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다섯가지 질문과 대답 > 한봉래 형제님 / 2022년 5월 15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눅 24:13-3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인데요. 우선 서론적으로 한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할하십니다. 부활하시고 사십일만에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때까지 사십일을 이 땅에 계셨습니다. 왜 사십일일까요? 40이라는 숫자는 굉장히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다시 잠깐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사시다가 삼십세 때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30세라고 하는 것은 제사장이 일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어떻게 시작하시냐면 공생애는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죄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침례를 받으십니다. 그것으로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일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보면 사십일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고, 그 다음에 공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사십일을 이 땅 가운데 계십니다. 그래서 공생애 처음의 사십일이 있고 공생애 마지막에 사십일이 있는 셈입니다. 주님이 사십일간 주리시다가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단이 세가지 시험을 하지요. 주님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나요? 사단이 시험을 하는데, 혹시 주님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갈 수 있나요? 없습니다. 주님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시험을 받으시죠? 사십일간 시험은 주님이 시험에 혹시 넘어지시나를 보려는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험받지 않으십니다.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고 시험 받지도 않으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공생애 시작 전에,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사십일간 시험받으시는 이유는 주님이 죄 없으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도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험도 받지 않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입증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 될수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에게 죄가 있다면 주님의 죽음은 대신 죽는게 아닙니다. 자기 죄로 죽는 겁니다. 그래서 공생애 처음의 사십일은 주님이, 앞으로 이분이 앞으로 사역을 하실텐데, 이분은 죄 없는 분이다.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이렇게 우리 가운데 일하셨다. 이것이 공생애 초기에 있었고요. 마지막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사십일을 이 땅에 계셨는데요. 제자들과 늘 계신것이 아니고 가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필요하시면 나타나시고 그러는데요. 몇번 나타나셨느냐? 세는 것에 따라 조금, 뭘 넣느냐에 따라 조금 다른데요. 하여간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전부 세면 사십일동안 열번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도 그 중에 한번 나타난 건데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은 뭘 의미하냐면, 주님의 공생애 초기 사십일은 주님의 사역이 죄 없으신 분의 사역임을 입증하듯이, 공생애의 마지막 부활은 이제 주님이 승천하셔서 하실 사역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뭘 하고 계신가, 그것을 이 지상 40일동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번의 사건이 있는데요. 열번동안 나타나셨는데, 10이라는 숫자는 책임을 나타냅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될 내용 열가지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번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나타남을 본, 목격한, 주님의 나타남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경우에도, 우리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가 이와 같은 주님의 나타남을 경험했으니, 그가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가, 라는 것을 그 내용에 들어가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이 제자 사건을 통해서 다섯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다섯가지를 질문하고 대답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주님은 왜 모르게 나타셨을까?' 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이 두제자가 길을 가고 있는거죠. 주님이 같이 그 길에 동행하시면서 주고받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주님인 줄 몰라봅니다. 왜 몰라보게 했을까요? 그래서 이야기의 끝에 가면 주님이구나, 알아봤습니다. 주님이시네, 하니까 사라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제자가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는데, 아마 추측하기로는 자기 집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가 누구냐하면, 하나는 글로바고, 하나는 글로바의 아내였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집에 들어가고 식사하고 했기 때문에 아마 부부였을 가능성이 큰데요. 어째거나, 이 두 사람의 최고의 고민은 부활한 주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소문을 들었어요. 주님의 무덤에 여자들이 가 보았다. 가 보았더니 시신이 없었다. 그리고 천사가 대신 말하기를 주님이 살아나셨다고 말을 했다. 그래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안믿는 것이죠. 그리고 두 사람이 가보았다. 두 사람은 베드로, 요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하니까 베드로 요한이 무덤에 가 봅니다. 가 보니까 과연 돌은 옮겨져 있었고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주님이 부활하신 날 일어난 사건이죠 부활한 그날, 아직까지 이 엠마오로 간 제자에게는 부활한 주님을 내가 직접 만났다, 이런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주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실망과 슬픔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집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활한 주님이 "나다, 내가 부활했지 않느냐." 그리고 전번의 다른 제자처럼 옆구리 상처, 손의 상처를 봐라. 이렇게 하면 해결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십니다. 가장 부활한 주님이 직접 자기를 드러내면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쭉 대화하시고 이렇게 하신 이유가 뭔가? 이게 첫번째 질문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질문은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쭉 이야기 하시면서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왜 그러느냐, 왜 슬퍼하고 있느냐?" 이야기를 쭉 듣고, 그 다음에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책망하실때 무얼 책망하셔야 하냐면 제 생각에, 왜 부활을 못 믿느냐, 천사들의 말,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데 왜 못믿느냐? 그리고 못믿었다고 해서 그냥 집으로 가면 되느냐? 이런 것을 책망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 책망은 안하십니다. 안하시고 책망의 내용이 뭐냐면 왜 성경을 믿지 않느냐, 입니다. 왜 성경을 믿는데 시간이 걸리느냐, 더디 믿느냐? 빨리 믿을 수 있는데,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다른 것을 책망하실 것 같은데, 왜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시는가.
