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정형모 형제님(요약)

<스가랴 강해 7>

박이레 2022. 7. 9. 21:14

2016년 12월 11일 일요일

강사 : 정형모 형제님

<스가랴 강해 7>

지난 집회 기간동안 함께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함께 주님께 저희들의 마음을 아뢰드렸던 이 기간을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마지막 스가랴 13장과 14장 말씀에서 마지막 결론을 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보기전에 잠깐 몇가지 슬라이드를 보고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있었던 불행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시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로 인해 겪은 형벌이었습니다.

이것은 타이터스 아치라고 하여 로마에 가면 로마 장군이 유다에서 승전을 기념하여 만들어 놓은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치안에 세겨진 부조입니다.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전리품을 빼앗기는 모습니다.

그 다음은, 2차 대전때 나치에 의해서 끌려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자손들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어제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사건에 대해서 보았습니다만, 예루살렘이 포위 되었을때에 일어나게 되는 우리 주님의 개입이 있을것입니다.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그 일이 있을것입니다. 여기 산이 있고 그 옆에는 감람산이 있습니다. 이 두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기드론 골짜기라 말합니다만, 여호사밧 골짜기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중요한 심판이 일어날것이고, 이것을 요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므깃도에서 요시아가 죽었고 아마겟돈 전쟁이 여기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마겟돈 전쟁에서 피뭍은옷을 입고 오신다는것을 이사야서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란산에는 엄청난 숫자의 묘지가 오래전부터 있습니다. 이 묘지는 돌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묘지에 꽃을 가져다 놓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꽃대신 돌을 올려놓는것으로 참배했다는 표를 합니다.
바로 이곳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것입니다. 이 산에 주님의 발이 닿을것이고 산은 갈라지고 그 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커다란 골짜기가 생길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스가랴서 13장 말씀으로 오겠습니다.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슥13:1-9, 개역한글)

주님께서 먼저 13장 읽은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은 어제 예루살렘을 공격해오는 이방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스라엘은 <혼취케 하는 잔>이요 <무거운 돌>이 될것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원수는 그와같이 접근해 오지만 우리 주님께서 유다 백성을 강컨케 하시고 대단히 강력한 군사로 삼으실것입니다.
연약한 사람을 다윗과 같이 다윗과 같은자는 하나님의 사자 같이 하신다는것을 이미 시사하셨습니다.

이와같은 부분에서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시게 될때, 요한계시록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단독으로 무찌르시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지 보겠습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주님앞에 극적으로 회개하는가 보았습니다.
우리는 12장에서 다윗의 승리를 보았습니다. 또한 요셉의 재회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앞에서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놀라운 애통, 진정한 회개를 통해 거절당하셨던 주님께서 그들 민족에게 영접을 받게 되십니다.

오래전에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이 성에 입성하셨지만 거절 당하셨죠.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 우리 주님께 공식적으로, 다윗에서부터 나단과, 제사장과 시므이 이스라엘 온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복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13:1, 개역한글)

여기 아름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샘'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 샘은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의 피로다> _찬송가

여기서 말하는 샘은, 물입니다.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솟구쳐 나오는 신선한 물입니다. 이제 회복된 사람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계속해서 신선하게 보존되게 되는 물입니다.

그런데 이 샘은 언제 열렸을까요?
이 백성들이 처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할때 열렸습니까? 아닙니다. 오래전에 열렸습니다.

