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삼서 1-4절 / 마포모임, 23년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요한삼서 1절부터 4절까지 오늘은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성경을 읽겠습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1-4).
오늘은 요한삼서 말씀이고요.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분한테 보내는 편지로서, 또 가이오가 진리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내용이 초반부에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1절부터 4절까지 교제할 텐데요.
Q.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장로는 요한이고요.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나오는데 이 가이오에 대해서 성경에서 다섯 번 나옵니다. 저는 전에 가이오가 다 같은 가이오인 줄 알았는데요. 이 가이오가 다 제각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가이오에 대해서 교제 나눠 주실 분 계시면은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강성찬 형제님, 가이오랑 비슷하니까 교제해 주십시오.
- 강성찬 형제님 : A. 예, 일단 먼저 가이오가 언급된 성경을 보면 고린도전서 1장에 사도 바울이 이 침례를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으로 나옵니다. "그리스보와 가이보 외에는 너희 중에 아무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그리고 또한 사도 바울이 이제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에 그를 돌봐주었던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로마서에 이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방문할 때 보면 또 가이오라는 이름이 언급이 됩니다. 그때 이제 에베소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킬 때에 그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바울 대신 그들이 다른 성도 두 명을 잡아가지고 데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이제 사도바울 일행이 아시아로 돌아가는 길에 더베에 가이오가 함께 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언급이 되어 있는데, 사실 이 가이오라는 이름이 여기 많이 언급된 것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흔한 이름입니다. 우리로 치면 '철수' 정도라고 할까요? 그런 거라서 사실 여기 나온 가이오와 같은 사람인지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여기 가이오라는 어떤 형제님이 언급이 되어 있고요. 그리고 좋은 간증을 또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이 편지에 수신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요한이서하고 비교를 해봤을 때, 이제 요한이서에서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택하심을 입은 부녀", 이제 그 자매님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그런 표현이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하는 가이오", 그 가이오에 대해서 사랑을 받고 있는 그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수신자를 생각하게 될 때에 어떤 면에서 모두 우리 성도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자매님의 귀한 섬김을 나타내고 있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 또한 가이오처럼 그냥 평범하지만 그래서 뒤에 나오는 이 디오드레베처럼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 아주 특별하게 존귀한 그런 이름은 아니지만, 이제 평범하게 성도들을 섬기고 그리고 사랑을 받고, 이런 모습이 우리 성도들의. 특별히 형제의 또 대표적인 모습으로 언급이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앞에 이제 부녀가 자매의 대표와 표본으로 언급이 되었다면, 또 여기서는 이름 없이 섬기는, 평범하게 섬기는 그런 형제들의 대표로 언급이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네, 감사합니다. Q. 그럼 요한이서에서는 왜 이름을 안 적었고요, 요한삼서에서는 왜 이름을 적었을까요?
- 강성찬 형제님 : A.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어떤 형제님이 특별히 이 부녀에 대해서 안전을 고려해서 그렇게 이름을 적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한 번 있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Q. 부녀의 안전이라고 하면 그 거짓 교사들이 그 이름 알면 그 집에 쳐들어갈까 봐서인가요?
- 강성찬 형제님 : A.거짓 교사뿐만 아니라 또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비해서 입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여기서 가이오에 대해서는 '사랑한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 그리고 2절에 "사랑하는 자여"도 나오는데 왜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시는지에 대해서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간단하게 개요 먼저 말씀드리고 그 사랑하는 가이오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요한삼서를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나눌 수도 있겠지만 방금 말씀한 대로 성도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그 성도들의 영적인 특징들이 계속 언급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들이 개요를 보자면 1절부터 8절까지는 주로 가이오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고요. 9절 10절에서는 이제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11절 12절에서는 데메드리오에 대해서 저희들이 배울 수 있겠고요. 그리고 마지막 13, 14, 15절에서는 이 사도 요한의 마음에 대해서, 성도들을 향한 마음에 대해서, 이 네 사람에 대해서 저희들이 이제 배울 수 있을 것 같고요.
