님들이 너울을 항상 쓴다. 기도하고 말씀만 있으면 무조건 써야 된다라고 이렇게 실행해 왔는데 저희들이 성경을 엄격하게 따져볼 때 교회의 일곱 집회에서 교회 하는 집회에서 쓰게 돼 있다. 이게 성경적인 원칙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그다음 질문이 누가복음 15장은 탕자 비유가 나오는 장이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이렇게 돼 있는데 질문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는가요?" 라고 하는 질문이 나와 있는데요.
그냥 이 단어만 보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의인이라고 돼 있으니까 혹시 구원받는 사람이 아닐까? 의인이라고 하는 단어를 보면 되죠. 그다음에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이건 이미 회계를 했다는 뜻인가?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렇게 여러 가지로 이제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데 항상 저희들이 어떤 성경을 이해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이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요. 두 번째로 저희들이 문제 삼는 것이 문맥입니다. 어떤 문맥에서 이와 같은 단어가 쓰였는가 하는 거죠. 누가복음 15장을 보시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 15:1-3).
그러니까 이 비유는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냐면 자기 스스로 행위로, 자기 행위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대상이, 주님이 이 비유를 하실 때 누구 들으라고 하신 것이냐 그러면 자기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다라고 하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바리새인 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는 것이 흐름상 맞겠고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 이제 비유가 3개가 나오는데요. 잃어버린 자 잃어버린 자를 찾는 기쁨이 주제인데요. 저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하죠. 돈을 여기저기다 책갈피 사이에 넣어놨어요. 잊어 먹었어요. 그런데 언제 보니까 어차피 내 돈인데 없는 줄 알았던 내 돈이 있는 거예요. 꼭 공동 생긴 것처럼 되게 기분이 좋죠. 이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 이게 이제 누가복음 15장 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제 셋이 나오는데 하나는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동전을 잃어버렸고요. 세 번째는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하나님은 목자입니다. 찾는 분, 목자고 두 번째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버지입니다. 이게 찾는 사람을 나타내는데 목자도 하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나타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죠.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니까 아버지시죠. 그다음 가운데에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가운데 비유의 이 여자는 아마도 교회를 겨냥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닐까 이렇게 이해하고요. 그다음에 잃어버린 사람 쪽을 보겠습니다. 양입니다. 이제 양은 성경에서 어떤 비유를 쓰냐면 이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이렇게 돼 있죠. 양은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예를 들면 개는 가끔 신문에 보면 막 저기 주인 집 찾아오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잘못 팔려갔는데도 옛날 주인 집을 찾아오고 막 이러잖아요. 그런데 양은 자기가 맨날 왔다 갔다 하는 길인데도 이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치입니다. 그래서 이 양은 어리석은 어리석은 죄인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바보같이 그쪽 길로 가서 망해버리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동전은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자기가 틀림없이 죄인데, 누가 봐도 죄인인데, 자기를 죄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전부 이게 바리새인들이 가르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세 번째, 탕자는 의도적으로 알면서 고의적으로 반발하고 반역하고 있는 죄인들을 이렇게 가르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지금 문맥이 이제 바리새인들을 어리석은 사람, 그다음에 자기 개념이 없는 사람, 그리고 고의적으로 주님께 반발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주님이 묘사하고 있고 그중에서 이제 회개할 것이 없는,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래서 회개할 것이 없는 죄인은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그래서 주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에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라고 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이제 바리새인들을 가르킨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그다음에 누가 복음 나왔으니까 계속 보겠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인데요.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 23:31).
푸른 나무, 마른 나무가 뭐냐? 이런 질문이 나왔는데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고 주님께서 이러한 언급을 굳이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런 질문인데요.
우선 이 부분은 누가복음 23장 잠시 보시면 23장 26절부터 보겠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해가지고 이제 이 대목이 그러니까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이제 빌라도가 넘겨줍니다. 그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하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 재판을 받고 있던 자리에서 이제 갈보리라고 하는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 장소까지 가는 도중입니다. 이걸 세상에서는 이걸 '비아 돌로로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을 가보면 지금도 성당에서 금요일 되면 맨날 신부들이 앞에 십자가 메고 맨날 여기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쭉 맨날 가는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하는 그 자리입니다. 여기서 가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메고, 십자가는 주님이 하나를 메고 계신 거죠. 하나는 이제 갈보리에 있는 거고 그래서 십자가를 메신 건 아니고 이제 막대기 하나를 메고 가십니다. 이때 주님 나이가 서른세 살이죠. 그리고 이 재판 과정, 그리고 이 집행을 이렇게 보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웁니다. 얼마나 참 안타깝다. 저 젊은 사람이 또 어떻게 말하면 괜찮은 사람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체포되고 미움을 사서 심지어 이렇게 아주 끔찍한 죽음을 죽게 됐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웁니다. 그랬을 때 주님이 뒤를 돌아보시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라 이건 울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울지 말라. 나는 창세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의 길을 가는 중이다. 이 길은 우는 길이 아니고 정말 믿는다면 찬양과 감사해야 되는 길이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이제 이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실 때 빌라도는 주님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자기가 보기에 죽일 만한 죄를 범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를 이제 풀어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풀어주려고 많이 하냐면 명절이면 죄수를 한 명 사면하는 관례가 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절대로 풀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바라바를 딱 세웁니다. 이게 이제 강도였고 살인자였거든요.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 사람 풀어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저녁에 잠 못 잡니다. 