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0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교회 19_찬송(2) >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0-3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출애굽기, 홍해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보여 드렸습니다.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3절에서 "새노래" 찬송에 관한 시편기자, 다윗의 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 26:26-30).
여기 예수님과 열한사도들이 찬미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찬양에 대한 세번째 언급입니다. 네번째 성경구절을 보겠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3-25).
여기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성경 구절인데요.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 5:8-10).
이 대목은 하늘에서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들과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가지를 찾았는데요. 우선 지난 시간에 했던것을 다시 복습해 보고 오늘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찬송하신다고 하는 표현이, 저희들은 찬양하면, 성경 찬송가가 늘 교회에 있었고 찬송가를 보고 찬양을 한다고 늘 생각했는데, 다시한번 찬양에 대해서 성경적인 것을 찾아보면 하나님이 찬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찬송이 첫번째로 나온곳이 저희들이 기억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찬송하신다.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찬송 하시는 곳이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는 것이 네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노래 합니다. 여호와의 종의 노래 마지막이 이사야서 53장입니다. 저희들이 잘 알고 있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했던 이 부분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노래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찬양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찬송에 동참하는자가 되었다. 함께 주님을 노래할수 있게 되었다. 주님의 아름다움, 주님의 고난, 주님의 은혜, 주님의 부활, 이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이 노래하시고, 찬양하시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찬송에 함께 동참한다. 이것이 찬양이다. 그래서 찬양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찬송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찬송하시는 이유는 기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생각할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주님을 볼때,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주님에 대해서 노래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찬양을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하나님 아버지의 찬양이 주님에 대한 노래, 주님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 여호와의 종 네개의 노래가 있고요. 그 다음 두번째,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노래중에 슬픈 노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노래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나오고, "이스라엘에게 내가 무엇을 더할수 있었으랴, 이 백성이 왜 이렇게 반역하는고" 하는 슬픈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5장에 있었고, 그런데 하나님의 이 노래가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스바냐서에 가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된 이스라엘,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을 인하여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못하셔서 부르는 노래, 이게 스바냐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찬양 하신다.
두번째, 두번째 우리 주님께서 노래 하십니다. 주님께서 노래하신다고 하는 대목은 읽어드린 마태복음 26장에서 유월절을 잡수시고 가룟유다를 내보내고 그 다음에 구원받은 열한사도와 함께 만찬을 제정하시고 그리고 다락방을 나오셔서 이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주님께서 열한사도와 함께 찬양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찬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저희가 지난번에 본 대로 히브리서 2장에서 주님께서 실제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때에 주님이 찬양을 인도하시고 우리가 그 찬양을 함께 따라 부르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찬양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찬양이 마태복음 26장과 히브리서 2장에 두번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찬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찬양에 동참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경우에, 이 교회시대에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충만을 받으라. 이렇게 했을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찬양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서 우리가 또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이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신약에서는 교회가 찬송을 했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찬송이 있습니다. 여러번 나오는데요. 제가 다섯개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다섯개의 이유로 찬양 합니다. 우리의 찬양의 주제 입니다. 우리가 찬양할때, 그 찬양의 내용이 많이 있습니만, 다섯개가 기본적인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다시 보시면 이스라엘이 찬송을 했는데요. 15장 1절을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그래서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올려드린 이유가 무엇이냐면,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해 주신 구원에 대해서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더 자세히 약간 더 말해 보겠습니다. 구원 중에서 어떤 구원이냐면, 1절에 보시면 "말과 그 탄자" 애굽 군대가 특별병거 육백승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종 삼으려고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하신 그 구원에 대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유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한 찬양입니다. 어떤 자유냐, 그것은 나중에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이제 우리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는 죄를 거절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는다해보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다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할수 있는 해방, 이 자유로움, 이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찬양이고요.
우선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신구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하는데 찬양의 내용을 보는데요. 찬양하는 장소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찬양하는 장소는 출애굽기 14장은 홍해 앞에서 입니다. 홍해라는 바닷가에서 그들이 찬양을 했고요. 두번째, 시편 40편은 약간 비유적입니다만 이렇게 보겠습니다. 어디서 찬송을 하냐면 반석 위에서 찬양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2).