하갈이 자기아들 이스마엘과 쫓겨나 광야를 배회하게 될때에 아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갈의 눈을 밝게 하시고 옆에 있는 샘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샘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던것을 하나님께서 눈을 밝게하사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샘은 오래전부터 열려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에 오셨고 종려주일에 호산나라고 영접하는듯 했으나 바로 일주일후 민족이 거절했던 그분입니다. 그분은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악하게 거절했지만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샘은 터졌습니다. 위대한 샘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눈이 어두워 옆에 샘이 있는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12장에서 장차 그날 이 백성이 눈이 뜨이는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샘이 있다는것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았을때 '우리가 이와같은 범죄를 했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민, 다윗의 족속들을 위해서 열린샘은 그들을 계속해서 깨끗케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구원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계속되는 신선함이 보장된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슥13:2, 개역한글)

그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직전에 놀라운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환란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우상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의 언약을 맺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정말로 참 메시아로 믿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7년의 언약을 맺지만 3년 반후 그 언약을 파기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자기의 모습을 성전 한가운데 세워놓고 절하게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미운 물건이라 하였습니다.
우상숭배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우상숭배는 수도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에게서 우상숭배를 배워왔고 그것으로 인해서 바벨론까지 포로되어 갔다왔습니다.

그러나 말세가 되면 다시 우상숭배가 들끓게 될것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보면 <집안을 잘 청소했더니 나갔던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환란시대에 우상숭배가, 사귀가 역사하는 시대가 될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이 오시게 되고 이 백성이 회개합니다.
왕국이 설립되기 전에 정리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상을 제거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의 이름이라도 기억이 되지 않게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제거하는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땅에 거짓선지자, 그리고 사귀가 없어집니다.

사귀는 간사할 사 입니다.
귀신의 영은 인간을 향해서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좋은것을 갖다 바치고 샥 바뀌어서 "좋다.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 하지만 순식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또 인간을 향해서 요구합니다. 이것이 악한 신입니다. 사귀입니다.

인간은 그런신을 믿고 거기에 매달려서 살고있는 가련하고 불행한 존재들입니다.
이제 말세에 사라질 것은 거짓 선지자가 사라집니다. 거짓 선지자가 존재하고서 천년왕국이 올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의가 바다와 같이 편만한 공의의 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정권은 의로 가득한 공의가 가득한 보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영원한 나라고 그나라는 평화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거짓선지자가 제거되어야 하며 그 뒤에서 조종하는 사귀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슥13:3, 개역한글)

신명기 18장 20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예언하게 될때 그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통해서 주님의 메세지가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신약교회에서 사라지는 은사들 중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있었을때는 그것을 분별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엉터리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사단의 쓰임을 받는것입니다. 이와같은 거짓선지자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환란시대에 주님오시기 가까운 시대에 이와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수많은 악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스가랴서를보면 그 일 이면에 일어나는 일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예언하려고 하면 부모가 견딜수 없어서 그를 칼로 찌릅니다.
이와같은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물론 오늘날은 이와같은 경륜의 시대가 아닙니다.
저희들이 자식들이 이와같은 이단에 빠지거나 잘못된 길을 가게 될때 우리가 칼로 찌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그가 돌아오기를 많은 노력으로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지금 시대에 이와같은 일을 한다고 하는것은 아닙니다만 이와같은 일은 주님오시기 전에 환란시대에 주님오시기 전에 있게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슥13:4, 개역한글)

지금의 분위기를 보십시오.
거짓예언을 하게 될때 부모는 칼로 찌릅니다. 심지어 거짓 선지자도 예언을 하려 할때 그 자체를 부끄러워 합니다.
털옷도 입지 않습니다. 옛날에 선지자들이 털옷을 입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습니다. 석청과 메뚜기를 먹었습니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선지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털옷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털옷을 입지 않는것입니다. 곧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드러나는것을 두려워하는 분위기인 것입니다.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슥13:5, 개역한글)

또한 사람들이 그를 거짓선지자라고 이야기할때 이러한 변명을 하게 되는것입니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슥13:6, 개역한글)

<네 두팔 사이의 상처는 어찜이냐> 이를 달리 번역하면 <네 손안에 있는 상처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손발의 못자국을 이야기하는것이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뭍습니다. 그가 거짓선지자라는 의심이 있을때에 "네 손에 있는 상처는 뭐냐?"라고 뭍는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 친구집에서 받은 상처라"고 둘러대는 것입니다.