이 끔찍한 사람하고 주님하고 둘을 내세웁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예측합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을 석방시킬 것이다. 사면하자고 할 거다. 바라바를 사면하자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제안을 합니다. 둘 중에 한 사람 사면하는데 둘 중에 하나 누굴까? 그랬더니 예루살렘 사람들이 선택합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여라. 이렇게 합니다. 그는 굉장히 놀랍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 보는 데서 손을 물을 대서 손에 손을 씻습니다. "나는 이 사람 피에 대해서 이 사람 죽음에 대해서 나는 깨끗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냐면 "이 사람의 피가 만약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이렇게 합니다. 이게 굉장한 말을 한 거죠. 그리고 이 말대로 일어납니다. 저희들은 언제 일어났다고 보냐면요. 이건 성경에 안 나오는 거니까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AD 70년에 그러니까 주님이 주님이 오셔서 이제 30년 공생애를 하시죠. 그리고 이제 돌아가시고 은혜를 베풀고 죄 용서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거절합니다. 그러고 나서도 주님이 은혜를 베풉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기다립니다. 40년 동안 다시 주님의 부활과 그다음에 이제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고 교회가 계속 이스라엘에게, 이게 잘못된 판결이었다. 주님은 이런 분이었다라고 다시 회개하고 믿을 것을 40년간 전합니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보통 이제 이렇게 말이죠. AD 70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역하고 로마의 디도 장군이 와가지고 예루살렘을 잔인하게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때 일어났던 일들, 그때 이제 로마 군인이 예루살렘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정복했는가, 이런 것들을 이제 요세푸스 이런 사람들이 묘사합니다. 끔찍하게 예를 들면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르고 이런 아주 무서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제 한 번 벌어졌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언제 벌어질 걸로 보냐면 환란 시대에 이제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그리고 그때 이 이스라엘이 아무리 타락해도 적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인정 안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하나님 자기들이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을 때 어마어마한 핍박이 두 번째 역사상 일어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은 그들이 당했던 이 끔찍한 비극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죠. 어떻게 말하냐면 아주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뭐냐면 보통은 이렇게 말하죠. 여자들이 자녀를 낳으면 축복이죠. 그래서 자녀를 가진 여자가 복이 있는 여자입니다. 자녀가 없으면, 주님이 안 주실 수도 있고 성경적으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적인 인간 감정으로는 자녀가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날은 거꾸로 됩니다. 자녀를 가진 여자가 저주 받은 여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앞에서 자기 자녀들이 끔찍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아도, 예를 들면 노숙자로 살아도 그래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답니다. 죽은 것보다야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지. 이게 인간의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산이여 제발 내 위에 무너져서 나를 좀 죽여다오." 사람들은 죽고자 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차라리 죽고 싶어요. 근데 죽지 못하는 거예요. 죽음이 도망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발 산아 내 위에 무너지라라고 호소하는 기이한 날이 옵니다. 두 가지, 여자들, 그리고 죽음을 원하는, 그러나 죽을 수 없는 날. 이 날이 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두 번 AD 70년, 그리고 환란 시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이 피를 돌리라"라고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 여자들을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래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이제 너희들의 선택, 사람은 이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이거 심어놓고 다른 거 거두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 하신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푸른 나무하고 마른 나무인데요. 푸른 나무는 일단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이제 그 당시 로마의 총독으로서 그는 공정한 재판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게 많이 나오는데요. 사법부가 정의롭게 평가해야 합니다. 사법부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정부가 어떤 사법부가 공정하게 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물론 정치인이기도 하고 로마 황제한테 어떻게 해서 로마 여기 팔레스타인 총독이 되고 여러 가지 그런 부패한 사람이지만, 그리고 여러 가지 일도 했죠. 예를 들면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절기 지키러 온 유대인들이 어떻게 도망가는데 성전까지 도망갔죠. 그런데 그런데 거기 제사 지내고 있으니까 군인들이 빌라도한테 물어보죠. "어떡할까요? 성전 안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잡을까요?" 빌라도가 명령합니다. "잡아라." 보통은 이제 통치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백성의 여론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민주주의 국가니까 맨날 여론조사합니다. 그래서 대통령 지지도가 이렇게 되면 또 이렇게 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빌라도도 제일 어려운 것이 특별히 이 유대인들의 어떤 평가입니다. 그래서 성전만큼은 놔둡니다. 성전에는 들어가거나 이렇게 안 하려고 합니다. 근데 빌라도가 성격이 괴팍한 사람입니다. 그래가지고 군인들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 이제 제사 지내고 있었죠. 거기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제사에 섞어버리고 이제 이게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일을 한 거거든요. 그러면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항의하고 데모하고, 그리고 이 소식이 들어가면 로마 황제한테 들어가면 자기 총독자리도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정치인인데도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의로운 재판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여러 번 시도합니다. 이게 푸른 나무입니다. 그래도 공정한 재판을 하려고 하는 정부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른 나무는 그때는 적그리스도가 통치자입니다. 그는 법 같은 거 무시합니다. 그는 완전 독재자입니다. 그리고 그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사람이다." 아주 악의 화신입니다. 그가 3년 반 동안 거짓 평화를 넣어가지고 유대인들하고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3년 반 후에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666이죠. 완전히 거래를 못하게 하고 이렇게 하는 어마어마하게 악한 통치를 하는 억압적인 통치를 하는 그 정부를 '마른 나무'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때가 되면, 환란 때가 되면 이와 같은 주님이 받으시는, 이와 같은 십자가 형벌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환란을 유대인들이 받을 것을 주님께서, 그 악한 정권 밑에서 최소한의 정의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아주 그냥 끔찍하게 죽이기로 목표로 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이 그의 소원인, 이런 정부 밑에서 너희들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를 거절한 결과이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 그다음에 계속 누가복음 나온 부분 살펴보겠습니다. 9번째 질문인데요.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눅 22:14).