세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넘어진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넘어진거죠. 주님은 말하십니다.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할것 아니냐? 고난이 있어야 영광에 들어가는데, 물론 그리스도가 영광에 들어갈거다. 그런데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고난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난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왜 제자들은 고난에 넘어질까, 왜 주님은 영광을 처음부터 영광으로 하시지 꼭 고난을 통과해서만 영광으로 가게 하시는가.
그 다음에 네번째 질문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주님이, 그러니까 세명이서 길을 가신거죠. 가다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했는데 주님은 더 가려고 하는 것처럼 하십니다. 주님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을 안했으니까 더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제자가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날도 어둡고 더이상 길 가기 어려우니, 그리고 시간도 됐고 시장하니, 우리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시지요. 하고 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이 이분들과 같이 갈 때는 목적지가 이분들입니다. 더 갈데 없습니다. 더 딴데 가려고 하는게 아니세요. 그런데 주님은 왜 더 가려고 하는 것처럼 하셨을까? 이것이 네번째 질문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번째 마지막 질문입니다. 주님인 줄 알아봤습니다. 알아보자마자 그들이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시간적으로 보면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25리니까, 보통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니까, 거리를 측정하면 두시간에서 세시간정도 걸어가야 됩니다. 사람이 일반적인 일반적인 성인 보폭으로 걸으면, 한 세시간쯤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오후에 출발합니다. 그래서 한 세시간 쯤 엠마오게 도착하니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들어간거죠. 그런데 다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캄캄한 밤이 됩니다. 이미 어두어졌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가면 안될까요? 즉시 일어나서 갑니다. 그리고 즉시 일어나서 간 것을 승인 하듯이, 그들이 다시 돌아가니까, 그 자리에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즉시 예수님인줄 알아보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돌아갔을까? 이것이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다섯가지의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해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답해 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길을 가면서 서로 묻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떤 형제님은 이것을 '바이블 리딩'이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그동안 있었던 주님 십자가, 장사된 것, 그리고 부활, 주님의 부활의 직접 목도하지는 못했지만 돌이 옮겨져 있었다. 무덤은 비어 있었다. 천사들이 증언했다. 여기까지,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이것을 믿을수 있느냐, 사실이냐,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때 모습, 죽으실때 주님께서 하셨던 기도, 그리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장사했던 것, 아리마대 요셉, 그 부자의 묘실에 장사된 것, 그리고 죽으시기 전에 다리를 꺾는 장면, 이런 것들을 두 제자가 가면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왜 어두움이 세시간 동안 있었지? 그것이 뭘 의미하지?" 그러면서 이 두 제자가 서로 "내 생각에는 이런것 같애." "아니야, 그러면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이렇게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입니다. 두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는 거죠. 거기에 주님이 끼시는거죠. "무슨 이야기 하느냐?" 물어보고 그 대화에 주님이 같이 들어가신 것인데,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면 부활한 주님인 것을 밝히시면 이 대화는 싹 사라집니다. 부활한 주님이 계신데, 여자들이 살았는데, 두 사람이 가봤는데, 이거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도록 주님께서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토론을 하도록 주님께서 자기의 정체를 일단 감추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떤 책에 그런 제목이 있었는데요. '생각하는 자는 믿지 않을 수 없다.' 입니다. 생각해 봐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생각건데 우리 모두가 죽은 것이라" 또 고린도후서 10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케 하니"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멈춰버리고 뇌를 꺼버리고, 그리고 성경을 받아들이는게 아닙니다. 이거 왜이러지? 이렇게 써진 것과 이렇게 써진 것은 모순이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합니다. 이런 대목도 있죠. 로마서에 보면,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택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고, 그건 어떻게 된거냐? 그러면 에서는 책임이 없지 않느냐? 하나님이 미워하셨는데, 그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나오는거죠. 그랬을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하죠. "힐문하는자여, 그릇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할수 있느냐?" 하고 질문을 막아버리죠.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하죠. "다 먹지 말라더냐?" 이렇게 가는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제자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그리고 무덤, 그리고 부활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 사건에 대해서 서로 경건하게, 믿는 자 답게, 여기서 어떤 교훈을 끌어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와 목표를 알아내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제 주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된겁니다. 주님인줄 알아보면, 주님께서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을 통해서 결국 주님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주님의 의도와 주님의 목표를 결론을 지었을때, 주님은 된겁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이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딱 사라지신 거죠. 