왜 거짓선지자는 자기의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 둘러대는 변명을 할까요?
거짓 성지자를 향해서 사람들은 항의를 합니다. "당신은 거짓 선지자가 아니냐?" 그러나 그는 거짓선지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을 합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이런 질문을 받았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것이 주님의 상처인가? 라고 생각하게 될때, 왜 주님의 상처가 아닌가의 이유를 몇가지 보겠습니다.

우리주님 자신은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분은 기름부음을 받은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아닙니까?

스가랴 같은 경우는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입니다만, 왕과 제사장직을 같이 겸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세가지 직분을 함께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주님을 향해서 "당신 선지자냐?"라고 뭍는다면 우리 주님은 그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부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지자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땅에 오셔서 그대로 말슴하셨습니다. 단순히 선지자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궁색한 변명을 하는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물론 손과발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가 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종, 여호와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인간의 종으로, 사람의 뜻에 의헤서 걸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친구집에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에 의해서 로마 집정관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죄인을 대신해서 받은 상처입니다.

그러나 이 거짓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손의 상처는 자상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낸 상처인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의 대결에 있어서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제단앞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기를 계속해서 외칩니다.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너희신이 졸고 있나 보다. 너희신이 들을수 있도록 더큰소리로 외치라"
바알 선지자들은 더 큰 손으로 외치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칼을 가지고 자기를 상해하면서 외칩니다.

이것은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행사입니다. 자기자신의 열의,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믿는 신에게 나아가는 형태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자상입니다.

우리주님의 상처는 자상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손발의 상처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때 로마의 법에 의해서 그리고 유대인들의 합심한 고소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 죄인의 죄를 대신해서 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을때 세상사람들에게 자기의 상처를 보이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손발의 그 상처자국이 무엇이냐? 하고 물은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꼐서는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이야기 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궁색한 변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었고 농부였다>
우리 주님은 농부가 아니십니다. 우리주님은 목수이셨습니다.

여기서의 질문은 주님의 상처가 아닌 거짓선지자가 가지고 있던 자상이었다는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7장에서는 다시 저 뒤로가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슥13:7, 개역한글)

선지자께서 <칼아 깨어서> 라고 말합니다. 칼을 의인화 하고 있습니다.
칼이라고 하는것은 성경에서 정부의 심판하는 권세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4, 개역한글)

<그>는 정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입니다.

칼이라고 할때, 그것은 정부가 가진 합법적인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심판으로 우리 주님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버림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한 완전한 인간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을 심판하실때 하나님으로써 우리주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문을 닫고 세시간동안 심판하셨습니다. 우리주님께서 세시간동안 인간에게서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다면 세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문을 닫고 심판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 받았습니까? 그분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을 대신한 자리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의의 심판을 받은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스가랴는 의인화법을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자를 치라>

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시는 고난을 받으시게 될때의 진면목은 하나님의 칼이 벌떡 일어나서 우리주님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여기서는 <내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이 어려워도 돌보지 아니하고 양들이 배고파도 먹이지아니하고 인도하지 아니하는 악한목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때에 <내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목자입니다. 그런데 이 목자를 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고난받는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메시아가 고난받는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일의 예표 그림인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이요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바칠때에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행사하면서도 아브라함의 마음은 타들어 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고난받는것을 나는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구속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 아드님께서 고난을 받고 고통과 슬픔에서 신음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인간이 회복되고 죄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구속이 이루어질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은 부활할것이요, 만방에 하나님의 의가 선포될 것이요, 그리스도는 승격되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 내 목자를 치는데 동격이 있습니다. <내 짝된자> 이는 나의 동료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동료사람은 우리주님과 동격입니다. 하나님과 아드님은 동격입니다. 그래서 나의 짝된자, 나의 동료라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나의 짝된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말로 하면 <짝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동료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될때 그분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목자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공의의 심팜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영으로 오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으로 돌아가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써 돌아가신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집니다.
AD 70년에 로마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스라엘은 완전히 흩어져 버립니다.