"누가복음 22장 14절에서 제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사도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며 성경에 표현된 사도와 제자의 차이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사도행전 22장 14절은 이제 사도라고 돼 있고요. 이 대목은 지금 어떤 장면이냐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 가롯 유다를 포함해서 열두 제자, 나중에 가룟 유다는 나가게 되는데요. 이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잡수십니다. 이게 이제 최후의 만찬이라고 그러나요. 세상에서, 하여간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명의 제자들과 하십니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그다음에 만찬을 제정하십니다. 만찬을 제정하실 때 가룟 유다는 빠집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에 가룟 유다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만찬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빠집니다 그 사이에 가룟 유다가 이제 나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유월절을 잡수시고 그다음에 만찬을 제정하시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누가복음 22장은 사도라고 표현돼 있다라고 이렇게 질문하셨는데요.
마태복음하고 마가복음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제가 보니까 마태복음은 26장에 나와 있습니다. 잠깐 마태복음 보시죠.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마 26:20).
'제자'라고 번역이 돼 있기 때문에 왜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라고 돼 있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셨거든요. 그다음에 마가복음 14장,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막 14:17).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주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이게 대체적인 건데, 대체적으로 이제 인정하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형제님이 계시기 때문에 저희가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목요일 저녁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이제 십자가를 앞두고 한 10시간 전에, 아침 못 박히시니까, 10시간 전에 제자들과 이렇게 모여 있는데 이 표현을 누가 복음은 '사도'라고 돼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열두 제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다음에 여기 마가복음은 '열둘'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왜 이렇게 됐느냐 이렇게 하는 건데요.
이런 걸 따지실 때는 조금 표현이 좀 그런데요. 우리나라 성경으로 따지면 안 됩니다. 이건 우리나라 성경으로 번역을 그렇게 해놓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걸 보려면 할 수 없이 '킹 제임스'를 보든지 아니면 '원어'를 보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어를 어떻게 아냐? 저희들 원어 모르죠. 원어 보는데, 지금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어플을 보면 제가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 영어는 약간 아셔야 합니다. 원어가 다 뜨죠. 예를 들면 이게 이제 헬라어니까 일단 원어로 뭐다 이렇게 나오죠. 그런데 그다음에 이것을 딱 찍으면 한글로는 안 나오는데 영어로는 나옵니다. 영어로는 이게 무슨 뜻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 대목을 보면 마태복음에서 열두 제자라고 돼 있는데,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원어에는 제자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이제 누가는 사도라고 돼 있고, 그래서 사도하고 제자하고 표현이 다르지 않느냐? 왜 여기서는 사도라고 표현되어 있고 여기서는 제자라고 표현되냐? 이렇게 이제 우리나라 말로는 대조될 수 있는데 이제 이건 우리나라가 성경을 그렇게 번역했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에는 저희들이 성경 번역이 개혁한글이 있고 물론 개혁개정은 거의 똑같습니다마는 한글 킹제임스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이 한글 킹제임스를 보면 번역을 이렇게 달리 해놓은 것일 수 있는 거죠. 제가 안 찾아봤습니다마는 그래서 이제 한글 킹제임스 같은 것도 이것도 아마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그거는 참조해 보시고 그리고 다시 원어 언어를 볼 수 있는 곳에 가셔서 보면 그냥 '열둘' 그다음에 '사도'라고 돼 있습니다.
그럼 열둘이라고 돼 있는 건 맞는데 왜 사도라고 누가 복음서에서 표현했느냐? 이건 이제 생각할 수 있죠. 마태, 마가는 열둘 이라고, 12 이라고만 돼 있는데 왜 누가는 사도라고 표현했느냐? 이렇게 질문을 바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누가는 특별히 사도라고 했을 때는 저희들이 이제 교회에서 이렇게 돼 있죠.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토대를 쌓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기초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유월절을 끝내고, 이제 유월절은 다시 없습니다. 만약에 이 시대에도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고 한다면 주님이 마지막으로 6월절을 끝내버리신 것입니다. 이건 안 받아들인 거죠. 지금도 가끔 어디 있죠? 하나님의 교회인가, 유월절을 지키셨습니까? 이거 성경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것입니다.