그 다음에 세번째는 마태복음 26장, 아까 읽어드린 거죠. 주님께서 만찬을 제정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찬양하십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어디서 찬양했느냐 하면 십자가를 앞두고 찬양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곧, 체포되시고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앞두고 찬양하셨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사도행전 16장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 5장은 하늘에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개의 경우에 찬양을 드린 장소를 보면 해안가, 바위 위, 십자가 앞에, 감옥, 하늘 이 다섯곳에서 찬송합니다. 찬양할 만한 장소로는 좀 이상한 거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왜 기뻐하는지, 베드로전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리스도인은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의 기쁜 찬송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상한 곳에서, 특히 십자가를 앞두고, 감옥에서 어떻게 찬양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거기서 왜 찬양하느냐?
그 찬양의 내용을 보면 아까 출애굽기 15장에서는 홍해를 건너고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가 수장되었을때 자기를 더이상 추격해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해방감, 그 완전한 자유 앞에서 찬양을 하고 있고요. 두번째는 시편 40편인데요.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40편 2절을 보시면 " 반석위에 두사" 그렇게 했는데요. 그리고 3절에는 "찬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의 찬송은 반석 때문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바위 때문에, 그래서 두번째 찬송의 내용은 자기들이 받은 구원의 근거 때문에, 아까 자유라고 하는것은 구원이 주는 혜택입니다. 구원 때문에 누리는 것을 인하여 찬송을 했다면, 시편 40편은 그 구원의 근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입니다. 이것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근거때문에 두번째는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이 찬양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했습니다. 이 대목은 한번 저번에 제가 빌립보서 설명할때 한번 했는데요.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행 16:23).
사도바울이 채찍에 많이 맞습니다. 그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로마의 캄캄하고 습기찬 감옥에 갇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깊은 감옥" 그러니까 아마도, 지하 제일 먼쪽, 탈출이 불가능한 곳에 집어 넣고 "그 발을 찾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발을 우리로 치면 수갑 같은거죠. 발을 채우는거죠. 여기서 착고라고 하는 단어를, 저희들이 성경 공부할때 가장 기초적으로 보는것이 단어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착고라는 단어는 저희들이 잘 안쓰는 단어죠. 그래서 이런 단어를 찾아보고, 그리고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쓰였는가를 찾아보는것, 이것이 관주 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가, 하는것을 보는거죠. 그래서 성경공부의 가장 기본이 언어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착고라는 단어가 어디에 쓰였느냐면 주님께서 나무에 달려 친히 그 몸으로 저주를 받으셨다. 이 나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 입니다.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십자가라고 표현하지 않고 나무에 달렸다. 그러면 이것은 십자가 입니다. 그러듯이 이 착고도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이 원어가, 그래서 이 발을 나무로 만든 어떤 것으로 사도바울과 실라의 발을 어디에 묶어버린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는 거죠. 사도바울과 실라가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찬송할수 있었을까? 그들의 마음은 뭘까, 그들을 찬송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랬을때 그것을 접근해 가는 방법이 단어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무구나." 그래서 이렇게 추측해 가는것입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혀서 무엇을 묵상했느냐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체포되어서 맞고 갇혔지만 우리 주님이 겪으신 십자가는 비교할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십자가와 죽음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인간이지만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비난받을만한 어떤것도 찾을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이렇게 말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것을 묵상하다가 그 다음에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의 구원을 생각하면 바울의 구원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습니다. 언제 구원받느냐 하면 정오에 구원받습니다. 낮 열두시 해가 밝은 때입니다. 해보다 밝은 주님이 나타나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고 구원 받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구원과 대조해보면 이번에는 한밤중입니다. 밤 열두시입니다. 한 밤중에 사도바울이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해보다 더 밝게 구원하신 주님께서 그 어두운 밤중에 사도바울을 승리케 하십니다.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낮에 구원하시고 밤에 이기는 자로 만드시는 주님, 이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할수 있었던 이유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주님의 부활 이후의 승리를 묵상하면서 그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할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요한계시록 5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어린양이 계시고 그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직접 보좌에 안자 게십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 앞에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앞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9절 보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그때에 하나님 앞에, 주님앞에 새로운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는 내용이 뭐냐면 "책을 가지시고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주님만이 이 우주를 통치하실수 있는, 주님만이 하나님의 계획을, 인봉을 떼니까요. 두루마리 책이 펼쳐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주님만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님이 어떤분인가를 생각할때 찬송하는 거죠. 그리고 두번째, 주님께서 하신 일, "일찍 죽임을 당하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주님의 사역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는 거죠. 그래서 다시 보겠습니다.