그 기간을 가르켜서 디아스포라 말합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까지입니다.
이제 그것은 외모적으로 오래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흩어졌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체포되실때에 제자들은 흩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사실 이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흩어져 버릴것에대한 예표의 그림입니다.
그들이 흩어졌을때 하나님은 양들이 다시 돌아오는것을 구상하고 계셨습니다.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기 나오는 작은자들은 잔존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을 따르는 잔존자들을 두십니다. 환란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 잔존자들이 있습니다. 그 잔존자들은 작은 자들입니다.

그손을 드리운다라고 할때, 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심판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드럽고 자비로운 손길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슥13:8, 개역한글)

환란시대에 유대인들의 삼분의 이가 죽습니다. 삼분의 일이 남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그날 인구조사를 했을때 이스라엘은 80만명이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는 800만명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이시간 환란이 도래한다면 이 800만명의 삼분의 이가 죽는것입니다. 약 530만 정도가 죽는것입니다.

2차 대전 나치하에 600만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가까운 수가 멸절되는것입니다.
그리고 250-270만이 남습니다. 오늘날 인구수로 말한다면 그런것입니다. AD 70년에 이스라엘의 죽은 사람의 수가 150만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사람이 희생다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1/3 은 남는데, 그들중에 잔존자들이 있을것입니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슥13:9, 개역한글)

삼분의 일 남은 사람들이 통과할곳은 풀무입니다. 그곳은 금속을 넣어서 찌꺼기를 걸러내는것입니다. 그것을 몇번 반복하여 더욱 더 순도높은 금속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환란시대에 주님앞에 나타나기 전에 주님앞에 돌아온 잔존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은 끄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이일은 어제 일보다 먼저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들은 이와같은 풀무를 통과합니다. 베드로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믿는 그리스도인을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시는것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을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는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킬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수많은 고난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와같은 고난을 통과할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하고 우리가 아름다운 성품으로, 우리의 봉사와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 고난의 방법이 바로 이 용광로에서 제련하는 것입니다. 그 찌끼가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나서 우리가 주님앞에 나오게 될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불순물이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성품속에 얼마나 많은 찌끼들이 남아 있습니까? 그 찌끼 떄문에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섬길수 없습니다. 이 찌끼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에 많은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정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때로 이와같은 고난, 때때로 저와같은 괴로움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때때로 이해할수 없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고난을 통과하게 될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환란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하는 이 고난을 보면서 우리에게의 실제적인 교훈들을 받습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관계입니까?
그 백성들은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라고 말하신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앞에 거룩한척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위선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을 보면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들은 나의 백성이라고 화답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오게 될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될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와 관련해서도 마찮가지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때 이 기도가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것을 응답하심을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인내가운데, 좌절치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러한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스가랴 13장에서 샘이 열렸습니다. 12장에서는 여호와의 눈이 열렸습니다.
14장 마지막에 가서는 감람산이 열립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때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홍해바다 가라졌습니다.

이제 말일에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공격하게 될때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감람산이 갈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골짜기가 생깁니다. 그리로 백성들이 도주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옛날에는 바다가 갈라졌고 마지막때는 산이 갈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일을 역사하실것입니다.
14장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것 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10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5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14:1-21, 개역한글)

먼저 1-3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것 같이 하시리라
(슥14:1-3, 개역한글)

이는 마지막 부분에 일어날 사건을 말합니다. 4절부터 주님의 강림과 함께 천년왕국에 아름답게 변모될 그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12-15절까지 다시 환란시대 마지막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6절 말씀부터 마지막절까지 다시 천년왕국으로 돌아갑니다.
이걸보면 스가랴서 14장 말씀을 시루떡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환란과 왕국이 자꾸 거듭되는것입니다. 왜이런 시루떡을 주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기록하셨을까요? 살펴보겠습니다.