주님이 유월절은 모세가 출애굽할 때 처음 제정됐었고 그다음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끝내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지 않겠다" 하신 것입니다. 끝난 거고요 그리고 만찬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 이 장면의 유월절을 마치고 만찬을 열고 있는 이 장면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그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주님의 이와 같은 주님과 함께 있었던 것을 교회에게 전하고, 그래서 구약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 교회 시대와 은혜의 시대와 성령 시대가 열리는 것을 가르쳐야 되는 사도들이기 때문에 누가는 특별히 보충적인 언어를 추가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도와 제자의 차이는 분명하죠. 사도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죠. 예수님이 세상에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는 예수님을 대표합니다. 사도를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정체성이죠.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 이게 사도고 제자는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 그다음에 7번째 질문인데요. "교회와 이스라엘의 상급의 차이점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은, 보통 이제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이해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성취하셨다, 라고 하는 이렇게 약속과 성취 쪽으로 성경을 큰 흐름을 따라 이해하는 게 있습니다. 이걸 '언약신학'이라고 합니다. 언약과 관련돼서 이해하는 게 하나가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저희들이 믿고 있는 것은 '세대주의'라고 부릅니다. 7개의 세대를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다르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이게 이제 핵심적인 거죠. 그다음에 이제 노아 시대가 오고 그다음에 이제 율법 시대가 오는 거죠. 율법 시대는 이스라엘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이제 다른 거죠. 그리고 이제 저희들이 갖고 있는 것은 은혜의 시대인데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대조를 율법 시대와 지금 십자가 이후의 은혜의 시대가 두 개가 다르죠. 율법은 행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게 율법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에 갇혀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살 것입니다. 지켜서 살 사람이 한 명도 없죠. 그래서 이제 신약시대에 와가지고 다시 풀어낸 거죠. 율법을 주신 목적은 순종해서 구원받으라는 의도가 아니고 이게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기 위해서다, 이렇게 된 거죠. 저희들은 이렇게 합니다. 행하라. 그래서 순종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가 아니고, 내가 생명을 주었으니 행하라. 우리는 구원받고 순종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순종 못 합니다.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오면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십계명과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킬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준 것입니다. 교회에게 준 것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새로운 계명, 그런데 이 새 계명이 옛 계명하고 똑같습니다. 옛 개명은 뭐냐하면 십계명은 둘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이걸 다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제 서로 사랑하라로 온 거죠. 그런데 이 서로 사랑하는 이 새 계명이 옛 계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여간 이제 저희들이 주님에게 받은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게 우리가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구약하고 뭐가 다르냐 그러면,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이렇게 돼 있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으니" 우리 안에 십자가로 십자가를 믿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과 교회는 매우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 생겼냐? 아브라함을 부를 때 창세기 12장에 생깁니다. 창세기 11장까지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12장에서 생기고요. 다시 말하면 세상에 여러 민족이 있는데 이제 노아, 세 아들로 민족들이 야벳, 함, 샘, 이렇게 막 흩어가죠. 그중에서 물론 샘 후손이기는 한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는 그전에 상당히 많은 민족들이 형성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민족 가운데서 늦게 형성됩니다. 왜 그러냐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른 이유는 이것입니다. 많은 민족들이 생겨가지고 이제 이렇게 각 나라를 이루면서 바벨론, 여기저기서 아마 최초로 문명을 이룬 것이 이제 유브라데스 강이니까 아마 그쪽에서 이제 앗수르, 바벨론, 이런 족속들이 쭉 민족들이 나왔고요. 그다음에 이제 애굽에서는 또 애굽 민족들이 생기고 막 이렇게 했었죠. 그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른 이유는,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가지고 이 지식을 그들에게 줍니다. 한 하나님이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집어넣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세상에 존재하느냐? 여러 민족이 많은데 이스라엘이 독특하게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그들은 이걸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다. 모든 다른 민족은 자기들 나름대로 신이 있습니다. 바벨론은 바벨론 신, 우리는 뭐 단군, 그래서 곰이 됐다나요. 마늘 먹고, 뭐 하여간 별 소리를 다 하죠.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별소리를 하죠. 이 많은 신화와 이렇게 여러 이론 가운데 또 과학자들은 뭐죠? 빅뱅이니, 별소리를 하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딱 계시를 해준 것입니다. 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이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이스라엘이 만약에 이걸 잃어버리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 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팔아버립니다. 바벨론으로 팔아버립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하고 똑같습니다. 그래, 한 하나님 아니야. 맞아 바알도 신이고 뭐도 신이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망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이제 부르신 목적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한 독특한 민족을 이 땅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모든 다른 민족에게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하나님이 계신다. 나머지 전부는 가짜다.
그래서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미워합니다. 이거 봐라. 자기만 옳다는 거야? 아니 왜 상대적으로 다 인정하고 서로 그래야지. 얘네들은 진짜 고집 세네? 독단적이네. 편협적이네, 라고 하는 인상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맨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서 온 민족이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려고 오는 거죠. 그때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스라엘을 옹호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이게 이제 인류 역사인 거죠.
그리고 교회는 언제 생기냐? 잠깐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한번 보시죠.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세우다"라고 하는 동사가 미래형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교회는 안 세워집니다. 교회는 언제 세워지냐?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잘 보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주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는 안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는 또 이런 표현이 있죠.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엡 2:11).