신 구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다섯개 정도를 들수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자유를 인하여. 그리고 두번째, 그 구원의 근거 때문에.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창세전에,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의 근거를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세번째, 십자가인데요. 십자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잔을 돌리시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번째 이유는 '영원한 용서' 때문입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영원한 속죄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감옥에서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으면 모든일이 잘 되고가 아닙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어도 그가 하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주님의 승리를 생각하면서 그가 고난 속에서도 찬양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난 가운데 들어가도 찬송할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막을자가 없다. 이게 바울과 실라가 했던 찬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하늘에서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이제 우리가 지금은 믿음으로 보고 있지만 하늘에 올라가면 두 눈으로 우리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 분이 어린양이십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손과 발에, 십자가의 자국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은혜와 사랑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로 다섯가지의 내용으로 찬양한다. 주님이 주신 자유, 구원의 토대, 십자가의 영원한 용서, 그리고 어떤 고통도 어떤 어려움도 빼앗아 갈수없는 구원의 기쁨, 그리고 하늘에서 직접 주님을 보았을때의 그 찬송. 이렇게 이 다섯개의 내용으로 찬양한다. 이것이 지역모임의 다섯개의 찬양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잠깐 몇가지 조금 더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으로 다시 가셔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 드려 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출 14:30).
"구원하시매"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것을 보면, 첫번째 구원은 애굽에 있을때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첫번째 유월절이죠. 애굽에 있는 모든 초태생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양을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안에 있으면 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 무엇이냐? 유월절 구원은 어떤 측면을 설명해주냐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도 죄를 하나님이 묻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에서의 구원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입니다. 홍해에서의 구원은 애굽을 나와서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어는 애굽 군대가 다시 종 삼으려고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홍해에서의 구원은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구원을 셋으로 나눌때,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이것이 지옥심판을 면하는 구원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입니다. 두번째, 홍해의 구원은 죄가 더이상 우리를 지배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거절할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를 짓는것은 어쩔수 없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짓는것은 그가 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그는 죄를 안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거절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홍해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죄의 능력으로부터, 죄의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은 것, 그래서 그는 죄를 짓지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이것이 홍해에서의 구원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감사 드릴때, 이제 지옥가지 않는다뿐만 아니고, 이제 죄를 이길수 있다.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순종할수 있는자가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안가에서 있었던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인데요. 다시 종으로 돌아가지 않는,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능력, 이것이 찬양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바위 위에서 찬송을 했는데요. 이 바위는 구원의 토대 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것은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니까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 이후의 하나님이 고안이 아니고, 창세전에, 사람이 죄를 짓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이미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우리에게 달리지 않았다. 사람의 어떠한 것에 상관없는 구원.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으로만 얻어지는 구원, 이 부분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를 지고가는 구원에 대해서는 아까, 영원한 속죄,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온 세상,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생각했는데요.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 26:30).
이 찬미가 뭐 였느냐를 생각할때 보통 형제님들이 그렇게 봅니다. 그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날, 유월절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찬양이 뭐였느냐, 그것을 시편에서, 그리고 이 "찬미하고" 이부분이 시편을 노래하고 이 뜻입니다. 시편과 관련 됩니다. 그래서 그때의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불렀던 노래를 찾는 겁니다.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 이 시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하나님 앞에서 올렸던 찬송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이 찬송을 불렀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잘 몰랐겠지만 주님께서 이 찬송을 부르실때 어떤 감각을 가지고 어떤 내용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까, 이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시 113:4).
이것이 무엇과 관련되냐면 출애굽 사건 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십니다. 그 강력한 손으로 끌어내는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4절 보시면 이런 내용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애굽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하나님보다 높을수 없습니다. 당시 가장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하나님께서 치시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거기에서 끌어내시는 이런 내용을 가지고 계시는, 이런내용을 가지고 있는 시편 113편을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114편으로 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시 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다.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이것이 유월절과 관련되서 부르실수 있는 찬송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분이 주님이시죠. 그 다음에 115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115편은 영광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외에 어떤자도, 모세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사건이다. 이게 115편 1절 입니다. 그래서 113-118편까지가 유월절을, 그리고 영적으로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하는 이런 것들이 중첩이 되면서 드려지는 찬송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116편으로 가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2-13).