이 중에 아시다시피 디오드레베가 으뜸대기를 좋아해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아마 가이오하고 디오드레베가 같은 교회, 같은 모임에 속해 있는 거고 그 모임에 지금 굉장한 이제 어려움이 지금 있는 상황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이오는 충성스럽게 진리 안에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몇 번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두 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그런데 이게 이제 감감 무소식이 된 거죠. 아마도 디오드레베가 중간에서 이 편지를 무시했거나, 무시한 거죠. 사도요한의 어떤 권면이나 이런 것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요한이 아마도 바울이 디모데나 디도를 보내는 것처럼, 이제 여러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보낸 여러 형제들이 그 교회에 속한 가이오의 소식을 들은 겁니다. 저희들이 3절에 보면 가이오에 관한 소식을 들어서 이 요한에게 전달을 한 겁니다. "이 모임의 상황이 이렇고 그 가운데서 가이오가 지금 이렇게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 이제 이 문제를 이제 해결하고, 이제 간접적인 거죠. "나중에 가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고, 그리고 특별히 이제 이 가이오에게 격려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들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 격려의 편지를 가이오에게 썼다고 생각이 되고요.
저희들이 최근에 그 요담의 그 비유에 보면 4개의 나무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중에 한 나무가 가시덤불이 이제 디오드레베 같은 나무죠.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형제 자매님들이 한번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어떤 각각의 특징들이 어떤 나무와 연결이 되는지 이것들도 한번 저희들이 한번 교제를 했으면 좋겠고요.
요한이서에서는 그 위험이 교회 밖에서 시작됩니다. 교회 밖에서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위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매에게 부탁해서 그들을 조심하도록 하는 사도 요한의 편지고요.
여기에 요한 삼서에서는 교회 내부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으뜸이 되려고 하는 이 디오드레베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마땅히 영접해야 될 형제들을 내쫓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이 서신서를 쓰는 거고요.
저희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30절까지 보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다가 하는 그 경고의 말 중에 "밖에서 늑대가 들어오고 안에서는 어그러지는 말을 해서 자기를 쫓는 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이것이 이 교회 안에서,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 "사랑하는 가이오"에 대해서는 좀 말씀을 드리자면, 이제 사도 요한이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 장로된 요한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이제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요한이서에서는 부녀이기 때문에 이런 형용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가이오에 대해서는 남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나를 '주님께서 사랑한 제자'라고 계속 요한복음에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요한일서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 요한이 형제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가이오"라는 표현이,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네 번이 나오는데요. 첫 번째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이게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아마도 가이오 안에 있는, 그리고 가이오가 행하고 있는 그 진리를 보고 그 같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2절에서는 "사랑하는 자여"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그의 잘됨과 그의 범사에 잘됨과 강건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요.
이제 5절에 보면 "형제들에게 행한 것이 신실하다."
그가 행하는 그 사랑을 보고, 그가 다른 형제들에게 행하는 사랑을 보고 그 가이오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절에 보면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이게 요한삼서에 나오는 유일한 '명령어'입니다. 저희들이 요한이서에 명령어가 두 번 나오고요. 요한삼서에는 명령어가 한 번 나옵니다. 이게 '주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명령하면서, 이것을 부탁하면서,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사랑을 하는 마음을 담아서 명령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한 가지 더 1절에서 "장로"라는, 본인을 이렇게 계속 장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요한이서하고 삼서를 보면 이 요한은 굉장히 그 모임의 상황, 성도들의 상황을 굉장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그 부녀가 처한 상황, 그 부녀의 자녀들의 간증,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이 가이오가 속한 모임에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이 신실하게 간증을 지키고 있는지를 이 장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도자들은 이 모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 각각의 성도가 어떤 점에 있어서 잘하는지, 혹은 어떤 면에서 위험성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격려하고 경고하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장로 형제님들이, 인도자분들이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특별히 또 여기에서는 요한삼서에서는 징계, 교회 안에 징계도 지금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면들을 또한 장로라는 표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4절에 보면 "내 자녀들이" 그래서 이 아버지의 심령으로 그 성도들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장로'라는 호칭을 통해서 좀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예, 그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교제를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에 세 번이 나오는데요. 이를 조금 번역을 한번 이렇게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로가 사도 요한이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사랑받는 자 가이오에게"라고 이렇게 1절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오는 "사랑하는 가이오"는 '사랑받는다'라고 생각을 하면 될 것 같고요.