하나님이 인류를 나누실 때 우리는 인류를 셋으로 나누죠. 우리는 보통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이렇게 셋으로 나누죠. 이건 이제 우리 구분이고 성경은 인류를 셋으로 나눕니다. 이스라엘, 이스라엘 아니면 전부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둘로 나눕니다.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 아닌 민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있고 하나님께 멀리 있는 민족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개 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 십자가 이후에 하나가 더 생깁니다. 유대인, 이방인, 또 하나님의 교회, 셋으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민족적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 있는 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유대인이 예수님 십자가를 믿어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유대인 아닙니다. 이방인이, 우리가 이방인이죠. 이방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어서 구원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입니다. 이렇게 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교회는 민족적 차이 없이,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아주 감동되는 것이 사도행전 11장인가요? 안디옥 교회를 보면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누구 누구가 들어가냐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유대인들이 낍니다. 그런데 또 누구죠? 구레네 사람이 또 들어갑니다. 흑인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구성을 보면 민족하고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죄 용서를 경험한,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서 모이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과 교회는 기원이 다르고, 그다음에 이제 여기서 질문한 것은 이제 상급이 뭐냐고 그랬는데, 우리는 이렇게 돼 있죠. 빌립보서 3장에서가 이렇게 돼 있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렇게 돼 있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늘 백성입니다. 이 땅 백성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축복은 이 땅에서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천년 왕국에서 주님이 왕이 되시고 천년 왕국을 통치하실 때 천년 왕국의 수도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한테 "우리도 좀 메시아 만나게 해달라." 이렇게 하는 이스라엘이 가장 축복받은 나라, 가장 존경받는 나라, 이제 될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에 관한 복이고요. 이게 이제 신명기 28장 같은 데 이렇게 예언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교회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축복이 아니고,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이제 이해하는 거 이렇게 보겠습니다. 구원받으면 세상에서 평안하게 잘 사느냐? 상관없는 거죠. 영적으로는 굉장히 하늘에 속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이미 앉히운 바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고난당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이 땅에서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잘 되냐 못 되냐는 교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운데 어떤 분은 이 세상을 평안하게 또 이렇게 잘 사는 분도 있고 교회 성도인데 지지리도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관이 없는 거죠. 이건 세상에 있는 것과 무관하게 하늘에 속한 복을 얻은 것이 교회고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그래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이 땅에서 뭔가 잘 되고 아브라함도 부자지요. 이삭도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야곱도 나중에 보면 다 뺏기고 맙니다마는 뭐죠? 저기 양 어마어마하게 다 가지고 오죠. 그래가지고 이제 라반하고 막 해가지고 양 많이, 원래는 자기는 양 한 마리도 없었는데 라반 밑에서 막 일하다가 양 어마어마한 때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가지고 누구한테 다 갖다 바치죠? 에서한테 선물로 다 갖다 바칩니다. 다 뺏깁니다. 에서가 안 받기는 했지만, 하여간 이스라엘 쪽은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들이 이제 되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면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와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랬더니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셔 "네 재산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쫓아라." 그러니까 부자가 못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놀랍니다. 이유가 뭐냐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부자는 구원받기 힘들지. 교만하고 또 부자 되는데 그게 쉽겠어? 다 인간적인 세상적인 수법 써서 그런 사람을 구원받기 힘들지. 우리는 생각하는데 거기서는 논란이 되는 게 이스라엘의 경우에 부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이 복 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복 주셨는데 천국에 못 간다? 이게 이제 굉장한 거죠. 주님의 말씀이 굉장히 이제 그들에게는 생소하게 보이는 거죠. 그런 면에서,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축복은 천년 왕국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 유브라데스 강에서 나일강까지, 이게 다 이스라엘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한 번도 그 땅을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드디어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 중에 가장 뛰어난 민족, 존경받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상급이고요.
교회의 상급은 하늘에서 이제 우리는 이제 상급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천년 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이렇게 돼 있죠. 주님의 보좌에 앉아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백성이고 교회는 통치자입니다. 왕입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우리는 왕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두 개가 다르죠. 이걸 가지고 교회가 더 훌륭하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자랑할 수 없는 거죠.
그렇게 돼 있고요. 그래서 교회에게 책임이 더 있습니다. 어떤 책임이 있냐면, 그러면 통치자가 되려면, 백성이 되는 건 쉽죠. 통치자가 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게 이거죠. 솔로몬이 왕이 됐는데, 누가 와서 물어봅니다. 여자 두 명이 와서 아니 같이 애를 낳아가지고 같은 방에 있었는데 애 한 명이 죽었는데 서로 이제 살아있는 애가 자기 애라고 하는 거죠. 솔로몬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로몬이 지혜롭게 하는 거죠. "아, 자꾸 이렇게 엄마가 둘이니까 할 수 없다. 쪼개자. 둘로 쪼개자." 그랬더니 한 여자가 "그래요, 쪼갭시다." 한 여자가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십시요." "이 여자가 어머니다."죠. 그러니까 그 사건을 잘 마무리 하는 게 아니고 솔로몬 이걸 압니다.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자기가 손해 볼 지 정, 자녀를 위하는 존재다라는 걸 아는 거죠. 그리고 그와 같은 테스트를 하는 거죠. 이게 솔로몬의 지혜인 거죠. 이런 지혜를 우리들이 이 땅을 살면서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우리들이 가정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학교 생활도 하고 막 하죠. 이런 가운데 영적인 지혜를 습득하도록 하나님이 환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다니면서 잘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급우들하고, 동료 학생들하고 막 지내면서 이렇게 복잡한 인간관계, 그 가운데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 그중에서 뭐가 정말로 핵심적인가를 잘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을 잘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직장을 보내고 막 이런 사회 속에서 살게 하신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속에서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찰력을 실제로 직장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원칙, 이런 것들을 실제로 현실에서 사용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을 입증하고, 확신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통치해야 합니다. 열 고을 권세도 있고 일곱 고을 권세도 있는데요.
그래서 교회의 상급은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땅에서 영적으로 성장해서 그 성장 정도에 합당한 통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변경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원은 계속 같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성경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거죠. 이게 이제 교회의 상급입니다.
* 그다음에 한 가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나이가 몇 살이었나요?"
모르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죠. 그런데 하여간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그다음에 누구 소식이 들리냐면 리브가 소식이 들립니다. 그리고 23장, 24장에서 이삭이 결혼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성경 공부할 때 원칙 중에 하나가 맨 먼저 언급된 원칙, 첫 언급의 법칙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면 그 문맥이 그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곳이 창세기 2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쓰였습니다. 그래서 사랑, 그러면 우리 시대의 개념은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맨날 유행가에 나오고 온갖 드라마 주제가 남녀 간의 사랑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셨죠? 십자가에 보내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사랑에 관한 것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언급이 뭐냐 하면,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더라" 제가 이제 이 대목 설명할 때마다 청년 형제들이 "좀 이상해요." 내가 항상 그러죠. "아내를 삼고 사랑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로 삼는 게 아니다. 누가 마음대로 사랑하라 그러더냐? 아내를 삼고 아내를 사랑하는 거다." "이상해요. 사랑하고 아내 하면 안 돼요?" 막 그런 질문을 하는데 하여간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내를 삼고 하나님이 주신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아내를 삼는 게 아니고, 하여간 그렇게, 두 번째 사랑은 뭐냐? 신랑과 신부의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게 이제 보통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인데요.