14장 말씀을 보면 이 순서는 연대순이 아닙니다.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슥14:2, 개역한글)

주님께서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계시록말씀을 보면 세 덜러운 개구리같은 영이 나와서 군대들을 모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군대를 모으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을 볼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일들을 하나님께서 초 지배하신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직도 보좌에 앉아있고 악귀들은 역사하고 마귀는 어리석은 인간을 사용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일이 역사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시고 때로는 거부하시며 때로는 금하시고 때로는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선인도 사용하시고 때로는 악인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이 모든일을 주권적인 뜻하신대로 이루십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주님을 섬길때에, 근본적으로 우리마음에 인정해야 할것은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긍국적으로 우리가 순종하게 될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그 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항거할때 우리에게 오는 많은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읍이 약탈되고>
이제 군대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약탈됩니다.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패하는듯 보입니다.

<가옥이 약탈되고 부녀가 욕을보며>
이것은 전쟁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포위와 전쟁은 마지막 포위와 전쟁입니다.
열국이 예루살렘을 에워싸서 이제는 들어가 약탈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가장 커다란 불행과 절망속에 빠집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것 같이 하시리라 (슥14:3, 개역한글)

바로 그때에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나가십니다. 이것은 왕이 적군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해서 적군이 쳐들어오고 약탈당하는 일이 있을때에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습을 볼때 이것이 '아마겟돈의 위기'를 말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아마겟돈의 전쟁은 여러곳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아마겟돈 전쟁에 온세계가 몰려오는 것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그의 군대를 끌고오는 것도 있고, 또한 북방왕이라고 하는 앗시리아 왕(앗수르왕)이 쳐들어 옵니다.

적그리스도와 앗수루왕은 인간적인 경쟁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둘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전투가 있습니다. 또 선지자의 말에 '보수라' 이곳은 요르단입니다. 서해 남쪽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승전하고 돌아오십니다.

지금 스가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또 예루살렘 전투는 마지막 전투입니다.
그 전투모양을 지금 여기서 아마겟돈 위기와 관련해서 예루살렘의 현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슥14:4, 개역한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일어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놀랍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집니다.
아래에서 위로 찢어진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바위가 터지고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사람들이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땅에 지진이 난것입니다. 오래전에 우리 주님께서 이 감람산에서 떠나셨습니다. 그때에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위를 쳐다보느냐? 너희 주는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바로 그 동일한 장소에 주님께서 오실것입니다.
감람산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감람산은 우리 주님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이 미래에 어떻게 처참하게 파멸되고 그 백성들이 어떠한 고난을 받을것인지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을 보셨을뿐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그 눈물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서 주님은 승천하셨고, 그 장소로 주님의 발이 닿습니다. 그발은 어떤발입니까? 십자가에서 못박힌 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이요 그발이 어찌 아름다운가>

이사야 선지자는 아름다운 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발은 아름다운 발이요 고난을 당하신 발입니다. 그발이 산에 닿게 되는것은 대단히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것도 역사적인 일이요, 십자가에 돌아가신것도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인류의 모든 미디어가 대대적으로 홍보했어야 할 사건입니다.

스가랴는 이 놀라운 사건, 주님의 두발이 감란산위에 닿게될 사건을 오래전에 예언했습니다.
주님의 발이 산에 닿을때에 이 산은 갈라집니다.

이 말씀을 보면 '감람산의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골짜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동서로 갈라졌지만 움직이는것은 남북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서로 골짜기가 형성될것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지형변화를 가져옵니다. 또한 이 지형변화로 예루살렘이 우뚝서게 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분지입니다. 여러산들에게 둘러쌓여있는 분지입니다. 그곳은 강이없는 독특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분지와 같은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오실때에 일어나는 지형변화로 인해서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남북 어디서나 다 예루살렘을 바라볼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물이 흘러서 그 골짜기가 강바닥이 됩니다. 서쪽으로 지중해로 동쪽으로는 사해로 생수가 넘쳐 흘러내리는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항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이 항구가 되는것을 상상할수 있습니까?
놀라운 지형변화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강림하시게 될때 일어날 지형변화입니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슥14:5, 개역한글)

아셀의 정확한 장소는 알수 없습니다만 긴골짜기로 될것을 성서는 예언합니다.
아모스서를 보면 아모스가 웃시아시대의 지진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갑자기 생기게 될 그 거대한 골짜기로 잔존자들이 도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나왔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 백성들이 바로에게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기쁨가운데 행진했으나 홍해앞에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철병거가 쫓아옵니다.
이제 그들은 공포가운데서 "왜 우리를 여기로 인도했는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로 끌고왔는가?"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하는것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구조하셨습니다.