목표를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첫번째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는 왜 책망하시는가? 무얼 책망하시는가? 인데요. 주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이유는 계속 제자들과 함께 옛날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제자들과 계속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헤어지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이런 부분들을 이유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젖을 떼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안보이는데 하나님의 우편에 가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봐야 합니다. 주님이 엎에 없어도 주님이 곁에 계신 것을 알고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겨두신 위대한 유산이 뭐냐 하면, 두개입니다. 하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대신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깨닫고 인도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부터 제자들이 성경에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을 자기가 잘 생각하고 질문해야 되고, 그러면 이런식의 대답도 듣고 했던, 이 성령의 인도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디모데후서 3장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께서 지으신 거죠. 그 다음에 이 성경을 어떻게 쓰느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충분하니" 성경의 기능이 네개입니다. 교훈이 있습니다. 교리입니다. 교리가 있고 그 다음에, 교리에서 틀린 것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책망할뿐만 아니라 바르게 고칩니다. 그 다음에 바르게 고친 다음에는 그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여기서 성경이 하는 일을 주님이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책망하십니다. 어떻게 책망하시냐면, 성경의 교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고 사흘만에 부활하십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못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구약성경부터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되리라."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교훈(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한다.
그 다음에 두번째, 그 성경의 교훈을 더디믿고 있으니까 책망합니다. 왜 못믿느냐?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진리를 왜 못받아들이느냐? 그 다음에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다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이렇게 풀어주실때, 그리스도가 이렇게 고난 받아야 하는 것,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구약 성경에서 많은 예를 들어서 설명해줘요. 이것이 회복시키는, 교훈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이제 계속해서 그 길을 걷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네가지 기능,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한다고 하는 이것을 주님께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또 그 후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와 같은 네가지 단계를 밟아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른 것을 놔두고 왜 실망했느냐, 왜 떠나가느냐, 너희들만 집으로 가 버리면 되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고 물론 그것은 잘못된거죠. 그렇지만 이 성경이 제대로 기능하면 그 문제점들이 전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고난입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보면 벌써 틀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거늘" 주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선지자보다 크신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죠. 성전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고요. 그 다음에 요나보다 크다. 이게 선지자보다 크다입니다. 솔로몬보다 크다, 왕보다 더 크다.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주님은 왕 이상입니다. 선지자와 다릅니다. 그런데 "선지자여늘" 이거 벌써 주님을 축소한 거죠. 그 다음에 두번째,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주님은 온 세상의 구원장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분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벌써 주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주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고난 받을 것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중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다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이 잘 아는 것, 이사야서 53장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는 너무 잘 알죠. 그분은 찔려야 합니다. "그가 상함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분은 상함을 받고 채찍에 맞으셔야 합니다. 그것을 이사야서를 자기들도 읽었을텐데, 이것을 왜 넘어가느냐?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구절을 감사 드릴때 자꾸 쓰느냐? 어떤 생각을 하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의 나라로 만드실 것이다. 모든 적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이쪽에만 엑센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사모되고 그것이 늘 관심이고, 그러니까 그것과 정 반대되는 이것은 눈에 잘 안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 구원, 죄 용서, 이런 것들은 잘 보이죠. 그런데 이런 대목이 안보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런 구절은 잘 안보입니다. '무엇이든지 심든지 거둔다고? 잘못 심어도 하나님이 은혜로 좋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게 아닌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하죠.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나이다." 그래서 다윗이 죽지 않습니다. 살인, 간음은 죽어야 합니다. 그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해 주십니다. 어떻게 용서하시느냐? 다윗의 죄를 위해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용서 받았어도, 그에게 불행한 일은 변함없이 생깁니다. 