그러면 이제 창세기 22장에 그러니까, 결혼을 몇 세에 하냐면 이삭이 40세에 합니다. 그러면 40세보다는 밑이죠. 그래서 이제 예를 들면 30세? 이때쯤 들었을까? 이렇게 하는데요. 이런 질문 나오면 저도 모르죠. 그런데 이제 저는 뭘 가지고 있냐면,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고 이런 질문에 대해서 찾아보고 대답하려고 했던 시도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런 거 나오면 어디를 보냐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 중에 하나가 '뉴베리'라고 하는 형제님이 계십니다. 굉장히 이제 원어 연구하신 형제님인데, 그러니까 모임에서 배출한 형제님들 가운데 우리는 헬라어 이런 게 막 어렵잖아요. 서양 언어니까, 우리는 일본어 중국어 같으면 좀 하겠는데, 그런데 이제 모임 형제님들 가운데 이렇게 언어에 아주 독특한 재능이 있는 형제님들이 좀 배출이 됐습니다. 첫 번째로 배출된 분이 다비입니다. 이 다비라고 하는 분이 저희들하고 약간 분별은 다르지만 그분이 언어적인 천재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독일어 성경 번역하고 불어 성경 번역하고 막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다비 성경'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이것도 저희들이 무료로 어플을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배출한 사람이 바인이라고 하는 형제님하고, 바인 형제님께서 이제 성경 사전이 있는 거죠. 그리고 뉴베리라고 하는 분이 아주 언어에 정통합니다. 그런데 원어를 따라서 성경 번역을 안 하고 킹 제임스를 놓고 자기가 이해한 원어를 이렇게 보충으로 이렇게 넣었습니다. 이게 뉴베리 성경인데요. 구입하실 필요 없습니다. 요즘에는, 저에게 오시면 제가 pdf 파일로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지기도 했고, 이게 사실 이제 저작권이 약간 문제가 1800년대 산 분이니까 상관없는데요. 이제 그분은 이 뉴베리 이 형제님이 뭘 해놓으셨냐면 이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막 구약 성경 있잖아요. 각 장마다 이 장은 BC 몇 년도에 일어난 사건이다, 를 형제님이 적어놨어요. 어떻게 아셨는지까지는 저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 형제님이 창세기 1장, 그러면 BC 몇 년, 2장 몇 년 이렇게 쭉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런 문제는 간단해요. 창세기 22장 가면 그 형님이 BC 몇 년, 해놨거든요. 그러면 다시 이제 가는 거죠. 창세기 21장 딱 가면 이삭이 태어난 장이거든요. 그럼 21장은 몇 년도인가 찍었는가 보고 22장 몇 년도가 보면 금방 나옵니다. 그리고 요세푸스라고 하는 사람이 이제 이런 우리들이 궁금한 것에 대해서 막 적어놨어요. 이건 꼭 믿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아마 이제 이게 세상 역사학자들, 그리고 믿지 않은 유대인들, 그래서 유대인 역사에 대해서 쭉 구체적으로 쓴 건데요. 그분이 썼던 것하고 거의 일치합니다. 창세기 22장은 이 사이 25살로 봅니다. 25살 때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보는 건 이거죠. 25살이면 아브라함 나이는 어떻게 되죠? 125세죠. 100세에 나았으니까, 스물다섯 살 아들이 125세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저희들이 늘 말하는 거죠. 이상이 죽고 싶지 않으면 반항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묶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순순히 묶이는 거예요. 그게 이제 놀라운 그림이죠. 주님께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런 장면.
그리고 잠깐 다른 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여러 그림이 있는데 첫 번째는 가죽옷을 입힙니다. 무화가 나무잎으로 안 돼요. 사람이 만든 거 안 되고 하나님이 가죽 옷을 입히시죠. 이제 죄가 있으면 죄를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하는 거죠. 두 번째는 아벨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이제 가죽옷은 죄를 죄를 덮어버리는 그 죄를 묻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이제 가죽옷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이제 아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입니다. 화염검, 쫓겨났거든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데 다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는 제사가 아베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 하나님께 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죄만 용서받은 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가야 되죠. 이제 하나님하고 교제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게 아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고 그다음에 노아의 번제가 있습니다. 노아가 제사를 지낼 때는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이게 이제 노아의 번제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창세기 22장입니다. 여기서는 이제 점점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자세히 계시하시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여기 22장에서 그 질문이 나오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나오는 거죠. 창세기 22장에서 "아버지 나머지는 다 있는데 제사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죠.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리라." 하나님이 직접 그 양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1장 29절이죠. "보라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이다." 이게 이제 침례요한이 말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주님의 십자가, 이삭이 죽어야 되는데 대신 양이 죽죠.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고 부활이 그림자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종적인 하나님 토대가 된다. 이게 이제 창세기 22장의 주제로 볼 수 있습니다.
* 그다음에 남은 시간에까지 "말씀 모임 안에서 생길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을 어떻게 하면 방지할 수 있는지" 이런 건데요.