말일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바다가 갈라지지않고 산이 갈라집니다. 그 갈라진 산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주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웃시아때에 지진때에 사람들이 도망했던것과 같이 도망할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이스라엘은 공략 당할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잔존자들을 살리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스가랴는 감탄하며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실때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임재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에서나 매 성경의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을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인재가운데서였습니다.

우리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십니다. 그분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그것을 인해서 스가랴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이요>

우리는 창세기에서 요셉이 번영하게 될때 형제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형통하였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슥14:6, 개역한글)

천체가 어두워집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집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개역한글)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같이 변합니다. 낮의 광명과 밤의 광명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실때 6시간 달리셨습니다. 마지막 세시간동안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늘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캄캄해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밤이 오는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적적인 흑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이땅에 오시게 될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송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이땅에 강림하실때에 온세상은 어두워지고 공포가운데 빠질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아들을 거절한 이세상에 합당한것은 그와같은 어둠 뿐입니다.

이러한 어둠뿐이다가 주님께서 강림하실때에 오는 위엄과 찬란함은 어떠겠습니까? 이것은 대조적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말일에 세상이 어두워질때 온세상 사람들이 이를보고 기절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세상이 공포가운데 빠지게 만들것입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8, 개역한글)

이 생수는 살아있는 길입니다. 보통 생수의 근원은 산꼭대기입니다. 그러나 이 강은 지류가 없습니다. 이 생수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이 물은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오염된 이 세상을 정결케하는 물입니다.

사해는 죽은 물입니다. 그곳에는 고농도의 염분밖에 없습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말씀을 보면 이 물이 사해로 흘러가게 될때 거기에서 물고기가 뛰놀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습니다.

현대의 지구는 환경이 망가지고 급속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한해한해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오실때 이 모든것은 달라지고 생수로 인해서 이세상은 치유를 받을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물이 나와서 남편으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그물은 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천년왕국때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양편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은 온세상을 살리는, 땅을 살리는 생수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슥14:9, 개역한글)

<홀로하나>라는 말이 두번 반복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년왕국때의 이름입니다. 그분을 필적할 어떤것도 없습니다.

이전 말씀에서 '우상의 이름조차도 기억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모세율법의 첫번째에서 가장먼저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비슷한 다른 경쟁자들, 우상을 섬기지 않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경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이름외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와 뜻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임안에 놀라운 소망과 복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주님만, 그 이름만 여기 계시다> 입니다. 그말은 오로지 주님의 뜻만 우리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이외의 것, 인간의 생각을 여기 넣기 원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을 우리가 차는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우리가 발로 찹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자기의 생각을 거기 넣고 만드는 모든것은 <하나님은 여기 홀로 계시다>라고 할수 없는것입니다. 하나님을 구석에 몰아넣고 다른것들을 들여와서 하나님과 경쟁하도록 우리가 허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 외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주님 아닌것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복을 발로 차버립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만 홀로 하나 되시다 라고 인정하고 실천해야 할것입니다.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슥14:10, 개역한글)

<아라바>라는 말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기이한 지형입니다.
갈릴리에서 요단은 기이한 지형입니다. 사해는 이세상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곳이 사해입니다. 깊은 골짜기입니다.
사해 끝에서부터 아카바라는 항구가 있는데 그 항구에 이르기까지 괭장히 낮은 , 깊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여기를 가리켜서 '아라바'라고 말합니다.