그의 아들 네명이 죽습니다. 압살롬 죽습니다. 암논 죽습니다. 또 아도니야 죽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용서인가? 아니, 용서라고 하는 것은 결과까지 깨끗하게 해야 용서 아닌가?' 죄의 결과를 계속 진다면, 다윗이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계속 받는다면, 목숨은 살았는데 벌을 받는다면 이것이 용서인가? 라는 생각을 저같은 사람은 하는 것입니다. 왜요? 은혜에 대해서 다시는 기억지 않는다, 이런 것에 엑센트가 가 있고, 하나님의 통치 방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모순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부분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뿐만이 아니고, 그래서 성경은 강조합니다. 모든 성경의 쓴 바, 가운데 우리가 중요시하고 우리가 붇들고 있는 성경의 원칙과 배치되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통치 방법에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둘 것입니다.
그 다음 네번째로 가겠습니다. 왜 주님은 더 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이 부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실때, 그리고 베드로가 "정말 주님이시면 저도 그 물위를 걷게 해주세요." 했던 그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제자들은 먼저 배타고 가라고 해서 가고 있었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서 더이상 못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주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때, 당연히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 곁을 지나서 더 가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초청해야 그리 오십니다. 여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더 가려고 하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청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주님을 초청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구하고 요한복음 6장에 이런 약속이 되어있죠. 이런 말씀이 있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자는 안다." 우리에게 더 영적이고 더 거룩하고 더 주님을 닮도록 우리 마음이 추구하고 그것을 우선순위로 놓고 주님 앞에 간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하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더 가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나서, 쭉 성경을 듣고나서 그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첫번째,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온 세상을, 죄인들까지 구원하시는 구원자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주님에 대한 이해가 넓어집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을 구원하니까, 이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제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들이 알게 된거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그들을 낙심시킨 것은 주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은,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이 막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이 막을 수 없다면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빛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안에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의 빛을 담고 있기에,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고 조금 있다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알았을 때, 이 계획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알았을때, 정말로 이해한 사람은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고 내일하자, 아닙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헌신이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쳐보겠습니다. 저희들에게 적용해보면요. 저희들은 엠마오로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열한제자도 있었고, 주님도 그 자리에 온거죠.
그래서 첫번째, 저희들이 교회로 모일때마다 성경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모일때마다 주님을 경험하고 그 주님의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모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이같은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모여서 하는 것은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서로 문의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을,
두번째 저희들이 모여서 말씀을 교제할때마다, 말씀을 펴서 이야기할때마가 이 네가지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의 교리, 성경이 무얼 말하는가?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허용하지 말고, 다시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리고 그 길을 굳게 가는 것, 이런 일들이 저희들이 말씀을 교제할때마다 저희 가운데 일어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우리는 집회 시간을 통해서 유익을 얻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이 집회 시간에 교제되는 이 복된 소중한 시간에, 저희들이 다 바쁩니다. 그러나 시간을 쪼개서, 여러가지 일을 멈추고, 해야 될 일을 그치고 모였습니다. 이 시간이 저희들의 영적인 성장을 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반복되는 여러 시간 중에 하나가 아니고 정말 유익을 끼치는 시간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준비하고 구하고 모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들이 모이는 시간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알려지기를, 하나님이 왜 세상을 만드시고 맨 끝을 어떻게 하실건가, 그 가운데 그 목표에 합하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큰 거시적인 하나님의 위대한 그림을 이해하고 이것이 우리를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만들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계속 대전 중구 모임을 축복하셔서 저희들이 모일때마다 그 가운데 임재하셔서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워지고 주님을 뵙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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