잠깐 고린도 전서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나,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길 때나, 저희들이 굉장히 조심하는 것은 영적이어야 된다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제 우리가 주님을 섬기죠. 구원받은 후에 이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섬긴 것이 금은 보석이냐, 나무, 풀, 짚이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주님을 열심히 섬겼는데 다 타버립니다. 금,은,보석으로 섬겨야 돼요. 그럼 금,은, 보석은 뭐냐? 이제 그리고 성경에 이런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40살까지 애굽에 있는 학술을 다 배웁니다. 그래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할 생각을 합니다. 모세가 굉장하죠. 왜냐하면 모세는 왕궁에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삽니다. 그가 바로가 되기를 원하지만 않으면 그는 2인자로서 자기 평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생각을 합니다. 그때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 편을 들려고 합니다. 이상하죠.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기꺼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공주의 아들이었거든요. 그걸 버리고 세상은 온갖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노예된 이스라엘 편에 섭니다. 굉장하죠. 그리고 40세까지 그가 애굽의 모든 학술과 지식을 공부는 저 혼자 다 했어요. 그런데 그 결과 어떤 결과가 나왔냐? 애굽인을 죽인 살인자가 됩니다.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도망가가지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또 보냅니다. 그래가지고 이제는 뭐 옛날에 뭐 한 거 다 잊어먹고 이제 양치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러고 있는데 80세에 하나님이 부릅니다. "내가 너를 사용해서 출애굽을 시킬 테니까 가라. 애굽으로 돌아가라. 내 백성을 인도해라." 그랬더니 모세가 뭐라고 그랬죠?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요. 전 못 합니다. 전 입술이 둔하여 말할 줄을 모릅니다." 공부는 지가 혼자 다 해놓고 말할 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예요? 그런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 씁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잘 배워가지고 내가 이걸 이용해가지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겠습니다. 안 씁니다. 40세 때에 안 씁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여러 가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또 모임 안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지혜로 하면 안 됩니다. 일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가면 다 타버릴 것입니다.
제가 이제 최근에 외국에서 한국 성도님인데 외국에 계시다가 이제 오랜만에 한국에 오신 분하고 교제를 했는데, 캐나다에 어떤 형제님이 계십니다. 구원받고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셔가지고 아주 백만장자가 된 분이 계세요. 제가 한번 가봤더니 bmw 타고 다니더라고요. 이제 bmw를, 제가 그때 한 20년 전에 bmw를 보니까 이게 주유소에 딱 가면 기름이 종류가 다른 기름을 넣어야 돼요. 최고급 기름을 넣어야 돼요. 그리고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이거 조금 이렇게 가면 기름을 어마어마하게 쓴대요. 성공한 분이 계세요. 이분이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모임 형제님이시죠. 주님을 위해서, 그래서 자기가 가진 돈, 시간, 이런 것들을 구도자들에게 쓰고 또 그다음에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쓸 뿐만 아니라 성도들 좋은 데 가서 사주기도 하고, 또 어디 호텔 하나 빌려가지고 성도님들 같이 수양회 할 때 그냥 거액을 투자하고 이렇게 하셨어요. 그래서 좋다. 나도 저런 형제는 옆에 있으면 좋겠네. 이제 그래가지고 이제 그분 열매들이 있어요. 모임에, 그분이 복음 전해서, 이제 어려우면 그분이 자기 회사에 취직시켜주는 거예요. 어떤 성도님이 또 실직을 하고 그러면 또 해주고 그래서 그 사랑에 감동받고, 그래서 이렇게 한 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을 이제 주님이 일찍 데려가셨어요. 간암에 걸려서, 그리고 나서 이제 이 가정이 이제 계속 그 모임에 있었으니까 아는 거예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그분이 더 이상 도와주지 않는 거죠. 그러면 그분을 통해서 모임에 들어왔거나 이렇게 한 분들이 남아 있어야죠. 이분 간증이에요. 이게 꼭 맞는지 저는 이제 모르지만, 이분 간증이 이거예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임에, 단 한 명도.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제 물론 하나님은 또 달리 보실지 모르겠어요. 저희들이 이제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거예요. 그렇게 섬긴 게 그럼 맞았나? 물론 잘한 거죠. 선을 베풀고 이렇게 한 거, 그걸 비난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영적으로 섬겨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모임 안에서 섬길 때도 정말 영적이어야 된다.
그래서 이제 제가 몇 가지, 그리고 이제 모세뿐만이 아니고, 제가 이제 몇 가지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은 젊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옵니다. 다른 거 막 할 수 있는데 예루살렘에 옵니다. 그리고 최고의 교사 가말리엘 밑에서 배웁니다. 그래가지고 사도 바울이 뭘 했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 참 이상하죠. 아니 하나님을 하나님께 열심히 있고,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내가 흠이 없다." 그가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그 대목을 읽으면 저는 진짜 너무하다. 아니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 믿으면 안 되는데 믿는다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을 돌이키기 위해서 혹은 벌 주기 위해서 뭘 하죠. 그런데 남자 여자는 좋아요. 노소는 좀 곤란하지 않냐. 이제 다 늙은 사람 좀... 그리고 늙은 사람까지 이해해요. 어린아이까지 그럴 필요 있나? 싶은 일을 사도 바울이 합니다. 그 지식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제가 이런 이야기 많이 하는데요.