그다음에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 사도 요한이 진리 안에서 그것도 흠정역으로 보면은 '그 진리'라고 저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인 사랑받는 가이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하는'에 대해서 한번 1. 처음에 그 '사랑하는 가이오'는 사랑받는다라고 저희가 좀 쉽게 한번 볼 수가 있고요. 2. 두 번째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사도 요한이 주어인 거죠.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 그리고 3. 세 번째 "사랑하는 자여"는 이게 제가 궁금한 것 중에 하난데요. 그 세 번째 사랑하는은, 우리 성경은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라 해서 저희가 사실 그 요한삼서 2절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는 말씀 중에 하난데, "네가 범사에 잘되고"해서 '범사에'가 '잘 되고' 앞에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흠정역은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여기에 '범사'가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헬라어를 모르지만 헬라어의 순서에는 "사랑하는 자여" 그다음에 "범사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2절에 이 "범사에"가 과연 "잘 되고" 앞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2절에 "사랑하는 자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범사에"가 헬라어 순서대로 하면 "사랑하는 자여 범사에"라는 것이, 이 헬라어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의 기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그 사도 요한이 항상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받는 자에 대해서요. 그러면 저희가 처음에 나오는 '사랑하는'을 '사랑받는'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그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으로, 세 번째는 '사랑받는 자'이긴 한데요. 그 사랑받는 자가 그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받는다는 것은 '항상'인 것입니다. 어떤 특정 시점에 특정 순간에만 받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이 "사랑하는"에 대해서 그 앞 뒤로의 어떤 그 표현을 보면서 이렇게 저희가 좀 구분을 할 수 있다고 보이고요.
그 가이오 관련해서도 저희가 몇 주 더 공부를 하게 되면 가이오와 디오드레베가 대조되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이오는 아까 교제가 된 것처럼 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이름이지만, 이 가이오는 물론 그 뒤에 6절에 가면 그 가이오의 특징이 그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이오를 보았을 때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아까 흔하게 쓰인 이름이라고 했고요. 그리고 다만 저희가 요한삼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디오드레베하고 대조가 되는, 반대에 있는 인물이고, 그 가이오는 3절에 나오는 '진리'와 6절에 나오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요한이 "내가 그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라고 해서 그 사랑은 그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그 특징을 그대로 이 가이오는 그 진리와 3절에 나오는 "네게 있는 진리", 6절에 나오는 "너의 사랑을 통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이제 성도님들 혹시 나중에 기억하시기 좋으라고 제가 그냥 말씀을 드리는데, 아까 가이오에 대해서 네 번 그 얘기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성경에 여기저기 나오긴 하는데요. 1. 로마서 16장의 가이오가 있고요. 2. 고린도전서 1장의 가이오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장의 가이오는 침례를 사도 바울이 베푼 거죠. 3. 그리고 교회 식주인 가이오가 있고, 그런데 이게 성경으로 한 장만 넘기면 같이 있거든요. 4. 그리고 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하고, 더베 사람 가이오도 사도행전 19장, 20장 그래서 이렇게 한 장만 넘기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군데만 알면 이 4명을 이렇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이건 그냥 정보 차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 깨알 정보 감사합니다. Q. 그리고 저기 식당 팻말 얘기 나왔는데요. 이거랑 욥기에 나오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심히 창하리라" 그거 그 두 개가 주로 식당 같은데 가면 걸려 있습니다. 그 식당 망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게 맞나'에 대해서는, 제가 만약 기도 집회 때 어떤 형제님에 대해서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하시기를 구합니다." 이러면 저를 판단하시겠습니까? 저는 이게 그리스도인이 이런 거 기도하면 좀 부끄러운 거라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혹시 횟불 주석을 미리 읽어보신 분 계시면, 거기에 번역이 이상한 건지 제 눈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 조금 이상하게 돼 있더라고요. 그거에 대해서, 이것을 식당 팻말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합당한지에 대해서 교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도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러니까 이거를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교제하는 것이 합당한가?