아까, 영광과 관련된 것이죠. 이제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겠습니까?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구원해주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거죠.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이때의 성도는 우리 주님 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의 죽음을 귀중히 보십니다. 이것보다 더 값진것은 없는거죠. 그래서 모든죄를 다 용서하고 남는 보배로운 피라 말할수 있는거죠. 물론, 주님말고 구원받은 성도가 또한 죽는것도 귀중히 보십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주님을 말할수 있겠습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찌어다"(시 117:1).
이제는 찬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이방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서 모든 민족이, 그가 언어가 어떻든지간에 모든 민족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찬양하게 될 것을 내다보는 찬송이 117편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118편을 보겠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이것은 베드로가 인용한거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수 있는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한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택하여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와 베드로가 인용한거죠. 그 다음에 2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시 118:27).
유월절에 양을 가지고 와서 제단뿔에 맵니다. 아직 제사드려지기 전에 이 양은 이제 드려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곧 죽여서 제단에 그 피를 뿌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모든것을 준비하고 마음을 각오하고 굳게 하시고 이제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113편부터 118편까지를 열한명의 사도와 함께 다락방을 나와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면서 부르는 찬송인 것입니다. 이 찬송을 열한사도들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모릅니다. 아마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다 도망가버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넘어지고 그런거죠.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 찬송을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시고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자 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출애굽, 진정한 어린양, 참된 유월절을 주님께서 실체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이제 주님께서 그렇게 가신거죠. 어째거나 우리는 주님께서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단번에 주어진 영원한 속죄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계속해서 그 찬송의 주제로 삼을수 있는 거죠.
다시 보겠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지역교회로 모여서 찬양을 드리는데 그 찬양의 주제가 여러개가 있지만 우선 다섯개를 쳐보면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그 자유를 찬양할수 있고요. 두번째, 그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들, 그 구원의 근거가 창세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영원전에 세우셨던 그 계획을 따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것을 저희들이 찬양하는 거고 그 다음에 실제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신 주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속죄, 그게 우리의 찬양의 근거이고. 그리고 또 하나 사도바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자꾸 인용했던대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이 우리의 기쁨을, 우리의 구원의 즐거움을 뺏어갈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가지만 그들이 찬양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진으로 감옥문을 여시고 그런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죄수들이 탈옥하지 않고 그래서 간수가 구원받고 그래서 오히려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셨지만 우리는 다르죠. 그렇지만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이 생기고 그들에게 우리가 온유하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수 있는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십니다. 우리도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주님처럼 변화되고 그리고 우리의 두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목격할 것입니다. 그때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우리가 찬양을 영원토록 드릴 것입니다. 그것이 지역교회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송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와같은 말씀들을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찬양을 불러 일으키고 지역모임이 함께 찬양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찬양하는 방법은 저희들이 지난시간에 다룬대로 하나님께서 찬송을 어떻게 하길 원하시느냐? 함께 부르길 원하십니다. 모두 함께, 그리고 또 하나는 찬양은 이해하면서, 그래서 찬송을 드리면서 그 찬송가 가사, 찬송의 내용이 이 다섯가지의 찬송의 내용이 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면서 그 내용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찬양하고" 하는 표현 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면서 부르는 것이지, 음악적인 감동이 아니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내용이 무엇이다 하는것을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이해하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밝히보고 찬양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저희들이 우리의 음성으로 모든 성도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음성으로, 악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음성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한다. 이것이 저희들이 그리스도의 지역교회의 찬양에 대해서 믿고 있는 바입니다.