우리가 만약에 우리 가운데 누군가를 대통령을 만들고 싶으면 경력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은 혹시라도 아들 낳으면 군대 꼭 보내고 이거 잘못하면 대통령 안 되거든요. 그다음에 주민등록 옮기지 말고 어디 이상한데로, 이거 다 신문에 나오거든요. 누구한테 돈 빌리지 말고, 대통령 될 거니까, 이렇게 할 거예요.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죠. 하나님이 자기가 사용하는 사람들을 경력 관리를 합니다. 근데 모세 위대한 구약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경력 관리를 하나님이 이상하게, 살인자를 만드세요. 하나님이 쓰실 거예요. 신약에서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경력을 둡니다. 베드로, 수재자죠.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실까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몇 가지 말씀드리면 저는 세상 지혜를 쓰는 영역을 보통 한 여러 개가 있지만, 한 3개 첫 번째, 창조 과학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죠. 그런데 사람들이 뭐 하나님이 만들었냐, 그러고 과학자들이 막 부인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 중에 성경을 믿는 과학자들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이 과학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입증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조과학 좋아하고 제가 좋아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김명현이라고 하는 분, 유튜브 가끔 보는데요. 아주 설득력 있고 좋습니다. 그런데 모임에서 그와 같이 복음 전할 때 창조과학 안 씁니다. 모임에서 안 씁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냐? 성경을 딱 대고 성경을 잘 풉니다. 이 단어는 무슨 뜻이고 이 문맥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들 책임입니다. 우리는 왕의 교지를, 왕의 선언문을 읽어드립니다. 나머지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가 구원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를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돼 있는데 믿어야지." 이렇게 안 합니다. 설득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특히 안 합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했던 것입니다. 미련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제가 이제 반대하는 것은 의료 선교, 이런 거 딱 반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요. 그리고 믿으세요. 합니다. 아니요. 저희들은 복음 전할 때 어떤 이해관계로도 호소 안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좋은 것처럼, 예수 믿으면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이게 나한테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되거나 그래서 결정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가끔 옛날에 전도수련회 이런 거 할 때 보면 지역을 나눠줘가지고 막 전도해라, 그러면 전도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되냐면요. 제가 이제 아주 인간적인 방법을 알아냈어요. 전도지를 가지고 어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주는 거예요. 그리고 전도지를 줘요. 그러면 다 받습니다. 손님인데 이것도 사주고 그러면서 좋은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예수님 믿으시면 어때요? 나쁜 방법입니다. 의료 선교, 그다음에 이제 그래서 이제 저희들도 한번 그런 생각을 했지요. 마포 모임에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면 어떨까요? 토요일마다 영어, 수학, 무료로 가르쳐준다. 이제 지금 과외 공부 하고요. 그리고 영어, 수학, 가르쳐준 다음에 30분만 복음을 전한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게 나쁜 겁니다.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왜냐하면 제 개인적인 간증이거든요. 제가 이제 예수님을 믿었어요. 믿고 나서 제가 이런 회의가 들었습니다. 내가 그때 굉장히 죄의식에 시달렸고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고 근데 내 친구가 나한테 교회에 가자 그랬고, 성경을 줬고, 그래서 믿은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가 만약에 그 고민이 있을 때 내 친구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에 열심인 친구가 있었더라면 내가 지금쯤 어디 저기 해인사 이런 데 들어가서 방장 쯤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만약에 누군가가 저를 잘 설득해서 "봐라,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성경 봐봐 예수님이 이런 분이야." 그리고 뭐 요즘에 많이 그런 거 있죠. 방주는 지금 터키 어디 있답니다. 또 뭐죠? 뭐 이런 어떤 과학적으로 입증된 걸 가지고 예수님 시신을 쌓던 것도 있대요. 그래가지고 잘 저를 설득했어요. 그래서 제가 믿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보다 더 설득력 있는 사람이 나한테 와가지고 안 믿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하면 넘어갈 거 아니에요. 그래서 믿음이 사람 의지에 있지 아니하고 그 사람이 나한테 잘 설명해 주니까, 이게 맞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게 이런 의미가 있구만. 예수님이 하나님이 맞네. 하고 믿은 게 아니고 내 구원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께서 성경을 사용하셔서 내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도록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세상 지혜와 이런 것들을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은 것만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가야 합니다. 만약에 저희들이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도 있고 그래서 이제 그 친구들을 복음으로 구원으로 받게 하고 또 모임 안에서 잘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만약에 인간적인 관계를 사용한다면 겉으로 보기에 효과적일 수 있지만 타버린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근거해서 영적인 방법으로만 승부해야 된다.
그래서 이제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떤 비난을 듣냐면 "되게 까다롭네. 그래 잘났다. 그래 너만 상 받아라." 이런 소리 듣죠. 그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그날 가봐야 아는 게 아니고 구원은 지금 아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상급도 지금 아는 겁니다. 그때 가보니까 그때 계산되는 거 아닙니다. 지금 말씀에 의해서 이 말씀에 따라 순종했을 때 주님이 틀림없이 약속대로 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성경에 대한 확신은 없고, 그래서 저는 이제 인간적인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성경에서 제일 위험합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아이디어 많이 내는 사람,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근데 모임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일 인기가 많아요. "이러면 좋겠네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 생각은 사람 생각과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인간적으로 이러면 좋겠네라고 하면 딱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서 주님의 기이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 뭘로 보내세요? 로마 황제로 보내도 부족한 겁니다. 낮아지고 낮아진 겁니다. 그런데 목수로 보내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하는 나사렛에서 사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죽게 하십니다. 하나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자기 아들인데, 사랑하시는 분인데, 이 하나님의 지혜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섰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세상 지혜와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경을 진리로 이렇게 받아들여 놓고 또다시 주님을 섬기는 것은 또 이제 인간적인 것들을 쓰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정말로 저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인간의 관계를 맺고 이런 게 부득이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야 된다. 영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된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된다. 이게 이제 저희들이 계속 추구하고 있는 길이고, 이게 좁은 길이고, 이게 오해받는 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길이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선히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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