<온땅이 아라바와 같이 되되>

이사야 선지자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때, 선구자가 있어 그 길을 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길을 침례요한이 예비하게 될때 그것을 가리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짜기가 어두워지고 높은산과 작은산이 낮아지고> 모든것이 평지화되고 균일화 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는 짖밟히는사람과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실때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것은 낮아지고 저밑의 골짜기는 더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높아지고 나머지는 전부 아라바같이 평지가 되는것입니다.

모임은 예루살렘이 이렇게 높이지는 것처럼 높아져야 합니다.
어떤점에서 높아져야 합니까? 우리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간증을 온세상에 보이도록 높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발견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형변화입니다. 우리의 심령에도 이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10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슥14:10-11, 개역한글)

여기 나타난 지명들을 보면 예루살렘의 동과서 남과 북을 말합니다. 이곳이 다 높아지고 나머지는 다 아라바와 같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연히 산다는것은 많은사람들이 모여 번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12절부터 환란 말기에 있을일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슥14:12-13, 개역한글)

여기 두가지가 있습니다.
재앙과 공포입니다.
12절에 재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때에 원수들에게 내릴재앙입니다. 살이 썩고 눈과 혀가 바로 썩는것입니다. 산채로 죽는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의학용어로 괴사라고 합니다. 썩으면서 죽는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13절은 공포입니다. 미디안과 기드온이 전쟁을 할때 미디안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습니다. 기드온이 공격하게 될때 미디안 사람들은 공포에 빠져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습니다.

재앙과 공포는 주님께서 마지막때 원수들을 향해서 다루실 방법입니다.

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5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슥14:14-15, 개역한글)

재앙과 공포, 그리고 14절 말씀을 보면 유다가 그들의 원수들과 싸워 많은 보화를 얻을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국들과 함께 온 말과 노새 약대와 나귀에게도 주님이 내리신 재앙이 함께 임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말씀을 보고, 스가랴서 13-14장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주님께서 원수를 단독으로 무찌르는것을 볼수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칼로, 말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산채로 불못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군사들을 멸하셔서 마지막 날에 새들의 잔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재앙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재앙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약탈하고 그들의 전리품을 얻습니다. 우리는 1-3절사이에서 열국이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와서 약탈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열국이 승리가운데 임하게 될때 주님께서 그들을 단독으로 물리치시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또 외부에서 다른 군대가 오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도망간 잔존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다윗과 같은 용기를 얻고 원군이 되어 외부의 다른 원수들을 주님께서 재앙가운데 공격하시는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스가랴서 14장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원수에 대해서 1-3절사이에서 그리고 12-15절로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계신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14:16, 개역한글)

이 남은자들은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산자의 심판이 있습니다. 환란에서 살아남은 자들중에는 믿는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가리켜 양이라 말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염소라 말합니다.
이들 중에서 양들이 천년왕국으로 들어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믿는자들은 천년왕국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매년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천년왕국때에는 유월절을 지키고 초막절을 지킵니다. 즉, 일곱절기 중 첫절기와 마지막 절기를 지킵니다. 첫절기를 지키는 이유를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 절기 초막절을 지킬까요?

초막절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을 짖고 살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입니다. 미래의 천년왕국 때에 지키는 초막절은 추수의 기쁨입니다. 초막절은 추수 이후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추수의 기쁨과 번영을 누리는 위대한 기간인 것입니다.
초막절은 천년왕국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때에 온세상의 사람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것입니다.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슥14:17, 개역한글)

그런데 그때에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을것입니다.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14:18-19, 개역한글)

애굽족속은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일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창일함이 없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실때에 하나님의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때에 백성들은 반드시 초막절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인 것입니다.
그것은 천년왕국의 즐거움을 그들이 만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지속되면서 새로 태어난 새 새대들 중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을것이기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14:20-21, 개역한글)

스가랴 1장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짜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놓고 좌절과 여러가지 반대로 어려움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서 여러가지 영감을 주는 말을 했고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성전을 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민족을 향해서 스가랴는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스가랴서라는 예언서를 썼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백성이 가지고 있던 절망속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소망은 그 백성이 성결하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은 천년왕국때에 이루어집니다.