그 다음에 몇가지 잠깐 점검을 해보면요, 악기 문제를 가지고 자꾸 문제가 되는데요. 일단 상식적으로 보면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1세기의 교회,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 빌립보, 고린도, 이런 교회들의 경우에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첫번째, 어떤 지역교회도 자체 건물을 가지고 모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초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굉장한 핍박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어떤 교회도 자체 건물을 가진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부보면 어느어느 집에서 모이는 교회 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문헌을 보면,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700년 이후에 비로소 악기 사용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교회는 악기를 쓴 적이 없습니다. 악기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쓸 형편도 안되고 그래서 저희들이 "아니 왜 요즘, 피아노도 있고 악기가 있는데 그것을 왜 안치느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상황에서 그렇게 보는거죠. 그러나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사도행전의 어떤 교회도 악기 없이 700년간 교회사에서 내려왔다고 보시고요. 그 다음에 어떤 분들이 이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 집회때는 악기를 쓰면 안되느냐?"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유명한 전도자가 DL.무디가 있었고 그분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생키라고 하는 분에게 찬송을 부르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그 찬송이 많은 구도자들의 마음을 열기도 하고 또 믿을 마음을 생기는데 기여했다,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그런것을 비판하고자 하는것은 아니고요.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믿습니다. 항상 저희들이 기본적으로 갖는 태도가 복음을 전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구원시킬수 있는 능력은 저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다. 많은 사람을 구원시킬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법에 있지않고 사람을 구원하는것은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다.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이고 약간 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서 우리가 복음집회를 책임있게 하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물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것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조작해서는 안된다. 감정을 흥분 시켜서, 혹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열어서, 그렇게 구원을 만들어내봐야, 이것이 다 어려움이 됩니다. 그래서 정말 순전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그의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고 주님께 합당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집회때도 저희들이 사람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만들수 있는 음악을 쓰는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이런 이야기를 하죠. 찬양을 부르려고 하면 하면 첫음을 잡아야 하잖아요? 아까도 첫음을 누군가가 잡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꾸하지 말고 첫음 잡으시는 분이 계속 잡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잘 안 잡히니까 피아노를 갖다놓고 첫음을 치면 음을 잘 잡을수 있지 않느냐? 그런 편의성 때문에 악기를 피아노 같은 경우에 쓰면 어떠냐 하는 건데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지역모임의 어떤 음을 리드할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고요. 아마 이 중에서 그래도 제일 나은분이 책임감을 가지고 누군가가 찬송을 부르면 첫음을 잡아주시면 좋습니다. 만약에 그런분이 없다. 그래서 첫음을 잡을때 첫음을 잡는것이 늘 문제가 되고 처음을 잘 못잡아놓으니까 나중에 더 올라갈때 힘들고, 또 밑으로 내려갈때 힘들고 그래서 찬송이 좀 어렵다고 하는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기억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읽으신다. 그래서 음악적으로 잘 훌륭하게 (물론 일부러 못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찬양을 드리는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방문한 모임 중에는 광진 모임이라고 있는데요. 거기는 실제로 성악을 전공한 형제님들이 계세요. 거기는 찬송을 부르면 바로 확 나옵니다. 바로 나올뿐만 아니라 성악을 전공하신 분은 화음을 넣습니다. 그러면 저는 좀 마음이 안하면 좋은데.. 그냥 똑같이 하면 좋은데, 음악적으로 잘 아시니까 그렇게 하죠. 그게 실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것을 비난할수는 없습니다만은 그러다보니까 어떤 연합집회할때 광진모임 성도님들이 오면 찬송 고를때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아무거나 골라도 다 나오지까, 그것이 나쁜것이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중요한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그 마음속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을 주님께서 보신다. 특별히 이 다섯가지의 내용을 주님께서 보신다. 그 다음에 모임에서는 쓰지 않더라도 가정에서 쓰는것은 어떠냐? 가능합니다. 저희들이 교회적인 집회가 아닌 곳에서 함께 찬양도 부르고 배우고 하는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역교회의 찬송에 대해서 하나님이 찬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찬양에 합류한다. 이것이 첫번째 개념이고요. 그 다음에 찬송의 내용은 주로 이와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찬송의 방법은 함께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지역교회의 찬송과 관련된 겁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찬송을 기뻐 받으실뿐만 아니라 자희들이 늘 찬송하는 성도가 되어서 저희 마음속에 어떤 경우에도 뺏기지 않는 이 영적인 기쁨, 구원의 즐거움, 이게 찬양으로 잘 표현되고 또 성도들간의 교제로, 또 모임에서 여러 섬김으로 나타나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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