- 김영권 형제님 : A. 합당 안 한 것 같은데요. 일단 저는 그 "잘 되고"에 대해서 제가 찾아봐서 그거를 좀 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잘 되고"를 찾아보니까 그 로마서 성경에 4번 사용됐는데요. 첫 번째로 사용된 곳은 로마서 1장 10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성도를 보러 가고 교제하기 위해서 그 그곳에 가길 원할 때 "잘 되고"라는, 1장 10절 찾아보겠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여기서 "좋은 길"에 대해서 말이 '잘 되고'라는 단어가 쓰였고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6장 2절입니다. 연보에 대해서 썼을 때 "미리 준비하라"라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얻은 대로"로 여기 쓰였을 때 '잘 되고'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삼서 2절에 두 번 이 "잘 되고"라는 단어가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고린도전서 말씀을 먼저 저희가 생각해 보면 저희가 그 얻은 대로, 저희가 일을 하고 또 혹은 저희가 수익을 얻은 것을 저축하여 연보할 때 그것이 먼저 쓰임이 있고요.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이 성도를 보기 원하고 함께 교제하기 위해서 어느 목적지에 갈 때, 도달하기 위해서 이 "잘되고"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요한삼서에서 봤을 때는 앞서 형제님께서 어떤 식당이나 어떤 비즈니스에서 쓰일 때는 뭔가 이익을 우리가 잘 얻고, 또 부유하게 되고, 라는 것으로 이렇게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로마서를, 물론 고린도전서도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저희가 참고하면 더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목적하신 것들, 그리고 우리에게 각각의 삶에, 또 성도님들에게 주신 사역을 이루는 데까지 그것을 가는 것, 그래서 이 단어가 '좋은'과 그리고 '길'이라는 단어가 합작이 되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두고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목적을 둔다면 이것을 그릇 적용해서 뭔가 돈을 많이 벌고 비즈니스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을 만을 생각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또한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 성도라면, 사도 바울이 목표했던 것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까지' 그것을 '성취'하고 그 성도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즐거워하는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사회자분 말씀하신 것처럼 횃불 주석이 조금 번역이 잘못, 그러니까 아니 잘못됐다기보다는 그 의미를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 박용수 형제님 : 그럼 잘 전달해 주십시오.
- 강성찬 형제님 : 횃불 주석을 읽어보시면 어떻게 돼 있냐면, 우리 그 육체적인 건강함, 그리고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만큼 우리 영혼이 건강한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 박용수 형제님 : 그게 원어예요?
- 강성찬 형제님 : 아니, 그렇게 한국어로 되어 있어요. 가로 열고, 가로 안에가 그렇게 돼 있어요.
- 박용수 형제님 : 아, 그래요?
- 강성찬 형제님 : 저도 그게 딱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봤는데 어떤 말이냐면 금방 제가 한 말 듣고 이해가 됐어요?
- 박용수 형제님 :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맞을거 같아요. 그렇게 안 적혀 있었어요. 뭔가 말이 되게, 이거 세상 사람이 썼나 싶을 정도로...
- 강성찬 형제님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기준'이 중요한 겁니다. 이제 영혼히 잘 된 것처럼, 그게 기준이죠. 그 기준대로 그의 건강과 그의 물질이 풍요롭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이 기준을 잘 살펴봐야 되는데, 그래서 그 횃불 주석에서도 뭘 물어본 거냐면 우리는 지금 육체적으로 대부분 건강하게 살죠. 그리고 대부분 또 풍요로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에 비해서는 우리의 영혼의 건강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걸 잘 모르겠다. 이걸 이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형제님이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가이오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데, 만약에 그것처럼 우리한테도 기도할 수 있는가? 나의 영혼의 수준만큼 너가 건강하길 바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 병에 걸려 죽어야 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 박용수 형제님 : 왜 저 쳐다보면서 해요.
- 강성찬 형제님 : 너의 영혼의 그 건강한 만큼, 네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길 바란다. 이렇게 기도해 버리면,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 박용수 형제님 : 이제 가이오는 확실히 알겠네요.
