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자, 삭개오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 > 2022년 9월 11일 일요일(요약) / 한재광 형제님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개역한글)
여기 또 하나의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고 키가 작은 삭개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제자들이 부모와 그 자신 중 누구의 죄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주님께 뭍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제적인 결함이 그 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삭개오는 어렸을때부터 그러한 죄인라는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러한 눈빛들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육체 속에서 삭개오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다른사람들과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 없었기에 그는 세리로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만족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리고는 아열대성 기후로, 따뜻하고 물이 많아 아주 많은 나무가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교통의 요로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는 세금을 걷기에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지배국이었던 로마는 민간의 조세 청구인에게 의뢰해서 그 사람의 재량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신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인정사정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한 삭개오에게 더이상 필요하거나 이뤄야 할 것이 남아있을까요? 삭개오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이름으로 그 뜻은 술결한, 죄가없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전과 회당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거하면서 그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토색으로 가득한 그의 삶에 어떠한 만족이 있었을까요?
만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무시당하지 않고 살았다면 그가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니면 세리의 일을 하지 않았다면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삭개오가 그러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앞서 간증문을 통해서 들었듯이 삭개오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삭개오의 이름을 가졌다 해도 그는 죄인으로서 태어났기에 죄인으로서 충실한 삶을 산것 뿐입니다.
첫번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이제까지 사랑온 수많은 삶이 여러분을 의롭다고 말해줍니까? 아니면 죄인이라고 말해줍니까?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세리장 삭개오는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윙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리고 가까이 오신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19:3, 개역한글)
"보고자 하되" 이는 보고자 열망하되라고 볼수 있고, 이는 조사하여 최종 단계를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자세히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고자 하되"라는 단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본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 문둥병자를 주님께서 고치신 것,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것, 이 모든것을 삭개오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신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아온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4절에 나와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19:4, 개역한글)
"보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간절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이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았을까요? 그러나 삭개오는 사람들의 눈을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예수님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눅19:1, 개역한글)
여기 두번째 사람 예수님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삭개오로 되어있는 누가복음 19장은 삭개오로 시작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개역한글)
실제로는 삭개오가 주인공인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입니다. "들어 지나가시더라" 여기 '들어'라는 것은 중요한 목적을 위해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공생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리고를 들어 지나가셨습니다. 이는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잃어버린 자입니까? 아니면 찾아진 자입니까?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19:5, 개역한글)
예수님은 이 잃어버린 자, 삭개오를 찾기위해 여리고도 들어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오시자마자 바로 삭개오가 있는 뽕나무로 오셨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이름도 뭍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고 그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에는 '반드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그냥 삭개오의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삭개오의 집에 머무는 것이 가장 필요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세금을 걷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19:6, 개역한글)
삭개오는 처음 보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대로 전혀 놀라지 않고 속히 내려와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즐거워하며" 이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수 없는 은혜와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개역한글)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4-5, 개역한글)
"즐거워 어깨에 메고" 이 즐거워가 삭개오가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일은자를 찾았을때에 먼저 하나님께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아오셨을뿐 아니라 찾아내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즐거워하는 것보다 먼저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세리장이 되었지만 멸시와 천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미움과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 즐거움과 동일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개역한글)
여러분이 누리고 싶은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에 만족하십니까?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19:7, 개역한글)
수군거린다는 것은 강한 불평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 바로 그의 집으로 들어가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사람들의 흥미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신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왜 여기에 앉아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까? 아니면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뽕나무 위에 오른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절 말씀을 통해서 다시한번 살펴본다면,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나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분은 누구입니까?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19:8, 개역한글)
여기 네번째 간증이 나와있습니다. 장소가 거리에서 집으로 장소가 바뀌어 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주인이며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온 삭개오는 자기의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악착같이 재물을 모았습니다. 재물이 곧 그의 전부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삶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토색한 것을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적으로 토색하면 1/5을 더해서 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주님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네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그는 빈털털리가 될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토색으로 가득찼던 삭개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 삶입니까? 누가 주인입니까? 여러분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9, 개역한글)
이렇게 변화된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확증하십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개역한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것처럼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개역한글)
여러분은 누구의 자손입니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믿고 있는것은 누구입니까?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개역한글)
사람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인을 찾아 은혜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찾아내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찾는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대로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주님의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1절에서 말하고 있을뿐 아니라 10절에서 그 목적을 이루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삭개오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여기 마지막 세번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잃어버린 자와 찾아진 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는 선택하여 참된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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