오늘날도 마찮가지 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저런 어떤 목적을 위해서 거룩함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상실해 버린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함을 보존해야 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우리가 무엇을 한다해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년왕국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백성들의 거룩입니다.
그 거룩은 공적인 생활에서 나타나 있고 종교적인 생활에도 배어있고 그들의 사사로운 생활에도 가득히 베어 있습니다. 어딜 가도 어떤곳에 있어도 그들은 거룩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천년왕국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가지고 계시던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이루어 집니다.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우리는 스가랴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의 그림을 보았습니까? 이 모든말들은 모두가 전쟁을 위해서 쓰여지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천년왕국때에 하나님께 헌신되는 도구로 쓰여집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생활에서 하나님께 거룩함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모습을 조금더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전의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것이요>

여호와의 전에 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단 앞 주발이 있습니다. 주발에는 피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전의 솥보다 피를담고 있는 주발이 더 거룩하다고 유대교 안에서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는 더이상 그것은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우리 마음속에 가지는 잘못된 생각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회사를 다니게 될때 그것은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는것보다 더 세속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스빈까? 집안에서 설거지를 할때 그것을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떤일을 하던지간에 이 모든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떤일을 할때, 이것은 거룩한것 이것은 덜 거룩한것 이라고 차이를 두지 않습니까? 그러나 쳔년왕국때에는 모든것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생활에서도 거룩, 비거룩의 차이가 없다는것은 모든 생활에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집이나 밖에나 언어나 행동이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보존해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말씀을 읽고 교제하는데 있어서 거룩을 더 경험하고 보존해 나갈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14:21, 개역한글)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우리는 천년왕국때에 천년왕국의 전을 주님께서 지으신다는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은 주님이 지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아름답게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 성전안에 가나안사람이 더이상 있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히브리어로 '상인'이라는 뜻입니다. 상인과 관련해서 우리는 일곱번째 환상에서 물질주의, 상업주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시날과 바벨론에서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전에 가나안에서 페니키아에서 무역하는법을 배워왔습니다.
그와같은 물질주의적인 생각은 항상 거룩과 반대되는것입니다. 우리주님께서 이땅에 오셨을때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바꾸는 사람과 비둘기파는사람들이 가득한것을 보셨습니다. 물질주의 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굴혈, 도적들이 번죄를 꾀하는 아지트 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입니다.

무역, 물질, 상업을 우선으로 하는 생활, 생각입니다.
이 모든것은 환상에서 바벨론으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는 더이상 가나안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말로 망령된자, 불경건한사람, 물질주의자가 없습니다.

거룩하다면, 가나안사람이 있을수 없습니다.
천년왕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왕국입니다. 이 가련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상시키십니까?
예루살렘은, 살렘, 평화의 곳으로 주님께서 만드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곳이고 높은곳으로 만드십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름답습니까?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겔48:35, 개역한글)

<여호와사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교훈을 받습니다. 모임이 왜 아름답습니까?
모임에 우리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 전도, 모든활동,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스가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소원, 그리고 여러가지 예언, 환상, 활동을 통해서 스가랴는 그 백성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비전을 주셨습니까?

이와같은 모든 어려움 죄악이 사라지고 열린 샘이 있을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보호하시고 산을 골짜기로 만들고, 그리고 도망하게 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어떻게 그렇게 높이, 아름답게 만들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위로와 비전을 스가랴는 전해주었습니다.

이와같은 놀라운 위로와 비전을 우리도 마음속에 가지고 주님을 계속 섬겨야 할것입니다.
주님께서 각인의 성도님께서 속한 모임에 주님의 비전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영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긴시간을 통해 같이해주시고 공감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함께 순종하고자 하셨던 이 기간들을 통해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