- 강성찬 형제님 : 예, 가이오는 그의 간증을 통해서 그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인지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거죠. 그리고 이제 사도 요한은 기쁘게 그걸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제 사도요한이 기도한 걸 보면은 가이오가 아까 그 금방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을 기도합니다. 그가 계속 성도들을 접대하고, 돕고, 전송하고, 이런 데 있어서 그의 이제 건강과 또 물질적인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걸 기도한 것이죠. 예전에 솔로몬에 대해서도 그렇게 교제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시죠. 왜냐하면 솔로몬이 솔로몬에게 맡긴 일, 하나님께서 맡긴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일을 주셨고 그것을 위해서 솔로몬이 지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그걸 주신 것입니다. 이제 가이오에게 있어서도 계속적으로 그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추가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제 이와 비슷한 부분이 빌립보서 4장 19절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이 사도 바울과 일행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이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쓸 것을 채움으로 그들이 계속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케 하사 너희 위에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여기서도 연보를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심을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먹을 것, 씨를 주셔서 그들이 계속 그 위에 열매가 더하도록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로도 그런 가이오가 계속적으로 그런 특별히 접대를 하고, 전송하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잘 되고, 특별히 그의 건강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았다면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도 했을 수 있고, 그의 건강이 나쁘지 않았을지라도 이 일을 계속적으로 함으로 의의 열매가 더할 수 있도록 사도는 기도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 김회상 형제님 : 그 2절에서 이제 사도요한이 가이오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이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가이오가 성도들을 접대하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자기의 일과 자기의 건강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을 돌보지 않고 계속 사랑하고 베푸는 거죠. 심지어는 이제 방금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들을 접대하고 이런 섬기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과 건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스스로 그것을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희생하고 이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사도 요한은 이것이 이제 물질적으로나 건강이 잘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저희가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부터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나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지금 디모데도 동일한 상황인 것입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도 바울이 부탁하는 것입니다. 네 건강을 좀 돌봤으면 좋겠다. 이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고요.
빌립보서 2장에서도 에바브로디도가 비슷한 일을 합니다. 그 빌립보에서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온 에바브로디도가 거의 죽게 됩니다. 그런데 2장 30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은" 그는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가이오가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가이오가 나중에 '아, 이제 돈 좀 좀 벌어야겠네. 건강도 좀 더 신경 써야 되겠네.' 이렇게 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옆에 있는 사도가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저 가이오의 일이, 건강이 잘 되게 도와주십시오."라고 이제 옆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 아버지의 심령으로서 그것도 같이 이렇게 잘 돌보기를,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일을 잘 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네, 이게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잘 되라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살면 가난해지고 건강을 해친다는 증명하는 그런 거죠?
.........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이 맞잖아요. 지금 영적으로 살면 자기 몸을 헤쳐가면서 이렇게 된다는 걸 증명하는 구절로 볼 수 있겠습니다. 맞죠? 아닌가요? 네, 아무튼 이거 나중에 누가 이거 가지고 또 이렇게 저처럼 이상한 질문하면 꼭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가이오가 되게 가난하고 병이 든 상태다.
3절 4절 남았는데요. 3절 4절에서는 지금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 지금 나오고 있어요. 아까 형제들에 대해서는 요한 사도가 보냈던 그 형제들이라는 얘기를 해 주셨고요. 그 형제들이 이제 돌아와서 이 가이오가 속했던 모임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 보고에서 가이오가 진리대로 행하고 있음을 또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에 대해서 규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이 너무 모호해서 그런가요? 그러면 이제 4절에서 요한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들을 때" 요한은 가장 기뻐했다라고 나오는데요. 이 구절에 대해서도 교제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 구절은 참고로 제가 기억이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어떤 형제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이렇게 질문을 했었고, 그때 그 형제님이 이 요한삼서 4절을 들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라고 얘기를 해 주셨었어요. 그래서 기억이 나는데요. 그리스도인이, 혹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그 형제들이 돌아와서 아마도 그 요한이 있는 곳에 왔겠죠. 그래서 이제 가이오에 대해서 증거를 합니다. 요한은 이 가이오의 영혼이 잘 된다고 하는, 그 영혼이 번성하고 열매 맺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증언을 통해서 알게 되는데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여기 보면 형제들이 와서 두 개를 얘기합니다. 1. 첫 번째로 "내게 있는 증거를 증거한다." 그리고 2.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두 개를 증거하는 거죠. 그 사람 안에 있는 진리, 그리고 그가 진리 안에서 이제 행하는 것.
저는 처음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진리를 어떻게 증거하지? 라고 저는 처음에 생각했거든요.이게 보통 우리가 말을 해서 "나는 이걸, 이런 걸 믿어요."라고 얘기하면 아, 이 사람이 그걸 믿고 있구나라고 그걸 전달했던 건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이제 저희가 생각이 되고요. "그 안에 있는 진리"가 어떤 진리냐면 저희가 요한이서 2절에서 배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장로가 그 부녀를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 부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진리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얘기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도 그 가이오를 보았을 때 가이오가 성도들을 돕고 섬기고 하는 모습은 그 안에 있는 진리가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오 마음속에 있는, 가이오가 붙들고 있는 그 진리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게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진리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두 번째로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이것은 가이오가 자발적으로 진리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부분은 정말 그 안에 있는 그 말씀이, 그 진리가 그 가이오를 움직이는 거,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증거하는 거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가이오가 말씀을 따라서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을 증거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예, 그 아까 사회자 형제님이 4절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 요한삼서 4절과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요한이서 4절입니다.
그래서 그 요한삼서 4절에서는 "내가 내 자녀들이" 그래서 그 사도가 이제 성도들을 복음을 전했고, 또 이 진리를 전했던 그 성도들을 이렇게 '자녀들'이라 부르고 있고요. 그리고 그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라는 '그 진리 안에서' 이렇게 걷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희가 요한이서 4절에서 마찬가지로 "진리에 행하는 자", 여기서는 그 이제 부녀의 그 자녀들 중에서 진리에 행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까 사회자 형제님이 무엇이 가장 기쁠까? 더 즐거울까라고 했을 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저희가 이해를 하면 요한이서 4절과 삼서 4절을 그렇게 좀 이해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한다라는 것을 저희가 좀 이해를 해 볼 수가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이렇게 사도 요한이 이것을 요한이서와 삼서에서도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도도 그렇고요. 그리고 저희에게도 이제 적용을 해보면 함께 있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그러니까 요한이서 4절은 보는 거죠. 그리고 요한삼서 4절은 듣죠. 그런데 이렇게 눈으로 보았을 때, 그러니까 요한이서 4절은 내 앞에서 진리로 행하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거죠. 그리고 요한삼서 4절은 저 멀리 떨어진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저희에게 무엇이 가장 기쁘고 즐거울까라고 했을 때, 실제로 내가 보거나 아니면 전해 듣거나, 여하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렇게 행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기쁘고 또한 즐겁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3절에 나오는 "네게 있는 진리"하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조금 두 개로 나누어 보면 앞에 있는 것은 "네게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네게 있는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라고 할까요? 내면이 진리를 향하여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향하여 헌신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이 외형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걷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3절에 그 앞에 있고 뒤에 있는 것을 저희가 그냥 쉽게 내면과 외형적인 것으로도 이렇게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예 약간만 추가하면 이제 3절에 "네게 있는 진리"는 문자적으로는 '너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6절에는 '너의 사랑'이 나오고요. 3절에는 '너의 진리',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된 대로 그 "너의 증거를 증거하되" 이제 여기 한이라는 단어가 이제 2 절에서 가치라는 이 같은 단어인데요. 이것은 이제 불량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될 때 2절에서 사용되고 이유로도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와서 너의 진리를 증거하되 어떻게 그 것이 증거되었냐면 바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으로, 진리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 진리 밖에서는 행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그의 진리가 증거가 된 것을 이렇게 보게 됩니다.
- 전효진 형제님 :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을 때 이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가 하는 말들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알고 있는 거죠. 또한 그의 행동을 볼 때 그가 하고 있는 말들을 증명을 해주는 겁니다. 그 말이 이제 틀림이 없음을, 그의 언행이 일치가 되는 거죠.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분명하게 행동으로 드러나고, 또 말로도 증명이 되고, 이런 모습들을 이 가이오가 보여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그런 모습들은 성도들이 볼 때 이제 기쁜 것이며 또 사도 요한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진리 가운데서 가이오가 행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렸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말하는 진리들이 이렇게 삶에서 섬김으로, 사랑으로, 또 희생으로, 이렇게 분명히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기쁨이 있었다고 그렇게 보여집니다.
- 박용수 형제님 : 네, 4절도 하고 있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여기 아까 앞에서 형제님께서 그 요한삼서 4절하고 요한이서 4절을 비교해 주셨는데요. 요한이서 4절은 "심히 기쁘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삼서 4절은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4절은 최상급입니다. 정말 최고로 기쁘다. 이거보다 더 기쁜 게 없다라고 이제 얘기를 하고 있고요. 이서 4절에서는 아주 많이 기쁘다, 이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서 4절에서는 "너의 자녀 중에", 너의 자녀이니까 부녀의 자녀들인 거죠. 부녀의 자녀들이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것을 볼 때 기쁘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내 자녀들이" 이제 요한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 다음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라고 얘기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예를 들어서 디모데나 디도에게 이런 표현을 씁니다. "믿음 안에 있는 참 아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아들" 이제 아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으로 그들이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표현이고, 여기에서 여기는 '자녀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요한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기보다는 요한이 그 장로로서, 그들을 아버지와 같이 돌본 겁니다. 영적으로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고 또 위험이 있을 때마다 경고해주고, 이렇게 이 장로 요한은 자기가 돌보는 이러한 그 영혼들에 대해서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그리고 그들을 내 자녀처럼, 여기에 "내 자녀"가 '강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처럼 이렇게 돌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진리 안에서 행했을 때 정말 가장 큰 기쁨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저희들 다 인도자뿐만 아니라 저희들 모두가 다 이제 이런 것들을 기뻐해야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짧게 조금 하나지만 더 덧붙이자면요. 이제 그 사도가 기뻐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이 가이오가 충성되게 변하지 않고 계속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 가이오가 하고 있는 것이, 이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현재형'으로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앞에 형제님 말씀해 주신 것처럼 "네게 있는 진리"가 '너의 진리',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그가 그것을 확고하게 붙잡고 있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진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확신하고 변하지 않게, 분명하게 붙잡고 있는 이제 그의 진리에 대한 태도를 또한 함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형제들이 와서" 이것도 현재형으로 되어 있고요. "증거하는데" 이것도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그것을 방문하고 한 번만 "아, 그래 잘하고 있어요."라고 말한 게 아니라 여러 번, 가이오를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와서 돌아와 가지고는 똑같은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이오가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고,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계속 행하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그의 변하지 않게, 신실하게, 충성되게 하는 것이 또한 사도에게 또 큰 즐거움을 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방금 앞에서 형제님이 교제해 주셔서 좀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교회는 굉장히 문제가 있는 교회입니다. 인도자가 지금 마치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을, 사랑을 행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움 가운데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리를 따라서 행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열매 맺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계속 이 말씀 묵상하고 있었거든요. 이 요한 삼서, 저희가 이제 이 중국에 가보면 모임이 정말 이게 하나님의 교회인가 싶습니다. 제가 일일이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 영혼, 영혼들을 보면 정말 많은 기도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고, 권면이 필요하고, 또 그런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제 생각에 이런 데서 정말 신실한 영혼이 나올 수 있을까? 정말 열매 맺는 영혼이 나올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면 요한삼서 말씀을 이렇게 묵상해 보면 이 가이오 같은 분이 나오기를 이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이 이 교회가 어떻기 때문에 나는 이렇다, 이렇게 자꾸 얘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뭐 이래." "우리 교회는 이래." 그래서 이제 자신의 영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교회 탓을 합니다. 다른 성도 탓을 합니다. 그런데 가이오를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이오는 그 영혼이 풍성하게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진리 안에 서고, 그리고 이제 이 요한삼서를 읽어보면 이런 가이오, 어떻게 보면 그 모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이 가이오에 대해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순회했던 그 형제들이 증거하고 있고 사도 요한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멀리 있지만 그를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메드리오를 보내서 그에게 본받게 하기를, 계속적으로 그 일을 하게 하기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의미에서 또 저희들 모임 생활하는 데에도 이렇게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네, 감사합니다. 제가 그 아이를 가르치다 보면 내가 범사에 잘 되기는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이해력이 좀 떨어지고 그러면, 그러면 그때 제가 속으로 바라는 것은 '건강하게만 커라.' 이렇게 또 생각을 하는데, 제가 요한삼서를 보면서 왜 나는 진리 안에서 행하래 행하라, 이게 왜 나한테는 우선순위가 없는가에 대해서 좀 돌이켜 보게 됐고요.
그리고 아까 가이오가 평범한 이름이라는 교제를 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 평범한 이름을 사용하심으로써, 형제님 말씀하신 대로 엉망인 교회에서도 평범한 성도가 하나님을 충분히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격려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교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님들 중에 한 분 기도해 주시고 집회 마치겠습니다.